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활동

 


1. 결성 과정
2. 1집 S.E.S. (1997)
3. 2집 S.E.S. 2 (1998)
4. 3집 Love (1999)
6. 4.5집 Surprise (2001)
7. 5집 Choose My Life-U (2002)
8. 5집 활동 종료 이후 해체 전까지
9. 20주년 기념 앨범 Remember
10. 해외 진출
10.2. 대만 활동
10.3. 그 외
11. 해체


1. 결성 과정


1996년 이전에도 우리나라 가요에선 여자 가수들이 미약하게나마 있었는데 1993년에는 S.E.S.와 핑클같은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 형태의 최초의 걸그룹이라 할수있는 애플이라는 3인조 걸그룹이 나왔다.
바로 몇주 후 CF 모델 출신들로 결성한 S.O.S라는 4인조 그룹이 나왔고[1] 같은해에는 처음으로 언론에 '''걸그룹'''으로 소개된 중앙대학교 연극영학과 4학년생들이 만든 칼라라는 그룹으로 1993년 강변가요제에서 "후회하고 있는거야" 라는 데뷔곡으로 대상을 받았다.
칼라는 당시 걸그룹이라 불렀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빅마마같은 보컬 그룹이라 할수 있기 때문에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 형태의 최초 걸그룹은 애플이 시조새라 할수있다. 대중가요계 걸그룹 선풍여성그룹 가요계 새바람
1994년에는 윤현숙과 이혜영의 2인조 그룹 코코, 1995년에는 3인조 그룹 쎄쎄쎄, 1996년에는 비비뚜띠[2]라는 2인조 그룹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지만 오늘날의 걸그룹 컨셉과는 차이가 있었다. 사실, 위의 사례는 걸그룹이나 아이돌 컨셉보다는 듀오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여전히 여자 가수가 히트곡을 내는 건 1년에 두세번 있을까말까한 일이었고,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부터 20위까지 남자 가수들이 싹쓸이했을 정도로 여성 가수라 입지를 굳히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환경이었다. 박미경, 강수지, 신효범, 엄정화, 이소라[3]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며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였다. 위에서 언급한 1993년 언론에 걸그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여성 그룹의 존재 자체는 거의 없었고[4] 나왔다고 해도 우정의 무대에 몇 번 출연해서 인기를 잠깐 누리다 사려져갔을 뿐이었다.
당시 여성 그룹, 특히 여성 아이돌 그룹 쪽의 시장은 우리나라 음반 기획자들이나 레코드사들에겐 미지의 땅과도 같았다. 영국의 스파이스 걸스, 일본의 SPEED, 미국의 TLC와 같은 걸그룹들이 수백 수천만장을 팔아치우며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며 많은 제작사들이 의욕적으로 여성 그룹을 기획하고 도전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레이블 반도음반에서 내놓았던 걸그룹 애플(아이돌), 일본식 아이돌을 표방하며 해외 진출까지 시도했던 4인조 S.O.S, 한국의 TLC를 꿈꿨던 에코, 삼성뮤직의 후원아래 홍콩에서 데뷔했던 이뉴, 1998년 2집 야야야 부터 즉 데뷔 1년 후 부터 인기를 얻은 베이비복스 1기[5]까지 많은 그룹들이 데뷔했지만 성과가 만족스러운 걸그룹은 한 팀도 없었다. 남성 팬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하기엔, 여성 그룹 시장의 진입 장벽은 너무나 높았다.
당시 현진영유영진을 발굴하고 H.O.T.를 데뷔시키며 선견지명을 과시했던 SM의 이수만은 여성 아이돌 그룹 시장의 잠재성을 인식하고 1996년 가을 무렵부터 걸그룹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앞선 수많은 여성 그룹들의 선례를 보면서, 여학생 팬들이 확보되어있는 남자 그룹들과는 달리 맨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여성 그룹은 조금이라도 어설프게 보여서는 씨도 안 먹힐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성 댄스 그룹을 기획하면서 2년동안 자그마치 1만명이 넘는 소녀들을 오디션했다는 사실이 SM의 신중했던 준비과정을 말해준다. 오랜 오디션 끝에,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3명의 소녀들이 선발되었다. 안양예술고등학교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한 최성희, 괌 교포 출신의 김유진,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유수영. 가창력은 다소 부족했지만 외모, 춤실력은 좋았던 유진, 슈와 가창력 멤버였던 바다까지 또한 외국어 구사 능력까지 고려된 결과였다.
당시 S.E.S. 후보였던 연습생은 총 8명[6][7]으로, 바다가 먼저 리드 보컬로 정해지고 난 뒤, 유진과 슈가 서브보컬로 정해졌다.
바다는 안양예고 재학 시절 교내 축제 무대에 선 것을 계기로 이수만에 의해 발탁되었다. 원래 바다는 뮤지컬 배우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대학 진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수만이 대학 학비 전액을 지원해 주면서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수 준비를 하게 됐다. 유진은 H.O.T.의 화보집 촬영차 괌에 갔던 캐스팅 디렉터와 이수만의 눈에 띄어 발탁이 되었고[8] 슈는 god손호영, 데니 안, NRG김환성[9]과 함께 혼성 그룹을 준비하던 중 롯데월드 지하상가에 놀러갔다가 S.E.S. 제의를 받게되면서 둘을 남겨두고 먼저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10] 세 사람에겐 각각 바다, 유진, 슈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각자의 이름자를 따서 S.E.S.라는 팀명이 결정되었다..[11][12]
오랜 준비와 투자, 트레이닝 기간을 가졌던만큼 S.E.S.에게 좀 더 야심적인 음악이나 화려한 이미지를 씌워 줄 법도 했지만 SM은 오버하지 않았다. 오히려 S.E.S.를 통해 보여진 것들은 무척 심플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이것저것 다 하려 했던 다른 여성 그룹들과는 달리, SM은 히트곡을 만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공식에 충실했다. 곡이 좋을 것. 노래를 잘할 것. 가수가 매력적일 것. 그리고 다른 요란한 이미지들 대신 그 바탕 위에서 극도의 세련미를 추구했다. 가수의 외모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깔끔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단장되었고, 꽉 짜여진 안무와 감각적인 뮤직비디오가 보태졌다.

2. 1집 S.E.S. (1997)




1997년 11월 28일, SBS 《충전! 100% 쇼》를 통해 데뷔한 이들은 데뷔와 동시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면서 단숨에 인기스타로 급부상했다.[13] 〈I'm Your Girl〉은 이제 갓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로 S.E.S.는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남성을 향해 '난 너의 여자야'라며 만인의 여자친구를 자청하며 적극적이고 대담하게 소녀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 결과 S.E.S. 등장 이후 한국 가요계에 '누나 부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로 대성공했으며 〈I'm Your Girl〉은 뜨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로 흠잡을데 없이 괜찮은 노래다.
여성그룹 시대의 서막을 열어젖히려는 듯 서서히 밝아지는 사운드와 함께 S.E.S.를 이후 신화의 멤버로 데뷔하게 되는 에릭앤디의 랩이 섞이는 감각적인 도입부는, S.E.S.라는 대형 그룹의 등장을 알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We open of the new chapters, Here we come, here come" 하는 랩 가사는 S.E.S.가 이루어낸 엄청난 성공을 알고 있는 지금 더 의미심장하게 와닿는 부분이다. 부드러운 리듬 편곡과 발랄한 멜로디, 멤버들의 풋풋하고 맑은 목소리는 더할 나위없이 달착지근하다. 이 곡은 S.E.S.가 만들어낸 수많은 '명곡'들 중에서도 가장 공들여서 만들어진 곡에 속한다. 인트로, 각 절의 배치와 후렴구, 코러스, 랩, 브리지와 애드립에 이르기까지 이 곡의 모든 부분은 놀랄 정도로 정교하고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다.
이것은 멤버들의 보컬 분담과 음역, 호흡, 사운드의 흐름, 심지어 곡의 재생 시간까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계산한 결과이다. 작곡가 유영진의 재능과 더불어, 이 곡의 작업에 1997년 당시의 최신기술로 SM의 모든 역량이 대대적으로 투자되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I'm Your Girl〉의 비트 자체는 힙합이다. 따라서 안무로 표현하면 동작이 끊어지는 맛이 있어서 소녀다움을 제대로 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m Your Girl〉은 누구에게나 마냥 사랑스럽고 살랑거리는 이미지로 상징될 수 있는 건 마약 같은 도입부와 세련된 훅 그리고 뛰어난 곡 해석 능력 덕분이다. 멜로디의 간결함과 완성도가 높으며 군더더기 없는 편곡과 코러스, 정돈된 캐릭터와 안무는 삼위일체 여성 그룹의 교본으로 후대에 전해졌다.
클로즈업된 눈동자에 비친 원형의 형광등 조명, 찹쌀떡처럼 노출 오버되어 강조된 톤은 한동안 아이돌 뮤비의 정석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기준이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다이아몬드 원석이 깎는 대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이때의 S.E.S.는 후배 여성 그룹들에게 공통적인 영감을 주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노래가 바로 〈I'm Your Girl〉이다. 이 곡의 깜찍함만을 빌리려고 도전했다가 어설픔만 드러내는 후손 걸그룹들의 무대를 종종 보면서 S.E.S.가 1997년 당시 기준으로 얼마나 놀라운 것을 선보였는지를 보여준다.
〈I'm Your Girl〉로 데뷔와 동시에 돌풍을 일으키면서 초대박이 난 S.E.S.는 그 기세를 몰아 후속곡 〈Oh My Love〉로 연속 히트 행진을 이어나갔다. 이장우의 2집 수록곡인 〈널 만난 이후〉[14]를 리메이크한 〈Oh, My Love〉는 비교적 평범한 노래였던 원곡에 SM 특유의 힙합적인 느낌과 S.E.S.의 예쁘장한 화음이 더해져, 보다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곡으로 바뀌었다. 예쁜 가사와 상큼한 멜로디, S.E.S.의 아기자기한 속삭임이 조화를 이루는 곡으로, 원래 남자 가수의 노래였다는게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여성스럽고 나긋나긋한 느낌을 주는 곡이기도 하다. 〈I'm Your Girl〉의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에 조금 빛이 바라는 것 같기도 한 곡이지만, 이 노래가 있었기에 S.E.S.의 요정같은 세련되고 산뜻한 이미지가 후속곡에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Oh, My Love〉에서 S.E.S.는〈I'm Your Girl〉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약간의 변화를 꽤하며 또 다른 이미지로 타이틀곡 못지않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I'm Your Girl》은 뉴질스윙의 리듬으로서 청순함에 파워풀 안무를 곁들여 당찬 사랑 고백 메세지를 전했다면 〈Oh, My Love〉에서는 좀 더 쉽고 친근하게 들을 수 있는 팝적인 느낌이 가미된 음악을 선보이며 수줍은 느낌의 사랑 고백 메세지를 전했다. 무대위에서의 스타일과 안무또한 많이 달라졌다. 〈Oh, My Love〉에서는 자신들의 나이대에 보여줄 수 있는 깨끗하고 풋풋한 학생다운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실제로 무대 의상도 흰 셔츠에 통이 넓은 힙합 바지등 간편하고 따라하기 쉬운 패션이 주를 이뤘다. 당시 7nani라는 캐쥬얼 브랜드에서 자사의 이미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연예인을 설문 조사한 결과 S.E.S.가 선정돼 지면 광고 모델로 발탁되면서 의상 협찬을 받기도 했으며, S.E.S.가 보여준 통이 넓은 바지 패션은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대유행하기도 했다. 안무면에서도 파워풀한 군무가 주를 이뤘던 〈I'm Your Girl〉보다는 좀더 한층 따라추기 쉽고 살랑살랑함을 강조하는 안무를 보여줬다.
가요톱텐에서 최고 3위 기록, 3월 22일 SBS 인기가요에서 첫 진입 순위 4위로 진입했고, 29일에는 진입 2주만에 1위 후보에 오르는 등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인기 몰이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정상에 섰다. 총 5주 동안 1위 후보에 올랐으며, 4월 12일 1위를 차지하면서 다시한번 정상에 섰다.
참고로 1집 활동 당시 〈I'm Your Girl〉과 〈Oh, My Love〉로 거의 3개월간 1위 후보에 올랐는데 1위를 한건 겨우 3번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여성 그룹 시장 파이가 적기도 했고 워낙 남자 가수가 쟁쟁한 데다가 더군다나 신인이었던 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 그룹 최초로 가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15] 〈Oh, My Love〉때는 당시 국민 가수라 불리는 신승훈과 함께 1위 후보에 올랐다.
5월에는 농심이 새우깡의 10대 소비자 유입을 위해 새로운 10대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아이돌 스타 S.E.S.를 1년 계약 개런티 1억 5천만 원이라는 당시 신인 걸 그룹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로 계약하여 첫 CF 촬영을 가졌다. 이후 마지막 팬서비스 차원으로 〈데자뷰〉, 〈완전한 이유〉, 〈Nonsense〉 등을 결합한 메들리로 2, 3주간 활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걸 그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한 앨범에 무려 5곡이나 활동하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5월 31일 세종대학교 대향홀에서 '''걸 그룹으로서는 최초로 공식 팬클럽 창단식'''을 가지며 성대했던 1집 활동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날 약 2,500여 명[16]에 가량하는 팬들이 집결하여 S.E.S.와 첫 만남을 가졌다.
사실, 이들의 성공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SM의 철저한 기획과 트레이닝, 멤버들의 빼어난 미모와 재능, 훌륭하게 만들어진 타이틀 곡과 근사한 뮤직비디오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SPEED, 스파이스 걸스, TLC와 같은 여성 그룹들이 해외에서 대박을 거듭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던 우리나라 가요팬들에게, 그리고 소녀들이 H.O.T.젝스키스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소년들에게 S.E.S.의 등장은 너무나도 적절하고 나이스한 타이밍이었다.
남학생들은 마치 홀린 것처럼 레코드 가게로 찾아가 집단으로 이들의 CD를 사댔고, 데뷔한 12월부터 나우누리 팬클럽 게시판에는 하루에 1,000개가 넘는 글들이 매일 올라왔다. M.netKMTV에서는 프로그램마다 이들의 뮤직비디오를 한번씩 방송했고, 순위에 진입하자마자 이들은 지상파 3사의 순위프로를 싹쓸이했다. '''이 모든 것들이 한 달 안에 이루어졌다.''' '혜성과도 같이 등장해서 가요계를 점령' 과 같은 구태의연한 표현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례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이들의 성공은 가요계의 지형과 판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동안 잠재되어있던 전국의 무수히 많은 사춘기 소년들과 빡빡머리 군인들, 기타 등등의 20~30대 남성 팬들이 어엿한 구매층으로 떠올랐고, 60만 장이라는 높은 판매고로 그들의 구매력은 입증되었다. 남자 팬들은 S.E.S.의 등장으로 여성 가수를 좋아한다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여가수들은 S.E.S.의 대박에 힘입어 약진을 거듭해 남성 가수들을 능가하는 거대한 팬덤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핑클을 비롯해 이들의 아류로 출발한 후발주자 미소녀 걸 그룹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차례 차례로 앨범을 내면서 가요계에 뛰어들었다. 이것은 마치 황무지에 하나의 꽃이 피어나 그 꽃가루를 퍼뜨려서 향기로운 꽃밭을 만들어내듯이 S.E.S.의 등장은 보이그룹들이 득세했던 삭막한 가요계에 수많은 미소녀 걸 그룹들이 피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학생들은 이런 미소녀 그룹들의 등장으로 지금까지의 무료함을 완전히 씻어낼 수 있었다.
이전에도 S.E.S.와 같은 형태의 그룹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모범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이전의 걸 그룹들이 최대 수요인 젊은 남성층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컨셉, 예를 들어 사회비판이나 실력을 전면에 내세운 미국식 등을 내세운 것과 달리, S.E.S.는 이들이 소화하기 쉬운 순수하고 청순한 컨셉으로 준비되었으며, 곡 자체도 누구나 무리 없이 들을 수 있는 세련된 스타일의 팝 댄스곡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시장에서 가급적이면 많은 대중에게 접근하기 위해 취했던 접근방식이며 동시에 당시 시장에서 검증된 유일무이한 여성 아이돌 강수지의 뒤를 잇는 안전한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여기에 더해 추가적으로 당시로서는 강도 높은 댄스를 준비했다는 것은 특이할 만한 점이다. (이후 유사한 컨셉은 소녀시대여자친구 등에 계승된다.) 성공이라는 단어보다 평정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기존의 여자 가수들을 싹쓸어버리면서 가요계에 확고부동한 위치에 자리했다.
여성 트리오가 소위 주목을 받았던 시절은 1986년 서울시스터즈, 1976년대 희자매 이후 거의 10년~20년 만이였다.[17] 펄 시스터즈 이후 30년 만에 걸 그룹 시장에 붐을 일으키며 걸 그룹의 새로운 원형을 만들고 본격적인 걸 그룹 전성시대를 열었다.[18] S.E.S.의 등장은 S.E.S.의 전성 시대의 시작뿐만이 아니라 '''90년대 걸 그룹 열풍의 주역이자 시발점'''이 되었다.
베이비복스는 S.E.S.가 등장하면서 대성공을 거둔 청순 컨셉에다 파워풀한 군무를 수용하여 차별화에 성공하였고, 이후 희대의 라이벌로 불리는 핑클의 등장을 야기했다. 이후 S.E.S.와 핑클은 한국 걸 그룹 역사상 최초로 라이벌 스타 마케팅으로 서로 양대산맥으로 군림하면서 윈윈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쯤 되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걸 그룹 라이벌 스타 마케팅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티티마, 써클, 씨유, O-24, 쿠키, 클레오, 파파야 등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사라졌던 '''90년대 걸 그룹 열풍의 주역이자 원조'''이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한국 가요사에 이어질 여성 아이돌 그룹의 원형을 알리는 시초'''가 되었다.
  • 1997년 외환 위기에도 불구하고 앨범 발매 첫 주 김건모에 이어 3위를 기록, 발매 10여 일만에 15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여자 가수도 인기가 구매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위축될 대로 위축된 소비자들의 금전상태와 불법 다운로드의 시대를 고려하면 평상시의 30만장에 필적할 히트였다.
  • 데뷔 앨범이 6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여성 및 신인가수로는 유일하게 연간 음반판매량 10위 안에 랭크되었다. 이 앨범으로 《골든 디스크》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는데, 이례적으로 여자 신인상을 두 팀이나 받게 되면서 한 팀이 대차게 까였다.
  • 일명 무인도 버전이라 불리는 〈Oh, My Love〉의 첫 번째 뮤직 비디오가 1998년 3월 말부터 방송을 타기 시작했으나, 방송에는 적합하지 않은 퀄리티라는 이유로 일주일 정도 만에 자취를 감추고 새 버전으로 재촬영을 하게 된다.
  • 휘성이 〈Oh, My Love〉의 백업댄서로 활동하였다. 2007년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하여 무대에서 춤을 추는 유진을 보면서 "저렇게 예쁜 사람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하였다. 김원희가 휘성에게 소개팅을 제안했으나 당시 스튜디오에 있던 팬들이 격하게 반발을 해서 무산. 이외에도 도전 1,000곡에 출연해서 〈I'm Your Girl〉 안무를 능숙하게 추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 신승훈에 이어 한국가수로서는 2번째로 미국 빌보드 지에 소개되어 '새로운 아시아 스타'라고 평가받았다.
  • 1998년 5월 31일, 세종대학교 대양홀에서 열린 공식 팬클럽 《친구》 창단식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방송활동을 마무리한다.
  • M.net 가요베스트27에서 선정한 《1998 가요 베스트 100》에서 〈I'm Your Girl〉이 2위, 〈Oh, My Love〉가 38위를 차지했다.
  • MKMF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98 M.net 좋은 뮤직비디오 시상식》에서 〈I'm Your Girl〉이 여자 신인 부문을 차지했다.

3. 2집 S.E.S. 2 (1998)



S.E.S.의 성공 이후 본격적인 걸그룹의 태동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검증되지 않았던 남성층이 걸그룹의 새로운 구매층으로 떠올랐고, 1998년은 S.E.S.를 필두로 한 여성 댄스그룹 붐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해였다.
2집 타이틀곡 〈Dreams Come True〉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외국곡을 차용한 유로 댄스팝으로 신비스럽고 몽환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강조하여 청순을 극대화한 요정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1집에 비해 한층 파워풀해진 안무와 비음 섞인 목소리 등 국내 정서와는 다른 이질적인 곡 분위기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팬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이 신선하게 느껴져 대히트를 하게 된다. 또한, 새로운 사운드 소화에 성공함으로써 가창력과 성장 가능성을 갖춘 아이돌 그룹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Dreams Come True〉는 핀란드의 여성 듀오 나일론 비트의 〈Like A Fool〉[19]를 리메이크한 곡으로 1997년 이수만이 폴란드에 머물고 있던 작곡가를 만나 판권을 사들였다. 노래길이가 길고 지루한 데다 곡의 절정 부분이 약해 곡을 사오는 과정에서 이 노래를 S.E.S.의 분위기에 맞춰 보완할 경우 우리나라 작곡자 이름을 함께 올려도 되냐는 허락을 받아 유영진이 원곡에 새로운 멜로디와 스캣랩 등을 추가하여 공동 작곡가로 이름을 올려놓았다.[20]
당시 일본에서도 막 데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주일 단위로 양국을 오가며 활동을 병행하게 되는데, 막 활동을 발표한 S.E.S.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앨범 판매량은 호조를 보여 일주일 만에 33만 장을 기록하며 월간 1위를 차지한다.[21]

이후 후속곡인 〈너를 사랑해〉[22]까지 대중적으로 큰 히트를 거두면서 걸그룹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S.E.S.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소녀 스타일의 스쿨룩 컨셉이 호평을 받으면서 활동 2주 만에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빠른 속도로 인기몰이를 하게 된다. 가수의 이미지와 컨셉이 딱 들어맞을 때 어떤 파급력이 생기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당시 후속곡 활동 일주일 만에 1위 후보에 올랐던 S.E.S.가 그 다음주에 바로 1위 후보에서 제외되자 순위 선정에 의문을 품은 팬들이 《SBS 인기가요》에 강하게 항의하는 일이 있었는데, 결국 《SBS 인기가요》에서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 가수는 1위 후보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공식적으로 시인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활동 막바지에는 슈가 만성 위염으로 쓰러지면서 굿바이 무대도 가지지 못한 채 급하게 활동을 마무리하게 된다. 당시 S.E.S.는 일본과 대만을 오가며 가히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귀국하자마자 출연한 《뮤직뱅크》 방송이 끝나고 슈가 실신해서 병원에 실려가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2집 마지막 방송 활동이 돼버렸다. 리허설 때도 실신해서 대기실에서 응급조치를 받으며 누워있었다고 한다. 슈는 1집 때부터 만성위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아플 당시에는 독한 약을 하루에 6번씩 먹으면서 버텼다고 한다. 나중에 이것과 관련해 악질 안티들이 여자 아이돌로서는 치명적인 내용의 루머를 퍼트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23]
  • 원래 11월 1일에 컴백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Dreams Come True〉과 〈Eternal Love〉등 4곡을 재녹음하게 되면서 발매가 미루어졌다.
  • KMTV 《가요대전》에서는 신인상 후보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서 팬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KMTV 측은 2집을 발표했기 때문에 후보에서 제외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 1998년 '한국 사이버 방송연예대상' 설문조사에서 김희선, 송윤아에 이어 S.E.S.가 '올해의 미스 네티즌' 3위에 선정됐다. 이는 KBS 2TV의 《연예가 중계》가 광장커뮤니케이션에 의뢰해 1998년 12월 약 한 달간 전국의 PC통신 사용자 6,631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이다.
  • KBS 국제방송이 방송의 날을 맞아 1999년 8월 한달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국내외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과, 《네티즌의 선택, 한국 가요 베스트 10》 인기투표에서 S.E.S.의 〈Dreams Come True〉가 3,950표로 가장 좋아하는 곡 1위로 뽑혔다. 더불어 90년대 한국 가요계 장르 흐름을 선도한 50곡 후보 가운데서도 1위를 기록. 2위와 3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신승훈이 각각 올랐다.
  • 《케이팝 세계를 홀리다》라는 책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언타이틀, BoA, 빅뱅, 2NE1, 샤이니, 브라운 아이드 걸스 등과 함께 역대 아이돌 10대 명반에 포함되었다.
  • 여담이지만 후속곡 〈너를 사랑해〉부터 처음으로 치마를 입기 시작해서 팬들의 반응이 대단했다고.
  • 슈가맨2에서 '떠날 거야'로 슈가맨으로 등장했던 쎄쎄쎄의 매니저가 원래 <너를 사랑해>는 쎄쎄쎄가 처음 받았던 노래라고 주장. 쎄쎄쎄의 1집, 2집 타이틀곡과 몇몇 수록곡이 〈너를 사랑해〉의 프로듀서인 최수정의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쎄쎄쎄의 파워풀한 컨셉하고 안 맞아서 거절당하며 S.E.S.에게 갔다고 한다.


4. 3집 Love (1999)



《I'm Your Girl》에서 보여준 뉴질스윙의 장르지만《Love》에서 S.E.S.가 전했던 메세지는《I'm Your Girl》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졌다.《I'm Your Girl》이 남성에게 적극적이고 당찬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면 《Love》는 첫 사랑이라는 감정의 달콤함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진실해지고 단단해지는 소녀의 감성을 오로지 소녀의 시선으로 표현한 노래이다. 한마디로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시기에 놓여있던 S.E.S.의 성장통과 딱 맞아떨어진 노래라고 할 수 있다. S.E.S.가 남성팬층뿐만 아니라 여성팬층까지 흡수할 수 있었던 큰 요인은 그녀들이 노래했던 메세지에 잘 드러나있다.
남성들이 꿈꾸는 남성에게 의존하고 기대는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니라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메세지와 밝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가사는 소녀팬들의 공감과 환상까지 얻을 수 있기에 충분했다. 3집 타이틀곡 〈Love〉는 한국적 멜로디 위주의 전략을 내세운 다른 걸그룹과는 다르게 파격적인 염색과 비비드 장식으로 화려함을 더한 이국적인 컨셉으로 고급스런 접근을 시도했고, 〈Love〉라는 곡으로 음악적인 퀄리티에 있어서 만큼은 타 여성 댄스 그룹들의 수준을 저만치 따돌려 놓기에 이른다.
S.E.S.는 등장했을 때부터 처음이라고는 믿기 힘든 완성도를 지닌 그룹이었고[24] 결과야 어찌됐든 해외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험을 거의 유일하게 쌓고 있었던 만큼 그에 걸맞는 포지션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원산지가 해외인 〈Dreams Come True〉에서는 이질적인 요소도 함께 부담해야 됐지만 자체적으로 공수한 〈Love〉는 한 치 부족함이 없는 높아진 위상 그 자체였다.
그동안 S.E.S.하면 천박하거나 성적인 코드를 발산하지 않으면서도 예쁘다는 느낌을 꾸준히 주었으며 거기에 적절히 외국 느낌이 나는 세련됨으로 앞서가는 그룹의 전형을 만들어 내었지만 그것은 전부 〈Dreams Come True〉까지 보여주 듯 어린 요정이라는 아이돌 가수의 틀 안에서 구현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Love〉는 어렵지 않게 그녀들을 아이돌이라는 한계에서 탈출하게끔 해주었다. 유영진의 최고작이라는 평가받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아름다운 노랫말, S.E.S.라는 그룹의 이미지와 아주 적절히 맞아 떨어졌을 뿐더러 아이돌 댄스라는 한정된 디렉토리 안에서 '음악만으로도 승부를 할 수 있는' 여성 댄스 그룹의 존재로 한 발 더 나아가게 된다.
노래 제목처럼 S.E.S.가 〈Love〉에서 노래하는 사랑이라는 화두는 어리기만 했던 그때와는 분명히 다른 감정으로 노래된다. 〈I'm Your Girl〉처럼 너무 철없이 들뜨지도 않고 그렇다고 〈Dreams Come True〉처럼 환상으로만 둘러싸여 있지도 않은채 조금씩 생활안에 편안함으로 묻어나는 사랑의 현실적 감각을 미디움 템포안에서 캐쥬얼한 발라드로 표현해 내며 기존 10대 팬들의 호응과 20대 팬들의 또 다른 발견을 이끌어 낸다.
S.E.S.는 3집으로 자신들의 가수 커리어뿐만 아니라 걸 그룹 역사상 대기록을 갱신하는 위업을 남기게 된다. 발매 3일만에 550.030장이 팔려나가 '''걸 그룹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걸 그룹'''이라는 기록을 남겼으며, 총 누적 판매량 760,475장을 돌파하며 '''단일 앨범 기준 걸 그룹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걸 그룹'''으로 기록되었다.[25] 이는 1998년 5월 한국영상음반협회가 설립되어 대한민국 가요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음반 판매량을 집계한 이후 걸 그룹 뿐만 아니라 여자 가수로서도 최다의 기록이고, 90년대 초반 신나라레코드가 집계한 발표한 연간 음반 판매량 차트까지 포함하면 이소라의 80만장에 이어서 여자 가수로서 2번째의 최다 앨범 판매라는 대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활동 중반에는 에뛰드와 1년 계약 2억 5천만원이라는 당시 여자 가수로서의 최고의 몸값을 갱신하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화이브미니와는 6개월 계약 1억 6천만원의 개런티로 광고 계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26]

이후 S.E.S.는 후속곡 《Twilight Zone》으로 활동하였다.[27] 이로서 다시 한 번 1999년 연말부터 2000년의 초반부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된다. 《Twilight Zone》 활동 초반 슈의 배꼽티 의상과 'Come into my bed'의 가사가 야하다는 지적때문에 의상과 가사를 부라부랴 수정[28]하며 지상파 3사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29] 《Twilight Zone》은 《Love》에서 보여준 소녀에서 여인으로라는 S.E.S.의 성장통을 담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Twilight Zone》에서 보여준 S.E.S.의 모습은 《Love》보다 더 대담해지고 과감해졌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집착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30] 그에 따라 그들의 스타일과 안무는 더욱 더 성숙함이 배가되었다. 특히 초반 활동 당시 성숙함과 세련미가 넘치는 정장룩과 코트룩 스타일은 지금보아도 세련됐다는 평가를 받는다.[31] 특히《Twilight Zone》 활동 시기의 슈의 보라색 브릿지 머리는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경이로운 감각의 헤어스타일이라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이때부터 팬덤 내에서 슈의 인기가 한층 더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때 슈는 미모의 정점을 찍었으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비쥬얼 레전드 시기로 꼽힌다. 2000년 1월 23일 SBS 인기가요에서는 당시 연기자에서 가수로 전업하여[32]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SKY의《영원》을 누르고 3집 활동 이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지상파에서 1위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날 바다는 감격에 눈물을 보였고 유진은 앵콜 무대중 관객의 팬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등 유독 감동을 표현했다.[33]
마치 게임에서 하나의 미션을 컴플리트하면 몇 분의 시간이 더 주어지는 것처럼 S.E.S.는 3집의 성공으로 20대에도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1, 2집이 S.E.S.의 전기라고 한다면 3집으로 인해 S.E.S.의 후기 활동의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녀들은 아이돌 댄스 그룹에서 더 나아가 여성 보컬 그룹이라는 수식어도 민망하지 않은 유일한 그룹이 된다. S.E.S. 역시 특유의 고급스런 컨셉을 유지하며 유니크한 걸그룹으로 성장하게 된다.
3집 활동을 마친 이후 멤버들은 1주일 가량의 휴식을 가지고[34] 2000년 3월 19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드디어 자신들의 첫 단독 콘서트를 열게 된다.[35] 대한민국 대중 가요 역사상 단독 공연 최초로 인터넷으로 콘서트 티켓표를 예매하기 시작하였고[36] 이틀 만에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당시 공연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37] 콘서트에는 한국팬들뿐만 아니라 일본팬 대만팬도 공연을 관람하러 원정까지 왔고, 박진영도 콘서트를 관람한 바 있다. 콘서트 이후 한국, 대만, 일본의 100여명의 기자단과 동시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대한민국 가수 최초로 3개의 언어로 가지회견이 진행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그만큼 S.E.S.가 아시아 각국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세계적인 걸 그룹임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38]
첫 단독 콘서틀 성황리에 마친 S.E.S.는 이후 얼마 안 돼서 3월 26일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현 우리금융아트홀)에서 제3기 공식 팬클럽 창단식을 가지며 3집 활동을 총정리한다. 이후 4월 1일 일본 활동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여 마지막 남은 일본 활동을 펼쳤다.[39]
  • 3집은 앨범 발매 3일만에 55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넘는 등 여전한 인기를 과시했으나 활동에 있어서는 악재로 가득한 시기였다. 보수적인 성향의 KBS는 머리색을 문제삼아 노랗게 염색한 머리 색깔이 시청자에게 혐오감을 주고 청소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라는 같잖은 이유로 방송 출연을 금지시켰고[40], SBS는 특정가수가 자사의 음악 방송 《SBS 인기가요》를 통해 컴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S.E.S.의 방송출연을 금지시키면서 지상파에서는 MBC만 출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후속곡 활동을 하면서부터 3사 지상파 출연이 가능해졌다.
  • CD 버전에는 노래와 더불어 토크 트랙이 수록되어 있다.
  • 8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며 공식적으로 한국 여가수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다. 특히 여자 가수로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 역대 음반 판매량 TOP 25안에 랭크. 1세대 아이돌 음반판매량 순위에서도 100만장을 넘는 앨범을 보유한 두 그룹 god와 H.O.T. 다음으로 높은 기록. 3집 활동 당시 여러 문제로 KBS와 SBS에 출연금지를 당해서 MBC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어찌보면 방송도 안타고 여성그룹 최대판매량을 했다고 볼 수도.

5. 4집 A Letter From Green Land (2000)



일본 활동으로 오랜 공백을 가진 끝에 1년 2개월 만에 발표한 앨범으로, 전반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완성도 높은 음악으로 아이돌 가수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평단과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이끌어내며 가수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발판이 된 앨범이다. 이는 당시의 시점에서 뽑아낼 수 있는 아이돌 팝의 최고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수준이다. 특히 일본 활동을 통해 멤버들의 실력 및 안목이 한층 향상된 상황에 소속사의 전폭적인 지지가 결합된 수작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S.E.S. 아니면 다른 누가 부를 수 있을까 싶은, S.E.S.가 쌓아올린 고급스러운 화성과 스타일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나는 〈Be natural〉을 시작으로 MISIA의 원곡에 비해 떨어지긴 하지만 J-POP풍이 덜 느껴지는 S.E.S가 재해석한〈감싸 안으며〉, 내 친구 바다의 이별 이야기를 살짝 훔쳐 듣는 것처럼 그녀의 감정이 100% 묻어나오는 앨범 최고의 트랙 〈Story〉에 이르기까지 이 앨범은 한국 가요계에서 위치하고 있는 S.E.S.가 정상급 걸그룹의 위치로 각인되는 저력을 보여줬다.

당시 재외국민 선발학생 부정입학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연예인 특례입학 문제도 함께 불거져 나왔는데, 유진과 슈가 졸업한 한국켄트외국인학교가 학력인가를 받지 못한 학교로 밝혀지면서 유진과 슈의 대학입학문제가 구설에 오르게 된다. 발단은 부정입학 수사를 하던 와중 이같은 방법을 통해 부정입학한 연예인이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부터였다.
당시 유진과 슈는 재외국인 전형이 아닌 각각 음악과 외국어 특기생으로 입학을 한 케이스였지만 정작 문제는 두 사람이 졸업한 외국인학교가 학교로 인정이 되지 않으므로 고졸학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2001학년도 수시모집에서 특기자전형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합격한 슈와 신화의 앤디가 입학이 취소되었다.
파문이 진정될 때까지 컴백을 무기한 연기하자는 의견까지 나오는 등 소속사 내부적으로도 활동 여부를 놓고 논란이 많았으나, 활동을 중단한 채 시간을 벌기보다는 오히려 능동적으로 활동하면서 이번 파문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게 낫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컴백을 강행하게 된다. 당시 시끄러웠던 대학입학문제에도 불구하고 S.E.S.가 쓰러지지 않을 수 있던 것은 S.E.S.의 앨범이 팬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대중에게도 '음악'으로 공감할 수 있는 요소를 갖췄기 때문이었다.
3집까지만 해도 팬들에게만 인정받던 아이돌 가수에 불과했지만 4집 이후로는 아이돌을 넘어서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넘어섰고, 그것은 한국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아이돌의 대중성과 보컬 그룹에 대한 음악적 인정을 획득하는 그룹의 이미지를 갖게 해줬다.
활동 전부터 순탄치 않은 시작이었지만 앨범 발매 1주일 만에 50만장을 돌파하고,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게릴라 콘서트》에서 방영 당시 최고 인원 동원이었던 11,745명의 관객 동원으로 최고 기록을 갱신하는 등 호조를 보이게 된다.[41] 방송 이후 공식 홈페이지에는 무려 3,000여개의 글이 올라왔고 TNS 기준 전체 시청률이 23.2%를 기록하면서 방영 당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한 순간 최고 시청률이 40.1%까지 치솟으면서 역대 게릴라 콘서트 순간 최고 시청률 1위, 2000년대 이후 역대 MBC 예능프로 순간 최고 시청률 2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갱신했다. 일본에서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여러 무대를 라이브로 소화하고, 타 아이돌 그룹 앨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정통 재즈 스타일의 곡 〈Be natural〉을 과감하게 후속곡으로 선보이는 등, 음악적으로 완성도를 진지하게 어필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서서히 바뀌어갔다.
2001년 1월 14일 SBS 인기가요를 통해 최초로 4집 컴백 무대를 가졌으며 연이어 18일에는 KBS2 뮤직뱅크, 20일 MBC 음악캠프를[42] 통해 본격적인 4집 활동을 시작하게된다. 26일에는 컴백 2주만에 케이블 채널 NTV N-Top 인기가요에서 최초로 1위를 수상했다. 이후 컴백 3주만에 모든 지상파 가요차트 프로그램에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1위 후보에 오르게 된다.[43]
KBS2 뮤직뱅크에서는 2월 15일, 22일, 29일 총 3주간 1위를 차지하며 당시 뮤직뱅크에서 3주 연속 1위를 한 가수에게 주어지는 골든컵을 걸 그룹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수상했다.[44] MBC 음악캠프에서는 10일, 17일, 24일 총 3주, 연속 3주 1위를 차지하며 당시 음악캠프에서 3주 연속 1위를 한 가수에게 주어지는 킹카(King of the Camp)를 걸 그룹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수상하게 되었다. 특히 첫 1위를 차지한 10일에는 god의 니가 필요해를 꺾으며 당시 1주만 1위를 더하면 후속곡도 3주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god의 기세를 꺾었다.
당시 god에 매번 밀려 2위에 머물렀던지라 S.E.S.는 1위 수상자로 발표됐을 때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SBS 인기가요에서는 25일, 3월 4일 총 2주간 1위를 차지했다. 11일 3주 연속 1위에게 주어지는 왕중왕만 남겨놓고 있던 시기에 S.E.S.측은 사전 점수도 3,000여 포인트 앞섰기에 무리없이 1위를 차지할거라고 생각했으니 포지션의 《I Love You》에게 1위 자리를 내줬다. 이후 SM 측은 순위제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여 SBS에 S.E.S.뿐만 아니라 모든 가수의 출연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한다.[45] 《감싸안으며》로 지상파와 케이블을 통틀어 한주간의 무려 8개의 TV 가요차트에서 동시에 1위를 차지하는 대기록을 남겼으며 이후 7개의 TV 가요차트에서 3주 1위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 타이틀 곡 〈감싸 안으며〉는 S.E.S.의 일본 데뷔곡 〈めぐりあう世界〉를 써준 시마노 사토시의 곡으로, 일본 R&B의 선두주자 MISIA의 히트곡인 <つつみ込むように>를 번안한 곡이다. 〈감싸 안으며〉는 지상파와 케이블을 통틀어 SBS를 제외한 7개 방송사 전 음악 프로그램 왕중왕(3주 1위)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으며, 이 곡이 5분 이상 되어서 지상파 방송에서는 1절과 후반부를 부르는 편이다.
  • 〈Be natural〉은 2014년 10월 레드벨벳태용(NCT)의 피쳐링으로 리메이크되었으며, 음악방송에서는 랩부분이 생략되었다.
  • 당시 S.E.S.는 《SBS 인기가요》에서 왕중왕까지 마지막 1위 만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지난주까지 2주 연속 1위를 한데다 사전집계 조사에서 3천여포인트나 앞서 있었기 때문에 별 이변이 없는 한 1위를 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포지션의 〈I Love You〉에 밀려 2위를 하게 된다. 이에 소속사였던 SM 엔터테인먼트는 《SBS 인기가요》 순위 선정의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소속 가수들을 《SBS 인기가요》에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6. 4.5집 Surprise (2001)



2001년에 발매된 4.5집은 일본에서 활동했던 곡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발표한 앨범. 국내가수 중 거의 유일하게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인 해외 활동 경험이 있던 그룹이었기에 발표할 수 있었던 앨범으로, 그간의 일본 활동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발표한 앨범이기도 하다.[46] 처음에는 싱글 타이틀곡이 전부 수록될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일본 정규 1집 수록곡 위주로 구성되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수록되지 못한 곡도 있다고.
  • 걸그룹 에이핑크의 미니 3집 《Secret garden》의 타이틀곡 〈No No No〉(신사동 호랭이작곡)가 〈꿈을 모아서〉의 코드진행을 표절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바 있다.


본상을 수상한 2001 KM가요대전에서는 바다 작사의 <달 끝까지>를 라이브[47]로 불렀다.

7. 5집 Choose My Life-U (2002)



5집 타이틀곡 〈U〉는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겠어'라는 능동적이고 당당한 여성상을 담고 있는 노래며 컴백한 지 1주일 만에 1위를 휩쓸었다. 이 당시는 1세대 3대장 여자 그룹이 활동시기가 겹쳤던 기간이었는데 베이비복스의 우연, 핑클의 영원이 있었다. MBC 음악캠프에서 라이벌인 핑클의 영원과의 1위 경쟁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당시 소속사와의 계약이 끝나가는 시점이었기에 전폭적인 지원를 받지 못했으나 후속곡 〈Just a Feeling〉 이라는 후기 히트곡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사실 5집 타이틀곡인 U보다 이 곡을 더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이 곡은 S.E.S.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곡이며 활동한 S.E.S. 노래 중 1위를 못 해 본 2곡 중 하나다.[48] 어반자카파의 앨범에서는 어쿠스틱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으며, S.E.S.에 대한 후배들의 오마주 무대라든가 각종 가요 프로그램의 타 가수곡 부르기 무대에서도 높은 확률로 선곡되는 노래. 앨범에는 1번 트랙과 14번 트랙에 각각 오리지날과 리믹스 버전으로 수록되었는데, 리믹스 버전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인지도나 인기도는 리믹스 버전이 압도적. [49] 뮤직비디오에 2002한일 월드컵 기념으로 콜라보했던 그룹 V6이노하라 요시히코가 우정출연하였다. 수험생들에게 사랑 받는 노래인 달리기(노땐스)도 이 앨범에 수록되었다.

8. 5집 활동 종료 이후 해체 전까지


5월 말부터 5집 활동을 종료하고 개인활동에 들어갔다. 유진은 2002년 5월 27일부터 2부작으로 구성된 SBS 오픈드라마 <남과 여, 해피버스데이> 를 통해 연기자로 변신했고, 는 6월부터 한일합작 뮤지컬 동아비련 재연 공연을 시작했고, 또한 일본 남성그룹 V6와 프로젝트 싱글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2002년 6월 10일에는 S.E.S. 멤버 전원이 SMTOWN 여름 앨범에 참여하였고, 유진은 해피버스데이가 끝난 뒤 미니시리즈 러빙유의 주인공 진다래역을 맡아 본격적인 주연으로 데뷔하게 된다.

2002년 8월 28일, S.E.S.는 5집 수록곡 중 Just A Feeling과 달리기를 각각 3가지 버전으로 편곡하여 6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리믹스 앨범 <Remixed> 를 발매하였다.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20000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2년 7월 유나이티드3 FRJEANS의 모델로 신화와 함께 발탁되어 10월까지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는 S.E.S.의 '''마지막 광고 모델 경력'''이 된다.
2002년 10월 3일 S.E.S. 공식 팬클럽 '친구'의 6기 창단식이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날 공연에서 S.E.S.는 'Just A Felling', '달리기' ,'친구', '친구- 두번째 이야기' 4곡을 불렀고 이외에도 팬들과 토크를 가지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MC는 초반에는 김영철이 맡았으나 김영철이 스케줄 탓에 공연 중간에 자리를 비웠고 당시 게스트로 함께했던 박경림이 나머지 진행을 맡았다. 그리고 이는 팬클럽 '친구' 의 '''마지막 팬미팅'''이 되었다.
방송의 경우 2002년 7월 13일 열린 조이앤조이 콘서트에 출연하였고 2002년 9월 28일 KBS2에서 방송된 부산 아시안게임 전야제, 또 2002년 10월 18일 경의선 복원기념으로 열린 SBS의 '통일로 미래로' 에 참여하였다.

2002년 11월 21일, S.E.S.는 S.E.S. 역사상 마지막 앨범 '''<Friend>'''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선물하는 의미가 큰 앨범으로, 신곡 Soul To Soul과 그 전의 히트곡들을 모아 발매했다.
2002년 11월 29일, S.E.S.는 Mnet Music Video Festival에 참가해 여자그룹부문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수상하였다. 팬들 사이에서는 12월 7일 열리는 서울가요대상과 12월 13일 열리는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의 참여여부를 놓고 말이 많았으나 결국 불참을 선언, 그 해 연말 가요 시상식에 불참하였다. 2002년 말 연말 집계에서 S.E.S.의 앨범들이 집계되었고, 2002년 12월 31일 공식 팬클럽 '친구' 의 6기 활동 기간도 끝나면서 S.E.S.는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9. 20주년 기념 앨범 Rem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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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신곡 발표, 20주년 기념 콘서트 등 여러 방향을 두고 재결합을 논의하다가 아예 이수만까지 극비회동하여 재결합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고 마침내 재결합에 합의. 일시적 활동인지는 공식적인 활동이 진행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팬들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는 중. #
재결합 기념 공식 홈페이지도 오픈되었다. #
2016년 11월 28일에 디지털 싱글 Love [story]가 발표되었다. 노래 자체는 1999년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리메이크 형식으로 편곡과 재녹음을 기했다. 원곡에 없던 유진과 슈의 랩 파트가 추가되었고, <('Cause) I'm your girl>의 후렴부분이 삽입되었다. 음원은 사실 명성에 비해 초라한 성적을 내었지만 팬들을 위한 기념비적인 앨범이 되었다.
디지털 싱글 Love를 시작으로 리얼리티 <Remember I'm your S.E.S>로 컴백과정을 담아낼 예정이라고 한다. 그 뒤에 12월 30일부터 31일까지 콘서트를 개최하고 1월 1일에 새앨범 타이틀곡을 선공개하고 1월 2일에 풀앨범을 공개하면서 새앨범 발매와 함께 새시작을 연다고 한다. 모든 진행과 관리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콘서트 티켓팅이 무려 2분만에 종료가 되었다. 콘서트는 여타 다른 아이돌들처럼 화려한 콘서트는 아니고, 바다, 유진, 슈가 매년마다 진행중인 자선바자회와 콘서트를 합친 바자회 콘서트가 될것이며, 화려하기보다는 어쿠스틱 편곡을 하는등 굉장히 잔잔한 콘서트가 될 거라고. 때문에 콘서트 수익의 20%를 기부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을 시작으로 바자회 콘서트는 꾸준히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리얼리티인 <Remember I'm your S.E.S>는 TV도 아니고 인터넷도 아닌 SK브로드밴드의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인 옥수수를 통해 공개한다고 한다. 옥수수가 자체가 한국에서 인지도가 상당히 낮은 플랫폼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쪽을 선택했는지 의문. 덕분에 홍보가 잘되지않아서 리얼리티를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 팬들은 차라리 네이버TV나 V앱을 통해 공개했으면 훨씬 주목 받았을 것이라며 아쉬워 하는중이다.
총 10부작인 리얼리티로 하루에 하나씩 공개되었으며 길어야 15분 정도 하는 짧은분량으로, 신곡 녹음과정이나 회의모습 뮤직비디오,재킷 촬영현장 등이 담겨있으며, 활동 당시의 숙소나 장소등을 돌아다니면서 추억을 되새기는 과정을 담았다. 특히 그리웠던 집안일을 돕던 이모, 작곡가, 스타일리스트,열혈팬등을 10여년만에 재회하면서 매회 눈물을 쏟아냈다.
12월 17일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통해서 정식적인 첫무대를 가졌다.
컨셉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예전과 같은 요정컨셉은 아니지만 멤버들의 나이대에 걸맞는 원숙미를 내세웠다. 또한 <Be Natural>처럼 흑백에 시크한 모습도 있는데 이는 바다가 직접 제안한 컨셉으로써, <Be Natural>때 요정과 거리가 멀게 수트를 입고 멋지게 다니는 컨셉을 언젠가는 해보고 싶었는데 해보니 본인들도 맘에들게 성공한 컨셉이었다고.
새 앨범이 말그대로 새 앨범이 될 것인가 혹은 리메이크 앨범이 될 것인가에 대한 회의에서 새앨범이 될 것이라고 의견이 나와서 신곡+리메이크곡을 합친 앨범이 될 것으로 보인다. 타이틀곡은 총2개의 더블타이틀곡으로써 <한 폭의 그림>과<Remember>가 당첨되었다. <Remember>는 듣자마자 유진이 바로 타이틀곡으로 밀고 갔을정도로 극찬했다. 작곡가는 유영진과 Erik Lidbom.
12월 30일 앨범의 타이틀곡인 <한 폭의 그림>과 <Remember>의 티저가 공개되었다. <Remember>의 티저에는 슈의 아들인 임유가 등장하기도 했다.

2017년 1월 1일 0시에 앨범의 선공개 타이틀곡 <Remember>가 공개되었다. 선공개 타이틀 곡 <Remember>는 미디엄 템포의 팝 발라드 곡으로, 세 멤버가 직접 작사, 이번 앨범을 준비하며 느낀 감정과 팬들에 대한 진심을 담았다고 한다.

1월 2일 정오에 공개된 풀앨범이 공개되었다.
추가된 타이틀 곡 <한 폭의 그림 (Paradise)>은 다수의 S.E.S. 히트곡을 만든 SM 대표 작곡가 유영진이 작곡, 데뷔 시절 S.E.S.의 음악 스타일을 대표한 뉴잭스윙 장르라고 한다.

10. 해외 진출


SM 엔터테인먼트의 해외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1997년 H.O.T.의 중국 진출부터이다. 당시 중국은 공산국가의 잔재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경우 입출국을 할 때 군대 문제로 매번 여권을 반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일본은 복수여권이 나오기 전이라 남자 연예인의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SM은 군대 문제 등이 얽혀있는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여자가 해외 활동을 하기에 더 수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됐고 이에 따라 다국적 멤버로 구성된 S.E.S.를 기획하여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10.1. 일본 활동





  • 싱글 3집 愛という名の誇り (1999)

  • 싱글 4집 T.O.P. (1999)
  • 싱글 5집 Sign Of Love (1999)

  • 싱글 6집 Love (2000)
  • 싱글 7집 Lovin' You (2000)


10.2. 대만 활동


1999년, 한국 앨범에 있는 곡을 모아 발매한 셀렉션 앨범 《I'm Your Girl》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S.E.S의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한다. '''우주최강미소녀군단'''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달고 나온 한국 셀렉션 앨범과 일본 1집 앨범 《REACH OUT》이 연달아 2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아시아 대표 걸그룹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국내에서 발간된 첫번째 영상집 2천권이 대만으로 건너가자마자 매진사례를 기록하고, 그다지 활발하지 않던 활동에도 불구하고 1999년 5월 21일 카오셩에서 열린 대만 공식 팬클럽 창단식에는 5천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려들기도 했다. 나중에는 S.E.S.의 영향을 받은 S.H.E.라는 그룹마저 나올 정도.
일본 1집 앨범은 대만 《삼립 텔레비전 HITS CHART(동양권 부문)》에서 11주간 1위를 기록하면서 1999년 연간 차트 1위를 기록했고, 한국 3집 앨범는 14주 1위를 기록하면서 1999년 연간 차트 9위, 2000년 연간 차트 8위를 기록했다. 대만 내에서만 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는 얘기도 있지만 대만 음반 시장 규모를 봤을 때 정확한 정보는 아닌 듯.

10.3. 그 외


미국의 래퍼슨 사를 비롯한 네오비전, 존 미디어 등 3개의 프로덕션으로부터 미국 진출 제의를 받았으나 미국 팝계의 높은 벽(인종차별, 음악적 문화적 차이 등)을 허물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고 판단해 진출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일본 진출만으로도 쉽지 않았음을 보건대 현명한 판단. 다만 진지한 형태의 제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음.

11. 해체


2002년 12월 19일,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유진이 SM을 떠나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함으로서 S.E.S.의 해체가 공식화되었다. 당시 SM은 유진과 바다가 SM과의 재계약을 포기했기 때문에 S.E.S.로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언플을 했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은 회사와 두 멤버간의 재계약 불발로 인해 팀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멤버 셋 모두가 S.E.S.라는 팀을 마무리하고 개인적인 미래를 준비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인터뷰에서 바다는 '세 멤버의 동의로 이루어진 해체'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일본활동을 마감하고 국내 활동을 준비할 당시부터 SM 잔류 여부와 상관없이 각자의 길을 걷기로 이미 합의를 끝낸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해체 발표 당일 S.E.S.의 해체 여파로 SM의 주가가 6.25% 급락했는데, 이에 SM은 그동안 S.E.S.의 음반 판매가 부진했기 때문에 소속사에서 많은 투자를 해오지 않았고 올해 활동이 다소 부진했기 때문에 협상결렬이 전체 매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알다시피 S.E.S.의 음반 판매량은 SM 내에서도 상위를 다투는 수준이었고 2002년만 하더라도 가수 보아에 이어 SM 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음반 판매고를 올렸기 때문에 저런 언플이 먹힐 리가 없었다.
바다는 MP엔터테인먼트와 20억 계약설이 있었으나 양측의 입장차이로 계약이 무산되면서 웅진코웨이개발 산하 웅진 미디어와 5억원에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유진은 S.E.S. 데뷔 당시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매니지먼트를 맡았던 정해익과 4억원에 계약, 슈는 그대로 SM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맺게 된다.

12. 해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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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해체했지만 멤버간의 불화나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해체한 것이 아닌 멤버들의 자발적 의지로 해체한 것이기 때문에 해체 후에도 서로의 활동을 자주 서포트하는 편이다. 최소 1년에 한 번씩은 공식적인 자리를 갖고 있으며 사석에서 따로 만나는 건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을 정도.



[1] 멤버 박상희는 심리상담 전문가로 종편방송에 출연 중이며, 사현진은 연기자로 활동 중이다.[2] 다만 뚜띠는 그 뒤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고 현재는 트롯트 그룹으로 활동중이다.[3] 이소라가 가요 프로그램엔 거의 출연하지 않았지만 음반판매량과 라디오 때문에 순위프로에 이름을 오래 올려놨다.[4] 1980년대 선구자적인 아이돌로 세또래가 있다. 이 중 한 명은 이후 베이비복스의 멤버로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베이비복스 문서 참고.[5] 베이비복스는 꽤나 성공한 그룹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S.E.S.가 데뷔하기 전에 발매했던 1집까지만 해도 완전히 부진했고 폭망했던 상황이었다.[6] S.E.S.의 라이벌 그룹이었던 핑클이효리도 그 중 하나. H.O.T.의 열렬한 팬이었던 이효리를 캐스팅 디렉터 김수현이 데려왔는데 사무실에 오자마자 줄행랑을 쳐버렸다고.[7] 물론 S.E.S.라는 그룹명 자체가 최종 세 멤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므로, 만약 다른 멤버들로 걸그룹이 결성되었다면 S.E.S.가 아닌 다른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8] 유진은 H.O.T.의 팬으로 1996년 1집 활동 마무리후 그들이 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싸인을 받기위해 공항에 나갔다가 현지 교민으로 통역을 요청 받았고 그 후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9] 이후 천명훈의 추천으로 뮤직팩토리로 이적.[10] 이 때문에 손호영과 데니안은 멘붕에 빠졌다고 했지만 결국 god로 대박이 났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 가수를 준비중이었지만 정식으로 계약서에 서명하지는 않은 상태였다.[11] 처음 데뷔시 이름은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Super Emotional Sound의 약자였다. 데뷔후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신화와 같이 출연하여 밝힌 내용. 이후 이름을 번역하면 촌스럽고(....) 대중들이 외우기도 힘들어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바다의 이름을 영어인 Sea로는 쓰지 않았었던 것도 그 증거의 하나. [12] 이름을 읽는 방법도, 처음에는 현재 익히 부르는 '에스 이 에스'가 아닌 약자를 읽는 '세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데뷔곡 I'm your girl의 초반 랩을 들어보면 'I like 세스, Yo! We like 세스, Yo!'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13] 참고로 이 프로그램의 MC는 당시로서는 신인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3인조 남성 그룹 우노(Uno)의 멤버였던 강성민이다.[14] 1996년에 이장우의 2집이 나왔으며, 가장 유명한 곡은 이승환이 작곡하고 마지막에 여자들이 합창하는 "청춘예찬"이 있다.[15] 그 이전 가요 차트에서 여성 그룹의 최고 성적은 1998년 1월 3째주에 에코가 <행복한 나를>로 가요톱텐에서 2위까지 간 게 최고 기록이었다.[16] 당시 팬클럽 회계 보고서에 따르면 1기 팬클럽 가입자수는 2,263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17] 사실상 서울시스터즈도 성인 가요를 부르는 걸 그룹이었다. 희자매는 TBC 가요 차트에서 7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사실상 희자매 이후 걸 그룹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거의 20년만의 일이었다. 80년대 후반 세또래, 90년대 초반 SOS 등이 있었지만 깜찍한 외모만 믿고 정작 가수에게 중요한 음악성의 부재로 초반에 잠깐 스포트라이트만 받았을 뿐이었고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18] 펄 시스터즈는 당시 신중현이라는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트로트가 판을 치던 당시 대중 음악계의 사이키델릭, 소울 풍 등의 충격적이고 신선한 음악을 시도한 걸 그룹으로 6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는 걸 그룹 최초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3년 전문가들이 선정한 M.net 레전드 아티스트에서 펄 시스터즈와 S.E.S.가 뽑히기도 했고, 바다가 불후의 명곡에서 커피 한 잔을 커버하기도 하였다. 이 둘은 시대적으로 봤을 때 음악적으로 신선하고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19] 그 유명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쓰였던 곡이다.[20] 당시 한국을 방문해 S.E.S.의 녹음 과정을 지켜본 원작곡가가 대단히 만족해했다는 후문.[21] 신나라 판매 차트에선 무려 9주 동안 주간 1위를 기록.[22] 본래 1집에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2집 타이틀로 했으면 좋겠다는 이수만의 의견에 따라 2집에 수록하게 됐다. [23] 결국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해당 내용을 보도한 매체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함.[24] 반대로 핑클은 "자신들의 성공이 의도치 않았었다"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연습생 생활을 한 적도 없었고, 갑작스럽게 준비없이 만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성공을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회고를 한 적이 있다.[25] 2020년 10월 블랙핑크가 정규 1집 THE ALBUM이 통산 120만 장을 팔면서 기록을 경신했다.[26] 실제로 에뛰드는 S.E.S.가 2000년 2월에서 2001년 1월까지 일체의 앨범 활동이 없었을 때 TV CF가 온에어되어 그나마 팬들의 갈증을 채워주었다. 에뛰드라도 없었다면 생각만해도 대략 암울하기 그지없다...[27] 랩퍼는 이글파이브 활동을 마치고 SM에 합류한 심재원이었고 백댄서 중 1명은 훗날 슈퍼주니어의 멤버가 된 희철이다.[28] Come into my heart로 가사를 변경했다.[29] KBS는 1999년 12월 연말부터 SBS는 2000년 1월부터 출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4~5일 가량만 일찍 출연 정지가 풀렸으면 SBS 가요대전은 참석할 수 있었을 터... 1999년 SBS 가요대전에 S.E.S.를 비롯한 H.O.T. 등 SM 소속 가수들은 SBS와 기싸움을 펼치는 중이었고 그로 인해 방송정지를 당해 연말 시상식으로까지 이어져 부당한 조치로 수상까지 실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SBS 가요대전이 열리던 날 S.E.S.는 동시간에 방영되는 MBC 코미디대상에 축하무대에 서기도... S.E.S. 팬이라면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무대...[30] 대략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굉장히 집착적이다...[31] 하지만 코디가 점점 삽질을 시작하며 중간에는 성숙한 컨셉과 어울리지않는 망토나 케이프를 이용한 귀여운 컨셉으로 가더니... 사실 여기까지는 봐줄만했다 적어도 이상하지는 않았으니까. 활동 막바지에 가서는 츄리닝 컨셉을 보여줘 팬들의 대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메들리때 잠깐 활동하며 보여주기로 한 스타일을 미리 도입해서 괜히 초만쳤다...[32] 지금은 가수들이 연기자로 전업하는 시대지만 당시에는 반대로 연기자들이 가수로 겸엄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음반 호황기라 몇십만장만 팔아도 돈이 짭짤하였다... 실제로 가수에 뜻이 있고 소질이 있는 연기자들이 가수 겸업을 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90년대 초반부터 김민종, 손지창, 장동건 등이 있으며 차태현, 강성연 등등이 있다.[33] 방송국들의 규제와 소속사와의 기싸움으로 인해 한마디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진 셈이다.[34] 유진은 가족들이 살고있는 괌으로 휴가를 떠났는데 콘서트에서 이 필름을 공개하기로 하였으니 공개되지는 않았고 나중에 SM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볼 수 있었다.[35] 첫 단독 콘서트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콘서트이기도 하다... 4집 당시 콘서트 계획이라는 얘기를 하기는 했는데 물건너간 듯. 최근에 다시 재결합을 한다면 콘서트를 열 것이라는 대형 떡밥을 날리기도 했다. 야호... 그런데 진짜 할지는 진짜 해봐야 아는 것이다. 해체 후 14년동안 재결합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지켜지지 않았다...[36] S.E.S. 이전에는 99년 연말 SM페스티벌 축제를 통해 최초로 시도되었다. 가수 단독 공연으로서는 S.E.S.가 최초였으니 이또한 지금까지 이어지는 공연 인터넷 예매의 원류라 할 수 있다.[37]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라 자세한 내용은 함구하겠으니 걸 그룹이 1만여석의 체조경기장 콘서트를 매진시긴컨 S.E.S.가 최초였다.[38] 덕분에 평소의 기자회견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39] 이후로 거의 1년간 팬들은 S.E.S.를 TV를 통해 만날 수가 없었다...[40] 실제로 슈는 KBS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보라색 머리에 헤어용 컬러 스프레이를 뿌려서 검은 머리로 다녀야 했다.[41] 당시 H.O.T.와 god가 동원한 인원을 돌파한 수치였다.[42] 하필 1년만에 컴백인데 몹쓸놈의 PD가 뜬금없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대두짤 효과를 도입하여 팬들의 원성을 샀다. 하필 그 전 무대가 라이벌 핑클의 무대라 더욱 더 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했다. 이후 해당 무대는 5집 SBS 인기가요 컴백무대 달리기 무대와 함께 잊을만하면 간간히 올라와서 웃음을 주는 S.E.S. 의 무리수 금지 영상으로 남게 되었다.[43] 다만, 당시 국민 그룹이라는 호칭까지 얻으며 범 국민적인 인기를 얻은 god와 붙어서 아쉽게 2위에 그치곤 했다.[44] 8월 9일부터는 당시 지상파 순위제의 공정성을 문제삼아 순위제가 없어졌다. 당시 S.E.S.는 4.5집 스페셜 앨범으로 컴백한 상황이라서 또 한번 1위 기회를 놓친 셈이다. 하여튼 상복이 이렇게 없다.[45] 3집 출연정지 같은 경우에는 다분히 SBS 측의 보복성도 있었지만 이번은 SM 측의 치맛바람이 컸다. 결국 남은 4집 활동에서 SBS에서의 활동은 일체 금지되었으며 마지막 고별무대도 없었다. 이후 한국연예제작자협회와 SBS가 공동 주최하는 2001 드림콘서트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4.5집 컴백 이후에도 몇주 지난 후에 SBS 측과 화해해서 방송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46] 사실 이 시기는 일본 앨범의 라이센스가 한국에 발급이 안 됐기 때문에 SM은 가사를 번안해 발표하는 방법을 택했다. 보아의 스페셜 앨범들도 이래서 발표된 것.[47] 팬들 사이에서 숨은 명곡이자 레전드 라이브로 꼽힌다.[48] 다른 한 곡은 4집의 〈Be Natural〉.[49] 오리지널 버전은 앨범의 첫 곡임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전체적으로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그런 것도 있었어?' 정도의 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