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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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시역 확장의 역사. 현재의 법정 경계를 기준으로 제작된 관계로, 동-리 단위 이하의 자잘한 경계변화는 생략되었다. 적색 년도는 편입 이후에 환원된 년도.[1]
5. 대한민국 (대구직할시 승격 이전)
6. 대구직할시 승격 (1981년 7월) 이후


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대구의 옛 이름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 이름인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다. 즉, 원래는 이 지역을 부르던 순우리말이 있었으나,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한자로 그 음을 빌려 표기하다가 가장 널리 쓰이는 '대구', '달구벌'이 정착된 것이다. 달구벌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 신라계림 사상에서 기원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에서 유래했다(즉, '닭의 벌판-닭벌'을 음차한 게 '달구벌')는 연구자료가 있다. 그래서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수 있다. 참고로 대구시를 상징하는 새는 독수리이다.[2] 다만, '달구' 또는 '달구화'와 같은 지명이 오늘날 확대된 대구광역시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현대의 대구광역시 중구와 남구 일부분에 해당한다.
대구광역시 전역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규모의 지석묘(고인돌)군과 신석기-청동기 시대 유물의 존재로 말미암아, 일찍이 군장 국가 형태의 소부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고대 삼한시대에 들어서는 진한의 소국인 다벌국, 혹은 달구벌국(혹은 卓國)이었으며, 서기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244년 조분 이사금 때 달성(現 달성토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261년 첨해 이사금 때 완공되었다. 달성은 경주 월성과 비슷한 구조이며, 해자를 포함했다. 달성 완공과 함께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임명했다. 이후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통일신라시기에는 9주 5소경양주 소속이었다. 이 때 지금의 대구 땅에는 위화군(喟火郡, 수성구), 그리고 위화군의 소속 영현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중구(대구)), 팔거리현(八居里縣, 북구(대구) 칠곡동), 다사지현(多斯只縣, 달성군 하빈면), 설화현(舌火縣, 달성군 화원읍) 이 있었다.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 달구화현은 대구현(大丘縣), 팔거리현은 팔리현(八里縣),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으로 고쳤다. 보다시피 지금까지 사용하는 지명이 이 때 많이 등장했다. 다만 신라 때는 이전 지명과 경덕왕이 고친 지명이 혼용되어 달구벌, 달벌 등의 이름도 계속 사용되었다.[3]
689년 신문왕이 이곳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기존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장보고군이 민애왕의 신라 관군을 상대로 20배 병력을 격파한 달벌대전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2. 고려


대구광역시의 지명 문서들에 가면 볼 수 있는 태조 왕건의 안습한 굴욕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 한눈에 보려면 여기로.
대구현 지역은 경산부(현 성주군)에 속했다. 수창군을 수성군(壽城郡)으로 고쳤고 지금의 수성구 이름으로 이어진다.

3. 조선 ~ 대한제국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한자가 공자이름구(丘)와 같다고 하여''' 개칭 떡밥이 생겨났다. 영조 때는 반려되었으나, 정조 초기 1783년 대구(大邱)로 한자를 바꿨는데 이 역시 순조 때까지도 함께 쓰이다가 이후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는 물론 대구(大邱)로만 쓴다.
중국어권에서는 간혹 구(邱)와 구(丘)를 헷갈려 "大丘"로 쓴 사례도 있다. 둘 다 뜻이 언덕인데다 현대 중국어 발음에서도 발음(qiu)과 성조(1성)가 같다. 일본어로는 그쪽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카타카나로 "テグ(大邱)"로 쓰는데 간혹 일반인의 경우 한자를 헷갈려서 글자꼴이 비슷한 "대저(大邸)"로 쓰는 사례도 발견된다.
대구의 진산(鎭山)인 달성산의 이름은 옛 이름 '달구벌'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이 정식 행정구역 명칭으로 남아 있어 도시명의 유래를 잇고 있다.
1419년(조선 세종 원년) 대구현·수성현(수성구 일대)·해안현·하빈현(달성군 하빈면, 다사읍 일대)을 통합하여 대구군으로 승격하였다.
1466년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01년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경상감영은 역사가 참 복잡한데, 조선 초기에는 경주부에 있었다가, 태종 7년(1407년)에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우도로 나누면서, 좌도는 경주부, 우도는 상주목에서 관할하도록 했다. 그러다 여러가지 부작용 때문에 다시 경상좌/우도를 하나로 합치며 경상감영을 상주목에 두었다. 그 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분리됐다 합쳐졌다를 반복하면서 성주의 속현 팔거현(現 칠곡군), 대구도호부, 안동대도호부 등으로 이전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 대구도호부에 경상감영이 세워졌는데,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대구도호부는 아예 개발살이 나고(...) 감영은 안동대도호부로 옮겨갔다. 그러다 1601년, 안동대도호부가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대구도호부에 세워졌고 그 이후로 경상감영은 쭉 대구도호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참고로 대구는 경상도(영남) 전체를 보았을 때 거의 정중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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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대구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현재의 청도군 각북면, 각남면, 풍각면까지도 대구부 관할에 있었으나, 1906년 청도군으로 편입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23부제로 개편되었을 때 대구부 소재지가 되었다(대구 지역은 대구부 대구군, 현풍군). 1896년 다시 13도제로 바뀌면서는 경상북도 관찰사 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풍각면, 각남면, 각북면을 청도군으로 이관했다. 또한 현풍군의 낙동강 북부 지역을 고령군으로 이관했다.

4. 일제강점기


조선말까지만 해도 대구는 경상도에서 경주, 상주, 진주보다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의 부설로 인해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 수운의 교차점에 위치한 대구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반면 경부선 철도 노선에서 소외된 경주, 상주, 진주는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일제시대말 대구는 서울, 평양, 부산에 이은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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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4월 1일 실시된 부군면 통폐합으로 인한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부는 현재의 중구 일원만 '''대구부'''로 남고, 나머지 영역은 현풍군과 통합하여 '''달성군'''으로 분리되었다. 일본어로 대구는 たいきゅう(다이큐), 달성은 たつじょう(닷쇼)라 발음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달성군 성북면 남부, 달서면, 수성면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이 때, 성북면 북부(금호강 이북)는 공산면에 편입되었고, 달서면에 속했던 감삼동이 성서면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해안면은 동촌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때부터 공산면과 동촌면은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
이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 동양의 모스크바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산주의 색이 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짙은 지역이었다.[4] 1946년의 대구 10.1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상감영공원에 대구 10.1 사건의 흔적이 남아 있다.

5. 대한민국 (대구직할시 승격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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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해방 이후 1949년 대구부(府)에서 '''대구시'''(市)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잠깐동안 임시수도로 격상되어 정부기능이 집중된 적이 있었으나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이 대구역에 포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다시 부산에 임시수도 자리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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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1월 달성군 동촌면, 공산면, 성서면, 월배면, 가창면의 5개 면을 대구시에 편입하여 대구시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었다. 이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게리맨더링이라 한다. 그러나 5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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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동촌면을 제외한 4개 면[5]을 달성군으로 복귀시켜 대구시의 영역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이 때 월배면과 성서면의 경계는 1958년과는 다소 달라졌다.[6] 또한 같은 해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 동구, 남구, 서구, 북구의 5개 구가 설치되었다. 참고로 공산면은 다시 외롭게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가 ,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 때 재편입되었다.
1973년 7월 달성군 화원면 대곡리가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1975년 10월 서구 원대동 일부, 노곡동, 조야동 및 동구 신암동 일부가 북구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북구로 편입된 원대동 일부는 노원동이 되었고 신암동 일부는 대현동이 되었다. 달성군 월배면은 1979년, 성서면은 1980년에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980년 동구 남부가 수성구로 분구되었다. 동시에 남구의 남산동과 대봉동 북부가 중구에 편입되고 남구에 잔류한 대봉동은 이천동으로 개칭되었다

6. 대구직할시 승격 (1981년 7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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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직할시 시절의 휘장[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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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7월 대구직할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상황.
1981년 7월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달성군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및 경산군 안심읍[8], 고산면[9], 칠곡군 칠곡읍[10]을 편입했다.
1987년 1월에는 동구 연경동이 북구에 편입되고, 서구 본리동 일부가 남구에 편입되어 본동이 되는 등 각 구 사이에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88년 1월 1일에는 서구와 남구의 각 일부[11]를 분리하여 달서구를 설치했다.
1995년 '''대구광역시'''로 개편됨과 당시에 경상북도 관할이었던 달성군을 편입하여 산하 기초자치단체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 때 달성군보다 상대적으로 연담화가 잘 되어 있는 경산시를 편입하는게 더 나았을 선택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1995년에 칠곡군 동명면, 지천면 편입과 함께 경산시 편입이 거론된 적이 있다.[12] 달성군이 산지가 많고 지리상으로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어서 경산시를 편입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당시 경산시는 이미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어 도세 감소를 우려한 경상북도의 반발 때문에 경산시를 대구광역시로 편입시키기는 어려웠다는 의견이 있다.
[1] 참고로 이 지도에는 오류가 있는데 1958년이 아닌 1957년이다. # 다만 해당 사이트에서는 1957년 행정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이 공포됨과 동시에 변경이 시행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대구광역시청에서는 1957년 해당 법률의 공포로 1958년에 변경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2] 그래서 대구 FC가 창단될 때 팀명을 '대구 이글스'로 정했다가 야구팀이냐는 반대여론이 거세서 그냥 평범하게 대구 FC로 팀명을 바꿨다.[3] 이 때문에 현대 대구의 지명 중에도 과거 달구벌과 달벌 등에 삽입된 '달(達)'자를 넣은 곳이 있다. 대표적인 지역이 달서구달성군.[4] 같은 시기 평양은 기독교 색이 짙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다.[5] 단 파동, 서변동, 동변동, 평광동은 대구시에 잔류하였다.[6] 원래 성서면 소속이었던 송현동이 이때는 월배면으로 편입되었기 때문.[7] 해당 휘장은 일제강점기 대구부 시절부터 사용된 휘장이다. 참고 현재도 맨홀 등에서 드물게 볼수 있다.[8] 현재의 동구 안심 1~4동 및 혁신동[9] 현재의 수성구 고산 1~3동(시지지구)[10] 현 북구 칠곡지구 일원[11] 서구 중 성서지구, 성당동 전역과 내당동 일부(현 두류동), 남구 중 월배지구 전 지역[12] 이것도 단지 카더라 수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시 내무부 개편안 문서에서 대구시역 확장안의 하나로서 포함되었던 것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