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성/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
대전고등학교 야구부 시절,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수투수로 뽑혔고, 결승전에서 완투하는 등 총 5게임에서 5승을 챙겼으며 그의 활약으로 대전고는 경남고를 꺾고 청룡기에서 우승을 일군다.[2] 한양대 시절에는 정민태와 함께 좌대성 우민태로 불리며 대학 야구를 평정했다.
구대성의 야구인생은 그야말로 혹사 그 자체이며 오죽하면 '''혹사를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다. 대전고등학교 야구부 시절부터 뛰어난 투수로 이름을 날리며 혹사를 당했고[3] 한양대학교 시절에도 물론 혹사.
2. 빙그레-한화 이글스 1기 시절
그리고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해서도 그 혹사의 후유증으로 루키 시즌을 거지반 날려먹다시피했다. 훈련부족으로 5월이 되어서야 데뷔전을 치렀고, 그나마도 두 경기 등판 후 개점휴업 간판을 내걸었다. 시즌 막바지인 9월에나 다시 등판을 시작해 2승을 따낸 게 전부. .
하지만 이듬해인 94년엔 선발투수로 시작해 마무리 송진우와 보직을 바꾸며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 7승 8패 12세 ERA 2.60의 성적을 내었고, 95년에는 선발과 마무리를 병행하며 4승 '''14패''' 18세이브 3.5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해 그 해 다패왕[4] 을 뒤집어쓰는 등 승운은 따르지 않았으나 161탈삼진으로 탈삼진 2위를 기록하며 위력적인 구위를 뽐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6년에는 18승 3패 24세이브 1.88의 평균자책점으로 다승왕과 구원왕, 평균자책점 1위를 동시에 차지하며 시즌 MVP에 등극했다.[5]
구대성 전성기시절 한화는 선발이 5~6이닝을 막았다→구대성 등판. 선발이 일찍 무너졌다→구대성 등판. 선발을 뛸 사람이 없다→구대성 선발등판(...)[6] 이었다. 구대성이 안 나오는 날은 정민철, 송진우가 완투를 하던가, 아니면 그냥 버리는 식으로 경기를 해결.[7]
당시에는 이광환 감독의 LG가 현대적인 분업화된 야구로 성공을 이루면서 점차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이 자리잡아가기 시작했지만, 필승조로 일컬어지는 강력한 중간계투라는 개념은 그제껏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엔 선발이 7회 언저리까지 막아주면 바로 마무리투수가 올라와서 몇이닝이건 경기를 매조지하는 방식이 대세였다.[8] 그래서 구대성 또한 3~4이닝씩 공을 뿌려대고 다음날 또 나와서 3이닝씩 뿌려대고 이런식이었다. 심지어 한화 이글스의 유일한 우승인 1999년의 운용 방식이 1, 2, 3선발인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이 최대한 이닝을 막고 내려가면[9] , 나머지 이닝은 구대성이 틀어막아 3경기를 확실히 챙기고 나머지 경기는 이기면 좋고 지면 말고 식의 3승 2패 전략(...)이었다. 이런 식의 운용을 하려면 정말 구대성급의 확실한 불펜투수, 그것도 중무리 투수를 가지고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방식. 심지어 한국시리즈에서도 전 경기에 등판하며 1승 1패 3세이브를 기록하고 이 때 한화의 14년 만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MVP까지 가져왔다. 일본 진출 전 마지막 시즌에는 투수진이 망한 관계로 7번이나 선발에 등판해 1996년 이후 규정이닝을 채웠다. 다만 이 때는 구대성의 평균자책점 타이틀 수상을 위해 이희수 감독이 밀어준 것이다.[10]
다만 이런 식의 운용은 구대성의 커리어에 있어 손해를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는데, 보직이 고정되어있지 않다보니 특히 세이브 수에서 어느정도는 손해를 본 것이 사실이다. 흔히 구대성을 흔히 성구회 멤버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은데, 워낙 장기간 선수생활을 한데다 임팩트가 강해 그런 오해가 있지만 실제로는 가입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성구회 멤버가 아니다. 2009년 성구회 창립 당시 투수는 200승을 달성했던 송진우 한 명이었고, 두 번째 투수 가입자인 임창용은 5년이 지난 2014년에야 이름을 올렸다.[11] 투수는 200승 혹은 300세이브가 가입 조건이기 때문에 사실상 입성이 엄청나게 힘들다.
95년 신인 구대성의 투구폼과 공의 무브먼트.
커리어 중 인상적인 것은 리그 MVP를 차지했던 1996년의 기록인데, 단 2경기에 선발출장 했음에도 불구하고 먹어준 이닝이 139이닝이며, 1996 시즌의 성적은 '''18승 3패 24세이브 방어율 1.88 WHIP 0.76'''로 현재까지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했던 투수중 단 세 명만이 이룩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12] 55경기 등판 중 선발 등판은 단 2경기로 중무리 투수라고 불릴 정도로 계속 중간에서 굴려 댔다는 이야기. 마무리 투수가 다승왕까지 등극한 것은 현재로서도 유일한 수상기록이며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처음에는 150km 초중반을 찍어대던 강속구 투수였지만 거듭되는 혹사로 인해 프로 선수가 되었을 때 이미 구속이 3~4km 정도 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거듭되는 프로에서의 혹사,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 빼놓지 않고 뽑히는 바람에 시속은 계속 떨어져 결국 평균 140km을 겨우 웃도는 구속이 되었다.
일본 진출 전 마지막 등판은 2000년 10월 12일 삼성전이었는데, 특기할 사항은 '''선발등판'''(...) 사실 시드니 올림픽 직전인 9월부터 송진우와 보직을 교체해 선발 기용되고 있던 상태였다. 올림픽 직전엔 구대성의 선발 기용 가능성을 점치는 기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올림픽 당시 구대성의 완투승이 마냥 쌩 기적만은 아니었던 셈.[13] 올림픽 복귀 후 첫 경기였던 10월 3일 현대전에서는 통산 1000탈삼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3. NPB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국제 대회에서 일본 킬러라 불릴 정도로 일본전에 강했다는 명성 덕분이었는지, 2001년에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해 4년간 선수로 뛰었다. NPB시절 투구 영상 입단 당시 막 유니폼을 바꾸었는지라 구대성은 마지막 블루웨이브 유니폼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선수 중 하나가 되었다.
첫 해에는 불펜으로 뛰다 시즌 도중 선발로 전향하여 7승 9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4.06의 성적을 기록[14] 했고 KBO 올스타전에도 출장했다. 2년차부터는 아예 선발로 다시 뛰며 정착해 규정이닝을 채우고 퍼시픽리그 2위에 해당하는 2.5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15] 물방망이 타선으로 인해 5승에 거두는데 그쳤다. 2002년 시즌 오릭스에는 3할타자가 다니 요시토모[16] 를 제외하면 한 명도 없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멘도사 라인급 타자들이였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지명타자까지 쓰는 퍼시픽리그에서 당시 팀 타율이 .235밖에 안 됐을까! 경기당 평균득점이 3.1점으로 2002년 퍼시픽리그가 역대급 투고타저[17] 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독보적으로 답이 없는 물빠따였다.
어쨌든 2003년과 2004년에도 선발로 뛰면서 각각 6승을 거뒀는데 잔부상 때문에 2년 연속으로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했고 피홈런 갯수가 폭등[18] 하면서 평균자책점도 4점대로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오릭스의 나머지 투수진이 워낙 막장이라[19] 구대성은 여전히 오릭스의 에이스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구대성의 일본프로야구 시절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명성이나 기대치에 비해서는 아쉬운,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게 된다. 물론 전성기 시절의 구위를 제법 잃은 상태에서 일본에 진출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겠지만. 국내리그에서 구원 투수가 외국 리그로 진출한 상태로 선발 투수로 뛰면서 살아남기 힘든 시기에도 불구하고 신기하다, 여튼 후배 정민철이나 선배 정민태 보다는 그나마 잘했었다.
그리고 2004시즌이 끝난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처음에는 구대성의 영입에 관심을 보였던 뉴욕 양키스 입단이 유력하다는 분위기였고, 언론에서도 구대성의 양키스 입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보도를 연일 내놓았다. 하지만! 금방 진행될 것 같았던 양키스와의 계약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2005년 1월, 뉴욕 메츠와 1년 스플릿 계약을 맺는다.[20][21]
여담으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마지막 경기가 된 경기인 2004년 9월 27일 경기의 상대 선발 투수였다. 이 경기는 긴테쓰와 오릭스의 합병 전 치러지는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이름으로 치른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구대성은 블루웨이브의 마지막 선발 투수가 되었다.[22] 이 날 구대성은 승리투수가 되어 '''블루웨이브의 마지막 승리투수'''도 되었다.
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메츠 시절
2005년에는 뉴욕 메츠에서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동했다. 36세의 나이로 콜업되었는데, 이는 2009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출신의 좌완투수 다카하시 켄이 40세의 나이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콜업되기 전까지 메츠 프랜차이즈 사상 최고령 루키 기록이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생애 첫'''(…) 타석에 들어섰을때 타석 제일 먼 곳에서 방망이를 들고 가만히 서있기만 해서 4구 삼진을 당했다. 며칠 뒤 두번째로 들어선 타석에서는 레전드급 에이스 랜디 존슨과 상대하게 되었는데 랜디 존슨의 공을 깨끗한 2루타로 연결한 뒤 이후 호세 레예스의 보내기 번트 때 무리한 주루 플레이로 점수를 뽑아낸 적도 있다[23] .[24] 당시 홈에서의 판정은 오심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는데, 훗날 구대성 본인도 주심이 봐준 것 같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메이저리그 심판들은 약간 애매한 상황에선 홈어드벤티지를 주는 경향이 있다고 좋게 볼 수도 있긴 하다.
이 두번째 타석은 첫번째 타석과 극히 비교되어 덕아웃의 메츠 선수들은 모두 폭소했고[25] [26] 지역 라디오의 해설자조차도 패닉에 빠졌으며 그날 경기에서는 이닝 중간에 교체될 때 메츠 팬들의 'KOO~'하는 함성과 함께 기립박수를 받은 뒤 "오늘의 선수"로 뽑혔다. 이 타석에서 덕아웃의 마이크 피아자는 데이비드 라이트에게 "구대성이 안타를 치면 자선단체에 100만달러를 기부하겠다"는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그래서 영상을 보면 웃는 라이트와 당황하는 피아자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덕아웃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비롯해 여러 선수들에게 엄청난 환영을 받으며 '''서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장면은 한 번 볼만하다.
다만 이 주루플레이로 인해 옆구리와 어깨에 타박상을 입었는데,[27] 이 당시 구대성은 3경기 연속으로 홀드를 기록한 상황이었지만 이 경기 이후 서서히 페이스가 떨어지며 결국 부상자명단에 오르게 된다.
이 때문에 훗날 구대성은 인터뷰에서 '내가 미친놈이었지'라는 말로 이 주루플레이를 후회하기도 했다. 부상에서 복귀한 이후에는 원포인트로 등판해 매 이닝 안타,볼넷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28] 실력적으로 메이저리그 생활을 하기 힘들었고 결국 시즌 후 메츠를 떠나게 되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성적은 33경기 0승 0패 6홀드 평균자책점 3.91.
'''타자로서는 2타수 1안타 타율 0.500 장타율 1.000 출루율 0.500 OPS 1.500'''
5. 한화 이글스 2기 시절
2006년 제 1회 WBC 직전 해외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해 친정팀 '''한화 이글스로 복귀''', 보직은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으며, 복귀 초창기 처음에는 완벽한 투구로 대성불패라 불렸으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 특유의 무신경한 피칭으로 두들겨 맞으며 적에게는 '''희망'''을, 아군에겐 '''똥줄타는 상황'''을 부여한다. 하지만 언제나 역전 상황에서 (본인만) 여유있게 막으며 모든 이들을 낚는다 해서 쿠낚시 혹은 쿠태공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7 시즌 내내 특수한 폼으로 인해 더더욱 괴롭혀 왔던 무릎수술로 인해 2008시즌에는 6월에서야 등판이 가능하였다. 저멀리 떠나가버린 강속구는 다시 찾지 못하였지만, 관록으로 한화 불펜[29] 에서 힘이 되주었다.
2009년에서는 전반기에 46이닝에 연투 10번에 3연투 4번에 4연투 3번(…)으로 한화 불펜진에서 연투에 연투를 이으며 김인식 사단의 육노예목록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송진우가 은퇴하면서 한국 프로야구에서 최고령 투수가 되었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운드 위에서 공을 뿌리고 있으며, 2009 시즌 종료후 한대화 신임 감독이 젊은 선수들을 위한 지옥훈련이라고 하면서 가게되는 나가사키 마무리 훈련에 고집을 부려서 같이 참가했을 정도의 투혼[30] 을 보여줬다.
2010년 8월 14일 은퇴를 선언했다. 무릎 부상이 은퇴의 결정적인 영향. 은퇴시기의 인터뷰.
9월 3일에 은퇴경기를 치렀는데 조동찬을 상대로 중견수 플라이 아웃, 그렇게 마운드를 떠났다. 이날 선수단과 프런트 모두 '''대성불패'''라고 마킹된 유니폼을 입었다. 자신의 배번 15번은 2011년 전체 1지명으로 뽑은 '''유창식'''이 물려받게 됐다. 한화 구단 '''역대 최고 계약금'''(7억원)을 받고 입단했고 좌완이라는 공통점으로 물려받은 듯하다.[31][32] 영구결번은 본인이 고사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상 참고.
은퇴 후 당분간 '''호주'''에서 야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로써 한, 미, 일, 호주 4개국 야구를 경험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33]
6. 호주 프로야구 리그 시드니 블루삭스 시절
그리고 2010년 11월, 재창설된 호주 프로야구 리그[34] 에서 호주 프로리그 첫 세이브를 기록한다. 영상 포탈[35] 그런데 상대 팀에... '''호주 리그로 파견 나온 롯데 1.5군급 선수들이 섞여 있었다.'''
아무튼 2011년 1월 14일까지 14경기 등판 1승 1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1.37을 기록. 호주에서도 대성불패의 신화를 이어갔다. 좀 더 자세한 스탯을 볼려면 이 곳 참조. 결국 원년 시즌 최고 구원투수 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참고로 처음 호주리그에 들어왔을때 6개 구단에서 모두 영입을 시도했지만 시드니 소재 학교에 다니는 자녀 때문에 시드니 블루삭스로 가게 되었다고.
그러나 2011년 11월 24일까지 4경기에 등판해서 2번의 패전을 기록하였고, 특히 11월 24일 경기에는 9회 말 3점차 리드를 2아웃까지 멀쩡하게 잡아놓고 2타자에게 연속으로 안타를 허용(중견수 앞 단타-좌익수 뒤 투런)하고 다시 주자를 볼넷으로 출루시킨 뒤 내야안타를 맞고 끝끝내 쓰리런을 맞으면서 팀의 승리를 지키지 못하여 결국 이 경기의 패배로 시드니 블루삭스는 리그 최하위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한 부진에도 불구하고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3.38로 '''2년 연속 구원왕'''을 차지하게 되었다. 팀 시드니도 우여곡절 끝에 4위에 랭크,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왼손 타자로는 평균자책점 0.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호주 프로야구 리그 홈페이지 메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시아 시리즈의 흥행을 위해 아시아 시리즈 기간 동안만 퍼스 히트로 트레이드되어 아시아 시리즈에서 등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제 3회 WBC를 앞두고 속보가 나왔는데, 호주 야구협회 측에서 쿠옹에게 '''호주 대표팀으로 참가해서 마무리로 뛰어달라'''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쿠옹은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만약 기사대로 일정이 추진되었다면, 한국 야구계는 최초로 타국에서 뛰는 자국출신 선수를 상대하게 될 수 있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12~13 시즌엔 마무리 자리를 팀 동료 매튜 윌리엄스에게 물려주고 중간 계투 요원으로 뛰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36] 그래도 시즌 중반인 12월 중순까지는 여전히 건재한 모습.
13-14 시즌에는 매튜 윌리엄스가 애들레이드 바이트 팀으로 옮겨, 다시 시드니의 마무리를 맡게 되었다. 시즌 초지만 11월까지 4세이브로 압도적인 단독 선두. 나머지 경쟁자들은 1세이브(...). 게다가 현지시간으로 12월 8일 캔버라 캐벌리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을 하게 되었다. 1아웃만을 잡고 내려갔던 한화 이글스에서의 은퇴경기를 제외하면 오릭스 시절 이후 근 10년여만의 선발등판. 4.2이닝 2실점으로 승패는 기록하지 못했다. 정규시즌이 끝난 시점에서 1승 1패 11세이브로 캔버라 캐벌리의 숀 W. 톨러와 공동으로 세이브 1위를 달성하였다. 호주리그에서의 세 번째 세이브 1위이다. 팀도 정규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캔버라 캐벌리에게 패배하며 4년 연속 3위(...)를 달성.[37] 플레이오프에는 등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즌 두 번째로 최고 구원 투수상을 수상했다. 그야말로 노익장.
2014년 기준 한국나이로 46세이고 만으로 따져도 44세인데, 한국에서 뛰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송진우의 최고령 등판 기록은 넘어섰다. 송진우의 최고령 등판 기록은 43세 2개월 10일. 2014년 3월 20일 벌어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호주 리그 올스타 팀 간의 친선경기에서 7회에 등판해 다저스 타자 안드레 이디어, 후안 유리베, 스캇 반 슬라이크[38] 를 상대로 깔끔하게 3자범퇴시키고 내려갔다.
위 경기 즈음의 인터뷰에 의하면 선수생활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는 '''불러주는데가 없으니 못가죠'''라고 답변.
구단측으로부터 호주 개막전 관람 티켓을 받았지만 공교롭게도 22일 경기 티켓을 받은 거라 23일 류현진의 경기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표를 구해보려고 했지만 모두 매진. 류현진과 사적인 친분을 이용하면 쉽게 표를 구할 수 있었겠지만 자기 편리를 얻자고 선발 등판을 하루 앞둔 후배에게 안 좋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서 22일 경기 티켓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아 다저스 더그아웃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류현진에게 호주 원주민이 쓰는 전통 부메랑과 쿠키를 선물하고, 류현진의 팬인 아들이 산 류현진 모자에 싸인을 받았다고 한다. 아들이 꼭 류현진의 싸인을 받고 싶었다고. 이런 구대성의 사정을 알게 된 MLBAM의 알렉스 피전 해외사업이사이자 MLB 아시아 소셜 미디어 운영자인 SVMG의 밀튼 추가 류현진의 등판 경기를 볼 수 있게 티켓을 마련해줬고, 구대성은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우여곡절 끝에 류현진의 경기를 볼 수 있게 됐다.
2014년 11월 9일 캔버라 캐벌리와의 원정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드러내다가 퇴장을 당했다. 영상. 꽤 거세게 항의를 했는데, 더 큰 문제는 퇴장을 당하고 화를 참지 못하고 경기장 밖으로 공을 던져버린 것.[39][40] 아무래도 징계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기가 끝난 후 구대성은 구심을 찾아가 사과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 공은 야구장을 넘겼다.
2014-15 시즌 구대성은 방어율 2.12, 4세이브로 세이브 4위가 되었고 팀은 '''또다시''' 3위를 달성했다. 겉으로 보이는 성적은 세이브가 적어 못한것 처럼 보일 수 있으나 세부 내용을 보면 회춘하신 모습.[41] 마무리 특성상 이닝수가 적어 정확한 평가를 할 순 없지만 방어율이나 K/BB도 출중.[42] 14~15시즌에는 또한 ABL통산 100탈삼진을 달성 한다. 사실 팀이 시즌 중반까지 하위권에서 빌빌거리고 있었던 원인도 불펜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에 따른 연쇄효과로 구대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 것일 수도 있다.[43] 팀 입장에서는 불안한것 처럼 보이는 구대성을 대체할 불펜투수조차 없었던 것이 뼈아팠던 한 해였다.
2015-16 시즌에는 시드니를 비롯한 어떤 팀의 로스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 과연 이대로 은퇴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사실상 은퇴로 점쳐지고 있다. 그렇긴 해도 일간스포츠 인터뷰(2016년 2월 15일)에서 50살까지 현역으로 더 뛸 생각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호주 야구 리그가 열악하여 리그 선수 상당수가 직장인으로 퇴근하여 야구선수로 뛰는 준실업리그이고 자신도 4달동안 1경기도 빠지지 않고 나와야 2500달러(300만원) 받는 수준이라 돈이 문제가 아닌 그냥 야구가 좋아 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015년 시즌부터 시드니 블루삭스에서 뛰고 있는 임경완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른쪽''' 어깨가 안좋아서 1년 쉬고 내년에 다시 복귀할 예정이라고 한다. 2016년부터 다시 복귀해서 50살까지 선수생활을 하겠다고...#
2016년에는 15세 이하 호주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참석했다.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은 있지만 몸이 안 따라준다는 발언을 해 은퇴로 기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6-17 시즌 시드니 블루삭스에 투수코치로서 로스터에 올라가있는 것이 확인되며 사실상 현역에서 은퇴를 한 것으로 보인다. #
7. 호주 프로야구 리그 질롱 코리아 시절
이렇게 야구선수 생활을 완전히 그만두나 싶었지만 2018-2019 시즌에 다시 도전한다고 한다. 그간 공을 던지지 못했던건 허리 통증이 심해서였다고. 그러나 질롱 코리아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선수로써의 모습은 이번 시즌엔 보기 어려울 것 같았으나... 2018/19시즌 최종 라운드에 선수로 등록되어 2019년 1월 19일 투수로 출전했다. 이 날 성적은 1이닝 1피안타 1사사구 무실점.#. 경기 후 인터뷰에서 팬서비스 차원에서 던진거고 앞으로 선수로 뛸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8. 국가대표 경력
8.1.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구대성 선수가 마무리로 등판하여 당시 일본 최고의 포수 후루타 아츠야 등을 포함하여 6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경기를 마무리한 바가 있다. 이때부터 구대성은 일본 프로팀들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결국 NPB에 진출을 하게 되었다.
8.2. 2000 시드니 올림픽
올림픽 직전, 대표팀 확정 당시에는 선발로 쓴다는 계획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 9월부터는 송진우와 보직을 바꿔 선발로 뛰기도. 하지만 당시 대표팀에 좌완투수가 송진우, 구대성 둘 뿐이었고(...) 결국은 계투행. 이후 이승호가 송지만 대타로 투입되면서 좌완 요원은 세 명으로 늘었다. 올림픽 도중에는 믿었던 정민태가 부진하여 결국 마지막 경기 선발로 기용된다.
당시 임선동은 약체 이탈리아에 털릴 정도로 부진하여 쓰이지 않았고, 정민태도 부진했던데다 예선 일본전에서 발목부상을 당했다. 선발 경험이 있던 정대현-송진우-박석진은 전날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 사용, 이승호-손민한은 그 전전날 나온 상태였다. 진필중-임창용은 마무리로 시즌 중 선발 등판이 한 번도 없었다. 거기에 구대성은 23일 일본전에서 5이닝을 던지고 27일까지 4일을 쉰 상태였다. 19일 쿠바전 이후로 휴식을 취한 김수경도 있었지만 아마시절 일본 킬러의 이미지, 그리고 23일 일본전에서의 역투 때문에 구대성 선발이 매우 유력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18일 호주전에서 진 직후 대표팀 선수들의 카지노 출입 파문이 보도됐다. 여론을 고려할 때 동메달이라도 무조건 확보하여 입국해야 할 상황.
한편 경기 전날 구대성은 심한 담에 걸려 팔을 제대로 뻗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침을 맞고 있는 구대성을 향해 김인식 감독(당시 대표팀 투수코치)이 ''''괜찮냐''''고 묻자 구대성은 ''''그냥 견딜만 해요''''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그럼 내일 선발은 너다''''라고 통보한 뒤 돌아섰다고 한다..... 그리고 구대성은 ''''하라니까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등판했다고.[44][45] 그리고 전설의 '''155구''' 완투승을 이뤄내 후배들의 병역을 책임졌다.[46][47]
참고로 이 경기의 상대투수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구대성이 '''155구 완투승'''을 거둔 와중에 마쓰자카 또한 '''160구 완투패'''를 기록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 기록이다.[48]
어쨌든 이후 구대성의 몸값은 상한가를 치면서 올림픽 직후 MLB로부터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구대성의 대활약을 직접 겪은 NPB 팀들의 추파가 이어진 끝에 구대성은 2001년 NPB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MLB까지 진출하면서 해피엔딩.
8.3.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8.4. 2006 WBC
배영수[49] 에 의하면, 2006년 1차 WBC 대회에서 배영수가 스즈키 이치로를 맞춘 건 구대성이 '''(봉)중근이가 던지면 안 아프니까 더 세게 던지는 네가 맞춰라, 맞추면 만 엔 줄게[50] .'''라고 지시했다고 한다.[51] 배영수가 승부를 걱정하자(당시 1점차였다), 구대성은 '''뒷처리는 내가 한다'''라고 말했고, 진짜 배영수가 이치로를 맞춘 후, 다음 세 타자를 삼진-파울플라이-1루땅볼로 처리했다. 일본킬러 겸 그의 배짱과 자존심을 보여주는 사례.#
9. 연도별 성적
- 통산 성적에서 순위(KBO)는 1,000이닝 이상 기록한 선수 중에서의 순위
10. 보유 기록들
- 7년 연속 20세이브.[52]
- 한국 첫번째 9년 연속 두 자릿수 세이브. [53]
- 역대 마무리 투수 중 유일한 골든 글러브, MVP 수상자.[54]
- 역대 이닝당 삼진 비율 1위.[55]
- 평균 자책점 1위를 두 번 이상 달성한 선수 네 명 중 한 명.[56]
- 투수 4관왕 : 구원투수라는 이유 + 비인기 팀 + 몰지각한 기자들 때문에 요즘은 묻혔지만, 어쨌든 투수 4관왕을 달성한 투수 세 명[57] 중 한 명이다.
- 다승왕-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 투수 세 명 중 한 명.[58][59]
- 7년 연속 세 자릿수 삼진.[60] .
- 호주 프로야구 리그 초대 세이브 왕
- 9회 2사에서 3점차를 뒤집는 만루홈런의 피해자.(1995년 대 삼성전, 상대타자 이동수)
[1] 이 사진속의 각각의 인물들은 KBO에 길이길이 큰 성적을 찍고 은퇴한 레전드 들이다. 심지어 세 사람 모두 우승 반지도 있다.[2] 이 당시 대전고를 이끌었던 선수가 투수는 구대성이었고, 타자는 1987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최우수선수였던 우투좌타의 내야수 조규철이었다. 조규철은 이후 성균관대에 진학한 후 1993년에 신고선수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고, 1999년에 방출되었다.[3] 청룡기에서 6경기 49이닝을 던지기도 했다.[4] 이듬해 같은 학교 선배인 정민태가 14패로 다패왕을 먹는다.[5] 당해년도 입단한 박재홍도 괴물만한 성적이였는데, 평소 악의적인 글을 쓰는 기레기들이 안 좋은 소문을 내어 그는 은퇴하기 전까지도 미운털이 박혀 그만 MVP투표에는 광탈 했지만, 신인상은 받았다.[6] 다만 커리어하이인 1996년에는 선발기록이 2번밖에 안 된다. 그런데 1완투를 했다.[7] 심지어 저 둘도 안되면 한용덕, 이상군도 항시 마운드에 올라갈 준비를 했어야 했다.[8] 마무리 투수이면서도 126이닝이라는 규정이닝을 돌파한 93년의 선동열 김경원이나, 마찬가지로 100이닝을 넘게 소화한 94년의 정명원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였다.[9] 당시 송진우가 완투 1위, 정민철과 이상목이 나란히 6위를 했다. 99년 당시 한화의 완투 경기는 13경기로, 한화보다 완투 경기가 많았던 팀은 15경기를 완투로 해결한 '''롯데'''밖에 없었다.[10] 정민철이 당해년도에 일본으로 진출을 해서 1선발을 믿고 맏길 만한 투수가 이상목과 송진우(야구) 였는데 이상목은 시즌 초 어깨부상으로 시즌아웃, 결국 송진우가 선발과 계투를 오가면서 거짓말 안하고 개고생을 했다. 심지어 구대성 일본 진출 후 선발/계투로도 번번히 출전하였고 이는 정민철이 국내로 복귀 했을 때도 이러했다.[11] 그 5년 사이에 타자는 네 명이 이름을 올렸다.[12] 다른 두 명은 영원한 회장님 송진우와 2001시즌 LG트윈스에서 활동했던 투수 신윤호. 단, 이 기록은 구원승과 세이브를 합쳐서 세이브포인트(SP)로 구원왕 타이틀을 결정했던 2003년도까지만 적용된다. 세이브만으로 최다세이브 수상자를 결정하는 2004년 부터는 다승-구원 동시 석권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13] 물론 당시 아팠음에도 투혼을 발휘한 건 기적이 맞지만, 최소한 선발 투수로서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는 얘기다.[14] NPB도 당시에 일시적으로 타고투저가 시작되는 부분이였다.[15] 1위는 팀 동료 카네다 마사히코. 이쪽은 2.50 ERA로 평균자책점왕 타이틀을 따고도 4승밖에 못 찍었다...[16] 여자 유도 선수인 타무라 료코의 남편 되는 분이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상대 대결인 북쪽의 계순희와 올림픽에서 만났지만, 패배한다.[17] 리그 평균득점으로만 따지면 한국프로야구의 2006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참고로 2006년 KBO는 21세기 최고의 투고타저였다. 어찌보면 막말로 과거 추신수가 있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짐작 떠오르게 하는 팀 타자들...[18] 이 시기는 리그 전반적으로도 갑자기 타고투저 현상이 발생해 홈런 갯수가 증가한 시기이기는 했다. '래빗 볼'이라 불리는, 반발력이 좋은 공을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19] 03 오릭스는 '''팀 실점(927), 자책점(819), 평균자책점(5.95), 피안타(1534) 4개 부문에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기록'''을 기록했을 정도의 막장 팀이었다.[20] 당시 구대성의 에이전트였던 더글라스 조(조동윤)의 일처리에 대해서 구설수가 많았다.[21] 이후 구대성 측에서 더글라스 조가 구대성에게 계약 내용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고 구대성의 돈을 몰래 착복한 적도 있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22] 덤으로 이 해 구대성은 개막전 선발 투수였으므로, 구대성은 말 그대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마지막 시즌의 시작과 끝을 책임진 투수이기도 하다.[23] 이 경기에서 조 벅의 "안녕하십니까?" 한국어 드립이 나왔다. 해설자였던 팀 맥카버가 웃으며 어디서 들었느냐며 묻자 고등학교 동기였던 한국학생이며 좋은 친구였다고 대답한다.[24] 영상을 보면 포수가 번트 커버하려 홈 플레이트에서 좀 떨어져있었고, 구대성이 달려올 때 포수도 홈 베이스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홈 플레이트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이를 노리고 파고 들었다 볼 수 있다.[25] 생각해보시라 랜디 존슨의 키가 2미터 10센티였고, 구대성의 키가 180센티 조금 넘는다. 동영상에서도 보면 키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런데 친 타구는 거의 홈런성 타구였다. 이걸 지금으로 치면 김선빈이 '''장외홈런을 날린 것'''이나 같은 급의 충격이었던 셈이다. 여기에서 나온 폭소도 조롱조가 아니라 놀라움이 겨워 나왔던 리액션이었다.[26] 정확히 얘기하면 랜디 존슨은 좌타자 상대 통산 피안타율이 2할도 안 되는 좌타자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투수로 특유의 딜리버리로 인해 좌타자 입장에서는 공이 몸으로 날아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투수다. 아무리 투수 타석이라서 랜디가 힘을 빼고 던졌다고 쳐도 프로에서 타자 경력이 일천한 선수가 쳐내기 힘들다는 얘기. 그런 선수의 공을 단순 안타도 아니고 장타로 연결했으니 선수들이 놀랄 만도 한 일이었다.[27] 흔히 저 슬라이딩할 때 입었던 점퍼에 야구공이 들어있어 그로인해 부상을 입은것으로 알려져있으나 구대성은 본인의 에세이 책에서 이를 부인했다. 참고로 투수는 어깨가 식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각자의 재량에 따라 베이스 러닝 때 점퍼를 입는 것이 허용된다.[28] 다행히 당시 메츠 불펜투수인 하일먼이 승계주자를 잘틀어 막아 방어율은 높지 않았다.[29] 당시, 한화 투수진은 고참이라 할 만한 불펜이 없다시피한 상황이었다. 몇 명만 예를 들자면 안영명, 마정길, 권준헌, 윤규진, 정민혁 정도...[30] 사실 이런 영웅담따윈 다 필요없고 이 말 한마디면 된다. 위에 언급한대로 '''구대성은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사고로 인해 좌완으로 바꿨다.'''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에피소드.[31] 그런데 유창식은 2014년 시즌 후 이 번호를 '''이용규'''와 교환하여 욕을 배불리 먹었다. 심지어 유창식이 이용규에게 먼저 교환하자고 제안한 모양....이후 유창식은 구단에서 '''승부조작'''과 다른 구단으로 트레이드 되어 얼마 못가 전 여친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고 법정구속되었다.[32] 사실 류현진도 원래 구대성의 배번을 쓰려고 했지만 구대성이 국내로 돌아오자 99번을 썼다.[33] 두번째 투수는 함께 1회 WBC에 나간 후배 '''김병현'''.[34] 1990년대 열렸다가 인기 부진과 크리켓계의 견제로 문을 닫았었다.[35] 등장 브금이 '''오지 오스본의 Crazy Train'''.[36] 구대성은 이 시점에서 팀 내에서 1959년생인 코치 한 명을 제외하면 가장 나이가 많다. '''감독이나 투수코치보다도'''.[37] 호주리그가 13-14시즌까지 창설된지 4시즌이기 때문에, 창설 이후부터 내리 3위만 한 것.[38] 2018년 두산 베어스에서 파레기의 대체 선수로 영입되어 두 달도 안 되어 쫓겨난 반레기가 맞다.[39] 이게 방향이 관중석 쪽이라 국내 기사에선 "관중석에 공 투척" 이라고 기사가 나왔다가 수정되기도 하였다.[40] 물론 관중을 노리고 던진 것은 아니지만, 만약 공이 관중석에 떨어졌다면 더 큰 논란이 생겼을 것이다. 다행히 공은 관중석을 넘어 구장 뒤편의 개울에 떨어졌다고.[41] 피안타율이 높아졌지만 K/BB를 보면 호주리그 진출 후 최초로 딱 3.00을 찍었다.[42] 2010~11시즌에는 2.73을 찍었던 비율이 11~12시즌에는 2.72, 12-13시즌과 13-14시즌에 각각 1.75, 1.77을 찍으며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지만 14-15시즌에 딱 3.00을 기록해내면서 반등에 성공한다.[43] 그 나이에 황충마냥 노익장을 시전 하는거도 무리... 만약 했다면 쿠옹은 호주에서 황충놀이를 했을지도.[44] 근데 이 에피소드는 말들이 조금씩 다른데, 처음에는 구대성이 너무 아파 '좀 힘들것 같은데요.'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우리의 킬인식님께서는 그의 숨은 명언 '''왜 못던지느냐.''' 라고 말했다고. 그 말 듣고 구대성이 황당한 표정으로 웃으며 속으로 '아, 내가 나가야겠구나.' 라고 생각했고 선발등판 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는 말도 있다. 어느쪽인지는 각자 판단.[45] 참고로, 구대성이 아프다고 말한다는 건 '''진짜로 아픈 거다.''' 그럴 때를 빼곤 던지라고 해서 싫다고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46] 사실 0:0으로 진행되다가 8회에 3점 선취득점한 후, 9회 1사 이후 1점을 내줬는데, 투구수도 이미 150구 가까이 된 상황이어서 김인식 당시 대표팀 투수코치가 투수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갔으니, 구대성이 '여기까지 던졌는데 이제와서 강판시키느냐'라고 항의(?)해 계속 던졌다고.[47] 당시 배터리를 이뤘던 홍성흔도 '공이 점점 좋아집니다.' 라고 구대성이 끝까지 던지는 것을 주장했다.....[48] 훗날, 메이저리그 노조들은 이러한 동양 야구를 보고 정신나간 선수 관리라고 펌하하였다. 아시는대로 두 선수 MLB로 진출 했지만, 구대성은 1년차에 부상, 마쓰자카는 3년 차 부터 부상과 부진으로 꼬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구대성 부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리한 주루플레이었지만.[49] 배영수도 당시, 미필이라 병역이 걸린 대회였다.[50] 그것도 한국 원화가 아니라..[51] 언론에 의해 '''왜곡'''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이치로는 30년 발언으로 한국에서 안티가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52] 2018시즌 7년 연속 20세이브를 달성한 손승락과 타이.[53] 두번째는 손승락.[54] 당시 MVP 경쟁자가 한국 최초로 30-30을 달성한 신인 박재홍이었다. 참고로 선동열은 MVP를 받았을 때 선발 투수였다.[55] 2위가 선동열이다.[56] 다른 세 명은 선동열, 류현진 그리고 윤석민.[57] 다른 두 명은 선동열, 윤석민. 이 둘은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 4관왕이다.[58] 당시 구원왕의 기준은 세이브수가 아닌 구원승+세이브수인 세이브 포인트로 구원왕을 가리는 제도였다. 당대 18승 중 절대 다수가 구원승이었기 때문에 중무리를 하면서 구원왕이 가능했던 것.[59] 구대성 이전에 송진우가 달성한 것이 최초였고, 이후 신윤호가 2001년에 달성한 것이 마지막. 21세기부터는 마무리 개념이 제대로 잡혔고, 2004년부터는 세이브 포인트가 아닌 세이브 숫자로 구원왕을 가리게 되어 사실상 거의 달성할 수 없는 기록이 되었다.[60] 마무리 투수 중에서는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