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케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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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특징
4. 인물상
5. 대표작
5.1. 감독 작품
5.2. 연출작


1. 개요


'''原 恵一 (はら けいいち)'''
일본애니메이션 감독. 1959년 7월 24일 출생. (64세) 군마현 타테바야시시 출신.

2. 생애


사탕가게를 하는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원하던 미술대학도 못 가고 애니메이션 전문학교로 진학했는데 정작 본인은 애니메이션보다는 영화에 흥미가 많았다고 한다. 주변에서 보니깐 보긴 했는데 좋아하는 애니가 뭐냐고 물어봤을때 사자에상이라 대답할 정도로 열광적인 오타쿠는 아니였다고 한다.[1] 어찌보면 선배 오시이 마모루처럼 일반적인 오타쿠가 아니라 순수 영화덕후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러다가 타카하타 이사오미야자키 하야오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을 접하고 주변에 그림에 능숙한 사람들에 영향을 받아 애니메이션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신에이 동화 입사 후 초기에 주로 연출 일선에서 활약했는데 도라에몽에서 연출을 담당한 편도 평가가 좋은 편. 도라에몽은 잠시 참여했지만 이후 에스퍼 마미의 감독을 하며 호평을 받았다. 여기서 시바야마 츠토무의 콘티를 구해서 보고 분석하며 콘티 작법을 배웠다고 한다.
크레용 신짱은 1992년 제 1화부터 줄곧 연출과 콘티로 참여했다. 그러다 1996년에는 혼고 미츠루 감독의 하차로 크레용 신짱의 TV 시리즈 감독을 맡게 되었고, 1997년부터 크레용 신짱 극장판 감독도 맡았는데 작품의 평은 괜찮았음에도 흥행이 잘 되지 않아 고전했다. 그러나 이때 9, 10기 어른제국과 전국대합전을 최고의 역작으로 만들었다. 이후 감독직을 물러났으나 극장판 시리즈는 13기까지 연출 부분에 참여했고 TV 시리즈는 2004년 7월까지 감독을 맡다가 하차. 극장판의 명성에 가려졌어도 크레신의 TV 애니메이션 또한 그가 감독을 맡는 동안 가족 애니메이션으로써 성공적으로 안착했기 때문에 이 쪽도 레전드.
2005년 신에이 퇴사 이후로는 오리지날 극장 애니메이션을 감독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때문인지 2011년 35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장편영화 특별상 수상한 바 있다.
2013년엔 영화 《스물 네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로 유명한 일본의 명감독인 기노시타 케이스케의 삶을 다룬 '시작의 길(はじまりのみち)'예고편이라는 실사영화를 감독했다.
크레용 신짱 이후 TV애니메이션에서는 손을 뗐으나 볼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애니판 콘티 작업에 다시 참여하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의 작화를 했던 이타즈 요시미 감독을 도우러 간 것이다. 이후로 다시 TV판의 콘티를 하는 경우는 없어졌다.
한국에선 크레용 신짱(짱구) 극장판 감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유독 한국에서만 다른 작품의 인지도가 떨어진다. 사실 한국에서도 어른제국이랑 전국대합전 만들었다고 하면 "아 그 사람 확실히 잘 만드는 것 같긴 하다" 라고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른제국과 전국대합전도 일본 문화청 선정 일본 100대 애니메이션에 상위권에 선정된 작품이다.
일본에서는 호소다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와 함께 애니 연출계 신흥 거장으로 언급될 정도의 인물로 일본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애니메이션 부문 대상을 미야자키 하야오 이래 두번째로 받은 인물이다. 미야자키와 타카하타 이사오 이후 처음으로 키네마 준보 선정 올해의 영화에 뽑힌 감독이기도 하다. 이 잡지는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영화로 취급하지 않는다. 거기서 영화로 인정했다는 것은 상당한 영예가 있다. 토미노 요시유키가 자기 작품은 영화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고 투덜대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러냐면 키네마 준보에서 안 뽑아줘서 그렇다.] 다른 작품인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컬러풀도 일본에선 평가와 흥행에서 꽤 성공한 작품이다. 일본 외에서도 유럽에서도 꽤 쳐주는 감독으로 프랑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3번 수상한 바 있다.
타카하타 이사오와 큰 친분은 없었으나 타카하타 이사오는 생전부터 하라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갓파 쿠를 보고 "이런 작품이 히트해야 한다" 라고 극찬했다고. 나중에 응원 메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실제로 아동문학을 추구하는 것과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성향부터 매우 유사한 점은 있다. 이런 이유로 호소다나 신카이가 언론에서 포스트 미야자키로 거론되는 것과 다르게 하라 케이이치는 포스트 타카하타 이사오라 불리기도 한다.
다만 2015년 백일홍: 미스 호쿠사이의 흥행 실패와 2019년 버스데이 원더랜드의 작품성에서 비판을 받아 슬럼프라는 평가도 있으며,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지가 관권이라 하겠다.

3. 특징


애니메이션을 보는 주 타켓인 저연령층뿐만 아니라, 그 연령층들과 같이 손잡고 보는 고연령층 부모들에게도 자연스러운 감동을 주는게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예로 짱구는 못말려 넘사벽 극장판으로 평가받는 어른제국의 역습의 경우에는, 저연령층보다 고연령층이 눈물을 흘릴정도였다고 할 정도.
상술한 사자에상 발언도 그렇고 애니메이션 감독치고는 애니보다는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은 편. 특히 키노시타 케이스케와 오즈 야스지로, 데이비드 린을 존경한다고 한다. 실사 쪽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평가가 많음에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로는 사람의 손으로 그리는 맛이 좋아서라고 2010년 밝힌 바 있다. 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 일본 영화 전부 통틀어서 상당히 '고전 영화'스럽게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다. [2]
독립 이후로는 주역엔 전문 성우보다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있는데, 본인 말로는 애니메이션 목소리와 과장된 연기가 익숙하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문 성우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이 일화엔 약간의 뒷얘기가 존재한다. 2004년 인터뷰에서 인랑마인드 게임 외에는 애니메이션에 재미를 못 느꼈다고 말한 뒤 '기분 나쁜 캐릭터와 그에 맞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성우와 연출가 등이 내뿜는 자의식적인 나르시시즘 같은 빌어먹을 것'라고 상당히 강경하게 말한바 있는데, 훗날 이 발언이 오해로 받았는지 해명하면서 '전문 성우는 대단한 존재'라 말하며, '정말로 싫어하면 쓰지 않았을것이다' 라고 정정한 바 있다. 하라 본인이 한동안 연을 쌓았던 크레용 신짱에 출연하는 성우가 자주 출연하는데, 특히 후지와라 케이지, 야지마 아키코는 하라가 신에이 퇴사 이후 감독을 맡은 세 작품 모두 출연한 바 있다.
성우 코바야시 아이∀건담리리 볼자노로 출연한 걸 보고, 신짱 스태프 중에 ∀건담에 참여한 이케하타 타카시를 통해 데모 테이프를 들은 뒤 챠코 역으로 낙점했다고 한다. 코바야시 아이는 크레용 신짱 극장판 중 최고 순위를 다투는 어른제국의 역습태풍을 부르는 장엄한 전설의 전투 두 편 모두 히로인 역을 맡게 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좋아해서 전격! 돼지발굽 대작전 오이로케 역에 미츠이시 코토노를 기용하기도 했다. 캐릭터 디자인도 미사토를 의식하기도 했고, 미사토가 신지를 신짱이라 부르는 것에서 착안했다고. 미츠이시 코토노는 돼지발굽 대작전 이후 아게오 마스미 역에 캐스팅되면서 TV판 레귤러로 정착하게 된다.
짱구 이후로는 주로 만화와 라이트노벨만 애니화 되는 현실을 보며 "이대로라면 일본의 훌륭한 아동문학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고하며 짱구 이후의 작품은 대부분 아동문학을 원작으로 한다.
하라 케이이치가 담당한 짱구는 못말려 TV판 에피소드나 극장판에선 노하라 히로시의 비중이 늘어나는 특징이 있다. 지금의 지구를 지키는 인간병기 노하라 히로시의 이미지는 하라 케이이치가 만든 것이다.

4. 인물상


애니메이션계에 친구는 별로 없다고 한다. 히구치 신지라던가 유아사 마사아키 같은 신에이 시절 크레용 신짱 스태프하고는 그나마 친한 사이인듯. 성격도 게으른 편인지 업무 시간에 졸다가 혼난 적도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여행을 좋아해서 중학교 시절부터 자전거 여행도 다녔고 지금도 자주 여행도 다닌다고 한다. 히구치 신지 말에 따르면 술에 강한 모양. 그 외에는 크레용 신짱 애니메이션 작업하면서 원작 감수 작업을 도와주던 나카시마 카즈키 [3] 와 친하다고 한다.
신에이 동화에서 나온 이후로는 스에요시 유이치로, 마츠모토 노리오, 이타즈 요시미, 마키하라 료타로, 츠지 시게히토(辻 繁人)와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휴대 전화나 컴퓨터, 팩스 같은걸 소지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더 이상 불필요한건 배우고 싶지 않다'라는데 이 때문에 연락하기 매우 어려운데다 대담 같은데 지각하는 일이 잦은듯. 다만 옛날 얘기이며 현재도 그러는지는 불명이다.
블루 하츠의 팬. 에스퍼 마미 연출을 담당했을때 블루 하츠 포스터를 등장시킨 적도 있고 삽입곡도 넣으려고 했으나 저작권 문제로 무산된 바 있다.
(이상 출처는 하마노 야스키 저, '애니메이션 감독 하라 케이이치' (2005)에서)
제자로는 히라카와 테츠오가 있다.

5. 대표작



5.1. 감독 작품



5.2. 연출작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은 감독이 아닌 작품이라도 12기 까지 높은 비중으로 연출에 참여했다. 거의 부감독이나 그 이상이라 봐도 좋다.

[1] 하라 케이이치 자체는 안노 히데아키로 대표되는 1세대 오타쿠들과 동년배이다.(나이는 하라 케이이치가 안노 히데아키보다 한살 위) 하지만 성향은 안노와 정반대라는 것이 차이점.[2] 일본 영화계엔 오즈 야스지로나 키노시타 케이스케 사후 직접적으로 이런 스튜디오 고전주의 노선을 이어받은 감독이 의외로 별로 없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그래도 일본 대중 영화 쪽에서 폭넓게 자리잡았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생각보다 직계가 적은 편. 대체로 쇼치쿠 뉴웨이브나 소마이 신지 부류를 직접적으로 따르고 있다.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는 호소다 마모루가 소마이 신지 팬으로 알려져 있다.) 야마다 요지는 스튜디오 시절 말기에 경력을 시작한 케이스고, 그나마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원래는 다큐멘터리 출신으로 성향 변화가 잦았다. 지금도 고레에다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력에 대해 물어보면 다소 거리를 두고, 나루세 미키오 언급을 자주 꺼낸다.[3] 짱구는 못말려가 연재중인 잡지 편집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