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정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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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德壽宮 靜觀軒
덕수궁의 건물이다. 덕홍전과 함녕전의 북쪽 언덕에 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경내에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정관헌이다. 다만, 다른 양관들과 달리 한국 전통 가옥의 일부 요소가 혼합된 형태이다.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1] 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현존하는 덕수궁 내 양관 중 가장 오래되었다.
‘정관(靜觀)’ 뜻은 '조용히(靜) 내다 본다(觀)'이다.
2. 용도
건물의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의견이 있다. 그 중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했던 카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식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진 관련 기사만 나온다. 1901년(광무 5년) 2월에 태조 이성계의 준원전 본 어진을 이곳에 모시라는 기록을 시작으로##[2] ,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3] 를 보관하고#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순종실록부록》의 기사도 1912년에 여기 있던 어진들을 중화전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4]
실록보다 더 기사량이 많은 《승정원일기》에는, 어진 외에도 신하들을 접견한 것과## 봉심[5] 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휴식이나 커피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정관헌이 애당초 카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다만, 전용카페는 아니더라도 황실의 휴식 공간임은 맞다는 주장도 있다. 1920년 5월에 매일신보에 실린 《자규(子規)야[6] 우지마라 주인(主人) 일흔[7] 덕수궁(德壽宮)을 백량동작생황진[8] 이 옛이야기가 아니로구나》에는 정관헌을 고종이 아기였던 영친왕과 함께 여름 더위를 잊던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관헌의 위치는 황실 가족들이 살던 내전 권역이었다. 내전의 일을 공식적으로 잘 기록하지 않는 관습을 고려하면, 기록에 어진 내용만 나온다해서 섣불리 카페나 휴식 공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3.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모른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덕수궁의 건물들 중 즉조당,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1897년(건양 2년) 이후에 처음 지은 것이고, 상술한 1901년(광무 5년)에 적힌 태조 이성계의 어진 관련 기록을 보아 저 사이에 건립한 듯 하다.##[9]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비었고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많은 전각들을 허물었다. 그럼에도 정관헌은 살아남았다. 다만, 관람객들을 위한 찻집, 카페로 쓰면서 건물의 구조도 바꾸었다.
8.15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카페로 기능했다. 1954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주최한 광복절 기념 음악회를 비롯하여# 각종 모임 및 행사가 이따금씩 열렸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 2월 6일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이미 덕수궁 전체를 사적 제124호로 관리하고 있었기에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자로 지정 해제했다.
4. 구조
- 이 포스팅을 참조. 자세하게 정리를 잘 해놓았다.
5. 여담
- 또한 대중들에게 고종의 카페로 알려져서 그런지, 스타벅스[10] 에서 시민들에게 명사들의 강연 프로그램과, 커피와 간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행사를 2009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이곳에서 진행한다.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들이 직접 만든다고 한다.#
[A] [1]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1860 ~ 1921. 흔히 ‘사바틴’으로 널리 불린다. 근대기 서울과 인천의 주요 건물들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2] 저 당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이 불탔기 때문에 태조의 어진을 베껴 그리려고 함흥의 준원전에 있던 그림을 잠시 덕수궁으로 옮겼다. 하지만 태조 어진을 실제로 여기에 모시진 않았고, 경운당이란 건물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베껴 그린 직후 다시 함흥으로 옮겼다.[3] 당시 순종은 황태자였기에 그의 초상화는 어진이 아닌 예진(睿眞)으로 불렸다.[4] 단, 《순종실록부록》은 일제가 만들었고, 일제강점기의 고종(이태왕)과 순종(이왕)의 동정을 다뤘기에 《조선왕조실록》으로 보기엔 힘들다. 더군다나 조선시대를 다룬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일제의 이왕직에서 펴낸 것이기에 정식 실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5] 奉審. 왕명으로 왕실의 사당이나 무덤, 초상화 등 여러 시설과 물건들을 관리하고 점검하던 일.[6] 두견새.[7] '잃은'의 당시 표기법.[8] 柏粱銅雀生黃塵. "잣나무 서까래 구리로 만든 새는 누런 먼지만 내고 있네"라는, 당나라 시인 왕발(650~676)의 시 임고대편(臨高臺篇)에 등장하는 구절로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이다.[9] 저 당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이 불탔기 때문에 태조의 어진을 베껴 그리려고 함흥의 준원전에 있던 그림을 잠시 덕수궁으로 옮겼다. 하지만 태조 어진을 실제로 여기에 모시진 않았고, 경운당이란 건물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베껴 그린 직후 다시 함흥으로 옮겼다.[10] 2009년 문화재청과 ‘문화재지킴이’ 협약을 맺고 현재까지 다양한 문화재 보호활동을 실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