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자경전
1. 소개
昌慶宮 慈慶殿
창경궁의 대비전이다. ‘자경(慈慶)’ 뜻은 ‘자친(慈親), 즉 (왕의) 어머니가 복(慶)을 누린다’이다.# 훗날 고종 시기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처소로 지은 경복궁 자경전도 여기서 이름을 땄다.
2. 역사
1777년(정조 1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다. 위치는 양화당 북쪽의 언덕이었다. 왜 높은 곳에 지었는 지는 모르나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는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려던 것이고, 둘째, 창덕궁과 가까우면서도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에 지었다는 것이다. 창덕궁과 창경궁 지대의 높이 차이가 꽤 나서[1] 창덕궁에 살던 정조가 원래 혜경궁이 머물던 창경궁 경춘전으로 일일이 문안가려면 꽤 높은 계단을 이용하거나 한참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첫 이름은 자경당(慈慶堂)이었다. 공식적으로 혜경궁 홍씨는 임금의 숙모이자[2] , 왕이 되지 못한 전(前) 세자의 빈일 뿐이라 ‘전(殿)’[3] 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는 혜경궁을 자신의 생모로서 극진히 대접했기에 사람들도 처소의 이름을 자경전으로 불렀고 1778년(정조 2년)부터는 공식적으로도 자경전으로 언급했다.##
창경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위치도 그렇고, 규모도 그렇고, 무엇보다 사는 사람이 사람이니만큼 건물의 위상은 굉장히 높았다. 혜경궁의 손자 순조가 훗날 지은 《자경전기》에 따르면 창경궁에서 위상이 법전, 즉 궁궐에서 제일 중요한 전각과 같다고 했다.
1780년(정조 4년)에는 화빈 윤씨의 가례를 여기서 올렸다. # 혜경궁은 이곳에서 계속 살다가 순조가 즉위한 후인 1802년(순조 2년)에 경춘전으로 옮기고 14년을 더 살다가 1816년(순조 16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혜경궁이 나온 뒤엔 왕대비 김씨(효의왕후)가 살았고 1821년(순조 21년) 여기서 승하했다. 1827년부터 1830년까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하던 시기에는 이 곳에서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순조 부부의 생일을 축하하며, 즉위를 기념하는 잔치를 열었다.### 이 때 연회공간으로 사용하면서 건물을 증축했다.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때 헐어서 자미당[4] 으로 지었다. 이후 다시 짓지 않았다.
1909년(융희 3년)에 자경전 터 옆에 제실박물관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가 박물관으로 바꾸었으며 박물관을 덕수궁으로 옮긴 1937년부터 장서각[5] 으로 활용했다. 해방 이후 1981년에 장서각의 보관 문서 전부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옮긴 후 빈 건물로 방치했다가 1992년 11월에 철거했다. 현재는 빈 터이며 자경전 터라는 표지판만 있다.
3. 구조
- 창건 당시부터 1827년까지 자경전의 모습을 보면, 정면 5칸으로 동, 서, 남쪽에 행각을 두고 자경전 본채와 연결시켜 ‘ㅁ’자 형태를 띄게 했다. 소맷돌이 없는 3개의 계단을 중앙에 놓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1827년에서 1829년 사이에 증축한 모습은 《동궐도》에서 볼 수 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나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더 넓어졌다. 중앙의 3칸을 대청으로 두고 앞, 뒤로 툇간을 두었으며 대청 양 옆의 방을 온돌로 두었다. 그리고 서남쪽으로 2칸의 방을 덧대었으며 동쪽 칸의 외부는 가퇴를 두고 나무 기둥으로 받쳤는데 가퇴의 외면에는 창이나 벽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 전면에 월대를 두어 위엄을 돋보임과 동시에 여러 행사를 하기 편하게 했다. 계단도 전과 같은데 새 건물의 경우, 정면의 서남쪽에도 계단이 보인다. 각도 상 보이지 않으나 정황 상 동남쪽에도 계단이 있었던 듯 하다. 이 외에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