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주(1887)

 





'''도정궁의 역대 주인'''
15대 창산군 이해창

'''16대 이덕주[1]'''

(도정궁 매각)
17대 이영기[2]

'''조선귀족 후작'''
'''도정궁 15대 사손'''
'''이덕주
李德柱'''

'''본관'''
<colbgcolor=#ffffff> 전주(全州)
'''이름'''
덕주(德柱)
''''''
흥여(興汝)#
'''생부'''
창산군
'''생모'''
남양 홍씨(南陽 洪氏)[3]
'''부인'''
숙부인 한산 이씨(韓山 李氏)
숙부인 전의 이씨(全義 李氏)#
'''생몰기간'''
1887년 6월 28일 ~ 1962년 11월 7일
1. 개요
2. 생애
2.1. 조선 및 대한제국
2.2. 일제강점기
2.3. 광복 이후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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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황족 출신 관료이자 일제강점기조선귀족.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종가 도정궁의 15대 사손(嗣孫)[4]이자 16대 주인이며 창산군 이해창장남이다.

2. 생애



2.1. 조선 및 대한제국


1887년(고종 24년)[5] 6월 28일에 한성부 사직동 도정궁에서 태어났다.
주로 역임한 관직은 국가 제향시설의 관리였다. 사직영희전을 비롯하여 목릉[6], 정릉[7], 경릉[8], 의릉[9], 익릉[10], 원릉[11]의 참봉을 지냈다. 이외에 경효전[12] 사승과 태복시[13] 주사, 태자시강원[14] 시종관을 역임했고 조경단[15]을 수리한 공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고종 퇴위 직전인 1907년(광무 11년) 5월에는 정3품 비서감승 직을 맡았다.#

2.2. 일제강점기


1910년(융희 4년)에 일어난 경술국치 이후 이덕주의 아버지 이해창일본 정부에게서 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4년 뒤 이덕주는 이해창의 법적 상속자라 해서 종5위를 받았다.
1915년 10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특별회원으로 추천받았다. 그해 11월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다이쇼대례기념장, 1928년 11월에는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45년 3월에 아버지 이해창이 사망하자 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5달 뒤에 조선해방되었다.

2.3. 광복 이후


8.15 광복 이후인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뒤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후 1950년대에 도정궁을 매각했다.
1962년 11월 7일 오전 0시 30분에 서울 종로구 당주동 자택에서 사망했다.#[16] 향년 75세.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들어갔다.#

3. 가족


어머니 남양 홍씨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의 딸이다.
부인이 두 명이었다. 첫 부인 한산 이씨을미사변명성황후와 함께 살해당한 이경직의 딸로, 이덕주보다 1살 연상이었으며 1913년에 사망했다. 이후 11살 어린 전의 이씨 부인과 재혼했다.#
장남 이우갑(李愚甲)은 1918년 3월에 태어났고 1950년 5월에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래서 이덕주 사후 도정궁 사손 자리는 이우갑의 장남 이영기(李英基)가 물려받았다. 이영기는 1946년 생으로 2024-10-23 02:48:03 현재까지 생존해있다.
[1] 군호를 받기 전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군호가 없다.[2] 원래 이덕주의 장남이자 이영기의 아버지 이우갑이 물려받아야했으나 이덕주보다 먼저 죽었다. 그리고 1950년대에 도정궁을 매각하여 이후로는 도정궁에서 거주한 경험이 없다.[3] 홍종우의 딸.[4]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란 뜻이다.[5] 고종은 이덕주의 증조할아버지 뻘이나 나이는 35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즉, 이덕주는 이원 황사손과 같은 항렬이다.[6] 선조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능.[7] 태조의 비 신덕왕후의 능.[8] 헌종효현왕후, 효정왕후의 능.[9] 경종선의왕후의 능.[10]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의 능.[11] 영조정순왕후의 능.[12] 명성황후의 혼전이다.[13] 국가에서 사용하는 목장, 수레를 관리하던 곳.[14] 황태자 교육을 담당하던 곳.[15] 전주 이씨 시조 이한위패를 모신 장소.[16] 기사 원문에는 이름이 이흥여로 적혀있다. 흥여는 그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