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1. 개요
2. 설명
3. 여담
4. 같이 보기


1. 개요


西
후백제의 왕이 되는 견훤이 무진주(광주 일대)에서 892년 '''스스로 사용한 관작'''. 신돈, 김부식, 최충헌의 관작들과 함께 한국사에서 매우 많은 관작들로 손꼽히며 '''총 47자'''다.

2. 설명


많고 많은 관작을 분리해서 해석 해보면 다음과 같다.
  • 신라(新羅): 자신의 국가를 선포하기엔 아직 신라의 권위가 남아있어 국적을 신라로 유지.
  • 서면도통(西面都統): 신라 서부 지역을 관장하는 도통. 도통은 당나라의 직위이다.
  • 지휘병마제치(사)(指揮兵馬制置(使)): 병마를 지휘하는 제치사(制置使)[1]로 아마 뒤 사(使) 자가 빠진 것으로 보인다.
  •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여기서 전(全)은 전주(완산주), 무(武)는 무주(무진주), 공(公)은 공주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전주·무주·공주 등 주의 군사(州軍事)를 맡은 관리'. 당의 도독은 사지절도독, 지절도독, 가절도독 세 분류가 있다.
  •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전주자사 대행.
  • 겸(兼): (직위를 겸하다.)
  • 어사중승(御史中丞): 어사대 소속으로 감찰권을 맡는 직위.
  • 상주국(上柱國): 천자가 공이 큰 신하에게 치하하는 의미로 내려주는 훈위.

  • 한남군 개국(漢南郡 開國公): 한남군 지역의 공작.
  •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 하사 받은 식읍이 2000 호.
관작을 풀면 신라 서방의 도통, 군대를 관리하는 제치사, 전주, 무주, 공주 등 주의 지절도독주군사, 전주의 자사대행, 어사대 어사중승, 상주국 훈위를 받은 한남군 공작이다. 받은 식읍은 2000 가구.
당나라의 도통, 제치(사), 지절도독주군사, 자사, 어사중승에서 따와 만든 관작이다.
사실상 신라로부터 독립했으면서도 관직명의 맨 앞에 '신라'를 붙여 형식상 신라의 신하임을 내세우고 자신을 왕(王)이 아닌 공(公) 작위로 자처한 이유는, 천 년 가까이 지속된 신라와 동급의 정통성을 자칭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대 사람들에게 신라 왕은 중국황제까지는 몰라도 다른 군주들보다는 더 높은 존재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견훤은 8년 정도 이렇게 실제로는 왕노릇을 하면서도 그렇다고 왕은 아닌 외공내왕의 애매한 칭호를 달고 한반도 서남부를 군벌로서 지배하다가 900년에야 완산주(전주)에서 백제왕에 즉위하였다.[2] 여기에 후백제918년오월에 조공하고 중대부(中大夫) 관작을 더 받았다.
이상의 관작이 자칭이 아니고 오월에 조공하고 하사받은 관작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도통이니 상주국이니 하는것들은 죄다 당나라의 관작들이다. 하지만 직함은 당나라의 것이지만 그 직함 뒤에 붙은 관장 부서, 지역은 전혀 당나라 소속이 아니다. 즉 견훤이 오월에게 직접 "나에게 '신라 서부 담당' 도통, '신라 전주'의 자사대행, '신라 군대를 담당한' 제치사, '신라 한남군을 봉지로 받은' 공작위를 달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925년에는 중국 후당조공하고 상기 칭호와 비슷한 부분이 많지만 더욱 격이 높아진 '''총 52자'''의 검교태위(檢校太尉) 겸(兼) 시중(侍中) 판백제군사(判百濟軍事)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해동(海東) 사면도통(四面都統) 지휘병마제치등사(指揮兵馬制置等事) 백제왕(百濟王) 식읍이천오백호(食邑二千五百戶)란 관작을 받기도 했다. 이때에는 신라가 없어지고 해동과 백제가 들어가있으며 지위도 공(公)에서 왕(王)이 되었다.

3. 여담


동문선에 기록된 예종 시책문엔 이자겸의 직위가 나와있다. 당시 이자겸의 직위는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3]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겸(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4] 수태보(守太保)[5] 익성동덕추충좌리공신(翊聖同德推忠佐理功臣)[6] 상주국(上柱國)[7]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8] 삼중대광(三重大匡)[9]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10]였다.
척준경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에게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
(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11] 삼중대광(三重大匡)[12]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13] 검교태사(檢校太師)[14] 수태보(守太保)[15]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16] 판호부사(判戶部事) 겸(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17] 상주국(上柱國) 관작을 받았다.
견훤은 최충헌의 관작으로 유명한 '''총 46자'''의 '벽상삼한삼중대광[18] 개부의동삼사[19]태사[20]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21] 상장군[22] 상주국[23] 병부어사대판사[24] 태자태사[25](壁上三韓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守太師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上將軍 上柱國 兵部御史臺判事 太子太師)'보다 한 글자가 더 많다.
신돈도 만만찮은데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26] 벽상삼한중대광[27]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성부원군[28]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壁上三韓重大匡 領都僉議使司事 判重房監察司事 鷲城府院君 提調僧錄司事 兼 判書雲觀事)' 관작들을 가졌다.

4. 같이 보기


[1] 851년(선종 대중 5년), 당에서 제정된 직위.[2] 이후에도 후백제가 신라한테 '존왕(尊王)'의 의(義)를 두터히 하고 사대(事大)의 정(情)을 깊이 하였다.' 운운하는 것을 보면 왕을 칭한 후에도 형식상 신라왕 아래로 행세 하였다. 신라는 신라왕 아래 명주군왕이나 갈문왕, 고구려왕, 보덕국왕, 탐라국왕, 우산국왕과 같은 왕아래 제후왕이 있던 나라다.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인데 고려왕 아래에 낙랑왕, 실직군왕, 필영대왕, 문영대왕, 정간왕, 조선국양헌왕 같은 제후왕이 있었다.[3] 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4] 판상서이부사는 상서성 이부의 장관, 서경유수사는 서경 조정의 최고 장관을 의미한다.[5] 삼사(三師) 직 중 가장 낮은 직위.[6] 좌리공신호.[7] 최고위 훈위.[8] 인천의 백작.[9] 1품 1등위 향직 품계.[10] 종 1품 최고위 문산계 품계.[11] 인종이 준 위사공신호. 신흥사의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갔다.[12] 1품 1등위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향직 품계는 원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였으나 성종이 문산계 품계를 만들면서 명예직으로 밀려났다.[13] 종1품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문산계 품계는 성종이 도입한 정식 품계이다. 문관, 무관 모두 문산계의 구분을 따랐다.[14]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리는 명예직이다.[15]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에 수직을 붙힌다. 태보는 삼사 직 중 하나다.[16] 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 중서문하성의 장관은 문하시중. 바로 밑이 평장사다.[17] 판호부사는 호부의 장관으로 약칭이다. 풀네임은 '판상서호부사'로 줄여서 판호부사, 호부상서 등으로 불렸다. 서경유수사는 서경 분사의 최고 장관이다.[18] 향직 품계.[19] 문산계 품계.[20] 수직, 삼사.[21] 중서문하성 문관직.[22] 무관직.[23] 훈위.[24] 상서성 병부 및 어사대 문관직.[25] 태자부 소속 문관직, 삼사.[26] 보세공신호.[27] 문산계 품계.[28] 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