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크메니스탄/역사
1. 개요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자 동서교역의 중심지 호라산의 역사와 투르크멘인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이 지역은 고대부터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중세에는 튀르크계 국가들이 건국되었다. 호라산 지역은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와 함께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 이 지역에는 '''압바스 왕조'''를 비롯한 여러 제국이 발흥하였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우즈베키스탄 외에도 카스피 해 너머 캅카스 동부의 아제르바이잔과도 역사를 많이 공유하는 편이다. 원래는 메디아의 일부로 간주될 정도로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지대하게 받았던 지역이지만 투르크메니스탄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튀르크화되었다.
2. 고대
기원전 8000년경부터 농경이 이어져 왔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카스피해와 아랄해 사이에 인도-유럽어족 유목민으로 추정되는 다하이 인들이 살았으며, 이후 기마 유목민인 스키타이족과 마사게타이족이 이 지역을 차지했으며 오늘날 투르크멘 지역에 위치했던 해당 유목집단을 통틀어 다헤(Dahae)라고 부른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에는 박트리아 속주에 속했으며, 이 지역은 인구가 적어서 많은 세금을 기대할 수 없었으나 페르시아군에게 막강한 기병 전력을 제공했다 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를 정복할 당시 이 지역의 마사게타이족 기병들이 마케도니아군에게 상당히 애를 먹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중무장 기병으로 마사게타이 기마궁수들을 제압한 이후 이 지역의 오아시스에 '알렉산드리아 마르기아나'라는 도시를 세우는데, 이 도시는 나중에 메르브의 기원이 된다.
2.1. 헬레니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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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사후 휘하 장군들간의 권력 다툼과 내분이 일어나며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장군과 그 후손들이 다스리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페르시아 영토에 정착한 마케도니아 장군들이 페르시아 귀족 여성들과 혼인하고 이 지역에 그리스인 이민이 들어오나, 향수병에 걸린 그리스인들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이 지역의 서부이란어군계열의 파르티아인들이 남하하여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을 아우르는 파르티아 제국을 세웠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가 지나치게 서쪽에 치우친 이유로, 파르티아인들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앙을 장악하자 셀레우코스 제국 동부의 그리스인들은 고립되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그리고 인도 그리스 왕국을 세우고 그리스식 주화를 주조하며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간다라 미술로 대표되는 핼레니즘 문화를 뿌리내리게 된다.
2.2. 불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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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 왕조가 마우리아 왕조의 뒤를 이어 북인도와 중앙아시아 남부를 장악한 뒤, 동서무역과 교통의 요지인 이 지역을 자주 침공하면서 파르티아와 쿠샨 왕조는 잦은 전쟁을 벌였다. 불교는 마우리아 왕국 시대부터 교세가 확장되기 시작해, 인도 그리스 왕국의 메난드로스 왕이 불교로 개종하면서 그리스인 사이에도 전파되었다. 농촌 중심의 브라만교와 다르게 불교는 도시 상인들의 권리를 대변해주었으며, 인도 상인들의 적극적인 불교 전파에 힘입어 중앙아시아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쿠샨 왕조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적극 진흥하였고, 고대 중앙아시아의 주류 종교로 부상한 불교는 호라산을 포함한 파르티아 왕국 동부 전역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고고학적 연과 결과 오늘날의 페르시아 만 연안의 많은 동굴에서 파르티아 왕조 시절 불교 사원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2.3. 조로아스터교의 부흥과 마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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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가 멸망한 이후 등장한 사산 왕조는 조로아스터교 지상주의에 입각하여 페르시아의 헬레니즘 문화와 인도 문화를 억압하였다. 이들은 전임자 파르티아인들이 종교와 민족에 관용을 베푼 것을 방종이라고 비판하면서 많은 불교 사원과 바빌로니아 고대 종교 사원들을 폐쇄시키고 그리스인들을 강제로 동화시키며 조로아스터교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강력한 권위를 누리게 되었으며, 사산 왕조의 권위를 등에 업고 급속히 교세를 팽창시켰다.
파르티아가 사산 왕조에 멸망당하던 해 크테시폰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마니는 자신의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불교의 진리를 아우르는 성인이라 주장하면서 서기 3세기 마니교를 창제했다. 마니는 지중해 세계에서는 기독교 영지주의를 차용하고 호라산의 불교와 자이나교로부터는 사원에서 '독신 수행 생활을 하는 '''출가자''''와 '가족을 부양하고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재가자''''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호라산 지역의 주민들은 마니교를 받아들인 소그드인들의 지속적인 교역 활동으로 학문과 문화가 번성하게 된다. 발흐 근교에 위치한 불교 순례지 나우바하르가 부유한 무역상이던 순례객들의 보시로 인해 시설이 개선되며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의 발흐에 해당하는 자리아스파에 있다고 주장하며 샤한샤에게 호라산 동쪽의 영토를 병합할 것을 계속 요청하였고 사산 왕조는 호라산 동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중부까지 영역을 팽창하려 시도하게 되었다. 샤푸르 1세는 이에 사산 제국 서쪽에서 사로잡은 로마인 포로들을 당시 사산 제국의 동부 요충지로 이동시켜 니샤푸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샤푸르는 니샤푸르를 건설함으로써 로마군 포로들의 탈주 의지도 꺾어버리고, 로마군의 토목 기술을 이용하여 신도시의 기반을 탄탄히 하는 등 이 중의 효과를 얻었다.
한편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일대로 이주한 흉노족들이 세운 고대 말 에프탈 왕국은 소그드인들은 교역을 장려하고 도시를 관리하며 세력을 키운 뒤 호라산 지역으로 확장을 노렸다. 에프탈족은 머리가 장두형에 피부색은 인도인이나 흉노족보다 하얗다고 하며 앞머리와 옆머리는 짧게 깎는 대신에 뒷머리를 길게 길렀다. 이들은 소그드인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인 성문법을 만들었으며, 이는 곧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 국가들로 전파되었다.
에프탈족은 사산 왕조가 로마 제국과 싸우고 아르메니아를 침략할 때 지원군을 보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페로즈 1세는 황위에 올리기도 하고 전사시키기도 했다. 페로즈 1세의 아들 카바드 1세는 아버지 페로즈가 전사한 전투에서 에프탈족에게 포로로 잡혔던 적이 있으며 카바드 1세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농간[1] 으로 황위에 폐위된 이후에는 에프탈족의 도움을 받아 황위를 되찾는 등 에프탈족은 사산 왕조의 적이자 혈맹이었다. 에프탈족은 과거 자신들이 사산 왕조를 도와 침략했던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가 지휘하는 사산 왕조 군대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고 이후 서돌궐족이 이들을 합병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상실한다. 에프탈족의 잔당들은 신드와 카슈미르 인근으로 이주한 후 인도인과 동화되었다.
5~7세기의 메르브,헤라트,발흐는 불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공존하고, 소그드인 무역 상인들이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중개무역하는 부유한 국제 도시였으며, 트란스옥시아나와 페르시아를 잇는 호라산은 동서 문물 교류의 중심지였다.
3. 이슬람화
7세기 경에 이슬람 라쉬둔 왕조의 3대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의 재위 기간에 아랍 무슬림에게 정복되었으며, 아랍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호라산 지역에 정착한 아랍인들은 중앙아시아 문화에 동화되었으며, 아랍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마이야 왕조로부터 차별받던 호라산의 페르시아인 무슬림들과 동조했다. 호라산을 근거지로 한 압바스 가문은 747년 거병하여 748년 메르브를 함락하여 거점으로 삼고 750년 우마이야 가문를 무너트린다. 세계사적 대사건인 압바스 왕조의 건국에는 호라산 지역의 소그드인들이 거병 자금을 대며 긴밀하게 관여했다고 추정된다.
압바스 왕조는 2대 칼리파인 알 만수르 치세에 메르브에서 오늘날 이라크 남부의 쿠파로 천도하였다가 이후 과거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의 폐허 근처의 바그다드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이를 수도로 삼았다. 압바스 왕조의 구성원들은 국제 교류의 중심지였던 자신들의 출신지 호라산의 문화를 잊지 않았다. 이들은 우마이야 왕조 시절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던 페르시아인 관료들을 적극 등용했으며, 중앙아시아 무역 도시들의 사회 시스템을 이슬람 사회에 적극 차용하였다.
9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니샤푸르 출신 페르시아인 마왈리의 후손 이븐 알 핫자즈는 부하라의 학자 무함마드 알 부하리의 영향을 받아, 신뢰성 높은 하디스 편집본으로 유명한 사힛 무슬림을 편찬했다. 이븐 알 핫자즈가 편찬한 사힛 무슬림은 부하라 출신 학자가 수집한 사힛 알 부하리 하디스와 함께 순니 이슬람 양대 하디스 편집본으로 인정받는다. 인도 수학의 음수 개념이 니샤푸르 출신 수학자에 의해 보급되는 등 니샤푸르는 호라산과 트란속시아나, 인도의 과학과 학문이 중동으로 보급되는 거점이 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7대 칼리파 알 마문의 제위기 동안 이 지역에서 타히르 왕조나 사만 왕조같은 타지크계 군벌 정권들이 마냥 독립 국가처럼 운영되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프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왕국의 왕이나 다름 없었다. 사만 왕조는 나중에 튀르크계 카라한 칸국에 정복되는데 이를 계기로 호라산 동부 중앙아시아 튀르크인들은 순니 이슬람-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4. 튀르크화
하자르 칸국이 키예프 루스의 침략으로 몰락하자 하자르 칸국 궁정의 신하였던 셀주크가 하자르족 난민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 시르다리야 강 삼각주의 오우즈 투르크족을 규합하여 셀주크 투르크의 기원을 이루었다. 이들은 사만 왕조와 카라한 칸국, 가즈나 왕조가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혼란에 빠져있던 호라산 지방으로 쳐들어가 영역을 넓혔다. 메르브를 중심으로 한 호라산 지방은 셀주크 투르크 제국 치하에서 명재상 니잠 알 물크의 선정에 힘입어 번영을 누렸으며, 셀주크 투르크의 동서 분열 이후에도 산자르의 지배 하에 번영을 누렸다.
니잠 알 물크는 사마르칸드 - 부하라 - 메르브 - 니샤푸르를 잇는 도로망을 개선하고 숙박 시설을 설치하며 경찰을 주둔시켜 세금 수입을 증대시켰다. 셀주크 제국의 대학을 신축하거나 시설을 개선하는데도 공을 들였는데, 이렇게 새로 증축된 이슬람 대학들은 니잠의 이름을 따서 “니자미야”라고 불렸다. 발흐와 헤라트의 유서깊은 대학들이 니잠의 지원 하에 규모가 더 커졌으며, 특히 호라산 서부 니샤푸르의 니자미야가 가장 유명했다.
그러나 번영도 잠시 투르크멘이 전공에 따른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인지 반란을 일으켜서 메르브와 그 인근을 황폐화시켰다. 그 이후 호라산 지역은 호라즘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하필 '''호라즘 제국이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 호라산 지역은 관개시설들이 파괴되고 농민들이 학살당하고 도시가 불타면서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메르브 일대의 주요 거주민은 페르시아-타지크계 대신 투르크멘족으로 대체되었다. 다행히 일 칸국의 위구르인 다루가치였던 쿠르구즈가 선정을 베푼 덕분에 호라산의 경제가 복구될 수 있었다 한다. 1235년 부임한 쿠르구즈는 재무를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여 세금 징수에서의 부패를 일소하였고, 역참의 관리들이 제멋대로 역참의 자원을 남용하는 행태를 근절하여 우편 체계를 개선시켰다. 그가 재임한 기간동안 토착 유력자들은 지하 관개 수로를 다시 복구하고 도시 상공업 경제와 무역을 다시 부흥시킬 여력을 얻게 되었다. 쿠르구즈 본인은 기독교도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를 일찍 여읜 후 불교 신자로 자랐고, 이후 일 칸국에서 무슬림 박해를 막아주면서 자신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을 사막화로부터 구하고 선정을 펼쳤던 다루가치 쿠르구즈는 몽골 제국 왕족들간의 음모에 휘말려 1242년 일 칸국 조정에서 모함을 받아 입에 돌을 가득 넣은 후 참수당하는 형벌을 받고 죽었다.
15세기 후반에 티무르 제국이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을 정복하게 되었다. 티무르는 후계자 샤 루흐는 호라산 지역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통치를 행했고, 이는 호라산 동부(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서부)가 근본주의와 되는데 일조했다. 투르크메니스탄 동부 지역은 투르크멘 계통의 백양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4.1. 사파비 왕조의 팽창 실패
티무르 제국이 멸망할 무렵 시아 이슬람을 광신[2] 하는 사파비 왕조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흥기하여 순니파 백양 왕조를 멸망시켰다. 백양 왕조 시기까지 페르시아인들은 대부분 순니파 이슬람을 믿고 있었다. 백양 왕조를 전복한 사파비 왕조가 순니파 무슬림들을 강제 개종, 학살, 추방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 전역에서 순니파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아제리인 키질바시들은 아제르바이잔 인근 조지아, 아르메니아, 체르케스, 다게스탄 일대의 기독교인들을 납치해 쉬아 12이맘파로 강제 개종시킨 후 맘루크로 만들어 이란 각지에 주둔시켜 순니파들의 봉기를 차례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인 순니 무슬림 상당수가 이웃한 오스만 제국와 부하라 칸국 등으로 탈주하였으며 이로서 이란은 시아파 다수 지역이 되었다. 이후 사파비 제국과 우즈베크족의 부하라 칸국이 호라산 지역을 두고 격전을 벌였다. 사파비 왕조는 정복한 지역의 순니파들을 강제로 쉬아파로 개종시키는 정책을 펼쳤으며, 이 와중에 호라산 지역 전체가 쉬아파 지역에 될 수도 있었다. 우즈베크 칸국과 사파비 왕조는 특히 호라산 동부의 교역 중심지 헤라트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그러나 사파비 왕조가 이 지역의 투르크멘족들을 통일하는데 실패하면서 호라산 서부 일부 지역만 쉬아 이슬람 지역으로 만드는데 그쳤다.
사파비 왕조 몰락 이후에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한 때 이 지역을 다시 정복하는데 성공하지만 나디르 샤는 순니파였다... 호라산 북부 지역은 샤이바니 왕조에 이어 히바 칸국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전통적인 페르시아 문화권이었던 호라산 지역은 사파비 왕조의 팽창 실패로 투르크 문화권으로 남게 되었다.
4.2. 히바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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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년부터 1873년 사이에는 우즈베크인들과 튀르크멘인들의 국가인 히바 칸국에 튀르크메니스탄과 카라칼파크스탄,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서부 일대에 들어서 통치했다. 히바 칸국은 부하라 칸국과 마찬가지로 무굴 제국에 말이나 말린 찻잎을 수출하며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히바 칸국 경제는 농업보다는 목축업의 비중이 강한 편이었고, 이 지역의 인구는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파괴와 학살 이래 과거 수준으로 복구되지 못하고 정체된 수준이었다.[3] 1740년부터 1746년동안 잠시 나디르 샤에 의해 잠시 정복당한 적도 있었으나 다시 복구되었다. 무굴 제국이 마라타 동맹의 공격과 시크교도들의 분리 독립, 영국의 침략으로 약체화되고 기술 변화로 말의 수요가 급감하자 히바 칸국은 줄어든 세입을 대체하기 위해서 코칸드 칸국이 청나라 신장 지역을 약탈해서 한족들을 노예 시장에 파는 것을 모방하여 이웃 지역을 약탈을 시도했다. 종종 이 지역에 정찰을 나온 러시아 군인들이 통째로 증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튀르크멘족에게 습격당해 납치되어 노예로 매매된 경우였다. 이에 자극받은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후반기에 군대를 보내 히바 칸국을 정복했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튀르크멘족들이 약탈하던 카자르 왕조 동북부 지방 일부 역시 접수해버렸다.
5. 근현대
5.1. 트란스카스피아 주
러시아 제국 정복 이후에도 히바 칸국의 명목상 지위는 유지되었으나, 대신 히바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 제국령 투르케스탄 총독부 예하 트란스카스피아 주에 소속되었다. 카스피해 동부에 위치해있던 이 트란스카스피아 주가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전신이 된다.
카스피해와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철도가 건설되고 러시아가 이 지역을 너머 아프가니스탄을 노리면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3년 이후인 1920년 히바 칸국은 최종적으로 폐지, 멸망하고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이 들어선다.
러시아 제정의 붕괴 이후 소련이 성립되면서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은 투르케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의 투르크멘 주(자카스피 주)에 속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우즈베키스탄과 인접한 히바 칸국과 부하라 토후국 지역에도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정부(1·2)가 들어섰다.
5.2. 튀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르케스탄이 분할되면서 투르크멘 주는 두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내의 투르크멘 자치주[4] 와 합쳐져, 1925년에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편되었고 이는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전신이 된다. 1928년 당시 투르크멘 SSR의 행정구역. 스탈린 시기에 문자가 두 차례에 걸쳐서 바뀌는 등의 변화를 겪었고, 농업 집산화로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되었다. 1940년대 이후에는 잠잠해졌다가, 1991년 소련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독립하였다.
6. 참고 문헌
- 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크리스토퍼 벡위드
-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 타밈 안사리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르네 그루세
-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 The Cambridge History of India / E.J. Rapson (고대사 부분)
7. 둘러보기
[1] 급진적인 공산주의와 성개방 사상을 가지고 있던 조로아스터교의 이단 분파 마즈다크교를 용인하고 마즈다크교로 개종했다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한테 찍혔었다.[2] 이스마일 1세를 비롯한 사파비 왕족들은 자신들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직계 후손으로서 일리와 후세인의 복수를 위해 모든 순니파를 쓸어버려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사파비 왕조의 왕족들은 정기적으로 이슬람 초창기 4명의 칼리파 중 알리를 제외한 나머지 3명(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이븐 아판)을 참칭자라며 저주하는 예배를 근행했으며, 키질바시들은 활쏘기를 연습할 때 “이 화살이 우마르의 심장에 꽂히기를”이라는 말을 구호로 외쳤다 한다.[3] 1902년 히바 칸국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 인구 조사 결과 인구가 겨우 70만여 명 수준으로 나왔다.[4] 오늘날의 다쇼구즈(Daşoguz, 당시 러시아어로 타샤우스-Ташауз)와 튀르크메나바트(Türkmenabat, 당시 러시아어로 차르주이-Чарджуй)가 위치하는 투르크멘 자치주(1·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