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평가
1. 플레이 스타일
1.1. 타격
상대가 어떤 공을 던질지 미리 예상하고 해당 코스로 휘두르는 게스 히터. 다른 거포 스타일의 타자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스윙도 간결하지만, 일단 배트에 맞은 공은 확실히 멀리 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승엽의 타격기술에 대해 분석한 기사도 많은데, 공통적인 내용이라면 힘보다는 기술로 넘긴다는 것이다. 즉 배팅 포인트시 공의 중간에서 약간 아랫부분(스윗스팟)을 쳐서 멀리 넘기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또한 유연성이 좋아서 컨디션이 좋을때는 어떤 자세에서도 거의 교과서 적인 스윙으로 배트를 컨트롤한다.
노리고 치는 스타일이지만 한국 프로야구 통산 타율이 3할을 넘는다. 통산 홈런 10위권 중에 타율이 3할을 넘는 것은 이승엽, 양준혁, 이대호, 최형우 뿐. 양준혁과 이대호, 최형우가 홈런타자보단 교타자로 분류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승엽의 3할은 대단한 성적이다. 힘으로 넘기는 타자들이 빗맞춰도 넘겨버리는 능력이 있다면 이승엽은 공의 중심을 때리는 능력 자체가 좋기 때문에 안타나 2루타도 많이 양산을 해낸다. 이에 관해서 정리해놓은 글이 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본다면 자신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공이 왔을 경우 대처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단점이다. 때문에 변화구 대응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고, 정말 어이없게 벗어나는 공을 스윙하여 스트라이크 판정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직구에 대한 대응력이 낮아지자 일본프로야구에서 분석된 뒤로는 별로 활약을 하지 못했다. 특히 종변화구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이따금씩 몸쪽 공을 잡아당겨서 큰 타구를 만들어내서 많이 가려지는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몸쪽 공에도 약하다. 때문에 대 이승엽 투구패턴은 몸쪽 몇개 보여주고 바깥쪽 변화구, 혹은 종변화구로 승부가 거의 정석. 그래서 이승엽의 약점을 나타내는 말은 떨공삼(떨어지는 공에 삼진)이다. 이 떨공삼은 신인 때부터 은퇴하는 날까지도 온전히 극복해내지 못했다.
일본 언사이클로피디아에서는 이승엽을 타석에서 춤추는 선수(...)로 묘사하고 있다. 그만큼 삼진이 많은 선수. 다만 이는 KBO보다 수준이 높은 NPB에서의 부진이 심화되면서 나오는 이야기로, 한국에서의 이승엽은 삼진은 많을지언정 그 못지않게 볼넷을 많이 얻어내는 타자이다. 한국프로야구 1기 9년 동안 0.306의 통산타율에 0.409의 출루율을 유지했으며, 한국 복귀 이후 성적까지 포함한 통산 출루율은 .389이다.
물론 4할에 근접한 출루율이 순전히 선구안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승엽 정도의 홈런 타자라면 투수들이 가급적이면 '헛스윙 해주면 좋고 아니면 볼' 식의 승부를 하게 되기 마련인데, 상술한 대로 게스 히터인 이승엽은 그런 공에도 스윙을 해서 삼진을 당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허나 거기에 당하기만 했다면 공갈포로 전락했을 것이고,[1] 그 정도의 타자였다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승엽은 KBO 통산 16년 동안 볼삼비가 1:0.8 정도를 유지하는 타자다. 공격적인 성향 때문에 삼진당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KBO리그에서 선구안이 나쁜 편에 속하지는 않고, 거포형 타자 중에서는 상위권에 든다고 볼 수 있겠다.
삼진이 많은 것과 함께 거론되는 단점으로는 기복이 심하다. 이것은 일본프로야구는 물론 한국프로야구에 있었을 때도 언급되었던 문제점. 즉 타격 감각이 올라왔을 때는 한 경기 2~3개 홈런을 연달아 치면서 홈런 개수를 급격히 늘리는 재주가 뛰어나나, 부진할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삼진머신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월별 성적 뽑아보면 한 시즌내에서 좋을 때와 안좋을 때의 월별 성적이 '''3할'''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등 컨디션과 멘탈에 좀 지나치게 영향을 많이 받는 경향이 있다.
2006년까지만 해도 직구에 대한 대응력이 매우 뛰어났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변화구는 괜찮으나 빠른공 상대타율이 점점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 노쇠화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각에서는 요미우리로 옮겨 온 이후 근력 향상을 위해 근육질로 몸을 키우고 유연성을 외면한 것[2][3] 이 역으로 배트스피드 저하와 부상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이렇듯 생각보다 약점이 많은 선수. 이 때문에 일본프로야구에선 분석 + 멘탈 문제가 겹쳐 한국프로야구에 비해 많은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장 그렇게 좋지 않다는 일본프로야구 성적을 합쳐 계산해본다면 타율, 출루율, 볼넷을 제외한 스탯에서 양준혁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또한 외국에서 통하지 않는 타자라고 폄하하기에는 국제대회 성적도 좋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시작해 국가대표에 꾸준히 뽑혔고, 현역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추후 명예의 전당 입성자들로 이루어진 팀을 국제대회에서 볼 수 있었던 역대 유일한 대회였던 2006년 제 1회 WBC에서는 대회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는 등 현재까지 국제대회 통산 홈런과 타점 1위는 그의 몫이다.
다만 일본에서는 가장 좋았던 06년을 제외하고는 소속리그에서 타격 스탯이 비율, 누적 공히 홈런을 제외하고는 순위권에 들어간 적이 별로 없다. 그 홈런 수도 8년간 159개로 연평균 20개에 가깝지만, 홈런 숫자만 많을 뿐 나머지 스텟은 장타 부문(2루타, 타점, 장타율 등)을 제외하고는 10위권 안에 들어간 적이 없는 공갈포 스타일이었다. 사실 위에 나온 몸쪽공과 바깥쪽 변화구, 횡변화구에 약점이 있다는 내용은 일본 리그에 간 바로 다음해인 05년에 일반인 대상으로 발행하는 스카우팅 리포트에 들어있는 내용으로 구단 스코어러가 분석한 내용도 아니고 일반인들에게 공개 되는 서적에 실릴 정도로 약점이 명백하였으나 결국 이를 일본 생활 8년 내내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요미우리 시절 이승엽은 단 한번도 팀내 최고연봉자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돈값 한 시즌은 06년뿐이다. 홈런 잘 나오기로 유명한 도쿄돔을 홈구장으로 쓴 것을 감안할 때 요미우리 시절의 활약은 홈런 숫자만으로 가늠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환경이었다.
06년 시즌만큼은 역대 NPB 진출 선수 중 최고의 활약을 보였으나, 이대호라는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부상이 없는 한 풀타임 4번타자로 꾸준한 활약이 보증된 타자가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1년이라도 잘한 타자가 없었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게 되었다.
일반적인 거포 이미지(힘은 좋지만 발은 느린 근육돼지 라든지)와는 달리 주루능력도 있다.[4] 컨디션 관리와 부상 방지 등의 이유로 도루 횟수 자체는 많지 않지만, 주루사가 적고 허를 찌르는 도루도 한 번씩 하는 편.[5]
발이 느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수치가 병살타 갯수. 2015년 기준으로 7천타석을 넘게 들어섰는데 100개를 갓 넘는 수준이다.[6]
일본에서도 3,000타석 가까이 들어섰지만 병살 갯수는 40개로 대략 75타석에 1번꼴. 이는 좌타자인 것을 감안해도 손꼽히는 수준이며 이승엽보다 타석에 많이 들어선 선수중에 이승엽보다 병살 비율이 낮은 타자는 KBO내에 오직 전준호 한 사람뿐이다.
장타/안타 비율이 엄청나서(45%대) 은퇴 선수 중 역대 장타율 1위이기도 하다. 비슷한 장타율의 박병호가 있기는 하지만 그 또한 만년으로 갈수록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1.2. 수비
타격이 주목받기 쉬운 능력이라서 상대적으로 잘 언급이 안 되는 부분이긴 하나 수비 실력도 역대 최고를 논할 수준이다. KBO는 말할 것도 없고 NPB에서도 센트럴리그 연속 무실책 기록(1,225이닝)을 가지고 있다. 1루 수비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볼 수 있는 포구나 번트 수비시 숏 바운드 처리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1루 선상수비도 아주 좋다. 다만 왼손잡이 1루수답게 1루선상 강습타구 수비는 가끔씩 약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한창 요미우리에서 삽 푸고 있을 때 이승엽이 나오면 '오늘은 수비 위주 라인업'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얘기할 정도.
기본은 1루수지만 커리어동안 딱 2년간 좌익수를 본 적이 있다.
한국 시절에는 1996시즌으로, 당시 전 해의 신인왕 이동수가 부상 이후 복귀하였는데, 원래 3루수였지만 수비가 불안하였다. 고로 1루로 전향을 꾀하였고 이승엽은 1루수에서 밀려나 좌익수를 맡았다.[7] 이 때 양준혁도 이승엽과 이동수 때문에 우익수로 밀려났던 적이 있었다. 다만 이 때 좌익수로 나오는 일은 적었다.
일본에서는 치바 롯데 소속이었던 2005시즌에 좌익수로 기용된 적이 있다. 당시 치바 롯데의 1루수는 1루 전문 스페셜리스트이자 팀의 최고 인기선수였던[8] 후쿠우라 카즈야였는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기도 힘든 게 1년차 이승엽이 워낙 성적이 안 좋았던 반면 후쿠우라는 워낙 수비가 좋은 선수였던데다[9] 그 시점에서 4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타격도 빼어난 선수였기 때문이다.[10] 이 때문에 이승엽은 입단 첫 해부터 주로 지명타자로 나왔는데, 지명타자도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좌익수 경험을 살려 이듬해인 2005시즌에는 좌익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2012년 이후로는 나이 때문에 지명타자로 많이 나오고 있다. 1루수로도 나오지만 지명타자 빈도가 더 많다. 그러나 2012년에는 웬 모험꾼이 최악의 부진을 겪는 바람에 시즌 중반에 1루수를 본의 아니게 다시 봤지만...[11] 2013년에는 그 모험꾼이 각성한 덕분에 지명타자 출장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현역 마지막 시즌이 될 2017년에는 다시 1루수 출장 비중을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개막전 1루수로 선발 출장하고 1루수로 100경기 이상 출장하는게 목표라고 한다.[12] 현역 마지막 시즌이라 은퇴 전 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더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삼성 라이온즈가 1루수 용병을 데려오면서 보기 힘들 전망이다.
1.3. 라이언 사도스키 리포트
한국의 전설적인 타자지만 기량이 쇠퇴했다. 모든 타석에서 ‘테드 윌리엄스 시프트’를 사용할 것. 땅볼의 95%가 오른쪽을 향한다. 외야수들은 정위치를 지킬 것. 몸쪽 직구에 약하다. 쳐도 파울이 된다. 몸쪽 공에 손이 일찍 덮이고, 그래서 실망하고 나면 더 일찍 치러 나온다. 이때쯤에도 아직 아웃되지 않았다면 바깥쪽 낮은 직구가 효과적이다. 오른손투수들은 커브나 슬라이더를 던지면 안 된다. 체인지업은 통하겠지만 직구가 더 나은 해결책이다. 좌투수는 몸쪽 직구를 보여주고 나면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다. 주력은 평균 정도지만 상황 판단이 좋다. 세 명의 1루수 중에 수비력이 가장 좋다.
1.4. 종합
KBO 리그에서 뛰면서 그가 역대 KBO 리그 최고의 홈런타자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통산 타율도 3할을 넘기고 통산 OPS가 0.960에 달할 정도[13] 로 사실상 주루를 제외하면 완벽에 가까운 타자이다. 다만 리그 수준차를 보아 타 경쟁자들 대비 '역대 최고의 타자'라고 보기는 힘든데, 그래도 KBO 내 활약만 보자면 역대 최고수준에 반드시 들어가며 홈런으로만 보자면 최정 말고는 비교할 자가 없다.[14] 이승엽의 진가는 41세까지 이어진 그의 활약인데, 이로 인하여 그는 실로 무지막지한 마일스톤을 쌓았다.
단 리그 수준 차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06시즌을 제외하면 공갈포성이 짙은 성적을 냈고 특히 08년 이후의 성적은 처참하다. 일본에서는 장타력과 수비는 수준급이었지만 나머지는 평균 이하였고 특히 선구안과 컨택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합법적 병역 브로커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마다 한방을 쳐주면서 영웅으로 등극했다. 클러치 히터는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쟁이 뜨겁지만 국가대표 팀에서의 이승엽에게는 분명 스타성이 있었다.
2. 자기 관리
야구선수 중엔 흔치 않은 비흡연자에, 술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 내에서도 가장 몸 관리에 철저했다고 하며, 일찍이 MLB나 NPB식의 선진 훈련 체계를 접하면서 크게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이승엽의 롱런에는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도 한몫했다는 평을 받는다.
3. 꿈보다 돈을 사랑하는 남자?
이승엽은 2004년과 2007년 자유계약신분으로 미국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각각 지바 롯데와 2년 5억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4년 30억엔의 계약을 맺으며 미국 진출을 포기한다. 그의 이러한 선택을 두고 일각에서는 돈을 위해 꿈을 포기한 것으로 해석한다. 2004년 그가 다저스로부터 제시받은 계약규모는 100만 달러 정도의 마이너계약[15] 이었으며, 2007년에는 구체적인 협상 내용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요미우리에서 당시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았으니 금전적으로 미국행보다 NPB에 남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팀을 정상으로 올려놓기 위해서라는 건 FA선수들이 밥먹듯이 하는 말이다. 류중일도 말했는데 야구는 1명이 잘 한다고 이기는 스포츠가 아니다. 이승엽이 요미우리에 잔류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갔다고 해서 요미우리가 우승을 못 한다는 생각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6~2007년 이승엽이 그나마 일본에서 평타이상칠 때는 팀은 우승하지 못했다. 그리고 먹튀가 된 2009년에 요미우리가 우승한다. 팀을 정상으로 올리겠다는 건 형식적인 말이라는 것이다. 솔직한 이유는 우승을 하고싶어서[16] 가 맞다. 팀이 잘나가는 팀이라야 분위기도 있고 신나는 법이다. 비밀번호를 찍는 팀보다는 훨씬 팀 분위기가 좋기 때문이다. 다른 솔직한 이유로는 당시 메이저리그에 가서 성공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17] KBO에서 슈퍼스타였는데 일본에 와서는 타이틀 1개도 수상을 하지 못했으니 메이저리그에 가서 데뷔시즌을 2004년처럼 망할 경우 몸값은 4년 30억엔이라는 파격적인 금액에서 반토막났을 것이다. 그래서 도박보단 안전하게 30억엔을 받은 것이다. 이승엽을 아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승엽은 도박같은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반면 이대호나 오승환은 일본에서의 거액을 뿌리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하였고 심지어 최향남도 메이저 도전을 했는데 메이저리그 도전이 아니라 요미우리에 잔류한 후 30억엔을 먹튀한 것은 위 내용을 뒷받침해준다. 2010년 부활을 노렸다고 반론할 수도 있는데 2010년 이승엽 성적을 본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2016년 이대호가 이승엽과 비슷한 대박계약을 포기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해서 모든 악조건과 메이저 백업을 감수하고 도전하면서 이승엽과 비교되고 있다. 2017년 황재균 역시 무모한 도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본인의 꿈을 위해 트리플A로 가면서 국내에 잔류할 경우 메이저리그 도전보다 몇배는 더 많은 돈을 포기했다. 과연 이승엽의 꿈이 메이저리거였을지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하면서 인기를 얻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안전한 길을 따라가면서 꿈이라 외치는 메이저리그에 도전의지가 과연 있었는지부터가 의문인 셈이다.
3.1. 반론
프로가 돈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더구나 그가 해외로 진출한 2004년 당시에는 KBO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선수가 단 한명도 없었을 뿐 아니라, 리그의 수준차와 위상을 감안할 때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하는 것 역시 충분한 도전의 가치가 있었음이 사실이다. 2007년 다시 한 번 메이저리그 진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가 이를 포기하고 요미우리에 잔류한 이유는 팀을 일본 정상으로 올려놓기 위해서였다.[18] 이는 그가 요미우리에 잔류한 직후부터 본인이 누누히 밝혀온 내용이고, 이는 실제 계약 조건에 요미우리가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할 경우 메이저리그 진출을 보장한다는 옵션을 건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더군다나 당시 그는 메이저리그의 모구단으로부터 상당히 좋은 조건의 계약을 제시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2003년 양키스와 계약한 마쓰이의 경우를 참고해보건대 WBC와 NPB에서 대활약한 이승엽이 메이저리그에 갔다면 이대호처럼 1년간 리그 적응 검증 후에 대박계약을 노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서전에서도 아베 신노스케와 같은 선수들이랑 같이 요미우리를 우승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2009년에 요미우리가 우승했을 때,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라 분했다고...
정작 꿈을 위해 돈을 포기했다는 이대호는 메이저리그 경력 덕에 150억 계약을 체결했고 선수협 회장이 되고나서 판공비로 5,6천만원씩 받아간다는 걸 감안하면 이승엽을 비판할 때 이대호를 꺼낼 수 있을지나 의문이다.
4. 일본시절 먹튀
이승엽은 2004~2011년까지 일본프로야구에서 총 8시즌을 뛰었는데, 05~07 3시즌은 꽤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나 그 외의 기간은 부진했고, 결국 2012년 한국으로 복귀한다. 그가 먹튀라는 오명을 얻게 된 이유는 이러한 기나긴 부진에 요인하는 것으로 특히 요미우리와 초대형 계약을 맺은 이후 3시즌 동안 극도로 부진하여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04~05시즌 지바롯데와 2년 5억엔, 06시즌 요미우리와 1년 2억 1000만엔, 07~10시즌 요미우리와 4년 30억엔, 11시즌 오릭스와 1+1년 연봉 1억 5000만엔 수준의 계약을 맺었는데, 연봉으로만 따지면 04~06시즌이 대략 20위권, 07~10시즌이 일본 최고 수준, 11시즌이 40~50위권 정도로 리그 탑이었던 07~10 이외의 시즌에서도 얼추 상위에 속하는 연봉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일본시절 커리어를 보면, 2루타, 홈런, 장타율, 타점, OPS 등의 주요 공격지표에서 10위권 안팎의 성적을 찍으며 그럭저럭 돈값은 한 05시즌이나 연봉 대비 몇 배의 활약을 펼친 06시즌을 제외하고는 30억 엔 계약 후 07은 어느 정도 면죄부가 된다 해도 수준 이하의 성적을 찍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먹튀라는 오명을 씻기는 어려우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국내복귀 직후 시즌은 2012년과 일본에서 부진했던 시즌인 2008~2011년을 본다면 마치 다른 사람같은 성적을 내고 있다. 더구나 2014년엔 3할 30홈런 100타점을 할 정도로 기량은 죽지 않았다. 이승엽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일본 성적과 매우 매치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 때 KBO가 극심한 타고투저였다는 것은 감안해야한다. 일본 가기 전인 1997~2003년까진 역대 최고의 홈런 타자였지만 2004~2011년에는 2할 5푼에 평균 20홈런의 선풍기가 되어 버렸고 국내 돌아오자마자 30대 후반 나이에 다시 활약한다는 것 자체가 한일간의 수준 차이를 뒷받침해준다. 이런 사례는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성공사례라 할 수 있는 류현진이나 이대호, 오승환도 각자의 리그에서 정상급 기량을 보여준 바 있지만, 전체 커리어에서 비교해보면 국내의 기록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병규, 이범호, 정민철 등 이미 국내 레전드 선수들이 일본 가서 망하거나 수준 이하의 성적을 보인 사례는 많다. 또한 한국 리그를 폭격한 용병들 역시 일본 리그에 진출하고 폭망한 사례들이 즐비하다. 그만큼 KBO와 NPB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보여주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리그의 수준차를 감안하더라도 이승엽의 2008년 이후 NBP에서의 성적은 좋지 못한 편이다. 하지만 진출 직후 2시즌은 수준급 성적을 냈다는 점과 국제대회에서는 강했다는 점 때문에 국내용 타자라고 폄훼하기엔 어폐가 있다.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나무위키에서도 여러 번 서술된 부분인 NPB 초창기 시도했던 무리한 웨이트 트레이닝이다. 실제로 NPB에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 2008년에는 국제대회인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부진했다. 이는 리그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이승엽 개인의 문제가 더 크다는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이후 2012년 한국에 복귀한 이승엽은 2008년에 비해 벌크업이 확 빠진 모습을 보여주며, 이후에는 2013년의 부진이 있긴 했으나 종합적으로는 은퇴할 때까지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5. 탁구장+타고투저로 고평가된 타자?
WAR로이승엽은 1999년 9.72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2년은 9.7로 역대 5위다. 2003년 심정수가 WAR이 12점대다. 실제 기록으로 봐도 이승엽이 타이틀은 많이 가져갔지만 심정수가 MVP를 받아도 이상할게 없을정도로 전체적인 성적은 심정수도 잘했다.타자의 공격력을 객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치인 WRC+의 역대 단일시즌 순위를 보면 이승엽이 최고도 아니다[19] . 이승엽은 97·99·01~03시즌 총 5회의 홈런왕을 수상했으며, 특히 03시즌에는 56개의 홈런을 때려 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홈런 기록을 수립했으나, 당시 이승엽이 사용하던 구장의 규모와 리그의 분위기를 거론하며 그의 홈런 기록을 평가절하 하는 주장이 있다. 즉 당시 삼성의 홈구장이었던 대구시민야구장이 리그에서 가장 작은 규모였기 때문에 이승엽이 홈런에서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는 주장과 그가 활약한 시즌은 대부분 타고투저 시즌이기 때문에 그의 홈런 개수에는 거품이 끼어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실제로 그가 2003 시즌에 기록한 56홈런 중, 홈 홈런의 비율은 62.5%로서 원정보다 월등히 높았으며, 그의 전성기인 97~03 7시즌 중 5시즌이 타고투저 시즌이었다.
이러한 논란은 그의 일본 시절로까지 확대된다. 그가 일본 시절 최고의 기록을 올린 2006 시즌 41홈런은 홈런이 잘 나오는 도쿄돔에서 기록된 것이며, 당시 일본리그 또한 타고투저 시즌이었기 때문에 이 역시 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시는 리그 총 홈런이 지금보다 1.5~2배는 더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고, 도쿄톰의 홈런 파크팩터 또한 센트럴리그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또한 나름대로 타당한 주장으로 보인다.
게다가 여기서 화룡점정으로 우즈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KBO에서는 이승엽의 성적이 더 좋았음에도[20] 우즈는 일본에서 이승엽을 성적면에서 '''압살하게 된다.'''[21] 이 때문에 이승엽은 KBO에서 온갖 수혜를 받은 타자, 심지어는 거품이 아니냐는 주장인데 이는 밑에 항목을 참조
정말 타고투저의 득을 본 시즌은 14~17시즌이었다고 할수 있다. 자세한건 타고투저 참조.
5.1. 반론
2007년 넓이가 확장되기 이전 대구구장의 크기에 대한 오해가 있으므로 이에 대해 반드시 정리 해 둘 필요가 있다. 대구구장은 이승엽이 54홈런을 기록한 1999년에는 좌우거리 95m, 중앙거리 117m의 규모로서 당시 프로야구 홈구장으로 사용되던 11개 구장 중 중앙거리 5위, 좌우거리 7위 정도의 위치였다[22] . 나아가 이승엽이 56홈런을 기록한 2003년을 살펴보면, 7개 구장 중 중앙거리 5위, 좌우거리 4위 정도로 대체로 리그에서 중간정도의 크기로 볼 수 있다[23] . 더구나 사실상 가장 큰 잠실과 담장이 높은 사직구장을 제외한 나머지 5개 구장들은 대체로 비슷한 규모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유독 대구구장만이 특출나게 작은 구장으로 인식되어 탁구장이란 조롱을 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즉, 대구구장은 옛날에도 평균정도의 규모를 가지는 구장이었으며, 확장을 하면서 국내에서 2~3번째로 큰 구장이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음으로 1999년 이승엽이 친 54개의 홈런을 분석해 보겠다. 그는 54개 중 중앙으로 22개, 우중간으로 15개, 우측으로 7개, 좌중간으로 9개, 좌측으로 1개의 홈런을 날렸다. 각 방면 홈런의 평균비거리는 중앙 123m, 우중간 120m, 우측 108.5m, 좌중간 110.5m이고, 좌측으로 넘긴 1개 홈런의 비거리는 125m이다. 전체 평균비거리는 118.5m이다. 다만 홈런비거리는 기록원의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기록원도 나름의 기준에 따라 최대한 근사치에 가깝게 기록할 것이며, 110m의 담장을 겨우 넘기는 홈런이 130m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적어도 본 주제에 한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홈런에 대한 특정 구장의 유·불리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홈런 파크팩터가 활용되지만, 이는 팀의 구성원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2013년 잠실구장의 홈런 파크팩터는 두산일때 0.804, LG일때 0.699로 상당한 차이가 난다. 2003년의 대구구장 홈런 파크팩터는 1.274였지만 이듬해인 2004년에는 1.059로 급락한다. 파크팩터의 이러한 들쑥날쑥함을 보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최소 3년 이상의 누적자료를 활용하지만, 그것마저도 부정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수치들은 그저 대략적인 경향성만을 확인하기 위한 참고자료일 뿐 절대적 보정 수치로 활용할 수는 없다. 당시 프로야구 구장의 평균 크기는 96-116-96이고, 좌중간과 우중간은 중앙거리를 기준으로 4~5m짧은 것이 일반적이니까 대략 112m로 잡아도 무리가 없다. 이 정도 크기의 가상구장을 기준으로 하고 각 방면의 개별 홈런을 비교했을 경우 115m의 비거리를 기록한 중앙 3개의 홈런과 100~110m의 비거리를 기록한 좌·우중간 9개 홈런이 넘어가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좌·우중간 7개 홈런이 생산된 대구구장의 좌·우중간 거리는 적어도 112~3m였을 것이므로 이 타구들은 실제로는 좌·우측에 가까운 위치에 떨어진 것들로 보아야 하며, 나머지 2개의 홈런들도 같은 사례들이기 때문에 좌·우중간 9개의 홈런은 어느 구장에서든 당연히 홈런이 되는 타구들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앙으로 날아간 3개의 타구가 모두 홈런이 되지 않았다 치더라도, 50개 이상의 홈런을 쳤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대구구장이 그 당시 특출나게 작은 구장은 아니었고, 따라서 그의 홈런 기록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승엽이 잠실을 홈으로 사용했더라면 홈런수가 급락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잠실구장에서만 132경기를 치렀을 경우를 가정하여 적용하더라도 30+홈런은 거뜬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고[24] , 이미 다른 선수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조건에서 훨씬 많은 수의 홈런을 쳐냈던 이승엽에게만 이런 극악의 가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승엽의 30+홈런 시즌인 97~03년에 기록된 총 홈런의 수는 302개이고 이 중 대구구장에서 친 홈런이 182개니까 60%로 평균보다 10% 높은 수치이다.[25] 참고로 2015 시즌 KBO리그에서 각 팀별 홈런 TOP3에 랭크된 선수들의 홈런 홈/원정 비율을 살펴보면,[26] 분명히 동일한 조건에서 활약한 선수들임에도 불구하고 비율 수치가 제각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삼성의 경우 박석민이나 최형우처럼 홈에서 더 많은 홈런을 친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이승엽·나바로와 같이 원정에서 더 좋은 활약을 한 선수들도 있다. 롯데의 경우도 강민호는 홈에서 62.8%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최준석은 홈에서 고작 35.4%의 홈런밖에 치지 못했다. 다른 구단에 속한 선수들 역시 '''잠실을 홈으로 사용하는 팀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구장에 따른 홈런수의 경감에서 특별한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더불어 이승엽이 각각 54·56홈런을 기록한 1999·2003시즌 삼성 라이온즈 홈런 TOP3에 랭크된 선수들의 홈경기 홈런비율을 살펴보면, 이승엽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이는 선수도 있고, 평균에 수렴하는 선수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27] 구장의 크기가 이들의 홈런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김기태, 마해영이 타석에 들어서면 구장의 크기가 극도로 줄어들었다가, 스미스, 양준혁이 들어서면 다시 고무줄처럼 쭉쭉 늘어났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사례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 동일한 홈구장을 사용하는 선수들끼리도 홈런의 홈/원정 비율이 천차만별이다.''' 그 이유는 선수에 따라 홈에서 더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고, 원정경기가 더 체질에 맞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물론 구장환경의 차이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이승엽이 활약한 시기가 우연히 타고시즌과 겹치는 점을 들어 그의 홈런 기록을 폄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전성기 시즌을 살펴보면 97·98년은 투고시즌, 99·00·01·02·03년은 타고시즌이라 할 수 있는데, 02·03년은 지표상 99·00·01년보다 타고가 상당히 완화된 시즌이었다[28] . '''이 기간 그의 홈런 기록을 보면 32·38·54·36·39·47·56개로 투고시즌인 97·98년에도 30홈런 이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타고가 심했던 99·00·01년는 각각 54·36·39홈런을 때려 99년을 제외하면 투고 시즌과 홈런 생산력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후 타고가 상당히 완화된 02·03년에는 오히려 47·56홈런을 때려 타고가 심했던 시절보다 더 많은 홈런을 치고 있다[29]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승엽은 홈런수가 타고나 투고와 같은 시즌의 분위기에 따라 격동의 차이가 발생하는 유형의 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다른 프로야구 스타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대호는 전성기라 할 수 있는 04~11년에 각각 20·21·26·29·18·28·44·27홈런을 기록했다. 이 중 04~05년은 타고시즌, 06~08년은 투고시즌, 09~10년은 타고시즌, 11년은 평균적인 시즌이었다[30] . 타고시즌과 투고시즌에 따른 홈런수의 경감에서 별다른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이 선수는 연평균 23~4개 정도의 홈런을 치다가 10년에 갑자기 44개의 홈런을 때려 홈런왕에 올랐다. 이 기록은 거품이 한가득 낀 타고시즌의 유산으로 마땅히 까내려야 할 기록일까?
다음으로 그의 일본시절 구장환경과 홈런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리해 보겠다.
도쿄돔의 구장형태와 정체불명의 상승기류[31] 등 애매모호한 근거를 주워듣고는 막연히 이승엽이 홈런에서 엄청난 이득을 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06~10년에 이승엽이 홈구장으로 사용한 도쿄돔의 홈런 파크팩터는 센트럴리그 최고 수준이지만, 1988년 도쿄돔 개장이후 요미우리의 클린업으로 활약한 파워히터들 중 이적한 선수들의 홈런수 증감 수치를 보면 특별히 구장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느낌이 없다[32] . 더불어 이승엽의 일본 시절 홈경기 홈런 비율을 살펴보면, '''홈런 파크팩터가 퍼시픽리그 최악 수준이었던 지바마린스타디움에서조차 원정과 동일한 수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으며, 도쿄돔을 홈으로 사용하면서 이 비율이 7% 증가하지만, 이정도면 한 시즌 20홈런 기준[33] 으로 '''불과 1.4개의 이득을 보고있는 것이 되므로 특별히 큰 수혜를 받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34] . 다시 말해 도쿄돔이 비교적 홈런이 나오기 쉬운 구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비거리가 긴 파워히터 유형의 타자인 이승엽에게 이러한 구장 환경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06시즌 기록한 41개 홈런의 개별 비거리 수치 분석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35] . 도쿄돔은 좌·우중간 길이가 110m로 짧기 때문에 홈런이 나오기 쉬운 구장으로 알려졌는데, 이승엽은 홈런 41개 중 14개를 도쿄돔의 좌·우중간으로 날렸다. 여기에 당시 센트럴리그 구장의 평균 좌·우중간 길이인 112.9m[36] 를 기준으로 하면 넘어가지 않았을 홈런은 도쿄돔의 좌중간 담장을 살짝 넘어가 110m의 비거리를 기록한 19호 홈런 단 1개 뿐이다 . 즉 나머지 40개의 홈런은 비거리상 리그 평균급 구장에서도 방향을 가리지 않고 모두 넘어가는 타구들이므로 이승엽이 도쿄돔을 홈으로 사용함으로써 얻은 이득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2006년 이승엽의 성적에 대하여 단지 해당 시즌이 타고시즌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가절하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식의 방법은 타고시즌에 타율 0.312을 기록하여 리그 18위에 오른 A선수와 투고시즌에 타율 0.276를 기록하여 리그 7위에 오른 B선수를 비교하여 B선수가 더 낫다는 주장을 하는 것에나 유용한 것이지 한 선수의 절대적인 성적을 파악하는 데는 당연히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당시 이승엽이 거둔 성적의 가치는 그 기록의 리그내 위상에서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다. 06시즌 이승엽은 센트럴리그 타율 2위, 홈런 2위, 안타 7위, 타점 4위, 득점 4위, OPS 3위를 기록하여 거의 타격 전부문에 걸쳐 탑5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6. VS 타이론 우즈
7. 2003년 서승화와 난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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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날 경기에서 서승화는 등판하지 않았다. 하지만 LG와 삼성간 빈볼성 힛바이피치와 위험한 수비 및 주루를 주고 받았고 결국 9회 삼성 라형진이 LG 장재중을 맞춤으로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선수들이 모여드는 과정에서 이승엽이 먼저 서승화에게 달려가 밀치면서 둘의 난투극이 시작되게 된다.[37]
어찌보면 이승엽의 흑역사 중 가장 큰 사건. 서승화의 향후 행적이 어떻든 이승엽의 행동이 결코 타당치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7.1. 주장
2003년 8월 9일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쓰고 있던 도중 평범한 벤치 클리어링이 아닌 주먹다짐 난투극+출장정지로 이승엽하면 떠오르는 겸손, 매너, 인성과 매우 괴리감이 느껴지는 사건이다. 펠릭스 호세가 2001년 배영수에게 참교육과 비슷한데 호세는 이 참교육으로 출장정지와 2001년 성적만 보았을 때 MVP는 역대 단일시즌 OPS 3위, 출루율 1위 기록으로 호세가 1순위였는데 참교육 1방으로 골든글러브까지 날라갔다는 점에서 이승엽이 2003년 난투극을 하고도 호세처럼 MVP, 골글 수상 못한 것도 아니라서 승까들은 2001년 호세가 MVP 못 받았으니까 2003년 MVP도 이승엽이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벤치클리어링에서 주먹이 오고간 사건은 거의 드물며 이승엽이 그 중 1명인데 그의 인성에 대한 평가는 서승화와의 난투극을 보았을 때 전혀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승빠들은 서승화같은 쓰레기 투수에게 국민타자가 참교육으로 응징해 준거고 서승화같은 2승 23패 투수를 언급하지 말라고 말한다. 아무리 승빠들이 옹호를 해도 이승엽이 벤치클리어링에서 폭력을 휘두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며 그 당시 이승엽 나이는 28세라는 점에서 어렸을 때라고 변명도 힘들다.[38][39]
이승엽은 "모범이 되어야할 프로선수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면서 잘못된 모습을 보인 것을 후회한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막상 SBS 힐링캠프에서는 서승화가 중학교 후배인데 사과를 안했다는 이상한 사족을 달기도 했다.[40]
7.2. 반론
여기서 문제는 이승엽의 난투가 올바른 행실이니 아니니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경기중 난투는 분명히 잘못된 행동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사건을 가지고 그의 겸손, 매너, 인성과 관련지어 억지로 그를 까내리려고 하는 무리들이 문제다. 여기서 해당 사건을 제시하는 무리들의 목적이 이승엽에 관한 사건을 정리하는 차원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삼성과 LG의 경기는 경기 초부터 벌어진 사구 등의 문제로 인해 두 팀 간의 감정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고, 이승엽 또한 이미 당일 경기에서 고의성 사구를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9회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하고 이승엽과 서승화의 난투가 벌어졌다. 비록 이승엽이 사구를 맞기는 하였으나 엄밀히 말하면 서승화가 가해자는 아니었다. 더구나 서승화는 그 당시 거의 주목받지 못한 어린 선수였기 때문에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였던 이승엽에게 여론이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일말의 변명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승화는 이 사건 이후 그가 은퇴할 때까지 끊임없이 벌어진 일련의 사건사고[41] 는 물론이고, 사기혐의로 피소까지 되는 등의 막장행각으로 인해 동료의식은 커녕 상식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인성 쓰레기의 깡패였음이 명백하게 밝혀졌기에 그를 감싸는 여론 역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42] 실제로 이승엽은 평소 서승화의 행실에 문제가 있어 감정이 상한 상태[43] 였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KBO에서는 이 사건이 우발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판단하여 비교적 가벼운 징계를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이승엽은 이후 인터뷰에서 직접 당사자들이 만나 화해했으며, 본인도 그때의 일을 후회한다고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무리들은 이 사건을 끌어다 그의 인성을 폄훼하는 하나의 소재로 이용함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사건의 이승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른데 프로야구 역사상 몇 안되는 '''경기장 선수 폭력사건'''이자 '''어린 아이들'''에게는 문화 충격이기 때문이다. 이승엽의 실수라 보고 10년이 넘은 이야기+추가 사건 없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저런 어린이들 앞에서 싸움질이나 하는게 레전드냐?''' 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경기장에서 난투극을 벌였는데도 레전드라고 대접받는 선수들이 각 구단마다 하나씩은 있는데 이승엽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7.3. 결론
이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승엽의 '''경기장 선수 폭력사건'''가지고 서로 거친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러려니 하자
13년 후 일어난 삼성-한화 폭력 사태 때는 폭력의 원흉 대신 사과했다. 벤클 때 이상군을 찼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었으나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진실은 이상군만이 알 수밖에
8. 팬 서비스 관련 논란
기부 등의 봉사활동은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이에 관한 평가도 우호적인 편이지만 '''야구장 등에서 이뤄지는 개인적인 팬 서비스에 대해서는 상당히 인색하고 이에 따른 논란도 상당히 많은 편.''' 다른 팀 팬들은 물론 삼성 팬들조차 이승엽의 팬 서비스가 좋지 않다는 것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비판할 정도.
싸인 부탁시 거절은 기본이고 말 걸고 응원해도 무시하며 팬 사인도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본인 말로는 여태까지 많이 해줘서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하며 또 다른 이유로는 자기가 해준 사인볼이 중고나라같은 중고 사이트에 올려진걸 보고 꺼린다고 한다. 전자는 '''일고의 말할 가치 없이 잘못된 생각이고,''' 후자의 경우 사인을 해준 선수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는 있는 문제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더 강경한 대응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옳고 그름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관련 평가에 관하여 한 번 알아둘 필요는 있다(NPB 주니치 드래곤스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구단 차원에서 사인볼 판매 금지를 요청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경대응도 불사할 수 있다고 경고한 일이 있다. 원문 링크).
그래서 일각에서는 사인에 받는 사람 이름을 같이 기재하거나 사실상 사인을 뿌리는 식으로 해서[44] 매물가를 엄청나게 떨어트려 결과적으로 사인의 중고거래를 억제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당초 그런 이유로 모든 사인을 거절하는 것은 정말로 순수한 의도로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의도까지 왜곡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즉, 사인을 해서 사인볼을 팬에게 넘겨준 시점부터 그 공의 소유권 및 처분권은 오롯이 그 팬에게 있으므로, 그 팬이 그 공으로 불법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기분이 나쁜 것은 기분이 나쁜 것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팬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 내지 책임감의 표현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프로가 가져야 하는 자세라고 할 수는 없다.
메이저리거들의 경우에도 판매용 싸인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상당히 많지만 그런 이유로 싸인을 거절해주지 않는다. 한 예로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의 경우에는 판매용으로 쓰지 못하게 야구공의 싸인 위치를 약간 틀어서 해줄지언정[45] 팬들의 싸인 요구를 거절한 적은 없다.
일단 '은퇴 얼마 안 남았으니 팬 서비스 잘해주겠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대로 지켜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6시즌 한 삼팬이 잠실야구장에서 본 모습으로는 여전히 싸인 안해주고 있다고. 싸인 잘해주는 놈들과 안해주는 놈들 정리 그리고 앞서 이승엽 본인이 말한 것처럼 '''공에 이름을 써달라고 하는 분들에게만 해드리겠다'''고 했는데 '''그런 말을 꺼내기 전에 거절부터 해버리니'''... 그냥 안 해주겠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다.Q. 이승엽 선수는 싸인 잘 해주는 편이신가요?
이승엽: '''아뇨. 싸인 잘 안해줍니다.'''
Q. 이유가?
이승엽: '''제가 너무 많이 해 드렸던거 같습니다.''' 지금까지. 예전부터 너무나 많이 해드렸기 때문에 싸인에 대한 노이로제. 예전에 지인들, 팀에서 원하는 것, 팬들이 원하는 것들을 해드리다보니까 '''싸인에 대한 희소가치가 아무래도 좀 떨어지겠죠.'''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직거래가 되는 걸 봤을땐 '아 내가 해줘서는 안되는 거구나' 그래서 웬만하면 안 해드리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린이 팬들이나, 공에다 이름을 써달라고 하는 분들에게만 해드리고, WBC 기념볼 같은 공에 요구하면 제가 좀 의심... 그래서 사실 좀 줄이고 있어요. 하지만 올해 다시 달리 마음을 먹어서 웬만하면 해드릴려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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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의 은퇴를 앞둔 2017년 9월 1일 네이버 스포츠에서 준비한 이승엽 은퇴기념 이벤트에서 지난날 그의 부실하고 형편없던 팬 서비스에 대한 팬들의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삭제된 베스트댓글 '저리가라 이새끼야'[46][47] 특히 이승엽의 경우는 오랫동안 국민타자로 사랑받았던 만큼 이런 괴담의 피해자가 전구단을 걸쳐 여럿 있기 때문에 해당 이벤트 댓글란이 매우 살벌했다. 은퇴 전 이승엽에 대한 미담을 대중들에게 알리려는 취지로 주최한 이벤트였으나 뜻하지 않게 과거의 좋지 못한 행적만 드러나게 되어 망신살만 톡톡히 뻗쳤다.
또한 팀 내 영건인 구자욱, 박해민의 팬서비스가 나쁜 것도 이승엽의 영향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은퇴를 코앞에 두고 열리는 은퇴 투어 중에 경기 전 본인을 보고 자라온 20~30대의 팬들 대신 은퇴 투어를 준비한 각 구단에서 36명씩 '''미리 뽑아둔''' 어린이 팬들만 따로 싸인해주는 걸 보고 이제와서 이미지 세탁하느냐고 까는 팬들도 많다.[48]
'''그나마''' 어린이 팬들에게는 팬 서비스를 좀 해주는 편인데 '''자신이 데뷔한 해, 전성기를 보며 자라온 어린이들'''이 '''지금의 2~30대'''인데 이 사람들에겐 큰 마음의 상처로 남을 것이다. 종목은 다르지만 브라질의 축구 스타였던 호나우두가 팬들에게 싸인을 잘해주다 못해 '''스케줄에 지각할 정도로''' 싸인을 매우 잘해주는 대표적인 인물인데, '''어렸을 때 브라질 리그의 한 축구 선수에게 싸인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그렇다고.''' 호나우두가 이승엽에 비하면 넘사벽급으로 유명 인사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다만 2017년 후반기에는 잘 해주고 있다. 물론 이것이 이전에 팬서비스에 대해서 재평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인터뷰를 보면 은퇴 후 '''행사 때마다''' 웃으면서 아주 잘 해준다고 하니... 만날 기회가 있다면 기대해보자.
이승엽 본인의 겸손 등의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도 자업자득이다. 본인의 이미지 관리를 다른 곳에서 아무리 잘한다 한들 이승엽이 최고의 커리어를 쌓은 곳은 프로야구다. 정치인도 자신들의 지지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킨다. 하물며 팬의 사랑을 먹고 사는 프로선수가 팬들 대하는 태도가 엉망이라면 평소 아무리 인성이 좋아도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다.
은퇴 후에는 좀 나아졌다고는 하는데 여러 이벤트에서 사인 잘 해줬다는 당연한 얘기밖에 없다. 그것도 한정된 인원만 사인해주는데, 많아야 100명대 인원에서 끊고 당첨되지 않은 20명을 추가로 사인해 준 정도. [49] 본인 자서전 사인회에선 자기 책을 산 사람에게만 '''응모 기회'''를 준다는 얘기까지 나오며 비웃음을 사는 중. 친절하게도 다른 데서 구입한 자서전도 인정된다고 한다.#
삼성 팬들 중 일부는 이승엽이 은퇴 전에는 자신에게 혹독하고 팬 서비스를 할 시간에 훈련을 더 하는[50] 성향을 가졌으나 은퇴 후에는 여유가 생겨서 개인 SNS를 시작하는 등 팬들에게 다가서는 모습을 좀 더 보여주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본인이 KBO 홍보대사를 하고 싶다는 인터뷰도 했고. 이런 의견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시대가 지날수록 팬 서비스에 대한 개념이 바뀐 것도 크다. 팬 서비스라는 것이 과거에는 '''사인보다는 팀의 성적에 기여하는 것이 더 중요한 팬 서비스'''로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고, 더욱이 이승엽의 연고지인 대구경북 특유의 보수적인 성향이 이러한 성향에 한몫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이 이전까지의 행적을 만회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약속처럼 은퇴 이후 팬 서비스는 확실히 좋아졌다.
2018년 4월 들어서 공중파 뉴스에 KBO 선수들의 팬 서비스 관련 문제가 대두되자, 이승엽도 같이 언급되고 있다. 물론 부정적인 면으로.
KBO 홍보대사가 된 뒤에도 나오는 이승엽 관련기사마다. 죄다 희소성 관련 드립, 싸인 팔아먹을까봐 안해준다는 발언에 관한 조롱성 댓글들이 달리며 여론이 상당히 나빠졌다. 가령 이승엽이 자서전을 내자 '자서전 희소성 떨어지니까 조금만 찍어라', 아시안게임 해설위원으로 활동한다고 하니까 '목소리 희소성 떨어질 텐데 걍 해설하지 말고 집에 있어라' 같은 조롱성 댓글이 달린다. 앞서 서술한 어린이 팬 싸인거부 소문이 원인이 된 건진 모르겠으나, 싸인 관련 발언에 대해 공개 사과를 하지 않는 한 이것은 평생 이승엽을 따라다니는 굴레가 될 것으로 보인다.
8.1. 왜 문제가 되는가?
너희들이 볼펜 한 자루라도 만들어 봤냐? '''너희들처럼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데도 대접받는 것은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팬들한테 잘해야 한다.'''
기업들이 매년 큰 돈을 들이며 적자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스포츠 구단을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단순히 사람들에게 스포츠 보게 해주려고? 절대 아니다. 기업은 이윤을 내는 집단이지 복지와 봉사를 하는 집단이 아니다. 기업이 스포츠 구단을 운영하는 이유는 '''홍보 효과''' 때문이다. 어떤 스포츠에든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응원하는 팀이 생기게 되고, 그 팀을 운영하는 기업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홍보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팀을 응원하는 팬들을 상대로 기업 홍보와 마케팅 효과를 누리기 위해 큰 돈 들여 스포츠 구단을 운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팬들의 관심과 응원을 당연시 생각하고 무시한다면, 아주 당연하게도 인기와 화제성이 떨어지며, 기업들의 관심도 떨어지게 된다. 기업의 관심이 떨어지면 선수 자신에게도 대접을 전보다 못받는 악영향을 초래하는 결과가 된다.나에게는 싸인을 해 주는 데 5초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 싸인을 받는 사람의 5초는 평생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
[53]
메이저리그를 보자. 대부분의 선수들이 팬 서비스를 성실하게 해주며, 그렇지 않은 알버트 푸홀스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리고 선수 연봉에는 팬 서비스에 대한 가치도 들어있다. 하물며 KBO보다 훨씬 상위 리그인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팬 서비스를 굉장히 잘 해주는 편인데 명색이 팀, 더 나아가 야구 전체를 대표하는 선수가 팬 서비스를 안 하겠다면 그 시점에서 그 선수는 프로선수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굳이 메이저리그까지 가지 않아도 같은 한국 야구선수인 박용택, 오재원, 같은 팀 후배 장원삼이나 대선배 이만수 등의 선수들과 비교해 봤을 때, 이승엽은 팬 퍼스트 정신이 제대로 갖추어졌다고 보기 힘들다. 오직 팬의 사랑과 관심으로 살아가는게 프로선수인데 팬을 우습게 여긴다면 도대체 프로 스포츠의 존재 의의를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결국 프로선수로서 돈은 벌고 싶은데 서비스는 하기 싫었다는 얘기 밖에 안된다. 몇몇 팬들은 이승엽이 사인할 시간에 훈련하는 것을 선호해서 팬들을 외면한 것이라며 비호하고 있지만, 자기 시간 쪼개가면서 팬 서비스를 하는 선수 입장에서는 '''"난 훈련하기 싫어서 팬 서비스 하는 줄 아냐?"'''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사실 삼성 라이온즈는 전통적으로 팬 서비스가 '''가장 나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구단'''이다. 이승엽보다 선배인 양준혁[54] 부터 신인이었던 구자욱까지 전부 팬 서비스에 대해 좋은 소리가 없었고, 다른 구단으로 떠난 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55] 투수조는 상당히 친절한 편이지만, 전술된 야수조가 문제다.[56] 삼성의 원조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만수'''가 선수시절부터 팬 서비스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했던 걸 생각하면, 이승엽을 비롯한 지금의 팀 후배들은 실망스러울 지경. 특히 대표 선수인 이승엽부터가 이 부문에 무성의하니 다른 선수들까지 그런다는 것. [57][58]
이승엽이 선수로서 전설적 성적을 남기고 은퇴를 하였으나 결국 이 일화는 좋지 않은 꼬리표로 남겨져 '''앞으로도 이승엽을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다.'''[59] 팬 서비스는 스포츠 선수들의 기본 덕목임에도 레전드라고 추앙받는 선수가 가장 기본이 되는 팬 서비스에 소홀하며 설득력 없는 변명으로 일관한 것은 참 아쉬운 부분이다. 2017 시즌 은퇴가 다가오자 앞으로는 팬 서비스를 잘 하겠다고 말하였지만 이는 면피용 대처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은퇴 이후 이승엽의 팬 서비스가 박찬호급으로 좋아져도 결국 '''"선수 때는 더럽게 사인 안해줬는데 은퇴하고 나니까 잘해주네"''' 그 이상의 평가는 받을 수 없을 것이다.
2018년에 팬 서비스 논란 기사출처가 나오면서 이승엽의 팬 서비스 문제도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다. 일부 야구팬들은 이승엽의 팬 서비스가 그렇게까지 형편없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며 놀라워했으며, 이로 인해 은퇴 이후 어떠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고 성적까지 좋았던 선수의 평가가 급격하게 떨어진 이례적인 사태가 일어났다.
물론 선수들이 팬 서비스를 하고 안 하고는 선수의 자유나 팬들이 그 선수에게 욕을 하고 떠나가는 것 역시 팬들의 자유다.
간혹 트레이 힐만의 인터뷰를 유효한 반론인 것처럼 제시하며 메이저도 팬 서비스 안 좋은 것은 똑같다고 반박하는 이들이 있는데, 애초부터 그 인터뷰의 장본인인 트레이 힐만은 팬 서비스가 굉장히 좋은 야구인이다. 더군다나 이승엽이 욕을 먹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사인을 안해줘서'''가 아니라 사인을 거절하는 이유에 대한 인터뷰, 즉 '''사인의 희소가치 발언''' 때문이다. 만약 이승엽이 잘 안해주는 행위가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사인의 희소가치 같은 변명 없이 팬 서비스를 좀 잘해줬다면 지금만큼 까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위의 인터뷰가 있기 1년 전, 분명히 류현진이 팬들을 무시하고 줄행랑을 치는 모습이 얼마나 여론에게 욕을 먹었는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귀를 귀울였다면, 충분히 팬 서비스에 대한 반성을 했을 것이고, 이에 조금이라도 사인을 잘해줬을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사인을 잘 안해준다"고 밝히고 사인의 희소가치를 들먹이는 행위는 '''팬들을 무시하는 행동이 얼마나 후폭풍을 몰고올지에 대한 경각심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주고, 충분히 비난받아 마땅하다. 사인거부를 이유로 이승엽을 비난하는 댓글 등의 내용에는 십중팔구로 자기 희소가치나 챙기는 졸렬한 놈이라는 반응이 꼭 들어간다. 희소가치 떨어진다고 사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도 싸인 안해준 형편없는 의식을 지적하고 있기에 메이저리그도 싸인 안 해줘도 똑같다는 것은 유효한 반론이 될 수 없다.[60]
또한 강조했듯이 '''별명은 국민타자인데 팬 서비스와 태도가 형편없다'''는 이유도 있다.[61] 같은 공직자가 음주운전을 하더라도 대통령이 하는 것과 9급 공무원이 하는 것은 국민정서가 받아들이는 크기가 다르다. 이승엽은 많은 야구팬들에게 사랑과 응원을 받으면서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승엽의 행동에 배신감과 불쾌함을 느끼는 정도가 다른 선수에 비해 더 큰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비판의 스피커가 더 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승엽만 까인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이들에게도 사인 안 해주었던 이범호, 나지완이나 이승엽 이상으로 태도가 안 좋았던 김민식이나 '''류현진''' 역시 욕을 많이 먹었다는 것도 알아두어야 한다.
보통 이승엽의 이런 형편 없는 태도 뒤에 지나가던 양준혁이 나타나 자기 사인이라도 대신 받아가라는 했다고 하는 삼성 팬들의 증언이 퍼져 양신을 찬양하게 되었다는 경우도 많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양준혁은 기분파라 팬 서비스 퀄리티가 확실하게 좋다고 볼 수 없고 종종 욕도 먹는데, 이승엽에게 거부당한 팬들이 그냥 딱하게 보여서 잠깐 호의를 베푼 것 정도로 인성 부분에서 상당히 평가절상된 걸 보면 그만큼 이승엽의 팬 서비스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알 수 있다.[62]
NFL 최고의 쿼터백인 톰 브래디 이나 NBA 르브론 제임스 와 비교해서 기록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팬서비스는 천양지차이다
왕정치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과 비교해서는 할말이 없다
8.2. 해명과 사과
사인 및 욕설 논란에 대한 해명과 사과는 11분 50초부터 볼 수 있다.
2020년 KBO리그 개막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박재호 기자의 유튜브 채널 '개막특집 레전드 토크'편에 출연해서 사인 및 욕설 논란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했다. 일단 그 때 당시 본인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근래 각 구단 퓨처스팀, 상무, 경찰청 선수단에 강연을 했을 때도 후배 선수들에게 자신처럼 행동해선 안된다고 얘기했었다고.
인터뷰 당시에 대한 해명으로 본인은 아직도 인터뷰 당일이 생생히 기억난다며,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전제를 깔면서도 본인이 그렇게 인터뷰했었던 이유를 밝혔다. 당시 성적도 좋지않아 마음고생을 하던 와중에 야구장 외의 장소에서 본인이 공포를 느낄 정도로 스토커처럼 사인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이미 본인에게 사인을 받은 사람들이 중복해서 계속 사인을 받으러오는 경우도 많아서 이미 사인을 받으셨으니 못받은 분들을 우선으로 해 드리겠다고 했다가 항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본인 표현으론 선수들만큼 얼굴을 자주 보는 사람들이었다고. 인터뷰 당시 사인을 너무 많이 해 드린것같고 희소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당초 그런 사람들을 겨냥한 표현이었지만 전달이 잘 되지 않았고, 본인으로 인해 상처받으신 분들께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는 더 잘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다만 1996년[63] 에 사인을 요구하는 팬에게 욕설을 했다는 루머는 강하게 부인했다. 당시 본인도 21살이었기 때문에 초등학생 팬이 말을 걸어도 존대를 하는 시절이었다며, 정말로 자신에게 그런 욕설을 들었다면 본인에게 연락주면 다시 사과드리겠다고 했다. 게다가 당시 정황을 따져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 해당 댓글의 작성자는 98년 2월 또는 12월 즈음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주장하나 삼성 라이온즈는 1998년 2월에는 오키나와로, 12월에는 브리즈번으로 전지훈련을 갔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이승엽 대신 사인을 해줬다는 양준혁은 12월에 임창용과 트레이드되어 해태로 떠났었고, 20대 초반의 데뷔 3년차 선수가 고3에게 막말을 한다는 것은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98년 12월이 아니라 97년 12월 아니냐고 말장난을 하는 주장도 있는데 직접 당시 일정이나 보고 확인하자.
애초에 삼성 구단은 매년 2월 12월마다 호주, 오키나와 전지훈련을 떠나는데 96년이든 97년이든 98년이든 이승엽이 한국에 있을 수가 없는 시기였다. 물론 근거도 전혀 없고 헐뜯기를 위한 루머일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으니 좀 더 그럴듯한 시기(예컨대 시즌중이라든가)로 재포장될 공산이 있지만 원 댓글에서는 분명 1998년 12월 혹은 2월에 한국에 없었던 이승엽에게 욕을 들었다고 되어있었다.
마지막엔 그간의 사인 논란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본인의 업보라고 생각하며, 현역 때 더 팬들에게 친근하게 대해줬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고 있다는 멘트로 해당 건에 대한 토크를 마무리했다.
[1] 일본에서 이승엽의 스탯은 장타율이 더 높다는 것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김상현의 스탯과 매우 유사하다.[2] 역시 FA로 거인으로 온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겪었던 테크트리이다.[3] 정확히 말하면 2006~2007년 무렵 힘을 키우기 위해 체중을 크게 불렸다.[4] 그의 체격은 실제로 일반적인 거포들에 비해 상당히 호리호리한 편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홈런타자지만 힘으로만 승부하는 타입이 아닌지라(물론 힘 자체는 좋은 편이긴 하다) 육중한 체격이 아니고 덕분에 발도 늦진 않은 편.[5] 통산 도루 성공률은 정확히 70%.[6] 이종범보다도 좋은 수치. 이종범은 우타자라 불리한 면이 있긴 하지만.[7] 1995시즌만 놓고보면 이동수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인데, 95년 이동수는 22홈런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승엽은 13홈런.[8] 이 선수는 롯데 원클럽맨인데다가 고향부터 치바, 초중고가 전부 치바라서 그야말로 롯데 프랜차이즈 끝판왕이었다. 2020년 현재는 2군 타격코치 겸 수석코치를 맡고 있고, 다음 감독으로 대놓고 내정된 상태.[9] 그 이승엽보다도 수비가 좋았다. 팀메이트들이 말하길 '''후쿠우라가 없었으면 송구실책이 2배가 됐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온갖 괴상한 폭투성 송구를 다 캐치했으니. 또한 이 사람은 은퇴경기 때 44살이었는데도 다이빙 캐치로 마지막 수비를 할 정도로 수비 능력이 살아 있었다.[10] 이 연속 3할은 6년동안 이어졌고, 후쿠우라는 이승엽과는 다르게 교타자였지만 그래도 전성기에는 15홈런 안팎은 쳐줬던 중장거리 타자였다. 통산 홈런도 100개는 넘겨줬고. 무엇보다도 이 선수는 2000안타를 찍었다. [11] 이 상황에서 1루 백업으로 선택된 선수가 강봉규. 딱 기대치만큼의 1루 수비를 보여주긴 했다.[12] 기존 1루수 구자욱이 외야수로 전업할 예정.[13] 3,000타석 이상 기준으로 이승엽보다 OPS가 높은 타자는 아직 노쇠화가 오지 않은 박병호밖에 없다.[14] 다만 최정은 임팩트보다는 누적에서 조금 더 강하고, 이승엽의 경우 임팩트가 엄청났지만 일본 이적 이후 생각보다 활약을 못한 탓에 600홈런이라는 마일스톤을 쌓았지만 임팩트와 롱런에 비해 누적이 크지는 않다. [15] 당시 한국야구를 평가하는 미국야구의 시각이 이 정도였기 때문에 국내 프로야구 선수가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사실상 일본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다음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류현진 이전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16] 메이저리그에 하위권팀에 갈 바에는 강팀에 남고 싶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승엽이 있던 팀들은 모두 가을야구에 갈 수 있는 강팀이였다. 오릭스가 유일한 약팀인데 이때는 국내복귀를 하고 싶었는데 선동열 덕분에 1년을 더 일본에 있어야 해서 그랬다.[17] KBO에서는 밥 먹듯이 타이틀을 땄지만 일본 진출 이후에는 한 번도 타이틀 홀더가 되어보지 못했다.[18] 물론 가족을 위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을 것이다.[19] 1위 82백인천 227.0 / 2위 15테임즈 222.4 / 3위 83장효조 215.4 / 4위 93양준혁 212.0 / 5위 03심정수 210.7[20] 클래식 스탯의 차이에 비해 세이버 매트릭스 관점에서는 차이가 적은 편이다.[21]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승빠들이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압살이 맞다. 이승엽은 일본에서 한번도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 반면 우즈는 홈런왕을 따냈고 일본에서 퇴단하는 날까지 OPS가 9할 밑으로 내려간적이 없을 정도로 좋은 성적을 선보였다. '''심지어 우즈가 7살이나 더 많은데도!'''[22] 잠실:95-125-95(2.5) / 군산:98-122-98(2.3?) / 수원:95-120-95(2.5) / 사직:95-118-95(4.8) / 대구:95-117-95(3.0) / 마산:97-116-97(2.0) / 대전:99-115-99(2.5) / 광주:98-114-98(2.1?) / 청주:99-110-99(2.5?) / 전주:98-110-98(5.8) / 도원:91-110-91(4.8) → 평균:96-116-96(3.2) 이었다.[23] 잠실:100-125-100(2.6?) / 문학:95-120-95(2.8) / 수원:95-120-95(2.5) / 사직:95-118-95(4.8) / 대구:95-117-95(3.0) / 대전:97-114-97(2.5) / 광주:97-113-97(2.1?) → 평균:96-118-96(2.9)[24] 단 홈 구장 차이로 홈런이 수치상 떨어질경우 01년도 mvp도 보증할수없으며 02,03년도에는 심정수가 홈런왕이 될수있기때문에 MVP수상쪽에서는 손해를볼수있다.98년 우즈에게 MVP를 뺏겼을때 홈런갯수차이를 본다면 MVP수상에 홈런왕프리미엄을 무시할수는없다.[25] ‘목동 홈런왕’이라는 누명을 쓴 박병호가 2014년 기록한 홈경기 홈런 비율은 67.3%다. 어떤 이는 이것이 이승엽의 홈경기 홈런수치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의 홈런이 구장빨이라고 주장한다. 참고로 박병호와 동일한 년도 동일한 팀에서 동일한 구장을 사용한 강정호가 홈경기에서 기록한 홈런의 비율은 52.5%로 평균에 수렴한다. 상식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26] ●SK ▫브라운14/28(50%) ▫박정권17/21(80.9%) ▫이재원6/17(35.3%) ▫최정5/17(29.4%) ●삼성 ▫나바로19/48(43.2%) ▫최형우19/33(57.5%) ▫이승엽9/26(34.6%) ▫박석민17/26(65.3%) ●두산 ▫김현수 11/28(39.3%) ▫양의지 6/20(30%) ▫오재일4/14(28.5%) ●롯데 ▫강민호22/35(62.8%) ▫최준석 11/31(35.4%) ▫아두치16/28(57.1%) ▫황재균19/26(73%) ●KIA ▫이범호12/28(42.8%) ▫필15/22(68.2%) ▫김주찬7/18(38.9%) ●LG ▫박용택4/18(22.2%) ▫오지환 2/11(18.2%) ▫히메네스2/11(18.2%) ▫이병규2/11(18.2%) ●넥센 ▫박병호28/53(52.8%) ▫스나이더16/26(61.5%) ▫유한준19/23(82.6%) ●한화 ▫김태균7/21(33.3%) ▫최진행7/18(38.8%) ▫김경언10/16(62.5%) ▫김회성8/16(50%) ●NC ▫테임즈24/47(51%) ▫나성범16/28(57.1%) ▫이호준 12/24(50%) ●kt ▫ 김상현12/27(44.4%) ▫박경수14/22(63.6%) ▫마르테10/20(50%)[27] ●1999년 ▫이승엽32/54(59.2%) ▫스미스21/40(52.5%) ▫김기태 20/28(71.4%) ●2003년 ▫이승엽35/56(62.5%) ▫마해영26/38(68.4%) ▫양준혁17/33(51.5%)[28] 경기당 득점 비율(100이상은 타고, 100이하는 투고) → 97년:97 / 98년:97 / 99년:119 / 00년:111 / 01년:114 / 02년:102 / 03년:102 (출처:statiz)[29] 이승엽 타석당 홈런수는 97년 18.03타석, 98년 14.94타석, 99년 11.37타석, 00년 15.11타석, 01년 14.71타석, 02년 13.12타석, 03년 10.64타석 and 이승엽 타수당 홈런수는 97년 16.15타수, 98년 12.55타수, 99년 9.00타수, 00년 12.61타수, 01년 11.87타수, 02년 10.87타수, 03년 8.55타수[30] 경기당 득점 비율(100이상은 타고, 100이하는 투고) → 04년:103 / 05년:101 / 06년:87 / 07년:94 / 08년:99 / 09년:114 / 10년:110 / 11년:100 (출처:statiz)[31] 돔 내부의 온도차나 환기시설에 의한 상승기류는 도쿄돔뿐 아닌 어떤 돔구장에서든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도쿄돔에서는 관중석 상단에 천장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송풍기를 설치한 것이 문제가 된다. 즉 플라이볼이 될 타구가 일정 고도에 다다르면, 송풍기에서 주입되는 공기의 영향으로 비거리가 늘어나 홈런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승엽과 같은 파워히터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승엽이 2005년 지바롯데에서 기록한 30개 홈런의 평균비거리는 120m이고, 2006년 요미우리에서 기록한 41개 홈런의 평균비거리는 121.2m로서 불과 1m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하물며 06시즌은 벌크업으로 인한 파워상승으로 홈런의 비거리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도쿄돔은 이승엽의 홈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32] ● 落合 博満 (Ochiai Hiromitsu): 17 → 15 (1993~1994) (나고야구장 → 도쿄돔) ● 広澤 克実 (Hirosawa Katsumi): 26 → 20 (1994~1995) (메이지진구구장 → 도쿄돔) ● ジャック・ハウエル (Jack Howell): 20 → 14 (1994~1995) (메이지진구구장 → 도쿄돔) ● 清原 和博 (Kiyohara Kazuhiro): 31 → 32 (1996~1997) (세이부프린스구장 → 도쿄돔) ● ドミンゴ・マルティネス (Domingo Martinez): 30 → 16 (1998~1999) (세이부프린스구장 → 도쿄돔) ● 江藤 智 (Eto Akira): 27 → 32 (1999~2000) (히로시마시민구장 → 도쿄돔) ● 小久保 裕紀 (Kokubo Hroki): 32 → 41 (2002~2003) (후쿠오카돔 → 도쿄돔) ● ロベルト・ペタジーニ (Roberto Petagine): 41 → 34 (2002~2003) (메이지진구구장 → 도쿄돔) ● タフィ・ローズ (Tuffy Rhodes): 51 → 45 (2003~2004) (오사카돔 → 도쿄돔) ● 李承燁 (Lee Seung-yeop): 30 → 41 (2005~2006) (지바마린스타디움 → 도쿄돔) ● 小笠原 道大 (Ogasawara Michihiro): 32 → 31 (2006~2007) (삿포로돔 → 도쿄돔) ● アレックス・ラミレス (Alex Ramírez): 29 → 45 (2007~2008) (메이지진구구장 → 도쿄돔) ● 村田 修一 (Murata Shuichi): 20 → 12 (2011~2012) (요코하마스타디움 → 도쿄돔) ● ホセ・ロペス (José López): 22 → 25 (2014~2015) (도쿄돔 → 요코하마스타디움) 나고야구장·메이지진구구장·히로시마시민구장·요코하마스타디움은 도쿄돔보다 작은 구장, 세이부프린스구장은 비슷한 크기, 후쿠오카돔·오사카돔·지바마린스타디움·삿포로돔은 도쿄돔보다 큰 구장이라고 할 수 있다.[33] 요미우리 시절 이승엽의 평균 홈런 수[34] ● 지바롯데 마린즈: 22/44 (50%) ● 요미우리 자이언츠: 59(2)/100 (59%) ● 오릭스 버팔로스: 9(3)/15 (60%) 요미우리 시절 홈경기 홈런 중 2개는 각각 삿포로돔과 오사카돔에서 기록한 것, 오릭스 시절의 홈경기 홈런 중 3개는 홋토못토필드고베에서 기록한 것[35] 41개 중 35개는 미디어의 보도내용을 활용하였고, 기사를 찾지 못한 6개 홈런은 유튜브에 업로드되어 있는 영상자료를 참고하여 추정하였다. 추정한 홈런은 1호(우중간115m)·26호(좌중간115m)·27호(우중간115m)·29호(중월120m)·31호(중월125m)·41호(좌중간115m)임을 밝혀둔다.[36] 고시엔구장:118m / 나고야돔:116m / 메이지진구구장:112.3m / 요코하마스타디움:111.4m / 도쿄돔:110m / 히로시마시민구장:109.7m → 평균:112.9m[37] 38초부터 홈플레이트에 달려가는게 이승엽.[38] 참고로 전년인 03시즌에는 82이닝동안 사구가 3개뿐으로 서승화가 문제아란 인식의 시작은 벤클이 일어난 04시즌부터라고 이승엽 안티팬들은 주장하는데 애초에 사구 개수가 문제아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것도 말이 안되고 사기에 후배 폭행 등 서승화의 이후 행적이 전부 이승엽과의 난투극 탓이라는 억지를 부릴 게 아니면 사실상 의미없는 주장이다..[39] 물론 프로와 사전접촉 등 입단 전부터 입방아에 오르긴 했다.[40] 이승엽은 경북출신으로 경상중-경북고를 나왔으며 서승화는 충청권 태생으로 한밭중-대전고를 나왔다.[41] 경기중 빈볼투구는 기본이고 상대선수의 발을 걸어 부상시키는 등 더티 플레이를 상습적으로 일삼았는데다가 말년에 2군에서 후배의 머리를 야구방망이로 밀어 상처를 내며 여러 가지 구설수를 일으켰다.[42] 지속적으로 서승화는 본 난투극 이후 문제아란 이미지가 굳어진 케이스라고 논점을 흐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문제아 이미지가 굳어졌기 때문에 후배를 폭행하거나 더티플레이를 하고 사기까지 친 것인가? 이미지가 나빠지면 실제로 막나가게 된다는 식의 주장은 삼류 자기계발서에서도 하지 않는다.[43] 후배인 서승화가 위협구를 던졌는데도 사과하지 않았고, 계속 위협적인 공을 던졌다. 사건 이후 그해 9월 말 다시 LG와의 경기를 가졌는데 당시 홈런 신기록을 코앞에 두고 있던 이승엽을 다시 상대하게 되자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항의를 하고 시속 110km짜리 아리랑볼을 마치 장난치듯이 던졌고, 이승엽은 그런 공은 치지 않겠다고 하여 볼넷으로 걸어나간 바 있다.[44] 실제로 과거 오 사다하루나 박용택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45] 미국은 싸인의 위치가 그 싸인볼의 가치를 평가한다. 최상품은 '스윗 스팟'이라고 부르는, 메이저리그 공인구에서 커미셔너 싸인이 적힌 자리에 적힌 싸인.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이 자리에다 싸인 해주는 건 팔아도 된다는 뜻이고, 실제로 구장 판매용 싸인볼이나 이벤트 볼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 싸인을 해놓는다. 참고로 이 스윗 스팟은 한국식 기준과는 정반대인데 한국은 스윗 스팟쪽은 비워놓고 그 좌우에 싸인과 싸인한 날짜를 적어 주는게 베스트다.[46] 대부분 베스트 댓글들이 죄다 이승엽의 형편없는 팬 서비스에 관한 것들이다.[47] 다만 저리가라 이새끼야 운운은 시기상 성립할 수가 없는 조작댓글이다. 자세한 것은 하단의 해명 단락에서.[48] 왜 어린이 팬들만 받게 했냐면, 성인 팬들을 부를 경우 그 싸인을 또 '''팔아먹을까 봐''' 일부러 이벤트 자체를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49] 사인회같은 여러 이벤트에서 사인을 거절한다는 게 이상한 거다.[50] 알다시피 이승엽은 엄청난 훈련광이다.[51] 최희암 감독은 농구 감독이지만 이 말은 인기가 있는 모든 프로 스포츠 선수들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아직 팬 서비스 개념도 자리잡기 한참전인 1990년대'''이고 이 당시 농구는 '''프로도 아니었다.'''[52] 데얀은 실력뿐만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싸인이나 셀카 요청을 받아주는 등 K리그 선수들 중에서도 팬서비스를 잘 해주는 선수로 유명하다. 본인이 짐을 든 상태로 차를 타고 어딘가로 급히 움직여야 할 상황에서 셀카요청을 받았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그 짐을 다 내려놓고 셀카요청을 아무렇지도 않게 혼쾌히 받아주는 등의 일화가 있다.[53] 일례로 서울에서 대부분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실업팀 등 선수 생활도 서울에서 대부분 한 스케이트 선수 안현수도 의외로 롯데 팬이다. 러시아로 가고 나서도 가끔 한국에 오면 사직구장에서 목격되는 것도 그 때문. 이유인즉슨 어릴 때 마해영이 야구장에서 사인을 해준 것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 안현수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고 롯데는 평생 팬을 얻은 것.[54] 양준혁은 일화들을 종합하면 기분파 성향이 좀 있어서 사람마다 팬 서비스 평가가 살짝 바뀌는 편이다. 잘해줄 땐 잘 해주지만 안해줄 땐 냉랭했다고. 팬들 대하는데 편차가 있다는거 자체가 팬 프렌들리 마인드를 장착하고 있는 선수는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다만 시작부터 안해주려는 이승엽이 너무 돋보여서 나름 팬 서비스를 잘해줬던 모습이었던 양준혁이 상대적으로 부각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양준혁의 경우 팬들에게 나온 말을 보면 본인의 츤데레 성향이 있어서 팬 서비스가 저평가 되었다는 말도 있듯이 분명 팬 서비스가 나빴다고 보기엔 어려운 선수였다.[55] 참고로 삼성의 주축 타자들이었던 이 셋의 팬 서비스도 삼성 시절에 그다지 좋지 못한 편이었다. 최형우는 KIA 이적 후에도 싸인이 받기 힘들다는 증언이 많이 나오는 등 여전히 팬 서비스가 나쁘다. 채태인은 팬서비스 좋기로 유명한 넥센으로 이적한 덕인지 많이 개선되었다. 박석민은 경기 전에는 절대 안 해주지만 경기 후에는 잘 해 준다고 한다.[56] 예외적으로 유격수 김상수는 팬들에게 매우 친절하다. 굳이 가서 사인을 해주는 행동 때문에 '''연쇄 사인마'''라는 별명이 붙었다.[57] 구자욱은 '''삼린이 싸인도 거절하는 등 이승엽도 넘어선 개같은 팬 서비스'''로 여전히 논란거리에 오르내리며, 박해민은 '''인사도 무시하고 선물을 먹튀'''했다는 전적이 있어서, 박해민 데이 행사때 팬들에게 욕을 무지막지하게 먹고 이후 팬들한테 태도를 고치겠다고 사과한 적이 있다. 배영섭 역시 싸인 요청을 해도 그냥 무표정을 하며 지나가 버리는 것으로 유명하고, 강한울은 기아 소속이었을 때부터 팬 서비스가 안 좋기로 유명하다. 싸인 부탁을 '''가래 뱉으면서 거절'''했다는 소문이 도는 백상원은 말할 필요가 없다. [58] 그래도 구자욱은 인스타그램에 반성하는 글을 올린 뒤 팬 서비스가 확실히 좋아졌다는 평을 받고 있고, 박해민 또한 현 아내에게(당시 여자친구) 한 소리 들은 뒤 팬 서비스가 개선되었다. 그리고 배영섭과 백상원은 나란히 방출 크리. 강한울만 아직도 악평 일색이다.[59] 2018년 4월 본인 자서전에 대한 기사 베댓들을 보면 이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0] 다만, 메이저리그는 무조건 팬을 최우선시하고 팬서비스가 안 좋은 선수는 연봉 계약에 불이익이 있다는 등 과도할 정도로 메이저리그 미화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며, 힐만의 인터뷰도 그에 대한 반박 중 하나였다. 이승엽을 비판하기 위해 메이저리그 팬서비스를 과하게 부풀렸다는 것. 메이저리그 및 해외 팬서비스에 관해서는 팬 서비스/해외를 참조. 물론 이승엽의 경우는 상기한 바와 같이 단순히 팬서비스가 안 좋다는 것을 넘어 사인의 희소가치를 운운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본인의 부실한 팬서비스를 합리화했기 때문이다.[61] 앞서 말했듯이 알버트 푸홀스가 욕먹은 이유와 마찬가지로 태도가 좋지 않아서라고 말해두었다.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62] 비슷한 사례로 KIA 타이거즈의 김민식이 있는데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도 사인을 잘 안해준 나머지 그 팬 서비스 안 좋다는 이범호가 나서서 자기가 사인 대신 해주겠다고 한 카더라가 돌기도 했다. 물론 김민식은 이승엽과 달리 이적생인데다 성적도 좋은 편이 아니라 더더욱 까인다는 차이점이 있다.[63] 원댓글은 98년이나 인터뷰어인 야구부장이 잘못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