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페이
1. 개요
'''중국 음악계의 천후(天后)'''라고 칭해지는 '''중화권을 대표하는 최고의 국민 가수다.''' 등려군 이후 최고의 가수로 평가받으며 '왕페이가 없다면 중국과 홍콩 가요계를 논할 수 없다.'고 말해질 정도의 위상이다. 중국 대륙, 홍콩, 대만, 화교 등 모든 중화권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연기활동과 일본진출에도 성공하여 국제적인 인지도도 높다. 한국에서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 출연하여 배우 '''왕정문'''으로 많이 알려졌고, 파이널 판타지 8의 주제곡 'Eyes on Me'를 부른 가수로도 인지도가 있다.'''天后'''
서양의 얼터너티브 팝&록을 수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비슷비슷한 유행가가 판을 치며 외국에 뒤쳐진 중국 음악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음악으로 아시아권에서 인정받은 몇 안되는 중화권 가수'''로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1] 청아한 목소리와 몽환적인 창법이 트레이드 마크이며 작사/작곡/프로듀싱을 하는 싱어송라이터이다. 파격적이고 세련된 패션, 당당한 태도 등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화제를 모아 왕페이 자체가 하나의 아이콘으로 여겨진다.
2. 생애와 활동
2.1. 데뷔 이전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9년 8월 8일 베이징에서 엔지니어 아버지 왕유림(王佑林)과 성악가 어머니 하계영(夏桂影)의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왕페이의 할아버지 왕조민(王兆民)은 국민정부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부천대 당시 대만으로 이주한 중국 국민당 고위층이여서 문화대혁명 당시 왕페이의 집안은 감시대상이었다.[2] 딸의 앞날을 걱정한 부모님은 어머니 성씨인 하(夏)와 아버지 이름 중 림(林)을 따서 하림(夏林; xia lin; 샤린)이라는 아명을 지었고 사회분위기가 유해진 1984년이 돼서야 왕비(王菲)라는 본명을 쓸 수 있었다. 왕페이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는 집단농장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고 어머니도 직장에서 근무해야 돼서 태어나자마자 상하이의 이모 집에 맡겨졌고 다섯 살 때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정치와 관련된 문제라 중국 메이저 언론에서는 왕페이의 어린시절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왕페이는 어린시절을 '항상 불안하던 어둠'이었다고 회상했는데 이 시기 유일한 빛이되준 존재가 등려군의 노래였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퍼지던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등려군을 '노래 스승'으로 삼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81년 베이징둥즈먼중학(北京市东直门中学)에 진학과 동시에 중국 중앙 텔레비전 합창단(银河少儿艺术团)에 입단해 활동했다. 합창단으로 활동하면서 85년부터 87년까지 등려군 커버곡을 여러장 녹음했고 이 음반들은 왕페이가 스타가 된 후 CD로 발매 되었다.
1987년 샤먼대학[3] 생물학과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결정하고 곧바로 자퇴한다. 영국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갔는데 홍콩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기에 당시 광둥어를 전혀 못했다고. 우연히 '''패션 모델'''로 캐스팅되어 연예계에 발을 디뎠고 이때부터 '''왕정문(王靖雯; 왕징웬)'''이라는 예명과 Shirley Wong이라는 영문명으로 활동한다. 왕비(王菲; 왕페이)는 중국 대륙 느낌이 강한 이름으로 대륙 출신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공공연했던 홍콩 사회분위기 상 본명으로 연예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에이전시가 홍콩 출신 같은 예명을 쓸 것을 권유했다.[4] 어쩔 수 없이 예명으로 활동했지만 본명을 쓰길 원한 왕페이는 왕정문이라는 이름을 싫어했고 데뷔 5년 후 본명으로 활동한다.
2.2. 신인시절
1989년 가요콘테스트(亞太金箏流行曲創作大賽)에 참가하여 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Cinepoly 음반사와 계약'''을 했고, 11월 셀프타이틀 앨범 '''『王靖雯』'''을 발매하며 데뷔한다. 데뷔앨범 『王靖雯』는 전형적인 칸토팝 발라드 앨범으로 특색은 없지만 왕페이의 청아한 음색과 가창력은 주목을 받아 3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홍콩 골드레코드 인증을 받았고 그해 신인상을 수상했다. 성공적인 데뷔 후 1990년 6월에 2집 『Everything』을, 12월에 3집 『You're the Only One』을 발매하는 동시에 여느 홍콩 연예인이 그렇듯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데뷔초 앨범들은 당시 홍콩 유행가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며 몇몇 번안곡이 실렸고, 연기는 서투른 광둥어으로 대본을 머리속에 주입하며 시키는대로 하였다.
소속사와 매니저가 시키는 대로 끌려가는 생활에 염증을 느낀 왕페이는 '''1991년 돌연 활동을 중지'''하고 약 1년간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왕페이의 입지는 이름이 어느정도 알려진 라이징 스타에 불과했는데 부침이 심한 홍콩연예계에서 신인이 활동을 중지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뉴욕에서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최첨단의 음악, 패션에 눈을 뜨게된 왕페이는 영어이름을 본명과 가까운 '''Faye Wong'''으로 바꾸고 1992년 8월 『Coming Home』을 발표한다. 수록곡 「容易受伤的女人」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인구 700만명인 홍콩에서 무려 50만장의 판매량을 올렸고 경가금곡에 선정되면서 왕페이는 순식간에 홍콩 연예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2.3. 칸토팝의 여왕
1993년 2월 『執迷不悔』을 발표하는데 수록곡 '執迷不悔'는 왕페이가 처음으로 작사하고 최초로 북경어로 부른 곡으로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하겠다는 내용의 가사다.[5] 이어 9월에 발표한 『十萬個為什麼?』의 수록곡 '冷戰'이 많은 사랑을 받으며 2년 연속 경가금곡에 뽑혔고 93년 한해에만 4개의 드라마를 출연하면서 바쁜 일년을 보냈다.
1994년 4월 기존 광동어 노래들을 보통화로 부른 '''첫 보통화 앨범 『迷』'''을 발매하며 대만에 진출한다. 『迷』는 대만에서 80만장이 팔리며 히트했고 2009년 '대만 대중가요 명반 200(台灣流行音樂200最佳專輯)'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6월 29일 '''왕페이 커리어의 분기점이 되는 앨범 『胡思亂想』'''을 발매한다. 이때부터 王菲라는 본명을 밝히면서, 본격적으로 얼터너티브 팝/록으로 노선을 변경했고, 현재까지도 공동작업하는 임석(林夕)과 C.Y. Kong 등 뮤지션과 공동작업을 시작했으며, 중국 대륙 음악계와 적극 교류를 했다. 그 결과 칸토팝의 틀에 갖힌 홍콩 대중음악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중국 본토에는 한발자국 앞선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었다.
7월에는 주연을 맡은 '''《중경삼림》'''이 개봉했다. 왕페이는 홍콩 연예계 시스템상 연기를 하긴 했지만 연기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는데, 매우 인상깊게 본 《아비정전》의 왕가위 감독의 캐스팅 제의는 흔쾌히 수락했고 주제곡 '''몽중인(夢中人)'''[6] 도 불렀다. 《중경삼림》이 명작에 반열에 오르고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왕페이의 국제적 인지도 역시 높아졌고, 한국에서도 90년대 중반 중경삼림 붐이 일면서 왕페이(당시 왕정문)가 배우로 알려졌다. 《중경삼림》으로 스톡홀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홍콩 금상장, 대만 금마장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영화계의 열렬한 러브콜은 받았지만 왕페이는 '한번도 나 자신을 배우로 생각해본적 없다.'고 하며 모든 캐스팅을 거절하고 음악에만 집중한다. [7]
쉼없이 11월에는 두번째 보통화 앨범 '''『天空』'''을, 12월에는 광동어 앨범 '''『討好自己』'''을 발매한다. 《天空》은 대만에서 20일만에 50만장, 95년까지 100만장, 현재까지 200만장이 판매되며 대히트[8] 했으며, 비평적으로는 '대만 대중가요 명반 200'으로 선정되고 중국 대중음악에서 손꼽히는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討好自己』에서 왕페이는 본격적으로 작곡에 참여했고 임석과 더불어 왕페이의 중요한 음악적 파트너인 장아동(张亚东)과 공동작업하면서 독자적인 음악세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95년 왕페이는 자신의 우상 등려군을 위한 헌정 앨범을 기획한다. 첨밀밀 같은 인기곡들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선정해 공들여 편곡했고, 등려군 스타일의 신곡을 만들고 등려군을 초대해서 같이 듀엣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녹음 일주일전 등려군이 천식 발작으로 급사하여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단 한번도 등려군과 만난적이 없었고 녹음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날 예정이었던 왕페이는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7월 추모앨범이 되어버린 '''『菲靡靡之音』'''[9] 은 원곡을 헤치지 않으며 본인색을 잃지 않은 트리뷰트 앨범의 정석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대만 대중가요 명반 200'에 선정되었고 대만에서 50만장 이상, 홍콩에서 10만장 이상 판매되었다. 12월 발매된 광동어 앨범 '''『Di-Dar』'''은 트립합, 프로그레시브 록 영향이 강해졌으며 왕페이 특유의 창법이 더하여 몽환적인 퇴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실험적인 음악에 맞추어 패션과 메이크업도 아방가드르해졌는데 당시 왕페이의 모든 것들은 파격 그자체로 여겨졌다.
1996년 6월 세번째 보통화 앨범이자 '''왕페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浮躁』'''를 발표했다. 『浮躁』는 왕페이의 모든 앨범들 중 가장 실험적이고 예술적이며 완성도 높다는 평가를 받는데, 서양음악을 받아드리는 것을 넘어서 왕페이 식으로 풀어냈고 수록곡 절반을 가사 없이 허밍과 스캣으로만 부르는 시도를 하였다. 『浮躁』가 중화권 음악계에 일으킨 파장과 영향력은 엄청나서 각종 중국음악 명반 리스트에 들어가고, 지금도 후배 뮤지션들의 찬사를 받는 앨범이지만 상업성은 떨어져서 역대 왕페이 앨범들 중 최악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해 10월 중국 연예인 두번째, 가수로는 최초로 타임지 아시아판 표지를 장식했다. 소개 문구는 '''THE DIVAS OF POP'''.
2.4. 중국 음악의 천후 등극
당시 홍콩 가요계는 1년에 최소 앨범 2장, 많으면 분기별로 앨범 4장을 발매하며 가수들은 쉴틈없이 활동하고 음반사는 유행곡 양산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티스트의 개성이나 창작에는 관심이 없었고 수많은 아류작들과 번안곡들이 판을 치는 형세였다.[10]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선보이고 싶던 왕페이는 매년 2장 이상의 앨범 발매를 강요하는 음반사와 마찰이 생겼고, 결국 1997년 Cinepoly와의 계약이 종료되고 '''EMI로 이적한다.''' EMI는 역대 중화권 계약금 최고액 갱신(6000만 홍콩 달러), 5년간 1년에 앨범 1장 발매, 앨범 프로듀싱 전권 부여 등 최고의 계약조건을 제시했다.
EMI 이적 후 왕페이의 음악은 몇가지 큰 변화를 가진다. 광동어와 북경어 앨범을 번갈아 발매하지 않고 '''오직 북경어 앨범만 발매'''했고, 세계적인 음반사 EMI의 서포트로 '''레코딩의 퀄리티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1989년 데뷔 당시 영국령 홍콩은 중국 대륙 출신에 대한 차별이 심했고 보통화가 통하지 않아 광동어로 활동을 해야했지만,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보통화가 공용어가 되고 개혁개방으로 대륙시장이 열리면서 굳이 광동어로 활동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광동어가 유창하더라도 모어인 북경어에 비해 감정표현이나 가사 전달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북경어로만 노래하면서 가사 전달이나 앨범의 통일성이 훨씬 상승하였다. 또한 Cineploly 시절 음반들은 촉박한 시간과 한정된 투자로 레코딩 상태가 형편 없었는데 EMI 이적 후 충분한 시간과 자금의 투자, 우수한 스텝들로 앨범 레코딩 퀄리티가 국제적 수준에 맞춰졌다.[11] 성숙기에 들어선 왕페이의 음악과 중국 대중음악에서 들을 수 없었던 높은 레코딩 퀄리티 등으로 EMI 시절 5장의 정규 앨범들은 모두 중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앨범들로 평가받는다.
1997년 9월 장녀 출산 후 복귀 앨범이자 EMI 이적 후 첫 앨범인 '''『王菲』'''를 발매한다. 전체적으로 기존 왕페이의 음악노선을 따랐지만 중국의 인디 뮤지션 周鳳嶺이나 홍콩의 밴드 BlackBox의 멤버 張佳添과 작업하면서 신선함을 더하였다. 『浮躁』보다 더 대중성에 신경을 써서 팝 록 스타일의 '你快樂(所以我快樂)', 발라드 '人間' 등이 사랑을 받았고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처음으로 광동어 곡이 전혀 없이 발매한 앨범으로 홍콩보다 대만과 중국 대륙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이때부터 홍콩연예계를 떠나 중국 본토 위주로 활동한다.
1998년 10월 앨범 '''『唱遊』'''를 발매하고 두번째 콘서트 투어 '唱遊大世界'를 열었다. 『唱遊』는 전체적인 사운드는 심플해졌지만 다양한 창법과 기교, 깊어진 감정전달 등 왕페이의 보컬이 정점에 이른 앨범이라고 평가받는다. 수록곡 ''''홍두(紅豆)''''는 중국 대중음악에서 손꼽히는 명곡들 중 하나로 한국의 이해리와 이보람이 리메이크했다. 중국과 대만에서 대히트했고 홍콩판에 광동어 버전을 수록하여 홍콩에서도 대히트, '''모든 중화권에서 성공하며 독보적인 천후(天后)의 위치에 오른다.''' 음악 외적으로는 중국 최초로 고해상도 CD(HDCD) 기술을 도입했고 앨범 커버가 화제가 되어 왕페이의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포즈 등을 따라한 아류작들이 나왔다. 3년간 진행된 투어 '唱遊大世界'는 커리어 최초로 중국 대륙에서 공연을 열었고, 홍콩 콜로세움에서는 17일 연속 공연이라는 신기록세웠으며,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서도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치뤘다. 특히 1999년 3월 「Eyes on Me」 발매 직후 열린 일본 콘서트는 무도관에서 2일간 열렸으며 '''중화권 최초로 무도관에서 단독콘서트를 한 가수'''가 되었다.
1999년 2월 24일 일본에서 게임 파이널 판타지 8 주제곡 「Eyes on Me」를 싱글로 발매한다. 스퀘어에서 주제곡을 담당할 가수를 찾다가 왕페이의 목소리가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하고 EMI에 연락했다고 하며 『중경삼림』에 이어 왕페이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여준다. 「Eyes on Me」는 왕페이의 청아한 목소리, 시대를 앞서간 게임 그래픽을 바탕으로한 뮤직비디오, 파이널 판타지 8의 높은 화제성이 시너지를 일으켜 많은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 게임 OST의 명곡으로 여겨진다. 오리콘 주간차트 9위에 올라 '''중화권 가수 최초로 오리콘 싱글차트 TOP 10에 진입'''했고, 50만장 이상 판매되어 당시 게임 주제곡 최고판매량을 갱신했으며[12] , 게임음악 최초로 일본골든디스크에서 상을 받아 등려군에 이어 '''두번째로 일본골든디스크에서 수상한 가수'''가 되었다. 일본활동 후 9월 '''『只愛陌生人』'''을 발매했다. 프로듀서 장아동과 C.Y. Kong이 기존 왕페이 노선의 중심을 잡아주는 동시에 중국(郭亮, 李冰)과 대만(陳曉娟)의 뮤지션들과 협업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꾀했다. 앨범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세기말을 의식했으며 2002년까지 홍콩, 대만, 싱가포르에서 80만장 넘게 판매되었다.
2000년 3월 '''홍콩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여성가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정규앨범 16장과 그 외 앨범 4장이 총 970만장이 판매되었는데 이는 중국 대륙시장을 제외한 인구 700여만명의 홍콩 판매량이다. 저작권 의식 수준이 낮은 중국 대륙은 현재까지도 정확한 음반판매량 집계가 불가능하며, 왕페이의 모든 음반판매량 기록들은 홍콩, 대만, 싱가포르, 일본의 기록이다. 10월 발매한 '''『寓言』'''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확연히 구분되는 앨범이다. 전반부 5곡은 왕페이 작곡, 장아동 편곡, 왕페이-장아동 공동 프로듀싱으로 모두 중국에서 작업했고 베이징 심포니 오케스트라과 협연하여 고전 영화의 사운드트랙 같은 드라마틱한 음악을 시도했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홍콩에서 작업한 후반부는 C.Y. Kong이 대부분 작사/작곡했고 프로듀서 양교백(梁榮駿)이 대중성을 목표로 프로듀싱을 해서 비평적으로 후한 점수는 받지 못했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2.5. 일본진출, 2046, 활동중지
「Eyes on Me」의 대성공 후 도시바EMI는 왕페이에게 적극적으로 '''일본진출'''을 권했고, 그 결과 2001년 7월부터 9월까지 일본 후지 TV 3분기 드라마 《우소코이(ウソコイ)》 여주인공 林菲으로 출연했다. 남자 주인공은 나카이 키이치, 여자 조연은 나카마 유키에이였으며 간토 평균 시청률 7.9%을 기록했고 왕페이가 부른 주제곡 「Separate Ways」는 오리콘 주간순위 14위에 올랐다.
10월 EMI에서의 마지막 앨범 '''『王菲』'''[13] 를 발매한다.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왕페이가 작사/작곡에 참여하지 않고, 쭉 함께해온 중국의 장아동이 아니라 홍콩의 양교백과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다. 크게 달라진 제작 환경처럼 앨범도 기존 왕페이 스타일에서 벗어나 각각의 곡들이 참여 뮤지션들의 색이 드러난 곡들이었지만 왕페이의 보컬과 개성이 앨범의 통일성을 만들었다는 평을 들었다. 중화권에서는 여전히 식지않은 인기를 보여주며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일본에서도 단 한개의 일본어곡이 수록되지 않은 중국어 앨범임에도 오리콘 앨범차트 14위를 기록했다. 앨범 발매에 맞추어 콘서트 '全面體演唱會'를 열었고 일본에서는 무도관에서 2일, 오사카죠홀에서 1일 콘서트를 열었고 EMI에서 DVD로 발매되었다.
2002년은 활동중지했던 91년 이후 처음으로 앨범을 발매하지 않은 한 해였다. EMI와 계약종료 후 SONY와 계약을 했지만 매년 앨범을 발매하는데 지친 상태였고 영화촬영 중이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9년 왕가위 감독의 《2046》에 캐스팅되고 2001년부터 촬영에 들어갔지만 왕가위 특유의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제작 방식 때문에 촬영은 끝없이 길어졌다. 늘어지는 촬영에 왕페이를 비롯한 배우들은 지쳐만 갔고 제작자 유진위는 배우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자 2002년 코미디 영화 '''《천하무쌍》'''을 찍었다.[14] 양조위, 조미, 장첸과 함께 출연한 《천하무쌍》에서 왕페이는 '''홍콩 영화 평론가 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두번째로 홍콩 금상장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2003년 11월 2년만의 앨범 '''『將愛』'''를 발매한다. 장아동이 프로듀서로 다시 합류했고 앨범 분위기는 훨씬 편안하고 부드러워졌다. 앨범 발매 인터뷰에서 연예계 생활에 지쳤고 휴식을 취하고 싶다고 밝혀 이때부터 은퇴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홍콩, 대만, 일본 등 판매량 집계가 되는 아시아 국가에서 총 100만장 이상 판매되었고 12월 콘서트 투어 '菲比尋常'를 시작했다. 2004년 9월 《2046》이 개봉했고, 2005년 1월 菲比尋常 투어가 종료되었다. 그리고 5월 '''무기한 활동중지를 발표한다.''' 이전부터 밝힌대로 지나친 언론의 사생활 침해, 쉴틈없이 짜여진 스케줄 등 연예계 활동에 지친것이 이유. 이후 자선활동 등 극소수의 행사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공식적 활동을 하지 않고 철저히 언론을 피하며 생활했다.
2.6. 활동재개
2010년 1월 7일 주윤발 주연의 영화 《공자 : 춘추전국시대》 주제곡 '幽蘭操'을 발표하며 '''5년만의 복귀'''를 알렸다. 2월 13일 CCTV 춘절만회(春节晚会)에 출연하여 이건의 '傳奇'를 리메이크해서 불렀고 이 무대는 바이두 검색 4억5천만건 돌파하고 음원차트를 휩쓰는 등 여전한 왕페이의 인기와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2010년 10월부터 2012년 6월까지 6년만의 투어 '巡唱'를 열었는데 중국 대도시와 홍콩,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46공연에서 무려 2억 위안(=2900만 US달러)의 티켓 수입을 올렸다.
투어 이후 정규앨범은 발매하지 않고 영화 OST 위주로 1년에 신곡 1-2곡을 발표하고 있다. 2013년 4월 절친한 친구 조미의 감독 데뷔작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의 주제곡을 부탁받아 부른 ''''致青春''''은 그해 하루동안 가장 높은 검색량을 기록한 노래가 되며 히트했고 왕페이는 2013년 바이두 올해의 가수에 선정되었다. 그해 5월 등려군 탄생 60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여하여 등려군이 마지막으로 녹음한 미완성곡 '清平調'을 듀엣버전으로 완성시켜 공연했고, 2015년 5월 등려군 사망 20주기에 맞추어 정식 음원발매했다. 2014년 《총총나년》의 주제곡 ''''匆匆那年''''은 공개 24시간내 중국 뮤직비디오 조회수를 갱신하며 대히트했고, 2015년 《로스트 인 홍콩》의 주제곡 '清風徐來'은 중국 역대 박스오피스 6위에 오른 영화와 같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15년 2월 영국의 유력 여론조사기관 YouGov가 조사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 순위''' 중 17위를 차지했다.[15] 11월 22일 12년만의 정규앨범이자 20년만의 광동어 앨범 '''『敷衍』'''을 발매한다. 원래 『敷衍』은 1996년 Cinepoly 시절 녹음되어 96년말이나 97년초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왕페이가 EMI로 이적하면서 Cinepoly에서 보복으로 EP 2장과 베스트 앨범의 보너스 트랙으로 쪼개서 발매했다. 흩어진 채 돌아다니던 음원들을 왕페이가 유니버설 뮤직에서 개인 레이블 浮躁音樂을 설립하고 판권을 매입해서 19년만에 정식앨범으로 발매했다.
2016년 7월 영화 OST가 아닌 오랜만의 신곡 '塵埃'을 디지털 싱글로 발표했고, 9월 영화 《종니적전세계로과》 주제곡 '你在終點等我'을 불렀다. 12월 30일에는 약 4년 6개월만의 콘서트 '幻乐一场'을 상하이 메르세데스 벤츠 아레나에서 열었다. 투어가 아닌 1회 한정 단독공연으로 텐센트를 통하여 생중계되었고 중국 최초로 4K, VR 버전으로도 생중계를 하였다. 높은 티켓값에도 1시간 이내에 전석 매진되었고 당시 생중계 동시접속자가 2500만명을 넘어섰다.
2017년 11월 영화 《공수도》의 OST를 발표했다. 마윈[16] , 이연걸, 토니 쟈, 견자단 주연의 단편 영화며 왕페이는 마윈과 듀엣을 했다. 이 노래는 중국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 샤미에 독점공개 됐는데 하루에 사용자 수가 3천만 명을 넘어 섰고 유효 재생 수가 2억 5천만에 어마어마한 수치를 보여줬다.
3. 디스코그래피
3.1. 정규앨범
3.2. EP
3.3. 싱글
4. 필모그래피
4.1. 영화
4.2. 드라마
5. 여담
- 90년대 중반 영국령 홍콩시민권을 얻은 홍콩 국적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중국 본토에서 활동했고 2000년대 이후 완전히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 보니 광둥어도 90년대는 매우 유창했지만 2010년대는 많이 까먹어 홍콩 콘서트전에 따로 광둥어 연습을 하고있다. 2019년 파파라치에 의해 딸과 함께 공항에서의 모습이 포착되어있는데 손에 홍콩 여권이 들려있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 북경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단 한번도 제1언어 북경어로 연기해본적이 없다. 공리와 장쯔이가 출연해 북경어를 하는 왕가위 감독의 《2046》에서도 왕페이는 광동어를 한다. 대신 북경어 더빙판에서 성우를 쓰지 않고 본인이 직접 더빙을 해서 홍콩판이든 북경판이든 모두 왕페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연예계 언론과 사이가 매우 안좋다. 두번이나 활동중지했던 이유도 파파라치와 수 많은 찌라시 시달려 연예계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데뷔초에는 방송활동이나 인터뷰도 많았으나 90년대 후반부터는 언론과 아예 척을 져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어졌다. 독보적인 슈퍼스타여서 황색언론이 미친듯이 까대고 찌라시를 뿌려도 살아남는 것이지 일반 연예인이었으면 매장됐을 수위의 공격을 받고있다.
- 헤비스모커였다. 자신의 맑은 목소리가 평범하다고 생각해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하며 『將愛』 앨범에는 담배를 못 끊겠다는 '煙(담배)'라는 곡도 있다. 하지만 최근 담배를 끊었다.
- 카우보이 비밥의 히로인 페이 발렌타인의 모델이 되었다.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이 왕페이의 팬이라고.
- 주기적으로 티베트 순례를 다녀오는 등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로 유명하다. 불경에 멜로디를 붙여 불교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 조미, 유가령과 매우 절친한 친구. 유가령과는 데뷔초 홍콩에서 활동하는 중국 본토출신 연예인[17] 이라는 공통점으로 친해셔 30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유가령의 남편이자 영화에서 같이 연기한 양조위와도 친해서 가족끼리 만나는 사이. 조미는 2002년 영화 《천하무쌍》을 찍으면서 친해졌는데, 조미가 처음 감독한 영화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2013)의 주제곡을 부탁하자 아무조건 없이 흔쾌히 노래를 불러줬다.
- 음반사의 상술과 횡포로 정규앨범이 20장인데 컴필레이션 앨범이 24장이나 된다. 특히 Cinepoly는 EMI 이적 후 정규 앨범 발매시기에 맞춰서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고, 구성도 성의없는 우려먹기여서 많은 지탄을 받았다.
6. 사생활
1994년부터 중국의 유명 락밴드 '흑표'의 보컬 '''두유'''(窦唯; 더우웨이)와 교제를 시작하여 1996년 7월 결혼, 1997년 1월 3일 장녀 두정동(窦靖童)을 출산했다. '흑표'는 중국 대륙에서 매우 유명했지만 본토 이외 중화권에서는 듣보잡이여서 당시 홍콩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1999년 두유의 불륜이 언론에 발각되고 왕페이가 이혼소송을 걸어서 그해 8월 이혼하였다. 양육권은 왕페이가 가져갔다.
장녀 두정동(窦靖童; 더우징통)은 베이징에서 태어나 자랐고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밴드를 결성하고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2016년 '''Leah Dou'''라는 이름으로 앨범 『Stone Cafe』를 발매하며 데뷔했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며 왕페이의 콘서트 '幻乐一场'에서 코러스를 담당하기도 했다.
2004년 7월 드라마 소오강호(2001)의 주인공이었던 '''이아붕'''(李亚鹏; 리야펑)과 교재를 시작해서 2005년 7월 결혼했고, 2008년 5월 27일 차녀 이언(李嫣; 리옌)을 출산했다. 리옌은 구순열을 가지고 태어나 왕페이와 리야펑 부부는 '嫣然天使基金'이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중국의 구순열 환자들의 수술을 후원하고 있다. 2013년 9월 리야펑과 생활방식의 차이로 이혼했지만 원만히 헤어져 이혼 후에도 재단활동과 양육을 공동으로 하고있다.[18]
11살 연하 '''사정봉'''(謝霆鋒; 셰팅펑)과의 로맨스는 파파라치 사진 한장만 공개되도 바이두와 웨이보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는 중화권 최고의 스캔들이다.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도 등장할 정도다. 처음 교재가 알려졌던 2000년[19] 당시 사정봉은 갓 스무살 된 홍콩 최고의 라이징 스타였고 왕페이는 이혼 후 딸을 홀로 키우던 중화권 최고의 가수였다. 데뷔전부터 왕페이의 열렬한 팬이었던 사정봉의 적극적인 구애로 연인 관계가 되었지만 2002년 둘은 헤어진다. 헤어진 뒤 사정봉은 장백지와 잠시 사귀었지만 금방 헤어졌고, 2003년 왕페이와 재결합하지만 몇개월 뒤 다시 헤어진다.[20]
이후 왕페이는 이아붕과 결혼했고 사정봉은 장백지와 다시 만나 결혼해서 각자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 그러다 사정봉은 2008년 진관희 섹스 스캔들이 터진뒤 2011년 장백지와 이혼하고, 왕페이는 생활방식 차이로 2013년 9월 이아붕과 이혼한다. 두번째 이혼 후 재결합 설이 돌다가 2014년 9월 사정봉과의 데이트 사진이 파파라치에 찍혀 11년만의 재결합이 공개되었다. 워낙 탑스타들이고 15년전부터 얽히고 설킨 인연이라 '2014년 중국 최고의 스캔들 1위'로 선정되는 등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다. 2019년 3월 현재까지 사정봉과 열애중이다.
[1] 여지껏 중화권을 벗어나 인기를 얻은 가수는 등려군과 왕페이 둘밖에 없다.[2] 대만의 국회의원이자 작가 리아오(李敖)의 강연 및 회고록에서 밝혀진 내용. 리아오의 아버지와 왕페이의 할아버지는 같은 하얼빈 출신에 베이징대학 동기 동창이여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3] 厦门大学, Xiamen University, 하문대학. 푸젠 성 샤먼 시에 위치한 중국 15-20위권의 종합대학.[4] 영화 첨밀밀을 보면 당시 시대상을 짐작 할 수 있다. 2014년 홍콩 우산 시위에서 볼 수 있듯이 홍콩인들과 중국의 갈등은 현재진행 중이다.[5] 앨범에는 북경어와 광동어 버전 2개가 모두 실렸으며 홍콩에서 활동은 광동어로 하였다. 북경어 가사는 왕페이가 썼지만 광둥어 가사는 陳少琪가 작사했다.[6] 『胡思亂想』의 수록곡. 크랜베리스의 Dreams을 번안한 노래로 보통화 버전 제목은 '掙脫'이다. 몽중인이 워낙 히트해서 아시아권에서는 원곡보다 몽중인이 더 인지도가 높다.[7] 이후 출연한 작품들은 모두 개인적인 친분으로 출연하게된 것으로 《戀戰沖繩》는 장국영, 《大城小事》는 여명, 《2046》과 《天下無雙》은 왕가위의 인연으로 출연했다.[8] 대만 전체인구가 약 2200만명이다. 산술적으로 대만 인구의 약 9%가 앨범을 샀다는 것.[9] 중국 공산당은 80년대 중반까지 등려군의 노래를 靡靡之音(퇴폐적인 음악)라며 금지했었다. 菲는 왕페이의 이름이면서 非(아닐 비)와 같은 발음으로 菲靡靡之音은 1.왕페이의 등려군 노래 2.왕페이의 퇴폐적인 노래 3.퇴폐적이지 '''않은''' 노래라는 중의적인 앨범명이다. 현재까지도 위키백과 중국어판에는 菲靡靡之音의 뜻이 설명되었지만 바이두 백과에는 일절 언급이 없다.[10] 이는 홍콩 연예계 전체적으로 나타난 추세로 90년대 이후 홍콩 연예계가 쇠퇴하는 이유가 된다. 홍콩 영화 항목의 4.침체의 원인을 참조.[11] 아무리 막귀라도 Cinepoly 음반과 EMI 음반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12] 2002년 우타다 히카루의 킹덤 하츠 주제곡 光이 기록을 깬다.[13] 1997년 EMI 이적 후 처음 발매한 앨범과 동일한 셀프 타이틀 앨범이다. 연도를 붙여 王菲(1997), 王菲(2001)로 구분한다.[14] 《동사서독》(감독 왕가위/제작 유진위)과 《동성서취》(감독 유진위/제작 왕가위)의 경우 똑같다. 일본의 체계적인 촬영에 익숙한 기무라 타쿠야는 《2046》을 찍으면서 왕가위에게 학을 땠다.[15] 상위 20위 안에 든 유일한 중국인.[16] 알리바바 그룹의 대표이사 회장[17] 유가령은 장쑤 성 쑤저우에서 태어나 15살에 홍콩으로 이민 온 본토출신이다.[18] 결혼생활 당시에도 별다른 잡음이 없었던 부부였고, 장녀 두정동이 인터뷰에서 두유보다 이아붕이 더 아버지 같고 지금도 자주 왕래한다고 밝힐 정도로 관계가 좋다.[19] 사귄다는 소문은 1999년 가을부터 나왔고, 2000년 봄 파파라치에 찍히면서 공개적으로 알려졌다.[20] 2002년 사정봉이 장백지와 바람나서 헤어졌고, 2003년 사정봉이 왕페이를 못잊어 돌아왔지만 왕페이가 사정봉을 찼다는 설이 정설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