강봉균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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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전북 군산시)'''
제16대
강현욱[18]

'''제16~18대
강봉균'''

제19·20대
김관영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국민의 정부'''
''신설''

초대
'''강봉균'''

2대
김태동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국민의 정부'''
초대
김태동

2대
'''강봉균'''

3대
이기호

<colbgcolor=#878787><colcolor=#ffffff> '''이름'''
강봉균(康奉均)
'''출생'''
1943년 8월 13일
전라북도 군산시
'''사망'''
2017년 1월 31일 (향년 73세)
'''학력'''
군산사범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경제학 / 학사)
윌리엄스대학교 (경제학 / 석사)
한양대학교 (경제학 / 박사)
'''경력'''
제6회 행정고시 합격
경제기획원 차관보
노동부 차관
경제기획원 차관
행정조정실장
정보통신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재정경제부 장관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16~18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중도통합민주당 원내대표
민주당 전북도당위원장
대한석유협회 회장
'''가족'''
부인 서혜원
아들 강문선, 딸 강보영
'''본관'''
신천 강씨 곡산계
'''병역'''
병역면제
'''종교'''
개신교(장로교)[1]
1. 개요
2. 활동
3. 정당 활동
4. 기타
5. 선거이력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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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정치인, 관료, 교사. 경제 관료 출신으로, 민주당계 정치인이었지만, 경제적 성향은 우클릭했다고 평가받았다. 그래서인지 IMF 극복 등에 공이 있다고 호평하는 인사도 있는 반면, 안티들에겐 김대중 - 노무현 정부를 "왼쪽 깜빡이 키고 우회전"시킨 주범 중 하나[2], 친분이나 지역 등만 아니었으면 보수정당에 입당했을 인물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3]

2. 활동


1943년 전라북도 군산부(현 군산시)에서 태어났다. 1961년에는 군산사범학교(현 전주교육대학교, 군산대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1964년 다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제관료로 근무하였다.
김영삼 정권 때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김대중 정부 전반기에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및 경제수석비서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시중에 현금 유통량을 늘리는 양적완화를 지론으로 줄곧 주장하였는데, 시장에서는 양적완화보다도 1999년 '''대우그룹 유동성 위기를 잘 대처한 것'''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IMF 사태 이후 금융감독원장 이헌재와 호흡을 맞추면서, 외국자본의 움직임에 국내 시장이 매우 민감하게 된 시기에 적절한 대응을 해주었다는 것.
이 무렵 대우 김우중 회장은 국내 및 일본의 증권가에서 위기설이 나왔음에도 '''"대출을 더 받으면 위기 극복 가능하다"'''는 매우 낙관적인 상황판단으로[4][5] 이헌재가 악역을 자처하며 밀어붙인 구조조정[6] 작업에 소극적이었다.[7] 대우가 김대중의 야당 시절부터 후원금을 내고 광주의 무등경기장 건립 당시 향토기업인 금호그룹보다 더 많은 지원금을 내는 등 파격적인 행보로 호남 안팎의 인심을 많이 얻은 상태였던데다, 정부의 쌍용자동차 인수 협조요청에도[8]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예외'''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기도 했던 모양.
하지만 1996년 말 기준 30대 기업 평균 부채 비율이 387%였던 상황에서 국내 2위의 재벌그룹이, 실적이 점점 악화되는[9] 가운데서 구조조정 작업에 미진한 모습은, 97년 외환위기 후유증이 전국을 덮은 상황에서[10] 한국 대외신인도 악화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으므로 정부에서도 마냥 손놓고 있을 순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김우중 회장은 막판까지도 이헌재를 만나 담판을 지으려 하거나, 동업관계였던 제너럴 모터스의 지원을 기대하고 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고 있던 상황.[11]
그러나 대우 측이 기대를 걸었던 제너럴 모터스는 끝내 대우를 외면하고, 결국 대우도 정부의 권고대로 법정관리에 돌입, 긴급 공적자금으로 7조 + 추가 공적자금 22조 총 29조원의 '''국민세금'''이 대우그룹 회생을 위해 투입되고, 우량회사였던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대우건설은 국내외에 매각되는 과정을 거치며 그나마 위기를 넘기게 된다. [12]

3. 정당 활동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고흥길 후보에게 패하였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2002년 강현욱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전라북도지사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국회의원직을 사임함에 따라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군산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정책위의장 역임 중에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독수리 오형제[13]보다 정치적 스탠스가 우측에 위치한다고 하여, 열린우리당에서 가장 우측에 있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2007년 초엔 김근태 당의장을 친북좌파라고 공격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7년 당시 여권 재개편 과정에서는 김한길과 함께 통합파 양대 거두로서 집단탈당을 주도하고, 이후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 대통합민주신당을 거친다.
이때 한 토론프로그램에서 과거 자신과 꽤 가까웠던 한나라당의 유승민 의원과 경제 토론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유승민 의원의 집요한 참여정부 경제 비판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강현욱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보좌관 비리, 본인 및 아들 병역기피 문제가 확산되면서 민주통합당탈당하여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
하지만 2013년 새정치연합안철수 의원의 경제 자문을 맡으면서 정치를 다시 시작하였다. 2014년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전라북도지사 예비후보에 등록하였다. 그러나 송하진 전 전주시장에게 후보경선에서 패하였다.
이후 조용히 노후를 준비하나 싶었는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 위임설이 나오더니#, 실제 2016년 3월 선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본인은 "당을 초월해서 인기영합적 공약의 문제점을 제기해오던 차에 지난 14일 김무성 대표로부터 전화로 제의를 받고 (입당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허나 20대 총선 결과 새누리당이 참패하자, 선대위원장으로서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석유협회 협회장을 맡다, 2017년 1월 31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4. 기타


유승민 전 의원과 인연이 있었다. 청와대 근무 시절, 유승민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으로 추천한 사람이 당시 강봉균 정책기획수석이였다. 훗날 유승민은 강봉균 장관을 회고하며, 'KDI에 와 계실때 같이 테니스도 치고 바둑도 두고 경제에 관한 이야기도 하며 가깝게 지냈다' 면서 애도했다.

5.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성남 분당 갑)

35,881 (41.46%)
낙선 (2위)

2002
200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전북 군산 국회의원)[14]
'''36,855 (58.1%)'''
'''당선 (1위)'''
'''초선'''[15]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군산)

'''83,745 (78.28%)'''
'''당선 (1위)'''
'''재선'''[16]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군산)

'''49,885 (52.79%)'''
'''당선 (1위)'''
'''3선'''[17]

6. 둘러보기






[1] 군산시에 있는 예장합동 소속의 군산구암교회 집사#s-2였다.[2] 실제 성과는 차치하고서라도,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 동안 이렇게 정권내에서 재벌개혁, 노동개혁, 부동산규제, 한미FTA 등 사안마다 내전이 벌어지다보니, 결국 지지층이 공중분해되면서 2천년대 후반 민주당 암흑기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3] 민주당에서 이 계보는 홍재형, 김동철, 김진표 등으로 이어진다. 다만 보수정당에서 진보적인 발언을 하는 의원 보고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것 역버전이라, 나름 당을 위해서 일하는건데 본인들 입장에선 실례될 수도 있는 발언이긴 하다.[4] 일례로 대우조선과 대우자동차에는 김 회장이 80 ~ 90년대에 의욕적으로 육성한 기술진들이 포진해 있었고, 대우그룹 해체 후 매각되어 좋은 실적을 냈을 만큼 잠재력이 있었다. 즉 99년 위기를 잘 넘겼더라면 이후 호실적을 낸 조선, 자동차, 건설을 통해 재기할 수도 있었단 얘기. 이 때문에 당시 김 회장의 낙관적인 태도는 평가가 크게 엇갈리기도 한다.[5] 하지만 당시 박태준 전 국무총리가 '''" '공식적으로 확인된 액수'만 70억 달러"'''라며 경악했을만큼, 김우중 회장이 해외로 막대한 자금을 빼돌린 증거가 포착됨에 따라 회사의 회생과는 별개로 검찰 수사가 시작, 결국 김 회장은 해외로 도피한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현지에서 귀빈 대우를 받았다는 후문이 있다.[6] 간단히 말해 일반 기업은 부채율을 200% 미만으로 떨어뜨리고, 금융기관은 자기자본비율(BIS)을 8% 이상 확보하라는 얘기.[7] 대우그룹을 제외한 30대 기업은 이헌재의 권고가 떨어진지 5일만에 확실한 시행이 전제된 구조조정안을 제출해 금감원 관리들과 계속 씨름을 하고 있었다.[8] 당초 삼성그룹이 상징적인 의미로 (부채를 포함) '''1원'''에 인수하려 했던게 무산된 상태였다.[9] 재고를 해외법인으로 돌린 것까지 실적으로 장부에 기입하는 분식회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10] 시류 흐름에 민감한 서울/경기 지역은 97년 11월 ~ 12월에 큰 충격을 받았고, 지방은 6개월 쯤 뒤부터 돈맥이 막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11] 강봉균을 포함한 경제부 관료들은 이를 "부채를 빌미로 버티는 것"이라 간주하며 비판하였다.[12] 잠수함을 만드는 조선사는 해외매각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고, 대우 승용차 부문이 소형차 기술이 부족했던 GM에게 '''대우 이름을 지키고 고용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넘겨졌다.[13] 김부겸, 김영춘,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등.[14] 전임자 강현욱 전라북도지사 선거 출마로 의원직 사퇴[15] 2003.9.20 탈당
2003.11.11 열린우리당 창당
[16] 2007.2.5 탈당
2007.5.7중도개혁통합신당 창당
2007.6.27 중도통합민주당 창당
2007.8.3 중도통합민주당 탈당
2007.8.5 대통합민주신당 참여
[17] 2012.3.14 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