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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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ABBA)는 1972년부터 활동한 스웨덴의 4인조 혼성 팝 그룹이다.[3]
'''스웨덴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팝 그룹'''이며 '''대중음악 역사상 영향력 있고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 중 하나다.'''[4]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다. 당대의 전 세계 음악계를 휘어잡은 전설이며 스웨덴이 자랑하는 네 가지가 비에른 보리, 볼보와 스카니아 그리고 '''아바'''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또한 그들의 음악은 세대를 초월한 뛰어난 음악으로 인해 대중음악계의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다.[5]
2. 역사
2.1. 결성
1966년 6월 비에른 울바에우스(1945년 출생)가 벤뉘 안데르손(1946년 출생)을 처음 만난다. 비에른 울바에우스는 매우 인기 있는 포크 음악 그룹인 후테나니 싱어즈의 멤버였고, 벤뉘 안데르손은 1960년대 스웨덴의 가장 큰 팝 그룹인 헵 스타즈에서 키보드를 연주했다. 3주 후 두 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울바에우스의 부모님 집에서 파티를 한 후, 나중에 헵스타즈가 발표한 첫 번째 공동곡인 'Isn't It Easy to Say'를 썼다. 이들은 이후 대중음악사에 남을 송라이터로써 역사적인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후테타니 싱어즈는 이후에 ABBA의 매니저가 된 스티그 안데르손[6] (1931~1997)이 소유한 폴라 뮤직 음반 레이블에 자신들의 음반을 공개하기도 했다. 스티그는 또한 ABBA의 그룹 활동 초반 기간 동안 ABBA의 히트곡들에 가사의 쓴 인물이기도 하다.
1969년 봄,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그들의 미래의 배우자이자 ABBA의 나머지 멤버들이 될 두 여자를 만났다. 프리다라고 알려진 노르웨이 태생인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1945년 출생)는 1967년에 국가적인 재능 경연에서 우승했으며, 향후 몇 년 동안 유명해졌지만 덜 성공한 재즈와 포크 가수가 되었다. 린스태드는 노르웨이 태생이었지만 매우 어린 나이에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안데르손과 린스태드는 1978년 10월에야 결혼했다. 그녀의 솔로 경력 동안 주로 스웨덴의 전통 음악을 공연했던 앙네타 펠트스코그(1950년 출생)는 1968년 가수 겸 작곡가로서 국가적인 경연에서 우승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1967년 첫 싱글이 히트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솔로 가수였다. 그녀와 울바에우스는 1971년 7월에 결혼했다. 앙네타 펠드스코그와 울바에우스 같은 해에 여러 차례 투어를 했다. 1969년,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는 스웨덴 영화인 인가 2의 사운드트렉과 함께 'Ljuva Sextal'을 제작했으며, 스웨덴 음악 듀오 Svenne & Lotta와 함께 여러 차례 출연했다. 린스테드는 1969년 3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스웨덴 예비 결정전에서 "Härlig är vår jord"라는 노래로 4위를 차지했다. 이 당시 이 곳은 안데르손이 작곡가로 활동하던 장소인데 이 행사에서 린스태드와 안데르손이 만났고 곧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 1969년 5월,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가 텔레비전 쇼에 함께 출연했고, 또한 이 둘도 커플이 된다. 그와 동시에 안데르손은 헵 스타즈를 떠나 1969년 8월에 린스태드와 약혼했으며, 곧 그의 작품인 싱글 피터 팬을 녹음했다.
1970년,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의 첫 번째 공동 싱글인 'She’s My Kind of Girl'를 발매했다. 또한 1970년 4월 펠트스코그와 울바에우스도 약혼했다. 한편, 울바에우스는 펠트스코그의 솔로 앨범 'Som jag är'에 도움을 줬다. 안데르손은 이 앨범의 프로듀서 역할을 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스티그 안데르손의 음반 회사인 폴라 뮤직에서 'Lycka'라는 제목의 첫 번째 공동 앨범을 녹음했다. 이 LP 제작으로 음악 엔지니어 마이클 B와 협업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ABBA의 사운드 개발에 크게 관여했던 인물이다. 이 당시 여러 가지 백 보컬로서 참여한 펠트스코그와 린스태드는 이미 몇몇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웨덴 노래 'Hej Gamle Man'은 ABBA 멤버 4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첫 번째 곡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앨범에는 "비에른 울바에우스 & 벤뉘 안데르손"의 이름만이 언급되어 있다. 녹음 외에도, 4명의 음악가들은 같은 해에 '페스트 포크'라는 쇼를 연출하고 1970년 11월 1일에 출연했다. 1970년 11월 고테보리에서 처음으로 단체로 활동했다. 1970년 12월, 4명의 스웨덴인들이 처음으로 공동 텔레비전 쇼 "Festfolket"이라는 제목의 Nostalgiere view에서 미국의 노래 클래식 'California, Here I Come in Western costumes'를 선보였다. 펠트스코그와 울배우스는 1971년 7월 6일에 결혼했다. 그 후 1971년 7월 남부 스웨덴 버뮴 지방에 있었다. 1972년 고테보르에서 펠트스코그는 스웨덴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역할을 맡았다.
당시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의 싱글은 'Hej Gamle'을 제외하고는 스웨덴에서는 히트곡이 아니었다. 그러나 1972년에 'She’s My Kind of Girl'이 일본에서 발매되었고, 그곳에서 판매 차트 7위, 그리고 몇몇 다른 히트 차트의 선두에 올랐다. 그들의 영어 노래 중 하나가 다른 나라에서 성공했다는 사실은 두 음악가들이 그 이후로 영어 팝송에 더 많이 의존하는 이유가 된다. 펠트스코그와 린스테드의 일부 곡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그들 자신의 목소리와 잘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그들의 인생의 동반자들을 다가오는 음악 제작에도 포함시키기를 원했다. 1972년 3월 4명의 음악가들이 그룹으로 녹음한 첫 번째 곡의 제목은 'People Need Love'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확실한" 그룹이라고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멤버들은 그들 자신의 개인의 일로 동시에 바빴기 때문이다. 'People Need Love'는 1972년 6월에 발매됐고, 그 커버에는 밴드 이름 대신 "Bjorn & Benny, Agnetha & Anni-Frid."라는 그들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었다. 싱글은 스웨덴 싱글 차트 3위, 싱글+앨범 판매에서는 17위를 차지했다. 이 성공은 이 네 명의 아티스트들이 비교적 큰 성공을 위해 공동 앨범을 녹음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가을과 1973년 봄 사이에 'Ring Ring'은 'He Is Your Brother'과 함께 1972년 11월에 최초로 발매됐다. 독일 시장에서 더 높은 판매량을 얻기 위해, 당시 많은 국제 예술가들에 의해, 스웨덴 노래인 Hej Gamle Man(헤이, 음악가)와 Livet gär sin gäng(사랑의 말)과 영어로 된 노래인 Ring Ring과 Another Town, Another Train(사랑의 대기실)을 채택했다. 또한 독일어로 된 가사도 포함해서다. 그 밴드는 6일 독일 TV에서 첫 출연을 했다. 1973년 1월, 첫 싱글 'People Need Love'와 함께 음반 쇼에서 진행자 일자 리히터는 알려지지 않은 스웨덴 밴드의 이름을 소개했지만, 무대에는 비요른 울바에우스, 벤니 안데르손,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 인거 브룬딘이 있었다. 인거 브룬디은 린스태드의 친구인데, 펠트스코그는 8개월 동안 임신하여 여행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밴드는 당시 독일에서 알려지지 않은 무명 밴드였기 때문에 관객들 중 누구도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1973년 2월, 이 네 명의 음악가들은 9개월 동안 'Ring Ring'라는 노래를 가지고 스웨덴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출연했으나 아쉽게도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 이 싱글과 동명의 앨범은 차트에서 1위를 다투며 스웨덴에서 그 해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Ring Ring'은 또한 몇몇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히트를 쳤다. 1973년 3월 앨범도 나왔고, 이 두 싱글은 모두 이미 10만장이 팔렸다. 그들은 이번 앨범과 함께 스웨덴 차트의 3개의 순위를 차지했다. 'Ring Ring'은 15개 국가에서 발매되었고 덴마크와 벨기에에서도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계속되는 집단적 성공으로 인해, 4명의 음악가들과 그들의 현재 매니저인 스티그 앤더슨은 다음 해 스웨덴 멜로디 페스티벌에 다시 참여할 계획을 세웠다.
2.2. 유로비전 우승
1973년 9월, 4명의 멤버들은 여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그들의 새 밴드 이름인 "ABBA"라는 이름이 결정되었던 후에 두 번째 앨범의 녹음을 시작했다. 이들은 그룹의 이름을 그들의 이름의 앞자리를 딴 'ABBA'로 바꾸었다. ABBA는 스웨덴의 통조림 생선 회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 회사는 그들의 이름을 ABBA가 쓰는 것에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ABBA는 1974년에 열리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스웨덴의 예비결정을 위해 다시 초청되었다. 1973/74년 겨울에 'Waterloo'라는 앨범의 이름이 만들어졌다. ABBA는 원래 'Hasta Mañana'라는 노래를 생각했는데, 이 발라드는 지난 해의 우승 타이틀 스타일과 상당히 비슷했고, 따라서 큰 승률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Waterloo'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노래가 새롭고 혁신적인 스타일로 인해 발라드 방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신의 한수가 된다. 또한 'Hasta Mañana에서 펠트스코그가 리드 보컬로만 부른 반면 'Waterloo'는 두 여성 가수들의 듀엣이고, 따라서 그룹으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Waterloo'와 함께, ABBA는 1974년 2월에 처음으로 멜로디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1974년 3월 4일 'Waterloo'라는 타이틀을 가진 새 앨범과 싱글이 발매되었다. 그 밴드의 새로운 이름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성(Bjorn, Benny, Agnetha & Anni)은 그들의 새로운 이름인 ABBA 뒤에 괄호 안에 배치되었다. LP는 빠르게 스웨덴 히트 퍼레이드의 최고 순위에 도달하여 판매 기록을 깼으며 싱글은 싱글과 앨범 판매에서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매니저 스티그 안데르손은 이미 여러 유럽 국가들을 거쳐 대회 전에 싱글들을 홍보했다. 1974년 4월 6일 영국 브라이튼앤호브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그랑프리 결승에서 ABBA가 진출했다. 그 때까지는 음악적으로 다소 독특하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던 'Waterloo'를 부른 후, ABBA는 점수 평가에서 최고를 기록하며 17개 참가국 중 1위를 차지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이 승리는 그들의 국제적인 경력의 시작이었다. 싱글 'Waterloo'는 54개 국가에서 발매되었고, 그 중 많은 곳에서 히트 차트에서 선두에 올랐다. 영국에서 첫 1위를 기록했으며 이 노래는 500만장 이상 팔았다. 심지어 미국에서 TOP10 히트곡이 되었다. 이 성공 후, 일부 국가에서 'Waterloo'라는 앨범이 발매됐지만,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앨범은 차트에 특별히 성공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1974년 4월에 발매된 싱글 'Honey Honey'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만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우승자라는 '꼬리표'로 인해 ABBA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1974년 여름, 첫 싱글 'So Long'이 11월에 발매된 다음 그룹의 새로운 앨범의 녹음 시작이었다. 그와 동시에, ABBA는 첫 번째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그리고 30개국에서 투어를 돌며 1974년 11월, 독일 도시 프랑크푸르트, 브레멘, 하노버 등 7곳에서도 투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이 별로 없었고, 스칸디나비아 밖에서 바라던 성공은 여전히 거의 없었다. 어떤 콘서트도 매진되지 않았고, 예를 들어 비엔나 시청에서 진행된 기존 좌석의 1/4이 채 되지 않았다. 더셀도르프 음악회와 스위스에서 열리는 유일한 음악회는 심지어 낮은 사전 판매로 인해 취소되었다.
그래도 스웨덴에서는 ABBA가 계속해서 인기가 있었다. 1975년 1월 스칸디나비아 순회 공연도 모두 매진되었다. 그러나 반면 국내 언론들은 점점 더 대세가 되어 인기를 얻고 있는 이 그룹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논지는 이 그룹이 "너무 상업적이었고 음악은 너무 표면적이고 비판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 여전히 멤버들은 ABBA라는 그룹에서 전업적으로 일하지는 않았고, 처음에는 각자 자신의 경력에 대한 다른 선택사항들을 열어두었다. 1975년에 펠트스코그와 린스태드는 각각 스웨덴에서 솔로 앨범을 발표했으며, 린스테드는 하포의 무비스타를 제작하는 백그라운드 가수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ABBA라는 단순한 제목인 3번째 그룹 LP가 1975년 3월 21일에 발매되었다. 1975년 4월 연말까지 스웨덴에서는 45만장이 판매 되었다. 그 당시 다른 앨범보다 더 많이 팔렸다. 동시에 발표된 싱글 'I Do, I Do, I Do, I Do, I Do'는 스위스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만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영국 시장에서는 싱글이나 새 앨범이 큰 인기를 끌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영국에서 그 당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자들은 원 히트 원더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7]
2.3. 전성기
'''1974년 유로비전에서 우승한 ABBA는 지난 4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1970년대까지 비틀즈가 1960년대와 같은 존재였고, 두 그룹 모두 다른 현대 예술가가 아닌 것처럼 대중음악을 지배했다.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의 훌륭한 작곡, 아름다운 프리다와 앙네타의 환상적인 퍼포먼스. 완벽한 팝 밴드 –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가장 위대한 밴드가 되었다.'''
― uDiscover Music#
한편, ABBA는 1975년 여름 스웨덴 파크 투어에서 다양한 관객을 확보했으며, 예를 들면 스톡홀름 놀이공원 Grena Lund에 19,000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그와 동시에 'SOS'는 앨범에서 세 번째 싱글로 발매했다. 이 새로운 팝 타이틀은 영국 차트에서 6위, 독일에서 1위를 차지하며 히트 싱글이 된다. 이 당시 ABBA는 곡의 사운드 품질의 개선뿐만 아니라 새로운 추가 노래 제작에 대한 방향을 생각하고 있었다. ABBA는 항상 그들의 새로운 앨범과 싱글의 홍보를 위해 출연한 TV 공연 외에도, 최근 앨범에서 나온 네 곡의 뮤직 비디오가 주로 유럽 이외의 국가에서 방송되도록 제작했다. 1975년 8월 호주 음악 프로그램 카운트 다운에서 'Mamma Mia'로 출연했을 때 호주 ABC 방송국에서 시청자들이 ABBA의 재방송을 요청하는 전화가 쇄도했다. ABBA의 담당 레이블 폴라 뮤직은 RCA 호주 음반사로부터 해당 싱글을 발매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스티그 안데르손이 이미 앨범에서 싱글이 충분히 따로 되어 있고, 이 싱글은 전반적으로 ABBA를 홍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먼저 거절되었다. 너무 많은 싱글을 공개하면 음반회사의 주요 수입원인 앨범으로 수익이 감소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RCA의 요청과 호주의 대중들의 엄청난 수요는 포기하지 않았고, 따라서 폴라뮤직은 결국 싱글 발매에 동의했다.
이 시기부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스웨덴 그룹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이 급격히 증가하여 1975년 10월 'I Do, I Do, I Do, I Do'가 호주 1위를 차지했다. 3주 후' Mamma Mia'가 10주 동안 1위를 차지하여 그 해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싱글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 'Mamma Mia'는 세계적으로 메가 히트를 기록하고 독일과 영국에서도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또한, 1975년 11월, ABBA는 일부 국가에서 'The Best of ABBA'라는 제목의 첫 번째 베스트 앨범도 발표했다. 이 앨범은 LP 시장에서도 세계적인 메가 히트를 기록 했고, 이들의 경력에서 가장 큰 판매 성공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스웨덴에서만 8주 동안 앨범 차트의 최고 순위를 유지하고 이 곳에서만 30만장 넘게 팔았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 두 번째로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되었으며, 호주에서는 100만장 이상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이 앨범은 1981년, 폴라 뮤직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700만 장 이상의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또한 'S.O.S'가 'Waterloo' 이후 첫 히트 싱글이 되어 영국 시장에서 톱10에 진입하는 등 ABBA가 원 히트 원더가 아닌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1976년 ABBA는 마침내 그리고 확고하게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Mamma Mia'와 베스트 앨범 'Greatest Hits'의 역대급 성공으로 ABBA의 성공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룹의 큰 인기는 호주와 영국에서 아바의 광적인 팬덤 집단 '아바 매니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ABBA는 1976년 3월 첫 번째 싱글로, 새로운 싱글인 'Fernando'를 발표했다. 이 노래는 이전에 린스태드의 솔로 앨범 'Frida ensam'의 스웨덴어로 쓰여졌던 노래다. 이 노래는 역시 세계적인 히트작으로, 독일에만 600만장 이상이 판매됐다. 같은 해에 그 밴드는 4개의 1위 싱글을 가지고 있었고, 비틀즈 외에는 지금까지 어떤 밴드도 기록하지 못한 기록이다. 'Fernando'는 영국 음반협회에 의해 골드 음반을 수상했다. 이 싱글은 최소 13개국에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1,0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Fernando'는 호주 역사상 가장 긴 1위(1위 14주, 차트인 40주)를 기록했으며, 2017년 5월 1위로 15주를 달성한 에드 시런의 'Shape of You'에 추월될 때까지 4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Fernando'는 오스트리아, 벨기에, 프랑스, 독일, 영국, 헝가리, 아일랜드, 멕시코, 네덜란드, 뉴질랜드, 남아공, 스위스, 스웨덴에서도 차트 상위권에 올랐다. 또한 "Fernando"는 1976년 영국에서 네 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며 영국 톱10에서 10주를 보냈으며 또한 ABBA 3연속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다.
또한 프로모션 투어와 TV 스페셜을 통해 그 밴드의 세계적인 인기도 높아졌다. 호주에서는, TV쇼 The Best of ABBA가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방송보다 더 많은 시청률인 58%를 기록 했다. 독일 TV 방송인 뮤직 스토어는 ABBA가 유일한 밴드로서 완벽한 연속 시리즈를 제작했고, 스웨덴에서는 TV 특집을 기획해 1976년 최고의 인기 쇼로 만들어졌다. 영국의 탑 오브 더 팝스나 독일의 디스코와 같은 유럽의 많은 TV쇼들이 그 그룹의 싱글들을 위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심지어 호주의 한 TV 팀이 이 그룹을 인터뷰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몇 번을 방문해야만 했다. 1976년 여름, 일본-오스트레일리아 전기기기 제조업체인 'National'은 ABBA의 4명의 멤버들을 광고 모델로 결정했고 모델로 채택된 이들을 광범위한 홍보 캠페인을 위해 계약을 체결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ABBA는 이 광고 계약을 위해 100만 호주 달러를 받았다. 'Fernando'의 멜로디를 광고로 들을 수 있는 다섯 개의 다양한 광고 외에도 밴드 멤버들의 동기도 담긴 광고, 브로슈어 및 기타 광고도 진행됐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유명인이 된 것이다.
1976년 6월 18일, ABBA는 스톡홀름의 왕립 오페라에서 새로운 타이틀인 ''Dancing Queen'을 선보였다. 이 노래는 실제로 1976년 초부터 완성되었고 이미 독일 TV에서 상영되었다. 이 공연에는 스웨덴 왕 칼 16세 구스타프와 그의 약혼자인 실비아 좀멀라트이 참석했고 이들의 결혼식 전날 밤이기도 했다. 4명의 멤버들이 드레스와 정장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Dancing Queen'은 1976년 8월 전세계 시장에 출시되었고, 종종 ABBA의 대표적인 히트곡,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팝 타이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이 싱글 역시 역대급 히트를 기록하며 전세계적으로 600만장 이상 판매되었다. 'Dancing Queen'은 ABBA의 모국 스웨덴에서 14주 1위, 호주, 벨기에, 브라질, 캐나다, 독일, 영국, 아일랜드, 멕시코, 네덜란드, 뉴질랜드, 남아공, 로디지아, 노르웨이(32주 1위) 등 10여 개 국가에서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Dancing Queen'은 미국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으며[8] , 오스트리아, 핀란드, 프랑스, 스위스에서 톱 5의 히트를 기록했고 노래는 300만장이 넘게 팔렸다. 이 곡은 1976년 영국에서 네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이기도 하다.'''우리는 이 노래는 듣고 무조건 히트칠 것이라고 생각했죠. 우리는 전율을 느꼈어요. 그것은 특별한 노래였어요.'''
― 앙네타 펠트스코그, Dancing Queen에 대한 질문에 대답
1976년 말 ABBA의 4집 앨범 'Arrival'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 역시 전세계 전역을 강타했고 호주에서만 60만장, 독일에서도 이미 50만장, 폴란드는 80만장이 판매됐다. ABBA는 심지어 폴란드로 가서 국빈 대접을 받고 자신만의 TV 스페셜을 제작했다. 다른 동양권 국가에서도 ABBA가 인기가 많았고 음악적으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업적 성공은 제한적인 수준으로 유지되었는데, 그것은 각 국가의 통화들이 단지 제한적으로 변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로의 추가 프로모션 투어를 했다. 또한 'Arrival' 앨범은 'Money, Money, Money'과 'Knowing Me, Knowing You'와 같은 히트곡들을 낳았다. 네덜란드에서는 ABBA가 이전에 어떤 밴드보다 더 많은 앨범과 싱글을 판매했다. 이어 1977년 1월부터 3월까지 유럽과 호주의 콘서트 투어가 이어졌다. 그 투어는 모든 좌석이 매진되며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ABBA 월드와이드 투어는 유럽과 호주에서 1976년 11월부터 준비되었고 이미 몇 달 동안 전 세계에 티켓이 판매되고 있다. 1977년 2월 14일, 런던 로얄 앨버트 홀에서 공연을 두 번을 했는데 총 12,000명의 좌석이 매진됐고 350만명이 이 티켓을 사려고 문의를 하기도 했다. 유럽 투어는 28일에 시작되었다. 1977년 1월, 오슬로에서 16개의 다른 공연을 개최했으며, 그 공연은 스웨덴, 덴마크,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84,000명을 동원했다. 호주에서는 팬덤 '아바 마니아'가 최고조에 달했는데 9일 만에 시드니, 멜버른, 아델라이드, 퍼스에 있는 총 11개의 콘서트가 모두 매진되며 콘서트가 진행됐다. 총 관객 145,000명을 동원했다. 그것은 당시 호주 인구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당시 호주 역사상 가장 큰 콘서트 투어였다. 여섯 개의 야외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들이 봉쇄 작전을 펼쳤고 밖에서 수천 명의 팬들이 공연을 보려고 애를 썼다. 또한 Lasse Hallström의 감독 하에 원래 투어 다큐멘터리가 되어야만 했던 영화 'ABBA - The Movie'가 제작되었다. 'ABBA - The Movie'의 전세계 프리미어는 15일 열렸다. 1977년 12월 호주 시드니와 퍼스에서 ABBA의 매니저인 스티그 앤더슨도 참여했다. 이 영화에서 이 공연을 보려고 애를 쓰는 팬들을 볼 수 있다. 이 밴드는 투어를 마치고 스웨덴으로 돌아갔을 때, 주로 더 많은 영화 제작과 새로운 노래 작성에 전념했다.
그들의 계속해서 상승해가는 인기와 여러 가지 의무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시간의 압력에 직면해 지쳐있었고 혹사된 상태였다. 펠트스코그는 두 번째 임신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최대 12시간까지 일했는데, 이는 1977년 여름에 유산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5번째 앨범인 ''ABBA: The Album'의 작업은 몇 주 동안 지연되었다. 새 음반의 첫 번째 곡은 1977년 10월 영국 차트 6위에 오른 'The Name of the Game'가 발매되었다. 앨범 'ABBA: The Album' 12일 발매되었다. 'Arrival'은 전형적인 디스코 앨범이었지만, 이 앨범에서는 그들의 음악이 "더 성숙해진"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이 앨범의 히트곡으로는 'The Name Of The Game'과 'Take A Chance On Me'가 있다. 'Take a Chance on Me'는 ABBA의 7번째 영국 차트 1위[9] 를 기록하며 ABBA의 최전성기를 증명했다. 1978년 봄, 이 그룹은 미국에서 대대적인 홍보 캠페인을 시작했으며, 'Take A Chance On Me'의 Top 3 히트, 'ABBA: The Album'의 Top 20 진입을 이끌었다. 이 앨범의 마지막 싱글은 1978년 5월에 발매되었고, 그와 동시에, 펠트스코그와 올바에우스의 결혼은 이미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긴장감은 또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 사이에 큰 말다툼을 불러 일으켜서 협력이 엄청나게 어려워졌다. 밴드 내부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ABBA는 1978년 4월 말 2주 동안 미국으로 투어했다. 지난 몇 년 동안 3번의 프로모션 투어가 여기서 원하는 돌파구를 이루지 못한 후, 매니저는 애틀랜틱 레코드와 함께 50만 달러를 투자해 협력했다. 이 당시 수천 달러짜리 광고 캠페인이 있었다. 로스엔젤레스의 선셋 스트립에 ABBA가 스튜디오 음악 역사상 가장 수익성이 높은 밴드로 칭송하는 광고판이 부착되었다. 또한 그 밴드는 올리비아 뉴튼 존과 앤디 깁의 쇼에서 잼세션을 하고 ABBA의 노래 일부를 선보였다. 특히 'Take a Chance on Me'는 이 혜택을 누리고 빌보드 핫 100의 3위를 차지하며 골드 히트를 기록했다. 두 앨범인 'Greatest Hits'와 'ABBA - The Album'도 미국 차트에 올라 플레티넘을 기록했다. 이 당시 ABBA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기에 1977년 5월부터 1978년 5월까지 ABBA는 5천만 크라운의 수익을 창출했으며, 이는 빌보드 매거진에 따르면 1,2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이다.
1978년 5월 18일 스톡홀름 에릭스가탄에 설립한 폴라 뮤직 스튜디오가 문을 열었다. ABBA는 지금까지의 녹음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깨달았고 다음 앨범을 위해 지속적인 작업 환경을 개선했다. 그 해 초부터 여러 곡들이 작곡되고 제작되었지만, 그 중 많은 곡들이 다시 폐기되었다. 펠트스코그와 울바에우스의 부부 문제도 영향을 미쳤다. 1978년 여름, 그들은 부부 상담을 실시했지만, 그 상담으로도 부부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중 앞에서, 그 둘은 계속해서 커플로 활동했다. 1978년 9월에 'Summer Night City'가 녹음 세션의 첫 번째 곡으로 발매되었다. 그러나, 이 싱글은 지난 몇 년 동안 보여줬던 차트 순위에 도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 노래는 계획된 LP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애틀랜틱 레코드 담당 매니저인 제리 그린버그는 그 싱글이 발표되지 않은 한 미국에서 발매하지를 원치 않았다. 1978년 10월 6일, 린스태드와 안데르손은 9년 간의 약혼 후에 결혼했다. 한 달 후, ABBA는 TV 출연, 라디오 및 TV 인터뷰와 더불어 일본에서의 인기를 높아져 자신만의 TV 스페셜을 촬영하는 등 일본에서 또 다른 홍보 투어을 했다. ABBA의 다음 앨범이 나올 때까지 일본에서는 500만장의 ''ABBA: The Album'이 판매되었다. 1978년 12월 25일, 펠트스코그는 울바에우스와 함께 공동 빌라를 떠나 폴라뮤직의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로 이사했다.
1979년 1월 8일, ABBA는 뉴욕에서 열린 유니세프 행사에서 1주일 후 싱글로 발매된 새 노래 'Chiquitita'를 공식적으로 선보였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미 ABBA의 커리어가 여기서 더 인기를 끌 수 있다고 믿지 않았기에, 그 당시 ABBA는 다시 세계적인 히트곡을 다시 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라틴 아메리카의 영향으로 인해, 역대급 히트를 기록한다. 스페인어 버전으로 발매된 이 버전은 그 때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큰 히트곡 중 하나가 되었고, 아르헨티나에서 50만장의 판매를 했다. 라틴 아메리카 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 국가에서도 이 노래가 히트작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싱글이 1위를 차지했고 10만장 판매를 기록, 그 해 최고 히트 싱글이었다. 이 싱글의 판매로 인한 총 수입은 ABBA가 유니세프에게 기부했으며, 그 이후 이 노래에 대한 라이선스 소유권자도 유니세프가 된다. 2004년까지, 이 노래로 유니세프에게 100만 파운드의 수입을 준것으로 추산된다. 1979년 2월, ABBA는 스위스에서 TV 특집 ABBA를 촬영하기 위해 며칠 동안 스위스로 투어를 한다. 이 곳에서 'Chiquitita'를 위한 뮤직 비디오가 제작되었다. 그 밴드는 또한 무대 공연에서 그들의 새로운 앨범인 Voulez-Vous의 일부 수록곡의 공연을 선보였다. 이 앨범은 4월 23일에 발매되었다. 그 당시 트렌드를 반영한 디스코풍 노래가 많이 있었다. 디스코 앨범이지만 발라드 노래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Chiquitita'와 함께, 'I Have a Dream'은 ABBA를 대표하는 발라드 트랙이다. 그 해 동안, 'Does Your Mother Know'과 'Voulez-Vous'를 포함한 앨범의 세 개의 싱글이 전세계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앨범은 스웨덴과 영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앨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또한 1979년에 ABBA는 그들의 두 번째 베스트 앨범과 싱글 "Gimme! Gimme! Gimme! (A Man After Midnight)"가 영국과 독일 양쪽에서 또 한번 1위를 기록하며 히트를 쳤다. 이 싱글은 6개국에서 동시에 1위를 기록했다.
이 당시 ABBA는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하며 수 많은 곳에서 투어를 개최했고 가는 곳마다 공연이 매진됐다. 1979년 여름, ABBA는 또 다른 큰 무대 투어를 시작했고, 처음에는 북미와 유럽으로 향했다. 투어는 13일에 시작했으며 1979년 9월 15일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15,000명 관객을 동원한 공연을 시작한다. 이 투어에서 'Arrival', 'ABBA - The Album', 'Voulez-Vous'의 수록곡을 부른다. 그런데 이 투어 중에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1979년 10월 3일, ABBA는 공연을 위해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날아갔고, 그 과정에서 심한 폭풍우로 인해 비행기가 거의 추락할 뻔 했다. 그 비행기는 미국 도시인 메사추세츠에 착지했고 ABBA는 어쩔 수 없이 밴으로 보스턴까지가서 콘서트는 90분 지연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수년 동안 비행에 대한 공포로 고통받았던 펠트스코그는 저녁 무대에 섰지만, 다음날 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충격을 받아 워싱턴 DC에서 다음 콘서트에서도 공연을 하지 못 할정도로 충격을 받아서 공연은 최소됐다. 1979년 10월 5일 ABBA는 백악관에도 초대되어 환영회도 했지만 펠트스코그는 비행기 사고 후유증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10월 중순, 스웨덴의 고테보르그에서 ABBA의 제3차 유럽 투어를 시작했으며, 또 다른 다섯 번의 공연을 위해 독일로 이어졌다. 그 투어는 15일에 끝났다. 1979년 11월, 더블린에서 열린 최종 콘서트로, 두 기획에 걸쳐 개최된 거의 40개의 콘서트에서 3만명의 관중을 동원했다. 또한 런던 웸블리 아레나에서 총 6개의 콘서트는 또한 촬영되었고, 다큐멘터리인 ABBA In Concert를 위해 편집되었다. 이 공연은 2014년 ABBA Live at Wembley라는 제목의 더블 CD가 발매되었다. 1980년 3월, ABBA는 일본 투어도 했다. 일본에서 당시 ABBA의 인기는 대단했으며 도쿄의 일본무도관에서 6번 공연했으며 모두 매진되어 총 100,000명을 동원했다. 1980년 초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바베이도스로 여행을 떠났고, 그 후 새로운 앨범에 대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펠트스코그와 린스테드는 1979년에 발매한 'I Have a Dream'이 스페인어로 녹음한 뒤 발매한 후 스페인어로 된 Chiquita와 마찬가지로 매우 잘 팔리게 된다. 그래서 스페인어로 된 8개의 다른 ABBA 노래를 녹음했다. 1980년 6월 라틴 아메리카 시장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베스트 앨범 'Gracias por la musica'라는 앨범을 발매했는데, 그 앨범은 그 동안 녹음된 10곡의 스페인 가사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이 프로젝트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 앨범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아르헨티나, 멕시코, 스페인에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일본에서마저 상위 30위에 올랐다.
다음 앨범 'Super Trouper'의 녹음은 1980년 2월에 시작되었고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80년 7월에 'The Winner Takes It All'와 함께 이 세션의 첫 싱글이 발매됐고, 영국, 미국 등 21개국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이 노래는 비에른 울바에우스가 자신의 말에 따르면 작사하는데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종종 가장 좋은 가사를 가진 ABBA 노래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시기 1980년 7월 펠트스코그와 울바에우스는 공식적으로 이혼을 발표한다. 새 앨범은 11월 3일에 발매되었고 역시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다. 영국에서만 100만장이 미리 예약되어 결국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연말까지 전 세계 400만장의 LP가 판매되었다. 싱글 'Super Trouper'도 독일과 영국 등 많은 나라에서 1위를 기록한다. 또한 1981년 2월 중순, 벤뉘 안데르손과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는 그들이 이혼을 신청한다고 발표했다. 이혼 발표는 그간 그들의 결혼 생활 동안인 수 년간 고된 싸움이 지속됐다는 것을 표면화했고, 벤뉘는 이미 1981년 11월에 결혼한 또 다른 여성 모나 뢰르클릿을 만났었다.
1981년 3월, ABBA의 8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인 The Visitors의 녹음이 시작된다. 1981년 4월 이미 미국 진행자 딕 캐벳이 출연한 텔레비전 특집에서 세션에서 두 개의 새로운 노래가 소개되었다. LP는 마침내 1981년 11월 발매했다. 그 밴드는 음악 스타일을 크게 발전시킨 9개의 곡을 포함했다. 이 앨범은 많은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수록된 노래들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고뇌가 느껴지며 어둡게 들렸으며, 그 가사들들은 이별의 고통과 전쟁의 공포에 대한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더 행복한 요소가 있는 노래들 조차도 멜랑콜릭한 언더톤을 가지고 있다. 또한, ABBA는 이번 싱글 'One of Us'가 1981년 12월에 독일의 ABBA의 9개 1위 싱글 중 마지막이 되었으며, 남아공 역시도 마지막 5위 싱글이 되었다. 'One of Us'는 영국 싱글 차트 3위에 오르는 등 ABBA의 마지막 3위 히트곡이기도 했다. 또한 The Visitors는 음악 역사상 최초의 오디오 CD 중 하나였다. 이 앨범 역시 1위를 기록한다,
2.4. 무기한 휴식, 그 이후
1982년 1월, ABBA는 폴 매카트니,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당대 인기 아티스트들과 당시 미국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 독일 총리인 헬무트 슈미트와 같은 고위 정치인과 함께 'Benefit Gala vo'를 후원했다. 이 방송은 미국 TV에서 방송됐고 40개 이상의 국가에 방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 인민 공화국 및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당 지도부는 이러한 기획에 참여한 ABBA를 비난하기도 했다. 1982년 봄에, ABBA는 새로운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다시 한 번 갔다. 하지만 곧 4명은 그룹에 대한 열정을 잃었다. 여름 휴가 전에는 녹음된 곡이 'Just Like That', 'You Owe Me One', 'I Am the City' 달랑 3개밖에 없었다. 이 음악들은 ABBA의 예전 음악 스타일을 더 많이 표현했고, 공통적인 느낌들이 있었고, 그 곡들은 모두 조금 더 즐거운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린스테드는 필 콜린스와 함께 최초의 영국 솔로 앨범인 'Something's Going On'을 제작했으며, 펠트스코그는 스웨덴 영화 'Raskenstam'에 음악에 참여, 안데르손과 올바에우스는 또 다른 뮤지컬 '체스'를 함께 작곡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개인 활동으로 점점 더 언론과 대중 매체에서는 이 그룹의 해체에 대해 추측이 많아졌고, 그 때마다 멤버들은 항상 이를 부인했다. 그래서 1982년 8월 4명의 멤버들이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나 더 많은 노래를 녹음했다. 그 세 곡 중 "The Day Before You Came"와 "Under Attack"이 싱글로 발매되었다. 또한 1982년 11월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 "The Singles - The First Ten Years"의 'Cassandra'와 'You Owe Me One'은 두 싱글이 발매되기도 했다. 1982년 11월 6일, 노엘 에드먼즈의 영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Late Late Late Breakfast Show"에서 4명의 ABBA 멤버들이 게스트로 초대되었고, 인터뷰에서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펠트스코그는 'Fernando', 린스테드는 'Dancing Queen', 안데르손은 'Chiquitita', 울바에우스는 'The Winner Takes It All' 이라고 말했다. 후기 인터뷰에서 펠트스코그는 돌이켜 보면 'The Winner Takes It All'이 ABBA의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방송에서 앤더슨과 울바이어스는 이미 여러 신문에서 추측한 밴드의 해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부인했다.
1982년을 거치면서 벤뉘와 비에른이 뮤지컬 체스[10] 집필을 목표로 삼고 앙네타와 애니가 솔로 활동을 부활시키면서 점차 그 에너지가 그룹에서 고갈되고 있었다. 이 해 ABBA LP 발매된 유일한 앨범은 신곡 2곡을 포함해 The Singles – The First Ten Years라는 제목의 히트 싱글 베스트 앨범이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The Day Before You Came' 역시 히트를 기록한다. 1982년 말에 ABBA는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ABBA 11월 11일 서독 TV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1982년 11월 마이클 샨즈와 함께 쇼 익스프레스에서 독일에서의 마지막 공동 공연과 마지막 공연을 했다. 2년 전 이미 예정되어 있는 쇼 익스프레스에서 있었던 공연은 납치 위협으로 인해 공연이 취소되어야 했고, 스웨덴으로의 20분간의 라이브 방송으로 대체되었다. 1982년 12월 11일, ABBA는 한 번 더 Late Late Breakfast Show에서 'I Have a Dream'과 'Under Attack'을 함께 공연했다. 그들은 스톡홀름의 스튜디오에 있었고 위성으로 생중계되었다. 인터뷰에서, 이들은 ABBA를 위한 "잠정 휴식"을 발표했는데, 이는 돌이켜 보면 그 밴드의 해체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은 몇 년 후에 언제든지 다시 모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기한 휴식에 들어가기 직전에 싱글로 발매한 'Under Attack'이 아바의 마지막 곡이 되었다. 원래는 새 스튜디오 앨범을 발매할 예정이었으나 이미 지칠대로 지쳤던 멤버들은 계획을 접고 사실상 해산을 결정했다. Under Attack을 들어보면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The Visitors와 비슷하면서도 더 진일보한 사운드를 보여주는데 이 새로운 앨범이 제대로 발매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비록 1982년 아쉽게 그룹은 그룹 활동이 중단 되었지만, 그룹의 인지도는 계속해서 상승한다. 해체 된 이후 1980년대 중후반 ABBA의 인기는 차츰 차츰 떨어진다. 그러나 ABBA의 음악은 1990년대에 완벽하게 재부흥 한다. 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이 ABBA의 노래를 커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2년 영국 신스 팝 듀오 이레이저는 4개의 ABBA 노래인 Lay All Your Love on Me, SOS, Take a Chance on Me 및 Wozels You의 커버버전인 EP 싱글 Abba-esque를 발표했다. 그 싱글은 영국에서 1위, 독일에서 2위(총 19주), 오스트리아에서 1위(8주) 그리고 스위스에서 3위를 기록하며 대성공을 했다. 이 예상치 못한 성공으로 인해, 다양한 예술가의 ABBA 노래들도 뒤따라 커버되었다. 대표적으로 U2, 너바나[11] , R.E.M.과 같은 당대 최고의 인기 밴드들이 커버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마돈나[12] 와 티나 터너는 ABBA의 팬이라고 공개적으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1992년 6월 11일,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스톡홀름에 있는 에릭슨 글로브에서 U2의 콘서트에서 공연하여 보노와 함께 Dancing Queen을 불렀다.'''1982년 대인관계 긴장이 고조되면서 ABBA가 조용히 해체될 무렵, 그들은 이미 대중음악사에서 전설적인 자리를 확보했고, 전세계 대중 문화 전반에 정착 할 준비가 되었다.'''
그 이후 수 많은 TV 쇼, 영화에서 ABBA의 노래를 사용한 작품들이 생겨나면서 ABBA에 관해 많은 대중들의 많은 관심이 생기며 ABBA의 부흥이 시작 된다. 그 후 ABBA 재부흥의 정점을 찍은게 바로 1992년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 'ABBA Gold'다. 이 앨범은 ABBA 중단 이후 나온 앨범이지만 ABBA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앨범이다. 얼마나 중요하냐면 2019년 피치포크는 이 앨범을 '''"ABBA에게 무한한 명성을 가져다 준 앨범."'''이라고 평했다.# 이 앨범이 중요한 이유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록해서 그런것도 있지만 ABBA가 해체된 이후 10년 동안 CD는 LP를 대체하고 피지컬 매체의 지배적인 형태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80년대 말부터 CD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동안, ABBA의 카탈로그를 다루는 리이슈 앨범들이 전세계 음반 판매점에서 눈에 띄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타이밍에 나온게 이 베스트 앨범이다. 이 앨범은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3,100만 장 이상이 팔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다. 또 영국에서만 558만장이 팔리며 역대 2번째로 영국에서 많이 팔린 앨범이다. 심지어 이 앨범은 2020년 현재진행형으로 영국 앨범 차트에서 966주 동안 차트에 진입하고 있다.[13] 그 이후 나온 1993년의 베스트 앨범, More ABBA Gold는 계속해서 300만 장이 팔렸다. 1994년에 이어 박스 세트인 "Thank You For The Music"은 모든 히트곡, 선택된 앨범 트랙, 그리고 희귀하고 이전에 발표되지 않았던 음반들을 포함하고 있다.
ABBA의 곡은 현재까지도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으며, 특히 ABBA의 노래 24곡을 사용한 뮤지컬 "맘마미아!"는 현재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2008년, 2018년에 개봉한 아만다 사이프리드, 메릴 스트립 주연의 맘마 미아!, 맘마 미아! 2 두 편 모두 흥행에 성공함으로서 ABBA의 노래가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2010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된다.
2010년대에는 꾸준하게 재결합 떡밥이 돈다. 그러나 2011년 올바에우스는 "우리가 무대에 설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부정했으며, 2013년 펠트스코그는 "ABBA 재결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늙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멈춰선 지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고, 우리를 다시 합친다는 건 정말 의미가 없어요."라고 강하게 부정을 하며 재결합은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2.5. 재결합
그리고 2016년 6월에 멤버들이 30년만에 다시 모여 현역시절의 The Way Old Friends Do를 불렀다. 영상이 올라온 직후 한동안 불가능할 거라 여겨 잠잠했던 재결합의 목소리가 현재까지도 끝임없이 늘어나고 있는등 웹에선 멤버들의 행보에 대해 기대가 날로 커지고 있다.
'''결국 35년만에 재결합했다.''' 2곡의 신곡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링크''' 또한 아바 아바타 투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한다. 멤버들의 홀로그램 등을 통해 전세계에서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아바의 대변인인 고렐 한세르는 “새 노래들의 사운드는 낯익지만 현대적”이라고 전했다. 이어 아바가 아바타 투어 프로젝트에서 홀로그램 말고 직접 무대에 나와 연주를 하는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한세르는 “멤버들이 무대에 함께 올라 힘을 합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2018년에 발매 예정이었으나 그룹 사정으로 2019년 가을로 연기됐다가 2020년으로 또 연기됐다. 현재까지 5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예 싱글 발표에서 앨범 쪽으로 선회한 듯. 2020년 현재 새 앨범을 위해 벤뉘가 작곡한 8곡의 노래 중 5곡이 두 여성 멤버들에 의해 녹음되었고, 뮤직비디오 촬영도 결정되었다고 한다. 1500만 파운드를 투자한 신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뮤직비디오도 촬영했다고 한다. 2020년 7월 아바의 대변인 제프 로이드는 새로운 ABBA 음반 발매는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고 말했다.# 코로나 여파로 아바타 투어도 2022년으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3. 특징
3.1. 음악 스타일
'''ABBA의 팝은 대다수의 현대 히트곡과는 달리 R&B, 힙합, 소울, 펑크, 라틴음악의 영향, 즉 백인이 아닌 음악적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울바에우스는 1981년 인터뷰에서 "우리의 음악적 뿌리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노래를 좋아한다"고 그들의 접근 방식을 다소 깔끔하게 요약했다. "이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에서는 아마도 우리의 노래가 잘 통할 겁니다. 미국에서는 팝 음악이 블루스, 소울, 가스펠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는 ABBA의 유산에는 없는 것일 겁니다."'''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스웨덴 전통 민속음악과 슐라거 음악에서 자랐다. 이 음악은 독특하게 대륙적인 유럽풍의 팝 음악으로 엉성하고 단순한 음악이다. 그리고 그들의 취향이 10대로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거의 독점적으로 남아 있는 영향의 네트워크를 개발했다: 비치 보이스의 황금 십대 찬송가,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 레논-매카트니의 Rubber Soul, 클래식 음악, 그리고 뮤지컬 극장. 성숙한 작곡가와 작사가로서 결정적인 멜로디, 아찔한 편곡과 대위, 그리고 지나치게 과장된 감정적 제스처를 선호하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영향의 혼합은 그 밴드가 정제되지 않은 감상주의 공급자로서 명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ABBA는 지적이고 음악적인 단순함을 가장한 팝의 극대주의를 대표했다.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보다 문화적으로 더 멀리 떨어진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연구하고 학구적인 수의 정확성으로 재구성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슈퍼그룹으로 이해한 것을 하나로 모으기 전에 각 멤버들은 상당한 지역적 성공을 거두었다. 키보드 연주자 안데르손은 아바를 "스웨디쉬 비틀즈"로 만들며 히트곡을 썼다. 기타리스트 울바에우스의 후테난니 싱어즈도 스웨덴어로 된 커버와 미래의 스타가 되어 작사를 썼고, 결국 이 둘은 서로의 밴드에 기여했다. 울바에우스의 미래의 아내인 펠트스코그는 스스로 쓴 schmaltz로 10대 소녀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두 사람은 70년대 초반 그녀의 솔로 프로듀싱에 함께 일했고, 안데르손은 비슷한 펜으로 그의 파트너인 린스태드를 위해 홈통 히트곡을 제작했다. 네 사람 모두가 재능과 경험을 모아보니 결과는 빽빽하게 채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대인들은 처음에는 외부 프로듀서/송라이터에 의존했지만, ABBA는 대체로 자급자족적이었다. 매니저 스티그 앤더슨의 약간의 영어를 보조해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그들만의 가사를 썼다. 그들은 스틸리 댄과 함께 연주했던 것과 같은 숙련된 세션 음악가들과 함께 그들을 편곡하고, 제작하고, 노래하고, 공연했다. ABBA는 대부분의 MTV 이전 공연자들보다 더 많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투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녹음실은 그들의 집이었고, 그들은 스톡홀름의 폴라 스튜디오를 지은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퀸과 10cc처럼 ABBA는 새롭게 확장된 멀티 트랙 레코딩의 교향곡과 합창의 가능성을 악용한 배열을 빠르게 구축했다. 직설적으로 보이는 고리의 풍부한 질감 렌더링은 "이렇게 싸게 보이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돌리 파튼의 공리와 맞먹는 것이었다.'''
'''자꾸 귓전에 맴도는 곡조에 대가인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쓴맛과 단맛이 뒤섞인 상당한 조화 복잡성을 자랑했다. 모타운의 클래식 작사가들처럼 아픈 가사("S.S," "Money, Money, Money")로 날카로운 멜로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뛰어났고, 때로는 정반대의 조합("I Have a Dream," "Chiquititita")으로 슬픈행복함에 빠져들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의 가장 행복한 히트곡들에도 몇 가지 이상의 블루 노트가 포함되어 있다. "댄싱 퀸"의 희열적인 현악과 리듬을 벗겨내고 그들의 유일한 미국 차트 토퍼는 훨씬 슬픈 곡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황홀함을 느끼도록 배열되어 있다. 하모니가 '탬버린의 박자를 느껴라, 오 그래' 후렴구절에 맞춰 최고조에 달할 때, 음 사이의 프리송은 가사에 불균형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삶은 그들의 상황보다 훨씬 더 큰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노래방에서 그것들을 시도했던 여러분 중 누구나 이미 알고 있듯이, ABBA의 클래식들은 도전적일 수 있다. 이것은 메릴 스트립이 아닌 ABBA의 주크박스 뮤지컬 맘마미아!의 영화 버전에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펑크와 힙합은 많은 현대 팝의 멜로디적 복잡성을 거의 감소시켰는데, 특히 이 시구들에서는 곡이 현재 한계 간격 내에 있는 소수의 음표들 사이에서 잘 조율되는 경향이 있다. ABBA의 구절은 오늘날의 전형적인 후렴구보다 상당히 멜로디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그들은 소프라노 펠트스코그와 메조소프라노 린스태드가 각각 일반 록커들보다 더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어졌다. 종종 온전한 합창단으로 개조된 그들의 목소리는 프레디 머큐리가 퀸의 가성소리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와 초인적인 조화를 이루었을 때와 같이 그들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정렬되었다.'''
'''ABBA의 음악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행복한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북유럽의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꽤 슬펐을 때도, 우리는 항상 기쁨에 넘친 것처럼 들렸다.'''
― 앙네타 펠트스코그#
그야말로 팝 음악의 마스터라고 해도 될 정도로 완천제 스타일의 팝 음악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ABBA의 네 명의 음악가들과 그들의 매니저인 스티그 앤더슨과 함께한 공동 음악 기간 전에도 자신만의 음악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그룹에는 광범위한 음악 레퍼토리가 알려져 있다. 또한, ABBA의 모든 아티스트들은 상업적인 엔터테인먼트 음악의 다양한 스타일들의 디자인, 작곡, 제작, 해석하는 데 수년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4명의 음악가들이 이미 그들 자신의 곡을 썼었지만, ABBA에서는 오직 안데르손과 올바에우스만이 송라이팅 팀을 구성했는데, 특히 안데르손은 작곡을 하고 올바에우스는 가사를 썼다. ABBA의 음악적 롤 모델은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치 보이스였다. 또한 옛 스웨덴 민요들, 그리고 고전 작곡가 모차르트, 베르디, 바흐도 그들의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
ABBA의 독특한 사운드는 당대 최고의 팝 사운드로 여겨졌으며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오늘날에도 ABBA의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으로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상업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모국인 스웨덴의 경우에 더 그랬다. 음악학자인 Per F. Broman은 "ABBA의 문제는 실력이나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업적이라는 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업성이 강한 이지 리스닝 음악이 ABBA가 추구했던 장르였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70년대 전성기 당시 ABBA를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체된지 수 십년이 지난 후에도 ABBA의 생명력이 꺼지지 않자 ABBA를 긍정하는 평론가들도 많이 생겼으며, 2010년에는 그 영향력을 인정받아 팝 밴드 임에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14] 그들은 그룹 경력 이전에 다양하게 활동했던 음악적 배경 때문에, 그들은 초기 몇 년 동안 다양한 음악 장르들을 꾸준히 실험했다. 대표적으로 'People Need Love'나 'He Is Your Brother'와 같은 초기 작품들은 1960년대 후반의 'Flower-Power- 시대'의 영향을 여전히 들을 수 있다. 그들은 'Hasta Mañana' 같은 슈팅발라드에서부터 'Honey, Hone', 'I Do, I Do, I Do, I Do, I Do'와 같은 레게 팝과 트로피컬 러블랜드 스타일의 팝 음악에서부터 'Waterloo'나 'So Long' 같은 록 노래까지 다양한 팝 음악들을 다루었다. 그들은 또한 'Watch Out', 'Sitting In The Palmtree', 'King Kong Song' 같은 뛰어난 곡들을 제작했으며, 또한 다소 실험적인 팝을 제작했다. 1975년 3월에 제작된 'SOS'와 'Mamma Mia'는 결국 ABBA 특유의 고유한 음악 스타일을 찾게 만들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꾸준히 팝으로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 콤비의 콜라보레이션 과정은 종종 "영감적이고 극대주의적", "완전 완벽주의"로 묘사된다. 작곡하기 위해, 두 음악가들은 주로 스톡홀름의 작은 샤이어 섬 비고스에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음악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악기(기타와 피아노)에서 악기와 조화로 몇 시간 동안 함께 연주했다. 그들은 가끔 간단한 영어 단어나 구절을 불렀지만, 그 효과는 어떤 노래인지 구상하기 위해서 임시로 하는 것이고 나중에 나온 노래와 거의 맞지 않았다. 둘 다 흥미롭고 직관적인 접근 방법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것을 완성할 때까지 노래를 계속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안데르손과 올바에우스는 글을 읽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새로운 곡들을 창시하여 나중에 그들을 도와주는 스튜디오 레코딩 프로듀서들이 더 많은 것을 위해 가사들을 외울 수 있게 하였다. 이 방법에 대해, 두 아티스트들은 나중에 "작품들은 이미 태어날 때 그것을 잘 기억할 수 있을 때에만 정말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멜로디를 결합한 후, 울바에우스는 주로 그 멜로디에 맞는 기본 텍스트를 썼다. 울바에우스는 각각의 단어와 가사를 멜로디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하여 언어의 멜로디가 그 노래의 멜로디와 크게 일치하도록 하였다. 스웨덴어가 모국어인 울바에우스는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영어 텍스트를 완성한 후, 여전히 모국어에 의해 필요할 경우 검토되었다. 그들의 매니저인 스티그 안데르손은 초기에는 음악의 일부 관여했다. 일부의 노래 가사나 일부 가사의 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초기 커리어에, 단순하고 때로는 도전적이지 않은 가사들인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올바에우스는 보다 도전적이고 때로는 심오한 작사를 했다. 'The Winner Takes It All'의 가사는 그의 최고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노래를 종종 ABBA의 두 커플의 관계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의 삶과 유사함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올바에우스에 따르면, 그 노래는 그가 작사한 유일한 자서전 노래라고 한다. 부모의 관점에서 자신의 자녀들의 빠른 성장을 주제로 한 감성적인 발라드는 그의 딸 린다에게 바쳐졌다. 비록 그들의 노래에는 스트록과 레프레인이 간단한 변화로 따르는 전형적인 기본 구조가 있지만, 이러한 구조를 완성한 노래 'Intermezzzo No.1'에서 그들의 작곡 능력을 들을 수 있다. 또한 "The Name of the Game"와 같은 노래들은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곡을 작곡하게 된다. 제작 과정에서, 그들은 결국 그들의 곡과 소리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악기들 외에도 다양한 전자기타, 베이스 기타, 피아노, 드럼으로 구성된 안데르손과 울바에스는 기존의 오케스트라의 악기와 다양한 사운드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전자 음악을 추가했다.
그들의 음악적 동반자인 음향 엔지니어 마이클 B는 정교한 스튜디오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테이프에 음성과 악기를 녹음하여 다양한 곡의 변형을 만들었다. 일부 소리 요소를 느리게 하거나 시간을 약간 단축시켰다. 그는 미국 음악 프로듀서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따라서, ABBA 노래에는 이러한 제작 기술을 알지 못하면 절대 카피 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소리 요소가 생겼으며, 따라서 그들의 노래들은 독특하고 특이한 소리를 얻게 되었다. ABBA는 현대 스튜디오 기술이 ABBA 음악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함으로써 그들의 타이틀 제작에 항상 많은 돈을 투자했다. 그들은 유명한 녹음 스튜디오로 가서 1977/1978년에 스톡홀름에 있는 Polar Music Studio라는 자신만의 녹음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미국 시장에서 더 성공적이고 초기 '80년대 팝'의 전형적인 소리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그들은 몇몇 녹음들을 위해 마이애미에 있는 크리트리아 스튜디오에 가서 최고의 음악 프로듀서들과 협력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ABBA는 현재 스튜디오 기술의 최신 수준인 높은 엔터테인먼트의 음악을 제작했다. 그러나 새로운 음악이 이미 녹음된 노래와 너무 비슷했을 때, 그것은 전혀 제작되지 않았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ABBA의 미공개 노래 리스트이다. 그들의 예술적 창조와 정교한 제작 방식 때문에, ABBA는 오늘날 현대 팝 음악의 공동 창시자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3.2. 세계적인 성공
비영어권 그룹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최초의 그룹이다. 또한 ABBA의 대단한 점은 그들의 음악이 그 시대의 국한된 인기가 아닌 '''시대를 초월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인 ABBA의 인기는 상업적인 측면 외에도, 이전과 이후에도 ABBA와 같은 유사한 성공을 거둔 스웨덴이나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다른 밴드가 나오지 않고 있다. ABBA 이전의 스웨덴의 음악가의 성공은 1950년대 이후 대부분 그들의 나라에만 한정되어 있었다.'''이 스웨덴 그룹은 40년 전 10월 세계무대에 뛰어들었고 여전히 가장 성공적인 밴드 중 하나이다. 70년대 후반 상업적으로 절정에 달했던 ABBA는 볼보 다음으로 스웨덴 수출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영어권 밖의 다른 나라에서의 음악가의 전례 없는 인기였다. 한편, 현재 전세계 5400만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공연되고 있는 맘마미아 주크박스 뮤지컬에 의해 엄청나게 활성화되고 추진되어, 이 밴드의 음반은 계속해서 팔리고 있다.'''
국제 음악 시장, 특히 영어 음악 시장에서 성공 할 수 있었던 이유는 ABBA의 매니저인 스티그 안데르손과 멤버 벤뉘 안데르손, 비에른 울바에우스의 빠른 판단에 나올 수 있었던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ABBA는 폭 넓은 국제적인 팬들의 명성을 얻기 위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하는 것이 빠르게 목적지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처음 몇 년 동안 ABBA의 많은 히트곡들이 등장했다. 스티그 안데르손은 매니저로서 전 세계를 발판을 이용하여 모든 시장에서 싱글곡들을 선보였다. 1973년, 그들의 조국인 스웨덴 밖에서의 첫 번째 성공이 스칸디나비아와 베네룩스 국가들에서 두드러졌고,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이후, 특히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영국, 호주, 프랑스에서 ABBA의 성공은 어마어마했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아일랜드, 뉴질랜드와 같은 중소 음악 시장에서도 그 밴드는 부분적으로 큰 차트 및 판매 실적을 기록했다. ABBA의 경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1976년 ABBA는 영국, 아일랜드,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각각 3개의 1위 히트곡을 배출했고, 독일과 뉴질랜드에서 각각 4개의 1위곡을, 호주에서는 5개의 1위가 나왔다. 또한 1976년에 적어도 한 개의 싱글이 노르웨이, 스웨덴, 오스트리아, 프랑스 및 스위스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독일에서는 ABBA는 텔레비전에서 다양한 인기 음악 방송에서 정기적으로 프로모션 공연을 했다. 루디 카렐과 함께 진행 중인 밴드와 같은 쇼에서 단골적인 게스트 공연 외에도, 주로 ZDF와 디스코에서 일자 리히터, 라디오 브레멘 음악점 또는 레이너 홀베가 선보인 스타 퍼레이드에 출연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 대접을 받았다.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중 하나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15] 아티스트 중 하나인 ABBA는 총 1,130만 장의 싱글이 팔리며 영국에서는 1974년부터 1981년까지 모든 싱글이 적어도 TOP 10을 기록 했고, 그 중 9개는 1위를 차지했다. 역대 UK 차트에서 가장 많은 1위 곡을 보유한 아티스트 7위이며# 영국에서 가장 많은 싱글을 판 밴드 4위에 올랐다.# 여기에 발표된 앨범은 1982년까지 모두 1위를 기록했다. 지금까지 영국에서는 총 1,700만 장의 ABBA 앨범이 판매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무기한 휴식까지 영국에서의 어마어마한 인기로 그들의 공연과 인터뷰, 총 15개의 콘서트는 매년 화제를 몰고 다녔다. 위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1992년 발매한 ABBA의 베스트 앨범 'ABBA Gold'는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3,100만 장 이상이 팔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며 영국에서만 558만장이 팔리며 역대 2번째로 영국에서 많이 팔린 앨범이다.[16] 심지어 이 앨범은 2020년 현재 영국 앨범 차트에서 966주 동안 차트에 진입하며 역대급 롱런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기록은 영국 음악 사상 최장 기간 신기록이다.[17] 2020년 11월 1주차 기준 이 앨범은 무려 29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2020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24위,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된 앨범 24위#, 2010년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46위[18]#를 기록하며 영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스테디셀러 앨범 반열에 올랐다.
ABBA의 음악을 사용한 뮤지컬 맘마 미아는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초대박을 기록해 2020년 기준 역사상 가장 흥행한 뮤지컬 6위를 기록하고 있다.# 2020년 현재 이 쇼는 웨스트엔드 역사상 7번째로 오래 공연된 뮤지컬, 브로드웨이 역사상 9번째로 오래 공연된 뮤지컬을 기록하고 있다. 또 전세계적으로도 롱런을 기록하는 중이다.[19] 이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맘마 미아!(2008년 개봉)와 맘마 미아! 2(2018년 개봉) 역시 모두 전세계에서 대박 흥행을 기록했다. 그중에서 영국에서 초대박 흥행을 했는데 1편은 2008년 흥행 1위, 2편은 2018년 흥행 2위[20] 를 기록하며 성공했다. 영국 이외에도 유럽권, 오세아니아 전역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그룹이다. 베스트 앨범 ABBA GOLD는 이 곳에서도 불티나게 팔린 앨범으로 독일에서는 250만 장 판매, 스위스에서도 50만장 판매, 오스트리아에서는 397주 동안 차트에 올라 역대 2번째로 롱런한 앨범이다. 스웨덴에서는 2016년 10월 이 앨범이 6번째 베스트 차트 앨범으로 등재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이 앨범은 역대 네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다. 호주에서 이 앨범은 역대 네 번째로 많이 팔린 베스트 앨범이다.
반면, ABBA는 활동 당시 미국에서는 큰 인기를 이루지 못했다. 1972년부터 미국 음반인 플레이보이 레코드사는 그 밴드의 첫 음반을 발매했지만 모두 차트에 도달하지 못했다. 1974년, 스티그 앤더슨은 애틀랜틱 레코드와의 3년 계약을 체결하여 그 밴드가 해체될 때까지 모든 음반을 판매했다. ABBA는 1974년, 1975년, 1976년, 1978년에 그 곳에서 프로모션 투어를 했지만, 앨범 중 어느 것도 톱 20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들의 싱글들의 성공도 1위 히트곡과 3위 히트곡으로 크게 제한되었고, 6개가 싱글이 상위 20위에 올랐다. 벤뉘 안데르손은 1976년 인터뷰에서 유럽의 밴드에 대한 미국 음악 시장 진입이 일반적으로 유럽이나 호주 음악 시장보다 더 어렵다는 평가를 했다. 미국에서는 음악 비디오와 TV 출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특히 한 그룹의 라이브 출연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ABBA의 1979년 미국 투어 이후에도 ABBA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의 영화 맘마 미아!의 대히트로 ABBA의 인지도와 인기가 크게 상승한다. 베스트 앨범 'ABBA Gold'는 미국에서 총 580만장이 팔렸고, 닐슨 음악 시대(1991년 시작)의 19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앨범이다.# 동양권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일본에서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린 그룹이다. 일본에서 그들의 성공은 특히 1978년 가을의 프로모션 투어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의 텔레비전 쇼와 스페셜은 2009년에 일본에서 ABBA라는 제목으로 DVD로 발매되었다. 일본에서 진행된 ABBA의 콘서트는 1980년에 완전히 매진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현재 일부 획득하기 어려운 ABBA 라이선스 앨범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그룹이다. 70년대 말-80년대 초 당시, 한국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미)다큐멘터리 영화 ABBA (1977)가 개봉한 일은 있다. 외국 음악인의 영화, 특히 전기 영화나 극영화도 아닌 다큐멘터리를 극장 개봉까지 한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3.3. 이름
ABBA는 그들의 커리어 초창기에 성공에 대한 불확실로 확정된 그룹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그들의 4명의 이름들을 활동명으로 썼다. 그들은 "Bjorrn & Benny, Agnetha & Anni-Frid", "Anni-Frid, Agnetha, Benny, Bjorrn", "Bjorrn + Benny + Agnetha + Frida" 또는 "Bjorrn + Benny + Anna + Frida"라고 불렸다. ABBA의 첫 번째 오펠 차 앞 유리창에는 1973년까지 "BJÖRN BENNY AGNETHA FRIDA"가 쓰여 있었다. 미국의 초기 음반회사에서는 "Bjorrn & Benny, Agnetha & Anni-Frid"의 Agnetha가 부분적으로 빠져서 이름이 불리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앙네타 펠트스코그가 그 당시 CBS-Cupol 레코드 회사로부터 독점 계약을 한 가장 성공적인 소속 스타였기 때문에 펠트스코그의 이름에 대한 라이선스 수수료를 CBS-Cupol에게 ABBA의 소속 회사 폴라 뮤직이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계약관계는 ABBA가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 1975년 말까지 계속 적용되었고, 따라서 나중에 펠트스코그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CBS-Cupol에 높은 대금 지급을 해야 했다. 또 다른 여성 멤버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의 EMI Music 음반 계약은 1972년 만료되었다. 1970년대 초, 네 멤버들은 스웨덴 민속 공원에서 몇몇 음악 페스티벌에서 "Festfolk" 또는 "Festfolket"라는 이름으로 여러 번 공개적으로 공연했고, 스웨덴 클럽과 술집에서 "Engaged Couples"라는 이름으로 공연했다. 멕시코에서는 1972년과 1973년에 그들의 레코드 회사는 단순한 그룹 이름인 'Los Suecos'로 처음으로 이름지었다. 그들의 조국인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노래가 성공한 후에야 적절한 밴드 이름이 찾아졌다. 특히 이 들의 매니저인 스티그 안데르손은 언론에게 항상 "Bjorrn & Benny, Agnetha & Frida"라는 이상한 이름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에 점점 더 화가 났다.
1973년 3월 한 스웨덴 잡지에서는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진 그룹에 대한 이름 제안을 제출하라는 요청을 발표했다. 이때 등장한 그룹명이 바로 "Friends and Neighbors", "Alibaba", "BABA"라는 이름의 제안이 들어온다. 1973년 여름, 마침내 매니저 스티그 안데르손의 제안으로 그 그룹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스웨덴 예비 결정전에서 이 들의 이름 앞자리를 딴 "ABBA"라는 이름을 정했다. 이 간단하고 매우 두드러지고 간결한 단어 "ABBA"는 앙네타(Agnetha), 비요른(Björn), 벤뉘(Benny) , 애니(Anni) → ABBA의 4명의 밴드 멤버들의 초기 문자에서 유래한 약어이다. 때때로 밴드 이름 구성도 역순(애니, 벤뉘, 비요른, 앙네타)으로 해석되기도 했다.[21]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에서도 그 이름은 스웨덴에는 Abba Seafood라는 크고 잘 알려진 식품 회사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곤혹스럽다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안데르손은 "ABBA"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 이 회사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다. "ABBA"라는 용어는, "아버지의"를 뜻하는 성경 용어이기도 했다. 이 단어의 의미는 1977년 영화 ABBA에서 한 노인의 인터뷰 장면에서 언급된다. 이 밴드의 이름은 국제적으로도 매우 빠르게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거의 모든 언어에서 쉽고 동일한 방식으로 발음되고, 항상 알파벳순으로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3.4. 로고
밴드 이름이 ABBA로 결정된 후, 처음에는 커버, 포스터, 기타 프로모션 자료에만 타이포그래피로 그려졌다. 1976년 2월 ABBA는 독일 음악 방송 디스코에 출연하기 전에 사진작가인 볼프강 힐레만과 인근 스튜디오에서 독일 청소년 잡지 브라보(Bravo)의 일부 사진 작업을 의뢰받았다. 여기에서 네 명의 밴드 멤버가 각각 큰 은색 이니셜 문자를 들고 촬영하는 촬영 현장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 사진들에서 안데르손은 두 번째 자리에 서서 실수로 "B"를 거꾸로 들고 머리 위로 올렸지만, 사진 촬영이 끝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사진 작가는 이 밴드 멤버들에게 그 오류를 알려준 후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잠시 대화를 나눴고, 오히여 이 사진이 마음에 들어 이 로고를 소유하기로 결정하고 힐레만에게 "대형 마케팅 아이디어"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뉴스 고딕볼드의 그래픽 디자이너 룬 쇠데르크비스트는 반사형 "B"로 ABBA 철자를 개발하여 두 "B"가 두 "A"에 조화롭게 접근한다고 설명했다.
ABCA 로고는 1976년 8월 13일 공식적으로 발효됐고 등록됐다. 싱글 'Dancing Queen' 이후 지금까지 모든 공식 ABBA 레코드, 출판물 및 팬 기사에 이 로고가 사용되고 있다. CD 싱글 'Dancing Queen'과 1992년 베스트 앨범 'ABBA Gold'가 출시된 이래, ABBA 로고는 'Helvetica Roman' 글꼴로 개발된 버전도 사용되었고, 문자가 좀 더 작았지만, 굵기가 좀 더 넓었다. 그러나, Gold 앨범의 이후 앨범 발매에서는 이전 오리지널 로고가 다시 사용되었다. 반사형 "B"로 표시된 ABBA의 로고는 AC/DC의 로고와 롤링 스톤스의 키스 로고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음악 그룹 상표 중 하나가 됐다.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로고가 완성된 직후 새로운 ABBA 글꼴을 상표로 보호하도록 하였으며, 따라서 종종 추가 등록 기호인 ®를 부착하기도 한다. ABBA 로고가 상표로 등록된 후, 이 로고의 저작권은 ABBA 소유의 마케팅 회사가 소유한 권리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일부 오리지널 사운드 미디어, 다양한 라이선스 및 비공식 사운드 미디어에서는 ABBA 로고가 아닌 오리지널 로고를 그래픽으로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
4. 멤버
4.1. 벤뉘 안데르손
안데르손은 1960년대 스웨덴의 가장 큰 팝 그룹인 헵 스타즈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ABBA를 결성하고 그의 음악은 전세계적인 히트를 친다. 또한 맏형이기도 하다.
ABBA 이후 안데르손은 울바에우스와 함께 작곡을 계속했다. 그들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팀 라이스와 함께 쓰여진 뮤지컬 체스였다. 일레인 페이지, 바바라 딕슨, 머레이 헤드, 스웨덴인 토미 쾨르버그와 비외른 스키프스의 보컬이 들어간 체스 컨셉 앨범은 1984년 10월에 발매되어 전세계적으로 200만장이 팔렸다. 페이지/딕슨 듀엣곡 'I Know Him So Well'이 영국 차트 1위에 올랐고, 머레이 헤드의 'One Night in Bangkok'은 빌보드 차트 3위를 기록한다. 체스는 1986년 5월 런던의 웨스트엔드 프린스 에드워드 극장에서 무대에 올라 약 3년 동안 공연되는 등 긍정적인 평을 받았으나 브로드웨이에서는 부정적인 평을 받아 2개월동안 공연하고 막을 내린다. 안데르손의 다음 뮤지컬 프로젝트는 맘마 미아다. 이 뮤지컬은 ABBA의 곡 중 24곡을 중심으로 제작된 뮤지컬이다. 영국에서는 1999년 4월 웨스트엔드 초연,미국에서는 200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다. 맘마 미아!는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초대박을 친다. 2020년 기준 역사상 가장 흥행한 뮤지컬 6위를 기록하고 있다.#
안데르손은 현재 베니 안데르손스 오르케스터(Benny Andersson's Orkster, BAO)라는 밴드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스웨덴 동료 헬렌 쇠홀름, 토미 쾨르베르크와 함께 연주하고 있으며, 때로는 안데르손이 작곡한 새로운 소재의 음악을 연주한다. BAO는 스웨덴에서 5개의 앨범을 발매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모두 히트 싱글을 포함하고 있다. BAO는 2009년 스예홀름(Sjöholm)이 부른 노래 '두어르민맨("You Are My Man")으로 243주 동안 스벤스크토펜 차트 신기록을 달성했다.
2018년에는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안데르손이 솔로 피아노로 연주한 ABBA 노래, 체스의 노래의 원곡 모음집 'Piano'를 발매하기도 했다.
4.2. 비에른 울바에우스
울바에우스는 ABBA로 국제적인 인기를 얻기 전 일찍이 "웨스트 베이 싱어즈"로 알려진 스웨덴 민속-슐라거 밴드 후테타니 싱어즈의 멤버로 활동했는데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한 밴드였다. 이후 ABBA를 결성하고 세계적인 음악가로 발돋움한다. 1982년 ABBA가 활동을 중단한 후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작사가 팀 라이스, 크리스티나 프랑 뒤베믈라[22] 은 맘마 미아!(ABBA 노래 원작)와 협연하여 뮤지컬 체스를 만들었다.
울바에우스는 또한 안데르손과 함께 영국 작곡가, 작곡가, 작가 아카데미의 '특별 국제 공로상', 스웨덴 산업 통상부의 "음악 수출상"(2008), 스웨덴 음악 출판협회(SMFF)의 "평생 공로상"를 공동 수상했다. 울바에우스는 2019년 스웨덴 작곡가 안드레아스 칼손과 함께 토마스 레딘의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 엔델 아브 미트 헤헤르타(영어: A Piece of My Heart)의 영어 더브를 주선했다. 울바에우스는 레딘의 노래에 영어 가사를 쓰도록 요청받았다. 그들은 오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다. 2020년 비외른 울바에우스는 국제작사가·작곡자연맹 CISAC의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4.3.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
린스태드는 ABBA 이전에도 스웨덴에서 유명한 가수였다. 스웨덴인인 다른 멤버들과 달리 노르웨이인이다. 다만 노르웨이 국적은 두번째 남편인 노르웨이 귀족과 결혼하면서 취득한 것으로 원래는 스웨덴인이다.(다만 후술하듯이 어머니가 노르웨이인이라 노르웨이 혈통이 반 섞여있다.)
ABBA 이후에도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1982년 린스태드는 제네시스 드러머 겸 보컬리스트 필 콜린스의 앨범 'Something's Going On'을 프로듀싱했고, 그해 8월 히트 싱글과 영상 'I Know Has Something On'을 공개했다. 이 싱글은 벨기에와 스위스에서 1위 히트곡이 되었으며, 호주, 오스트리아, 핀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웨덴에서 톱10 히트곡이었다. 이 곡은 미국에서도 13위를 정점으로 성공적임을 증명되었다. 스베리게스 TV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전체 녹화 과정을 촬영함으로써 기록하였다. 결과는 모든 뮤지션뿐 아니라 린스타드, 콜린스, 울바에우스, 안데르손과의 인터뷰 등 1시간짜리 TV 다큐멘터리가 됐다. 이 다큐멘터리와 앨범의 프로모션 비디오는 Frida – The DVD에 포함되어 있다.
1986년 그녀는 스위스로 이주하여 남자친구인 건축가이자 독일 귀족의 후손 하인리히 로이스 공과 함께 프리부르에 있는 그의 성에서 살았다. 후에 스웨덴 국왕이 된 칼 16세 구스타프와 같은 기숙학교의 학생이었던 플로엔의 루스 왕자와 결혼함으로써, 린스태드는 스웨덴 왕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결국 스웨덴의 실비아 좀멀라트 왕비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남편은 1999년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환경운동가이며 1992년, 린스태드는 스웨덴의 환경단체 "Artister För miljön"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4.4. 앙네타 펠트스코그
ABBA의 보컬. 실질적 메인 보컬이라 볼 수 있으며 상당히 뛰어난 보컬을 자랑한다. 또한 막내이기도 하다.
ABBA 이후에도 솔로 활동을 이어가며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유럽에서 나름 히트를 친다. 1983년 발매한 솔로 앨범 'Rapp Your Arms Around Me'은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히트를 기록한다. 타이틀 곡은 벨기에와 덴마크에서 1위를 차지하며 네덜란드, 남아공, 스웨덴에서 톱5에 올랐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톱20에 진입하는 등 성공적인 히트곡이었다. 이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20만 장이 팔렸다. 세번쨰 앨범인 'I Stand Alone'도 역시 영국에서 1위를 거두며 인기를 기록했다. 그러나 펠트스코그는 1988년 초 이 앨범에 대한 홍보 직후, 은퇴를 선언하고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2004년, 펠트스코그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앨범 'My Coloring Book'의 발매와 함께 성공적인 컴백을 한다. 이 앨범은 1960년대 그녀의 10대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노래들의 커버곡들을 포함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앨범 차트 12위에 오른다. 2013년에는 솔로 앨범 'A'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호주, 독일, 스웨덴, 영국을 포함한 많은 유럽 국가들의 앨범 차트 톱10에 진입했다.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
5.2. 베스트 앨범
5.3. 라이브 앨범
5.4. 박스 셋
5.5. 싱글
6. 아바에 대한 말들
'''ABBA는 세계 최고의 밴드다. 경쟁자가 없다.'''
'''ABBA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려 퍼지는 70년대의 대중문화에 파장을 일으켰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인기는 여전히 강해지고 있다.'''
'''팝에 관한 한, ABBA는 비틀즈보다 지난 수십 년간 훨씬 더 영향력이 있다.'''
'''ABBA는 팝 그룹의 표준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1997년 NBA 파이널에서 나는 코트를 밟기 전에 ABBA의 Dancing Queen을 4번 듣곤 했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내가 선수가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ABBA가 그들의 음악에 순수한 기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0년대 중후반에는 ABBA만큼 훌륭한 팝송을 쓰고 프로듀스하는 사람이 없었다.'''
7. 박물관
스톡홀름에 ABBA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섬[23] ’으로 불리는 스톡홀름 유르고르덴(Djurgarden) 지역에 자리 잡은 ABBA 박물관은 2013년 5월 7일 개관했다. ABBA의 팬이라며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영국 리버풀의 비틀즈 박물관에서 영감을 받아 2006년 설립자 울프 웨스트먼과 에와 위겐하임 웨스트먼에 의해 처음 발표되었다. 스웨덴 스톡홀름 여행시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곳이며 베스트 어트랙션에 꼭 포함되어 있는 곳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팬들이 멤피스, 비틀즈 팬들이 영국 리버풀을 찾듯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은 ABBA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모여드는 음악도시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스톡홀름 시립 미술관의 토발드 올슨선데린 기획담당은 “많은 시민은 ABBA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은 스톡홀름 대중문화의 큰 부분이다. 많은 외국 관광객이 ABBA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다”고 얘기했다. 박물관과 도보 투어, 보트 관광이 대표적이다. 개장 전날 세계 곳곳에서 찾아든 ABBA 팬들이 박물관 앞에 모여 밤새 아바 노래를 부르며 개장 축제를 벌였고, 오픈과 동시에 3개월치 입장권이 매진될 정도로 화제였다. 2013년을 개관 이후로 2018년까지 약 150만 명의 방문객들이 방문했고, 이 방문객 중 70% 이상이 외국에서 왔다. 이 박물관은 ABBA의 그간 역사, 앨범, 의상 등 모든것을 총 망라한 곳이다. 볼거리도 상당히 많아 ABBA의 관한 엔터테인먼트는 가득하다. 볼 수 있는 기념품이 풍부하고 ABBA의 역사의 모든 세부 사항이 있다. 스튜디오, 사무실, 휴가 주택에 이르기까지 밴드의 유명한 장소를 다양하게 재현했다.
총 3개 층의 ABBA 박물관은 1970년대 활동 당시 착용한 화려한 의상, 모자, 부츠 등 40여 점을 전시하는데 드레싱룸을 마련해 이들의 의상을 관람객들이 직접 입어볼 수 있게 했다. 아바의 시그너처인 별 모양 기타를 비롯한 20여 점의 악기도 선보인다. 비요른 울바에우스는 열한 살 때 동네 목수가 만들어준, 그의 음악 인생 ‘첫 기타’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제는 60대가 된멤버들의 현재 모습도 만날 수 있다. 4명의 멤버 각자가 아바에 얽힌 추억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그동안 베일에 감춰졌던 이별과 이혼 등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담담하게 풀어낸다. 멤버 비요른 울바에우스와 당시 아바의 스타일리스트였던 잉마리에 할링(Ingmarie Halling)이 뮤지엄 기획에 직접 참여해 ‘리얼리티’를 높였다. 아바 멤버들에게 의미 있는 녹음실과 분장실, 함께 떠난 별장 등을 전시장에 재현한 것. 멤버들이 함께 모여 작곡을 했던 빅소(Viggso) 섬의 오두막과 1982년 은퇴 무대인 스웨덴 아레나 아이스하키 링크 재현에 가장 공을 들였다고 한다. 기존의 음악 뮤지엄이 작고한 뮤지션을 추억하는 ‘기념관’인 데 반해 아바 뮤지엄은 실제 그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요소를 강조했다. 전시장에는 데뷔곡 ‘Ring, Ring’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빈티지 전화기가 설치돼 있는데 전화번호는 오직 4명의 멤버만이 알고 있다. 운 좋은 관람객은 그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을 수도 있다. 피아노가 놓여 있는 전시장은 베니 앤더슨의 스튜디오와 연결해 놓았다. 앤더슨이 그의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생중계’하거나 관람객이 피아노를 치면 그가 답가를 연주할 수 있게 했 꼭 2차원적으로 전시를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방문객이 실제로 ABBA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직접 화면을 보면서 춤도 출 수 있다. 음악을 듣고, 비디오를보고, 나중에 다운로드 할 수있는 음악을 믹스하고, 심지어 자신을 연주 할 수도 있다. 또한 실제로 밴드와 함께 서서 공연 할 수있는 홀로그램 무대도 있다.
실내에 들어서면 ABBA 로고 ‘공연 전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ABBA는 전성기 때 공연 마지막 두 곡에서 이 소품을 이용했다. ABBA의 조명 디자이너였던 패트릭 우드로프는 “깡통 안에 전구를 설치한 단순한 소품이다. 공연 때 끝에서 두 번째 곡에서는 전구 불을 그냥 환하게 켰고 마지막 곡에서는 전구 불이 반짝이도록 했다. 관객은 여기에 늘 열광했다”고 얘기했다. ABBA의 매니저였던 스티그 안데르손 소유로 시내에 위치했던 폴라(Polar) 뮤직 스튜디오는 ABBA 사운드가 확립된 장소로 유명하다. 도시개발 계획과 함께 2004년 철거됐는데, 박물관은 원모습을 복원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1976년 발표한 네 번째 정규 음반 ‘어라이벌(Arrival)’ 표지에 사용된 벨47기종 헬리콥터를 타고 관람객이 사진 찍는 공간도 늘 인기다. ABBA 박물관은 주제와 상황에 따라 크고 작은 33개 전시공간을 마련해 밴드의 역사와 그들의 음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관람객이 ABBA의 다섯 번째 멤버가 돼 기존 멤버 네 명과 함께 관람하도록 설계했다. “무엇보다 인터랙티브(interactive) 관람에 주력했다. 방문객은 입장과 동시에 개인 ABBA 홈페이지가 생긴다. 방문객이 박물관 안에서 부른 ABBA 노래, 입은 ABBA 의상 등은 모두 저장된다. 전시된 피아노는 베니의 개인 스튜디오 피아노와 연결돼 있어 그가 실제로 연주하면 전시된 피아노가 같이 연주되도록 설계됐다.” ABBA 박물관 카타리나 포켄하브 홍보이사의 설명이다. 박물관 관광 외에도 약 2시간 길이의 ABBA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도보관광도 있다. 크게 늘어난 ABBA 팬들의 요청에 따라 2010년부터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ABBA의 흔적이 담긴 명소를 직접 보면서 스톡홀름의 역사까지 자연스럽게 배운다는 점이 매력이다.
이렇게 마담 투소같은 밀랍인형도 있다. 이 인형을 끝으로 박물관 관람은 종료된다.
8. 여담
- ABBA라는 이름은 자신들의 이름 첫 글자를 이니셜로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룹 결성 당시 그룹 이름은 4명의 이름을 모조리 나열한 Björn, Benny, Agnetha & Anni-Frid로, 이 이름은 1973년 첫 앨범 Ring Ring에 쓰였다. 이런저런 서류에 그 긴 이름을 적다가 지친 그들의 작사가이자 매니저인 스틱 안데르손은 멤버 이름의 머릿글자만 따서 ABBA로 적었고, 결국 그룹의 이름으로 굳어져 1974년부터 ABBA란 이름을 내걸게 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당시 스웨덴에서 가장 큰 통조림 회사(아바 해산물)[24] 의 이름과 우연히 같게 되었고, 결국 그 회사와의 협상 끝에 이 이름을 그룹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ABBA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애정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스톡홀름 알란다 국제공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대형 스크린 속 아바이며 스칸센 민속원에서 태어난 수컷 곰 두 마리의 이름은 아바 남성 멤버 이름을 딴 ‘비요른’과 ‘벤뉘’다.
- 디스코그래피를 차례대로 들어보면 알겠지만, 활동 초기에는 남성 멤버 비에른이 자주 리드보컬을 맡거나, 듀엣을 하기도 했는데, 후기로 나아갈수록 여성 멤버들이 주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대표곡도 대부분 여성 보컬이다. 후기의 히트곡들이 대부분 여성 보컬 곡들이라 남성 멤버 두 명은 병풍에 불과한 존재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바의 히트 곡들은 대부분 남성 멤버인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 두 명이서 공동으로 작곡했다. [Does Your Mother Know만 봐도 "비욘(Björn)"이 거의 노래의 대부분을 다 부르고 있다는걸 알수있다.
- 작곡 듀오인 벤뉘와 비에른은 악보를 쓸 줄을 몰랐고, 오직 앙네타만이 할 수 있었다고 한다.(1981년 'Dick Cavett'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 그들이 사용한 악기들은 실험적이었고 즉흥적이었으며, 또한 스튜디오에서 반주녹음에 노래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약은 오히려 훗날 뮤지컬 '맘마미아!'를 제작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먼저 음악이 완성되고 나서 다른 음악가들이 참여한 후 음악을 듣고 악보에 기보를 하고 가사를 추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후반작업에 6개월 이상이 소요되었고, 작곡가들 또한 벤뉘와 비에른이 음원을 먼저 만들고나서 후에 가사를 추가했었다고 밝혔다.
-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굉장한 인기가 있어, 전세계적으로 무려 2억 장 가량의 앨범이 판매 되었다. 국내에서도 인기가 상당한데,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와 세친구 오프닝으로 'I Do, I Do, I Do, I Do, I Do'와 'Honey Honey'가 쓰였다.
- 허나 미국에서의 인기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던 편. 아바의 음악 중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 노래는 Dancing Queen 한 곡 뿐이다. 주 이유 중 하나는 가사는 영어인 반면, 그 당시 멤버들이 영어를 거의 몰랐던 것이 크다. 덕분에 TV 등에 나와 공연을 하는 내내 외운 가사에 집중하느라, 초긴장 상태로 마네킹처럼 서서 노래만 줄창 불러대다보니 노래 외의 퍼포먼스는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 국내에서 다른 가수의 노래가 아바의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한다. "One Summer Night"과 "Summer Night"는 아바의 곡인 "Summer Night City"과 헷갈려서, "Sugar Sugar"는 가사 초반의 "Honey Honey"가 아바의 대표곡 "Honey Honey"와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꼭 한번씩 들어보고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 아바의 멤버들이 살인적인 스웨덴의 세율을[25] 피해 국적을 옮겼다 식으로 잘못 알려진 적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럴 수 있는데도 스웨덴 국적을 유지하여 그 많은 세금을 다 냈다. 나름대로 애국자라면 애국자랄까 스웨덴 국적을 포기한 것은 프리다(노르웨이 출신의 갈색 머리 여성) 뿐이고, 그 이유도 세금 문제가 아니라 아바가 해체한 이후에 프리다가 스웨덴-스위스 혈통의 독일 귀족으로 로이스 대공 겸 플라우엔 백작인 하인리히 루조(Heinrich Ruzzo Prinz Reuss, Graf von Plauen)와 재혼하면서 독일 귀족의 규칙으로 인하여 독일로 귀화했다. [26] 덕분에 그녀의 공식 호칭도 Anni-Frid Lyngstad Prinzessin Reuß von Plauen(독일어)(스웨덴어: Anni-Frid, Prinsessa av Reuss, Grevinna av Plauen, 영어: Her Serene Highness Princess Anni-Frid Synni Reuss, Countess of Plauen)이라는 엄청난 길이의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스웨덴 왕가와의 친분도 생겼다고 한다. 하인리히 루조는 1999년에 스톡홀름에서 병사함으로서 프리다와 사별하게 된다.
- 당시 기준으로 매우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공연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정말로 빡빡했던 당시 스웨덴의 세금제도 하에서 합법적인 세금 공제를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전해진다. 간단히 요약하면, 실생활에선 도저히 입고 다닐 수 없는정도 파격적 의상이어야 공연활동을 위한 무대의상으로 인정받아 비용처리가 가능했기 때문. # 그당시에 그러한 파격적인 옷을 입고 나가서 미국에선 앙네타에게 "가장 섹시한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 라고 농담삼아 질문을 던지자, 앙네타는 "글쎄요, 저는 본적이 없거든요 ㅎ" 라고 농담으로 되받아 쳤다. 이러한 내용은 아바 박물관에도 나와있는 농담이기도 하다.
- 워낙 유명하다 보니 영미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주 ABBA의 노래를 부른다. 주로 많이 부르는 노래는 'The Winner Takes It All'.1, 2, 3, 4, 5, 6, 7, 8, 9
- 1999년 스웨덴에서 4인조 혼성 그룹인 A*Teens(초기에는 ABBA Teens)가 아바의 리메이크 앨범으로 데뷔한 바가 있다. 이후 해체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곡으로는 "Upside Down"이 있다. 한국에서는 KBS 동물 프로그램 주주클럽 시즌2의 엔딩곡으로 쓰였고, 장나라와 성시경의 듀엣곡으로 번안되기도 했다. 그 외 북유럽 팝으로 유명한 경우는 제2의 ABBA에 가장 가까웠던 Ace of Base나 아쿠아(Aqua)가 있다.
- A*Teens의 멤버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 다니 레네발트: 1984년 7월 24일 생. 백금발의 굉장한 미소년인 남자 멤버. 어른이 된 현재는 키가 185cm나 될 정도로 덩치가 좋다.
- 마리 셰르네홀트: 1983년 7월 11일 생. 여성 멤버 중 큰 쪽. 역시 금발이다. 어른이 된 현재는 170cm로 여성 치고는 큰 키이다.
- 사라 룸홀트: 1984년 10월 25일 생. 여성 멤버 중 작은 쪽. 흑발에 입이 독특하게 생겼다. 어른이 된 현재는 165cm이다.
- 아미트 폴: 1983년 10월 29일 생. 동양인처럼 생긴 남자 멤버. 어른이 된 현재는 173cm로 이 당시에 비해 그다지 성장하지 못했다.
- 2013년 5월 스톡홀름에 아바 박물관(ABBA The Museum)이 생겼다. 공식 홈페이지 아바 멤버들에 관한 자료나 소장품이 상당히 많아 관광객들의 필수 체크 코스로 급부상 중이라 카더라.
- 베니는 스톡홀름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 일본에서 몇 차례 공연을 가졌던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내한 공연은 커녕 방한조차 한 적이 없다. 나름 인기있었던 걸 생각하면 아쉬울 따름.
- 1994년 호주 영화 뮤리엘의 웨딩에도 내내 아바의 노래가 나온다. 주인공이 친구와 아바 코스프레를 하고 노래하는 장면이 압권.
- 소설 & 영화 마션의 등장인물인 멜리사 루이스 (Melissa Lewis)가 ABBA의 열성적인 팬으로 나온다.[27] 남편이 ABBA의 1978년도 오리지널 미개봉 앨범을 입수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당연히 매우 기뻐했다. 활동 당시 아바의 앨범은 CD로 나오지 않았다. CD가 상용화된 것이 80년대 초이기 때문. 미개봉 LP판을 구했다니, 크게 기뻐할 만도 하다. 물론 이후에 앨범은 CD로 리마스터링되어 다시 나오긴 했고, ABBA Gold 같은 편집 음반은 CD로 나왔다.
- 멤버들 중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는 레벤스보른 출신이다. 노르웨이에서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해 할머니와 어머니가 일찍이 스웨덴으로 이주해서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프리다는 한동안 아버지(나치 독일군 장교였다고 한다)가 군함 침몰로 사망한 것으로 듣고 자라다가 아바로 유명해진 뒤 독일 잡지 'BRAVO'에서 사실이 폭로(?)되었고 그제서야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참고) 이 부분은 2016년 4월 2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 또한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는 벤뉘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유부녀였고 아이도 둘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상태로 노래를 했었다. 그리고 벤뉘와 이혼하고 나서는 스위스의 귀족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 귀족이 죽은뒤에는 공작부인인 상태로 영국남자와 만나서 같이 산다고 한다. 이러한 점만 보면 엄청난 능력자인것...
- 「The Winner takes it all」은 비에른이 이혼할 때의 심정을 담아서 쓴 곡이라는 루머가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일단 본인은 부인.
- 야구 응원가로 꽤 많은 노래가 쓰였으나, ABBA 측이 모든 응원가 사용을 거부하면서 묻히게 된 노래가 많다. 대표적인게 조인성과 민병헌. 특히 민병헌은 소속팀인 두산에서 ABBA의 요청을 쌩까고 곡을 계속 사용하다 소송 직전까지 가고 나서야 포기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 2000년대 후반 모 백화점의 폐장음악이 ABBA의 "I Have a Dream"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