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생애
1. 가족사
아돌프 히틀러의 할머니인 마리아 안나 시클그루버(Anna Maria Schicklgruber)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와 동거하던 중,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를 혼외자로 낳았다.
마리아 시클그루버는 알로이스는 출생신고는 곧바로 했지만, 정작 히들러와의 혼인신고는 하지 않고 계속 동거상태를 유지하였다. 알로이스가 태어난 이후 5년이 지나서야 히들러와 뒤늦게 혼인신고를 하였고, 이미 태어나 있던 알로이스는 친자로 입적하지 않고 동거자로 표시했다. 이 히들러라는 성은 고정된 철자가 없이 휘틀러(Hütler)로 쓰이기도 했다.
요한 히들러는 혼인신고 이후 어디론가로 가출하였고, 알로이스는 어머니의 성 시클그루버를 가지고 알로이스 시클그루버(Alois Schicklgruber)라는 이름으로 삼촌(아버지의 동생)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Johann Nepomuk Hiedler)의 아래에서 자랐다. 그런데 "네포무크"는 체코식 이름 ("네포무크의 요한"은 체코의 가톨릭 성인)이었기 때문에 이는 히틀러 집안이 체코계라고 추정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2] 또한 브라우나우암인은 체코와의 접경인데다가 오스트리아와 체코는 1526년부터 한 나라였으며 같은 가톨릭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접경지에서 독일인과 체코인 간의 혼혈은 흔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라는 성 또한 이와 비슷한 Hudler(혹은 hidlar, hidlarček)라는 체코 성씨가 있기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 스스로가 순혈 게르만족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과는 달리, 실은 체코인(서슬라브인)의 혼혈일 합리적 의심도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또, 간혹 히틀러가 유대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신빙성은 매우 낮다. 역사학자들도 이에 매우 회의적이다. 히틀러 유대인 설의 대표적인 주장인, 히틀러의 친할아버지가 프랑켄 베르거라는 이름의 유대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히틀러의 고향에 그 이름을 가진 유대인은 하나도 없었다고 부정한다. 특히 이 주장의 출처인 히스토리 채널은 이름과는 달리 흥미위주의 괴상한 음모론을 자주 들이대는 가십성 미디어이다.
어쨌든 요한 히들러는 나중에 돌아와 이름을 히틀러라고 바꾸었고 이 철자가 굳어지면서 알로이스에게도 전해진다.
알로이스는 자라나서 세관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세무서장(세관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인데, 이는 당시로서도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그는 결혼을 세 번 했다. 첫 결혼은 상사의 친척인 스무살 이상의 연상이었던 돈 많은 여자 안나 글라슬과 했다. 그런데 첫째 아내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을때 하녀였던 프란치스카 마첼베르거와 바람을 피웠고 하녀는 임신을 하게 된다. 첫째 부인이 자녀 없이 죽자 그 하녀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그 사이에서 이복 형제/자매들인 알로이스와 앙겔라가 태어났다. 두 번째 아내가 죽기 전에도 바람을 피워서 임신을 시키고 2번째 아내가 죽자 3번째 결혼을 한다. 3번째 아내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의 생모 클라라 푈츨이었다. 정리하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처는 모두 병사했고, 첫 번째 부인의 집안으로부터 유산과 집안을 물려받아 알로이스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는 세번째의 결혼에서 여러 명의 자식을 얻게 된다. 이 중 네 번째 자식이 바로 아돌프였다.
헌데 여기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그 3번째 부인이라는 여자의 정체였다. 알로이스의 '''사촌누나 요안나 히틀러 푈츨의 딸'''인 클라라 푈츨이었던 것이다. 외당숙과 종질녀 사이에서 나온 근친상간아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던 거다. 알로이스는 자기 종질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것이다.
영국의 전기작가 이안 커쇼의 주장에 따르면, 법적으로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를 키워 준 삼촌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가 알로이스의 진짜 생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아돌프의 친할머니 마리아 안나 시클그루버는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를 낳고 5년 후에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결혼한다. 이 부부가 죽은 지 약 20여년 뒤 요한 히들러의 동생이 '실은 우리 형님이 알로이스를 친자식으로 인정했었다니까요.' 하면서 교회에 뇌물을 먹이고 사후 입적시켰는데, 이런 비정상적인 입적은 알로이스 히틀러의 삼촌이 실은 그의 생부였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알로이스는 당시 50이 넘은데다가 이미 세관장으로 출세한 상태였고, 사생아로서 받는 사회적 차별도 거의 없었기에 출생의 사실을 감추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호적 변경도 삼촌(요한 히들러의 동생)이 주도한 데다가 나중에는 알로이스에게 재산도 상속해줬다. 그런데 후에 알로이스는 히틀러로 성을 바꾸고 생부로 의심되는 삼촌의 손녀와 결혼하는데 그녀가 아돌프 히틀러의 생모다. 이는 교회법으로도 근친이 명백하고 법적으로도 5촌(삼촌이 생부라면 삼촌-조카지간)인데, 결혼 당시 알로이스 히틀러가 직접 로마를 방문해서 교회에 바친 뇌물로써 그를 호적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2. 가계도
2.1. 히틀러의 선조
- 할아버지 :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3] (1792년 ~ 1857년)
- 할머니 : 마리아 시클그루버(1795년 ~ 1847년)
- 작은할아버지 :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1807년 ~ 1888년)
- 작은할머니 : 에바 마리아 데커(1792년 ~ 1873년)
2.2. 히틀러의 '''이복''' 형제자매
2.3. 히틀러의 '''친''' 형제자매
2.4. 이복 형제들의 후손
- 조카며느리 : 릴리 진 재퀴스(1925년 ~ 2004년)
- 이복형수 : 헤트비히 하이데만[7]
- 조카 : 하인츠 히틀러(1920년 3월 14일 ~ 1942년)[8]
- 이복누나 : 앙겔라 히틀러 라우발 (1883년 ~ 1949년)
- 이복매형: 레오 라우발 (1879년~ 1910년)
- 외조카: 레오 라우발 주니어 (1906년~ 1977년)
- 진외종손자: 페트로 라우발(1931년~)
- 외조카: 겔리 라우발 (1908년~ 1931년)[9]
- 외조카: 엘프리데 라우발 (1910년~ 1993년)
- 외조카사위: 에른스트 호체거 (1910년~ ?)
- 외외종손자: 하이너 호체거(1945년~ )
- 이복매형: 마르틴 함미취 (1878년~ 1945년)
3.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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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 시절의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히틀러 사이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형들과 3명의 친형이 있었지만 친형들은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에 모두 사망했다. 아돌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접경도시인 브라우나우 암 인[10] 에서 태어났는데, 얼마후 도나우 강변의 린츠로 이사하여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 30여년간 가출한 채 바깥에 있었던 알로이스의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는 히틀러(Hitler)라는 성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나타났다.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의 성인 시클그루버를 버리고 히틀러로 성을 바꿨고 아돌프도 정식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된다.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운 성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왜냐하면 시클그루버라는 성은 촌스러운 축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갖고 연합군들은 "니네 총통이란 사람 오스트리아 페인트공 출신으로 원래 성씨는 '시클그루버'랜다." 라며 전쟁 말년까지 독일군을 조롱했다.
어린 시절 히틀러의 가정은 지방 세무서장인 아버지 덕에 엄청난 부자집안까지는 아니지만, 히틀러를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에 보낼만큼 중산층 중에서도 잘 사는 편이었다. 다만 아버지는 가족한테 제대로 잘해주지도 않으면서 걸핏하면 아내와 자식을 때리고 폭언을 일삼는 난폭한 폭력가장이었다. 이 때문에 아돌프의 이복형 알로이스는 가출을 했고, 2차 대전 쯤에 영국에 정착해 버린다.[11] 그 중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장래희망으로 아버지와 자주 갈등을 빚었는데, 아버지는 난폭하고 권위주의적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인지라 자식들이 힘든 삶을 살기를 원치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는 히틀러에게 공무원이 되기를 강요하면서 폭력까지 일삼은 탓에 아들과의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12] 반대로 어머니는 아돌프가 태어나기 전 자식을 여러 번 잃어서 그를 애지중지했다고 한다.[13] 자식의 잦은 사망은 근친관계로 인한 건강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결국엔 히틀러와 동복 여동생 파울라만 생존한다. 이때문인지 동복 여동생 파울라를 히틀러가 잘 챙겨주었다.[14]
아버지 알로이스가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가장인 탓에 히틀러는 아버지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 『나의 투쟁』에서도 아버지의 대한 회상을 일부 볼 수 있는데, 알로이스가 뇌일혈로 사망했을 당시의 반응을 보면 마냥 히틀러가 아버지를 미워하기만 했다고 보기 힘들다. 요약하면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존경했으나 사랑을 느낀 기억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인자한 성격의 어머니 클라라를 몹시 좋아했다. 클라라가 사망했을 때 히틀러 가문의 주치의인 에드바르트 블로흐가 "아돌프만큼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에 그렇게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고 증언했을 정도.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인종차별적인 행동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서 온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알로이스는 전형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로서 제국이 표방하는 다민족, 다문화적 그 가치관을 자식들에게 주장했고 특히 알로이스의 근무지인 린츠는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인의 접경지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민족적인 가치관을 가졌고 결혼을 통한 혼혈도 많은 지역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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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의 히틀러.(가운데)
히틀러는 초등학교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실업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내 학업에 흥미를 잃어버렸다.[15] 실업학교 중등과정까지는 이수했으나, 고등과정은 유급당하다가 결국 자퇴한다. 나중에 어머니의 간청으로 전학을 가서 다시 진학해보지만 결국 또 다시 자퇴를 하게된다. 이 시기에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가 사망하는데 히틀러가 13살 즈음이 되었던 때였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공무원 생활에서 은퇴하고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평소에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16] 그렇지만 그는 가족들에게 유산과 연금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엔 별 다른 타격이 없었다고한다. 다만 수십 년 후 인류의 적이 된 아들 놈이 그 재산들을 다 날려먹는다.
- 유럽의 실업학교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취업을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의 실업계 고등학교와는 다르며, 순수학문을 탐구하는 분야로 진학하지 않으면 보통 실업학교에 갔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수학 과학 교육과정이 많으며, 졸업 후에는 취직하거나 이공계 실용대학으로 진학할수 있다. 의대나 법대, 자연과학, 인문학같은 순수학문으로 진학하려면 실업학교를 나와 김나지움 3년 과정과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현재도 유럽의 실업학교는 공부가 힘들고 어려워서 유급당하거나 자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다 보니 학업에 흥미도 없고 이해력도 부족한 히틀러가 이런 어려운 과정에 적응할 리가 없었다.
-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푀슈라는 역사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나의 투쟁에 히틀러가 정치적인 선전을 위해서 쑤셔넣은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는 주장이 많으며, 실제로 유년기에는 역사시험에서 낙제를 면하지 못할 정도의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부터는 역사에 관한 조예가 꽤 깊어졌는데, 한때 측근이었던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미술에 관한 책들과 더불어 독일 근현대 역사책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17] 총통에 되고난 뒤에도 식사 자리에서 종종 세계사 이야기를 한것을 보면 편견과 달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해박했다.
4. 화가지망생 히틀러
1905년 만으로 16살의 나이로 결국 히틀러는 무작정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였던 빈에 올라왔다.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빈으로의 유학(?)도 다른 가족들로부터는 별 반대가 없었다. 갓 상경한 시골뜨기에게 웅장한 건물과 예술의 향기가 가득했던 빈은 신세계였고, 히틀러는 예술가를 꿈꾸며 국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을 지원하지만 낙방하였다. 재수까지 하지만 이듬해에도 낙방[18] . 연이은 낙방에 직접 미술학교 교장에게 찾아가 항의하자, 공교롭게도 유대인었던 교장은 "자네의 그림은 예술이라기보다도 건축에 가깝네. 건축학교로 가는게 어떤가?"라며 권유했다.[19] 그러나 건축학교 입학은 실업학교 졸업증이 필요했고, 히틀러는 실업학교 중등과정만 마치고 중퇴해서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었다. 또한, 다른 교육을 받으려해도 능력이 안되는 나머지 받을 수가 없어 좌절하고 만다.[20] 이런 좌절은 히틀러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이는 후에 나치 지도자가 된 힘러, 괴링, 룀, 괴벨스 등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었다. 따라서 어느 심리학자들은 한번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더욱 큰 차원의 목표에 눈을 돌리게 되고, 그 결과가 훗날 나치의 목표로 발현되었다고 분석한다.[21]
히틀러는 이때부터 방황하면서 일정한 목표 없이 백수짓을 전전했다. 하지만 나의 투쟁에서의 기록들과는 달리, 빈에서 살던 시절에도 처음부터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지는 않았다. 세무서장 출신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과, 독신이라 자식이 없는 고모들이 물려준 재산을 쓰고 다녔다. 또한, 어머니도 생전에 히틀러한테 용돈을 두둑하게 주었다.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에서는 그가 부업 삼아서 그리던 그림엽서가 잘 팔리면서 금전적으로는 별로 곤란을 겪진 않았다고 한다. 또한 주기적으로 자식이 없는 고모나 외가쪽 이모들에게 피아노를 산다거나 레슨을 받는다거나 그림 도구를 산다는 명목으로 나중에 물려줄 유산도 '가불'해서 썼을 뿐더러 이런 용돈들로 옷을 사고 바그너의 오페라 등을 보러 다니며, 연주회와 전시회에 다니면서 할 일 없이 놀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수중에 있는 돈은 상당히 많았고 연금과 유산상속 등으로 받은 재산을 '아껴만 쓴다면' 얼마든지 일을 안 하고도 생활은 가능했다.
실제로 히틀러가 독신자 숙소를 전전하며 삶을 이어갔던 세월은 고작 1~2년에 불과 했고, 빈 시절 초기 그가 받은 한달 연금은 당시 '''초임 배석판사의 월급보다 많았다'''고 한다. 연금을 여러 개 수령해서 여동생 파울라한테 수령을 양보할 정도였다니 그의 물려 받은 재력이 상상이 간다. 결국 나의 투쟁의 기록은 자신의 생애를 고의적으로 비참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을 더욱 신화적 존재로 '형성' 하려 하는 왜곡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받는 돈과는 별개로 히틀러 본인에게는 경제관념 따위는 없었고, 배석판사 만큼 받는 돈으로도 부족해서 고모나 어머니에게 다시 손벌리기 일쑤였다. '먹고 사는 문제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집권 후에도 경제에 대해서는 무식했던 히틀러는 추종자들에게 경제 같은 건 '의지에 달렸다' 라고 했다. 이러니 경제 분야에서는 스스로 무능한 터라 아예 경제 전문가들한테 다 맡기며 경제에 관한 것은 그들 말대로만 했다. 다행히 당시 나치정권에서 새로 뽑은 경제장관과 제국은행총재가 매우 유능했던 터라 독일의 심각했던 인플레이션과 대공황의 위기로 붕괴되는 독일경제를 살려낼 수 있었다. 어쩌면 나의 투쟁에서 말하던 밑바닥 인생이란 자신의 기준에서의 밑바닥 이었을지도...
빈에서의 실패 이후, 미술가를 꿈꾼 히틀러는 심약한 어머니를 설득해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파리로 간다.[22] 하지만 야수파, 인상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혁신적인 화풍들이 인기를 끌던 당시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딱딱한 화풍만을 너무 선호한 나머지 그저그런 미술학도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전기 작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그림 실력은 정말 '미술가 지망생' 수준이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정치가로 출세한 후에 예전의 그 그림들이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자, 스스로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았나 보는지 그런 그림들은 그만한 값을 치르고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림들 대부분도 건축물에 대한 단순한 모사(模寫)화이다.
여하튼 화가가 되지 못했을 뿐더러 건축대에도 입학하지 못한 히틀러는 한동안 빈에서 그림엽서 등을 그리며 생계를 꾸려갔는데, 본인은 매우 불우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수개월에서 1년 사이 정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먹고 사는데 큰 문제는 없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빈에서 시작한 그림엽서 '화가' 인생은 1차 대전이 터지기 1년 전부터는 장사가 더 잘되는 뮌헨으로 옮겨서 전쟁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뮌헨에서는 상업광고에 까지도 손을 대서 찌라시용[23] 그림들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런 그림들이 그리긴 더 쉽고 벌이도 그림엽서 보다 훨씬 좋은데다가 평도 나쁘지 않아서 전쟁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이쪽으로 쭈욱 눌러 앉았을 수도 있었다.
미술학교 입학신청을 거부당했다는 점과 히틀러의 라이벌들이 예술 취미에서 히틀러보다 더 나은 수준을 보여준 점[24] 때문에 히틀러의 미술적 재능이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미술에 재능이 없다는 건 예술가로서 비엔나 아카데미라는 상당한 수준의 학교를 가고 싶어했을 때의 이야기며 좀 더 목표를 낮게 잡아서 교육을 받았더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거창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웬만한 은행원 수준의 수익을 얻을 만큼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실제로 별다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그림의 모작조차도 못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학원에서 돈 주고 미술을 배운다 쳐도 재능이 평범한 수준이거나 그보다 못 한 사람의 경우는 히틀러 정도의 그림을 그려내는 수준까지 도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만약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히틀러는 유명한 예술가까지는 못 되더라도, 적당히 그림 그려가며 돈 벌어 먹고 사는 상업화가로 살아갔을 수도 있는 일이다.
5.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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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의 히틀러(가장 오른쪽)
이렇게 자칭 예술가, 실제로는 백수와 다름없는 무의미한 삶을 보내던 히틀러에게 삶을 바꿀 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이었다. 독일 통일을 이룬뒤 제국이 선포된 이래에 황제의 독일 제국은 불패를 자랑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적어도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 당시에는 거의 전 독일인이 조국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 국민들은 전쟁을 환영했는데,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기뻐하는 히틀러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해당 사진뮌헨에 와서도 무위도식하며 지내던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다. 히틀러는 연락병으로 복무하면서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큰 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히틀러에게 전쟁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히틀러에게 군대는 바로 집이었다.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히틀러를 살린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을 겪지 않았더라면, 패전의 굴욕과 혁명의 격변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실패한 예술가, 사회 낙오자는 정치에 뛰어들어 선전가로서, 또 맥주홀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선동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찾아내 그것을 업으로 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패전, 혁명의 상처가 없었더라면, 이런 상처로 말미암아 독일 사회가 정치적으로 급진화되지 않았더라면, 선동가는 악에 받치고 증오에 찬 말을 들어줄 청중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패전의 후유증으로 히틀러의 길과 독일 민족의 길이 만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비스마르크가 앉았던 총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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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3장 전선의 연락병(133쪽)
원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에선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었다. 신체적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스트리아 육군 복무 부적합은 엄밀하게 말해서 병역기피행위에 기인한 것이었다. 요아힘 C. 페스트는 《히틀러 평전》에서 "당시 히틀러는 군대의 시스템을 억압적인 학교와 비슷하게 느꼈고, 그로 인해 계획적으로 뮌헨으로 도주하였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이후 오스트리아 법에 따라 병역 기피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심신미약과 재정적 기반 없음 등의 이유로 면제 처리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군정 당국이 심신미약...으로 처리한 이유는 "군대가 무서워서 도망칠 정도의 겁쟁이는 필요없다." 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독일 정부에 청원까지 하여 바이에른 왕국군에 자진입대했다. 자진입대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군대는 신체적 구속이었지만, 전쟁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옆나라인 독일 육군에 입대한 이유는, 당시 오헝 제국군이 손가락으로 세다가 모자라서 발가락까지 동원해야 헤아려야 할 만큼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라[26] , 자신이 혐오하는 슬라브 병사들과 같이 싸울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청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어떻게 히틀러가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청원서를 보내고, 그 청원서를 윗선에서 검토한 뒤 오스트리아 국적인 히틀러에게 바이에른 군의 입대를 공식 허락한다는 과정을 증명할 증거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개전 직후인 그 혼란한 상황에서, 히틀러의 진술대로 고작 하루 만에(1914년 8월 3일에 청원서를 보냄)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졌다는건 납득하기 어렵다. 히틀러는 아마도 청원서를 개인적으로 보냈겠지만, 그 당시의 혼란 상황 때문에 업무 착오로 숱한 바이에른의 지원자들과 함께 입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어쨌든 그는 바이에른 왕국[27] 육군에서 복무했는데 리스트 연대에서 연락병으로 활동했다. 히틀러의 연락병 복무를 두고 일설에는 전방에서 근무한 같은 연대의 동료이 히틀러처럼 전선에서 벗어난 후방부대원과 사령부에서 펜대나 굴리는 참모 장교들을 두고 '저 후방의 돼지(Etappenschweine)들은 총검으로 통조림을 열지 못해 통조림 공장에서 굶어 죽을 것'이라고 조롱했다는 말이 있는데 히틀러가 후방 출신이라는 선전은 30년대 정적들의 카더라로 신빙성이 낮다.[출처] 실제로 연락병은 참호를 나와 전선까지 가야 했기에 상당히 위험한 보직이었다. 전방이든 후방이든 전시라서 저격수들이 득실대는데다, 참호를 벗어나면 박격포와 곡사포의 표적이 되었으며, 통신수단이 미비했던 당시에는 포격 후에 병력을 돌격시키다가 전령투입이 늦어서 시간차 파악이 잘못될 경우 아군의 오폭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28]
1914년 히틀러는 이프르[29] 에 첫 배치를 받았고 10월부터 격전이 시작되자. 2달만에 소속 연대의 3600명 중 연대장까지 포함해서 3000명이 전사[30] 하는 생사를 오고가는 격전을 치렀다. 어떤 날은 히틀러가 연대사령부를 막 나간지 몇 분만에 프랑스군의 포탄이 강타하여 안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망하였던 사건도 있었다. 게다가 연대에 속해 있던 연락병 60명들 중에서 훈장을 수여 받은 병사는 히틀러를 포함하여 4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을 때 히틀러가 뮌헨에 있는 몇 없던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에선 1914년 말에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서 거의 자신만이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고 한다.
주위 전우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반적인 병사들의 사고관과는 조금 다르게, 언제나 독일의 국가적인 운명과 미래를 생각하는 등 현실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몽상가적인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단 1통의 편지나 소포도 받지 못했고 술·담배도 안 했으며(매음굴에 가는 데는 관심도 없었고) 남는 시간에 가끔씩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고 한다.
1914년 11월 1일 히틀러는 상병으로 진급했고 이것이 히틀러의 마지막 진급이었다. 부사관 막스 아만과 연대 인사주임은 히틀러를 부사관으로 진급시킬 것을 고려했으나 히틀러는 다른 부대로 전출되는 것이 싫어서 진급 대상자로 지명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인사기록으론 히틀러가 부사관으로 진급하기엔 인간관계나 통솔력에 문제가 있다고 남아 있다. 이렇게 괴짜 취급은 받았지만 상사나 동료들에게 받은 평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히틀러를 하사로 추천했던 소속부대 주임상사 막스 아만은 후에 나치당 중앙기관지의 출판사장이 되었고 불우한 연대 출신 전우들을 나치당 하급 지도자로 채용하거나 돈 몇푼 씩 쥐어주면서 나름 챙겨 주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당시 히틀러는 전우들과 속깊은 교류는 하지 않았으나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관계였고 시키는 임무는 충실히 수행해내는 사병이있다.
1916년 10월 9일 히틀러는 부상을 입는다. 소문에는 이때 혹은 맥주홀 폭동때 고환 하나를 잃었다는 소문이 돌아서 연합군이 놀렸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어찌됐든 히틀러는 2달 가까이를 베를린 부근 벨리츠에 있던 적십자병원에서 보냈다. 이 때 히틀러는 사기가 저하된 군인들과, 히틀러가 보기에 각종 꾀병을 부려서 병원으로 이송되어 온 환자[31] 들, 후방에서 반전운동을 벌이는 사회주의자들과 파업을 일삼는 노동조합 등을 보고 크게 경악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훗날 배후중상설을 신봉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이를 모두 유대인의 음모로 보았다.
1918년 6월 전쟁 말기에 히틀러는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는데, 훈장을 추천받은 이유는 기록이 말소되어 정확하겐 알 수 없다. 잘 알려진 사유인 유대인 장교인 후고 구트만 육군 중위[32] 가 추천해서 없앴는지는 원본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다. 어쨌든 1급 철십자 훈장은 특별한 소수만 받을 수 있어서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출세하는데도 큰 자산이 되었다. 혹자는 히틀러가 구트만 중위와 친해서 받은 거라고 까지만 독일 제국군 훈장 서훈은 매우 엄격해서 단순히 간부들과 친하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구트만 중위가 적극 추천한다 가정해도 하급 장교 중위 나부랭이 수준의 추천은 그냥 참고 사항일 뿐이다. 그냥 4년 동안 열심히 전선에서 열심히 복무한 대가로 받았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다.[출처] 또는 히틀러는 사령부 소속 연락병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훈공이 인정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공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상등병에 머물렀고, 몇 년 동안 히틀러는 승진이 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독일군이 우수한 하사관과 베테랑 병사들이 대거 전사하자 사령부에선 전령으로 우수한 히틀러를 사지로 보내지 않기 위해 계급을 머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당시 자기 주장이 강해야만 승진이 고려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히틀러는 상관에게 자신의 주장을 쉽게 자화자찬하는 성격이 아니였기 때문에 승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종전이 가까워졌을 무렵에 히틀러는 전투 중에 독가스를 들이마시고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하여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독가스의 특성에 의해서 뇌 신경의 일부가 손상된 히틀러는 히스테리 증상을 진단받고 군의관의 치료를 받았다. 또 독가스에 의해서 기관지를 손상당했기에 목소리가 변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훗날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히틀러가 독가스 피해를 원인으로 병원으로 후송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주장이 많다. 전쟁 말기에 히틀러는 독가스 공격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고 야전병원에 있었다고 하는데,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독가스가 아닌 장기간 동안에 겪었던 최전선에서의 전투로 인한 PTSD 증세였을 수도 있다고 한다. 히틀러가 차마 "난 전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실려갔다"고는 말 못하겠으니, 당시 흔하게 벌어질 수 있었던 독가스 중독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후방에서 느껴지는 전쟁에 대한 회의적인 정서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고, 아직 입원해 있던 중에 결국 전쟁이 패배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자신의 꿈과 희망이 처절히 짓밟혔다는듯이 크게 울분을 터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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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연락병으로 근무하던 중 부상을 입은 히틀러는 당시 영국 육군 이등병이었던 '''헨리 텐디(Henry Tandey)'''와 조우했는데 핸리 탠디는 결국 그를 쏘지 않았다는 도시 전설이 있다. 헨리 텐디 위키 기사
6. 나치 입당 과정
1차 대전이 끝난 뒤, 독일 제국군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결국 히틀러는 종전 이후 참전 전에 자신이 생활했던 뮌헨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시 뮌헨은 공산주의자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정하며 소련식 볼셰비즘 정권을 수립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자신을 받아주고 대접한 곳인 군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노력하였고,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산하 제1예비대대 제7중대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전역 대대에서 하달된 지시는 히틀러를 중대 대의원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즉 히틀러는 볼셰비즘 정권을 타도하는데 힘을 쓰기는커녕 그 휘하 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한 것이었다. 비록 이 시절 볼셰비즘 정권 휘하의 대대에서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기회주의적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혁명 좌파에 반감을 품었다는 사실은 병영에서 같이 지낸 사람들에게 뇌리에 남은 듯 하다. 이 시기의 기록은 히틀러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나치가 총통을 신격화하고자 대부분 훼손하였으나, 요아힘 C. 페스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상당한 부분이 밝혀졌다. 전간기의 우유부단한 행적은 히틀러 집권 전까지 나치당을 비롯한 우파진영에서 두고두고 까였다.
일부에서는 히틀러가 당시 활동할 수 있던 군사 단체가 뮌헨의 볼셰비즘 군대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뮌헨 밖에서는 각종 우익집단이나 의용군 등이 활동 중이었다. 즉 히틀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서 볼셰비즘 군사활동에 참여했다기보다는, 단지 제대하지 않고 가능한 한 군에 오래 남고 싶다는 이유로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히틀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끝나버린 전쟁에 갈 곳을 찾지 못한 상당수의 군인들은 실업자라도 면하기 위해 가까운 지역의 군 집단에 지원하였고, 그마저도 실패하면 전후의 불안정한 정국에서 남아도는 무기로 정치깡패나 용병집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인생의 방향이 바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공산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러시아에 대한 독일인들의 공포와 질서에 대한 갈망이었다. 히틀러가 뮌헨에 좌파 군대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뮌헨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무능한 공화국의 안일한 행정에 힘입어 극좌 공산주의자들은 뮌헨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선언하였고, 그 과정에서 좌우쌍방의 무차별 테러와, 재산압류, 정치적 숙청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혼란은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혁명이란 야만적이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과 아름다운것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고 히틀러 역시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독일 국민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확한 파악을 하게 된다.
또 하나의 경험은, 바로 선전과 구호의 힘이었다. 히틀러는 스스로 자신이 "카를 마르크스에게 많이 배웠다." 라고 인정했는데 그것은 고루한 정치적 이념이 아닌 정치적 이념을 이룩하기 위한 선전효과였다. 광장마다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연설하는 사람,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자극적인 선전문구, 수많은 젊은이들이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행진하는 모습에서 히틀러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과거 독일 제국군에서는 볼수 없는 모습이었고, 그것과는 상이하게 다른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언젠가 자신의 것으로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뮌헨의 사회주의 혁명정부가 무너지자 히틀러는 부대원들의 보안 행적을 조사하는 뮌헨 심문에서 동료 대의원 두 명을 고발했다. 일설에 따르면 히틀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는 이곳에 굴러들어 온 유대인을 지키는 혁명군이 아니'라면서 코앞에 닥친 싸움에서 부대가 중립을 지킬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예비대대원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 열심히 가담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히틀러가 좌익정부의 대대 대의원에 속해있으면서도 오히려 볼셰비즘 정권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은 인사로 알려져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19년 5월 11일 소비에트 공화국을 무너뜨리는데 관여한 바이에른 군대를 모태로 하여 폰 묄 소장의 지시로 바이에른 제국군 제4집단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뮌헨 볼셰비즘 정권 붕괴 후 의용군과 같은 군집단에 의해서 뮌헨 행정이 복구되기 시작하면서 히틀러 역시 해당 군집단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군대의 조직을 동경해서 어떻게든 군대에 남으려고 했다. 이 때 당시 뮌헨은 혼란했으므로 새로운 민족주의와 반 볼셰비즘 이론을 군대에 교육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는 히틀러를 지켜본 상관에 의해 이 역할을 받게 되었고, 이때 동료들 앞에서 시국에 대해 연설하면서 이 방면의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에 대한 재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자기가 자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절망하던 상태였으므로, 재능을 자각한 순간 나름대로 그 방면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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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의용군에서 독일 내 소수정치단체 조사와 관련하여 정무적인 업무를 하고 있던 중 히틀러는 한 소수 정당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명령을 받고 간 곳이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이었다. 이 독일 노동자당이 이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나치가 된다.
이 독일 노동자당은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정치활동은 커녕 노동자나 고만고만한 서민들끼리 모여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게 전부인 보잘것 없는 조무래기 정당에 불과했다. 허름한 창고를 빌려 열린 당 토론회에 지루하게 앉아있던 히틀러가 떠나려던 무렵, 초청받은 바우만 교수가 바이에른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빡친 히틀러는 바우만 교수를 몰아붙였고 교수는 당혹스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틀러는 열변을 토해내었다. 당시의 당 의장이던 안톤 드렉슬러는 이 연설에 엄청난 감명을 받았고, 자기가 직접 쓴 책자를 건네며 정치 운동에 참가할 마음이 있다면 찾아오라고 권유했다. 처음엔 코웃음만 쳤던 히틀러지만[33] 이내 심경에 변화가 생겨 이에 응하고 당원번호 555번을 받게 된다. 나치당 당원 번호는 501번부터 시작이므로 55번째 당원이다.[34]
참고로 나치라는 단어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에서 National의 Na와 sozialistische의 zi를 합쳐 불렸다고 흔히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나치의 반대파들이 국가사회주의의 두음인 나찌(Nati-)를 영어로 음차해서 부르던 멸칭이었다. 현재는 워낙 대중화되어 일반인이든 네오 나치든간에 모두 나치라고 부르지만, 히틀러 무리들은 자신들을 NSDAP, 국가사회당 정도로 약칭했다.[35] 그리고 히틀러가 입당했을 시절에는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tische)라는 이름은 없었고 그냥 독일 노동자당이었다. 자물쇠 수리공인 안톤 드렉슬러가 친구들을 모아 결성한 정치모임에 가까웠지만, 히틀러가 여기서 주도적으로 일을 벌이고 주도권을 잡음에 따라 점차 히틀러 개인의 사당으로 변하고, 1921년 중반엔 당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굳힌다. 안톤 드렉슬러는 히틀러를 뒤늦게나마 쫓아내려다 역습을 당해 이름뿐인 지도자가 된다. 그래도 명색이 당수라서 나름 대접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극우 세력과 교섭, 그리고 당 세력 확장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나치당이 맥주홀 폭동 이후 재건되면서 히틀러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다가 실패하고, 1925년 당에서 자진 사퇴해서 딴 살림 차리다가 쫄딱 망했다.
영국 애버딘대학교 토머스 웨버 역사학 교수가 1919년에 새로 설립된 독일사회당(German Socialist party) 창당발기인 대표인 한스게오르그 그라징거의 증언에 기반해 작성된 미공개 문서에서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히틀러가 독일사회당 기관지 사무실에 찾아와 그라징거에게 기관지 기자로 일하고, 당에 합류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돈이 한 푼도 없던 히틀러는 그라징거에게 돈을 빌려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독일사회당) 기관지에는 일할 자리가 없고 당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히틀러에게 대답했다는 글이다.#
7. 히틀러의 연설 능력
히틀러의 탁월한 연설능력과 천부적인 선전선동능력에 기반하여, 나치당은 무수한 극단주의 군소정당의 하나에서 점차 세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빈의 부랑아 시절에 숙소에서 동료들에게 잡설을 늘어놓으며 연마한 웅변술과 오스트리아의 정치지형을 분석하면서 보유하게 된 정치적 안목은 나치당 입당 이후 히틀러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그는 기존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전매특허라는 인식 때문에 보수파 정치인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연설능력과 선동능력을 매우 중시했으며, 전속 사진가인 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여러 제스처를 찍고 이를 분석하여 자신의 연설과 맞는 제스처를 효과적으로 선별하여 사용, 열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히틀러의 역동적인 제스처는 히틀러를 모델로 한 가상의 인물에도 쓰이면서도 히틀러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할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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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히틀러의 제스처 중 하나를 칼라사진으로 복원한 사진.
이 즈음의 히틀러는 스스로를 영웅을 위한 선동가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의회에서 어느 정도의 세력을 얻은 뒤에도 선전·선동에만 집중하며 다른 부분은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회피하곤 했다. 그러나 이후 나치당의 성공을 보며 서서히 과대망상에 빠지면서 권력욕에 눈을 뜨게 되고, 자신이 곧 독일을 구할 영웅이라고 믿게 된다. 히틀러는 나치당 초기 당재정이 빈약할 때는, 자기의 연설을 들으러 오는 청중들에게 광고를 하는 방법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니까 한창 신나게 자기의 정견을 늘어놓은 다음에, 상품홍보활동이나 광고를 하고, 업체의 돈을 받은 것이다.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집회에서 들어온 연설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의 연설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베르사유 조약처럼 당시 사람 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를 잡아서 온갖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제 독일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유일한 활로는 무엇인가? 사이사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두 시간 반을 내리 연설했지만 더 길게 해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구구절절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 독일이 직면한 공포도, 고통도, 절망도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망가진 민족에게 유일하게 남은 활로가 무엇인지를 역사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그것은 용기, 믿음, 행동력, 근면성, 위대하고 찬란한 공동의 목표에 헌신하는 자세를 통해서 가장 깊은 나락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새 출발의 다짐이었다. …… 그날 저녁 이후로, 비록 당원은 아니었지만, 나는 독일의 운명을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히틀러뿐이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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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평전 1권 5장 맥주홀 선동가(239~240쪽), 한스 프랑크의 증언
실제로 히틀러의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득세 이후 정세가 불안해지자 영국이 독일에 스파이를 심었는데, 그 스파이가 ''''그의 연설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고 보고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워낙 심해서 '''목소리만''' 놓고 보면 별로 듣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실제로는 연설 이전에 행해지는 다양한 효과들에 의해 히틀러의 연설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히틀러 본인도 제스처나 그런 것들을 연구해서 활용하기도 했다. 청중을 사로잡았다던 히틀러의 연설은 대부분 이런 행사들의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과정을 세심하게 설계해서 연설이 먹히게 하는 것도 재능이긴 재능이다.히틀러는 누가 뭐래도 일급 배우였다. 청중이 빽빽이 들어찬 집회장에 일부러 늦게 나타나는 것이나 철저하게 계산된 연설, 다채로운 어휘 선택, 화려한 손짓과 몸짓까지 이 모두가 관객의 반응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갈고 닦은 연기력은 타고난 말솜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낮은 소리로, 머뭇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감미롭지는 않았지만 변화와 리듬이 있었고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쳤다. 문장을 스타카토처럼 딱딱 끊다가는 적당한 대목에서 속도를 줄이면서 핵심을 강조했다. 연설이 점점 달아오르면 손동작도 활발해졌고 적에 대한 신랄한 야유도 터져 나왔다. 1927년과 1929년에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아주 세부적인 데까지 신경을 쓰면서까지 히틀러는 청중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는 데 집착했다. 옷도 그때그때 모임의 성격에 맞게 입었다. 열성 지지자들이 모여드는 대규모 당 행사나 집회장에서는 하켄크로이츠 무늬가 팔뚝에 새겨진 연고동색 제복에 오른쪽 어깨에서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면서 내려오는 가죽띠를 매고 무릎가지 올라오는 가죽 군화를 신었다. 일반 청중을 상대할 때는 전투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고 점잖은 느낌을 주기 위해 검은 양복에 흰 셔츠를 입고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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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 평전 1권 (p. 412~414)
한편 이 히틀러의 연설은, 전후 비 독일어권 사람들의 독일어에 대한 편견을 쌓는데 크게 기여(?)했다. 히틀러의 연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세계로 퍼지게 되면서 자연히 히틀러의 억양과 발음 등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독일어는 매우 딱딱하고 강한 발음의 언어란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의 뉴스나 선전물 등을 접한 외국인들이 한국어가 딱딱하고 강한 어조를 가진 언어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히틀러가 선동가로서의 명성을 가지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레니 리펜슈탈이다. 레니 리펜슈탈은 영화제작자/감독으로 히틀러의 연설 영상을 편집하여 배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혹자에 의하면 히틀러의 연설 자체는 지겹고 길고 두서가 없지만 리펜슈탈의 연출과 편집에 의해 일반 대중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는, 공감이 가는 선동가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8. 뮌헨 폭동과 수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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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의 히틀러. 가운데는 에리히 루덴도르프.
패전 직후인 20년대 초, 배상금의 여파와 초인플레이션이 겹친 불황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극우 및 극좌 세력의 무장 난동이 빈번했다. 이 시류를 타 히틀러는 1923년 11월 일명 '맥주홀 폭동'을 일으켜 화려한 반등을 꾀하게 된다.[36] 그러나 이 폭동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당의 로마 진군에 영향을 받은 히틀러의 즉흥적인 결정이었으며, 사전 계획도 엉성했다. (쿠데타에 있어 필수 요소인) 군대의 확실한 지지 선언도 없었고, 세밀한 계획도 없었으며, 정작 바이에른의 주요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주(州) 총리와 야전군 사령관, 경찰총장을 맥주홀에서 잡아 놓고는 자신들에게 협력하겠다는 구두 약속 하나만 받고 히틀러가 잠시 다른 곳에 간 사이에 그냥 풀어주는 멍청한 짓까지 저질렀다. 이 무모한 폭동은 히틀러의 바로 옆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측근이 진압군의 총탄에 맞아 죽는 등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물론 군대와 주 정부의 지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 바이에른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성지였고, 뮌헨은 그 심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뮌헨 시장을 비롯한 정부인사들이 공공연하게 베를린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빨갱이들의 왕국'''이라며 공격했고, 종종 바이에른이 베를린으로부터 독립될 것임을 암시하곤 했다. 나치를 비롯한 우익정당과 정치모임, 그리고 의용군들의 활동에 힘입어 이 지역의 반 공화국 정서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게 없을 상태였다. 더군다나, 맥주홀 폭동 이전에 뮌헨 시장과 방위군 그리고 루덴도르프는 히틀러와의 합의를 통해 바이에른에 민족주의 혁명을 선언하고 베를린으로 행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히틀러는 무솔리니식의 합법적으로 인정된 쿠데타를 주장하여 주지사를 비롯한 주 정부의 주요 인사들에게 암묵적인 허가를 받을 계획이었고, 뮌헨 시장 이하 쿠데타의 협력자들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의 이해타산으로 이루어진 동맹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뮌헨 시장은 사실 베를린의 전복보다는 베를린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고[37] , 루덴도르프는 베를린 전복 후의 구 제정복고를 꿈꾸었으며, 히틀러는 베를린을 전복시킨 뒤에 민족주의 혁명국가를 세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마치 경쟁하듯 뻗쳐나가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베를린에 입성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뮌헨 시장을 비롯한 인사들과 방위군 인사들이 11월 8일 저녁에 맥주홀에서 선언을 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고, 이들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뺏기는게 두려운 나머지 11월 10~19일 사이로 잡혀있던 쿠데타 계획을 아무 계획없이 11월 8일 당일로 당겨서 시작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뮌헨 시장과 히틀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을 깨뜨렸다고 소리질렀고, 뮌헨 시장은 홀에서 다시 시청으로 돌아간 뒤에 히틀러와의 공조는 없고 쿠데타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결국 11월 8일, 히틀러와 극우 패거리들이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의 맥주홀에 모인 뮌헨 고위인사들을 억류하고 자신들의 쿠데타에 강제로 합류시켰다. [38] 하지만 같이 쿠데타를 이끌던 루덴도르프가 '''기껏잡은 뮌헨 고관들을 풀어주는 엄청난 트롤짓'''으로 폭동은 실패하고 만다[39] . 다음날 아침 뒤늦게 상황파악을 한 히틀러는 뮌헨 중심가로 2000명의 당원과 함께 요란한 가두행진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경찰들에게 저지됐다. 얼마 후 총격이 시작되면서 난리가 벌어졌고, 히틀러와 어깨동무한 당원이 총에 맞아 철퍼덕 쓰러지면서 어깨 탈골상을 당했다. 완전히 멘탈이 나간 히틀러는 혼란을 틈타서 샛길로 빤스런한 다음, 돌격대원 차에 탑승하고 줄행랑을 쳤다[40] . 이후 거지꼴로 후원자인 한프슈탱글 부부의 저택에 숨어서 덜덜떨었다(...). 사흘뒤인 11월 11일 5시 경에 경찰이 자신을 곧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모든 것이 끝났다”라며 아연실색 하고, 자신이 가진 리볼버를 가지고 자살시도를 하지만 '''부인에게 제압당하고''' 이는 촌극으로 끝나게 된다. 얼마 후 아돌프 히틀러는 잠옷 바람 +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체포된다. [41]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수감된 히틀러는 처음에는 단식투쟁을 시도했다. 이는 정치적인 목적을 노리고 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모든것이 끝났다는 생각으로 자살시도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실패했고, 그가 할수 있는건 그저 폐인이 된채로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모든게 끝났고, 죽고 싶다고 끊임없이 되뇌는 것 밖에 없었다. 이후 히틀러가 제정신으로 돌아올때 까지는 한참 걸렸다고 한다. 맥주홀 폭동에서 보인 히틀러의 모습은 매우 한심하고 코미디 같지만, 훗날 히틀러가 대전에서 보이는 모습들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수 있다. 극단적인 감정 기복, 정세가 불리할 때 보이는 비이성적인 행동들, 그리고 몰락했다고 생각했을때 나타나는 극단적인 자괴파괴적인 행동들이 전부 이 사건에서 나타났고, 훗날 더 끔찍하게 반복된다.
위에서 설명하였듯 맥주홀 폭동은 허술한 계획에서 시작되어 멍청하게 끝나버렸지만,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일개 지역 인사에서 독일 전역의 유명 인사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며 훗날 히틀러의 정치적 출세에 있어 큰 자산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우선 히틀러의 체포 이후 이루어진 (히틀러 외 5인에 대한 형량을 심판하는)[42] 재판은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의 봉기는 좌파들의 폭동과 달리 애국심의 발로였다는 히틀러의 주장에 당시 재판관이었던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아니, 히틀러 선생 같은 애국자가 있다니!"라며 재판 일정의 2/3을 히틀러의 장광설에 할애하는 등 무제한적 변론을 보장해 주었다.[43] 또한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이름은 전국의 신문지에 오르내리며 인지도가 오르게 되고, 그 결과 사회 불만 세력에게 있어 '이 문제 많은 체제를 끝장내 줄 지도자'라는 인식을 박아주게 된다.[44] 여기에 반대파에게 있어 악명이 높아진 건 덤. 결과적으로 (많은 죄목이 누락된 판결문과 함께) 아돌프 히틀러는 금고 5년형을 선고받고 13개월 만에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45][46]
히틀러가 수감된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그는 온갖 특혜를 누리며 유명 인사로 살았다. 히틀러의 어머니를 자처한 '여사님'들의 무제한 접견이 허용되었고 나치 추종자들은 충성심을 인정받고자 매일 얼굴도장을 찍으러 왔다. 팬들은 가구와 꽃으로 그의 감방을 장식했으며 간수들은 '애국자' 히틀러 '선생'에게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 교도소 안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산책 및 운동을 할 권리도 부여되었고 타자기와 책상의 반입 또한 허용되었다. 교도소 측은 그의 옆방에 히틀러의 일편 단심 바라미 루돌프 헤스를 넣어주었고 헤스는 히틀러가 훗날 나치즘의 성경이 된 '나의 투쟁'을 구술하면 이를 받아적게 된다. 결국 히틀러는 수감되었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오히려 그의 이름을 독일 국민에게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히틀러는 기기묘묘한 애국자로 입소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식민 상태의 조선에도 이를 다룬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국적도 없는 애국자, 독일의 히틀러씨
히틀러는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건강검진도 같이 받았는데 여기서 오른쪽 고환이 '''잠복고환''' 즉 짝X알인 사실이 밝혀진다. 요제프 브룬슈타이너 당시 란츠베르크 교도소 의사가 쓴 히틀러의 검사기록에는 "아돌프 히틀러, 예술가이며 최근에는 저술가이다. 이 자는 매우 건강하다. 그러나 '''잠복고환'''이 오른쪽에 있다."라고 기록해 놨다.# # 즉 사고나 부상으로 후천적 장애인이 된게 아니라 선천적으로 짝x알이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살짝 와전되어서 히틀러가 1차 대전 때, 혹은 맥주홀 폭동 때 고환 한쪽이 날아갔다는 소문이 되어서 2차 대전때는 영국 같은 히틀러의 적들이 히틀러를 두고 짝X알로 두고두고 놀렸고, 노래로도 나왔다. 히틀러의 금욕적인 행동도 여기서 나온게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수감 6개월이 지난 후부터 석방 때까지 나치당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었다고 판단한 주 정부에서는 검찰과 경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석방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주정부의 판단은 당시 바이에른 주가 상대적으로 좌파 진영의 세가 강한 베를린에 맞서는 보수 진영의 중심지가 된 당시의 정세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바이에른 주의 보수적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언제까지 이런 애국자를 사소한 법 위반으로 가둬 둘 거냐"라는 질타가 상당했다. 역사가들은 이 때 히틀러가 반역죄에 상응하는 형량을 제대로 살았다면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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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출소 이후 정치노선을 바꾼다. 원래 히틀러는 롤 모델로 이탈라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선택했고, 무솔리니가 했던 것처럼 쿠데타로 정권 탈취를 시도한 게 뮌헨 폭동이었다. 그러나 무솔리나와 달리 히틀러는 실패했고 이후 무솔리니식의 폭력적인 쿠데타보다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합법일 뿐, 뒤로는 온갖 정치공작, 돌격대를 이용한 폭력과 각종 비리를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소 직후 히틀러와 나치당은 와해 위기에 몰릴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히틀러가 체포되면서 당의 중심이 사라져서 극우 진영이 온갖 내분에 휩싸이고, 이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전후의 경제적 비관주의가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함께 점차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 수감 시절 극우진영의 극심한 내분과 부진은 극우파들 사이에서 "히틀러가 아니면 정권을 잡을 수 없다." 는 일종의 신화적 관념을 심어주게 되었으며 보수 진영에서 히틀러의 입지가 크게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와중 히틀러와 나치당에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세계 대공황이 터져버린 것이다.
9. 나치당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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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히틀러는 독일의 전부가 되었다.''' ” 8월 4일자 신문 머리기사 제목은 그렇게 나갔다. …… 8월 초에 히틀러가 일으킨 조용한 쿠데타는 8월 19일에 관례로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승인을 받았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투표자의 89.9퍼센트가 히틀러에게 국가 수반, 정부 수반, 당 지도자, 군 통수권자로서 무제한에 가까운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하는 데 찬성했다. …… 룀 사건에서 힌덴부르크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몇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는 모든 위협 요인을 남김없이 제거했다. 마침내 지도자국가가 확립되었다. 독일은 독재 권력을 만들어주고는 거기에 손발이 묶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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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평전 1권 12장 절대 권력(730쪽)
세계대공황과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건국을 주도했던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들은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국민들의 지지는 점차 좌우의 양 극단에 위치한 정치 세력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기존 중도우파 유권자들의 표를 대거 흡수하며 극좌 공산당에 대항하는 극우 민족주의의 대표 정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히틀러의 총리 취임은 나치 신화에서 '민족 봉기일'로 당장 미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이제부터 열린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심지어 달력을 바꿀 생각까지 했다고 나중에 히틀러는 주장했다. 히틀러는 또 '권력 장악'이라는 말을 쓰면 쿠테타를 연상시킨다면서 합법적 경로를 거쳐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권력 인수'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고 나치 대변인들도 그런 식으로 용어를 바꾸어 썼다. 사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고 대통령이 전임 총리를 임명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히틀러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약속이나 한 듯이 여기저기서 열렬한 박수 갈채를 받으면서 히틀러와 나치당 간부들은 날아갈 듯이 기뻤고 그것은 이번의 권력 이양이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날 벌어진 일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가를 오해하거나 오판한 사람은 하루도 못 가서 뼈저리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것이다. 1933년 1월 30일 이후로 독일은 예전의 독일이 아니었다.
그 역사적인 날은 종말이면서 출발이었다. 아무도 슬퍼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이 시효를 다한 날이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린 총체적 국가 위기가 절정에 이른 날이었다. 그런가 하면 히틀러의 총리 취임은 전쟁과 대량 학살의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독일이라는 민족국가를 망가뜨리는 과정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억누르는 제동 장치를 하루아침에 훌훌 벗어던지고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마이다네크 같은 강제수용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나치의 끔찍한 살육이 막 시동을 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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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평전 1권 (p. 611~612)
지지율도 1928년 총선의 2.6%에서, 대공황 언저리의 1930년 총선에서 18.3%로 급격하게 상승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으로 도약하기에 이르었다. 급기야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쟁영웅 힌덴부르크에 이어 히틀러가 36.7%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하였다.[47]
또한 같은 해의 두번의 총선, 즉 1932년 7월,37.4%로 230석으로 원내 1당으로 등극하면서 총리직을 요구하지만 거부당하고 의회 재해산 뒤에도 11월 총선에서, 33.1%로 지지율은 내려갔지만 196석으로 원내 1당은 유지한다. 그러자 보수파에서는 히틀러를 끌어들여 대보수연합정부를 구성하려고 계속 시도하지만, 총리자리를 요구하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총리 부임을 반대하는 대통령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일단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는 거부하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을 대통령 내각[48] 의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파펜, 마이스너 등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힌덴부르크를 설득해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 그 외 독일 국가인민당의 내각 참여를 골자로 한 내각 구성 합의를 이루었다. 이렇게 되니 의회 지지세력 없이 대통령 신임으로만 유지된 슐라이허 내각은 무너졌고,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에 정권을 '''합법적으로''' 얻어낸다. 히틀러의 집권을 알리는 1933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 집권 과정은 히틀러와 나치당 뿐만 아니라 독일 정치권의 무수한 병림픽이 난무했는데 구체적인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항목 참조.
히틀러가 집권하고 절대권력을 구축한 건 히틀러 특유의 직관적 정치력과 벼랑끝 전술도 한 몫 했지만, 좌우파를 막론하고 나치당과 히틀러를 견제해야 할 경쟁 정파들이 히틀러와 나치당의 잠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1930년 총선에서 제2당으로 급격히 성장하자 사회민주당의 일부 논객들은 히틀러의 집권은 보수진영의 무능을 드러내 사회주의 독일로의 역사 이행을 한 층 더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산당도 비슷하게 생각한건 매한가지라서 사민당을 견제하며 지지기반을 흡수하는데 집중했다. 결국 공산당과 사민당은 나치에 대항하는 단일전선을 짜는데 실패하여 결국 권력을 나치에게 넘겨준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당시 주류였던 독일의 중도 우파 역시 나치와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였다. 보수파는 국민의 지지가 높은 나치당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방패로 삼고, 히틀러는 잘 달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일장춘몽에 불과하였다.
1933년 3월에 대통령이 새 내각에 힘을 실어주려고 의회해산권을 행사해 새로운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다. 때마침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히틀러 정부가 마음에 들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그가 제안한 기본권 제한에 동의했고, 이를 통해 공산당을 무력으로 때려잡고 선거에는 관권을 동원해 공산당의 참여를 방해했다. 그럼에도 총선에선 44% 득표로 단독 과반수 확보엔 실패했다.
히틀러는 나치만으로 과반의석을 달성하지 못하자, 의회 내 비나치 우파와 타협해 입법권을 행정부에 수여하는 '''수권법'''을 만들었다. '''이 순간이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최후였다. 그리고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자가 독일에서 탄생했다.'''[49] 이후 히틀러는 지방의회를 해산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여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불법 정당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은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독일 제3제국(또는 나치 독일)이 시작되었다.
10. 전운이 밀려오다(히틀러 집권기)
일단 권력을 거머쥐자 나치는 매우 빠르게 행동하기 시작하여, 히틀러가 총통에 오른지 불과 2년 만에 모든 야당은 사라졌고 당내 좌파는 박멸되었으며[50] 반대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었으며 독일은 재무장을 향해 달려갔다.추종자들은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1920년대 초반부터 히틀러의 머리 속에 심어 놓았다. 히틀러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과대망상이 심했는데 거기에 불을 지핀 격이었다. 그때부터 특히 1933년 이후로 내치도 그렇고 외교 정책이 눈부신 성공을 거두자 지도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그런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히틀러는 끝 모를 숭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도자를 누구보다도 숭배한 사람은 히틀러 자신이었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오만은 그렇게 해서 굳어졌다. 그리고 1936년부터 벌어지는 일은 오만에 대한 복수였다.
독일은 히틀러에게 점령당했다. 그뿐 아니었다. 독일은 팽창을 원했다. 세계 평화는 조만간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내가 예견한 대로 굴러간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히틀러는 스스로를 신의 섭리가 운명 지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나는 신이 나를 위해 깔아놓은 길을 잠결에 걸어가는 사람처럼 확신에 차 있다."고 3월 14일 뮌헨 집회에서 히틀러는 기염을 토했다. 체제 안에서 크고 작은 권력을 행사하던 모든 집단이 이제 죄다 히틀러 밑으로 들어왔다. 히틀러의 권위는 아무도 흔들 수 없었다.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신이 깔아놓은 길이 나락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통찰력이 있었던 사람은 그 무렵에는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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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평전 1권 마지막 부분
히틀러와 나치당은 절대권력을 얻고는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했다. 1934년 6월 30일 이른바 장검의 밤 사건으로 돌격대 지휘관인 에른스트 룀을 제거하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 프란츠 폰 파펜과 같은 위험요소들을 제거하고 위협함으로써 자신의 경쟁자를 모두 해치우는 데 성공했고 이 일로 히틀러는 절대권력을 다지게 된다.
재미있게도 히틀러는 초반에는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해결하고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폴란드 제2공화국에 유화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폴란드가 이뻐서가 아니고 히틀러 집권 당시에는 독일이 재무장도 안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후 독일 국방군은 나치당에 흡수되어버렸고 이러한 권력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히틀러는 민주공화제 시대에 비축되었던 국력을 이용해서 제3제국의 발전을 시도했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하인리히 힘러와 헤르만 괴링이 군을 장악하기 위해 벌어진 이른바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발생하자 히틀러는 군 최고통수권자가 되었고 유럽에는 전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 정세를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과 관계를 규정한 로카르노 조약은 휴지장이 되었고, 나치 내부의 여러가지 반대 의견들조차 깡그리 무시하고 모험적으로 강행한 라인란트 재무장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도취된 히틀러는 소위 '게르만족의 생존공간(레벤스라움)'을 확보한다는 미명하에 침략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이처럼 상식을 저버린 모험의 연이은 성공은 히틀러의 도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히틀러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라인란트 재무장, 영독 해군조약과 오스트리아 병합 등 연이은 외교적 성공으로 히틀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게 되었으며 독일 국민들은 실망은커녕 열광적으로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히틀러 주변 인물들의 견제와 조언은 무시당하곤 했다. 히틀러는 계속 자신이 죽기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폴란드 침공도 독일군이 다 준비되길 기다리면 5년이 더 필요한데[51] , 그러면 정복의 길을 걷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든다는 이유가 언급될 정도였다.
아우토반 등 나치 독일 정부의 업적들조차 대부분은 보헤미안 기질이 넘쳤던 히틀러 개인의 즉흥적인 결정 내지는 나치 권력자들의 명예욕에 의한 것이었으며, 제대로 된 토의와 명령하달체계에 따라 실행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부 경기부양책은 하인리히 브뤼닝과 슐라이허 재임시 기획되고 효과가 히틀러 때 나타난것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스페인 내전 참전조차 히틀러가 오페라 보다가 즉흥적으로 "도와주지 뭐!" 라고 한 게 화근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이후에 폰 블롬베르크를 비롯한 여러 군인들과 관료들이 달라붙어 스페인에서 삥뜯을 거 잘 뜯고 했다지만, 히틀러 개인은 내전 과정에서 포켓전함 어드미럴 그라프쉬페 호가 공화정부측 폭격기에 피격되자 미친 듯이 날뛰면서 스페인에 선전포고하겠다고 하는 등, 치밀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52]
이렇게 독일의 여력을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일들이 하나 둘씩 쌓이다 보니, 생활여건 유지와 계속된 재무장을 위한 자원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침략을 멈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 말았다.[53] 2차 대전 개전을 즈음해서는 나치당 내부에서조차 히틀러 특유의 막가라식 폭주를 멈추면 정권이 뒤집힌다는 위기의식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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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뮌헨 협정 시기. 왼쪽부터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나치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왕국의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
이후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연방국을 합병하고(안슐루스), 체코의 독일인 다수지역인 수데텐란트를 빌미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야욕을 보였다. 영국의 개입을 통한 1938년 9월 29일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수데테란트를 포기하고, 독일은 거기까지 만족하는 선으로서 평화는 계속되는 듯 했으나…
원래 가진 것 없이 도박판에서 허세를 부려 돈을 따면 거기서 끝이 아니라 점점 큰 판으로 넘어가듯 얼마 지나지도 않아 1939년 초에 체코를 병합하고 슬로바키아를 보호국으로 만드는 등 확장에 대한 야욕은 끝없이 줄달음쳤다. 설마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때부터 독일과의 전쟁이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 피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군비를 비축하기 시작하였다.
체코 다음은 폴란드였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상실하게 된 동프로이센으로의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를 요구조건으로 걸고 폴란드에게 협박을 하였으나, 폴란드는 당장 바다로의 출구가 막히는 등의 이유로 그리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폴란드가 영국과의 군사방위조약을 맺으면서 강경하게 저항하자 히틀러는 결국 창당 초기부터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 비밀리에 폴란드 및 동유럽 전체의 분할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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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마하트마 간디는[54] 히틀러에게 "전쟁 하지마"라고 충고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번역은 여기서
결국,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막상 폴란드를 침공할 때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지 않을거라 믿고 있었다고 한다. 애초에 폴란드만 잡고 끝낼 전쟁이였다.
그러나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보여준 미온적인 대응과 태도 때문이지, 결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히틀러와 당시 제3제국군 수뇌부의 판단 착오를 마치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 포고를 하는 바람에 전쟁이 더 커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령 폴란드가 요구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동유럽권을 침략하는 목적 자체가 소련 및 서방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으니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히틀러는 베를린 외곽에 대규모 공사를 지시했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가 세계정복을 하고 난 뒤에 세계의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이미 세계를 정복하려는 의지가 강력했으며 그래서 그 세계의 수도가 될 도시 이름을 "게르마니아"로 짓고 측근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인구 1억명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곧 공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18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국민회관의 초대형 돔이 압권이었다.
그러나 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바람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도시는 미완성 상태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풍기고 있었다. 이 도시를 계획한 건축가부터 이미 나치 전범이었으니…[55]
히틀러는 이 계획을 구상할 때 "당신들은 12년 후의 베를린을 알아볼 수 없을 거야."라고 자부했는데, 그가 이 말을 했을 때가 1933년. '''12년 후인 1945년에는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했으니 의도야 어떻든 그 말은 사실이 돼버렸다.
11. 제2차 세계 대전과 말년, 사망
개전 초중반에는 유능한 지휘관들과 연합군 측의 삽질 덕에 그야말로 유럽을 '쓸어담는' 수준의 정복왕이 되었으나, 이후 연합군 측이 체제를 정비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 데다 본인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에 가까운 전략 입안 및 본인이 명목상의 최고사령관 뿐만 아니라, 직접 육군 최고사령관까지 겸직하는 등의 무모한 겸직러쉬가 독일군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히틀러가 원래 소싯적부터 니트생활에 익숙해서 생활 리듬이 일반인과 다른데다가 뭔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결재도 안하고 넘겨버리는 버릇 때문에 제국총리 시절부터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는 것.
거기다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던 1941년전까지만 해도 중립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점령해 나아가던 상황에 '''난데없이 소련을 공격하고 싶다고 발언을 했다. 이때 당시 영국과 식민지와 영국 본토에 걸쳐 전쟁중이었는데 또 다른 강대국인 소련과의 전쟁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결국 독일군은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하여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앞까지 진군했으나 소련군이 처절하게 방어해내며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히틀러는 브라우히치를 해임하고 스스로 육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한다. 거기다 동맹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에 선전포고까지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을 행하고 만다. 물론 그 이후의 독일의 전황과 작전 상황은 안봐도 개판 오분전.
이런 막장 행보를 이어나갈 당시 히틀러는 몸과 정신이 쇠락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해가 50세,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는 이미 50대를 넘어 60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나이로 인한 노환문제도 좀 있었다. 생모 클라라 푈츨이 위암으로 4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데다 불규칙한 생활로 자신의 소화능력도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히틀러가 50이 넘어서고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크게 염려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복통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가족력을 의심했고 설사약을 복용하는 일도 잦았다.
- 히틀러는 암살 위기도 여러번 겨우 넘겼기 때문에 정신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선 무려 43번이나 암살이 시도되었고, 암살 시도 방법도 평범했던 목수까지 폭탄을 만들어 그를 암살하려 들거나, 부하장교들이나 여러 사람들이 그를 증오하여 죽이려고 별별 시도를 했던 게 드러냈다. 몇번은 성공할 뻔 했으나 그야말로 운좋게 암살을 모면[56] 했다. 하지만 이런 히틀러 암살계획이 생길수록 그의 정신 상태는 더더욱 맛이 가게 됐다. 절정은 1944년 말에 벌어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으로 이때 당시 폭발로 큰 쇼크를 받은 상태라 그 이후로는 반신마비 증세가 좀 있고 손이 떨리는 등 좀 제정신이 아닌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을 보면 이 사건 이후로 왼손을 자주 떨어서 연설이나 공식 자리엔 왼손을 안 보이며 다녔다고 한다.[57]
- 전간기 시절엔 그래도 연극과 영화 등을 감상하며[58] 취미생활도 즐겼고 자신의 부관들에게 농담도 던지는 여유를 부렸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서 하루 종일 전쟁 지휘벙커에서 참모들과 하는 작전회의에만 메달렸고 당연히 그의 정신건강도 피폐해졌고 경직되어갔다. 몇몇 그의 측근들은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의 히틀러가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할 정도.
- 1943년 이후로는 신경성 불면증까지 찾아와서 모르핀 성분의 안약 없이는 잠을 자지도 못했다. 게다가 주치의란 테오도어 모렐 박사는 약간 돌팔이로 마약성분이 함유된 약을 제멋대로 많이 처방해서 히틀러에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좋다고 수시로 먹이기까지 했다. 알다시피 마약 먹고 잘된 지도자는 없다. 처음에는 이틀에 한번 맞고 가끔 숙면에 도움이 되는 정도였지만 1945년 몰락 직전엔 하루 4번 이상 맞고도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시달렸다.[59] 결국 이게 히틀러에게 건강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말년의 기록이나 영상을 보면 다리를 저는가 하면 제대로 물건을 쥐지 못하는 등 파킨슨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가지고 있다. 영화 몰락에서 대머리 군의관인 친위대 대령 솅크도 히틀러가 파킨슨병을 확실히 앓았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독일의 패전이 히틀러의 파킨슨병 때문이었다고도 주장한다. 뇌 신경세포 손상으로 인하여 상황판단 능력이 떨어진 히틀러는 전쟁에서 오판을 거듭했다는 것.
특히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는 극도의 불안감을 드러냈으며 점점 판단력을 잃어갔다. 알베르트 슈페어가 회고록에서 밝히기로는 히틀러는 적의 정보기관이 실제 목표 지점에서 엉뚱한 곳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슈페어가 시찰을 돌며 찍어온 피난민 행렬 사진도 히틀러는 못 본 척했으며, 패배한 군인은 “피 흘리며 죽어가 전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까지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패배를 두려워한 나머지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자신이 몰락하는 이유가 바로 유대인 때문이라면서 광적인 증오심을 드러내며 유대인 학살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특히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에는 망상증과 잔인성이 증가되었고 사람에 대한 불신감이 더더욱 커져 가게 되었다.스탈린그라드 이후 몇 달 동안, 히틀러의 몸에 밴 낯익은 특징적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때때로 최측근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낙관주의가 아직 유지되고 있는 편이었다. 불굴의 의지력도 여전히 드러냈다.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가면이 이따금 벗겨지면서 심한 우울증과 숙명론을 툭툭 내뱉기도 했다. 그것은 히틀러의 내면에서는 이미 분명했던 인식, 다시 말해서 자기는 주도권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한때나마 시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을 때는 새삼 분통을 터뜨렸는데, 그럴 때는 대개 군 쥐휘관들이 있는 대로 욕을 얻어먹었다. 당신들은 거짓말쟁이고, 충성심이 부족하고, 국가사회주의를 거역하고, 반동적이고, 문화를 보는 안목이 없다고 히틀러는 몰아세웠다. 마음 같아서는 더는 상대하기도 싫다고 말했다. 히틀러의 비난 대상은 나중에는 독일 국민으로 바뀌었다. 독일 국민은 위대한 투쟁에 자기와 함께 나서기에는 너무 나약하다고 히틀러는 보았다. 패퇴를 거듭할수록 사방으로 포위당한 지도자는 무자비한 보복과 앙갚음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복수의 대상은 한편으로는 외부의 적이었고, 그 배후에는 언제나 유대인이라는 악마가 버티고 있었다. 내부의 적은 '배신'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감히 패배주의를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히틀러의 근본적인 잔인함을 옆에서 완화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수백만의 우상이었던 사람이 (자기 말로는) 에바 브라운과 애견 블론디 말고는 말벗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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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평전 2권 (p. 692~693)
나중에는 자신이 예술가로서 아름답다고 호평하던 프랑스 파리 시를 다시 빼앗기느니 모조리 불바다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고 만다. 그러나 프랑스 군정 총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보병대장은 고민 끝에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씹고 전면 항복한다. 백기를 든 콜티츠와 부하들은 파리 한복판을 끌려가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야유 및 욕설, 침까지 맞는 비참한 신세를 겪지만, 그래도 몇년 뒤 파리 시장은 그에게 감사패와 명예시민증까지 수여했다. 콜티츠는 종전 후 재판을 받을 때 그는 "나는 파리를 불태워 인류사의 죄인으로 기억되느니 차라리 히틀러의 배신자로 기억되고 말리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때 히틀러는 9번씩이나 직접 전화를 걸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ûle-t-il? /Is Paris Burning)?"''' 라는 말을 한 것이 유명해서 나중에 이걸 다룬 영화 제목이 바로 이 대사로 지어질 정도였다.[61]
-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은 종전 뒤에 전범 재판을 받아 2년 정도 복역했지만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을 높게 인정받아 가석방되었고 전쟁 후유증으로 1966년 숨을 거뒀다. 이 때 프랑스에선 레지스탕스 지도자와 프랑스 전현직 장군들과 외교관까지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명복을 빌었고 히틀러의 명령을 생까고 파리를 놔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가 명령을 거부하였기에 천만다행이지, 만약에 히틀러의 마지막 발광대로 파리가 불바다가 되었으면 상상도 하기 싫다고 히틀러에 대한 혐오감에 떨었다고 한다. 근데 진짜 파리 또는 프랑스를 불바다로 만들었으면 연합군의 진격속도와 레지스탕스의 활동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전략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결국 이 양반은 연합군 진격에 공헌해 또 다른 콧수염 대마왕까지 엿먹였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콜티츠는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저지른 파괴와 학살에 관여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는 인물이다.[62]
1945년 1월 16일 히틀러가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거리는 30억 제곱피트의 건물 잔해와 파편으로 가득했다. 낮에는 미 육군 항공대의 공습이, 밤에는 영국 공군의 무자비한 공습이 어어졌으며 공습의 강도가 거세어지자, 히틀러는 총통 벙커로 이동하기로 결정했고 이 지하 벙커가 그의 13번째이자 마지막 사령부가 되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이 총통 벙커는 땅속 55피트[63] 아래 있었고, 외벽의 두께는 6피트[64] 나 되었다. 지면으로부터 30피트[65] 아래에 8피트[66] 두께의 콘크리트 덮개가 상부를 덮고 있었고, 천장이 낮고 비좁은 방들이 중앙 복도 양편에 모여 있었으며 이곳에서 매일 회의가 열렸다. 외부 세계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24km 떨어진 초센의 국방군 최고사령부와 연결된 전화 교환대와 무성송신기, 무전기 각 1대씩이 전부였다. 히틀러는 이곳에서 뒤통수를 여러번 크게 맞았는데 바로 헤르만 괴링과 알베르트 슈페어, 하인리히 힘러의 배신이었다 이들의 배신은 각각 항목을 참조, 벙커에서 히틀러의 반응을 본 사람 중에서는 유명 여성 비행사 한나 라이치(Hanna Reitsch)가 있었다. 광적인 나치주의자였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벙커를 방문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전후에 아주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소련 폭탄이 총리관저의 벽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아래에 있는 벙커를 유독가스로 채웠기 때문에 땀이 나고 공기가 부족한 가운데 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히틀러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하인리히 힘러의 배신이었다.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은 기회주의적이고 부패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그의 배신은 예상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실망이 크지 않았고 알베르트 슈페어는 다른 세상에 붕 떠있는 예측 불가능한 예술가여서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충성스러웠고 청렴했던(?) 하인리히 힘러의 배신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며 "최악의 반역이자 배반이다!" 라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한나 라이치가 훗날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그는 미친 사람처럼 미쳐 날뛰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고 한다. 그러나 이전에 있던 발작들과는 다르게 힘이 많이 빠져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곧 발작은 가라앉았고 그는 괴벨스, 보어만과 함께 문을 닫고 자기들끼리만 회의를 했다.
결국 최후의 순간에는 베를린을 연합군이 폭격으로 폐허를 만든 후 소련군이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구석구석까지 들쑤시고 다닌 덕택에 총통벙커 근처까지도 초토화된 상태였으며, 그제서야 더 이상의 탁상놀음은 소용없다고 깨달았는지 자살했다.[67] 당시 히틀러를 위해 일하던 사람들은 그의 끔찍한 몰골을 보아야 했다.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는 힘들어서 몹시 무겁게 상체를 앞으로 굽히면서 다리를 질질 끌고 벙커의 회의실로 나왔다. 균형감각이 없었고 히틀러는 잠깐 걷고 나면(20에서 30미터 정도) 이런 경우를 위해서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주저앉거나 아니면 옆사람에게 기댔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그를 위한 서류들은 모두 3배 크기로 확대된 문자로 특별한 '총통 타자기'로 타자된 것이었는데도 그는 돋보기를 사용해야만 읽을 수가 있었다. 입 가장자리에서는 자주 침이 흘러내렸다." 라고 하며 등이 구부러지고 발을 질질 끌던 히틀러는 머리는 반백이고 일그러진 얼굴에 수염에는 흰 얼룩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부관이 그의 서명을 위조했다. 새로운 임명을 전화 한 통으로도 간단히 할 수 있었지만, 상당히 어리석으면서 매우 위험하게 그는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Robert ritter von Greim) 공군 원수를 벙커로 소환해서 그에게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독일 공군 총사령관 직책을 인계 받으라고 명령했다. 중상을 입고 고립되어 있던 폰 그라임은 4월 24일 한나 라이치와 함께 베를린으로 날아가 반역자 힘러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배신자가 내 뒤를 이어 총통이 되어서는 안 되오, 그가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시오!"
그는 결혼 예식을 위해 소회의실을 정돈하도록 명령했고 근처에 위치한 민중 돌격대에서 일하는 발터 바그너라는 이름의 관구 지도자를 불러들였고 총통과 에바 브라운의 결혼식을 주재하라는 부탁을 했다. 괴벨스와 보어만이 증인이 되었고 그들은 자기들이 순수 아리안 혈통이며 유전병이 없다고 진술하였다. 신청서들이 접수되고 결혼 예고가 "검토되고 규정에 맞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서에 의하면 발터 바그너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어서 참석자들은 증서에 서명했고, 에바 브라운은 너무 흥분해서 결혼 전 성으로 서명을 했다가 첫 글자인 B를 지우고 '에바 히틀러, 출생은 브라운'이라고 서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모두 개인방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여비서들, 히틀러의 요리사인 만치알리(Manzialy) 양, 그리고 몇몇의 부관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옛날을 회상하였다고 한다나는 이제 결혼 예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위에 부른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에바 브라운 양과의 이 결혼을 원하는지 묻겠습니다. 원한다면 '네'라고 대답하십시오. 이제 에바 브라운 양, 당신이 나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와의 결혼을 원하는지 묻겠습니다. 원한다면 '네'라고 대답하십시오. 이제 두 사람의 약혼자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하였으므로 이제 나는 이 결혼이 적법하게 맺어진 것임을 선언합니다.
그렇게 1945년 4월 29일 이른 새벽에 히틀러는 자신에게 헌신적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서와 유언장을 받아 적게 했다. 히틀러의 유언장은 두 장이다. 개인적인 유언장과 빌헬름 카이텔에게 전해질 유언장이었다.
두 장의 유언장은 4월 29일 새벽 4시에 서명되었다. 세 장의 사본이 만들어지고 그날 하루 동안 여러 방법을 통해 벙커에서 밖으로 알려졌다. 심부름꾼 중 한 사람은 히틀러의 공군 부관인 폰 벨로브 대령이였다. 히틀러는 힘러와 괴링을 모든 공직에서 쫓아냈고 그들을 반역자로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또다른 유언장을 폰 벨로브에게 육군 원수에게 주어 빌헬름 카이텔에게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히틀러가 작성한 마지막 문서였다.나는 지난 전쟁 기간 동안 결혼하는 것이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믿었기에 지금 지상의 이력을 끝내기에 앞서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눈 다음 자유의사로 거의 완전히 포위된 도시로 들어와서 나의 운명을 함께 나누려는 이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에 따라 내 아내로서 나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은 민족에 봉사해야 하는 나의 일이 우리 두 사람에게서 빼앗아간 것을 우리에게 보상해줄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은 당의 소유가 된다. 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 소유이고, 국가마저 파괴된다면 내가 내린 결정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들인 그림들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모았던 것이 아니고 언제나 내 고향 도시 도나우 강변의 린츠에 회랑을 건설하기 위해서 모았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가장 귀한 소망이다. 유언장 집행인으로는 가장 충실한 당 동지 마르틴 보어만을 임명한다. 그는 모든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릴 권한을 가진다. 개인적인 추억의 가치를 가진 것이나 시민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나의 형제자매들과 내 아내의 어머니, 그리고 그도 잘 알고 있는 충실한 직원들에게, 특히 여러 해 동안이나 업무에서 나를 도와준 나이든 남녀 비서들과 빈터 부인에게 나누어줄 권한을 가진다. 나 자신과 내 아내는 파면이나 항복의 수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다. 지난 12년 동안 민족에게 봉사하면서 내 일상의 업무 대부분을 처리한 이곳에서 즉시 불태워진다는 것이 우리의 의지다.
히틀러의 유언장.
그 뒤 히틀러는 카를 되니츠 해군 원수를 총리 겸 전쟁부 장관. 3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막 결혼한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부부는 즉석에서 피로연을 베풀었다. 히틀러는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지나간 영광스러운 날들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고, 작별 인사를 한 뒤 부부는 그 자리를 떠났고, 잠시 후에 권총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시체가 피를 흘리면서 소파를 피로 적시고 있었고, 에바 브라운은 독약을 마신 상태였다고 한다. 이들의 주검은 소련 포탄이 총리관저 정원에서 폭발하는 가운데 바깥으로 옮겨져 화장되었다."민족과 방위군은 이 길고도 힘든 싸움에서 모든 것을 마지막까지 바쳤다.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나의 신뢰를 악용했다. 전쟁을 치르는 도처에서 불충과 배신이 저항의 힘을 갉아먹었다. 이제 나는 국민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육군 참모본부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총참모본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참모본부의 공적은 전선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공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도이치 민족의 노력과 희생은 너무나도 커서 나는 그러한 노력과 희생이 허사가 되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앞으로도 도이치 민족을 위해 동쪽에서 공간을 얻는 것은 계속 목표가 되어야 한다."
12. 사망, 그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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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몇 주 동안 히틀러는 모스크바 동물원에 전시되거나 유대인이 연출한 연극에 주연으로 출연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 아니 망상을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하였다.[68] 이러한 걱정들은 4월 29일 무솔리니의 최후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욱 심해졌는데, 무솔리니는 죽고 나서 로레토 광장에 있는 주유소에서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렸고, 소리지르는 사람들이 시체를 치고 침뱉고 돌을 던졌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히틀러는 자신의 최후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 중에는 하인 하인츠 링게, 기사인 에리히 켐프카, 그의 비행사인 한스 바우르 등에게 자신의 유해가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히틀러는 준비된 독약이 신속하게 확실하게 죽음을 불러오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으며 한밤중에 블론디는 화장실로 끌려와서 히틀러의 개 조련사인 토르노브(Tornow) 상사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의료진의 한 사람인 하제(Hasse) 교수가 끼어들어서 집게를 이용해 독약 앰플을 으깨서 털어넣었다. 곧 이어 히틀러가 블론디의 시체를 무표정하게 한참동안 바라보았고, 다른 벙커의 사람들을 회의실로 불러서 이별을 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말을 건넸으나 히틀러는 대답하지 않거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회의를 하고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그 직후 시신을 부하들이 그의 시체를 총통관저 화원으로 끌고 나와 무려 190리터나 되는 대량의 휘발유를 자동차에서 빼서 화장했지만, 저장된 기름의 상당량을 사용했음에도 제대로 된 화장시설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태운 게 아니라 대충 시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수준이었기 때문에[69] 완전히 소실시키지 못했다. 화장한 직후에 소련군의 포화로 인해 시신의 상당부분이 부서졌지만, 소련군이 치아를 대조해서 히틀러의 시신임을 확인했다고 한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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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안할트 주 마그데부르크 근교에 위치한 비더리츠. 이 곳에 히틀러의 유해가 화장된 뒤 엘레 강에 뿌려졌다.#
이 시체는 1년이 지난 46년에서야 겨우 전부 수습되어 비밀리에 탄약 상자에 넣어 매장되었는데 스탈린은 그의 추종자들이 이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보안에 상당한 애를 썼다. 결국 이 탄약 상자는 독일과 소련 각지를 돌며 무려 8번이나 이장되다 결국 70년대 중반 동독 KGB 지부에 명령이 하달되어 두개골이나 이빨 등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일부분만 소련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화장된 뒤 작센-안할트 주, 마그데부르크 근교 엘레 강에 뿌려졌다. 이것이 냉전이 끝나고 밝혀진 공식적인 히틀러의 행방이다. '''결국 전 세계를 아리아인의 손아귀에 넣으려 했던 독재자는 마그데부르크 근교 엘레 강에 뿌려져서 그 마지막을 맞이했다.'''
참고로 스탈린은 아직 숨이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히틀러의 추종자들의 힘을 빼기 위해서 훼이크를 발동하는데 히틀러 시신의 행방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마치 히틀러가 살아있는 듯이 꾸며서 그의 추종자들이 그 흔적만 쫓다 힘빠지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KGB에게 히틀러를 잡아오라고 거짓 지시해서 1950년까지 KGB는 아르헨티나 전 지역을 샅샅이 뒤졌다.
2010년 5월 7일 러시아에서 옛 소련 당시 의무병들이 히틀러가 1945년 4월 30일 청산가리 캡슐을 먹고 숨진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베를린에 남아있던 나치 세력이 퍼트린 일종의 선전일 가능성이 있지만 정작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퍼진 것은 나치 세력의 선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소련에서 히틀러의 유골이라며 보관하고 있던 것이 구멍이 난 두개골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 러시아의 크리스토포로프 중장은 '히틀러의 입안에서 으스러진 유리 캡슐이 남아있는 점과 시신에서 씁쓸한 아몬드 같은 악취가 나는 점[71] , 사후 검시 결과 등으로 볼 때 청산가리 중독에 따른 사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면서 의무병들이 히틀러의 시신에서 치명적인 외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SBS기사, 연합뉴스기사
혹은 청산가리 캡슐을 입 안에 넣고 깨무는 것과 동시에 총을 쏴서 확실하게 죽으려고 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히틀러가 죽기 전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크게 고민하고 집착한 것을 보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72]
1916년 제 1차 세계대전 후 군의관의 증언, 사망 후 의시의 증언중에서는 '''히틀러가 여자'''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