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역사
1. 개요
크로아티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크로아티아는 역사에서 오랫동안 독립국이었던 적이 별로 없다. 크로아티아 민족 자체는 남슬라브계에 속하며, 언어도 옆나라인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와 거의 같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불렸다.
2. 고대사
국토사의 측면에서는 이미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일리리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후 로마 속주로서 달마티아(Dalmatia)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현재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지중해에 면한 지역이다. 내륙지역은 판노니아(Pannonia)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 유명한 달마시안의 원산지.
4세기 게르만족의 거센 침공에 시달렸으며,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가 패배한 뒤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여러 혼란한 상황을 거쳐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으나 8세기 슬라브족이 남하하여 차지했고, 이후 슬라브족의 영토로 계속 남는다.[1]
크로아티아인의 정착과정은 콘스탄티누스 7세가 10세기 경에 저술한 《De Administrando Imperio》(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이전시대의 크로아티아인의 이주와 형성 과정에 관한 문헌기록은 빈약하기 때문에 추론과 가설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 6세기 경에 아바르족의 지배를 피해 달아난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동로마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사절을 보내 일리리쿰[2] 에 주거지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조상에 해당하는 슬라브족들은 아바르인들이 몰락하자 현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하였다.
3. 중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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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인의 발칸반도 정착이 동로마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 지역이 원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래 동로마의 지배 하에 놓여있었던만큼, 원래 크로아티아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정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아바르족이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판노니아 크로아티아 공국은 프랑크 왕국, 달마티아의 크로아티아 공국은 동로마의 지배에 들어갔다. 판노니아의 크로아티아인들은 샤를마뉴의 대대적인 기독교 정책으로 로마 교회(가톨릭)로 귀의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닌(Nin)에는 최초의 크로아티아 기독교 교구가 세워졌다. 이렇게 한동안 크로아티아는 동로마가 지배하는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공국과 프랑크 왕국이 지배하는 내륙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823년에는 동로마가 프랑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달마티아도 프랑크 왕국에 복속된다. 그 후 크로아티아는 즈데슬라브(Zdeslav, 재위 878-879)재위기에 잠시 동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콘스탄티노플 교회 관할에 잠시 속하기도 했지만, 즈데슬라브 사후 브라니미르(Branimir, 재위 879-892) 재위기에 다시 로마 교회 관할로 돌아왔다.
크로아티아 공국은 925년을 전후하여 닌의 크네즈(Knez: 대공) 토미슬라브(Tomislav, 재위 910-928)가 왕을 칭하면서 크로아티아 왕국이 되었다.[3] 참고로 토미슬라브는 크로아티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왕이고 대크로아티아주의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군주이기도 한데, 정작 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해서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저 928년이란 연도도 928년에 닌 교구 폐지 회의가 있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회의에 토미슬라브가 참석했을 거라고 추측해서 정한 것이다.
크로아티아 왕국은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Petar Krešimir IV, 재위 1058~1075) 재위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는 1054년 동서교회가 분열된 후인 1059년에 로마 교회에 사절을 보내 공식적으로 왕으로 인정받아 비오그라드(Biograd)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더불어 크로아티아 내에서 로마 교회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또한 그는 크로아티아 해안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건설·육성했는데, 이 덕분에 닌 외에도 쉬베니크(Šibenik), 스크라딘(Skradin) 등의 도시가 발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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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의 최대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대대적인 영토확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영토를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내륙지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등지까지 확장시켰으며,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지역의 섬들이 크로아티아의 영토로서 확고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하지만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는 1075년 동로마 제국과 협상을 맺은 노르만족의 침략을 받았고, 왕 자신은 노르만족에 의해 생포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그는 석방을 위해 크로아티아 해안의 여러 도시들을 포기했지만,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노르만족의 감옥에서 죽었다고 한다.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가 아들 없이 죽자 포사비나(Posavina)지역의 반(Ban)이었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Dmitar Zvonimir, 재위 1075~1089)가 로마 교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즈보니미르 재위기에는 키릴 형제가 전해준 글라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문화가 발전했고, 중세 봉건체제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하지만 즈보니미르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1089년에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다가 국력소모와 재정파탄을 이유로 원정을 반대하던 귀족들에게 시해당했다.
즈보니미르가 귀족들에게 시해당한 후 스트예판 2세(Stjepan II, 재위 1089~1091)가 옹립되었다. 하지만 그가 후손없이 죽자 계승 분쟁이 발생했는데, 이 광경을 보다못한 즈보니미르의 왕비 옐레나 리예파(Jelena Lijepa, ?~1091)가 즈보니미르의 처남이자 그녀의 오빠였던 헝가리 왕국 왕 라슬로 1세(László I, 재위 1077~1095)에게 크로아티아 왕위를 제안했고, 제안을 수락한 라슬로 1세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슬라보니아(Slavonia)[4] 의 반(Ban) 페타르 스나치치(Petar Snačić, 재위 1093~1097)를 왕으로 추대한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반발에 크로아티아의 왕위를 얻지 못했다. 그 후 1097년 라슬로 1세의 뒤를 이은 칼만 1세(Kálmán I, 재위 1095~1116)가 스나치치를 살해하고 슬라보니아 점령에 성공하지만, 달마티아 지역 귀족들의 저항에 못이겨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해주되 칼만 1세가 크로아티아 왕위를 겸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이로써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동군연합이 성립했다.
13세기 헝가리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완전히 무너지자 지역 영주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4세기에는 세르비아 제국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으나 헝가리가 다시 중흥을 맞이하고 세르비아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위협을 떨쳐냈다. 그러나 15세기 헝가리 국왕이자 보헤미안 국왕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당선되는 등 헝가리가 유럽 정세 한복판에 깊숙히 말려들기 시작하면서 베네치아가 달마티아를 탈취하는 등의 영토 상실이 있었다.
4. 근대사 - 합스부르크 제국 (1526–1918)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군의 피상적인 침공과 약탈을 겪었지만, 크로아티아가 오스만 제국과 본격적으로 엮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전반에 들어서이다. 1526년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 왕국을 침공했고 이에 모하치 전투가 벌어졌다.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3개국의 국왕을 겸하고 있었던 야기에우워 가문의 러요시 2세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헝가리군은 대패하여 사실상 멸망했다. 이때 러요시 1세의 자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가 러요시 2세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당시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크로아티아 왕국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신속하게 페르디난트 1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동시에 보헤미아, 서부 헝가리도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에 귀속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이 성립되었다[5]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방대한 영토를 통치했던 합스부르크가는 현지의 문화와 자치권을 상당 부분 인정하는 관용정책을 펼쳤는데, 이에 크로아티아도 상당 수준의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에 귀속된 이후 크로아티아의 영토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의 거듭된 공세를 받는 변경 지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으며 해적들이 들끓는 탓에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등 난장판이 되었다.
1797년 나폴레옹의 원정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캄포포르미오 조약의 결과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대부분이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는데 베네치아가 다스리던 달마티아 역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이로서 지금의 크로아티아 전체가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는데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참패하면서 쇤부른 조약으로 프랑스에 할양되었다가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다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독일화, 헝가리의 헝가리인들은 헝가리인대로 마자르화를 크로아티아인들에게 강요했는데 이에 반발하여 크로아티아인들은 일리리아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명목상 크로아티아의 종주국으로 크로아티아인들의 권리를 억압하려는 헝가리와는 사이가 최악이었는데 1848년 혁명 당시 헝가리인들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크로아티아인들은 합스부르크에 충성을 맹세한 후 헝가리 봉기 진압에 앞장섰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하여 충격과 후유증에 휩싸여 있는 동안, 헝가리 민족 운동의 고조되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중 제국)이 수립되어 헝가리 왕국이 사실상 독립 국가 수준의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때 크로아티아의 통치권이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로 넘어갔다. 헝가리는 크로아티아를 완전 편입하려고 시도했으나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 시절부터 보장받아온 자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오스트리아가 나서서 크로아티아의 자치를 지지하며 압력을 넣은 덕분에 크로아티아의 자치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양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크로아티아는 제국에겐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교두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국의 해군 및 해양 정책에서 크로아티아의 비중은 매우 컸으며, 오스트리아 해군 내에도 실제 인구 비중에 비해 크로아티아계의 수가 더 많았다.
5. 현대사 (1918–)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세르비아가 주도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원래 국명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일원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종족적으로는 같아도 문화, 풍습, 사회체계, 경제적 발전, 종교까지 다른 세르비아인의 주도적 지배를 거부한 크로아티아계는 점차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부에서 파탄을 일으켜, 국왕 암살을 자행하고 1941년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을 비롯한 추축국의 침략 때는 병력 소집을 거부하여 유고슬라비아의 파탄에 일조했다. 이후 독일-이탈리아의 괴뢰 국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세워졌다. 독일의 후원 하에 반세르비아 조직인 우스타샤가 정권을 잡고 무자비한 인종청소를 벌였는데, 어찌나 잔혹했는지 '''천하의 독일 국방군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 우스타샤에 의해 살해당한 세르비아인의 수는 30만 명에서 70만 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대부분의 학살이 저질러진 보스니아의 2차대전 직후 세르비아인이 100만여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거의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인구의 20%에서 40%가 죽은 격이었다. 이 비율이면 유대인 학살보다 더하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계의 체트니크라는 민족주의 저항군과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 게릴라들 모두와 격렬히 충돌하였다. 90년대 이후 세르비아의 분열때 세르비아에게 대항한 나라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2차대전 때의 행적은 크로아티아 근현대사 최대의 흑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6][7] 이 때문인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크로아티아가 인지도를 올렸을 때, 일각에서는 크로아티아의 체크무늬 유니폼을 보면 나치가 생각난다면서 항의하는 목소리도 있었을 정도였다.
1945년 이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통합되어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렸으나, 1980년 티토가 죽은 뒤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대두되자 크로아티아도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으며 1990년 총선에서 유고슬라비아 내 각 공화국의 총선이 민족주의 정파의 승리로 끝났고, 크로아티아도 프로뇨 투지만[8] 의 크로아티아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으며 1991년 동구권의 붕괴를 계기로 슬로베니아와 함께 독립국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연방 붕괴를 거부한 세르비아계 연방군과 무력 충돌,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났으나, 국제사회의 중재와 압력으로 연방군이 철군함으로써 슬로베니아와 함께 독립을 달성하였다. 다만 밀로셰비치의 지원 아래 세르비아계가 다수이던 크로아티아 동부 크라이나 지방이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설립을 선포하여 1995년 여름까지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9]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문제로 말썽이 일어나지만, 크로아티아 역사는 아니므로 패스.[10] 독립 이후 세르비아와의 내전으로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물가상승률이 높아 한 동안 경제가 멍망진창이었으나 화폐개혁을 하는 김에 독일 마르크화에 페그를 거는 방식으로 물가를 안정화시켰고 국제재제로 투자유치에 어려움을 겼던 세르비아와는 다르게 크로아티아는 그런면에서 제약이 덜했던지라 1990년대 중반부터 안정세를 되찾았고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다시 휘청이기는 하나, 2000년대에 서방 세계로의 경제 통합을 지향하여 비교적 빠르게 성장하였다.
크로아티아도 2010년대부터는 EU에 가입하게 되었다. 2019년 11월 6일에 자그레브에서 교사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
[1] 달마티아 지역이 슬라브화한 이후에도 이곳에서 라틴인들은 지속해서 살아왔지만 슬라브인들의 출산율이 더 높았기 때문에 점점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하는 크로아티아인에게 동화되었고 이들이 쓰던 언어인 달마티아어도 날이 갈수록 세가 축소되어 19세기 이르러서는 사멸직전에까지 이르렀으며 마지막 화자인 Tuone Udaina가 1898년에 폭파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완전히 사멸하였다.[2] 현재의 발칸 반도 서부의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를 포괄하는 지역.[3] 당시 기록에는 왕을 칭했다는 직접적 기록은 없고 대신에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10세(Joannes X, ?~928)가 토미슬라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왕(Rex)이라 칭한 대목이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토미슬라브가 아니라 스트예판 드르지슬라브(Stjepan Držislav, 재위 969–997)를 최초의 크로아티아 왕으로 보기도 한다.[4] 현 크로아티아의 동부 지방.[5] 다만 헝가리 왕위 자체는 헝가리 귀족 다수의 지지를 받은 귀족이자 오스만의 신하로 들어간 야노시 서포여이가 차지했고, 왕관이 합스부르크에게 넘어간 것은 16세기 후반의 조약에 의해서였다.[6] 이런 친나치 경력 때문인지 대체역사 창작물인 겁스 무한세계에 나오는 추축군이 승리한 세계인 라이히-5에서는 파시스트 세계의 우주계획에 크로아티아 과학자가 포함되어있다는 언급이 있을 정도면 저쪽 세계에서는 제법 잘나가는 친독국가로 추정된다. 또한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는 크로아티아 지역의 벨리카에 게임의 무대 중 하나로 나치 절멸수용소가 있다는 설정이다.[7] 어찌보면 일본과 비슷한 대접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한게 나치 기준으로는 분명 '부적격'한 인종임에도(원칙적으로) 추축국 동맹의 일원으로서 '''명예 아리아인''' 인정을 받았다는 점이 그러하다.(출처: Honorary Aryans, Nevenko Bartulin 저)[8] 젊었을 때는 공산당원이었지만 1970년대에 반체제 인사가 되어 콩밥을 먹기도 했고 1980년대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크로아티아 민주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해서 집권했다. 따지고보면 민족주의를 선동해서 상당수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고 권위주의적인 성향을 보였기에 까이곤 하지만, 크로아티아 내에서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을 축출시키는데 성공하는 등 전쟁영웅이라 요시프 티토와 함께 평가가 좋은 정치인이며 과장 좀 하자면 국부나 그에 버금가는 영웅 취급받는다. 집권 말기에는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크로아티아의 경제가 침체하고 투지만이 죽은 뒤에 치러진 2000년 총대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당이 참패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는 등 말년이나 죽은 뒤에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꼭 좋은 취급만 받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전쟁에서 성공한 인물임은 분명하니까 그렇다.[9] 이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관광지로 유명한 두브로브니크의 경우 세르비아 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망대 측의 마을과 성벽 일대가 초토화되었으며, 크로아티아 측에서는 해당 지역에 전쟁 박람관을 조성하였다. 또한 2019년 1월 21일까지 두브로브니크 성 내에 참전용 추념 코너를 조성해 세르비아와의 치열한 공방전을 관광객들에게 보이고 있다. 허나 세르비아 역시 유고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서 학살과 탄압 등 전쟁범죄를 저지른 가해국가면서도 이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내에서 살던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한테 학살을 당한 전적이 있던 피해자였던지라 크로아티아가 과거 구 유고내전 당시 부코바르 시민 학살 등 세르비아 측에서 자행한 크로아티아인 학살을 문제 삼아 세르비아를 비난하면 크로아티아가 저지른 전범 행위들을 앞세워가며 피해자 행세하지마라고 크로아티아를 비판하기도 한다.[10] 단 헤르체고비나주는 크로아티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어서 사실상 크로아티아령 취급을 받긴 한다. 이는 세르비아인들이 다수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동부 지역의 스릅스카 공화국도 마찬가지여서 여기도 역시 세르비아인들로부터 사실상 세르비아 땅 취급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