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하르트 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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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rhard Milch''' (에르하르트 밀히)
출생
1892년 3월 30일, 독일 제국 하노버 빌헬름스하펜
사망
1972년 1월 15일 (79세),
독일연방공화국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뒤셀도르프
복무
독일 제국군(1910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1933년 ~ 1944년)
최종 계급
공군 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
주요 보직
독일 국방군 공군참모총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기타 경력
루프트한자 항공 1대 사장 겸 전무이사
1. 개요
2. 생애
3. 밀히 재판
4. 기타
5. 진급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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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직한 인상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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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8월 26일자 타임지 표지로 선정된 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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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3월 베를린에서 빌헬름 카이텔(左), 하인리히 힘러(中)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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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5월 알베르트 슈페어(左), 빌리 메서슈미트(右)와 함께.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독일 국방군루프트바페 소속 장성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
'''유대인''' 혈통이라는 커리어를 끝낼 정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원수까지 오른 인물이자 초대 '''루프트한자 사장'''. 헤르만 괴링, 알베르트 케셀링,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후고 슈페를레,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과 더불어 단 6명밖에 없던 공군 원수 중 한 명이다. 제3제국 공군력 재건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지만, 패전 후 뉘른베르크 계속재판 중 밀히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되어 1954년 석방된 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로 그의 성 밀히(Milch)는 독일어우유를 뜻한다.

2. 생애



2.1. 유년기 ~ 제1차 세계대전


1892년 3월 30일 하노버의 빌헬름스하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톤 밀히(Anton Milch)는 유대인 약사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밀히의 친부가 아니었다. 어머니 클라라 밀히(Klara Milch)가 바람을 피워 낳은 아이가 밀히였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유대인 혈통 논란" 문단에 후술한다.
1910년에 독일 제국군에 지원하여 8개월 간의 훈련을 거쳐 쾨니히스베르크에 주둔한 제1포병연대에 포병 소위임관하였다. 장교 임관 당시 밀히의 성적은 120명 중 최우등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밀히는 공군에 더 관심을 가졌고,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포병 장교 생활을 좀 더 하다가 1915년터 항공정찰병 교육을 수료한 후 공군으로 전속해 활동했다. 여기서도 밀히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 상관의 호감을 샀고 1916년 중위로 진급했다. 대전 말인 1918년 8월 밀히는 대위로 진급하고 제6전투비행단[1]을 이끌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2.2. 전간기



2.2.1. 장사하자!


밀히는 1920년까지도 군에 남아 있으면서 일명 "항공 경찰대"를 이끌고 쾨니헤스베르크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이 망하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군비 확장은 크게 제약받았다. 공군도 예외는 아니어서 항공 전력 보유가 금지되었다. 밀히는 공군에서는 뭘 할 수가 없었으므로 1921년부터 군을 전역했다. 밀히는 자신이 지휘했던 부대의 항공기가 정부에 의해 압수되는 꼴을 보고만 있어야 했고, 먹고살기 위해 민간 항공사에 취업하려 했다.
당시 독일 항공사로는 독일 루프트-레더라이(Deutsche Luft-Reederei)와 로이드 동항공사(Lloyd Ostflug)가 있었는데, 로이드 동항공사에는 후고 융커스(Hugo Junkers), 그리고 1차 대전에 밀히와 같이 참전했던 전우이자 공군 에이스였던 고트하르트 작센베르크(Gotthard Sachsenberg)[2]가 동업자로 있었다. 작센베르크는 밀히가 직장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회사에서 일하게 해 주었고, 밀히는 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 베를린, 발트 3국 등을 잇는 항공 우편물 배송 작업을 하게 되었다.[3][4]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에 의하면 독일은 항공기 생산을 전면 중단해야 했는데 항공사에서 이를 무시하고 멋대로 항공기를 만들어 대는 바람에 연합국이 '계속 그러면 루르 빼앗아 버릴 거다'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항공 우편을 위해 만든 F-13 10여 기조차도 정부에 또다시 압수당했다(…)[5] 안습.. 그래도 어찌어찌 버텨나가면서 1926년에는 다른 항공사와의 합병을 통해 만들어 낸 회사가 바로 '''루프트한자'''이다. 밀히는 루프트한자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6] 루프트한자는 2-3개의 회사를 합병했던 비교적 큰 규모의 회사였기에 중유럽의 항공 운수업을 거의 독점할 수 있었다. 이런 민간 기업 운영 경험이 나중에 루프트바페 재건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항공 운수업에 종사하면서도 밀히는 공군과 여전히 손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7]에 의해 독일군 참모본부는 없어지고 명목상의 조직인 국방성이 수립되었으나, 공군력이 아예 절단나 버린 독일로서는 어떻게든 꼼수를 부려 공군을 재건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 이에 국방성은 1차 대전에 참전했던 퇴역 조종사들[8]을 초빙해 의견 수렴을 은밀하게 하곤 했고, 밀히는 전술 비행, 제공권 장악에 관한 내용을 질문받고는 답변해 주는 등 나치당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미 공군력 재건에 일조하고 있었다.

2.2.2. 나치당을 만나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권력을 잡아 바이마르 공화국은 멸망하고 제3제국이 수립되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X까'''를 외치며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고, 공군도 재건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군비 확장을 대놓고 하기는 어려워서 눈속임의 일환으로 제국 항공부(Reichsluftfahrtministerium)가 설립되었다. 항공부 장관으로는 헤르만 괴링이 발탁되었고, 밀히는 나치당에 가입함과 동시에 차관이 되어 루프트바페 설립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여기에 1차 대전의 격추 에이스 에른스트 우데트가 합세하고, 밀히는 군비 확충, 우데트는 전투기 생산에 주력했다. 밀히는 독일 제국군 시절의 예비역 대위였으나 나치당 가입 후 대령 계급을 부여받았다. 공군 책임자로서 계급이 너무 낮으면 가오가 살지 않기 때문에 명목상 올려 준 듯.

2.2.3. '''유대인 혈통 논란'''


요약: 에르하르트 밀히는 양아버지가 유대인이었던 것 때문에 유대인이라고 알려져 있었을 뿐, '''진짜 혈통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를 전후해 밀히의 혈통에 관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밀히의 부친 안톤 밀히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된 것. 독일 공군의 재건을 담당하는 핵심 인물이어야 할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자 당장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페널티 중의 페널티였다. 그러나 괴링은 유능한 인재인 밀히를 잃고 싶지 않았고,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Wer ein Jud' ist, bestimme ich!)[9]

라고 일갈하여 밀히에 관해 입방아를 찧던 사람들을 전부 아닥하게 했다. 그리고 밀히의 모친 클라라 밀히로부터 '''밀히의 생부는 안톤 밀히가 아니라, 클라라의 외삼촌이었던 카를 브라우어였다'''는 진술서를 받아내 공개하여 확인사살하고 밀히를 보호했다. 덕분에 제3제국의 존속 기간 동안 밀히는 유대인이라는 오명을 벗고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건의 전모가 모두 까발려져 밀히를 멘붕시켰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될 만한 글을 첨부합니다. 원문은 이 글이며, 원문과 해석을 같이 작성했습니다. 각주는 편집 과정에서 제외했습니다. 혹시 해석이 어색하거나 틀리다고 생각되면 토론방 열어 주기 바랍니다.

'''Was Erhard Milch Jewish?'''

▶ '''에르하르트 밀히는 유대인이었는가?'''

Few senior military figures in the Third Reich have been more subject to claims of jewishness than the architect of the Luftwaffe: Erhard Milch. The problem is that, like Magda Goebbels and Hermann Goering, this legend is based upon having a parent who has taken a jew to be their lover or spouse, but they are not the biological parent of the individual involved.

▶ 독일 공군을 재건한 인물인 에르하르트 밀히만큼, '유대인'이었는가 하는 주장에 시달렸던 제3제국의 군인은 보기 힘들다. 문제는 뭐냐면, 마그다 괴벨스[10]

나 헤르만 괴링[11]의 경우처럼, 당사자의 부모가 연인이나 배우자로서 유대인을 선택했지만 그 유대인이 당사자의 생물학적 부모가 아닐 때 이런 주장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Milch is just such a case: even the Wikipedia article gets this outright wrong as it cites Brian Rigg's 'Hitler's Jewish Soldiers' on the subject. Rigg does cite primary documentation, but crucially doesn't cite the all-important Gestapo investigation into Milch's racial origins in 1935. This exonerated Milch of the rumours on the grounds that his actual father was not actually Anton Milch (who was jewish) but rather his mother's uncle: Karl Brauer.

▶ 밀히의 경우 또한 그렇다. 위키백과의 '에르하르트 밀히' 항목에서는 브라이언 릭스의 '히틀러의 유대인 전사들'을 인용하여 문제를 크게 오해시키고 있다.[12]

릭스가 주요 기록을 인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1935년에 게슈타포가 밀히의 혈통에 관해 조사했던, 지극히 중요한 결과물을 인용하지 않았다. 이 조사 결과에 의해 밀히는 유대인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났다. 밀히의 생부가 (유대인인) 안톤 밀히가 아니라, 모친의 외삼촌인 카를 브라우어(Karl Brauer)였다고 밝힘으로써 말이다.

The evidence upon which this exoneration was based was a confession written by Milch's mother, Klara Vetter, to her son in the autumn of 1933: where in four heart-rending pages she explained to Milch the socially unacceptable way in which he was conceived and why she (and his step-father Anton Milch as well as his biological father Karl Brauer) had kept it from him.

▶ 이에 대한 근거는 밀히의 모친 클라라 베테르가 밀히에게 보낸 고백서에 나타나 있다. 1933년 가을, 클라라는 총 4쪽에 달하는 슬픈 편지에서 '밀히는 사회적으로 용납받을 수 없는 방법으로 잉태되었으며 그녀가(계부 안톤 밀히와 생부 카를 브라우어와 같이) 그 사실을 밀히에게 왜 숨길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Klara's family was Catholic you see and her parents desired her to marry a penniless jewish orphan in the navy called Anton Milch, but Klara really loved another man (and he also loved her): her mother's brother Karl Brauer. Such a union was not illegal at the time (witness Adolf Hitler's parents who were uncle and niece), but it was enough to cause exclusion (per Canon Law)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in which the Vetter family was in communion.

▶ 알려져 있다시피 클라라의 가족은 가톨릭 신자였고, 클라라의 부모는 무일푼인 유대인 출신 고아, 안톤 밀히와 클라라가 결혼하길 원했다. 그러나 클라라는 다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고(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남자는 바로 클라라의 어머니의 형제[13]

, 카를 브라우어였다. 그런 관계는 당시로선 불법이 아니었으나, (히틀러의 부모가 외삼촌과 조카딸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라[14]) 클라라의 가족이 믿고 있던 로마 가톨릭 교단에서 (교회법에 의해) 쫓겨나기에는 충분했다.

It was also against the wishes of Klara's parents who forced her to marry Anton, which she consented to but with the explicit proviso (agreed with Anton) that she would not bear his children: rather she would bear the children of Karl Brauer or she would not go through with the marriage.This Anton agreed to and Milch was duly conceived by Klara's sexual activities with Karl Brauer not with Anton Milch: however to the rest of the world it would seem like Klara's children were also Anton's, which would in turn give them the necessary social legitimacy and prevent their true socially unacceptable origins becoming known to the world.

▶ 이는 클라라를 안톤과 결혼시키려던 부모의 바람을 거스르는 일이었고, 클라라는 결국 안톤과의 결혼에 동의하지만 솔직하게 한 장의 문서를 작성했다. 그 내용은 자신은 안톤의 아이를 가지지 않을 것이며(이는 안톤도 동의했다), 카를 브라우어의 아이는 가질 것이고 이걸 허가해 주지 않는다면 안톤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 안톤은 이것에도 동의했고, 자연스레 에르하르트 밀히는 안톤 밀히가 아닌 카를 브라우어와의 성관계로 태어났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클라라의 자녀는 안톤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었으며 덕분에 아이들은 사회적 필수 정당성을 부여받고[15]

그들이 지닌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할 혈통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

In support of this state of affairs we have no only Klara Milch's signed statement to Milch, but we also have Anton Milch's two page confirmation to Milch from October 1933 that what his mother had written to him was in fact true. This was not widely known during the Third Reich and because Milch was therefore a bastard not a jew: he could not technically be a officer in the Wehrmacht.

▶ 이런 상황을 위해 우리는 클라라 밀히가 에르하르트 밀히에게 보낸 편지뿐만 아니라, 안톤 밀히가 1933년 10월 아들 밀히에게 보낸 2장짜리 진술서[16]

도 확보해 놓았다. 그 진술서에는 '''클라라의 편지 내용이 맞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안톤의 편지는 나치 독일 시대에는 거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에르하르트 밀히는 유대인이 아니라 사생아였기에 원래대로라면 독일 국방군의 장교가 될 수 없었다.

This [17]

social quagmire is the origin of Hermann Goering's famous declaration: 'I decide who is a Jew!' Since he couldn't reveal Milch's true origins that the Gestapo investigation had discovered to the world, because it would mean losing a very capable officer due to a social stigma, but yet he also knew the claim that Milch was jewish was wrong.

▶ 이런 사회적 혼란 속에서 나온 게 헤르만 괴링의 유명한 발언,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정한다!"이다. 괴링은 게슈타포가 세상에 들춰 버린 밀히의 진짜 혈통을 숨길 수는 없었고, 사회적 낙인 때문에 매우 유능한 장교를 잃게 될 것이었지만, '밀히가 유대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Thus Goering took the only way out available to him at the time: declare that Milch was de jure non-jewish. He was quite right, but looking back as a historian this is unfortunate since the legend of Milch's jewishness has continued up to the present day and Goering's statement is oft used as 'proof' of how 'unscientific' the Third Reich's racial doctrines were.

▶ 그리하여 괴링은 그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을 사용했다. '''밀히는 법적으론 유대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괴링은 옳았다. 하지만 역사학자로서 그때를 돌아본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다. 에르하르트 밀히의 유대인 논란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제3제국의 인종주의가 얼마나 ''''비과학적''''이었는가에 대한 ''''증거''''로서 괴링의 발언이 빈번히 인용되기 때문이다.

'''C'est la vie.'''

▶'''이것이 바로 인생이 아니겠는가.'''


즉 에르하르트 밀히는 유대인 약사 안톤 밀히와 가톨릭 교도 클라라 밀히 사이에서 태어난 '''반쪽 유대인(Half-Jew)'''이 아니라, 가톨릭 교도 클라라와 그녀의 외삼촌(→ 가톨릭 교도[18])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므로 '''가톨릭 교도'''가 되는 것이다.
다른 출처를 인용하자면, 데이비드 어빙이 쓴 밀히의 평전 <루프트바페의 흥망성쇠(The Rise and Fall of the Luftwaffe[19])>에 따르면

(...) The city’s records show that one Anton Milch, apothecary of the Kaiser’s navy, had registered ‘a male child born to his wife, Klara Auguste Wilhelmine Milch, née Vetter, '''also[20]

of the Protestant faith'''’.⁴ Of Anton Milch there is little that can be said, or needs to be, '''for he was not the real father of the child.'''

▶ (중략) 이 도시[21]

의 기록에 따르면 제국 해군의 약제상으로 일하던 안톤 밀히라는 한 남자가 아내 클라라 아우구스테 빌헬르미네 밀히(결혼 전 성 베테르)가 임신한 남자아이(의 종교)를 ('''아내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개신교'''로 등록했다고 한다. 안톤이 개신교도였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안톤은 그 아이의 친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안톤과 클라라의 종교가 서로 달랐음을 추측하게 한다. 가톨릭과 개신교로 두 출처의 정보가 서로 다르지만 클라라가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없으므로 크게 중요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를 통해 안톤은 유대인인데 밀히의 친부가 아니고, 클라라는 밀히의 친모이지만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데 첫 출처에서 밀히의 친부는 클라라의 외삼촌 카를 브라우어라고 설명했고, <The Rise and Fall of the Luftwaffe>에서도 같은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즉 '''에르하르트 밀히는 가톨릭/개신교 쪽으로 분류되며 유대인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에르하르트 밀히가 유대인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앞서 '요약'에서 밝혔듯이 그냥 '''널리 알려진 양아버지가 유대인이었으니까 (제3제국 때나 지금이나) 밀히도 유대인으로 분류된 것이다.''' 괴링이 밀히의 처지를 구해 주기 위해 벌인 일련의 행동도 일종의 '''정치적 쇼'''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 듯하다. 게다가 밀히의 모친 클라라의 양심 고백서를 확인시켜 주는 부친 안톤이 밀히에게 쓴 편지의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데다가, 상술했듯 영어 위키백과의 에르하르트 밀히 항목에서 '밀히의 아버지는 유대인 약사다'라고 그냥 '''단언'''해 버리고, 위키백과의 인지도가 다른 출처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까닭에 다른 출처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밀히를 유대인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영미권 웹부터가 그렇다. 이 글, 이 글에서 여전히 밀히를 유대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정황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이고 아이러니하기 때문에 쉽게 부정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유대인을 극도로 증오한 나치 독일에서, 공군의 2인자인 고위 장성이 유대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리를 보전했다는게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글에서 밀히가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유명해지지 못한 내용이라 비슷한 내용의 게시글을 찾기는 어렵다. 당장 나무위키에서도 에르하르트 밀히 문서가 작성되기 이전, 독일군/원수 항목이나 나치 독일/인물 항목에서 밀히를 그냥 '''유대인 출신 장교'''라고 설명해 놓았다.
재차 요약한다면, '''유대인이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유대인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진 인물'''이라 표현하면 좋을 듯. 그리고 이딴 식으로 혈통에 집착하는 나치가 왜 정상이 아닌지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괴링 덕분에 밀히는 유대인이라는 혐의는 벗을 수 있었지만, '''사생아'''라는 만만찮은 굴욕적 칭호도 동시에 얻었다(…) 이후 밀히는 독일인 순혈 증명서를 항상 지참하고 다녀야 했고, 명예 아리아인(Ehrenarier)이라는 또 다른 칭호도 얻었다.
밀히 재판 도중 밀히는 혈통에 관해 계속 추궁당해야 했고, 그 자신에게도 충분히 아픈 기억인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법정에서 치부를 직접 언급해야 해서 많이 괴로워했다. 나중에 남긴 일기에 '''묻어 두려고 했는데 계속 캐물으니 돌아 버릴 지경이다'''라고 남겼다.

2.2.4. 메서슈미트 사와의 계약


어쨌거나 밀히는 위기를 잘 잘 넘겨내고 공군 재건 사업에 계속 매달렸다. 밀히는 메서슈미트 사와 계약을 맺고 항공기를 납품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초기 모델 중 하나인 메서슈미트 M20이 결함이 많아 시운전 중 계속 작동 오류를 일으키다가 밀히의 친구 중 한 명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분노한 밀히는 1931년 메서슈미트 사와 관계를 파기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 중인 1938년 재계약을 하여 Bf109 같이 좋은 성능의 기체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Bf109는 원래 바이에른 항공사(Bayerische Flugzeugwerke, BFW)가 만들던 비행기였는데 BFW는 1927년 메서슈미트 사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M20의 한심한 성능에 분노한 밀히는 BFW를 강제로 파산시켜 1933년까지 영업하지 못하게 하고, 메서슈미트 사가 BFW를 합병하는 것도 1938년까지 금지시켰다. 1938년이 되어서야 Bf109에 메서슈미트 사의 이름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2.2.5. 스페인 내전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히틀러는 강화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전 경험이 전무했던 루프트바페의 성장을 위해 밀히로 하여금 공군 부대를 스페인 제2공화국에 파견하는 임무를 맡겼다. 밀히는 지원자로 이루어진 부대를 창설한 후, 보안을 위해 공식적으로는 이들의 성명을 루프트바페에서 제명한 후 '콘도르 군단(Condor Legion)'이라 명명하고 이들을 보냈다. 이 의용군을 이끈 사령관이 바로 상기한 공군 원수 중 한 명인 후고 슈페를레(당시 소장)였다. 콘도르 군단은 실전 참전 경험을 통해 발전 가능성을 모색했다. Bf109가 데뷔전을 치른 곳이 바로 이 스페인 내전이었다.

3. 밀히 재판



에르하르트 밀히는 1947년 1월 2일부터 1947년 4월 17일까지 열린 뉘른베르크 계속재판 중 두번째 재판에 유일한 피고로 기소되었는데 기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에르하르트 밀히는 노예노동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쟁범죄를 고의적으로 범한 혐의, 또한 전쟁포로를 국제관습 및 국제법과 전쟁관습에 배치되는 전쟁작전에 자발적으로 또 고의적으로 이용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2. 밀히는 피험자들의 동의 없이 그들에게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의학 실험을 자행한 것에 고의적으로 또 기꺼이 함여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3. 밀히의 세 번째 기소 내용 역시 노예노동과 치명적 의학 실험에 대한 책임에 관한 것으로서, 앞선 두 내용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으나, 여기서는 주장된 피해자를 독일 민족 또는 다른 나라의 독일계 거주자로 한정한다
밀히는 1946년 12월 20일 모든 기소 내용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기소내용 중 1번과 3번에 대해 유죄를, 2번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1947년 4월 17일 밀히는 뮌헨 근교의 레프도르프 교도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51년 존 J. 맥클로이 고등판무관에 의해 1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54년 사면되었다.
투옥되어 있던 동안 밀히는 미국 대법원에 인신보호청원을 탄원했다.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4. 기타



5. 진급 내역


  • 1910.10.18 : 사관후보생(Fähnrich)
  • 1911.08.18 : 소위(Leutnant)
  • 1915.08.15 : 중위(Oberleutnant)
  • 1918.08.18 : 대위(Hauptmann)
  • 1933.10.28 : 대령(Oberst)
  • 1934.03.24 : 소장(Generalmajor)
  • 1935.03.28 : 중장(Generalleutnant)
  • 1936.01.30 : 임시 항공대장(Temporary General der Flieger)
  • 1936.04.20 : 항공대장(General der Flieger)
  • 1938.11.01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0.07.01 : 원수(Generalfeldmarschall)

[1] 번역은 '비행단(Fighter Wing)'이라고 하지만, 많은 곳에서 비행대대(Flying Squadron) 등으로 돌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많아 봐야 항공기 10여 대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 독일 해군 항공대 출신이자 푸르 르 메리테 훈장 수훈자. 격추수 31기.[3] 항공 우편은 기차보다 속도가 빨랐지만 가격이 비쌌다고 한다.[4] 이때 가장 많이 썼던 항공기가 융커스 F-13였다.[5] 기체 번호를 페인트로 덮어 씌우는 등 발악을 했지만 결국 뽀록이 나 버렸다.[6] 사실 밀히가 만든 전대 루프트한자는 패전 직후 파산했고, 현 루프트한자는 1953년 서독 정부 주도로 설립된 '루프탁'(Luftag)에서 상표권을 매수한 것이다. 그럼에도 루프트한자란 브랜드의 과거사까지 지워내진 못했다. 1990년대부터 독일 역사학계에 자사의 역사를 연구해 줄 것을 의뢰했고, 설립 75주년이 되는 2001년에 그 연구 성과를 출판할 예정이었으나 돌연 취소했다. 전대 루프트한자의 설립자가 누구인지 알고는 흑역사가 까발려질까 두려워한 것. 출처는 이곳. [7] '독일군 참모본부, 혹은 그 유사 조직은 해체하고 어느 형태로든지 재건을 금지한다(The Great German General Staff and all similar organisations shall be dissolved and may not be reconstituted in any form)' [8] 한스 폰 젝트 장군 휘하의 '공군 자문관'으로 발탁된 사람도 있었다.[9] 이 말의 원조는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Wien)의 시장이었던 카를 루에거(Karl Lueger)이다. 부유한 빈의 유대인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이다.[10]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부인. 계부가 유대인이었다는 설이 있다.[11] 대부 헤르만 폰 에펜슈타인(Hermann von Eppenstein) 백작이 유대인 핏줄이었다고 한다.[12] 항목을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지만, 초기 이력(Early Life) 단락에서 안톤 밀히가 그냥 아버지라고 서술해 놓아 생부, 친부의 구분을 처음 보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게 해 놓았다.[13]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명확히 알 수 없어서 중립적인 표현으로 기술함.[14] 아돌프 히틀러/생애 항목의 첫 부분 참조.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시클그루버가 3번째로 결혼해 낳은 자식이 히틀러인데, 문제는 그 3번째 부인이 클라라 푈즐, 즉 '''알로이스의 누나 '요안나 푈즐 히틀러'의 '''이었던 것.[15] 직역해 놓은 부분이지만 쉽게 말하면 그냥 바람 펴서 낳은 사생아가 아니라는 것(…) [16] <The Rise and Fall of the Luftwaffe>에 따르면, 밀히가 안톤을 찾아갔을 때 안톤이 '''직접''' 건넨 편지라고 한다.[17] 원문 작성자가 오타 낸 것으로 추정된다. is를 지우면 문장 문법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18] 위 인용문에서 클라라의 가족은 모두 가톨릭 교도였다고 설명하고 있다.[19] 영문 제목으로 구글에 검색하면 전문을 PDF로 볼 수 있다.[20] 이 also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책에서 정확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안톤과 클라라 중 한 명의 종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뒷 문장에서 안톤의 경우는 부정하는 것으로 보아 클라라의 종교가 개신교인 것으로 추정하고 그것으로 서술한다.[21] 에르하르트 밀히의 고향 빌헬름스하펜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