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중화문
1. 개요
德壽宮 中和門
덕수궁 정전#s-6인 중화전의 정문이다. 대한문으로 들어와 일직선상으로 금천교를 건넌 뒤 조원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보인다. 이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인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반면, 덕수궁은 원래 궁궐이 아닌 곳을 확장하며 지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5대 궁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20세기에 '''창건'''했으며 조선국 시절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정문'''으로 세운 문이다.
이름 뜻은 당연히 ‘중화전의 문’이다. ‘중화(中和)’ 자체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의미로, 《중용(中庸)》에서 따왔다.
2. 역사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인조 이후, 석어당, 즉조당 및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1년 뒤인 1897년(건양 2년) 환궁할 곳으로[3]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고 기간도 길어졌다. 그래서 한 동안은 기존에 있던 즉조당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부르면서 정전#s-6으로 사용했다.
그래도 명색이 제국인데 민가나 다름없는 즉조당을 정전으로 계속 쓰기엔 좁기도 하고 폼도 안나서(...) 정식 정전 건물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기존의 경운궁 영역은 너무 좁아서 궁역을 넓혀야했다.[4] , 그래서 그나마 여유 공간이 있던 남쪽으로 궁역을 확장한 뒤, 즉조당과 남쪽 궁장 사이에 정식 정전을 건립했으니 바로 중화전이다.
중화문도 이 때 정전#s-6의 정문으로 지었다. 1901년(광무 5년) 8월 20일[5] 에 정초했고, 같은 달 30일[6] 에 기둥을 세웠으며, 9월 24일[7] 에 상량했고, 10월 29일[8] 에 현판을 걸었다. 이를 보아 중화전 본전보다는 빨리 공사가 끝난 듯 하다.#
중화문 건립으로 경운궁의 구조 또한 크게 달라졌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 궁장 가운데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중화문 공사 및 궁역 확장을 하면서 철거했고 대신 동쪽 문인 대안문을 새 정문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옛 사진을 보면 인화문 터와 중화문의 위치는 몇 걸음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또한 원래 중문이던 돈례문 역시 없앴고 새로운 중문 조원문을 지었다. 금천과 금천교 역시 인화문과 돈례문 사이에 있었으나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새 금천을 팠고 원래 금천은 묻었다.[9]
그러나 1904년(광무 8년) 대화재로 불탄 이후 1906년(광무 10년) 중건했다. 이 때 기존 모습과 조금 달라졌다. 중화문을 기존의 자리보다 약간 남쪽으로 더 옮겨 지어 결과적으로 중화전 뜰은 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한 후,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궁궐 공원화했다. 이 때 석조전 앞 뜰에 정원을 만들었는데, 정원을 침범한다는 이유로 중화문의 행각을 헐었다. 이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래서 지금은 문만 휑하게 있다.(...) 다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동쪽 모퉁이에 흔적이 남아있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이 행각도 모습이 많이 달라져 현재는 시민들이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다. 행각을 복원하자는 의견이 있지만 그럴 경우 석조전의 정원을 밀어버리는 것밖엔 답이 없어 쉽지 않다.
3. 특징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다. 겹처마 양식에 지붕은 팔작지붕인 1층짜리 문이다.[10]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7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았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의 다포 양식이다. 어칸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4개의 공포를 두었다.(이렇게 기둥 사이에 놓는 공포를 주간포라 한다.) 협칸에는 각각 3개의 주간포를 얹었으며, 공포 사이사이는 벽으로 마감한 뒤 문양을 장식하여 한층 멋을 돋보였다.
- 기둥이 다른 궁궐의 문들에 비해 훤칠하게 높다. 그렇잖아도 높은 기둥들 중에서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高柱)라 하여 다른 기둥보다도 훨씬 높게 세웠다.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고, 단청은 단초머리의 모로단청[11] 으로 했으며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4. 여담
[1] 건물과 문을 포함한 권역의 정식 등재명칭.[2] 중화문 포함. 문화재청의 공식 기준 참조.[3] 還宮. 궁으로 돌아가다.[4] 위에 언급했듯 경운궁은 고종 이어 전 즉조당과 몇 채의 별당 빼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주변엔 외국 공사관이나 민가 등 여러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래서 주변 건물들을 최대한 사들이고 또 여의치 않을 땐 건물 사이사이를(...) 활용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5] 음력 7월 7일.[6] 음력 7월 17일.[7] 음력 8월 12일.[8] 음력 9월 18일.[9] 금천교는 새 금천으로 옮긴건지 아니면 철거하고 새로 지은건지 확실하지 않다.[10]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11]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