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1. 생애
1.1. 태어나자마자 불행의 시작
루돌프 황태자는 1858년 8월 21일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년 8월 18일~1916년 11월 21일)와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1837년 12월 24일~1898년 9월 10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루돌프의 할머니이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어머니였던 조피 대공비는 루돌프의 큰누나 조피[1] 가 부모와 동행한 헝가리 여행 중 장티푸스로 죽자 이를 빌미로 루돌프와 루돌프의 작은누나 기젤라를 자신이 직접 양육했다. 가뜩이나 시집살이로 힘겨워하던 엘리자베트는 큰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작은딸과 아들까지 시어머니에게 뺏기는 바람에 우울증이 심해졌고, 아이들 양육에 아예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 때문에 기젤라와 루돌프는 친할머니 밑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1.2. 행복한 적이 없었던 어린 시절
실질적으로 친손주의 양육을 담당한 조피 대공비는 루돌프가 장차 황제가 될 몸이라는 이유만으로 '''7살 때부터 군대식 보육교사'''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총소리에 놀라 기상, 차가운 눈발 걸어가기, 찬물 끼얹기, 루돌프 혼자 내버려두고 알아서 집까지 돌아오기 등 '''7살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교육이었다. 이 때문에 루돌프는 자라면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2]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격무에 시달린 데다가 엘리자베트는 자신의 정신병 때문에 여행을 빌미로 밖으로만 나돌았기에 부모의 사랑과 관심은 받지 못한 채 친조모가 후계자 교육이랍시고 실시한 학대에 시달린 셈. 그래도 어머니 엘리자베트가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이에 대해 프란츠 요제프에게 강력히 항의했고, 그런 아내에게 탈탈 털린 프란츠 요제프도 이를 수락하여 조피 대공비를 설득시킨 끝에 교관을 관대한 사람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2살 터울의 작은누나 기젤라와의 우애만이 힘이 되어 주었다고.
1.3. 갈등의 가속화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친독일적 성향의 황제이고, 루돌프 황태자는 친프랑스적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에 '''항상''' 갈등이 잦았다.
가정에 소홀한 워커홀릭에 할머니 조피 대공비에게 찍소리도 못했던 아버지와 대화할 시간이 '''극히''' 없어서 서로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해 갈등은 깊어만 갔고,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궁정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안그래도 예민한 정신이 불안정해진 관계로 부자 관계를 조정해보려는 노력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니들이 알아서 해라' 하는 식으로 방관하며 자신의 심신을 달래고자 도피성 여행이나 다녔다. 자연히 이들 부자의 불화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트가 잘못했다는 얘기도 많은데 사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시집왔을 때부터 어머니 조피 대공비와의 갈등이 있었던 엘리자베트를 위해주거나 어머니와 아내 사이를 중재하기는커녕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서 그러는 거니 당신이 참으시오."'''라는 식의 무책임으로 일관했기 때문. 아들의 저러한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조피 대공비는 아들이 골랐던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며느리에게[3]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킬 수 있었고, 엘리자베트는 남편과 가정에 진절머리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엘리자베트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프란츠 요제프나 조피 대공비 역시 문제가 많았으니 루돌프의 인생 전반부는 누구 한 사람만 탓할 것 없이 '''주변 어른들이 다 잘못이 많았다''' 한마디로 정리된다.
1.4. 사랑 없는 결혼, 그리고 갈등의 절정
루돌프 황태자는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 클로틸드 루이즈 헤르민 마리 샬로트(1864년 5월 21일~1945년 8월 23일)와 결혼했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의 루돌프 황태자와 외향적인 성격의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성격 차이로 많이 부딪히고 말았다. 거기다 스테파니 또한 시어머니 엘리자베트에게 극심한 시집살이를 당했고[4] , 당시에는 신생 국가였던 벨기에의 공주였기에 신분이 낮다고 여겨져서 황실에서도 겉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 사이는 루돌프 황태자와 프란츠 요제프 1세와의 사이만큼이나 악화되었다.[5] 사실 루돌프는 결혼 전부터도 스테파니가 '별로 예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다'며 탐탁치 않아했지만 이미 다른 신부 후보들[6] 과의 혼담을 전부 내쳐버렸기에 남은 상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스테파니와 결혼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테파니가 고대하던 아들 대신 딸 엘리자베트 마리(1883년 9월 2일~1963년 3월 16일)를 낳은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병약해져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못하게 되자 부부관계는 극도로 나빠졌다.[7]
2. 황태자의 러브스토리, 마리 폰 베체라
2.1. 갈등의 폭발, 사랑을 만나다
루돌프 황태자는 사랑 없는 결혼에 신물이 났고 가족사에 신경을 안 쓰고 어머니처럼 방황하다가 라리쉬 백작 부인에게서 알빈 폰 베체라 남작의 딸 '마리 알렉산드린 프라인 폰 베체라(Marie Alexandrine Freiin von Vetsera, 1871년 3월 19일~1889년 1월 30일)'를 소개받았다.
라리쉬 백작부인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친정오빠 루트비히 빌헬름(1831년 6월 21일~1920년 11월 6일)이 귀천상혼해서 얻은 딸로 루돌프 황태자에게는 사촌이었다. 아무튼 루돌프 황태자는 마리와 사랑에 빠졌고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들의 사랑을 반대했다. 루돌프 황태자는 당시의 교황 레오 13세에게 '스테파니 황태자비와의 혼인무효[8] 를 인정해달라'는 부탁을 했고[9] 레오 13세는 (당연히) '''이 사실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말해버렸다'''.
2.2. 비극으로 끝난 사랑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격노하여 루돌프 황태자를 불러내서 그의 면전에서 '''"너 같은 놈의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다. 제발 가정에 충실해라!!!"'''라고 한 후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결국 어릴 적부터 축적되어왔던 각종 스트레스와 원한, 분노와 외로움이 한 순간에 쏟아져나오면서 루돌프 황태자는 마리와 함께 사냥용 별장이 있는 마이어링으로 밀월여행을 가서 마리를 죽인 뒤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동반자살했다.'''[10] 일종의 정사(情死). 이때 루돌프의 나이는 만 30세였고 마리 폰 베체라의 나이는 겨우 만 '''17세'''였다.[11] 이 동반 자살 사건은 이후 '마이어링 사건'으로 언급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본래 루돌프가 정말로 사랑했던 여인은 따로 있어서 그녀에게 동반자살을 제안했다가 그녀가 거절하자 베체라와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심지어는 루돌프가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루돌프의 작은누나 기젤라는 '''"루돌프의 머리에 난 총상 근처에 화상이 없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는 루돌프가 직접 머리에 총구를 대고 총을 쏘지 않았다(즉 일정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사람이 총으로 루돌프의 머리를 쏴서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지타 황후[12] 역시 루돌프 황태자가 사실 살해당했다는 언급을 했다.
저 두 사람의 증언과는 별개로 살해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미사를 가톨릭에서 허락해 준 점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자살을 큰 죄악으로 여겨서 자살자는 장례미사를 치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루돌프가 살해당했다는 증거를 오스트리아 황실이 가톨릭교회에 극비리에 제시하고 이를 수용했다는 주장이다. 다만 대외적으로 황태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황실의 명예 문제로 끝날 리가 없기 때문에 비밀로 덮었다는 설이다. 살해의 배후는 제각각으로, 루돌프의 즉위를 반대하는 황실 내 보수파, 혹은 황실을 증오하는 공산주의계 세력 등이 후보에 있다.
루돌프가 사망한 이후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1900년에 헝가리의 귀족과 재혼했으며, 1945년 8월 23일에 사망했다.
3. 가정사의 비극
루돌프 황태자'''만''' 비극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루돌프 황태자에게는 그저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미 루돌프 황태자 이전에도 여행에 동행했던 큰딸 조피가 어린 나이에 병사한 걸 보아야 했으며, 이름뿐인 멕시코 황제 자리에 올랐던 남동생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막시밀리안은 어머니 조피 대공비가 가장 사랑한 아들이었고, 실제로 막시밀리안의 부고를 들은 조피 대공비는 충격을 받고 칩거하다 죽었다.
제수씨가 되는 벨기에의 공주 샤를로트는 진심으로 사랑한 남편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미쳐버리는 바람에 친정오빠인 '''레오폴드 2세'''[13] 라는 말종의 명령으로 감금당한 채 60년 가까이 살다 외롭게 죽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요제프 1세는 자신을 황위에 앉힌 어머니를 배려하느라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방치하는 바람에 부부 사이가 소원해졌다.
막시밀리아노 1세 뿐만 아니라 또다른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 역시 위장병으로 일찍 사망했으며, 루돌프 황태자 사후에 대신 후계자로 낙점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카를 루트비히의 아들) 역시 역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서거하기 2년 전에 사라예보에서 부인과 함께 암살당하는 바람에 늙은 황제는 또 다른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이러다 보니 동서 통틀어 이보다 더 비극적인 황실도 없을 거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 황실의 불행한 가족사도 그렇지만 1차 대전을 앞두고 공적으로도 국제사회에서 이미 궁지에 몰릴대로 몰린 오헝제국은 마이어링 사건과 사라예보 사건으로 연이어 후계자들을 잃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어 멸망했다.
이렇듯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불행한 황제였다.
4. 가족 관계
※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는 인물들은 ☆ 처리
- 아버지 : 프란츠 요제프 1세
- 어머니 :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 큰누나 : 조피(1855년~1857년)☆
- 작은누나 : 기젤라(1856년~1932년)[14]
- 루돌프 황태자 자신(1858년~ 1889년)☆
- 아내 : 벨기에의 스테파니(1864년~1945년)
- 딸 : 엘리자베트 마리(1883년~1963년)
- 여동생 : 마리 발레리(1868년~1924년)[15]
- 숙부 : 막시밀리아노 1세(1832년~1867년)☆
- 숙부 : 카를 루트비히(1833년~1896년)
- 사촌 :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년~1914년)☆
- 사촌 : 오토 대공(1865년~1906년)
- 당조카 : 카를 1세(1887년~1922년)
[1] 조피는 루돌프 황태자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이미 2살의 나이로 요절한 상태였다.[2] 가혹한 환경도 영향을 미쳤지만 어머니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비롯한 외가 혈통에서 정신병이 유전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비텔스바흐 가문 사람들에게는 우울증, 광증 등의 정신병력이 있었다. 또한 당장 부모부터가 근친혼으로 맺어진 사이이며(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는 이종사촌지간이다.) 그 윗대 조상들도 근친혼을 했는데 이 영향 역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3] 원래 조피 대공비가 며느릿감으로 낙점한 것은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였으나 프란츠 요제프가 엘리자베트의 미모에 끌려 기어이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엘리자베트는 만 16세밖에 안된 어린 나이였고 시골에서 태어나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피 대공비가 보기에 황후의 재목은 아니었다.[4] 시씨는 처음부터 루돌프와 스테파니의 결혼에 반대했다.[5] 왜 루돌프의 아버지를 예를 들었는지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생각해 보자.[6] 지체 높은 가톨릭 가문들인 작센 왕가, 스페인의 보르본 왕가,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가, 오를레앙 가문 등의 공주들과 혼담이 오갔었다.[7] 이 '병약해진' 것이 사실 성병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다. 황실 생활에서 얻는 스트레스를 여성편력으로 풀었던 루돌프가 그 과정에서 얻은 성병을 스테파니에게 옮기는 바람에 불임이 되고 말았다는 주장으로, 뮤지컬 엘리자벳에서는 이 이야기가 루돌프의 부모인 엘리자베트와 요제프의 이야기로 각색되어 나온다. 실제로 스테파니는 루돌프와 사별한 후 재혼했으나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이 설이 사실이라는 주장도 있다.[8]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예외적으로 '혼인무효'라는 것이 있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9] 스테파니는 루돌프의 여성편력을 혐오하여 남편과 이를 두고 크게 다투었기에 루돌프는 스테파니를 더는 사랑하지 않았고 처소에도 찾아가지 않을 정도로 부부관계가 파탄난 상황이었다.[10] 이때문에 장례식 때 공개된 루돌프의 사진을 보면 시신의 머리에 있는 총상의 흔적을 붕대로 가려서 장례를 치루었다.[11] 베체라는 사후에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1945년 소련군이 빈을 점령했을 때에 관이 파헤쳐졌고, 이 때에 두개골에 총상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정확한 진상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녀의 유골을 훔쳐가는 일이 생기는 등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12] 카를 1세의 황후. 다만 지타는 이 사건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3년 뒤 탄생), 이탈리아의 부르봉 방계 가문, 부르봉-파르마 가문 출신이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을 얼마나 알았을지는 알 수 없다.[13]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식민지로 삼은 콩고를 지옥으로 만든 끔찍한 인간 폐기물이다.[14] 루돌프의 누이들 중 그나마 가장 평온한 삶을 살며 장수했다. 16세에 정략결혼한 11세 연상의 남편과도 원만히 해로했고, 슬하에 둔 4명의 자녀들도 어느 하나 요절하지 않고 잘 자랐다.[15] 언니와 달리 한참 처지는 신분의 남편과 연애 결혼을 했다. 더 좋은 조건의 신랑감이 정략 결혼 상대자로 내정된 상태였던지라 반대가 심했지만 마리 발레리를 유독 편애한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 덕분에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다. 그렇게 결혼한 남편과 10명이나 되는 자녀를 낳고 잘 사는 듯했다. 그러나 말년에 남편이 외도를 저지른 데다가 심지어 그 외도로 얻은 사생아에게 장인의 이름인 '프란츠 요제프'를 붙여 주는 방식으로 모욕을 주는 바람에 큰 충격을 받아 병에 걸려 50대 중반에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