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망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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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제2대 황제.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체천창운지효순덕문무명단창술대성후택풍공인황제(體天昌運至孝淳德文武明斷創述大成厚宅豊功仁皇帝). 즉위 전에는 완복담(阮福膽)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즉위 후에는 이름을 완복교(阮福晈)로 고쳤다. 연호는 명명(明命)이며 연호를 따서 명명제(明命帝)라 부른다.
1838년 국호를 대남(大南)으로 바꾸었다. 남(南)은 이전 리 왕조 시기에도 북방의 중국과 자신들을 빗대 남제(南帝)에서 칭하는 등 유서 깊은 단어이며 베트남을 나타내는 단어라 보면 된다.
라오스, 캄보디아, 참파를 병합하면서 제정 베트남의 전성기를 누렸고 중앙집권제에 성공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이전에 가륭제를 도와준 프랑스와의 외교, 서양의 문물 수용으로 베트남의 근대화가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생애
2.1. 태자 책봉 논쟁
완복교는 완왕 완복영의 4남으로 진씨(순천고황후, 陳氏) 소생이다. 당시 광남국은 가정을 기반으로 북쪽의 떠이선 왕조와 탕롱을 기점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완복교는 1791년 태어났다. 세 살때 송씨(승천고황후, 宋氏)에게 양자로 들어가 자랐고 1801년 형 완복경이 죽어 태자가 공석이 된 상황에서 1814년 황후 소생의 이복동생과 송황후도 사망하자 태자로 책봉되냐 마느냐에 잠시 논쟁이 생기기도 했다.
신하 여문열(黎文悅)과 여질(黎質)은 완복교가 서자라는 이유로 장손 완복단(阮福旦)을 태손으로 세우도록 요청하며 반대했으나 완복영이 완복교는 송황후의 양자로 들어가 적자로 인정되기에 충분히 태자에 책봉될수 있다고 이유를 들었다. 완복교를 사실상 태자로 인정하려 하자 대신 완복성(阮福誠)은 완복교의 생모가 살아있기에 축문제사[3] 에 모친의 이름을 쓰면 안된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완복영이 말했다.
그리고 송황후의 아들 신분으로 제사를 지내는것이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그를 사실상 원자(元子)로 여겼고 이듬해 정식 태자로 책봉했다.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제사를 드리는 건데 문제가 있는가? 따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2.2. 즉위 후
그리고 아버지 가륭제가 1820년 죽자 이어서 즉위했고 가륭제때 설치된 서원을 폐지하고 문서방(文書房)[4] 으로 바꾸었으며 청나라의 제도를 참고해 관직을 새로이 정하는 개혁정치를 펼친다.
2.2.1. 기반을 다지다
우선 관직 1품부터 9품까지 각각 정(正), 종(從)으로 구분했고 문서방을 내각으로 삼아 각 순무의 3, 4품 관원을 불러 국가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가정성(嘉定城)의 총진(總鎭)을 폐지하고 청의 행정제도를 참고해 전국의 27개 진(鎮)을 30개 성(=1부, 府)로 묶고 그 성 이하에 부와 현(縣), 주(州), 총(總)을 두었다. 가륭제땐 군인들이 지역의 군사와 백성을 관리해 조정의 명령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명명제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였다.
또한 성으로 바꾼 후엔 순무, 포정사, 안찰사, 영병관(領兵官)의 관직을 마련해 조정에서 파견하여 임명시켰다. 순무는 성 내의 정치, 교육을 담당하였고, 포정사는 조세, 정전(토지배분), 징병을 담당하고 조정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안찰사는 영병관을 비롯해 군대를 담당했다.
그리고 중요한 성에 대신을 총독에 임명시켜 순무의 자격으로 시찰과 경계를 호위하게 했다. 소수민족에 대해선 토지를 개척해 귀류하게끔 했고 현지의 추장을 지주로 임명해 그들을 안정시켰다.
송나라의 추밀원, 청나라의 군기처를 참조해 기밀원을 설립했다. 기밀원은 4품 이상의 대신을 파견했고 그 대신들은 임금의 특명을 이행한다는 자격을 표시하기 위해 금패를 착용하게 했다. 그 산하 관료로는 원외랑, 주사, 사무, 편수가 있는데 각 부에서 선발했다.
명명제는 백성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여 하노이(당시에는 북성) 곳곳에서 빈부격차와 도박,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 배무선(裴茂先)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또한 부정부패한 관료를 처벌했다. 이후 십조성훈(十條聖訓)을 반포했고 북성 각지에 지금의 복지관과 비슷한 기관을 설립해 홀아비와 장애인을 데려와 그곳에서 살게 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청나라부터 양렴 제도(養廉制度)를 수용해 관료들의 봉급제를 명확히 정했다.
- 1품 ~ 3품 - 1년에 두번
- 4품 ~ 7품 - 각 4계절이 끝나갈 때 쯤 한번씩.
- 8~9품 이하는 한달에 한 번 봉급을 받는다.
2.2.2. 피휘 정책과 종실지위 정리
황실 계보를 정리해 열성옥보(列聖玉譜)를 편찬한 후 이후엔 20자를 정해 후대의 군주들에게 이 법칙에 따라 휘를 짓게 하였고 2자 명칭을 소자(小子)로 바꾸었다.
동시에 명명제는 제계시(帝系詩)와 번계시시(藩系詩)를 지어 직계 후손의 명명법(제계), 형제의 자손이 쓸 이름의 명명법(번계)를 제정했다.暶時昇昊明 昪昭晄晙晪
智暄暕晅㬏 晊晢曣曦㫟
돌림이름을 쓴 후에는 자신이 정한 부수가 들어간 한자로 이름을 지어야 했다.綿洪膺寶永 保貴定隆長 賢能堪繼述 世瑞國嘉昌 - '''帝系詩'''
면면히 넓혀온 나라 보배로운 영원함을 품고 귀함을 지키니 커게 번성함이 정해졌도다.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는) 선제(先帝)가 남긴 뜻과 사업을 이음을 견디니 누리는 상서롭고 나라는 기쁘게 번창한다.
綿+宀,洪+亻,膺+礻,寶+山,永+玉,保+阜,貴+亻,定+言,隆+才,長+禾,賢+貝,能+力,堪+才,繼+言,述+心,世+玉,瑞+石,國+火,嘉+禾,昌+小。
- 소치제(阮福綿宗), 사덕제(阮福洪任)
1839년 성조는 아들 소치제(즉위하기 전이라 장경공)의 건의로 황조종보(皇朝宗報)를 편찬해 응우옌 왕조가 광남국을 계승한 것을 기록했다.
2.2.3. 경제
명명제 시기 경제는 가륭제때와 큰 차이는 없다. 다만 가륭제 땐 가정성에 재결권, 임명권 등을 다시 회수해 황제가 직접 체결하게 했다.
1836년 명명제는 가정성의 토지를 측량, 징수했고 자신의 연호를 딴 명명통보(明命通宝)를 주조하였다. 명명통보는 뒷면에 사서오경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편 가륭제 때부터 생산해온 백연전(白铅錢)[5] 을 널리 보급했는데 무겁고 가치가 낮아 유통하기 어려웠고 당시 환율로 따지면 백연전 3개가 약 1000전에 불과했다. 명명제는 백연전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백연전은 중국의 오대십국시대 마초(馬楚)의 연철전(铅铁钱)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铅钱之用,富户既不敢私藏,而邻国来商者又不敢带回。此钱流通非但利于民,亦利于国,乃自然只利也」。
백연전의 유용성은 부자들이 숨길 엄두를 못 내며, 외국의 상인들이 경제에 침투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한다.(독점)
유통은 백성과 나라에 자연이 이롭게 할 것이다.
2.2.4. 과거제도 개혁
가륭제 제위 당시 과거제도는 향시(鄕試, 1차 시험)만 보았는데 명명제는 이 과거제도를 고쳐 회시(會試)제도를 두었다. 회시는 과거를 본 이가 다시 2차 시험을 치루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6년에 한 번 있던 과거시험을 3년에 한번으로 고쳤다. 그리고 부방(副榜)을 두어 향시에 합격해도 제한 인원수 안에 들지 못해 등용되지 못한자를 위해서 국자감에 일할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명명제는 과거 제도의 폐해를 알게 되었다. 과거 제도로 인해 학업의 획일화로 모든 분야의 연구 발전을 늦추고 진부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국가 발전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각했으나 과거 제도는 이미 이전부터 뿌리내린지 오래였다. 급작스럽게 바꾸면 사회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해 점진적으로 과거제를 고쳐나갈수밖에 없었다.
2.2.5. 유학 숭배 정책
명명제 본인도 학문을 가까이 했고 많은 독서를 했으며 시, 유학(儒學), 공자, 맹자를 숭상했다. 시집 두 권을 작성했고 그의 아들 일부도 시를 가까이 했다.
명명제는 유학의 보급에 신경썼고 치세동안 여러 마을에서 봄, 가을마다 공자를 위한 제사를 거행했다. 국사관을 만들어 국사를 편찬했고 장려했으며 그의 치세동안 반청간, 여광정(黎光定), 반휘주(潘輝注), 공문휘(龔文曦), 황공재(黃公才), 완연정(阮廷正), 무문표(武文鑣)를 비롯한 유학 가문 출신 명재상들이 등장했다.
명명제의 유학 숭배 정책으로 베트남 유학은 16세기 후반 후여조 유학의 황금시대에 이어 다시금 번상했다. 유학 교육도 중시하여 어린이가 서당을 다닐때 사서오경을 가르키게 했고 주자의 소자집주(小学集注)를 대량인쇄하여 널리 보급했다.
또한 1839년 명명제는 제후왕 자격으로 당시 청나라 황제였던 도광제에게 청하여 강희자전을 자국인이 배울수 있게 허락받았고 서당의 수업, 정부 공문서, 과거 시험에는 한자만 사용하고 쯔놈은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명명제는 한자를 채택했음에도 중어문학은 탄압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이는 중어문학들이 당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을 감추는 그의 태도는 마치 후대의 베트남을 보여주는 듯 했다.
2.2.6. 군사
명명제 시기의 병종은 보병, 수병, 상병(象兵)[6] , 기병, 포병 5 종류로 나뉜다.治國必有武備
나라를 다스림에는 무조건 군비가 있다. - 明命
보병은 경병(京兵)과 기병(奇兵)으로 나뉜다. 경병은 경성을 수비하는 병사로 편제상으론 영(營), 위(衛), 대(隊) 3개의 계급으로 나누었으며 이 중, 위는 두 개의 신공포, 이백 여개의 소총, 깃발을 사용했다. 경병은 보통 경성을 지키지만 비상시엔 외부로 출병할수 있으며 기병은 다시 기(奇)와 대로 나뉘었다.
상병의 편제는 대대로 매 대에 40마리의 코끼리를 지급했다. 상병이 움직일땐 황제는 몇 명의 수의사를 같이 파견시켰다.
수병은 도합 15위, 3대대로 나뉘며 명명제는 해안 방어를 중시했기에 수군을 자주 훈련시켰으며 포대를 자주 점검했다.
명명제 본인은 위의 말처럼 군사력을 매우 중요시 했지만 실제 조정에선 무(武)를 경시했고 현지의 관리들 역시 군사 훈련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당시 군대는 병사의 부족과 노후한 군사시설 등 문제가 많았고 명명제는 이를 인지했음에도 고치지 못했다. 군사력의 약화는 완조의 쇠퇴를 불렀으며, 더 나아가 손자 대에 외세의 침략으로 황실이 멸망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2.3. 반란과 정복 사업
2.3.1. 라오스 정복
1826년 시암의 통치에 비엔티안 왕국의 아누웡[7] 을 비롯한 라오스인(추장을 비롯한 부족)들이 독립을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시암왕 라마 3세가 보낸 보딘데차에게 패배하자 아누웡이 베트남의 명명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명명제는 바로 반문취(潘文璻)를 비롯한 대군을 지원해 그들을 구원하고 아누웡을 예안으로 맞이한다.
이후 아누윙이 점령당한 비엔티안의 수도 만상 수복을 꾀하자 명명제는 이번에도 지원군을 보냈는데 저번과 다르게 중립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아누웡이 패배했고 그가 지원을 다시 요청했다. 명명은 그 지원을 거절했고 단순 순찰만 적당히 하다가 아누웡은 씨앙쿠앙 왕국[8] 의 소내[9] 의 배신으로 붙잡힌 후 시암으로 보내져 처형당한다.
이후 시암이 다시 라오스를 공격하자 라오스의 각 부족들은 다시 베트남에 구원을 요청한다. 베트남의 장수 범문전(范文典)과 여등영(黎登瀛)이 세 갈래로 나눠 라오스에 진군하자 보딘데차는 더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뒤 철수했다. 이후 명명제는 씨앙쿠앙의 소내를 진녕방어사(鎮寧防禦使)로 책봉했고 쩐닝 부(phủ Trấn Ninh, 鎭寧府) 등 6부(府)를 설치하여 간접 통치를 하였다. 이후 소내가 조공을 상납하지 않았다는 죄를 물어 그를 처형시킨 뒤 완조의 신하 사광거(謝光巨)를 보내 그곳을 통치하게 했다.
2.3.2. 들끓는 반란
완조는 1802년 서산조를 무너뜨리고 전역을 통일했지만 북성 일대에는 후여조의 지지파가 많이 남아있었다. 여기에 관료들의 부정부패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해졌고 1822년 북성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 통제력이 먹히지 않게 되었다. 명명제의 치세동안 북쪽 지방엔 무려 '''254'''차례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반백횡(潘伯鑅), 여유량(黎維良), 농문운(農文雲)이 주도한 반란들이다.
남쪽의 가정성에는 여문회(黎文𠐤)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에는 시암군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개입했다. 이 봉기들은 완조에 심한 타격을 입혔으며 사실상 국가가 통제되지 않을 정도였다.
2.3.2.1. 여문회의 난
명명제는 1831년 개혁을 시행해 총진을 폐지하고 총독, 포정사, 안찰사, 청나라를 본따 만든 중앙집권제를 추진하여 성(省) 등을 나누었다. 이후 여문열(黎文悅)[10] 의 가정총진을 폐지한 후 번안성(藩安省)으로 이름을 바꿔 백춘원(白春元)을 포정사로 파견했고 그곳을 다시 국가 관할로 돌리려고 했다. 그리고 여문열의 죄를 물어 그의 무덤을 파헤쳤다.
여문열의 양자 여문회(黎文𠐤)는 양부의 부관참시와 중앙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결국 난을 일으켰다. 여문회 세력은 포정사 백춘원과 그 가족들을 붙잡아 처형했다. 번안총독 완문계(阮文桂)가 군대를 거느리고 난을 진압하려 했으나 패배, 피살당했다 여문회는 스스로 대원수를 칭했으며 채공조(蔡公朝)를 출병시켜 가정의 성 6개를 점령했다.
여문회는 더 나아가 프랑스의 선교사 조제프 마르샹(Joseph Marchand)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며 완복경[11] 의 아들 완복미당(阮福美堂)을 황제로 옹립할것을 계획했으며 베트남의 국교를 가톨릭으로 만들겠다고 하였다.
명명제는 장명강(張明講) 등을 출병시켜 여문회를 토벌하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여문회의 부하 채공조가 배신하여 여문회는 자신의 근거지인 번안성에서도 불리한 싸움을 진행해야 했다. 결국 시암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라마 3세의 수륙군이 베트남 관군을 공격하자 장명강은 시암군을 격파하고 캄보디아 일대의 왕 안찬 2세(安贊二世)를 납치하여 시암에 대항했고 보살성(菩薩城) 일대를 점령한다. 오래지 않아 시암군을 격파하고 반군의 기세가 떨어지는 중 여문회가 1834년 병으로 죽고 그의 8살난 아들 여문구(黎文鴝)가 뒤를 이었으나 반군의 근거지인 번안성이 함락되어 난은 진압되었다. 여문구를 비롯한 반란의 주동자들은 능지형으로 처형당했고 조정의 친 기독교인과 순교사들도 처형당했다. 그리고 시암이 반군을 지원했다는 점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는 파탄나게 된다.
2.3.2.2. 참파의 봉기
여문회가 난을 일으킨 후 순성(順城)[12] 에서도 참족이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순성 정권은 참족의 자치구역으로 완조가 점성왕 작위를 책봉하여 그곳을 다스리게 했는데 완조는 1832년 여문회 사망 후 순성 정권에도 개토귀류(改土歸流)[13] 정책을 집행한다. 참파왕(제후) 완문승(阮文承)[14] 이 순성을 귀속을 청한걸 구실로 순성의 제도를 폐지하고 순성의 이름을 평순진(平順鎮)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부터 참파 왕국은 멸망했고 완조는 그들의 문화를 탄압하여 완전환 동화를 유도한다. 황제가 임명한 조정의 관리들은 그들의 풍습을 존중하지 않고 참족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갔다. 1832년 이슬람 교단의 지도자가 참파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좌절되고 참파의 베트남화 정책은 무슬림 신도들에게 도마뱀, 돼지 고기를 먹이는 등 과격해져갔다.
한편 완조의 관군이 여문회 세력과 대치하는 도중 순성에선 완문승과 그의 부왕(副王)[15] 완문원(阮文元)이 1834년 완조를 '강도'라 부르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에는 라글라이족, 격하족(格贺族), 사정족(斯丁族) 등도 합세한 대규모 봉기였다. 부안(富安), 경화(慶和), 평순(平順) 3성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은 배공훤(裴公諠), 여덕점(黎德漸)이 토벌에 나섰으며 난에 합세한 참족과 기타 민족을 학살했다. 이 반란은 1835년 완문승과 완문원이 조정으로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하는걸로 진압되었고 동시에 정왕과 부왕이 사형당함으로써 참파도 멸망했다.
2.3.2.3. 농문운의 난
여문회가 난을 일으키자 그의 사위였던 농문운(農文雲)도 1833년 보악주(保樂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농문운은 보악주(고평) 따이족(岱依族) 지주였는데 반란을 일으켜 성을 함락하고 스스로를 절제상장군(節制上將軍)이라 칭한뒤 원륭통보(元隆通寶)까지 주조하였다. 농문운 세력은 북성을 공격했고 완극화(阮克和)란 자의 세력도 합세했다.
명명제는 여문덕(黎文德), 완공저(阮公著) 등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했으나 농문운이 양산(諒山)을 에워싸는건 매우 빨랐기 때문에 사광거까지 파견했다. 농문운은 망인(芒人) 등을 끌여들어 밀림에서 관군과 게릴라전을 벌였고 관군의 피해는 커져갔다. 사광거는 양산을 포기하고 고평만 다시 수복했으며 여문덕과 완공저가 보악주를 공격하자 농문운은 머리를 밀고 청나라로 도망갔으며 사위 윤광총(雲光總). 사촌 동생 농문사(農文仕), 농문석(農文碩)은 도망간 농문운 대신 관군에게 저항하여 세력을 유지했다. 농문운이 중국으로 도망갔다는 사실을 안 관군은 철수했고 관군이 물러나자 농문운은 보악주로 돌아왔다.
이후 1834년 완조의 관군이 보락주를 포위하자 농문운과 그 일가는 청나라로 도망갔지만 도주한 일이 있었던 후로 완조가 청나라에게 농문운의 도주를 다 말했기에 농문운 일가는 다시 완조로 압송되었다. 농문운은 숲속으로 숨었지만 범문전(范文典)은 그가 숨은 숲 전체를 태워버렸고 그 일가가 처형되면서 난은 진압되었다.
2.4. 천주교를 금지하다
1825년 프랑스 선교사 로제롯(Rogerot)이 다낭에 도착해 각지에 선교하는 일이 있었다. 명명제는 서양의 선교에 부정적이였고 탄압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명명제는 전국 각지의 선교사들을 순화로 불러 가둔 다음, 프랑스 서적을 번역하여 선교활동을 막게 했고 동년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톨릭을 버리고 선교사를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西方之道為左道,迷惑人心,敗壞風俗,故應嚴禁之,以使吾民信奉正道。
서양의 도는 사람을 미혹시키고, 풍속을 해치는 것이므로 이를 엄금하여 우리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도록 하라.
또한 1833년 여문회가 가톨릭 신자와 합세하고 장손 완복미당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는 사실이 그의 불안감을 자극했으며 이런 불안감으로 그의 천주교 탄압은 더욱더 강화되어갔다. 1900년 공개된 레오 13세의 주장에 따르면 명명제의 치세 중 베트남에서 가톨릭 순교자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다 처형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가혹한 탄압은 명명제와 손자 사덕제가 가장 심했다. 명명의 가혹한 탄압으로 명명제는 서양에선 폭군으로 자주 등장하고 동양의 네로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2.5. 캄보디아 탄압 정책
캄보디아는 이미 시암과 광남국의 이중 속국인 상태였다. 1834년 명명제는 여문회의 반란을 틈타 캄보디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장명강(張明講)을 보내 캄보디아를 공격한다. 장명강은 그곳에서 캄보디아 내정에 간섭했고 군대를 주둔하였다.
같은 해 안찬 2세가 병사하자 그의 딸이자 꼭두각시 여왕 앙머이(អង្គម៉ី)을 세워 캄보디아를 쩐떠이 성(Trấn Tây thành, 鎭西城), 프놈펜은 쩐떠이 부(鎭西府)로 삼아 베트남의 한 지역으로 완전 병합하고, 캄보디아의 모든 문물을 베트남식으로 고쳐서(개토귀류) 완전히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완조는 이전부터 캄보디아, 시암을 미개한 오랑캐로 여겨왔기에 자신들의 문화가 뛰어나다 생각해 베트남의 문화를 강요하였다. 크메르족에게 한자를 쓰게 하고 한자 이름으로 바꾸게 하였으며 군대를 베트남식으로 편제하고 군관의 대부분은 베트남인이 맡게 하였다. 만약 전쟁이 나면 크메르인들을 앞에 세워 고기방패로 쓰고 총기를 가진 베트남군이 뒤에서 사격하는 방식이였다.
또한 의복을 강제하고 머리를 기르도록 했으며 캄보디아인들이 신봉하는 불교를 탄압하여 승려들에게 불교의 절을 훼손케 했고 1840년 여문덕을 파견해 징세, 토지, 무역에 관여하였다. 베트남인들은 캄보디아인들의 땅을 빼앗았으며 이같은 행위는 캄보디아인들의 불만이 쌓이는 계기가 되었다.
2.6. 보수 정책
일찍이 명명의 부친 가륭제도 자신을 지원한 프랑스의 선교를 허용하였으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가륭제가 장손이 아닌 명명제를 태자로 책봉한 이유도 명명제가 즉위 전 서양에게 경계심과 의구심을 갖던 것에 주목하여 그에게 황위를 넘긴 것이였다. 명명의 아버지 가륭제도 죽기 전 유럽, 프랑스에게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말라 하고 죽었다.
1821년 장 바티스트[17] 가 프랑스 국왕 루이 18세의 국서를 가지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명명제와 통상에 관해 회담을 나누었고 명명제도 통상 조약 체결 의사를 밝혔다. 조약에는 프랑스인은 베트남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1824년 완복승이 신분 문제로 함장에게 명명제를 접견하는걸 거부당하고 프랑스로 돌아가자 명명제는 프랑스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고 이후에도 프랑스 함대가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또한 프랑스와의 국교를 중단하고 미국의 대통령 앤드루 잭슨의 국교 요청도 거부한다.
2.7. 서양 문물
다만 명명제는 서양 문물에는 긍정적이였는데, 기독교 탄압 정책은 상술했듯 순교자를 순화로 불러 프랑스 서적을 번역하게 했고 1834년 산업혁명이 일어난걸 알고 수화기제(水火記濟) 공장을 설립하여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증기기관차를 제조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명명제 치세에 베트남에서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서양에서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프랑스 출신 장 마리아 데스피오(Jean Marie Despiau) 의사를 불러 황실의 종친이 백신을 접종하게 했고 명명제는 이러한 정책으로 당시 서양의 발전을 이해하고자 했다.
2.8. 사망
보수적 성향을 지녔음에도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가 청나라의 광둥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청나라가 곧 쇠퇴할 것을 예측했다. 청나라하고 조공관계는 유지하였으나 얼마 안가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청나라가 졌다는 사실에 명명제는 영국이 자신들마저 침략할 것을 걱정한다. 명명제는 곧바로 베트남 사절단을 프랑스에 파견해 영국에 대항하기 위한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맺고 서방 세력과 의논하기를 원했다. 프랑스 수도에 도착한 사절단은 루이 필리프 1세에게 면담을 청했으나 서방세력들은 '베트남은 약소국' 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에 그들은 면담은커녕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채로 귀국한다.
명명제는 1841년 1월 20일 기운이 쇠해 향년 50세로 사망하였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태자의 제위를 보좌할것을 청했고 효릉(孝陵)에 매장되었다.
3. 평가
사실상 제정 베트남의 마지막 명군으로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의 노골적인 침략으로 허수아비 황제들이 세워졌다가 제정이 폐지되고 만다. 명명제의 치세는 제정 베트남의 최전성기였으며 서양의 문물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베트남의 근대화를 시도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법률제도 개혁을 진행해 국가의 기강을 확립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태도, 탄압 정책으로 소수민족의 반발을 일으켰고 억지로 동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폭군이란 평과 가톨릭 신도들을 처형하여 서방과 관계를 중단함과 동시에 베트남을 외교적 고립에 빠트린 암군이란 평이 공존한다. 이 보수 정책은 후대의 소치제, 사덕제 까지 이어지고 둘의 가혹한 탄압 정책은 (프랑스의 억지 명분도 있지만) 결국 왕조가 멸망에 가까워지는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다.
4. 기타
- 응우옌 왕조의 실록인 『대남식록(大南寔錄)』에 기록된 반기독교정책과 관련해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명명제와 신하들이 성경의 노아의 방주와 바벨탑이 나오는 대목을 읽고 황당무계한 헛소리로 간주했다고 한다.
- 명명제가 자식을 매우 많이 낳았기 때문인지 베트남에서는 정력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총 142명으로 아들이 78명, 딸이 64명이다. 이 황제 연호에서 따온 민망주도 있을 정도다.[18]
5. 참고 항목
6. 둘러보기
[1] 통칭 인황제.[2] 阮福景(응우옌푹까인, Nguyễn Phúc Cảnh, 1780 ~ 1801). 가륭제의 장남으로 7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건너가 동맹을 체결했다.[3] 태자 책봉 등을 선조들에게 알리는 의식.[4] 정부의 공문서, 황제의 조칙을 담당하는 공간이다.[5] 아연으로 만들어졌다.[6] 코끼리로 이루어진 부대.[7] 세타티랏 5세(พระเจ้าไชยเชษฐาธิราชที่ 5, 재위 1805 ~ 1829).[8] 비엔티안-베트남의 이중 속국.[9] 昭內. 재위 1803 ~ 1829.[10] 1763? ~ 1832년. 가륭제를 도와 완조를 재건한 공신이다. 그러나 명명제의 쇄국정치에 따른 입장차이로 갈등하다 후에 선교사 옹호의 죄로 무덤이 파헤쳐졌다.[11] 阮福景. 가륭제의 장남이자 명명제의 형이다. 태자였으나 요절했다.[12] 대월의 괴뢰가 된 제후국 형태의 참파.[13] 그 땅의 원주민 지도자를 해임하고 조정의 관리를 보내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정책.[14] Po Phaok The, 재위 1829 ~ 1832.[15] 정왕(正王)인 완문승을 도와 순성을 나눠 통치하는 작위이다. 서열상으론 정왕이 부왕보다 높다. 로마의 정제, 부제와 비슷함.[16] 장 바티스트는 이전 가륭제가 떠이선 왕조에 항전할때 해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베트남 여성과 혼인했고 베트남식 이름을 얻었다.[17] 완복승(阮文勝).[18] 출처: 최병욱 교수 저 베트남 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