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역사
1. 선사시대
울주군의 반구대 암각화 및 인근의 천전리 각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선사시대에는 고래를 사냥하며 살던 부족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 무렵에는 현재의 울주군 구영리 지역까지 기수역이 생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암각화박물관에 당시의 지형도를 재현해 둔 것이 있는데, 오늘날 삼산동 및 그 위의 중앙동(성남동) 일대는 전부 바다였고, 돋질산은 섬이었으며, 신복로터리 부근은 그 인근 북쪽까지 기수역 강변이 바짝 들어와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울산의 도심 지역 전체, 그리고 그 서쪽의 무거동, 다운동, 그리고 범서읍 저지대의 상당 영역까지 전부 바다였다는 소리이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울산 중구와 남구의 도시 지역은 죄다 바다였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태화강의 활발한 퇴적 작용으로 점차 구영리 부근의 굴화만이 소멸하고 차츰 오늘날의 무거동, 삼호동 강변 민가 일대까지 퇴적물이 쌓였다.[1] 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며 삼산동 지역이 야트막한 바다가 되고 이것이 이후 태화강의 희석 작용으로 습지가 되면서 미나리 생산지가 되었다. 구한말 이후에는 오늘날의 울산항 주변을 중심으로 염전이 발달했다. 그러나 이후 울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습지가 모두 묻히고 하류의 염전 역시 모두 울산항 부지로 변화하였다.
2.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울산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울주군 웅촌면과 양산시 웅상 일대에 걸쳐 존재했던 소국 우시산국(于尸山國)에서 유래되었다. 다만 훈민정음은 물론이요 이두도 정립이 안되던 고대의 향찰식 표기에서는 'ㄹ' 받침을 尸로 나타낸 사례가 여럿 있으므로 고대에도 울산/울뫼[ulmoj(울모이)/urmoj(우ㄹ모이)] 등으로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우시산국은 곧 경주시 일대를 지배하던 신라의 탈해 이사금 때 장군 거도에게 정복당했다. 바로 위에 신라의 수도 경주가 있는 덕분에 신라시대부터 수도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통일신라 때 울산항의 위치는 중요하여서, 수도 서라벌의 외항 기능을 수행하였다. 경주 동남부~울산 북구 지역 단층평지를 따라가는 울산가도는 불국사를 비롯해 통일신라기에 사찰이 집중되고 크게 개발되었는데 이는 울산만으로 상징되는 외국과의 무역 성행과 연결된다. 이와 관련해 신라 관련 유적·설화가 은근히 많다. 예를 들면 동구 일산동의 대왕암. 신라 파사왕 때 굴아화현(울산), 거지화현(언양)이 되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하곡현(울산), 헌양현(언양)으로 개편되었다. 언양권은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울산 중심부와 별개의 고을로 존속했다.
3. 고려
나말여초시기에 호족, 박윤웅이 지배하다가 고려에 복속되면서 태조 때 굴아화현에서 흥려부, 이후 흥례부가 되었다. 그러다가 성종 때 공화현으로 강등되었다. 현종 때 울주가 되었다.
한편 인종 때 헌양현은 언양현이 되었다.
4. 조선
태종 때 울산군으로 개편되었다.
세종 19년(1437년) 1월에 도호부로 승격했다가 동년 8월에 도로 군으로 격하했다.
태종 17년(1417년) 이래 조선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營城) 소재지였으며, 구한말(1907년) 진위대(육군보병 제3연대 3대대)가 해산할 때까지 경상좌도 지역의 군사기지이자 군사중심지 역할을 수행해왔다[2] .
세조 5년(1459년)에 경상좌수영을 보안상의 이유로 개운포에 옮겼다. 그리고 성종, 중종때에 다시 옮길것을 논하고 중종때 어느샌가 도로 해운포로 옮겼다.
한편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대마도주의 요청으로 개항한 삼포 중 하나인 염포가 울산에 있었지만 다른 두 포구였던 진해, 부산에 비해서는 또 일본과 거리가 적당히 멀어서 가장 이용률은 적었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 의해 일찍이 요새화되어 서생포왜성이 지어졌고, 울산성 전투의 처절했던 전장이기도 하다. 울산성에서 농성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에서 포로들을 엄청나게 끌고 갔는데, 당시 가토의 영지였던 일본 구마모토 시에는 울산정(町)[3] 이라고 하는 역이 있다. 1960년대까지 행정구역이었고 현재는 울산마치역[4] 이라는 역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상태. 구마모토 측에서 한국의 울산에서 유래한 게 맞다고 밝혔다.
1906년 경주군 외남면을 편입하여 두북면으로 개칭하였고, 웅상면이 양산군으로 편입되었다.
5. 일제강점기
1910년 두북면을 두동면과 두서면으로 분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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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후 울산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울산군과 언양군이 '''울산군'''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승격되고 동면이 방어진면으로 개칭되었다. 1933년 중남면과 삼동면이 합쳐져 삼남면이 되었다. 1937년 방어진면이 방어진읍으로 승격되었다.
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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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울산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상황.
1962년 울산군 울산읍, 방어진읍, 하상면, 대현면[6] , 범서면 무거리와 다운리, 청량면 두왕리, 농소면 송정리와 화봉리가 '''울산시'''로 승격되었으며, 울산군의 잔여지역은 '''울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울주군 서생면이 동래군에 편입되었다. 울산시는 특정공업지구 지정이라는 특혜로 대단위 중화학 공업 단지가 들어서고, 현대자동차, 현대미포조선, 석유화학단지 등의 공단이 들어서며 발전했다. 1983년 서생면이 양산군[7] 에서 울주군으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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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분구 당시 울산시의 행정구역 상황.
1985년 태화강을 경계로 중구(태화강 이북)와 남구(태화강 이남)를 설치하였다. 1988년 방어진출장소를 동구로 승격하였다. 1989년 울주군 삼남면 동부 지역이 삼동면으로 분리, 부활되었다.
1991년 울주군이 울산군으로 명칭을 환원하고, 1995년 울산시와 울산군이 통합되었다. 이 때 울산군 지역은 울주구로 개편되었고, 농소면이 농소읍으로 승격되었다. 1996년 언양면이 언양읍으로, 온산면이 온산읍으로 승격되었다. 보면서도 이상한 점이 있겠지만 당시 울주구는 하위 행정단위에 동이 아닌 읍·면을 두었고 그 읍·면 아래에 리를 두었다. 실제로 당시 주소가 '경상남도 울산시 울주구 농소읍 중산리' 이런 식으로 되어 있었다. 사실 당시 울주구 자체가 추후 울산시의 광역시 승격을 염두에 두고 임시로 편성한 행정구역에 가까웠다.
1997년 '''울산광역시'''로 승격되었다.[8][9] 지방 중심도시 역할을 하지 않는 도시 가운데 광역시로 승격된 것은 인천광역시에 이어 울산이 마지막일 것으로 보인다.[10][11] 이 때, 울주구를 울주군으로 개편하였다.[12] 또한 농소읍과 강동면[13] , 중구 명촌동, 연암동, 화봉동, 효문동, 진장동, 송정동, 양정동[14] 을 편입하여 북구를 신설하고, 중구 염포동을 동구에 편입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큰 동네 여러 개를 묶어 광역시로 만들었다고 까는 사람도 존재한다.[15] 실제로 태화강 이남, 태화강 이북, 방어진, 장생포, 범서읍, 온산읍 등 시가지가 분산되어 있는데다, 이를 묶어줄 교통수단이 도로(+버스)밖에 없는지라...
1998년 동구 염포동을 북구에 편입하였다. 또한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이 각각 울산지방법원, 울산지방검찰청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온양면이 온양읍으로, 범서면이 범서읍으로 승격되었다.
2018년 청량면이 청량읍으로 승격되었다.
2020년 11월 1일에 삼남면이 삼남읍으로 승격되었다.
[1] 지금도 태풍 등의 이유로 태화강이 크게 범람하면 저지대 도심인 삼산동 일대는 물에 잠기고, 태화강 국가정원은 쓸려온 토사로 흙밭이 되어 버린다. 1년 중 한 번만 쓸려도 퇴적이 엄청난데 수천 년 이상 이게 반복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오늘날의 울산광역시는 바다였던 땅에 쌓인 퇴적물 위에 조성된 도시인 셈이다.[2] 지금도 울산 병영성 유적과 병영동(병영1동, 병영2동)이라는 행정동 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3] 한국으로 치면 울산동[4] 원래 우루산마치역이라는 이름으로 한글 표기도 '우루산마치'로 되어 있었으나 어원을 고려해 한글 표기를 바꾸었다.[5] 1995년 울산군(현 울주군)과 통합하면서부터 현재의 CI를 사용하고 있다.[6] 대현면은 일제강점기 말때인 1945년에 잠시동안 울산읍에 잠시 흡수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6년에 다시 분리되었다.[7] 동래군은 1973년에 폐지되어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1995년에 부산광역시로 편입되어 기장군으로 부활하였다.[8] 보통 광역시 승격 조건이 인구수 100만 이상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인구 조건에 대한 법적 근거는 없다. 실제로 대전, 광주가 직할시가 될 때와 울산이 광역시가 될 때의 인구는 90만을 넘기기는 했지만 100만을 채운 상태는 아니었다.[9] 참고로 현존하는 오래된 일반구인 수원시 장안구와 권선구는 울산광역시의 자치구보다 3년 늦은 1988년에 설치되었다. (부천시의 일반구가 6개월 먼저 설치되었기는 했으나, 현재는 폐지되었으므로 일단 논외)[10] 현재 광역시 승격 가능성이 있는 도시들은 모두 각 지역의 중심도시이다.[11] 울산의 광역시 승격을 위한 정계 인맥 총동원령급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초자치단체 시절인 경상남도 울산시 당시에 서울출장소를 설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는 최초의 PK 출신 대통령(김영삼)이 집권했을 시기인 데다가 울산이 고향인 최형우가 행정구역 개편 주무부처인 내무부의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12] 울주구를 울주군으로 변경한 이유는 광역시의 구(자치구)에는 읍, 면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13] 이들 지역 울산시 출범 이래로 울주군→울산군→울산시 울주구의 실질월경지였다.[14] 해당 지역은 분구 이전 중구 동천강 이동 지역에 해당된다. (염포동 포함)[15] 수원시나 창원시 등 인구가 비슷한 규모인 곳에서 광역시 승격을 주장하면서 비교대상으로 걸고 넘어지는 곳이 주로 울산. 특히 수원시의 경우 울산 방식으로 화성+오산까지 통합하고 광역시가 되면 '''인구가 220만'''으로 불어나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