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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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래

본명
Natasha Shanta Reid (나타샤 샨타 리드)
한국명
윤미래 (尹美來)[1]
출생
1981년[2] 5월 31일 (42세), 미국 텍사스 주 킬린 포트 후드
국적
[image] 미국[3]
신체
162cm, 46kg, AB형
학력
서울미국인고등학교 (중퇴)[4]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5]
종교
개신교[6]
가족
배우자 타이거 JK, 아들 서조단(2008년생)[7], 사촌 오빠 박재선[8]
소속사
FEELGHOOD MUSIC
소속그룹
MFBTY
데뷔
1997년 업타운 1집 앨범 [Represent]
SNS

1. 소개
2. 활동
2.1. 음반
2.2. OST
2.3. 피쳐링
2.4. 방송 출연
3. 수상내역
4. 홍보대사
5. 비평
5.1. 논쟁의 이유
6. 기타
7. 관련 문서


1. 소개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가수.[9]
1997년 업타운 1집 앨범 [Represent]로 데뷔했다. 미국 출생이며 유년 시절 미군 아버지를 따라 미국, 한국[10], 독일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랐다. 1995년 만 14세(중학교 2학년) 때 미국에서 살다가 업타운 멤버의 눈에 띄어 데뷔 준비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외국인학교를 다녔지만 외국인학교 내부에서도 흑인 혼혈로 차별을 받아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다고 말했다. 미국인, 한국인, 흑인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었지만 이제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알고 있고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아버지는 주한미군으로 복무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토머스 J. 리드(Thomas J. Reid), 어머니는 한국인이며 미국 텍사스 주에서 태어났다. 윤미래는 한국 이름이며, 나타샤 섄타 리드(Natasha Shanta Reid)라는 법적인 영어 본명이 있다. 그 외에 T, 타샤, GEMINI 등의 다른 예명으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 DJ를 했던 아버지[11] 덕분에 음악을 많이 접하며 성장했다. 이는 윤미래의 검은 행복이라는 곡에도 언급이 된다.
1995년 업타운의 멤버를 모집하던 정연준의 눈에 띄어 1997년에 한국에서 데뷔. 당시 만 15세에 데뷔했지만 19살이라고 속여서 활동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과 알앤비를 동시에 소화시킬 수 있는 보컬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다.[12]
업타운을 잠시 떠나 애니[13]와 함께 타샤니라는 2인조 여성 듀오로 활동하기도 했으며[14][15], 타이틀곡이었던 "참을 수 없어 (Techno Ver.)"는 이렇다 할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타이틀곡의 실패로 후속곡이었던 '하루하루'[16], '경고[17]' 역시 줄줄이 성적이 부진하였으나 이 두 곡은 오히려 시간이 지나서 묻혀진 명곡으로 발굴되어 아직까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인기곡이 되었다. 하루하루는 미국 여가수의 슈퍼우먼인가를 표절했다고 하는 말이 있으며 노래가 상당히 유사하다.2000년 대마초 파문에 휘말린 업타운이 공식 해체되자 솔로로 전향.[18] 2001년에 1집인 'As Time Goes By'를 내놓아 큰 히트를 치며 솔로로 자리매김했다.[19]
타이거 JK와는 업타운 시절부터 친해졌으며 2007년에 결혼하여 2008년 3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들 조단을 낳았다. 타이거 JK가 인터뷰에서 한 말에 따르면, 흠 잡으려고 해도 흠 잡을 데가 없어서 어지간히 기가 센 남성 래퍼들도 윤미래한테는 음악적으로 아무런 찍 소리를 못한다고. #
슈퍼스타K3의 심사위원을 맡았지만 음악적 감수성이 높은 것 때문인지 다른 심사위원에 비해 냉철한 평가 멘트가 부족하여 심사위원으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2011년 9월 미국의 MTV의 뮤직 웹사이트 MTV Iggy가 선정한 주목해야 할 해외 여자 래퍼 12에 선정되었다. # 윤미래를 소개하기를 한국 힙합계의 여왕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20] 다만 국내에선 세계 12대 여성 래퍼로 선정됐다는 보도자료가 널리 퍼져있는데 원문 기사를 봐도 세계 최고의 12대 여성 래퍼라는 문구는 없다. 오히려 순위 기사라기 보다는 그저 다른 나라에 이러한 래퍼도 있다고 알려주는 기사에 가깝다.
2011년 12월 타이거 JK와 함께 MBC 로고송을 불렀다. MBC 50주년 로고송 조단 & 타이거JK & T.
2010년 즈음부터 미국 진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2012년 6월 발매 될 파 이스트 무브먼트의 새 앨범 타이틀곡에 저스틴 비버와 함께 피처링 참여한 것이 발표되었다. #
2014년 12월 25일 개봉한 북한 김정은 암살을 소재로 다룬 영화 더 인터뷰 OST에 참여인 줄 알았으나 소니측에게 무단 도용당했다. OST 사용 합의를 보는 과정에서 합의가 중단되어서 없던 일이 되었던 건인데 결국 정작 영화에서는 쓰인 것. 곡명은 'Pay Day'. 관련기사. 윤미래 측은 그래서 현재 소니 픽처스를 상대로 소송 준비 중. 2015년 5월 13일 소니 픽처스는 윤미래와 합의했다. 관련기사.
2015년 7월 30일 한화 이글스 응원가인 "이글거려"를 발표했다.

2. 활동



2.1. 음반


  • 2001년 9월 10일 As Time Goes By
  • 2002년 5월 4일 Gemini (Hiphop Album)
  • 2002년 12월 5일 To My Love
  • 2003년 4월 25일 Best
  • 2007년 2월 23일 Yoonmirae
  • 2009년 1월 19일 `떠나지마...` 디지털 싱글
  • 2011년 10월 27일 Get It in 디지털 싱글
  • 2014년 12월 8일 ANGEL 디지털싱글
  • 2015년 12월 14일 사랑이 맞을거야 싱글
  • 2018년 7월 5일 Gemini 2 (Hiphop Album)

2.2. OST


  • 2013년 8월 28일 Touch Love (SBS 수목드라마 주군의 태양 OST Part.4)

윤미래 Touch love 주군의 태양 OST Part. 4
  • 2014년 8월 27일 너를 사랑해 (SBS 수목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OST Part.4)
  • 2015년 5월 11일 너의 얘길 들어줄게 (후아유-학교 2015 OST Part.3)
  • 2016년 2월 18일 ALWAYS (KBS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 OST Part.1)

윤미래 - ALWAYS 태양의 후예 OST Part.1
  • 2016년 11월 24일 그대라는 세상 (푸른 바다의 전설 OST Part.2)
  • 2017년 5월 17일 Goodbye (추리의 여왕 OST Part.4)
  • 2017년 6월 16일 젊은 날의 Sky (KBS 금토드라마 최고의 한방 OST Part.3)
  • 2018년 10월 11일 그대 그대 그대 (오늘의 탐정 OST Part.5)
  • 2019년 8월 7일 My Dream (신입사관 구해령 OST Part.2)
  • 2019년 8월 8일 꽃 (Rose) (영화 김복동 OST)
  • 2019년 12월 22일 Flower (사랑의 불시착 OST Part.02)
  • 2020년 2월 22일 Say (이태원 클라쓰 OST Part.8)

윤미래 - Say 이태원 클라쓰 OST Part.8

2.3. 피쳐링



2.4. 방송 출연



3. 수상내역


  • 2016 제8회 멜론뮤직어워드 뮤직스타일상 OST 부분
  • 2016 제 25회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본상
  • 2013 Mnet 아시아 뮤직 어워드 베스트 OST
  • 2013 제5회 멜론뮤직어워드 뮤직스타일상 OST부분
  • 2012 제6회 아동학대예방의 날 보건복지부 장관표창
  • 2012 제5회 스타일아이콘어워즈 SK-II 피플스 초이스
  • 2010 제3회 스타일아이콘어워즈 스카이뷰티풀셰어링상
  • 2010 제4회 Mnet 20's Choice 가장 영향력 있는 스타 20인
  • 2008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노래상
  • 2008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 음반상
  • 2002 SBS 가요대전 R&B부문상

4. 홍보대사


  • 2007.07 무지개청소년센터 홍보대사
  • 2010.11 아동학대예방 홍보대사
  • 2012.04 제11회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홍보대사

5. 비평


한때 '대한민국 5대 래퍼는 윤미래, T, 타샤, GEMINI, 그리고 조단 엄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에게 윤미래는 '한국 최고의 래퍼'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힙합 음악은 역사가 짧기도 하고 대중들에게 여전히 생소하기도 하여 여성 아티스트의 참여가 현저히 드물었고, 거기다가 동시기의 힙합의 본토 미국에서조차 여성 래퍼 중에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Da Brat, 로린 힐, 릴 킴 그리고 미시 엘리엇 정도였을 정도로 결코 넓은 저변을 지니고 있지 않았었다.
힙합 1세대 래퍼라는 점과 한국 최초의 여성 래퍼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대중적으로 성공한 래퍼도 적었던 시기에 나온 래퍼다 보니 한국의 모든 여성 래퍼들은 좋든 싫든 윤미래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 문제는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여성 래퍼는 윤미래 뿐이다보니 잘하냐 못하냐의 기준도 윤미래를 두고 논해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 언프리티 랩스타에 출연했던 치타, 타이미, 릴샴 역시 이러한 풍토는 옳지 않다고 인터뷰에서 직접 비판한 적도 있다. 몇몇 리스너들은 윤미래와 전혀 다른 스타일로 힙합계에서 인정받은 리미가 진정한 한국 여랩 탑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리미는 래퍼로서의 활동을 접었다.
윤미래는 커리어를 오래 이어왔으니만큼 절대적인 넘사벽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거품이라는 의혹 역시 끊이지 않는다. 윤미래는 미국 출생으로 어릴 적 미군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짧은 시간 거주한 것을 빼고는 한국 나이로 15살 때부터 한국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한국에 와서도 중, 고등학교로 외국인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한국말이 서툰 편이다.[21] 따라서 가장 많은 지적을 받는 부분으로 데뷔 후 몇 년동안 한국어 가사를 직접 쓰지 못했다는 점이 꼽힌다.[22][23]
그래서 업타운 시절에는 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한국어 랩 가사로 인해 온갖 음악 관련 웹진에서 혹평을 들은 적도 많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래퍼가 자신의 가사를 못 쓴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외국이었다면 고스트라이터로 찍혀 묻혔을 일이다. 자신이 가사를 못 쓴다는 사실 때문에 MC가 아닌 프로듀서로 여겨지는 Dr. Dre는 다 짜서 넘겨주기 때문에 래퍼가 아니라 프로듀서로 여겨지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래도 윤미래가 말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대필은 아니지 않느냐' 라는 이야기로 반박하는 이들도 있으나, 애초에 본인이 이야기를 쓰지 않고 남한테 작사를 맡긴다는 것 부터가 이미 라임과 플로우를 남에게 맡겼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거나 진배없다. 그 증거로 윤미래의 노래 작사 저작권은 대부분 타이거 JK 앞으로 등록되어 있다. 단순히 감수, 틀린 것을 교정하는 것을 떠나 아예 다른 이가 새로 써준 랩을 대신 불러주는 것 부터가 심각한 결점이라는 것.
힙합초기에 영어랩을 하는 것은 대부분의 래퍼들의 트렌드였으니 윤미래만 꼭 집어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대표적으로 드렁큰 타이거의 타이거 JK만 봐도 초창기에는 김진표가 대신 써 준 가사를 불렀으나 이후엔 본인이 자신의 작사실력을 키워 본인이 직접 작사를 하고 인정받았다. 설령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이 부당하다고 여겨질 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에는 그랬다 정도의 평가일 뿐, 현재의 평가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결정적으로 윤미래는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만든 한국어 랩으로 채운 음반을 단 한 개도 낸 바가 없다.
랩으로 메이저 기획사에서 full-length 앨범을 발매했으며 충분한 판매량을 확보했으니, 대중적인 히트곡이 있다는 것은 다른 여자 래퍼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범접하기 어려운 장점이다. 다만 이에 관해 순수하게 랩으로 승부를 낸 히트곡이 없다는 점도 지적사항으로 꼽히고 있다.[24] 제이지의 Empire of state 사례를 들며 반박하는 의견도 있으나, 제이지는 이미 순수랩 히트곡을 여러 보유하고 있는 레전설 래퍼이고, 결정적으로 제이지의 디스코그래피와 역량은 고작 Empire of state 하나로 대표될 정도로 호락호락한 가수도 아니다. 애초에 Empire of state 자체도 알리샤 키스와 피처링으로 기획된 노래인지라 혼자서 후렴을 보컬로 때운 검은 행복같은 사례와는 비교하기도 힘들다. 차라리 굳이 비교하자면 니키 미나즈의 Superbass 같은 노래랑 비교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참고로 그 니키 미나즈도 초창기 앨범의 곡을 이런 식으로 구성하는 바람에 '지나치게 상업 지향적' 이라며 매니아들한테 까였었다.
몇몇 이들은 미국 데뷔하면 성공할 래퍼 1순위로 윤미래를 꼽기도 한다. 그러나 윤미래 스타일은 예전에 유행했던 스타일에 정박 위주의 랩이라 요즘 미국의 주류 스타일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이때문에 윤미래가 미국에 진출해도 더 현란한 플로우와 래핑을 구사하는 래퍼들이 즐비한 본토에서 굳이 윤미래의 랩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리스너들도 많다. 또한 이는 바꿔 말하면 윤미래가 기존에 안주하고 트렌드 연구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25][26]
윤미래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래퍼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래퍼라는 명제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중음악 관점에서 윤미래를 평가하면 분명 대중들에게 성공한 래퍼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음악적인 관점에서 따졌을때 나올 수 있는 평이다. 윤미래가 뛰어난 래퍼로서 인정받기 원한다면 매니아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건 어느 나라를 가도 마찬가지이다. 로린 힐이나 미시 엘리엇같이 오랫동안 하드힙합팬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들의 특징은 결과물의 완성도로 증명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국적 성별을 떠나 모든 래퍼들이 이제까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인의 능력을 증명해왔다. 오버그라운드에서 상업적이라고 비판받았던 니키 미나지 역시 여러 가수들과의 콜라보와 거기에서 보여준 독보적인 래핑을 통해 본인의 능력치를 증명하였다. 다른 래퍼들 역시 다 그래왔는데, 윤미래에게만 예외적인 기준을 적용해서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이 명제를 그대로 적용해 음반 판매량과 음원 순위로 래퍼들의 능력을 평가한다면, 이미 한국 음악시장에는 윤미래보다 훨씬 높은 판매량과 음원성적을 보여주는 자칭 래퍼들이 수두룩 하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본인이 직접 작사도 한다.
이런 래퍼로서 치명적인 핸디캡을 안고도 어떻게 한국 최고의 여성 래퍼로서 각인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결론만 말하자면 결국 혼자 살아남았기에 1위로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가 흑인이라는 혈통, 외모 버프가 분명 있었으며, 힙합의 고참인 타이거 JK 없이 그냥 솔로 래퍼였다고 해도 지금처럼 추앙받고 있었을지는 의문. 즉 전성기 이후엔 본인 역량이 제자리 걸음이거나 퇴보했더라도 부부 래퍼라는 이름으로 명성이 유지될수 있다는 음악 외 조건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살아남았을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자면 애초에 시작이 래퍼가 아닌 댄스 그룹 멤버였을 뿐더러, 업타운이나 타샤니 활동을 비롯해 R&B 위주 솔로 앨범의 히트로 기반을 착실히 다져놓은 상태였기에 실패에 대한 부담을 최대한 덜어놓은 상태에서 '여성 래퍼로서의 솔로 앨범'이라는, 한국 음악계에서 보기 힘든 동시에 상업적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시도를 감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말 그대로 맨 땅에 랩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렉시나 Foxy, MC 혼, 예솔, Steady B를 비롯한 동시기 여성 래퍼들의 경우 저런 시도를 할 상황 자체를 만들 수 없었다. 끽해야 MC 혼이나 예솔처럼 그룹에 묻어가거나 인디 레이블에서 소규모로 EP 찍어내는 정도. 스테디 B의 경우에도 1집을 낸 게 이름 알리고 거의 10년 후인 2009년이었으니 말 다 했다. MC 혼[27]은 DICE라는 인디 밴드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긴 하지만 이마저도 본업은 아니고, 랩하던 시절 인지도가 낮다가 댄스 가수로 전향한 1집에서 '애송이'가 히트치며 엄청나게 이름을 알린 렉시는 말할 것도 없다.
윤미래가 데뷔한지 10년 넘게 흐른 2000년대 시점에서도 '여성 솔로 래퍼'는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실력 논란이 있긴 했지만 온갖 마케팅을 하고도 욕만 한 바가지 먹고 실패를 맛본 타이미를 보면 자명. 웬만큼 간 큰 기획사 사장이 아닌 이상 아무리 인디에서 찬양받던 이라고 해도 '여성 솔로 래퍼'라는 카드에 섣불리 지원해줄 엄두를 못 내는 건 마찬가지였다.
허나 2010년대에 들어선 이후, 각종 매체를 통해 한국 힙합씬의 저변이 넓어지고 대중들 사이에서도 크게 인식되면서 성공적으로 데뷔하여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여성 솔로 래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언프리티 랩스타를 통해 주목받거나 혹은 커리어를 다시 이어가기 시작한 제시, 헤이즈등의 아티스트들이 대표적이며 씬 내부와 매니아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서 저변을 넓힌 재키와이, 스월비, 릴 체리, 윤훼이 등이 등장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윤미래가 가지고 있던 단점인 자체적인 작사 불가능과 래퍼로서의 미비한 힙합 디스코그래피를 데뷔시기부터 메꾸며 한 단계 진일보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윤미래에게 있어서는 '1세대 대표 여성 래퍼' 타이틀은 몰라도 '현존하는 최고의 여성 힙합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에는 점차 멀어져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 동안 쌓아온 경력과 위상덕에 여전히 존경받는 1세대 아티스트로 남겠지만 더 이상 정점의 자리를 현역으로 독점하기에는 힙합 아티스트로서 더 실력있는 후배들이 넓어진 씬에 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상황인 것.
이 외의 윤미래의 성공 요인을 꼽아보자면 음악적인 지원이다. 즉, 노래나 랩을 아무리 잘 한다 한들 좋은 곡을 만들어줄 이가 없으면 말짱 황이라는 것인데, 윤미래에게는 업타운에서 같이 활동했던 정연준을 비롯해 박근태, 방시혁 같은 강력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손에서 '하루하루', '참을 수 없어', '경고', '시간이 흐른 뒤 (As Time Goes By)[28]', '메모리즈' 같은 명곡들이 쏟아져나왔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들이 만들어낸 숱한 히트곡들을 생각하면 그 위상이 얼마나 후덜덜했는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정작 윤미래의 최근 행보는 OST 팝 발라드 위주의 디스코그래피[29]로 힙합과는 꽤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이며 간간이 힙합이라고 나오는 노래들은 오히려 후렴 부분 훅에 무게가 실리는지라 일부에서는 순수하게 랩으로 승부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최고의 여자 래퍼라고 일컬어지는 상황.
결국 오랜만에 나온 앨범 Gemini2 에서는 잔뜩 혹평만 받고 말았다. 보컬은 다른 가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탑클래스지만 랩은 더 이상 뛰어난 수준도 아니고, 발전은 커녕 퇴보한다는 평가만 받았다. 거기다 랩 실력은 둘째치고 여전히 부실한 작사능력과 미약하기 그지 없는 앨범의 내러티브는 매니아들 조차 등돌릴 정도로 실망스러운 결과물만 안겨줬다는 평이다. 힙합 전문 리뷰 사이트 리드머에서는 앨범의 퀄리티를 대놓고 비판하기도 하였다.링크
그나마 장점이라면 기량적인 측면에서 흑인 특유의 하드웨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량. 소위 말하는 땜삥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사운드를 때리는 파워가 아득히 다른 래퍼들은 따돌리고도 남는 수준이며 이 때문에 화려한 플로우나 랩 스킬을 보여주지 않아도 청중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는 점은 호평받는 부분. 또한 가창에서도 발휘되는 특유의 파워풀한 발성은 랩에서도 돋보인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위치에 대한 평가와 능력에 따른 평가는 엄연히 달리 이루어져야 하는데, 윤미래는 전자가 후자에 대한 평가마저 뒤덮고 있는 상황이라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하다.
2월 21일 나온 주노플로의 곡인 <Statues REMIX (ft. Bizzy, Double K, Dok2, Tiger JK, Yoonmirae)>에 피쳐링진으로 참여하였는데, 한국어 가사는 없지만 독보적인 라임과 발성으로 아직도 발전하고 있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대중의 반응 또한 대부분 호평이 가득하다.
종합하자면 1세대 힙합인들 중에서도 미국 출신과 당시로선 흔치 않은 여성으로서 일궈낸 노력과 결과물에 대한 리스펙은 충분히 필요하며 인정되지만, 압도적인 넘버 원 래퍼라기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고 평가받는다. 더욱이 2000년대 후반부터는 래퍼로서의 커리어보다 발라더, R&B 타입의 커리어를 더 자주보이는지라 순수한 의미에서 래퍼로서의 평가는 조금씩 떨어져가는 편. 다른 면으로 보자면 양쪽 모두에 수준급의 활약을 보이는 올라운더화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5.1. 논쟁의 이유


사실 윤미래에 대한 평가가 원래부터 이렇게까지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윤미래가 처음 데뷔했을 당시 한국에서 힙합의 입지는 지금의 반의 반도 안되는 수준이었고,[30] 따라서 대중적인 호응도 지금보다 컸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거기다 솔로 데뷔했을 당시엔 지나친 외국 여성래퍼들(특히 로린힐)에 대한 레퍼런스나 부정확한 한국어 발음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다' 는 이유로 관련 매거진에서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특유의 땜삥이나 느낌, 발성 때문에 기대하고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고, '아직은 미약하지만 포텐이 많은 가수' 정도가 딱 그녀를 바라보던 업계의 시선이었다.
게다가 윤미래는 업타운 당시 '보컬' 로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온전히 래퍼라고 여기는 시각도 당시엔 희미했다. 이때문에 솔로 당시 래퍼로 나온다고 했을 때 오히려 놀랍다는 시각도 있었다. 당시 그녀의 랩실력은 완전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음에도,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았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기대주 정도의 시각으로 보았지, 지금처럼 거장급으로 평가를 내렸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보면 당시 윤미래의 성과물은 기대에 못미쳤으면 못미쳤지, 대단한 무언가를 남겼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당장 그녀가 이후 냈던 솔로 앨범들도 대부분 싱잉과 랩이 비슷한 비중으로 담겨 '온전한 힙합 앨범' 으로 보긴 무리가 있었고, 이후 활동했던 타샤니 역시 당시로서는 잘봐줘야 '중박' 수준으로 무언가 임팩트를 크게 남긴 행보를 걷지는 못했다.[31] 지금와서 '경고'나 '하루하루' 같은 노래들이 스테디 셀러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상위 항목에 서술되었듯, 당시로서는 오히려 묻힌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쯤 윤미래가 무브먼트 멤버들과 교류가 많아지고,[32] 각종 관련 행사와 인터뷰에서 타이거 JK, 개코를 비롯한 다른 무브먼트 멤버들이 윤미래를 추켜세워주기 시작하면서 갑작스레 평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래와 함께 공연하면 다른 멤버들이 비교될까봐 무대 못선다' 라던가와 같은. 이런 이야기들이 윤미래 본인의 스토리+흑인 핏줄+한국 1세대 힙합 그룹 멤버' 라는 백그라운드와 합쳐져 함부로 범접하면 큰일나는 사람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된 것.
이 시기 쯔음해서 갑자기 윤미래의 과거 곡들이 스테디 셀러처럼 언급되더니, 3집 발매 쯤해서는 순식간에 레전드 래퍼로 추앙받기 시작하였다. 이 후 타이거 JK와의 결혼이나 '한국 5대 래퍼' 같은 밈들이 인터넷에서 유행하면서 지금의 윤미래의 커리어를 만들어줬다는게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윤미래의 과거 히트곡들은 완전한 랩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고, 단 한 번도 결과물로 무언가를 증명한 적은 없다.[33] 때문에 다른 래퍼들과 달리 여전히 검증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여성 래퍼' 라는 희소성과 동료 래퍼들의 칭찬과 같은 능력외 요소들이 그녀의 평판에 영향을 준 것으로 봐야 한다.
이 때문에 2010년대를 넘어서는 이제 그만 윤미래 좀 신격화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힙합 매니아들 사이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윤미래 이름 석자 잊어야 국힙이 발전한다.' 는 글에 동감댓글이 수십개가 달릴 정도.링크 사실 이런 상황을 본인도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워낙 풀이 없는 한국 힙합계에서 그나마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보니 본의 아니게 거품 논란까지 온 것이다.

6. 기타


  • 롤모델은 다 브랫과 로린 힐이라고 한다.
  • 카투사들 중 의정부시 캠프 레드 클라우드에서 복무하는 인원들은 가끔 볼 수 있다. 부대 후문으로 나오면 보이는 제법 큰 마트가 있는데, 여기에 윤미래와 타이거 JK가 가끔 나타난다. 조단을 데리고 나올 경우도 있다. 가끔 여기 없는 물건을 사러 홈플러스에 들른 가족의 모습을 보았다는 목격담도 있다.
  • 2020년 자신의 대표곡이자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검은행복을 소재로하는 동화책 <검은행복>을 출간했다.#

7. 관련 문서



[1] 법적인 본명은 아니다. 윤씨는 한국인 어머니의 성씨다.[2] 데뷔 초엔 1978년생이라고 속여서 데뷔했다.[3] 과거 한국은 '부계주의 국적법'을 택하여 1998년 이전 출생자까지 아버지의 국적만을 부여했기 때문에 한국 국적은 없다.[4] 주한 미군기지 내에 있으며 대부분 주한미군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다. 참고로 영내에는 고등학교 뿐 아니라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있다.[5] 인터뷰[6] 남편인 타이거 JK는 불교라고 하는데 서로의 종교를 존중한다고 한다. 유재석-나경은 부부와 같은 사례.[7] 2008년 3월 대한민국 출생. 부모가 둘 다 미국 국적이기 때문에 아들도 출생 시부터 단독 미국 국적이다.[8] 필굿뮤직에서 Jason Park이라는 예명으로 엔지니어와 프로듀서로도 활동하고 있다. 09년 무한도전 가요제 특집에 출연했었는데 그 당시 방송에 나온 바에 따르면 원래 꿈은 소방관이었으나, 09년도 기준으로 7년째(...) JK 부부에게 붙잡혀 같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9] 보컬과 랩 모두 최상급의 올라운더지만 본인의 이름을 건 히트곡은 대부분 R&B장르의 보컬곡들이다. 래퍼 관련 평가는 이후 항목 참고[10] 열살때 한국에 처음 왔다고 한다.[11] 미군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시절에 부대 내 클럽에서 DJ를 했을 정도로 내공이 꽤 있었다고 한다.[12]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에서 느낀 설움과 기쁨을 다룬 곡이 '검은 행복'인데, 이 곡은 특히 그녀의 음악 커리어에서도 명곡으로 꼽힌다. 중간에 흐르는 나레이션은 아버지가 직접 해주신 거라고.[13] 한국명 이수아. 해체 이후로 가수로 활동하진 않았지만, 홍영주와 함께 안무가로 연예계 생활을 몇 년간 더 이어갔었다. 2000년대 초반에 한국어가 어눌한 캐릭터로 당시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브레인 서바이버', '행복한 대결 막상막하' 등 지상파 메인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했고 엄청난 인기는 아니었어도 나름대로 좋은 예능감을 보여주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갑자기 방송 활동이 뜸해졌고 현재는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14] 업타운의 리더 정연준이 프로듀서 및 작곡을 맡았다.[15] 본래는 이효리(!)와 함께 3인조로 데뷔하려 하였으나 이효리가 DSP로 이적하면서 무산되었다. 반대로 애니는 DSP 연습생이었으나 당시 준비하던 핑클이 본인의 색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 DSP를 퇴사하고 윤미래의 소속사로 옮겨 윤미래와 데뷔하게 되었다.[16] 정연준의 솔로곡을 리메이크 한 R&B 발라드[17] 타샤니의 두번째 후속곡이었으나 방송 활동보다는 리듬게임 'Pump It Up'에 수록돼 더욱 홍보효과를 봤다.[18] 해체 당시 윤미래 또한 같은 멤버였다는 이유로 미성년자였음에도 강도 높은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그 후로 윤미래와 타이거 JK를 포함한 모든 멤버들도 업타운에 대한 언급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자신이 소속된 팀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한때 팀에 소속되어있었던 박탐희도 업타운 소속이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19] 당시 1집과 2집은 , 이브, 컨츄리꼬꼬 등이 소속된 기획사 월드뮤직에서 발매되었으나 2집 발매 직후 샾의 멤버 간 불화로 해체되면서 주가가 급락하여 최종 부도처리되어 윤미래의 2집은 월드뮤직의 이름으로 발매된 마지막 앨범이다.[20] 다만 여기는 이상하게 한국 음악을 밀어주기로 유명한 곳. 그래서 농담으로 '인기가요'의 이니셜(...)이라고 하기도 한다.[21] 아마 그 당시 인종차별 때문에 한국 학교를 다니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외국인학교를 다녔지만 그 곳 안에서도 백인 학생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차별로 인해 매우 힘들었다고 하였다.[22] 일단 먼저 자신이 영어로 가사를 쓰고 남편인 JK가 번역해 라임을 맞춰준다고 한다.[23] 단, Get It In 싱글부터는 본인이 직접 한국어 가사를 쓴다.[24] 대표곡이라고 꼽히는 '검은 행복', 'Memories', '삶의 향기들'은 대부분 후렴부 보컬 훅에 무게가 더 실린 노래이며, 순수하게 랩으로 승부를 본 노래는 없다.[25] 가리온의 MC 메타가 말했듯 음악 트렌드에 영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힙합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이는 래퍼로서 자기 관리에 소홀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26] 스눕독의 비판은 개성없이 천편일률적인 플로우로 랩을 하는 후배들에 대한 비판이지 트렌드에 민감하지 말라는 의견이 아니다. 다른 영상에서는 오히려 젊은 친구들의 놀이와 유행을 존중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링크.[27] 그래도 2000년대 초반에는 에이스로 손꼽히며 케이블 음악 채널에도 종종 등장했었다.[28] 참고로 이 곡의 코드 진행은 당시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알 켈리의 'I believe i can fly'의 코드 진행과 똑같다고 한다. 멜로디가 달라서 표절은 아니고, 당시엔 알앤비 장르 자체가 익숙하지 않던 상황이다 보니 레퍼런스로 삼은 걸로 보인다. 성시경이 자신의 라디오에서 알 켈리 관련 이야기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29] 태양의 후예 OST인 <Always>가 윤미래의 곡이다.[30] 애초에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힙합 시장 파이가 커질 수 있었던 건 '쇼미더머니' 의 영향이 제일 컸다. 해당 프로그램을 부정적으로 보는 현역 음악가들 조차 시장을 키웠다는 점은 하나같이 인정할 정도.[31] 애초에 타샤니는 힙합 '컨셉' 의 여성 듀오이지, 각잡고 힙합을 하는 그룹도 아니었다.[32] 업타운과 불화로 완전히 갈라서게 되면서 자연스레 다른 무브먼트 크루들과의 교류가 늘어났다.[33] 일례로 이센스의 'The Anecdote'나 피타입의 'Heavy Bass' 처럼 소위 인정받는 래퍼들은 결과물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았다. 반면 윤미래는 저런 과정 자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