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2003년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
조범현 배터리코치가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부임하며 배터리코치 자리가 비게 되자 2군 배터리코치였던 전종화 코치가 1군 배터리코치를 맡게 됐다. SK 와이번스에서 활동하다 은퇴한 양용모를 2군 배터리코치로, 야인으로 지내던 김일권을 2군 주루코치로 영입했다.
1.2. 선수 이동
2002년 시즌 후 박봉수, 변대수, 이준호, 정성훈[2] , 하춘동 등이 방출됐다. 이 중 정성훈은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
해병대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했던 권오준이 복귀했다.
1.3. 신인 지명
- 포지션은 지명 당시 기준.
- ※표시는 지명권 포기 등으로 입단하지 않은 선수.
- #표시는 대학 진학이나 유급으로 이후에 지명 당해가 아닌, 그 이후에 입단한 선수.
1.4. 외국인 선수
외국인선수 엔트리가 다시 2명으로 줄었는데,[9] 삼성은 전년도 좋은 활약을 한 나르시소 엘비라와 틸슨 브리또와 재계약했다.
2. 전지훈련
2003년 1월 8일부터 3월 12일까지 약 2달 동안 하와이에서 전지훈련을 가졌다.
3. 정규 시즌
4월 5일 정규리그 개막 이후 무려 '''개막 10연승'''을 달리며 선두로 치고올랐고 이 기간 동안 4월 15일 수원 현대 유니콘스전에서 양준혁이 싸이클링 히트 대기록을 세웠다.[10] 시즌 초부터 이승엽이 무서운 기세로 홈런을 치면서,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지 화제가 됐다. 이승엽은 6월 22일 SK 와이번스전에서 개인통산 300홈런을 기록하면서 세계 최연소 300홈런을 경신했고, 1999년 자신이 기록한 한 시즌 홈런 기록(54개)도 갈아치웠고,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56호 홈런을 치면서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경신했다. 이밖에 타점·득점 1위도 이승엽의 몫이었다.
이승엽 뿐만 아니라 마해영은 홈런·타점 부문에서 3위를 기록했고, 양준혁도 타율 4위와 홈런 5위로 전년도 부진을 딛고 부활했다. 이승엽-마해영-양준혁으로 이어지는 이마양 트리오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강으로 꼽힐 정도로 화끈한 공격력을 보였다.
이마양 트리오 뿐만 아니라 강동우와 고지행을 제외한 주전 7명이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면서 팀 홈런 1위, 팀 타율 2위, 팀 타점 1위 등으로 그야말로 핵타선을 구축했다. 특히 팀 홈런은 213개로 한 팀 최다 홈런을 경신했다. 이 때문에 올스타전에서 2루수[11] 를 제외한 전 포지션은 삼성 선수들의 독차지였다.
하지만 10승 이상을 올린 투수가 에이스 임창용과 배영수 둘 뿐일 정도로 투수진의 무게감은 가벼웠다. 전년도 평균자책점 1위였던 나르시소 엘비라는 부진하면서 조기에 퇴출됐고, 대신 영입한 라이언 글린도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마무리 노장진은 4점대의 평균자책점으로 전년도와 달리 마무리로서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게다가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관중들의 이목이 삼성의 승리가 아닌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 경신에만 쏠리면서 팀 분위기도 흐트러졌고[12][13] 승률도 점차 떨어졌다.[14] 결국 삼성은 76승 53패 4무를 기록하면서 3위로 정규시즌을 마쳤다.
3.1. 선수 이동
4월 25일에 임재철과 김승권이 한화 이글스의 고지행과 지승민을 상대로 트레이드됐다. 당시 삼성에 쓸만한 2루수는 박정환 뿐이었기에 이를 대신해 고지행을 잡기 위해서 한 트레이드였는데, 재일 한국인인 고지행은 당시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고지행을 설득하기 위해 역시 재일교포인 신용균 2군 감독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고지행을 설득해 데려왔다. 임재철은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엔트리에 있었지만 정규시즌에서 활약은 별로 없었고, 백업 외야수로는 김종훈이 있었기에 임재철의 자리가 없었다. 2001년 한화에서 데려온 김승권도 백업으로서 그다지 활약이 없었다. 고지행과 같이 온 지승민은 당시에는 그저 그런 좌완투수일 뿐이었다.
7월 15일에는 LG 트윈스에서 방출된 심성보를 영입했다.
4. 포스트시즌
정규시즌 4위를 차지한 SK 와이번스는 초보 감독인 조범현이 이끌고 있었고, SK 선수들도 삼성 선수들에 비하면 이름값이나 성적에서 밀렸다. 그래서 삼성의 압승이 예상됐지만, 삼성은 정규시즌 막판 흐트러진 팀 분위기를 다잡지 못했다. 결국 이마양을 위시한 타선을 갖고도 SK를 상대로 1번도 못 이기고 광속탈락했다.
5. 선수별 개인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성적.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 투수는 이닝이 많은 순서대로, 타자들은 타수가 많은 순서대로.
- 시즌 중 이적한 선수들은 당해 삼성 소속 성적만 기록.
5.1. 투수
- 우완
- 좌완
5.2. 타자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6. 수상 및 기록
- 배영수 : 전구단 상대 승리
- 김한수 :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 박한이 : 안타 1위(170개)
- 양준혁 :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사이클링 히트(4월 15일 수원 현대 유니콘스전)
- 이승엽 : 정규시즌 MVP,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홈런 1위(56개), 타점 1위(144타점), 득점 1위(115득점)
7. 관련 문서
[1] 페넌트레이스에서는 3위였으나 준플레이오프에서 4위 SK 와이번스에게 업셋을 당해 최종 순위는 4위.[2] 정성훈의 경우에는 2002년 1군 경기에는 등판하지 않았지만, 2군에서 100⅓이닝을 소화했다. 당시 2군 리그는 팀당 60경기를 치렀으니, 혼자서 팀 이닝의 1/5 가량을 책임진 셈인데도 방출되고 말았다.[3] 중앙대 진학. 대학 중퇴 후 2006년 신고선수로 입단.[4] 제주관광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5] 한양대 진학 이후 2007년 입단.[6] 영남대 진학 이후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면서 2010년에 신고선수로 입단.[7] 서울상명초에서 갈선초등학교로 전학[8] 이해창의 아들이다. 앞서 1996년 신인 지명 때 삼성이 지명했었으나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이후 2000년 신인 지명 때는 LG가 지명했으나 이 때도 입단하지 않았다.[9] 2001~2002년 2시즌 동안은 2016년 현재처럼 외국인선수 3명 보유에 2명 출장이었다.[10] 양준혁은 1996년에도 싸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개인 통산 2번째 싸이클링 히트.[11] 두산 베어스의 안경현이 뽑혔다.[12] 특히 시즌 막판 들어서 병살타가 많이 나왔다. 이승엽이 홈런 신기록을 경신한 롯데 자이언츠전에도 경기는 졌다.[13] 이에 대해선 많은 야구인들이 가장 큰 이유로 기레기들의 보도 경쟁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자들이 이승엽을 쫒아 다니면서 인터뷰하는것도 모자라, 팀내 다른 선수들에게도 인터뷰를 빙자하여 이승엽에 대한 이야기를 억지로 유도하는 등 팀 케미가 흐트러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죽했으면 2015년 이승엽이 399홈런 이후로는 일부러 남들보다 일찍 나와서 훈련하고 기자들이 오기 전에 라커룸에 틀어박히는 식으로 인터뷰를 피했었다. 본인이 밝힌 이유는 이미 2003년 당시에 기자들의 인터뷰 때문에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팀 분위기를 망가뜨린 게 미안해서라고.[14] 시즌 막판 틸슨 브리또와 김한수가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며 내야진에 공백이 생긴것도 한 몪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