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필립스
1. 개요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남우조연상, 각색상, 편집상, 음향상, 음향편집상 후보작'''
2009년 4월 발생했던 화물선 머스크 앨라배마호 피랍 사건 때 선원들을 대신해 홀로 인질로 잡힌 리차드 필립스 선장에 관한 실화를 폴 그린그래스 감독 연출로 제작한 영화이다.
2. 예고편
3. 시놉시스
- 출처: 네이버 영화
4. 등장인물
5. 내용/실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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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1일 케냐 몸바사 항에서 출항 중인 머스크 앨라배마(Maersk Alabama)
1만 7천톤의 화물[3] 을 실은 머스크 앨러배마 호는 케냐의 몸바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2009년 4월 8일 네 명의 해적이 배에 다가왔다. 미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에 따르면 4명 모두 17세에서 19세 사이였다. 배의 선원들은 노조훈련소에서 대(對)해적 교육을 받았고 그 전날에도 훈련을 받은 바 있다. 4월 8일 아침에 해적 경보가 선내에서 발령됐는데 기관장인 마이크 페리는 14명의 선원을 안전장소로 대피시켰다. 남은 선원들은 해적들이 다가오자 조명탄을 쏘며 저항했고 기관장과 1등 기관사(1st A/E) 매트 피셔는 배의 각도를 흔들며 해적이 탄 소형선박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해적은 머스크 앨라배마 호에 탑승했다. 기관장 페리는 주전원을 껐다. 해적은 선장인 리처드 필립스와 몇 명의 선원을 선교에서 납치했지만 선박을 조종하지는 못했다.[4] 페리와 소말리아인 승무원[5] 이 안전장소 밖에서 칼을 들고 기다렸다가 해적이 다른 선원을 찾으러 오자 어둠 속에서 그들의 우두머리 무세를 덮쳐 포로로 잡았다. 다른 선원들도 합류해 무세를 붙잡았다.
선원들은 필립스 선장과 그들이 붙잡은 수괴를 교환하려고 했지만 선원들이 수괴를 풀어준 데 비해 해적들은 필립스 선장을 풀어주는 걸 거부했다. 필립스는 해적들을 구명정으로 안내했고 작동법을 알려줬지만 해적들은 필립스를 데리고 배를 탈출했다. 다음 날인 2009년 4월 8일 미 해군 소속의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인 USS 베인브리지 함이 아덴 만에서 인질 구출을 위해 출발했고 9일에 머스크 앨러배마 호와 접촉했다. 머스크 앨러배마 호는 무장한 대원들의 에스코트를 받고 새로운 선장인 1등 항해사 래리 D. 에어셰임의 지휘를 받아 몸바사로 출발했다. 필립스는 9일 전에 직무대행자로 에어셰임을 지정해뒀다. CNN과 폭스뉴스는 사건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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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L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구명정의 모습
구명정에는 식량과 물이 있었지만 머물 곳이 부족했고 화장실이나 통풍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USS 베인브리지는 스캔이글로 구명정을 확인했고 다른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 USS 핼리버튼은 헬리콥터를 함상에 탑재했다. 두 군함은 해적들의 총기가 닿지 않는 수백 야드 뒤에서 따라갔다. 정찰기가 항공궤적을 파악했다. 두 배 사이에 무선통신이 이뤄졌다. 그 외에 해적에게 납치당한 4척의 외국 배가 구명정을 따라왔는데 중국, 독일, 러시아, 필리핀, 투발루, 인도네시아, 타이완 등의 국적자 54명이 납치당했다.
2009년 4월 10일에 필립스는 배를 탈출하려고 했지만 해적들이 사격을 하자 다시 잡혔다. 해적들은 미군이 필립스 선장에게 지시를 할까봐 겁이나 바다에 휴대폰을 버렸고 미 해군은 해적들에게 쌍방 교신이 가능한 무전기를 줬다.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USS 박서도 접근했다. 해적들의 전략은 그들의 동료와 합류하는 것이었는데 동료들은 다른 국적의 선박을 납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해적들은 필립스를 숨기기 위해 소말리아로 가려고 했다. 협상은 FBI 협상가에 의해 USS 베인브리지의 함장과 해적 사이에서 진행됐다. 납치범들은 위성전화로 다른 해적선과 연락하기도 했다. 한편 협상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4월 10일, 미 해군의 최정예 대테러부대 DEVGRU 대원들이 미 본토에서 현지로 급파되었다. 상황이 매우 급박했기에 DEVGRU 대원들은 수송기에서 해상으로 HALO 강하를 한 후 USS 박서 함에 승선하여 작전을 대기하였다.[6]
그러나 협상은 해적들이 토요일 일출 후에 USS 핼리버튼에 사격을 하면서 중단됐다. 미군은 반격을 하지 않았고 사태가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고 우연히 해적 중 하나가 구명정의 해치 쪽에 사격을 했다.
해적 중 하나는 위성전화로 로이터 통신에게 자신들은 안전하며 미국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공격 받을 때 방어할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필립스의 가족은 상황의 해결을 기다리며 버몬트에 모였다.
2009년 4월 11일 토요일 머스크 앨러배마 호는 몸바사에 도착했다. FBI[7] 는 배를 억류하고 조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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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의 USS 베인브리지 함장 캐스텔러노 대령(왼쪽)과 리처드 필립스(오른쪽)의 실제 사진
USS 베인브리지의 함장이었던 프랭크 캐스텔러노(Francis Xavier Castellano) 대령[8] 은 바람이 거세서 해적들이 흥분했고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고 밝혔다. 4월 12일 일요일에 DEVGRU 대원들이 Mk.11 Mod.0 반자동 저격소총으로 해적 셋을 사살하면서 필립스를 무사히 구출하였다. 캐스텔러노 대령은 상급자의 허가를 받은 상태에서 필립스의 생명이 위험했기에 발포했다고 밝혔다. 해적들이 AK-47로 필립스의 등을 겨눴기 때문이었다.[9] DEVGRU 저격수는 USS 베인브리지의 고물(함미)에서 저격했고 모두 머리를 맞췄다. 당시 USS 베인브리지는 구명정과 25에서 30야드 떨어진 수준이었다. 죽은 해적의 이름은 알리 아덴 엘미, 성이 하막으로 알려진 자,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자였다. 압두왈리 무세는 작전 직전에 필립스의 석방을 두고 USS 베인브리지에 협상을 하려고 승선했다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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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USS 박서(LHD-4) 함의 승조원들에게 구출받는 필립스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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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베인브리지(DDG-96)에 인양되는 구명정
죽은 세 해적의 시체는 2009년 4월 마지막 주에 소말리아의 밝혀지지 않은 수습자에게 미 해군이 인도했다.
생존한 해적 압두왈리 무세는 USS 박서에 구금됐고 미국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뉴욕의 법원에서 검사는 해적과 완력으로 배를 억류하려 한 음모, 인질 납치 등의 죄를 주장했다. 무세의 변호사는 무세가 청소년(15-16세라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무세는 범행 당시 18세였다고 인정했다.)이란 점을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무세가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으로 보았다. 무세는 해적죄와 기타 여죄로 2011년 2월 17일, 33년 9개월을 선고받았다.
2010년에 리처드 필립스는 이 일을 책으로 썼다. 선장의 의무(A Captain's Duty)란 책으로 이 책은 영화의 원작이 되었다. 또한 이 작전에 참가했던 DEVGRU 대원 맷 비소넷은 후일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넵튠 스피어 작전에 참가한 후 마크 오언이란 필명으로 빈 라덴 사살 작전을 다룬 회고록 노 이지 데이(No easy day)를 집필하면서 한 챕터를 필립스 선장 구출 작전에 할애하였다.
6. 평가
Smart, powerfully acted, and incredibly intense, Captain Phillips offers filmgoers a Hollywood biopic done right -- and offers Tom Hanks a showcase for yet another brilliant performance.
'''말끔하면서도 출연진들의 연기가 좋고, 그리고 놀라울정도로 긴장감 있는 영화 <캡틴 필립스>는 영화 팬들에게 할리우드가 제공할 수 있는 훌륭한 전기영화이며, 톰 행크스의 눈부신 연기력을 또 한번 보여줄 쇼케이스이기도 하다.'''
- 로튼 토마토 총평
'''폴 그린그래스는 하나의 장르다.'''
폴 그린그래스는 [플라이트 93]에 이어 관객을 제한된 공간에 주인공과 몰아넣고 정신적 육체적 한계까지 밀어 붙인다. 이제 그린그래스라는 이름은 서스펜스와 동의어가 된 것 같다.
- 김도훈 '''(★★★★)'''
'''폴 그린그래스의 탁월한 균형 감각'''
각다귀 같은 소말리아 해적을 무찌르는 영웅담일 뻔 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아니었다면, 그러고도 남았다. '어떻게'보다 '왜'를 먼저 묻는 감독의 고집스런 균형 감각 덕에 영화의 격이 달라졌다.
- 박혜은 '''(★★★★)'''
'''실화 사건 소재로 생동감 만들어내는 데는 폴 그린그래스가 최고.'''
- 이동진 '''(★★★★)'''
'''그린그래스에겐 재연이 아니라 생중계'''
- 박평식 '''(★★★☆)'''
IMDB 평점 8.1, 로튼토마토 신선도 93%, 메타크리틱 메타스코어 82점을 받는 등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다.'''‘본’ 시리즈 이전으로 뒷걸음질'''
- 이후경 '''(★★☆)'''
7. 흥행
북미 개봉 첫 주에 그래비티에 이어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했다. 그래비티와 타깃층이 겹쳐 묻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입소문이 좋았던 탓인지 꾸준함을 보이며 박스오피스닷컴의 예상 수익 7천2백만 달러를 뛰어넘어 1억 달러를 돌파했다. 해외수익 또한 영국에서의 흥행에 힘입어 1억 달러를 돌파, 월드와이드 2억 달러를 넘겼다.
7.1. 대한민국
한국에서는 11월 17일자 전국 3개 상영관에서 상영하고 있지만 사실 막내린 셈이다. 전국관객 집계는 19만명으로 흥행은 참혹했다.
더빙판도 나왔는데 톰 행크스 전문 성우 오세홍이 세상을 떠났기에 다른 성우가 맡게 되었는데 의외로 주로 조연을 많이 맡던 강구한이 맡았다.
8. 논쟁
뉴욕 포스트의 기사에 따르면 영화를 본 앨러배마호의 선원들이 실제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필립스 선장의 평판은 20년 전부터 거만하고 음침하고 이기적이라 나빴다고 한다. 선원 중 11명은 사건 후에 필립스가 그들의 안전을 의도적으로 위험에 빠지게 했다고 고용사에 5천만 달러 상당의 소송을 걸었다. 기사에 따르면 필립스는 7건의 해적 경고 메일을 받았지만 경고를 무시했고 선원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선원들은 필립스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경고를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제작사인 소니에서는 영화화에 앞서 일부 선원들에게 5,000달러를 주면서 이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쓰도록 했다고 한다. 나머지 선원들은 선박회사 등을 상대로 고소하여 재판을 진행 중. 결국 <캡틴 필립스>는 또 한 명의 영웅 만들기에 전념한 미국 선전물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이에 필립스 선장조차도 선원들의 문제 제기를 모두 인정했으며, 본인은 절대 스스로를 영웅시하려고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정작 영화에서는 필립스가 경비를 절감하려고 상황에 무심한 회사를 비판하는 듯한 부분이 나온다.[11] 이는 영화감독인 폴 그린그래스의 의중이 어느 정도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 초반 휴식시간에 맞춰서 선원을 닥달하는 장면이나, 아침 일찍 업무를 지시하는등 까탈스러운 상사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9. 기타
- 실제로 톰 행크스와 해적 역을 맡은 배우들은 촬영전까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이유는 해적을 처음으로 만났을때 필립스 선장이 느낀 그 낯설음과 두려움을 톰 행크스가 더 자세하게 연기하기를 바랐던 감독의 의도였다.
- 실제 리처드 필립스는 매사추세츠 주 윈체스터 출신으로 윈체스터 고등학교를 1973년에 졸업한 뒤 매사추세츠 대학교에 입학해 국제법을 공부하려고 하였으나 자퇴하고 매사추세츠 해양대학교에 들어가 1979년에 졸업했다. 그 후 간호사인 앤드리아 코기오(Andrea Coggio)와 1987년 결혼하여 대니얼과 마리아를 낳았다. 영화에서는 아들이 둘인 것으로 나온다. 2009년 4월 7일에 20인 규모의 선원과 상선 앨라배마 호를 타고 동아프리카 공해[12] 를 지나가던 중 해적의 공격을 받았다. 이는 19세기 이후 미국 국적에 등록된 선박에 해적질이 성공한 첫 사례이다. 해적들은 몸값으로 수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 해적들의 우두머리 무세 역을 맡은 바크하드 압디(Barkhad Abdi)는 소말리아계 미국인으로 배우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연기력을 선보이며 아카데미를 비롯 왠만한 어워드의 남우조연상 후보에 무더기로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필립스 선장과 처음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날 똑바로 봐. 이제부터는 내가 선장이다"(Look at me, I'm the captain now)라는 대사는 압디의 애드립이며 나중에는 어떤 커뮤니티의 주도권이 바뀔 때를 의미하는 밈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개런티는 65,000달러였다고 한다... 1985년생이며 영화감독 겸 제작자로 미국에서 뮤직비디오 연출 등을 맡은 바 있다. 1985년 모가디슈에서 태어나 예멘에서 자랐고 1999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미니애폴리스의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를 나왔다. 현재 자신의 영화를 감독 중이라고 한다. 그 밖에 다른 해적 배역들도 모두 소말리아 이민자들이 맡았는데 이들 모두 실감나게 해적을 연기했다.
원래 필립스 선장이 구조된 뒤 혼자 남겨지는 장면을 찍었으나 필립스를 구하자마자 의무실로 보냈다는 말을 들은 감독이 즉석에서 엑스트라를 했던 의무사를 불러 대강 상황 설명만 한 뒤 대사조차 주지않고 촬영했다.[13] 아이러니하게도 즉석에서 애드립으로만 촬영된 이 장면은 톰 행크스의 장년기 필모그라피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연기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의무사들이 실제 응급처치마냥 전혀 위화감 없이 명장면의 요소로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은 톰 행크스의 관록에서 비롯된 명연기 덕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 참고로 메달 오브 아너: 워파이터 싱글 미션중 해트 트릭(Hat trick) 미션은 캡틴 필립스의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미션이다.
- 목소리로만 나온, 사건 당시 전단장으로서 기함 USS 복서 함에서 지휘를 담당했던 미셸 하워드 (당시) 해군 준장 역을 당시 중장이던 하워드 제독 본인이 맡았다. 이후 역대 미군에서 세 번째이자 해군 최초의 4성제독(해군참모차장) 겸 전군 최초의 흑인임과 동시에 여성인 대장 계급의 장교가 된다. 하워드 제독의 진급은 미군에서 가장 인종 차별이 심한 군종이라고 욕 먹던 미 해군이 이미지 쇄신을 제대로 하는 데 기여했다. 2016년 기준으로 미 해군 유럽, 아프리카 사령관으로 다시 해적을 잡고 있다.
- 현재 머스크 앨러배마 호는 정비 후 운항을 재개했다. 현재 위치와 사진을 볼 수 있다.
- 중국에서는 미 해군의 활약상을 그린다는 이유로 상영 취소 처분을 받았다(...).
- 2017년 미국 언론 인터셉트가 DEVGRU의 전쟁범죄 행위들을 폭로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당시 해적들이 필립스 선장에게 아무런 적대행위가 없었고 지휘관의 사격 명령도 없었는데 DEVGRU 저격수들이 무단으로 해적들을 사살하고, 해적들이 갖고 있던 다른 인질들의 몸값을 슬쩍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