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금천교
1. 소개
德壽宮 禁川橋
덕수궁의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1] 와 외부와의 경계[2] 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래서 금천교 역시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과 중문인 조원문[3] 사이에 있다.
2. 역사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기존의 궁궐[4] 이 모두 불 타 월산대군[5] 의 사저를 중심으로 주변의 집들을 사들여 쓴 임시 행궁이었다. 더군다나 인조 이후에는 즉조당 및 그 부속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어준 후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궁이었다.
그러다 1890년대 후반 고종이 이 곳으로 이어한 후 비로소 제대로 정문, 중문, 침전, 편전 등을 지었다. 그 때 금천도 팠고 금천교도 세웠다.
대한제국 초기 덕수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고 중문은 돈례문, 정전은 지금의 즉조당인 태극전[6] 이었다. 그래서 금천과 금천교는 인화문과 돈례문 사이에 있었다. 지금의 중화전 마당이다.
약 3년을 그렇게 있다가 1901년(광무 5년)에 제대로 된 정전이 필요하여 새로운 중화전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지의 부족으로 덕수궁 영역을 남쪽으로 크게 확장하면서 인화문을 헐고 사람들의 통행이 잦던 동쪽의 대안문[7] 을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대안문과 새 중화전 사이에 중문 조원문을 지었으며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새롭게 금천을 팠고 금천교를 놓았다. 이 때 금천교 다리를 옮긴 건지, 새로 지은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총독부가 원활한 차량 통행을 위해 흙으로 덮었다. 8.15 광복 후인 1986년에 발굴한 뒤 원래 자리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단, 대한문을 1970년에 서쪽으로 14m 정도 이전하였기 때문에 현재 대한문과 금천교가 거의 붙은 모습이다.
3. 금천
금천교 밑을 흐르던 덕수궁의 금천은 '''‘정릉동천(貞陵洞川)’'''이다.
물줄기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옛 러시아공사관 근처에서 발원하여 정동 길을 따라 흘러내렸다. 다른 한 갈래는 지금의 삼성플라자 부근에서 발원하여 세종대로를 따라 흘렀다. 두 물길은 덕수궁 대한문 근처에서 만났다. 합류한 물줄기를 약간 틀어 덕수궁 경내를 지나게 하였으며, 이를 금천으로 삼았다. 이 물은 지금의 서울시청 앞 쪽에서 창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인화문이 정문이던 시절에도 정릉동천을 금천으로 사용하였다. 그 때는 정동 길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바로 덕수궁 경내로 끌어들였다.
금천 역시 일제가 금천교와 함께 묻었다가 문화재관리국에서 1986년에 금천교와 같이 복원하였다. 그런데 정말 흉내만 냈기 때문에 마치 웅덩이같다. 축대도 측면은 돌로 쌓았지만 바닥은 시멘트이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때는 거북이 조각 상까지 배치해놓아서 사람들은 거북이 수영장이란(...) 소리까지 했었다. 그래도 시멘트가 훤히 보이는게 좀 그랬던지 최근엔 자갈을 깔아놓았다.
당연히 물도 흐르지 않으며 만약 금천에 물이 차있는 걸 봤다면 이는 비온 뒤 고인 물일 가능성이 크다.
정릉동천은 현재 도랑 시늉이라도 나있는(...) 덕수궁 금천을 제외하고 전부 덮혔다.
4. 구조
- 다리 위엔 귀틀석과 청판석을 교대로 배열하면서 3개의 돌길을 놓았다. 이 길의 너비는 마차 2대가 지나갈 만할 정도로 굉장히 넓다.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는 가운데에 있는데, 딱 봐도 어도의 높이가 양 옆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훨씬 높다.
- 다리 윗 부분 동, 서 가장자리엔 각각 2개의 돌로 된 엄지기둥[8] 을 세우고 그 사이마다 7개의 난간을 설치한 뒤, 그 위에 난간을 고정하기 위해 단면이 8각형인 긴 돌을 얹었다. 기둥 머리 부분은, 모래시계 형태의 가운데를 작은 구슬로 장식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봉오리를 얹었다. 난간의 형태는 연꽃봉오리가 없는 것을 제외하고 기둥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외에는, 다른 궁궐의 금천교와는 다르게 서수 조각을 포함한 어떠한 장식도 없다. 그리고 높이도 다른 금천교에 비해 굉장히 낮다. 처음부터 제국 황궁의 금천교로 지은 덕수궁의 다리가 왕국 왕궁의 금천교보다 초라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5. 여담
- 다리 앞에 비석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가 있다. ‘누구던 다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인데, 아마 후대에 어디 굴러다니던 걸 그냥 옮겨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하마비는 관료들이 궁궐에 들어갈 때 가마나 말을 타고 오다가 중간에서 반드시 내려야 하는 지점을 나타낸 비석이라 궐 밖에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1] 궁궐의 앞쪽에 물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하였다.[2] 물론 실제 궁궐과 외부의 경계는 문과 담이지만, 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궁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두었다.[3] 현재는 헐리고 터만 남았다.[4]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5] 성종의 형.[6] 중간에 중화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02년 2층의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이 되었다.[7] 1906년 이름이 '대'''한'''문'으로 바뀐다.[8] 계단의 맨 밑이나 계단참 또는 꼭대기에 수직으로 서 있는 기둥.[9] 전통 건축에선 홍예라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