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스포츠

 




1. 개요


북한의 스포츠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북한은 과거 구소련을 비롯한 서구 공산주의 국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경제력에 비해서 꽤 선진적인 트레이닝 시스템을 도입, 선수 육성을 골고루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국제대회에서 간간히 복싱, 유도, 탁구, 마라톤 같은 종목에서 기량이 좋은 선수들이 데뷔하기도 한다. 특히 마라톤은 2016 리우 올림픽 때 성과를 보여주었는데, 남자는 27등, 여자는 10등, 11등을 차지하였다. 하계 올림픽에서는 1972 뮌헨 올림픽에서 첫 참가하여 한국을 이긴 유일한 하계올림픽이 되었다. 다만 경제력이 좋지는 않은데다가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통한 기량 향상에 난관점이 많다 보니, 남한 만큼의 성적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2. 종목



2.1. 구기 종목



2.1.1. 축구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에서 아시아 최초로 토너먼트 라운드인 8강에 올라간 것으로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또한 북한 주민들도 축구 국가대항전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다.
북한은 생각보다 축구 리그가 잘 발달되어있다. 북한 축구의 최상위 리그는 최상급축구련맹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AFC 주관 클럽대회에는 나가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AFC에서 정한 기준을 맞추지는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은 국가 전체가 일종의 군사국가이기 때문에, 각 지역의 중심이 되는 군부대에 축구단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전국 리그가 3부까지 나눠져 있다고 한다.
또한 여자축구는 남자축구보다도 더 나은 국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중국과 어깨동무를 할 정도. 실제로 U-17 월드컵에서도 우승하고[1] 성인 대회에서도 8강에 진출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뒀다. 또 아시안컵도 3번 우승했다.
최근 북한은 국가적으로 자국선수들을 해외 프로구단에 입단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두고 계약금으로 '''김정은의 돈'''을 벌기 위한 외화벌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북제재가 점점 강화되자, 북한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지난 3월 이탈리아 프로축구 리그에 진출한 최성혁(18)이 팀에서 방출됐다. 그리고 몇 년 뒤 현재 북한 축구 선수들은 잘 활동하고 있다. 또한 지속적으로 축구 유망주들을 유럽등지로 보내는중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선수는 세리에 A에서 뛰고 있었던 유망주 한광성이다.

2.1.2. 농구


농구도 북한에서 상당히 인기있다. 특히 김정은이 좋아하는 스포츠이기도 하며, 2013년에는 NBA 스타였던 데니스 로드맨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과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 과거에는 235cm의 거한 리명훈으로 꽤나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205cm의 여중생 박진아가 북한 거인의 계보를 잇는 듯 하다. 1999년 현대 아산의 추진으로 현대그룹 산하 대전 현대 걸리버스청주 현대개발산업 레드폭스 두 남녀 프로농구팀이 북한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북한에서 시행되는 경기규칙은 국제경기에서 시행되는 규칙과는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면 8점 슛, 4점 슛, 자유투 실패시 감점 등이 있다. 이는 북한에서 농구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규칙을 변형했다.

2.1.3. 배구


놀랍게도 한국보다 국제대회 참가가 더 빠르다. 1964 도쿄 올림픽 때 선수단을 내보냈던 한국과 달리, 북한은 1956 세계선수권에 출전해 17개 나라 가운데 8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는 제2회 대회이기도 하거니와 비극적인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끝난 뒤 3년 만에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당시 한국에서는 9인제(극동식) 배구를 하고 있었다. 북한은 1962 세계선수권에서 14개 출전국 가운데 10위를 했다.
1960~70년대는 북한 여자배구의 황금기로 강팀이었다. 북한 뿐 아니라 대한민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 팀이 대부분 상위권에 있었던 강팀들이었다.[2] 1972 뮌헨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을 세트스코어 3-0으로 누르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 배구 처음이자 마지막 참가인데, 북한의 주포인 김증복[3]에게 털리면서 패했다. 패배를 믿을 수 없던 한국 선수단은 김증복이 남자라고 주장하면서 성 검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내 신문 기사를 보면 요구해서 재검사를 했다는 기록만 나와있고 그 뒤 기록이 없는데, 북한의 메달이 박탈되지 않은 것을 보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한 마디로 한국 입장에서는 진 것을 인정할 수 없던 멘붕의 현장이였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4]에서 동메달을 딴 한국보다 4년 먼저인데, 당시 공산권 국가들이 스포츠 강국들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서유럽과 남미 등지에서는 배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남북한 경제 수준 차이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 팀은 1970 세계선수권에서도 동메달을 딴 전력이 있다.
1990년대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탓인지 북한 배구팀이 국제대회에서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 아시아선수권에 갑자기 참가해 7위를 차지했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2011 아시아선수권에서는 8강전에서 한국에게 1-3으로 패하며 최종 6위를 기록했다.
그런 뒤로 또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2017년과 2018 세계선수권 예선전에 나왔다. 2승 2패로를 기록하며 조 2위까지 주어지는 본선 출전권을 거머쥐지 못했다.
2019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아시아선수권이 열려 북한의 참가도 기대가 되었으나, 결국 불참하였다. 2018년 기준 북한 여자 대표팀은 세계랭킹 33위이다.
남자 배구의 경우 대한민국에서 열렸던 2003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했으나, 이 대회는 A 대표팀이 아닌 대학생들만 출전하는 대회이다. 그래도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던 아시안 피스컵이라는 친선대회에도 참가하는거 보면 선수를 꾸준하게 육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2.1.4. 야구


북한에서는 비인기 종목이다. 탈북자들 말로는 북한 주민 대부분은 야구라는 종목의 존재도 모른다고 한다. 무엇보다 경기 특성상 돈이 많이 들다보니 인프라 자체를 만들기 어렵다. 전용구장은 평양 청춘거리 구장과 남포 야구장 단 2곳이 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야구가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자 북한에서도 관심을 갖고 재일동포들을 불러와서 야구 육성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대학팀을 포함하여 32개 팀이 국내 리그전을 할 정도로 잘 나간 적도 있었지만[5]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고난의 행군으로 아사자들이 속출하면서 야구에 관한 이야기는 사그라지게 되었다. 그래도 2010년 이후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 북한 내에서 치룬 야구 경기 결과가 보도 되기도 하고 아시아 야구 연맹(BFA)과 국제야구연맹(IBAF)에도 가입하였다. 2016년에는 아시아심판 클리닉을 평양에서 개최하고 싶다고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에 제안한 적도 있다.
물론 아무리 지원이 있다고 해도, 선수층이 두텁지 못하다보니 국제무대에서의 성적은 매우 처참하였다. 1991년 6월 일본 니가타 ‘환동해국제친선야구대회’에서 이뤄진 남북한 야구의 사상 최초 대결에서 북한은 남한 한양대학교 팀에 16대 1, 7회 콜드게임으로 완패했다. 1993 아시아선수권에서도 북한은 대한민국에게 11대 0, 7회 콜드게임으로 패배했다.
북한에서 쓰는 야구 관련 용어 [6]

2.1.5. 핸드볼


북한에서 핸드볼은 ‘송구’라고 한다. 배구, 탁구 등에 비해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간 확보가 어렵고 필요한 선수 수가 많기 때문이다. 북한 핸드볼은 일반 지역팀 5개와 대학 체육단 팀 2개 등 총 7개 팀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1년에 약 4회 정도의 대회를 개최한다.
북한은 1974년부터 국제핸드볼연맹 회원국이 됐지만, 아직 세계 랭킹에 들어있지는 않다. 북한 남자 핸드볼은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1991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했고, 그 이후로는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2.1.6. 탁구


북한 탁구는 국제대회에 나설 때마다 다크호스라고 불린다. 북한 선수들의 세계랭킹이 낮은 편인데 이들이 세계랭킹이 높은 선수들을 꺾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탁구 전문 매체 더 핑퐁은 2015년 8월 6일 보도에서 북한선수들은 국제대회 참가를 많이 하지 않아 국제대회 참가를 기준으로 측정된 세계 랭킹에 따른 비교가 무의미하다며 북한 여자 탁구의 간판 리명순의 경우 세계랭킹이 30위권이지만 국제대회에 좀 더 출전했다면 10위권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북한 탁구는 지금까지 올림픽에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획득했는데,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리분희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여자 단식과 복식 동메달을 땄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김향미가 여자 단식 은메달을 획득했다.

2.2. 기초 종목



2.2.1. 육상


북한의 육상 사정도 한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는 않다. 트랙과 필드에서 모두 세계 무대는 물론이고 아시아에서도 메달권에서는 거리가 멀고 장거리나 마라톤에서만 가끔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다만 한국이 남자 마라톤이 강하다면 북한은 여자부에서 기량을 뽐내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1980년대 후반 등장한 문경애는 1988 체코 국제마라톤 준우승, 1989 베이징 국제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정성옥은 1999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하며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2.2.2. 수영


2015 세계선수권 다이빙 여자 10m 플랫폼 결승에서 김국향이 397.05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북한 최초의 세계선수권 금메달이었다. 동대회 다이빙 여자 10m 싱크로 플랫폼에서 김은향과 송남향이 동메달을 땄다.
김국향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메달권이 점쳐졌으나 입상에는 실패했다. 그 외 유니버시아드 대회와 아시안 게임에서도 메달을 땄다.
2017 세계선수권에서는 여자 10m 싱크로 플랫폼에서 김국향, 김미래가 은메달을 혼성 10m 싱크로 플랫폼에서는 김미래, 현일명이 동메달을 땄다. 이렇게 세계선수권에서 금 1개, 은 1개, 동 2개를 땄다.[7]
2019 세계선수권에는 북한 선수단이 전원 불참하였다.

2.2.3. 체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은 총 3명으로 배길수(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안마 금메달), 홍은정(2008 베이징 올림픽 여자 도마 금메달), 리세광(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도마 금메달)이다. 한국보다 국제대회 성적이 좋은 몇 안 되는 종목 중 하나다.

2.2.4. 역도


김정은이 집권한 후 전략 종목으로 밀고 있다. 금메달 수만 2011 세계선수권에서 1개, 2012 런던 올림픽 3개, 2013 세계선수권 3개, 2014 세계선수권 12개로 계속 늘고 있다.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영웅 대접을 해주고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다지만, 급속도의 상승세로 불과 몇 년만에 역도강국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북한 역도를 두고 의혹도 있다. 폐쇄적인 체제 속에서 약물빨로 저런 성적을 내는 게 아니냐는 것인데, 실제로도 점점 도핑에 적발되는 선수들이 나오고 있어 그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2014 세계선수권 직후 도핑테스트에서 8명이 양성 반응을 보였는데, 그 중 북한 선수인 김은주와 리정화가 포함됐다. 여자 75kg 용상과 합계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김은주는 스테로이드 계열 물질인 메틸테스토스테론과 메탄드리올이 검출됐고, 여자 58kg 용상 금메달과 합계 은메달을 수상한 리정화도 마찬가지로 스테로이드 계열 물질인 클렌부테롤이 검출됐다. 2명 모두 메탈 박탈과 함께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2015 세계선수권 도중에도 김은국[8]이 여성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해 남성호르몬 수치를 높게 유지시켜주는 레트로졸이 검출되었다. 이로써 양성 판정을 받아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2.3. 격투기 종목



2.3.1. 태권도


현재 북한은 국제태권도연맹을 주도하고 있다. 남한이 세계태권도연맹을 주도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원래 뿌리는 같지만 이렇게 남북으로 나뉘게 된 이유는 육군소장 출신이었던 최홍희1966년 서울에서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했는데 당시 박정희 정권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갈등을 빚었고, 결국 1972년 캐나다로 망명을 떠나게 됐다. 최홍희가 떠난 뒤 박정희는 1973년 8월 외교부에 근무하던 김운용(전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세계태권도연맹(WTF)을 결성했다.
캐나다로 망명한 최홍희는 북한 쪽과 인연을 맺었다. 1979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태권도를 설명하는 한편, 평양으로 사범들도 꾸준히 보냈다. 이렇게 최홍희의 국제태권도연맹은 북한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져 세계태권도연맹과 각을 세웠던 국제태권도연맹은 북한의 전폭적인 지지로 세계 100여 개국에 350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스포츠 조직이 됐다.
WTF 태권도는 스포츠적 요소가 강하고, ITF 태권도는 실전성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고하자.

2.3.2. 유도


북한에서는 유도를 유술이라고 부르며, 북한 유도 대표팀은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 동메달 4개를 땄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계순희가 여자 48kg급에 16살의 나이로 출전해 당시 84연승을 달리고 있던 세계 최강 다무라 료코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안금애가 2012 런던 올림픽 여자 52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2.3.3. 복싱


1972 뮌헨 올림픽이 북한의 첫 올림픽 출전 대회였고, 김우길 플라이급 은메달을 획득했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구영조가 밴텀급 금메달, 리병욱이 라이트플라이급 은메달을 목에 거는 등 1970년대에 올림픽 복싱 노메달에 그친 한국을 대신했다. 북한은 한국이 불참한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리병욱이 라이트플라이급 동메달을 차지했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12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 복귀하자마자 복싱에서 금메달 1개와 동메달 1개를 획득했다. 그러나 북한 복싱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침체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북한 선수 가운데 올림픽 복싱 준결승 이상에 오른 선수는 2000 시드니 올림픽의 김은철(라이트플라이급 동메달), 2004 아테네 올림픽의 김성국(페더급 은메달)뿐이다.

2.3.4. 레슬링


올림픽 레슬링 종목에서 지금까지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5개를 따내는 등 전통적으로 레슬링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해왔다. 특히 여자 레슬링을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북한 레슬링 대표팀 박영미(2019년 기준 세계랭킹 16위)는 2019 세계선수권 여자 자유형 53㎏에서 우승했다. 한국 레슬링 대표팀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 여자 레슬링 등록선수는 300명 이상으로, 한국 3배 수준이다.

2.4. 동계 종목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는 4강(한국, 중국, 일본, 카자흐스탄)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국가다. 또, 한국을 이긴 유일한 동계올림픽이 1964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이다.
1996년에 동계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려 했다가, 1995년 대홍수의 여파에 따른 고난의 행군으로 중국에게 개최권을 넘겼다.

2.4.1. 스피드 스케이팅


한필화가 1964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 여자 3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 메달은 아시아 선수 최초로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획득한 메달이다.

2.4.2.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황옥실이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여자 5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4.3. 피겨 스케이팅


4개 종목 중 페어에 가장 강한데, 페어가 경쟁률이 낮아서 입상할 수 있는 확률이 다른 종목에 그나마 높기 때문이다.
남혜용 / 김혁 조가 1986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북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 / 조 최초로 우승했다. 렴대옥 / 김주식 조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자력으로 본선에 진출해 13위를 기록했다. 이 조는 그밖에도 2018 사대륙선수권2017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경력이 있다.

2.4.4. 아이스하키


2019년 기준 북한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한국이 속해 있는 세계선수권 디비전 1보다 두단계 낮은 리그인 세계선수권 디비전 3에 속해있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 홈페이지에 따르면 북한에는 남자선수 640명, 여자선수 515명, 유소년 선수 420명이 등록되어 있다. 경기장으로는 실내 3개, 실외 12개가 있다. 세계랭킹은 남자 42위, 여자 27위이다.

2.5. 기타 종목



2.5.1. 프로레슬링


1995년에 북한평양에서 WCW/신일본 프로레슬링 주최로 프로레슬링 경기를 개최된 바 있다. 이 경기의 메인 이벤트는 릭 플레어안토니오 이노키였다. 이는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인 15만 명이 관람한 경기가 되었다. 이 경기는 강제 동원된 관객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논란이 많다. 하지만 북한을 비롯한 과거 공산권 국가들은[9] 공연이나 운동경기 입장권이 '''무료'''이거나 입장료를 낸다고 해도 푼돈 수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유명한 선수가 와서 경기를 한다거나, 어디서 재미난 경기를 한다고 소문이 났다하면 관중들이 몰려들기 쉽다.[10] 왜냐하면 공산국가에서 운동선수나 문화 예술은 공익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비싸게 티켓 값을 받음에도 유명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나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가 만원 관중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공짜면 어떤지 뻔하다.[11] 여하튼 공짜나 저가로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것이 북한에서 프로스포츠 경기가 근본적으로 생겨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이벤트 이름은 Collision In Korea였으며,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왔으나 현재는 재생되지 않는다. WCW의 사장 에릭 비숍은 개인행동이 금지되고 호텔 밖 외출이 금지된 상황에서 통제를 '''쌩까고''' 반바지에 런닝 셔츠 차림으로 평양 시내를 조깅했다가 보안원의 주의를 받았다.

3. 역대 북한 개최 국제 스포츠 대회



3.1. 단일 종목 대회



3.1.1. 탁구


  • 1976 아시아선수권(평양)
  • 1979 세계선수권(평양)

4. 훈장 및 칭호


북한은 철저한 계급사회이고, 신분이 오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얼마 안 되는 예외가 스포츠 선수가 큰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경우이다. 올림픽에서 메달이라도 따내면 정말로 신분이 수직상승한다.
아시안 게임이나 공인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공훈체육인' 훈장이 수여되고, 이보다 급이 높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서 메달을 따면 '인민체육인' 훈장이 수여된다. 메달 획득 횟수가 늘어나면 '노력영웅' 칭호가 추가된다. 가장 높은 명예는 '공화국영웅' 칭호인데, 스포츠 선수로는 1999년 정성옥이 세계선수권 여자 마라톤 부문에서 우승하며 북한 선수 최초이자 유일하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북한의 여자 유도 스타 계순희는 '노력영웅' +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았다.
1980년대 탁구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다수의 메달을 따고,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한 리분희는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았는데, 거기에 추가로 공산당 간부로 오르기도 했다.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정대세를 비롯하여 선수 및 코치/감독 등이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았다.

5. 관련 자료


[1] 무려 2번이나 했다! 최근에 요르단에서 열린 U-17 월드컵에서도 우승했다.[2] 한국과 일본은 꾸준히 실력을 유지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현재 북한 배구는 많이 쇠퇴했다.[3] 기사에 따라서는 김정복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발음이 비슷하고, 기자조차 북한 선수단과 접촉하기 힘들었던 시절이라서 그런 듯 보인다.[4] 이 때 획득한 여자배구 동메달이 대한민국 구기종목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다.[5] 신축 야구장을 조성할 계획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북한의 경제가 쇠퇴하던 때였던지라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6] 사실 남한도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외래어로 된 스포츠 용어를 대거 순화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감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직역한 듯한 용어들이 많다보니 당대기준으로도 어색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골키퍼를 문지기라고 하고, 세이브를 살았다라고 부르던가하는 식이다.[7] 한국은 금메달 2개와 동메달 2개를 획득했다.[8]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남자 62kg 용상, 인상, 합계 모두 세계신기록을 세워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세계신기록을 또 경신했다. 2015년 대회에서는 도핑으로 인해 중국의 천리쥔에게 용상과 합계 금메달을 내줬다.[9] 중국이나 베트남은 프로스포츠가 성행하기 때문에 실업리그가 아닌 프로리그라면 별로 해당이 안되지만(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프로 축구선수들의 급여가 너무 높다보니 선수들이 해외진출을 꺼려해서 중국 축구의 수준향상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그래서 샐러리캡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다.) 쿠바에서는 아직도 야구 1부 리그에서도 입장료를 푼돈으로 받는다. 물론 팬들의 입장에서야 거저에 보는셈이니 매우 좋지만 이 때문에 선수들의 급여가 짜다보니 꿈이 클 경우에는 외국으로 탈주하는 경우가 생긴다.[10] 이러한 이유로 외국의 프로모터들이 평양에서 락 페스티벌이나 기타 상업적인 이벤트를 열려다가 무산되는 경우가 꽤 있다. 기본적으로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부서에서 '''약 5억달러''' 정도를 행사 진행비용으로 요구하는데 일방적으로 '''돈을 꼴아박아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프로모터 입장에서는 '이런 걸 왜 하나' 싶을 정도이다.[11] 한국도 K리그가 처음 개막되었을 당년(1983년)에는 개막전을 제외한 나머지 경기를 무료로 볼수있게 해서 평관 2만명을 찍은적이 있다. 공짜니까 축구장이 꽉 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