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숙성황후 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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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서원(德陽書院)이 소장한 기황후 영정.[1]
'''시호'''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
'''존호'''
창숙광성황후(昌淑光聖皇后)
'''본관'''
행주 기씨(幸州 奇氏)
'''이름'''
'''고려'''
불명
'''원'''
기 설렁거 올제이 후투그
(Gi Solongo Öljei Khutugh / Өлзий хутуг / 奇 肅良合 完者 忽都)
'''생몰년'''
1315 ~ 1369(?)
1. 소개
2. 행적
2.1. 초년
2.2. 제2황후 시기
2.3. 제1황후 시기
3. 기황후묘?
4. 평가
4.1. 원나라의 입장
4.2. 고려의 입장
5. 매체에서의 등장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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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奇皇后

원나라 혜종 토곤테무르의 3번째 황후, 혜종의 제2계후이자 3번째 정실황후다. 북원 소종 빌레그트 칸 아유시리다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시호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 따라서 정확한 공식 명칭은 '보현숙성황후 기씨(普顯淑聖皇后 奇氏)'지만, 성이 기씨인 황후라고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기황후'라고 불린다.
고려 출신으로 본관은 행주, 아버지는 기자오, 외할아버지는 이행검(李行儉)[2]이다. 오라비가 5명, 누이가 2명이었는데 그 중 기철도 있다. 기씨의 고려식 본명은 알려진 바 없으나 기 설렁거 올제이 후투그(Gi Solongo Öljei Khutugh, 奇 肅良合 完者 忽都)[3]라는 몽골식 이름만 전한다.[4]

2. 행적



2.1. 초년


1333년 기씨는 공녀원나라에 갔는데,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가 추천하여 궁녀가 되었다. 고용보는 기씨를 앞세워서 권력을 얻고자 했는지 혜종의 차와 다과를 담당하는 시녀로 삼았다. 혜종은 용모가 아름답고 학식이 뛰어난 기씨에게 반해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혜종의 총애를 받자 권신 엘테무르의 딸이자 혜종의 제1황후 다나시리가 질투하여 괴롭혔다. 심지어는 채찍으로 맞아 온몸에 검고 푸른 멍이 들었으며, 인두로 지짐까지 당하였다. 그러나 다나시리의 남매인 텡기스다르카이 일파가 모반을 꾸민 혐의로 멸문하자 다나시리도 황후에서 폐위되었다. 중서우승상 메르키트 바얀이 주도하여 다나시리는 폐후가 된 뒤 유배 가는 길에 만 15세 나이로 독살당했다.

2.2. 제2황후 시기


혜종은 기씨를 새로운 제1황후로 삼으려고 애썼지만, 당시 실권자 바얀이 '몽골족이 아닌 여성을 제1황후로 삼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바얀후투그를 새로운 제1황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바얀이 반대한 데에는 기씨가 황자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338년, 기씨는 혜종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출산하였고, 바얀이 실각하자 혜종의 국사 사라판이 기씨를 제2황후로 책봉하길 청함으로써 제2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기씨는 흥성궁(興聖宮)에서 거처했다. 비록 아들을 낳고 황제가 총애하긴 했지만 정치적 뒷받침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마침 혜종이 태황태후 부다시리를 폐위하고 추방했다. 부다시리는 당시 휘정원(徽政院)을 관리했는데 부다시리를 추방한 후 혜종은 휘정원 관리를 기황후에게 맡겼다. 기황후는 이를 기회로 삼고 측근 박부카(朴不花)와 고용보를 이용해서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
휘정원을 자정원(資正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을 추천한 환관 고용보를 자정원사로 임명해 황실의 재정을 장악했으며, 엄청난 부를 쌓아 정치자금도 마련했다. 자기가 낳은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받게 했고, 고려 출신 권씨와 김씨를 황태자비로 삼았다. 같은 고향 출신이자 고용보가 추천한 환관 박 부카를 동지추밀원사로 임명해 군사권도 장악했으며, 나중에는 재상에 버금가는 정2품 영록대부에도 임명했다. 1365년 바얀후투그가 죽은 뒤에는 제1황후가 되었다.
기황후가 득세함으로써 고려가 받은 악영향은 매우 심각했다. 기황후는 자신과 친정 기씨 가문의 잇속을 챙기려고 고려에 많은 간섭을 행사했고, 기황후의 오라비 기철을 필두로 한 권문세족도 온갖 패악을 부린 것. 결국 공민왕은 1356년 병신정변을 일으켜 기철은 물론 가족과 측근들까지 모조리 숙청하였다. 이에 기황후는 덕흥군 왕혜(王譓)을 고려의 왕으로, 조카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고려의 세자로 삼고자 원나라 군대 1만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
한편 원나라로 끌려온 고려 공녀들이 원나라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공녀들을 유력자들에게 선물로 보내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세력이 성장하자 '''고려원나라로 보내는 공물의 양은 오히려 늘었다.'''
혜종 대에는 텡기스 일파의 반란 제압에 큰 공을 세운 메르키트 바얀이 최고의 권세를 누렸지만, 바얀은 혜종에게 윤허도 받지 않고 담왕 살살독을 마음대로 처형했다. 거기다가 텡기스 형제나 다름없이 마구 권세를 휘둘렀다. 이 때문에 혜종은 메르키트 바얀에게 불만을 품었고, 토크토아, 지아와태, 사라판 등이 메르키트 바얀을 실각시켜서 좌승상으로 강등하고 변방으로 쫓아낸 후에 토크토아를 승상에 임명하며 수년간은 원나라에 평화가 도래했다. 그러나 이번엔 혜종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방탕해졌다.
1360년, 우구데이 칸의 후손 아르카이테무르가 반란을 일으키고, 급기야 1364년에는 베이르테무르가 대도를 함락했다. 이때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기황후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포로로 잡혔다. 아유시리다라가 코케테무르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베이르테무르는 화가 나서 교지를 위조, 기황후를 궁 밖으로 쫓아내고 1백 일 동안 감금시켰다.

2.3. 제1황후 시기


하지만 이듬해 1365년, 한족계 출신 군벌 코케테무르가 아유시리다라의 편을 들며 대도를 수복, 결국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 간 내분이 끝났다. 기황후는 코케테무르의 힘을 등에 업고 혜종에게 양위하라고 압박했지만 혜종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 코케테무르마저 회군하여 대도를 떠났다.
그해 9월 바얀후투그 황후가 죽자 많은 대신들이 기황후를 제1황후로 책봉하라고 주청했지만, 기황후가 혜종을 자꾸 양위시키려 한 것 때문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혜종은 비답을 내리지 않고 다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황후는 제1황후 자리를 포기하지 못했다. 자정원을 숭정원(崇政院)이라 개명하고 바얀후투그가 생전에 관리했던 중정원(中政院)을 숭정원에 편입시키는 등 더욱 세력을 키워 혜종을 압박했다. 결국 혜종은 기황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365년 12월 기황후를 마침내 제1황후로 책봉했다.

너 설렁거(肅良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 와서 짐을 받들어 섬겼다. 너는 항상 조심하고 삼가면서, 낮밤으로 언제나 신망이 두텁고 성실했다. 너는 긴 세월을 생활은 검소하고 사람들에게는 공손하게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중궁(中宮)의 지위가 마땅히 현명한 처(妻)인 너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황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이 모두 너를 황후에 봉하라고 간청하고 있다. 액정(掖庭)의 궁녀들도 모두 너를 존경하여 따르고 있다. 그런데 너 기씨는 여러 차례 겸손하게 이를 사양하니, 너 뜻이 더욱 가상하다. 아! 너는 궁정의 일들을 신중하게 다스려, 충심으로 짐을 더욱 더 잘 보좌할 수 있도록 힘써라. 너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을 더욱 환하게 밝히고 계속 이어나가서, 함께 우리 조정의 홍복(洪福)을 보존하도록 하라.

- 원사, 원나라 혜종이 기씨를 대황후(제1황후)에 임명하면서 내린 교지

당시는 주원장이 중국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형성한 시점이었다. 과연 기황후가 제1황후에 책봉된 지 2년 8개월 만인 1368년 8월, 주원장서달에게 대군을 이끌고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북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이러한 명군의 공격으로 대도는 함락되었고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혜종은 기황후, 아유시리다라와 함께 대도를 버리고 북쪽 응창부로 튀었는데, 이 과정에서 며느리 권황후와 김황후, 그리고 그 자식들까지 전부 명나라에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 때 어처구니없게도 기황후는 고려가 지원하지 않는다고 매우 분노했다.[5][6] 응창부조차 명군의 위협을 받고 곧 위험해지자 원나라의 첫 수도 카라코룸으로 천도했는데, 이 와중에 혜종이 1369년 4월 23일 이질로 사망했다.
그후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북원의 황제로 즉위했지만, 기황후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어 알 수 없다. 아마도 기황후는 카라코룸에서 아들이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고 황태후가 되어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3. 기황후묘?


동국여지지에는 경기도 연천군에 기씨의 묘가 있다고 전한다. 또한 인근에서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되었고 석물 2기도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기황후가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연천에서 여생을 마친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고려사 등 관련 사서에 기씨가 귀국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
기씨가 고려로 돌아왔으면 당시 기씨가 고려에 끼친 엄청난 해악으로 미루어보아 고려사에 기록 한 줄이라도 남았을 것이다. 또한 공민왕이 자신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삼겠다며 고려를 공격했던 기황후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순순히 받아줬을지도 의문이다.

4. 평가



4.1. 원나라의 입장


'''원나라 입장'''에선 황후로서 그나마 막장까지는 아니었다. 이전 황후였던 다나시리가 워낙 인성에 권력욕까지 갖춘 여러 의미에서의 막나가는 인간이었던지라 다나시리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다나시리는 어린 나이에도 다른 사람을 인두로 지질 정도로 막장 인성을 가진 문제적 인물이었고, 결국 집안이 멸문한 뒤에는 15살에 사약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반란자의 집안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긴 했지만.
기씨를 다룬 자세한 기록은 원사 후비열전뿐이나, 열전 등 사료에선 자정원이라는 기구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심하게 사치와 향락에 빠지진 않았고, 틈틈히 효경과 사서를 읽었으며, 귀한 음식을 먹기 전에는 항상 원나라의 태묘(종묘)에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혜종 등이 최악이라 상대적으로 덜 까일 뿐''', 기황후도 과도한 권력욕에 매관매직을 일삼고 정쟁을 이끌어 원의 상층부를 썩어 문드러지게 했다는 것은 정사에도 기재된 분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기황후를 까다보면 원나라 패망의 주역으로 손꼽기도 하는데, 다만 이때 원나라는 기황후 이전부터 어차피 망조가 깃든 나라였고, 애초 원나라 멸망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민족 차별로 인한 한족들의 불만과 원나라 말기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 폭등[7] 그리고 이로 인해 경제가 파탄난 점, 군벌들의 봉기, 그리고 농민 반란을 가장 큰 이유로 원나라 패망의 주역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반면 기씨를 둘러싼 권력투쟁이나 고려 침공을 무리하게 시도하는 등 낭비 때문에 원나라 패망의 주역이 맞는다는 주장도 거센 편.
다만 고려 침공은 고려 입장에선 최악이었지만 '원나라의 권력자'인 그녀 입장에선 핵심 번국 중 하나인 고려의 이탈을 막아보려 시도한 것 자체는 실책이라기보단 당연히 해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고려의 전력을 과소평가해서 결국 깨졌다는 것이다. [8]
기황후 또한 정치적 악수가 없지 않았다. 토크토아가 승상이 된 후 유례없는 평화를 맞이했던 원나라였으나 희대의 간신 카마(哈麻)가 기황후와 토크토아를 이간질하여 결국에는 토크토아를 죽게 만들었다. 1345년 토크토아가 3사를 편찬할 때 그 말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비록 본심은 아니었을지언정 승상 토크토아를 죽인 것은 기황후에게 분명히 악수였다. 기황후가 권력 싸움에 정신이 팔리지 않고 토크토아가 오래도록 원나라에 남았다면 원나라의 멸망이 조금이라도 늦춰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또다른 결정적 악수는 심복 고용보가 죽은 후[10] 박 부카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준 것이다. 이는 1364년에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 간 내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기황후도 반황태자파인 베이르테무르에게 궁에서 쫓겨나 민가에 100일간 유폐되는 굴욕을 겪었다. 기황후가 이처럼 권력을 두고 다툼으로써 원나라의 국방력이 크게 약회되었고, 가뜩이나 불안하고 어지러운 원나라는 더욱 흔들렸다. 결국 원나라는 만리장성 이남 지역을 빼앗기고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무튼 신분이 낮은 공녀에서 출발하여 제2황후, 제1황후에 책봉되었고 아들을 대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입지전적의 인물이지만[11], 고국 고려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기씨가 일으킨 온갖 악영향이 많아 특히 한국의 역사가들로부터는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능력은 있는데 행실이 개차반인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4.2. 고려의 입장


'''고려의 입장'''에서는 민폐를 넘어 온갖 해를 끼쳤을 뿐 이득을 준 것은 전혀 없었다. 원나라에서 기황후가 권력을 잡고 기씨의 오라비 기철과 기원이 그 빽을 믿고 온갖 횡포를 부리는데도 부마국 고려에서는 기씨 집안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기씨 집안은 기황후의 세를 등에 입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기황후의 권력이 커지면서 기씨 일족의 횡포와 전횡은 날로 심각해졌고, 결국 공민왕이 즉위하자마자 원나라와 충돌할 엄청난 각오를 하며 고려 내부의 기씨 집안을 싸그리 쓸어버렸다. 그 후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자 원나라에 있던 기황후는 공민왕을 쫓아내고 덕흥군을 고려의 새 왕으로 세우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공민왕이 군대를 보내 막아냄으로써 무산되고 만다.[12]
한편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하는 이야기도 일부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부정적으로 평했다. 관련 기사
이강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으며,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말했다. 관련 기사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으로 데려가길 원했다.", "그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고 말했다.
게다가 "1343년(충혜왕 복위 4)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라고 나온다. 입성책동-민족문화대백과 오라비가 입성론을 일으키기까지 한 것. 또한 자기가 불리하거나 필요할 때 권력자에게 또 다른 공녀를 뇌물로 갖다바치고, 이곡이 혜종에게 상소를 넣어 공녀 차출을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 부카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기황후가 공녀들을 계속 원한 이유는 바로 자정원의 재정을 바탕으로 고려 출신의 처녀들을 데려다 길러 원나라 고위층에 뇌물로 선사해 자신과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인데 그러한 사실은 원나라 말기를 기록한 경신외사 등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사실로 볼때 기황후는 공녀를 막기는커녕 성상납을 시키는 사창가 포주 같은 짓을 저지른 셈.

기 황후는 고려 미인을 길러 권세가에게 바쳤다. 원나라 수도에서 현달한 고위 관인과 귀족은 반드시 고려의 미인을 얻어야 명가(名家)라 했다. 고려 여인들은 예쁘고 귀여워 사람을 잘 섬겼고, 그 집안에 들면 곧 사랑을 독차지했다. 지정(至正: 1341)년 이후로 궁중의 일을 맡은 사람의 태반은 고려 여인이었다. 이 까닭에 사방의 옷차림, 신발, 모자가 모두 고려 제품을 사용했다.(『庚申外史』) 관련 기사

기황후가 권력을 잡는 원나라 말기쯤 되면 고려에 요구하던 무리한 공물 요구가 조금 완화되기는 하지만 이는 원나라 말기 원나라 자체가 홍건적들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국력이 떨어져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강하게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여러 가지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조차 힘들어졌기 때문에 저절로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다. 단지 기씨가 황후로 있던 시절과 시기가 겹쳐 위와 같은 사실을 왜곡하는 주장이 나온 것일 뿐.

5. 매체에서의 등장


고려 말기를 다룬 한국 작품에선 대체로 고려 내부를 집중적으로 다루기에 줄곧 국외에 있던 기황후는 직접 나오지 않고 언급만 되거나 나오더라도 낮은 비중으로 등장한다.
2005년 방영된 MBC 사극 신돈에서는 배우 김혜리가 연기하였는데 악녀의 이미지를 매우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전에 김혜리가 맡았던 태조 왕건강비 역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연기를 펼쳤다. 극 초반에는 공민왕노국대장공주를 정략적으로 이어주며 이후 공민왕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려는 계략을 세우는 등 치밀한 모습이었지만, 공민왕고려로 돌아간 뒤로는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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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국내에서 기황후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가 나와 화제가 되었는데 바로 2013년 하반기 MBC 사극 기황후이다. 배우는 하지원. 이 드라마 속 배역에 대한 정보는 기승냥에 있다.[13] 그러나 시작 전부터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드러날수록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본래 역사와는 완전 다른 픽션에 불과한 내용이라서 아쉬움을 남겼다. 이러한 논란 내용은 문서 참고. 사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기황후는 이름만 기황후지 실존인물과는 다른 삶을 산 드라마 속 창작인물로만 보아도 무방할 정도. 이 드라마를 일반적인 역사 기반 드라마로 보면 큰일난다. 애초부터 해당 드라마는 원작이 실존인물인 기황후를 소재로 지은 소설이다. 다른 대하사극과 비교하기에는 약간 애매한 기준임을 고려하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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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드라마가 한참 유행했을 때 기황후의 얼굴이라고 인터넷에 퍼졌던 초상화가 있었는데, 초상화의 진짜 정체는 기황후가 아니라 다기라는 이름의 황태후의 초상이다. 참고로 기황후는 명나라 주원장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초상화는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링크

[1] 신숭겸을 독향하는 전라남도 곡성군의 덕양서원이 아니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행주 기씨''' 문중의 도선산(都先山)에 위치한 서원이다. 서원 자체는 2002년 7월 12일에 개원하였다.[2] 정화궁주와 얽힌 악연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정화궁주 참조하라.[3] '완췌후두'라는 표기도 자주 보이는데 중세 몽골어와 상관없이 현대 중국어 발음에서 비롯된 완전히 잘못된 표기이다.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기 숙량합 완자홀도. 기황후(드라마)에서는 그녀의 본명이 '기양', 나중에 바꾼 이름이 '기승냥'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숙량합' 부분에서 따 왔을 가능성도 있다.[4] 기씨의 이름 중 설렁거는 고려 출신이라 붙은 별칭이다. 몽골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을 무지개 라는뜻의 '설렁거스'라고 부른다. 그리고 끝에 붙은 후투그는 현대 몽골어로 황후나 왕비 혹은 여사의 의미를 가진 'хатан(하탄)'으로, 따라서 순수하게 이름에 해당하는 부분은 '올제이'이다. 별칭은 떼고 성과 이름에 해당하는 부분의 한자만 한국식으로 읽는다면, 일단은 '기완자'가 가장 이름에 가까운 게 된다.[5] 기씨가 고려에 저지른 만행들을 생각하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당시 국왕인 공민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획책하기까지 했는데 공민왕이 과연 도와주려 했을까?[6] 원래 고려는 그 전에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가 멸망할 적에도 지원요청을 씹고 도와주지 않았다. 겉으로만 사대를 맺었을 뿐 철저히 실리를 따라 외교를 한 고려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 거기에다 공민왕은 아예 반원정책을 기지로 내세웠고 명에 칭신하며 새로운 사대관계를 수립했다.[7] 특히 이 당시에 퍼진 흑사병으로 실크로드가 붕괴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경제 관념이 없었던 원 조정은 교초를 말 그대로 남발했는데,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된다.[8] 한민족 국가를 무력으로 제압한 몽골계 유목제국이 결국 한민족 국가에게 패배했다는 유사점도 있다.[9] 기철, 고용보 등의 주도로 충혜왕이 폐위된 후 곧바로 귀양길에서 급서했던 사건이었다. 이 때 고용보는 충혜왕을 함부로 겁박하면서 무례를 저질렀다고. 충혜왕의 급서 역시 워낙 갑작스럽게 발생했던 지라 사서에 기재될 정도로 의문스러웠지만 어쨌든 원나라 측에서 충혜왕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비록 충혜왕이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높았지만 어쨌든 한 나라의 임금에게 신하가 무례를 범한 것으로도 모자라 죽게 내버려 둔 것이다. 당연히 충혜왕의 동생인 공민왕 입장에서는 고용보가 자신의 친형을 죽게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원한을 갖고 있었을 수 밖에.[10] 사실 조일신의 난 때 조일신에게 찍혀 부리나케 도망쳐서 해인사 중으로 숨은 것이었는데, 충혜왕의 일[9]로 원한을 가지고 있던 공민왕이 1362년 그를 찾아내고는 어사중승 정지상을 보내 그를 처형시켜버렸다.[11] 중국의 역대 황제에게 사랑받은 '''이민족 국가의 여인'''들은 있었지만 황후까지 된 경우는 드물고, 자기 자손을 황제로 만든 사람은 없었다.[12] 이 전투에서 최영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맹활약했다.[13] 드라마 제목도 그렇고 이 정보를 궁금해해서 여기 들어온 위키니트들이 있을 것이므로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