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
泰評
생몰년도 미상
태봉과 고려의 문신.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후삼국시대 호족 유긍순(柳矜順)의 기실(記室)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비서 겸 서기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궁예가 유긍순이 다스리던 염주에 쳐들어와 그의 세력을 무너뜨렸고 태평 역시 궁예에게 항복했으나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궁예가 태평을 군졸에 예속시켰다고 한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왕건을 만나 왕건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우고 918년 순군낭중에 임명되었다.[1] 순군낭중 이전에는 기졸(騎卒: 기병)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아마 왕건을 전쟁터에서 수행하는 동시에 궁예를 몰아낸 반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나라고 추측된다.
몇 줄 기록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2000년작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상상력을 더해 왕건의 책사로 등장하며 천재 군사 참모로 묘사되었는데 배우로는 김하균이 연기했다.[2]
처음 등장은 제79회로 왕건이 상주를 공략해 후백제의 허를 찌르려는 전략을 수립할 때 작전 회의 말미에 있던 군졸로 나오는데 군졸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전략을 건의해 왕건에 의해 전격 발탁되었다. 이 때 설명하며 나온 장면을 보면 다른 병졸들 사이에서 쉴 때마다 혼자 책을 읽는다.[3] 왕건은 태평의 책략을 이용해 조령과 죽령을 빼앗는데 성공했고 이후 태평은 왕건의 책사가 되었다. 왕건이 태평을 총애하는지 제84회에 왕건 및 왕건의 의형제들과 함께 목욕을 즐기는 모습도 나온다.
왕건이 철원에 복귀한 이후 아지태가 찾아와 반역을 제의하고 돌아가자 아지태를 여러모로 비범한 사람임이 확실하다고 평했으며 왕건에게 살고 싶다면 아지태와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전장터로 나서야 한다고 간언한다. 물론 왕건이 절대 아지태와 손잡을리가 없기에 종간이나 은부에게 공격당하고 싶지 않다면 빨리 전장터로 나가라는 얘기. 때마침 후백제가 나주를 공격하여 왕건이 다시 나주로 가게 되었으며 이후 견훤이 나주를 수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수군을 몰고 쳐들어왔을 때는 화공을 위해 천문을 연구하고 남동풍을 불게 하는데 영락없이 제갈량이다.[4][5] 이후 왕건에게 역성혁명을 일으킬 것을 종종 설득하기도 했고 왕건이 시중으로 있을 때는 비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는 병부의 수장인 병부령으로 임명되었는데 이후 참가한 조물성 전투에서 대대적으로 창궐한 전염병에 감염되는 바람에 그만 죽고 만다. 이 때 군사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그에게 본격적으로 증상이 나타나 물을 찾으며 절규하는 모습은 충격과 공포. 안습한 것은 조물성 전투가 본격적인 고려와 후백제 간의 첫 전투였다는 점이다.[6] 왕건이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다며 눈을 뜬 채로 죽었다. 임종하면서 태평은 "신이 죽은 뒤에는 신보다도 더 총명하고 학문과 기지가 뛰어난 천재인 내봉성령 최응을 크게 쓰시옵소서"라며 최응을 중히 쓰라는 말과 최응에게도 "폐하가 대업을 이루는 것은 그대의 손에 달려있다"며 뒷일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다.[7] 태평의 사망에 왕건과 최응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 했지만 태평의 계책으로 나주 수복전에서 수군도 크게 피해를 입고 수달을 잃는 등 막심한 손해를 입었던 견훤은 태평의 부고 소식을 듣자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느니 속이 다 시원하다며 크게 웃었다.[8] 태평이 사망한 이후 최응이 병부의 수장이 되어 왕건을 보필하지만 결국 최응마저도 병으로 젊은 나이에 병사해 고려는 한동안 이들의 공백을 어느 정도 실감해야 했다. 삼년산성에서 패배한 이후(제165회)에 지난 공산 전투에서의 뼈아픈 패배를 겪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지라 왕건은 크게 상심하며 "태평 군사를 잃고... 내 아우 신숭겸이를 잃었어!(생략)"이라는 대사를 하는데 왕건에게는 태평을 일찍 떠나보낸게 큰 손해였을 것이다.
극 중 최승우가 삼국지의 제갈량을 모티브로 했다면 태평은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그리워하던 곽가가 모티브인듯 하다.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태봉과 고려의 문신.
2. 생애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후삼국시대 호족 유긍순(柳矜順)의 기실(記室)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비서 겸 서기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궁예가 유긍순이 다스리던 염주에 쳐들어와 그의 세력을 무너뜨렸고 태평 역시 궁예에게 항복했으나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궁예가 태평을 군졸에 예속시켰다고 한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왕건을 만나 왕건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우고 918년 순군낭중에 임명되었다.[1] 순군낭중 이전에는 기졸(騎卒: 기병)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아마 왕건을 전쟁터에서 수행하는 동시에 궁예를 몰아낸 반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나라고 추측된다.
3. 대중매체에서
3.1. 태조 왕건
몇 줄 기록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2000년작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상상력을 더해 왕건의 책사로 등장하며 천재 군사 참모로 묘사되었는데 배우로는 김하균이 연기했다.[2]
처음 등장은 제79회로 왕건이 상주를 공략해 후백제의 허를 찌르려는 전략을 수립할 때 작전 회의 말미에 있던 군졸로 나오는데 군졸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전략을 건의해 왕건에 의해 전격 발탁되었다. 이 때 설명하며 나온 장면을 보면 다른 병졸들 사이에서 쉴 때마다 혼자 책을 읽는다.[3] 왕건은 태평의 책략을 이용해 조령과 죽령을 빼앗는데 성공했고 이후 태평은 왕건의 책사가 되었다. 왕건이 태평을 총애하는지 제84회에 왕건 및 왕건의 의형제들과 함께 목욕을 즐기는 모습도 나온다.
왕건이 철원에 복귀한 이후 아지태가 찾아와 반역을 제의하고 돌아가자 아지태를 여러모로 비범한 사람임이 확실하다고 평했으며 왕건에게 살고 싶다면 아지태와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전장터로 나서야 한다고 간언한다. 물론 왕건이 절대 아지태와 손잡을리가 없기에 종간이나 은부에게 공격당하고 싶지 않다면 빨리 전장터로 나가라는 얘기. 때마침 후백제가 나주를 공격하여 왕건이 다시 나주로 가게 되었으며 이후 견훤이 나주를 수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수군을 몰고 쳐들어왔을 때는 화공을 위해 천문을 연구하고 남동풍을 불게 하는데 영락없이 제갈량이다.[4][5] 이후 왕건에게 역성혁명을 일으킬 것을 종종 설득하기도 했고 왕건이 시중으로 있을 때는 비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는 병부의 수장인 병부령으로 임명되었는데 이후 참가한 조물성 전투에서 대대적으로 창궐한 전염병에 감염되는 바람에 그만 죽고 만다. 이 때 군사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그에게 본격적으로 증상이 나타나 물을 찾으며 절규하는 모습은 충격과 공포. 안습한 것은 조물성 전투가 본격적인 고려와 후백제 간의 첫 전투였다는 점이다.[6] 왕건이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다며 눈을 뜬 채로 죽었다. 임종하면서 태평은 "신이 죽은 뒤에는 신보다도 더 총명하고 학문과 기지가 뛰어난 천재인 내봉성령 최응을 크게 쓰시옵소서"라며 최응을 중히 쓰라는 말과 최응에게도 "폐하가 대업을 이루는 것은 그대의 손에 달려있다"며 뒷일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다.[7] 태평의 사망에 왕건과 최응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 했지만 태평의 계책으로 나주 수복전에서 수군도 크게 피해를 입고 수달을 잃는 등 막심한 손해를 입었던 견훤은 태평의 부고 소식을 듣자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느니 속이 다 시원하다며 크게 웃었다.[8] 태평이 사망한 이후 최응이 병부의 수장이 되어 왕건을 보필하지만 결국 최응마저도 병으로 젊은 나이에 병사해 고려는 한동안 이들의 공백을 어느 정도 실감해야 했다. 삼년산성에서 패배한 이후(제165회)에 지난 공산 전투에서의 뼈아픈 패배를 겪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지라 왕건은 크게 상심하며 "태평 군사를 잃고... 내 아우 신숭겸이를 잃었어!(생략)"이라는 대사를 하는데 왕건에게는 태평을 일찍 떠나보낸게 큰 손해였을 것이다.
극 중 최승우가 삼국지의 제갈량을 모티브로 했다면 태평은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그리워하던 곽가가 모티브인듯 하다.
[1] 출처: 고려사 열전 왕순식 부 태평, 동국통감 권12 신라기[2] 이후에 등장하는 사극에서는 태평같은 선역보다는 악역이거나 좋지 않은 캐릭터로 자주 등장했다. 대조영에서는 고구려 간신인 부기원, 비밀의 문에서는 노론 김상로, 무인시대에서는 김광립,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명나라 장군 진린, 광개토태왕에서는 탐관오리 가렴, 징비록에서는 양호를 연기했다. 선역으로 나온 것들 중에는 천추태후에서 현종의 스승인 최항, 대왕의 꿈에서 신라 진평왕을 맡았는데 문제는 두 드라마가 다 결과가 좋지 않다.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는 조선 중기의 명재상 최명길로 등장한다.[3]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태평의 책략은 이론만을 익혀 나온 것이 아니라 군졸로서 보고 겪은 실전들을 토대로 나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군대의 가장 기본적이자 필수적인 요소인 군졸로서의 경험이 책을 보고 익힌 전략 전술의 이론과 만나 시너지를 발휘한 셈이다.[4] 극 중에서 제갈량을 언급하기까지 한다. "어떻게 남동풍을 불게 했을까 연구를 하다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것이 태평의 해설이었다. 제146회에서도 최지몽과 함께 병문안을 온 최응도 병부령은 제갈량과 같은 인재라고 위로하며 쾌유를 바랬다.[5] 당시 김하균은 김형일(능산 역), 김학철(박술희 역)과 함께 컨셉으로 에어컨 광고도 찍었다.[6] 역성혁명 이후부터 아자개의 귀부, 송악 환도까지는 별다른 전투가 없었고 태자 왕무와 박술희가 이끄는 고려군과 신검 형제들과 애술 등이 참전한 후백제군의 전투는 전초전 성격이었던만큼 왕건이 친정을 나온 조물성 전투가 본격적인 고려와 후백제 간의 첫 전투라 볼 수 있다.[7] 이 때문에 태평을 다소 일찍 극에서 은퇴시킨 것은 결국 왕건의 책사로서 최응을 부각시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8] 고려군에게까지 대놓고 그런건 아니고 이후 견훤과 왕건과의 만남을 주선하러 간 최승우에게 시켜 '애도의 뜻을 표한다'라고 하기는 했다. 한편 후백제 진영에서는 견금강이 전염병에 걸렸지만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