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역사
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마한의 54소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었다. 이후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이후 매홀군(買忽郡)으로 개칭되었다.
진흥왕에 의해 신라에 편입됐고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었다.
2. 고려
태조 신성대왕 때인 940년 수주군(水州郡)으로 개칭하였다. 강종 원효대왕의 등극 전 봉지가 바로 현 수원시였다.[1]
3. 조선
1413년(태종 13년)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개편되어, 현재의 수원이란 명칭이 확립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수원은 정조(正祖)가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華山/花山)으로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있던 수원부 치소와 시가지를 현재의 수원화성으로 옮겨버리고, 그 자리에 현륭원을 조성한 것. 그 때문에 연구가들이 옛 수원의 연구에 애를 먹고 있다.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송산동 일대) 지역이 바로 옛 수원의 중심지였다.[2] 그 와중인 1789년 광주유수부의 일용면[3] 과 송동면[4] 을 편입하였다.[5]
이원(移園)과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시 묵었던 화성행궁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자신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수원에도 배치시키고, 상업을 발전시켰다. 수원 역시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종2품을 두던 유수부였지만, 수원유수는 정2품으로 한성부판윤과 동급이었다.[6] 그러나 정조의 죽음으로 수원은 쇠퇴하고, 정조가 수원에 베풀던 특권 역시 폐지되었다. 다만 유수부라는 지위는 박탈당하진 않았다...만 이마저도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인해 인천부 수원군으로 강등된다(...)
4.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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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당시 수원시 일대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으로 현재의 수원 생활권이 확정되었다. 남쪽의 넓은 지역[7] 을 진위군에 내주고, 남양군의 육지 지역[8] 과 안산군 일부, 광주군 일부를 가져왔다. 대충 의왕시와 안산시 남동부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 이 시기에 옛 수원군과 남양군 시절 면들의 통폐합이 이루어져, 남부면·북부면이 수원면으로, 태촌면·장주면이 태장면으로, 안녕면·용복면이 안용면으로, 일용면·형석면이 일형면으로, 음덕리면·둔지곶면·화척지면이 음덕면(해방 이후 남양면으로 개칭, 현 화성시 남양읍) 등으로 통합되었다. 이 중 현재의 수원시 영역은 1914년 당시 수원면(팔달구 매산동, 매교동, 행궁동 일대), 일형면(장안구 전역 및 권선구 구운동, 서둔동, 팔달구 고등동, 화서동 일대), 안용면 일부(권선구 서남부), 태장면 일부(권선구 권선동, 팔달구 동부 및 영통구 일대) 등의 영역에 해당된다. 당시 화성행궁 내의 낙남헌을 수원군청으로 사용했다.[9]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에 수원에 일본식 지명이 도입되었다.
1936년 일형면, 안용면, 태장면의 각 일부를 수원읍에 편입하였다. 이 때 일형면의 잔여지역은 북쪽의 의왕면과 통합하여 일왕면으로 개칭되었다.
1941년, 성호면이 오산면으로 개칭되었다.
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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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14일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면서(바로 다음날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시'''로 개칭), 수원군의 잔여지역이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이와 동시에 수원의 일본식 지명이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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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화성군 태장면, 안용면, 일왕면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시역(市域)이 대폭 확장되었다.[10] 1967년 서울특별시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됐으며[11] , 1970년 북수동(행궁동) 후생병원 자리에 있던 화성군청이 오산읍으로 이전됐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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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 하리를, 1987년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 호매실리(현 금호동 지역)를 편입[13] 하면서 시역을 계속 넓혀 갔다.
1988년 구제가 실시되어 장안구와 권선구로 분구되었다. 1993년 장안구와 권선구의 일부를 팔달구로 분구하였다.
1994년 12월과 1995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화성군 반월면 입북리, 당수리, 태안읍 영통리, 신리, 망포리 및 용인군 기흥읍 영덕리 일부(현 영통지구의 황골마을 및 청명마을 일부)를 편입했다.
2003년 팔달구 일부를 영통구로 분구하였다.[14]
2012년 왕송호수공원을 중심으로 의왕시와의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2019년 9월,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일부(청명센트레빌, 영통업타운코트더테라스 일대)가 영통구 영통동에, 영통구 원천동 일부(나촌말삼거리 일대 중 중부대로 북쪽 지역)가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에 맞교환 방식으로 편입돼 경계가 조정됐다.
2020년 7월 24일, 화성시 반정동 일부(땅거스러미 형태로 나있는 반정4지구 예정 일대)가 영통구 망포동, 영통구 신동 및 권선구 곡반정동에, 영통구 망포동 일부(망포2지구 일부, 망포고등학교 서쪽 지역)이 화성시 반정동에 맞교환 방식으로 편입돼 경계가 조정됐다.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되고, 해방 이후 6.25 전쟁으로 화성마저 총탄과 포격 등으로 심한 피해를 입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화성행궁의 대부분이 복원된 상태이다.
6. 관련 문서
[1] 당시는 한남군(漢南郡), 작위는 한남공.[2] 즉, 정조의 수원화성 축조 이전까지 오리지널 수원의 중심지는 현 수원시가 아닌 화성시 화산동 일대였다. 마침 오리지널 수원의 중심지 근처인 화성시 봉담읍에 수원대학교가 있다. [3] 현재의 장안구 영화동, 조원동, 상광교동, 하광교동, 송죽동, 정자동, 파장동 등[4]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송라리, 원리[5] 견아상입지여서 성남시나 광주시 및 서울특별시 강남구와 강동구 등 성남/광주권 지역이나 서울 강동권 지역과는 연계성이 거의 없다. 당시 송동면은 광주군 북방면, 성곶면, 월곡면과 접했고, 일용면은 의곡면, 왕륜면에 접했으며, 이 지역들은 모두 인접한 타 군으로 편입되었다.[6]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수원광역시를 사실상 수원특별시로 승격, 취급한 셈이다. 물론 당연히 오늘날의 수원은 특별시는 커녕 광역시도 못 되는 상황이라...[7] 현재 평택시 안중읍·포승읍·오성면·청북면·현덕면의 거의 전부와 고덕면의 일부, 서탄면 황구지리에 해당하는 지역.[8] 제부도와 국화도 일대를 제외한 도서 지역(대부도, 영흥도 등)은 통째로 부천군에 이관되었다.[9] 이후 (시기 미상) 북수동(행궁동) 후생병원 자리로 이전됐다.[10] 이 때 태장면, 안용면의 잔여지역은 통합되어 태안면(훗날의 태안읍, 현재의 병점 일대)이 되었으며, 일왕면은 옛 의왕면 영역만 남게 되어 다시 의왕면으로 명칭을 회복하고 시흥군으로 넘어갔다.[11] 당대의 지역구 국회의원 이병희가 삭발시위까지 하여 유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2] 이후 화성군청은 2000년 남양읍으로 이전하였고, 현재 이 자리에는 롯데마트 오산점이 들어섰다.[13] 사실 금곡동이나 호매실동은 매송면과는 별로 연관이 없다. 칠보산을 넘어가야 매송면사무소가 있는 어천리가 나오기 때문에 오히려 구운동지역과 더 연관이 있다.[14] 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장안문이 장안구에 있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영통구가 분구됨과 동시에 북수동, 장안동, 신풍동, 화서동이 팔달구 소속으로 개편되었기 때문. 이외에도 매교동, 교동, 매산로1~3가, 고등동이 권선구 소속에서 팔달구 소속으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