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다 마모루
1. 개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일본에서는 신카이 마코토와 함께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을 '포스트 미야자키'의 선두 주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미야자키 하야오 이후는 확실히 호소다 마모루.'''
2. 경력
1967년, 후에 감독을 하고 연출한 늑대아이의 무대이기도 한[2] 도야마현 카미이치마치(上市町)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외동아들로 철도직원이었던 아버지는 일에만 몰두해서 항상 집에 없었고, 어릴 적에 말더듬이 장애가 있어 초등학교 1, 2학년은 특별지원학교를 다녔다.
1979년 여름 린 타로 감독의 극장판 《은하철도 999(극장판)》를 보고 충격을 받고, 그 해 겨울에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에게 어머니가 보여준 한 편의 영화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리고 칼리오스트로의 성 극장용 팸플릿에 실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 콘티를 보고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심을 갖는다. 소학교 졸업 기념 문집에는 "장래 희망은 애니메이션 디렉터가 되고 싶다. 미야자키 씨와 린타로 씨의 연출 방법과 화면 구성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라는 글을 남긴다
중학교 3학년 때, TV 방송에 나온 자작 애니메이션 특집을 보고 자신과 같은 학생이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A4 용지 1000장 정도를 준비하여 비행기가 총을 쏘는 약 1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학교 내 문화제에서 상영했다. 고등학교 1학년에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카도카와 영화 《소년 케니야》(1984년,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 공개 애니메이터 모집 소식을 알게 되어 중학교 때 만든 자작 애니메이션을 보내서 응모, 최종후보 중 한 명이 되었고[3] 프로듀서가 그 재능을 인정해서 도쿄로 와서 만나기를 권유받았으나, 학생 신분이라 학교 시험 때문에 포기한다.
1986년,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에 진학, 화가를 꿈꾸며 유화와 아크릴화를 전공. 5년만에 졸업한다. 대학 시절에는 레오 카락스 등의 프랑스 영화를 접하고,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화가보다는 영상,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고 한다. 영화 동아리에서 실사 영상물을 50편 이상을 만들었다. 작품의 대부분은 비디오 아트로, 영화의 형태를 갖춘 작품은 2편이고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대학 졸업 즈음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인턴 채용 시험에 응시하나 불합격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인턴 채용 시험에는 그림을 2장 이상 그려서 제출하라는 시험에 150개 이상 제출했는데, 불합격 통보와 함께 미야자키 하야오가 쓴 "지브리는 장인의 세계라서 자네처럼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을 (지브리에) 채용하면 오히려 재능을 없애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탈락시킨다" 라는 내용의 자필 편지를 받았다. 일용직이라도 좋으니 제발 채용해 달라고 지브리에 전화를 걸어 요청했는데, "이번 시험에서 미야자키 씨가 직접 편지를 보내준 사람은 모든 응시자 중 두 명밖에 없다.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이니 그것만으로 영광으로 여겨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호소다는 좌절해서 이 편지를 마구 구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편지는 소중하게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미야자키 감독은 분발하라면서 자네도 작더라도 작품을 만든다면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적었는데, 10여년 뒤 정말로 다시 만나게 돼서 깜짝 놀랐다고.
그 뒤에 카나자와시에 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잠시 일하다가, 《소년 케니야》 때 알게 된 프로듀서의 소개로 1991년 토에이 애니메이션에 입사한다. 호소다 마모루가 밝히기를 자신이 입사할 당시 토에이는 망해가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버블 경제로 일본 국내는 호황으로 들썩였는데 오히려 힘들게 헐떡이고 있던 곳이 아니메 업계였다고. 1980년대 일본 아니메 업계의 가장 큰 밥줄은 미국과의 합작(미국이 기획하고 돈을 대면, 일본측이 실제작을 담당)이었는데, 엔고로 인해 제작비가 비싸져서 채산이 맞지 않자, 기획되는 작품 수가 줄어들고 그 결과 일거리도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세일러 문》을 준비하는 시기에 입사했는데, 이 작품으로 토에이는 부활했다고 한다.
본래 연출을 하고 싶었으나 먼저 애니메이터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듣고 동화와 원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의 길에 들어선다. 신입 시절에는 실제 현장의 주변 동료 애니메이터의 능숙한 실력을 보고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애니메이터를 계속 해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애니메이터로 경력을 쌓아가기를 6년, 우연히 사내에서 연출 채용 시험이 있다는 공고가 적힌 벽보를 본다. 시험 내용은 1개월 안에 TVA 1화분인 20분 분량의 그림 콘티를 그려서 제출하라는 것이었고, 낮에는 평소 하던 일을 하면서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그림 콘티를 그려 응모해 합격, 1997년 게게게의 키타로 4기로 연출가로 본격 데뷔한다. 같은해 아버지가 급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비밀의 아코짱》(제3기)의 연출로 참여한 후, 1999년에는〈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으로 극장판 첫 감독작을 연출한다. 그리고《디지몬 어드벤처》 TV 시리즈의 제21화를 연출, 2000년에는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 〈우리들의 워 게임!〉를 감독하여, 그 연출력으로 업계 안팎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토에이 시절 참가한 작품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은 《슬램덩크》 극장판 3탄(1995년)으로 배운 것이 많았다고 한다.
2000년 8월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호소다를 지명하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기획이 있는데 감독을 맡아보지 않겠냐며 제의가 온다. 드디어 장편을, 그것도 한 번 채용에서 떨어진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맡는다고 리턴 매치라며 기뻐하며 의욕적으로 도전했지만, 기상천외한 원작을 어떻게 영화로 구상해야 할까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난관에 처해 시간을 허비하다가 겨우겨우 그림 콘티 C파트까지[4] 완성했지만[5] , 제작은 난항을 겪고, 감독 제안을 받고 제작에 매달린 지 2년만에 2002년 4월 21일 담당 프로듀서에게서 "이건 더 이상 무리겠어"라는 말을 듣고 감독직에서 강판당하고 호소다가 이끌던 제작팀은 해체된다.
이 때 지브리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제작에 올인하고 있는 상황이라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해 호소다는 자신의 인맥으로 여러 스튜디오를 찾아다니며 인력을 데려왔는데, 계획이 무산되자 신뢰와 인망은 실추되었고 데려왔던 스탭들은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음 일거리를 찾아야 했고, 그 동안 일한 급료 지불이 밀리는 등의 문제까지 발생했다. 호소다는 이 때를 돌이켜 "이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인생의 큰 좌절을 맛본다.
2002년 토에이로 복귀한 뒤, 영화의 기획을 계속 내보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호소다는 끝났다"라고 업계에선 수근거렸다. 토에이에서는 《오자마녀 도레미》와 《내일의 나쟈》 등의 연출, 루이비통의 프로모션 애니메이션 〈SUPERFLAT MONOGRAM〉를 연출하고, 2005년에 《원피스》 극장판 《오마츠리 남작과 비밀의 섬》[6] 을 만든다.
2005년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 매드하우스의 사장 마루야마 마사오가 우연히 호소다가 연출한 TV 시리즈 《오자마녀 도레미 콰~앙!》 40화를 보고, 장편 감독직으로 발탁해서 14년간 근무한 토에이 애니메이션을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되었다. 그리고 2006년 7월,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발표하고 일본 국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하고 6개의 스크린에서 개봉했지만,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9개월 동안 100군데 이상의 극장에서 로드쇼 상영되었다. 흥행 수입은 2.6억엔.
2009년 8월에는 3년에 걸쳐 만든 두 번째 감독작 《썸머 워즈》도 좋은 평가과 흥행에서도 16.5억엔의 히트를 기록했다. 썸머 워즈를 만들기 전, 어머니가 아파서 하던 일을 잠시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가까운 친척 어른의 "너는 성공하기 위해 도쿄로 떠났으니 이 곳은 가족들에게 맡겨두고 다시 올라가서 자신의 일에 집중하라"는 격려를 듣고 다시 일로 돌아와 가족들의 단합과 사랑을 다룬 《썸머 워즈》를 기획하게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 뒤에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치즈를 설립하고, 2012년 7월, 신작 《늑대아이 아메와 유키(국내 개봉명 늑대아이)》를 발표했다. 관객동원수 약 340만명, 최종 흥행수입은 42.2억엔으로 자신의 최고 흥행 기록을 달성했다. 2009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엄마와 육아'라는 테마를 그린 작품이었다. 이른바 포스트 미야자키의 선두주자로 작품성과 흥행성에 성공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의 위치에 오른다.
2012년 9월, 늑대아이 개봉 2달 후에 장남이 태어났다. 2015년 말에는 장녀(이름은 미라이)가 태어났다.
2015년에는 《괴물의 아이》를 공개하고 흥행수익은 58.5억 엔으로 또 다시 자신의 흥행 성적을 갱신했다. 이즈음에 호소다 마모루는 브랜드 네임류의 인기 감독이 되었다.
2018년에 또 한 편의 가족이야기 《미래의 미라이》를 공개했는데, 최종 흥행수입은 일본에서 28.8억 엔으로 전편보다 훨씬 떨어진 기록이었다. 영화 내용이 사적인 가족사 이야기라서 대중적인 공감을 못받았다는 평이 있다. 그리고 이전까지 공동으로 각본을 쓴 오쿠데라 사토코가 참여하지 않은 괴물의 아이와 미래의 미라이는 각본에서 문제점이 드러났고, 이 두 작품의 각본을 혼자서 쓴 호소다 마모루의 스토리텔러 능력을 지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호소다는 이전에도 각본을 직접 쓴 적이 있으며 그때는 욕을 먹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으며 오쿠데라와 같이 작업한 작품에서도 시나리오에 관여를 많이 하였다. 저 두 작품의 경우는 호소다가 직접 써서 문제라기보단 자기 취향을 너무 드러내서 그런 것이라 봐야한다.
활동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는 해외 쪽 주목도가 높아서 콘 사토시 이후 3대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을 확률이 높은 감독이다. [7] 본인도 적극적인지 해외 출품을 자주하고 있으며 특히 미래의 미라이가 칸 영화제 2부 행사인 감독주간에 초청되면서, 어느정도 가까워진 편. 다만 2020년 미야자키 고로가 아야와 마녀(애니메이션)으로 호소다보다 먼저 칸 영화제에 먼저 초청받게 되었다.
3. 연출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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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터 출신으로서 콘티를 상당히 잘 그리는 편으로 인물 작화를 꽤 간단하게 그리기는 하지만 표정이나 행동 지시는 원화와 다름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들어가있고 콘티에 배경까지 그려넣는 것이 특징이다.
이야기를 세밀하게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각본 단계에도 크게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컷과 구도를 되풀이하는 동(同) 포지션, 실사의 카메라 워크(광각렌즈 등)를 의식한 연출, 그림자를 그려넣지 않는 작화, CG의 움직임을 셀화의 움직임에 접근시키는 등, 실사·애니메이션·디지털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자적인 연출 기법을 가졌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멀티로 여러가지 큰 것을 잘 다룬다면 호소다 마모루는 세세한 개인적 표현을 잘 한다는 의견이 있다.
작품 속에서 비행운, 교통 표지판, 갈림길, 소녀, 노파, 주스, 디지털의 둥근 공간이 빈번히 나온다. 그 외에 비슷한 상황을 몇 번씩 반복하거나, 개그 연출로 인물의 얼굴이 만화적으로 되는 등의 표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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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을 전부 본 사람이면 연출상이나 장르적인 공통점이나 클리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가상 세계를 자주 소재로 차용하는 것도 특징. '우리들의 워 게임'의 디지털 월드,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타임 리프할 때 묘사된 시공간의 세계, '썸머 워즈'의 인터넷 세계 OZ, '괴물의 아이'의 또다른 세계 주텐가이 등등. 그리고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단편인 'SUPERFLAT MONOGRAM' 에서도 가상 세계 설정이 차용되었다.
때문에 호소다 마모루 작품이 연출, 내용 등을 우려먹는다는 지적이 있기도 한데, 이는 썸머 워즈가 우리들의 워 게임!을 답습한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사실 썸머 워즈는 우리들의 워 게임의 정신적 후속작에 해당한다. 썸머 워즈 소설판에는 우리들의 워 게임이 원작이라 표기되어 있다. 사실상 리메이크판이라 봐도 좋으며, 또한 같은 소재를 차용하더라도 스토리나 캐릭터면의 차별화는 상당히 잘 이뤄낸다. 괴물의 아이가 전작인 늑대아이와 같은 수인을 소재로 차용했다는 점에서 이번에도 또 소재 우려먹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으나, 늑대아이와는 상당히 차별화된 스토리를 짜내었기에 '답습'한다거나 '우려먹는다'는 평가는 다소 비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캐릭터의 표정 묘사 같은 건 좀 패턴화가 돼있긴 하나 아래와 같이 애니메이터 개인의 스타일을 존중하기 때문에 매 작품마다 꽤나 다른 영상이 나오며 새로운 시도도 끊임없이 하는 감독이다.
호소다 마모루는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스타일의 감독이 아니며 애니메이터 개인의 스타일을 존중하는 편이다. 신인 시절부터 각각의 애니메이터가 어떤 그림과 연출을 그릴 수 있는지를 분석했다고하며 중요한 장면은 그 장면에 맡는 애니메이터에게 위임해서 마음껏 날뛰게 하는 방식을 쓴다. 이런 스타일 때문에 몇몇 장면에선 본편의 큰 작화와 연출의 흐름과는 다른 상당히 이질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참고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은 모두 감성 드라마 → 액션 순서를 번갈아가면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감성) → 썸머 워즈(2009, 액션) → 늑대 아이(2012, 감성) → 괴물의 아이(2015, 액션) → 미래의 미라이(2018, 모험) 등등. 개봉 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시간을 달리는 소녀부터 3년을 단위로 차기작을 개봉하고 있다.[8]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에서 키워드는 '''선택'''이다. 늑대아이에서 학교와 산을 사이에서선택하는 유키와 아메, 아픈 유키를 안고 소아과와 동물병원 사이에서 고민하는 하나, 썸머워즈 포스터에 보면 왼쪽과 오른쪽으로 편이 갈리는 점등을 고려하면 된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에서는 선택을 한 후에 무언가 성장하게 된다.
뭉게구름은 성장의 의미이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에서 뭉게구름 혹은 구름은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키워드이다. 늑대아이를 예로 들어보겠다. 엄마 하나가 시골 할아버지에게 농사를 배웠을 때, 유기가 엄마가 만들어준 새 원피스를 입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했을 때, 아메가 늑대로서의 삶을 선택했을 때도 선택 후 구름이 피어오른다.
꽃밭은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무대이다. 보통 마모루는 영화 처음에는 꽃을 피우지 않은 상태에서,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이 무언가 선택을 하여 성장을 할 때 이후 장면에서 꽃이 꽃봉우리를 피우는 모습으로 성장의 증거를 보여준다.
요리를 비출 때 앵글에 공을 들인다. 이토 토모히코도 이걸 말하면 "이것이 가장 맛있어 보이는 각도야, 이토!"라고 말할 것 같다면서 이 점을 짚은 적이 있다.#
호소다는 섬세한 인물 작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머리카락이 한올한올 휘날린다거나, 명암을 몇 겹으로 넣는다거나. 눈코입을 뚜렷하게 그리는 작화는 그의 작품에선 별로 시도되지 않는다. 왜 음영을 넣지 않냐고 묻는 사람의 질문에 일부러 색을 구별해서 채색할 정도로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가 있지는 않다면서 그건 오히려 애니메이션에서 굳어진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기법을 카게나시(影なし)라고 하며 신의 탑도 이 기법을 사용했다. 대신에 움직임과 감정 표현을 중시하는데 카게나시도 움직임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이다. 혹은 인물은 매우 단순한데 배경이나 이펙트는 매우 화려하게 넣는 특징도 있다. 인물만 그런 게 아니고 디지몬을 할 때도 중요한 액션 장면에선 디지몬의 몸에 있는 문양이나 선을 없애서 애니메이터들의 부담을 줄이고 대신 액션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주로 기용하는 애니메이터인 모리 히사시나 니시다 타츠조도 이러한 특징을 가졌다.
이러한 단순하고 명암없는 작화를 선호하는 그의 취향 때문에 한국에서는 라이벌 신카이 마코토에 비해 작화로 저평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건 작화란 영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더 실력있는 작화가를 기용하는 건 호소다 마모루 쪽이다. 히구치 신지 말로는 일본에 그림을 제대로 그리는 애니메이터가 50명이 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오토모 카츠히로, 호소다 마모루가 다 데려가서 쓸 사람이 없다고 하기도 했다. # 그래서 작품 전반적으로 움직임이 매우 뛰어나다. 신카이 마코토는 정적인 연출에 배경, 채색, 촬영을 최대한 활용하는 쪽이고 쪽이고 호소다 마모루는 애니메이팅에 집중하는 타입의 감독이다.
그렇다고 호소다 마모루가 아예 채색과 배경을 포기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가 매드하우스에서 작업한 작품들과 스튜디오 치즈 설립 후의 작품들은 어느정도 기본적인 명암은 넣었고, 배경 미술과 미술은 굉장히 디테일하고 수려하다. 또한 그의 인물 작화는 전체적인 색채에 비해 어두운 색감으로 칠해진다. 이동진 평론가도 영화당에서 호소다 마모루의 장점 중 하나는 사실적인 배경 미술과 빛의 반사를 이용한 작화 표현이라고 말했을 정도. 어디까지나 신카이 마코토에 비해 덜 신경쓸 뿐, 극단적으로 애니메이팅에 집중하는 타입이 아닌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타입이다.
4. 인간 관계
4.1. 함께 작업하는 인물
- 애니메이터
- 각본
- 오쿠데라 사토코
- 음악
4.2. 영향을 받은 인물
미야자키 하야오의 제자로 잘못 알려져있는 경우가 많은데 전혀 아니고 오히려 존경하고 있다는 공식적인 말도 없다. 위에 언급된 대로 한때는 제자가 될 생각이 있었으나 미야자키에게 거절당했고, 나중에 미야자키의 의향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연출을 그만둔 이후론 별로 마땅한 인연이 없다.
오히려 호소다 마모루가 존경하는 감독은 타카하타 이사오와 스기이 기사부로이며 이 둘의 연출 기법과 유사한 연출을 많이 사용한다. 타카하타 이사오하고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호소다가 미야자키의 초기작을 좋아하는 만큼 그 영향도 있겠지만 다카하타 이사오에 비하면 크지는 않다. 호소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미야자키 씨와 전혀 다른 것이다"라고 여러 번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단적으로 카메라 앵글 활용법만 비교해도 미야자키와는 다르다. 미야자키는 카메라 앵글이 역동적으로 움직이지만 호소다 마모루는 카메라를 단단히 고정하고 이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9] 극적인 장면에서만 움직이는 연출을 주로 쓴다. 그러나 콘티를 그리는 구성과 방법은 미야자키의 영향이 크게 느껴지는데 두 사람의 콘티를 늘어놓고 비교해보면 기술적으론 거의 동질의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한편 그림의 스승은 야마시타 타카아키인데 호소다 특유의 명암을 안 넣는 그림은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둘은 한때 절연할 뻔도 했으나 화해해서 지금도 계속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으론 연출의 기초를 가르쳐준 스승들은 의외로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당시의 선배들이다. (사토 준이치, 이쿠하라 쿠니히코) 호소다는 신인 시절의 작업물이 부끄럽다고 공개하지 않아 세일러 문에 얼마나 많이 어디에 참여했는지 알려져있지 않으나 꽤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소녀혁명 우테나도 작업했으며 호소다 마모루의 결혼식에는 세일러 문과 우테나 주요 스태프들이 전원 참석했다고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동일한 컷을 반복하는 연출의 경우는 이쿠하라의 영향이 크다. 그 외에 연출을 배운 인물로는 드래곤볼의 야마우치 시게야스와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담-의 후루하시 카즈히로를 꼽는다.
요컨데 호소다 마모루는 스튜디오 지브리와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그쪽하곤 별로 관계가 없고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키워낸 감독이라고 봐야한다.
좋아하는 영화 감독으로는 빔 벤더스, 우디 앨런, 에드워드 양, 빅토르 에리세, 소마이 신지 등을 꼽는다. 특히 소마이 신지의 열렬한 팬이라 각본에 오쿠데라 사토코를 기용한 것도 소마이 신지의 이사 각본을 담당해서였다고 한다. [10] 일본에서 있었던 소마이 신지 회고전에 게스트로 참석해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으로는 빨강머리 앤과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주로 언급하며 그 외에도 전설거신 이데온, 은하철도의 밤 (스기이 기사부로 판) 등을 꼽는다.
5. 작품 목록
6. TVA 참가 작품
- 게게게의 키타로 4기 - 94, 105, 113
- 꾸러기 수비대 - 27, 33, 37 콘티
- 비밀의 아코짱 3기 - 6, 14, 20, 30
-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담- - 콘티
- 소녀혁명 우테나 - 7, 14, 18, 23, 29. 33, 39 연출뿐만 아니라 액션 신 애니메이터로도 참여했으며 우테나 팬 사이에선 호소다 마모루 담당 에피소드만 찾아서 볼 정도로 유명하다.
- 소녀혁명 우테나 극장판 ~Adolescence 묵시록~ - 콘티 (공동)
- 은하철도 999: 이터널 판타지 - 원화
- 천사가 될 거야 (1999) - 콘티(20화, 22화)
- 디지몬 어드벤처 21화[11] 연출, 콘티. 디지몬 팬에겐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 내일의 나쟈 OP, ED, 5화, 12화, 26화
- 꼬마마법사 레미 Vivace 40화, 49화[12]
- 원피스 199화[13]
- 스파이럴 추리의 띠 OP[14]
- 사무라이 참프루 OP[15]
- 세기말 오컬트 학원 ED 사진 촬영 [16]
7. 수상내역
8. 이야깃거리
- 상당한 동안인데다 신카이 마코토와 동시기의 작품 활동을 해서 신카이와 동갑으로 보거나 젊은 감독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나이가 꽤 되는 사람이다. 늦게 자수성가한 타입이라 이름이 알려진 게 늦었을 뿐이다. 결혼도 40대에 꽤 늦게 하였다. 그래서 자식 사랑이 지극하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 제작한 늑대아이 이후 작품은 작품관이 크게 달라진 게 체감된다.
- 2009년 썸머 워즈 개봉 기념으로 내한한 적이 있다. 차기작인 늑대아이 때는 첫 아들이 태어나서 내한을 못했지만 다음 작품인 2015년 괴물의 아이 국내 개봉때도 내한을 했다. 괴물의 아이 내한 때는 11월 11일 괴물의 아이 라이브톡, 11월 12일 늑대아이 시네마톡 및 티브이데일리와의 인터뷰로 총 2박 3일의 일정을 마쳤는데, 티브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차세대 미야자키라는 평가는 달갑지 않다는 입장 # 과 함께, 현재 한국 영화의 수준은 일본 영화가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으며 봉준호, 나홍진 감독 등의 작품에 자극을 많이 받고 있다 # 는 견해를 밝혔다. 썸머 워즈의 문제 발생과 그 처리과정이 2차세계대전의 책임에 대해 미국에 떠넘기는 방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후로 사다모토 요시유키(캐릭터 디자인)와 오쿠데라 사토코(공동각본)를 항상 동반했으나 사다모토는 괴물의 아이부터, 오쿠데라 사토코는 괴물의 아이에서는 '각본협력'으로 나오고, 미래의 미라이부터는 참여하지 않았다.
- 2001년에 했던 디지몬 어드벤처 21화 관련 인터뷰가 발굴됨으로 인해 논란이 생겼다.번역 히카리와 타이치의 관계에 대한 장면 묘사를 한 데 있어서 다소 부적절한 묘사를 한 것인데, 21화를 '대낮의 정사를 밖에서 훔쳐보는 듯한 이야기'라고 한다'든가 '히카리가 여성적인 부분을 이용해서 오빠를 붙잡으려한다' 따위의 외설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17] 물론 이러한 연출방향이 캐릭터의 설정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남매간의 근친을 묘사한 뉘앙스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라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실제로 캐릭터 설정상 둘이 성적으로 사랑했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인터뷰에서의 표현이 부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후에 디지몬 어드벤처 총감독인 카쿠도 히로유키 감독이 팬의 질문에
Q : 카쿠도(디지몬 어드벤처 총감독) 감독님, 최근에 발생한 큰 논란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인터뷰 내용 -나리가 태일이를 이성으로서 사랑한다.-이 공식 설정인가요? 아니면 그저 호소다 마모루 감독 개인의 생각인가요?
A : 그런 게 공식 설정일 리 없잖아요.
라고 대답하므로써 저건 그냥 호소다 마모루의 개인적인 해석이고 공식은 아님을 못박아뒀다. #
Q : 카쿠도(디지몬 어드벤처 총감독) 감독님, 최근에 발생한 큰 논란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인터뷰 내용 -나리가 태일이를 이성으로서 사랑한다.-이 공식 설정인가요? 아니면 그저 호소다 마모루 감독 개인의 생각인가요?
A : 그런 게 공식 설정일 리 없잖아요.
라고 대답하므로써 저건 그냥 호소다 마모루의 개인적인 해석이고 공식은 아님을 못박아뒀다. #
- 데뷔 후 10년 정도 애니메이터로서 드래곤볼, 슬램덩크, 세일러 문 같은 작품에 원동화로 참여하였으나 자신의 그림이나 애니메이터로서의 실력을 많이 부끄러워해서 감독작 외에는 어디를 자신이 했는지 공개하지 않거나 크레딧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어디를 했는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저 위에 있는 리스트는 팬들이 집요하게 추궁해서 겨우 알아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하시모토 카츠요 (橋本カツヨ)라는 가명으로 소녀혁명 우테나,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담- 같은 작품에서 콘티 연출가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건 토에이 직원이라 다른 회사 일을 하는 건 원칙적으로 금지였기 때문에 가명을 쓰고 활동한 것이다. 한때 호소다 본인은 "그냥 친구고 다른 사람"이라고 말했으나 나중에 자신이 맞다고 인정하였다. 이 시절 작품이 나중에 내놓은 작품과 성향이 매우 다르게 어두운 내용이 많아 호소다가 좀 어두운 연출을 할 경우엔 하시모토 카츠요가 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 소녀혁명 우테나 29화 각본도 맡았는데[18] 인터뷰에서 우테나 콘티 작업하느라 머리 빠졌다가 아리스가와 쥬리의 마지막 에피소드 콘티 작업을 마무리하고 머리가 다시 났다 ...라고 친구 하시모토 카츠요가 그랬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대로 자기 얘기다. 아리스가와 쥬리는 호소다 마모루가 혼자 확립하다시피한 캐릭터로 호소다의 딸이라 불리기도 한다.
- 카도카와 쪽에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연출을 제안했었다고 하는데, 웬일인지 그 뒤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 그 혹평의 대가 건담의 아버지도 늑대아이를 극찬했다. 그리고 원래부터 토미노는 호소다 마모루에 대한 평이 후했다. 자신이나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슷한 영역에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 썸머 워즈, 늑대아이, 괴물의 아이 모두 우리말 더빙이 되었는데 시간을 달리는 소녀만 더빙이 없었다가 2016년에 드디어 더빙판이 나왔다. 재미있게도 늑대아이, 괴물의 아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더빙판 3연타로 김서영이 주인공을 맡았다.
- 2012년 9월 24일 오후 11시 25분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 디지몬 시리즈의 오메가몬, 나아가 대다수 로얄 나이츠와 이후 많은 이족보행형 최상급 디지몬들의 공통점인 개미허리(...)의 원흉으로 지목받고 있기도 하다. 호소다 마모루는 콘티 단계부터 인물 그림을 마르게 그리는 편이라 사실상 이 사람이 원인이 맞다.[19]
-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원작자 츠츠이 야스타카가 2017년 4월에 위안부 관련 망언을 하여 욕을 먹는 가운데, 그저 해당 작품의 애니메이션 감독을 맡았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같이 욕을 먹었다. 국내에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원작 소설보다 극장판 애니로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호소다가 관련 망언을 했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애니메이션은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고, 심지어 원작자가 제작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또한 호소다 역시 츠츠이의 망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 2018년 12월 28일 박선영의 씨네타운에 출연하였다.
- 2019년 1월 4일에는 CBS 신지혜의 영화음악에도 출연하였다.
- 쇼타콘에다 수인러 라는게 세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썸머 워즈 부터 만드는 작품마다 남자아이와 수인이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하기 때문. 썸머 워즈의 이케자와 카즈마(쇼타), 킹 카즈마(수인) / 늑대아이 - 늑대인간(수인), 아메(쇼타+수인) / 괴물의 아이 - 큐타(쇼타), 쿠마테츠(수인) / 미래의 미라이 - 쿤(쇼타+수인)[20][21]
- 미래의 미라이에는 말을 타는 장면이 나오는데, 호소다 마모루 감독 본인이 경마를 좋아한다고 한다. 출전: 福山雅治 福のラジオ 2018.07.21〔138回〕ゲスト:細田守監督
- 2019년 12월 13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굉장한 영화"라고 절찬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 지금까지 중국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음에도 왠지 모르지만 중국 검열 심사위원들에게 상당히 미움을 받는 감독이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은 어처구니 없는 이유에 걸려 중국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중국 개봉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그의 라이벌인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은 거의 프리패스로 통과되어 대비된다. [22] 추측해보자면 늑대아이같은 경우는 수간이라고 느낄만한 내용이,썸머워즈는 도박이라는 내용이라고 생각할수는 있지만 다른 매체들에서는 잘만 나오기에 사실 중국 정부가 무능력한게 맞다.
[1] 이동진 평론가는 2009년과 2015년에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각각 썸머 워즈, 괴물의 아이 개봉 기념으로 내한했을 때 두 내한 행사 모두 사회자를 담당하였다.[2] 늑대아이의 무대는 사는 집을 비롯한 초등학교, 폭포, 논밭 모두가 실제 존재하는 장소를 화면으로 옮겼다.[3] 다른 두 명은 우루시하라 사토시와 후쿠다 미치오로 후쿠다와는 지금도 친하다고 한다.[4]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그림 콘티는 ABCD 네 파트로 나뉜다. 즉, 4분의 3까지 그림 콘티를 그렸다는 말이다. 이 호소다 마모루 버전의 하울의 성의 그림 콘티를 보고 싶어하는 팬이 많이 있지만, 아직도 미공개다. 몇 장인가 유출된 그림 콘티만을 보면 자동차가 나오고 길거리 장면을 보면 무대 설정이 현대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5] 호소다 마모루는 후에 인터뷰에서 "토에이에서 배웠다는 이상한 자부심 혹은 싸구려 프라이드 같은 것이 있어서, 미야자키씨와 타카하타씨에게 상담을 받거나 일종의 가르침을 청하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조금 정도는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이거다 저거다" 지적당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6] 이 작품은 스튜디오 지브리 시절의 쓰라린 경험을 투영하고 있다.[7] 3대 국제영화제에 애니메이션, 그중 일본 애니메이션이 초청받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콘 사토시 정도만 경쟁에 초청받았을 정도.[8] 이는 우리나라 최동훈 감독도 마찬가지.[9] 후술하듯이 호소다는 소마이 신지나 빅토리 에리세, 에드워드 양을 좋아하는데, 이 감독들의 영화는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롱테이크 연출을 즐겨쓴다. 거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0] 소마이 신지는 소년소녀들을 주인공으로 롱테이크 위주의 성장물을 내놓은 감독이라, 영향을 받은 걸로 보인다.[11] 원판 에피소드 제목은 '도쿄 대격돌' 이고 국내판 에피소드 제목은 '현실 세계로 돌아온 태일!' 이다.[12] 특히나 40화(더빙판은 삭제된 세 편이 있어 40화가 아니라 37화다)는 사쿠라 미라이가 나오는 중요한 이야기로, 기존의 동화풍의 그림과 전혀 다른 방식의 현실적인 연출을 선보이며 말도 안되는 퀄리티를 뿜어냈는데, 원래 4기 극장판으로 예정된 시나리오였다고 한다. 스폰서의 요구에 의해 일이 수틀리다 보니 TV판 시나리오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도레미 시리즈의 극장판은 재생시간이 26분으로 TV판과 큰 차이는 없다.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연출을 사용한 중간 에피소드의 개념이기 때문. 따라서 TV판화 되었다 해도 크게 누락된 부분은 없을 것이다.[13] 극장판 장편 오마츠리 남작과 비밀의 섬의 연출 제의를 받고, 그 전에 먼저 TV용 1편을 연출해 보라고 해서 만들었다. TV 시리즈물이라서 스타일을 맞추기 위해, PAN이라든가 QTB(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사용하는 그림 콘티 전문용어. quick track back의 약자. 카메라가 빠르게 뒤로 물러나면서 피사체를 찍는 것)라든가 이전과는 다른 카메라 워크 연출을 집어넣었다.[14] 하시모토 카츠요 명의.[15] 하시모토 카츠요 명의.[16] 하시모토 카츠요 명의. 엔딩 영상이 실사인데 그걸 카메라로 찍은 사람이 호소다 마모루다.[17] 예시로 타이치랑 코로몬은 수박을 먹고 히카리는 안 먹는 걸 두고 30세 본처(히카리)랑 20세 애인(코로몬)이 남편(타이치)가 없는 곳에서 수박 줄 테니 남편 돌려줘 하고 말하는 걸 뜻하는 것이며, 니네들은 디지털 월드에서만 알았지만 난 8년동안 알고 지냈다고 주장하며 오빠를 돌려받으려는 질척질척한 얘기라고 말했다.[18] 정확히는 콘티를 맡았는데 각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 감독한테 말했더니 새로 만들어라고 했고 각본을 보지 않은 채로 콘티를 그렸는데 방영되니 각본가 이름이 시라이 치아키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고 한다.[19] 실제로 디지몬 20주년 기념 아트북에서 공개된 오메가몬의 러프 디자인은 지금보다 훨씬 강인하고 육중한 디자인이었다.[20] 쿤이 강아지 꼬리를 엉덩이에 달고 반 강아지화 되는 장면이 있다.[21] 굳이 따지자면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 우리들의 워 게임도 남자 아이 및 짐승형 인외 캐릭터(디지몬)이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디지몬은 호소다 마모루가 캐릭터 디자인까지 맡은건 아니니 제외[22] 특히 날씨의 아이는 초능력, 범죄,기후 문제나 사회 비판 등 중국 정부가 불편해할 내용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동시에 다루고 있음에도 통과됐다. 중국 심의가 얼마나 기준도 없이 대충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