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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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유정(金裕貞)'''
'''가명'''
'''김나이(金羅伊)'''
'''본관'''
청풍 김씨
'''출생'''
1908년 2월 12일
대한제국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1] 증리
'''사망'''
1937년 3월 29일
일제 강점기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학력'''
경성 보성전문학교 중퇴
1. 개요
2. 생애
3. 주요 작품
4. 여담


1. 개요


김유정(金裕貞[2], Kim You-Jeong [3] 1908년 1월 11일 ~ 1937년 3월 29일)은 대한민국소설가이다.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 태생이다.[4] 소설 〈소낙비[5]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1935년에 등단했으며,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크게 호평받았다. 유정은 여자 이름에 주로 쓰이지만, 소설가 김유정은 남자다. 본관청풍(淸風)이며, 별도의 아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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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윗부분의 인물이 김유정이다. 오른쪽 아래는 친구인 이상.
농촌 배경의 토속적 작품이 많다 보니 착각하기 쉬운데, 당대 다른 젊은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시크한 도시인이다.''' 당시 신문에 실린 문답 등을 보면 그야말로 "무심한 듯 시크하게"라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이다. 김유정은 구인회의 회원으로 소설가 겸 시인 이상과 특히 친한 친구였다. 이상은 김유정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김유정〉을 지었을 정도로 특히 김유정을 존경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점은 소설 속의 김유정은 아주 건강하고 활동적인 청년이었으나, 현실의 김유정은 이 작품이 발표되고 1달 후에 사망했다.
이상과 김유정은 서로 병고와 가난으로 고통을 겪자 '''동반자살하기로 약속했으나 김유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후 이상은 자신의 소설[6]에서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밤으로 치러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에게 부상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유정과 이상 - 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 라고 표현할 정도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비록 살고자 하는 욕구가 보다 더 강했던 김유정에 의해 무산됐다고 하나, 그 두 사람은 실제로 1937년 3월 29일에, 이상은 4월 17일에 죽어 18일을 간격으로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둘 다 폐병을 안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참고로 이상은 소문난 골초였다. 이상이 도쿄에서 폐결핵이 악화되어 입원했을 때, 당시 그를 담당한 일본인 의사는 "폐가 아예 없었다"고 말할 정도다.

2. 생애


본관은 조선 시대의 명문 양반 가문 중 하나인 청풍 김씨. 아버지는 김춘식이며 어머니는 청송 심씨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대조가 대동법 실시에 크게 공헌한 명재상 김육이고, 9대조는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이다. 거기에서 계보는 김우명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고향에서는 꽤 명망 있고 부유한 지주였다.[7] 하지만 신분이 낮은 소작인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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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사진의 모습.
이러한 집안의 후원으로 김유정은 휘문고보연희전문에 차례로 입학하여 현대식 교육을 배울 수 있었다. 말년의 병약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유정은 휘문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운동장에서 투포환을 가슴에 맞고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으며 야구 · 축구 · 스케이팅 · 권투 · 유도 등의 스포츠와 소설 읽기, 영화 감상, 바이올린 연주, 하모니카 연주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유정은 연희전문 시절, 소리계에서 유명한 박녹주 명창에 대한 스토킹으로 악명이 높았다. 황당하게도 이게 김유정의 생애를 다룬 글에서 간혹 '짝사랑'으로 미화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 내막은 '''스토킹 범죄'''다. 그의 크나큰 '''흑역사'''이며 이런 과거 때문에 그를 혐오하는 사람도 많다.
어느날 우연히 김유정은 목욕을 마치고 목욕탕 문 앞에 서 있던 박녹주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이후 1928년 봄, 조선극장에서 열린 8도 모창대회에 박녹주 명창이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한 김유정은 대회가 끝난 후 수소문하여 그녀의 대기실에 찾아갔다고 한다.[8] 박녹주와 대화를 나눈 이후 김유정은 본격적으로 박녹주를 연모하게 되어 편지를 통해 정식으로 그녀에게 고백을 했고, 이미 1920년에 원산의 부호 남백우와 살림을 차렸던 박녹주는 깜짝 놀라 김유정을 집으로 불러 "당신은 학생이고 나는 기생(연예인)이니 쓸데없는 생각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점잖게 타일렀다. 그러자 김유정은 "학생과 소리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냐"고 대들며 "사랑이란 국경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때의 일로 그녀의 동생 태술과 친해진 김유정은 그를 통해 각종 선물이나 레코드판에서 뜯어낸 박녹주의 사진 밑에 ‘당신을 연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적힌 편지 등을 박녹주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또한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유정이 이즈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이윽고 김유정은 본격적인 박녹주에 대한 스토킹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척 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라는 편지가 시초였으며, 집착과 망상도 점점 심해져 처음에는 박녹주를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고 한다.
스토킹이 굉장히 심각한 상태였던 어느 날은,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라는 내용의 '''혈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식겁한 박녹주는 다음날 직접 김유정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저는 나이도 돈도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제 잘못이란 말입니까?”라며 한 소리 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1931년 5월 2일매일신보에 박녹주가 아버지의 학대[9]로 인한 스트레스 및 조선극장 지배인이었던 신모씨와의 애정문제로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자 연희전문을 1년전에 중퇴한 김유정은 다짜고짜 박녹주가 입원 중인 병원을 찾아가서 “진짜 죽었는줄 알았어요 만약 당신이 죽으면 저도 같이 따라갈께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병실에 있던 박녹주는 "괜한 기대말고 돌아가라."며 소리쳤고, 그 다음날 박녹주의 집 앞에서 김유정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 직후 박녹주는 순천의 거부인 김종익과 결혼했다. 박녹주는 결혼 이전부터 김종익과 교류를 했었으며 김종익은 이 인연으로 국악계에도 지원을 많이 하였다.
이 외에도 김유정이 박녹주에게 저지른 온갖 스토킹 범죄 일화가 많은데, 자세한 내용은 이 링크를 참고. #
아무튼 박녹주가 김유정의 마음을 받아들일리는 없었고 이후 실연(?)의 아픔을 처절하게 맛본 김유정은 방 안에 틀여박힌 채로 폐인 생활을 하다가, 늑막염치질[10]에 걸리게 되어 형 김유근[11]이 있는 고향 춘천의 실레 마을로 내려간다. 낙향의 원래 목적은 집안의 남은 재산까지 탕진하고 있는 형 유근을 상대로 재산 분배 소송을 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춘천으로 내려간 그는 들병이[12]들과 어울리며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박녹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집시처럼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뒷날 확인되었다.[13] 이후 유정은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도 휴양할 겸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가게 되지만, 이곳에서조차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다가[14] 결국 건강만 더 악화된 채 서너 달 만에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왔는데, 광산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후 김유정은 실레마을의 낙후된 환경을 목격하고 야학을 설립, 교사가 되어 주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인근부락 청년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자기또래 젊은이가 농민회니 부녀회니 만들어 놓고 꺼덕이는 꼴이 아니꼬워 김유정에게 걸핏하면 시비를 걸었고 결국 유정은 고향 마을에서 가끔 싸움판을 벌였다. 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야학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했는데(비교적 건장한 덩치와는 달리 병으로 쇠약해가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을 것이다.) 증리에 살고 있는 당시의 제자들에 의하면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몹시 날래게 움직여 수십 명을 상대해 쫓아버렸다고 한다.[15]
하지만 일제에 의해 얼마 못가서 야학이 강제로 해체되고[16] 유산을 상속받은 맏형 김유근이 방탕한 생활로 자산을 다 날려먹었기 때문에 경성과 춘천의 집을 팔 지경에 이르렀을 정도로 집안이 기운다. 이에 김유정은 경기도 광주[17]에 있는 큰누나에게 얹혀 살게 되나, 이 때 이미 김유정은 건강이 나빠 항상 누워 있는 신세였다. 게다가 누나 집도 가난했고, 공장 노동자들에게 밥을 팔며 살던 김유정의 누나는 기둥서방 남편 정씨[18]와의 심한 불화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병으로 누워 있는 동생 김유정에게 "내가 고생해서 벌어 온 돈이 아깝다. 네 놈은 돈은 못 벌어 오고 집에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냐! 취직이라도 좀 해라."며 풀었다. 물론 김유정의 체력과 건강을 보면 이것은 불가능했던 일. 나중에 김유정이 정 그렇다면 일본에 가서 막일이라도 하며 살겠다고 하자, 큰누나는 유정이 험한 일을 하다가 그나마도 좋지 않은 건강이 더 악화되는 것이 염려되어 유정에게 사과하였고 둘은 화해했다. 그러나 유정은 매형이 싫었기 때문에 거처를 큰누나집에서 다섯째 누나 집으로 옮긴다. 이외에도 옷차림이 남루하다고 병원에서 간호사들에게 무시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쭉 안타깝게 지켜보던 김유정의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안회남[19]은 김유정에게 "차라리 밖에 나가서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니?" 라고 제안하였고 김유정은 비로소 1934년, 본격적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고 구인회에 가입한다. 그 결과 1935년 소설 소낙비 등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1936년에는 잡지「여성」(1936년 5월)에 <그 분들의 결혼플랜, 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라는 공동제목으로 시인 박용철의 여동생 박봉자와 김유정의 글이 나란히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유정은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에게 우발적으로 서른 통의 연애 편지를 쓰는[20] 행동을 하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등단한 지 2년 만인 1937년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21] 2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이 2년동안 김유정은 그야말로 목숨을 불태운 집필 활동을 했는데, 단편작들을 모두 이 때 집필한 것은 물론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장편도 하나 만들었고 심지어는 번역본까지 한 권 만들었다. 이렇게 그가 2년 동안 남긴 작품은 무려 30여 편이나 된다. 그의 열정이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장례는 그의 형제, 조카들, 친구 안회남에 의해 화장으로 치루어져 한강에 유골이 뿌려졌다.
죽기 전인 1937년 3월 18일에 친구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치질과 가난에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말해주며 처절함 그 자체다.[22]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 되고 흥미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譯)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돈이 생기면 우선 30마리를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23]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다만 삶을 다할 때까지도 박녹주에 대한 집착은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거 같은데 김유정이 서른 살 나이로 요절했을때 그의 방안에는 '녹주, 너를 연모한다'는 혈서가 벽에 붙어있었다. 그래서 김유정의 장례식을 치른 안회남이 술에 만취한 채로 박녹주의 집에 나타나 "당신이 박녹주요? 친구는 당신이 죽인 거요.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갔소!"라며 원망했다고 한다. 김유정에게 이골이 날 정도로 시달렸던 박녹주도 그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회고록에서 "김유정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하여 내가 평생 슬하에 자식 없이 살았나 보오. 손이라도 한 번 잡게 해 줄 것을."라는 말을 남겼다.

3. 주요 작품


유명한 작품으로는 〈금 따는 콩밭〉, 〈봄봄〉, 〈동백꽃〉, 〈만무방〉, 〈소낙비〉 등이 있다.[24] 대체적으로 작품에 해학적 요소가 많고, 구수한 사투리와 아름다운 순 한국어 단어를 잘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글이 상당히 재밌다. 봄봄의 장인과 나의 고자되기뿐 아니라 만무방, 금따는 콩밭, 동백꽃 등도 실감나는 서술로 읽는 맛이 좋다. 동백꽃에서 점순이가 말한 "느그 아버지가 고자라지?" 등. 이는 앞서 서술된 박녹주의 영향으로 보인다. 생전 김유정은 박녹주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였던 흥보가춘향가의 대사를 외울 정도로 즐겨 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단편작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배경도 대부분 그의 고향 실레마을이다.
짧은 기간 동안 창작열을 불태운 탓에 거의 모든 단편 작품이 한 권의 단편집으로 집약되어 있다. 1938년 출간된 <동백꽃>에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봄봄>, <만무방>, <금 따는 콩밭> 등 김유정의 대표작이 모두 실려 있다.[25] 또한 2007년에는 김유정의 모든 소설과 수필, 편지, 일기와 번역한 소설을 모두 담은 <김유정 전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다만 현대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아서 가독성은 약간 떨어진다. 김유정의 모든 소설이 담겨 있고 심지어 미발표 원고도 들어 있다. 총 31편.
적잖은 사람들이 일제의 지배 하에 놓여있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조선의 현실을 외면하고 연애소설이나 썼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유정이 일제강점기 농촌의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은 '''해학 속의 비참함'''이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다루는 김유정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김유정이 쓴 소설들을 읽어보면 농촌사회의 암울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만무방〉에선 제 논의 벼를 떳떳이 거두지 못하고[26] 몰래 훔쳐 거둬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 나온다. 처음엔 그리 비극적으로 와닿지 않으나, 한 번 더 생각하고나면 소설 속의 상황이 얼마나 암울한지 눈치채게 된다.[27]소낙비〉에서는 이 해학 속 비극이 더욱 두드러진다. 남편이 도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에게 매음을 종용하여 동네 유지에게 보내는 줄거리가 해학적이고 향토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그 중심에는 생존을 위해 윤리마저 버린 일제강점기 농촌의 비참한 현실이 깔려 있다.
오히려 〈동백꽃〉이나 <봄봄>이 유명하거나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던 이유도 다른 작품들보다 덜 암울하고 덜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김유정의 단편들에서는 가난 때문에 매춘을 하거나 가정폭력이 발생하는 장면들이 자주 나타난다. 〈금 따는 콩밭〉만 해도 해학적이지만 상황은 정말로 허탈할 정도로 망한 상황에 친구며 부부끼리 치고 박고 싸우며, 위에서 언급된 만무방이나 소낙비 같은 부류는 아예 등장인물이 도둑질, 매춘을 권하는 내용이 있다. 〈산골 나그네〉는 술집 작부까지 하다가 혼인 혼수를 들고 본남편과 도망가는 이야기이고,[28] 〈따라지〉나 〈땡볕〉 같은 작품은 아예 작품의 설정부터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따라지〉는 셋방살이하는 인간군상들과 주인집과의 기싸움을 그리고 있고,[29] 〈땡볕〉은 남편이 병든 아내를 지게에 짊어지고 병원을 찾아가는 이야기[30]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그나마 밝다고 꼽히는 〈동백꽃〉과 〈봄봄〉도, 엄밀히 말하면 지주의 횡포와 착취에도 저항할 수 없는 계층의 상황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더 슬픈 사실은 여기서 소작농이 마름을 대하는, 즉 갑이 을을 대하는 태도가 현대인들에게도 쉽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마저도 '주인집 딸이라서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설명에 별다른 의문없이 수긍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해학적이고 풍자적일 뿐, 이야기의 시작점에는 당시 농촌~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과 현실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 여담


은근히 모에계통에선 시대를 앞서간 작가 중 하나. 단편소설인 〈동백꽃〉의 등장인물 점순이만 봐도 츤데레를 포함해 은근 많은 모에요소를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런 시대를 앞서간 모에요소나 개그신을 넣은 것 외에도, 위에도 말했듯이 해학 뒤에 있는 비참한 시대상을 작품 안에 담아내면서 은연중에 보여주는 표현기법도 매우 훌륭한 작가다.
작품의 주 배경이 되는 춘천시 신동면 증리(실레마을)에 김유정문학촌이 조성되어 있다.[31] 기념관 외에도 소소한 재밋거리들이 많고, 잘 짜여진 행사도 자주 하고 있으니 근방에 갈 일이 있다면 한번쯤 둘러 보는 것도 좋다. 여담으로, 해당 마을의 촌장은 우상의 눈물로 유명한 춘천 출신 소설가 전상국이다.
이 김유정문학촌에서 5분만 걸어가면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경춘선 김유정역이 나온다. 원래의 이름은 신남역이였으나, 마을 주변이 김유정 관련 관광지로 조성되다 보니 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역명까지 바꿔 단 케이스다.[32] 인물 이름을 역 이름으로 사용한 한국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 복선전철 개통과 함께 바로 옆에 새로 지은 한옥 스타일의 역사로 옮겼다.
2017년 6월 1일 지식채널e에서 김유정에 대해 다루었다. 해당 타이틀의 제목은 ''''약골 청년의 마지막 봄''''이다. 보러 가기
2018년부터 일부 인터넷몰과 여러 대형서점에서는 한국과 외국의 여러 유명 작가 · 작품의 이름을 따온 향수[33]들을 판매하고 있는데, 그중 김유정의 이름을 딴 향수도 있다. 참고 향의 경우 달달한 꽃향기가 난다. 상품명이 김유정 - 봄봄인데, 아마 봄봄의 분위기를 담기 위해 향수의 향을 봄 느낌이 나는 달달한 꽃향기로 설정한 듯하다.[34]
[1] 후에 신동면으로 개칭된다.[2] 1999년생 아역 출신 배우 김유정과 한자까지 같다.[3] 배우 김유정은 Kim YooJung으로 로마자 표기에는 차이가 있다[4] 헌데 김유정의 셋째누나 김유경은 김유정이 춘천 실레마을이 아닌 서울 태생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가족은 서울에도 큰 집이 있었다.[5] 황순원소나기가 아니다.[6] 〈실화〉(失花)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내용을 보면 소설이라기 보다 이상 자신의 말년을 각색해서 옮겨둔 듯 한 내용이라, 사실상 수필에 가깝다.[7] 그 유명한 만석꾼 집안이다. 할아버지 김익찬이 사마좌임금부도사(司馬座任禁府都事)를, 아버지 김춘식이 사마좌임금부주사(司馬座任禁府主事)를 지냈다. 김윤식의 조카뻘이다.[8] 기록에 따르면 당시 관계자를 제외하고 박녹주의 대기실에 출입한 사람은 훗날 부통령까지 되는 일제시대의 기업가 김성수의 부친이자 박녹주의 후원자인 김경중과 김유정 단 2명이었다고.[9] 박녹주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에 노름꾼인 인간 쓰레기로, 그녀가 어려서부터 소리를 해 번 돈을 죄다 날려먹었고 14살이 되자 2백원 받고 기생으로 팔아넘긴 인간이다. 이후로도 친부라는 이유로 끈질기게 그녀를 착취했다.[10] 사실 형제들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치질 수술을 받았으나, 당시 의학의 치료기술이 떨어지다보니 수술을 받아도 치질이 다시 재발하기 일쑤라 소용없었다. 또한 가난해서 제대로 된 치료와 관리를 하지못하다보니 더욱 악화되어 죽는 순간까지 치질로 고통받았다.[11] 김유정을 비롯한 다른 식솔들에는 관심도 없이 물려받은 재산을 혼자 탕진하여 김유정이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죽는 데 기여한 원인 제공자이다.[12] 당시 농촌에서 병에 담긴 술을 갖고 다니며 농민들에게 술을 파는 여성. 물론 술만 팔지는 않았다.[13] http://www.kimyoujeong.org/Kimyoujeong/GeumByeong[14] 이곳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돈을 다 써 버린 김유정은 이후 말 그대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여생을 보낸다.[15] http://www.kimyoujeong.org/Kimyoujeong/GeumByeong[16] 당시 일제는 야학이 독립 운동을 촉진시킨다며 금지하고 탄압했는데, 그렇다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인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야학탄압 때문에 조선의 문맹률은 일제강점기 내내 70%를 웃도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17] 정확히는 현재 하남시 상산곡동인 중부면 상산곡리. 현재 해당 자리는 중부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 사라져버렸고, 그 옆에 사충서원이 들어서 있다. (관련자료)[18] 일도 안하고 놀고 먹으면서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유정을 헐뜯으며 나가라는 압박을 주는 인간말종이었다.[19] 소설가이자 문학 평론가로, 우화 신소설 금수회의록으로 유명한 안국선의 아들이자, (후에 월북하는)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육촌형이다. 김유정이 '닭과 뱀을 고아먹고서야 살아날 것'이라고 했던 아래의 처절한 편지가 바로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였다.(이 편지에는 안회남의 초명이었던 필승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다.) 안회남은 이 편지를 받고는 안타까워했고 나중에 답장도 해주기 전에 김유정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장례식장으로 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김유정의 장례식 비용 일체를 부담하고 김유정의 미완성 유고를 유족으로부터 전달받기도 했다. 6.25 전쟁 중 월북했으며, 휴전 후 총살당한 임화의 일파로 몰려 숙청되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행적이 알려진 1954년 이후에는 언제 어디서 생을 마쳤는지에 대한 말년의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20] 물론 모두 반송당했다. 박봉자는 같은 해 김유정 자신도 알고 지낸 사이였던 문학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한다. 그리고 김유정은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했다.[21] 이때 그 고통이 심각했는데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고 치질이 악화되어 잠도 못자고 비명을 질렀으며 가래와 기침이 계속 되었다.[22] 무엇보다 이 편지에서 당시 김유정이 지병의 악화로 죽어가고 있음을 알수있다.[23] 치질로 인해 고통받으며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못받는것을 의미한다.[24] 참고로 〈봄봄〉과 〈동백꽃〉은 모의고사에서 자주 출제되는데, 내용에 대한 이해를 물어보는 문제보다는 되레 순우리말의 뜻을 묻는 문제가 더 많다.[25] 그 외에도 <아내>, <산골>, <산골 나그네>, <따라지>, <떡>, <솟>, <두꺼비>, <봄과 따라지>, <금>, <정조>, <야앵>, <가을>, <심청>, <이런 음악회>, <연기>, <슬픈 이야기>, <땡볕>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총 수록작의 수가 21편이다.[26] 수탈을 막기 위해서.[27] 형은 날백수로 지내고, 동생은 아픈 아내를 데리고 농사를 짓지만 수탈 문제로 날이 갈수록 사람이 피폐해져 간다. 오히려 일을 안 하고 손가락질 받는 형이 마음은 편한 역설적인 상황.[28] 애초에 혼인까지 하게 된 것도 산골주막 주인집이 선채금 30원을 못 줘서 원래 혼인이 파토났기 때문에 오갈 데 없는 여자를 데리고 살 생각을 했던 것이다. 돈 없으면 결혼도 할 수 없는 세태를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29] 신경질적인 누나에게 얹혀 사는 가난한 문인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김유정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투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지라는 말은 요즘도 쓰이는 은어의 뜻 그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물건이나 사람들을 의미한다.[30] 희귀병이면 대학병원에서 돈도 주고 병도 고쳐준다(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함.)는 말에 병든 아내를 지게에 짊어지고 힘든 길을 가지만, 아내의 뱃 속에 죽은 아기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는 제 병 고치는데 돈을 왜 주냐는 핀잔만 듣고 돌아선다. 죽어도 배는 못 째겠다며 집에 가자고 하던 아내는 빌린 쌀과 남편 빨래 걱정 등을 하며 당부를 하고, 남편은 그것을 유언 마냥 들으며 묵묵히 지게에 아내를 짊어진 채 땡볕 아래를 다시 걸어 돌아간다는 이야기다.[31] 경춘선 김유정역 인근에 있다.[32] 역 이름이 지역명과 맞지 않았던 탓도 있다. 개통 당시에는 신남면이었으나 얼마 후 신동면으로 바뀌면서 지명이 사라졌다.[33] 정확히는 책에 뿌리는 향수인 '북퍼퓸'. 물론 사람 몸이나 옷에 뿌려도 향기는 남는다.[34] 같은 북퍼퓸에 속한 김소월 향수도 근데 달달한 꽃향기가 난다. 미묘하게 다르긴 한데 맡아보면 비슷한 느낌을 숨길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김소월 향수의 경우 상품명이 '김소월 - 진달래꽃' 이다보니, 봄봄처럼 똑같이 꽃향기를 베이스로 향수를 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