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1. 개요
1970년 일본 공산주의 동맹 적군파(赤軍派)라 칭하는 요원 9명이 승객 등 129명을 태우고 하네다 국제공항을 출발, 후쿠오카 공항(福岡)으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소속 보잉 727 여객기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한 일본 최초의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이다. 요도 호 사건혹은 요도 호 납치 사건(よど号ハイジャック事件)이라고도 한다.
2. 과정
2.1. 공중 납치 실행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33분경 타미야 타카마로(田宮高磨) 등 일본 공산주의 동맹 적군파(赤軍派) 요원 9명이 도쿄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기체 등록번호: JA8315)를 공중 납치했다. 극좌 조직이던 적군파는 납치 사건을 벌이기 전, 경찰서 습격사건 등으로 일본 정부의 수사를 받으며 조직이 와해되는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요도 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29명이 타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의 무기를 들고 승객들을 창가로 몰아세운 뒤 로프로 포박, 기장을 위협하여 북한의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2.2. 이타즈케 공항으로
이 요구에 기장은 "이 비행기는 국내선이라 북한까지 갈 연료가 없다"고 범인들을 설득했고(실제로는 북한까지도 갈 수 있는 연료가 충분했다), 연료의 보충을 위해 오전 8시 58분 경 이타즈케 공항(현 후쿠오카 공항)에 비행기를 주기 시켰다. 일본 경찰은 범인들이 국외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위대를 보내 활주로를 막는 등의 공작을 펼치지만, 오히려 범인들을 더욱 자극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장은 범인들을 설득시킨 끝에 여성, 노인, 어린이, 환자를 포함한 인질 23명을 풀어주고 다시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하며 이항했다. 대한해협을 지나는 도중 범인 그룹들은 승객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읽고 싶으면 빌려주겠다."고 얘기하였는데 그 책들은 적군파의 기관지 '적군(赤軍)', 레닌 전집, 김일성 전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이었으나 승객들 중 책을 빌린 사람은 후에 나오는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뿐이었다고 한다.
2.3. 김포국제공항 도착
요도호는 실제로 38도선은 넘었다. 그러나 휴전선이 완전히 38도 선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는 아직 대한민국 영공에 있었다. 하지만 38도선을 넘자 북한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기장은, 영어로 "여기는 JAL351편"이라 신호를 보냈으나 응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여기는 평양 진입 관제"'''라는 수신이 들어와 지시대로 남쪽으로 회항하였는데 이것은 범인 그룹들을 속이기 위해 한국 측에서 기지를 쓴 것이었다.[2] 망명을 원하면서 정작 북한과 같은 말을 쓰는 한국어조차 전혀 모르던 범인 그룹들은 아무 의심을 가지지 않았고, 인천 앞바다를 거쳐 3월 31일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비상 착륙했다. 추후 범인들은 그들이 착륙한 곳이 평양이 아님을 안 후, 승무원과 승객을 인질로 잡고 북한까지 안전한 비행 보장을 요구했다.
당시 이 적군파들의 목적은 북한의 체제를 지지해서가 아닌 '''"일본을 혁명하기 위한 배후지"'''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북한을 자신들의 군사 기지로 만들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북한을 뒤집어 엎어서 자기네 땅으로 만든다는 게 아니라,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발족하면서 민주 기지론을 내세웠듯이 일본에서 혁명을 하기 위해 북한을 전진 기지로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매우 비현실적이었으며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래저래 국제 현실을 물렁하게 본 것. 이들의 범행 선언 중에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문구는 최근에 주범들이 개설하여 함께 갱신하고 있는 트위터 프로필 문구에도 쓰여져 있는데, 나이가 노년에 들어도 아직까지 철이 덜 든 듯 하다(...).
이들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해서도 한참 동안 속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위장을 했기 때문. 북한 인민군 복장도 준비하고, '환영 평양 도착' 식의 플래카드까지 걸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적군파 대원들이 북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에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먼저 간단한 한국어도 못하는 그들이 한국 측 요원에게 어느 말로 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설령 요원과 일본어, 혹은 영어로 대화했다면 요원 측에서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라 잘 못 알아들은 척 얼버무리면 저런 해프닝은 간단하게 막을 수 있기 때문. 아래 후술되지만 테러범들은 영어도 잘 못했으며, 그래서 결국 일본어로 교섭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다.
때문에 김포공항에 주기 중이던 미국 항공사 노스웨스트 항공의 민항기를 보고 알아차렸다든가, 흑인인 미군 병사를 보고 의심을 했다든가 하는 의견이 있다. 또, '긴 닛세이(김일성)의 커다란 사진을 가지고 오라'라는 요구에 북한과 적대국이던 한국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기에 위조 공작이라는 걸 알아챘다는 말도 있다.
한편 범인 그룹들이 인질을 살해하는 등의 최악의 상황으로 진행할 경우 한국 군/경 측에서는 특전사 및 전투경찰, 헌병부대를 요도호에 투입해 진압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세계적으로 전문적인 대테러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이런 항공기 인질극 상황에 대한 준비와 대응 매뉴얼조차 없던 때라서 만약 무작정 투입됐다면 범인들뿐 아니라 다수의 인질들도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수 있다. 한국의 전문 대 테러 부대인 특전사 707특임대[3] 나 경찰특공대는 1980년대에 창설되었다. 707특임대 이전에도 특전사에 606부대(1975년 창설된 대 테러 및 청와대 경호 부대)와 27 특공 부대(1979년에 창설된 청와대 경호 부대)가 있었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1970년도엔 이들 부대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때다. 그리고 1970년에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대 테러 부대라는 개념조차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현대 특수부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영국의 SAS도 IRA와 교전을 벌이면서 막 대 테러 전술을 연구하기 시작할 때로, 최고의 군사 선진국인 미국에서 조차도 전문 대 테러 부대는 아직 없었다. 당장 요도호 사건 2년 뒤인 1972년에 벌어진 뮌헨 올림픽 참사를 겪은 뒤에야, 전문 대 테러 부대의 필요성을 깨닫고 세계 각국에서 부랴부랴 대 테러 전술 개발 및 부대 창설에 나섰다.
2.4. 교섭
한국 당국은 범인 그룹과 영어로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범인 그룹들은 영어조차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성립되지 않아 결국 일본어로 교섭을 시도하였다. 범인들은 다시 바로 평양으로 떠날 것을 요구했는데 멈춘 엔진을 재가동 시키기 위해선 보조 시동기가 필요했지만 한국 측에선 보급을 거부하여 그대로 서울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나온 범인들이었으나 곧 교섭에 응하여 식사등을 넣어주었다.
31일 저녁 일본항공 특별기가 야마무라 신지로(山村新治郎) 운수성 정무차관 등 일본 정부 관계자와 일본항공 직원을 태우고 도쿄 하네다 공항을 이륙하여 1일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이어 1일 오후 하시모토 도미사부로(橋本 登美三郎) 운수성 장관 및 가네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주한특명전권대사가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 정부에서는 정래혁 국방부 장관, 백선엽 교통부 장관, 박경원 내무부 장관이 협상에 참여했다.
사흘에 걸친 협상 끝에 범인들은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을 인질로 맞교환했다. 79시간 만인 4월 3일 오후 6시 5분, 범인 그룹 9명과 조종사 3명, 그리고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 등 13명이 탑승한 요도호는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1시간 반 후 북한 미림 비행장에 도착했고, 범인 그룹은 북한에 망명하였다.
3. 평양 도착
오후 7시 20분경 요도호는 평양의 미림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미 해가 진 후였는데, 미림 비행장에 유도등 등 야간 항공등화시설이 없어서 요도호 기장이 예전 2차 세계대전 당시 야간 특공 항공대 경험을 살려 육안으로 야간 착륙을 시도했다고 한다.
착륙 후 북한 측은 무기 등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여 범인들은 무기들을 놓고 비행기를 내렸는데, 범인들이 소지한 일본도, 권총, 폭탄 등은 전부 장난감이었다는 것이 후에 알려졌다.[4]
요도호에 타고 있던 범인 그룹 9명, 승무원 3명, 인질인 야마무라 차관, 총 13명은 북한 당국에 의해 신원이 확보되었다.
한편 서울 김포공항에서 해방된 99명의 승객들은 일본항공 특별기 DC-8 -62(JA8040)를 타고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NHK가 오후 7시반에 내보낸 특별 방송 '요도호 승객들 돌아오다'는 40%가 넘는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애초에 북한은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범인 그룹들을 뺀 승무원과 기체는 돌려보내겠다."고 했으나, 요도호가 도착하자 곧 말을 바꾸어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승무원과 기체의 빠른 송환은 보장할 수 없다."'''고 발표하여 일본 측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한 발 물러나 꼬리를 내린 북한은 다시 "인도주의적 관점에 따라 승무원과 기체의 송환을 행하겠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다음날 범인들을 제외하고 조종사 3명과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요도호를 타고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십 년이 흐른 1980년대에 주모자 등 3명이 사망하고[5] 당시 16세였던 1명은 198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유일하게 체포돼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다. 1명은 2000년 6월 태국에서 달러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았다.
일본 공안당국은 현재 북한에는 나머지 4명의 범인과 일본인 처[6][7] , 20여명의 자식들이 살고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들이 납치범(테러리스트)이므로 인도해 줄 것을 북한에 꾸준히 요구해 왔으나 북한측은 이를 거부해 왔다. 그러나 2001년부터 북한은 요도호 납치범 가족의 귀국을 허용하여, 몇 차례 귀국이 이루어졌으며, 2004년 7월 북한은 요도호 문제는 일본 정부측과 이전의 적군파 구성원들 사이의 문제라며, 납치범을 일본으로 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한국 정부는 수년 전 만경봉호를 통해 북한으로 수많은 재일 동포를 북송시킨 것에 대해 일본정부를 마음놓고 깔 수 있게 되었고[8] 일본은 한국과의 외교 교섭에서 커다란 빚을 지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결국 대부분의 인질을 구출한 곳은 한국 김포공항이다.
그뿐만 아니라 테러범들에 대한 한국 측의 대처는 당시 일본의 큰 호감을 샀다. 일제 패망 이후 일본은 대학생들에게 '지도에서 한국을 찾아보라' 하니 대다수가 위치를 몰라 애먹을 정도로 아예 한국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나마 6.25로 특수를 누린 일본이기에 그 정도는 인식하고 있는 정도. 때문에 테러범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일본에서는 '''"휴전 중인 나라에다 군사정변도 있었다니 그냥 다 쏴 죽이지 않을까?"'''하는 우려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간단한 방법으로 테러범을 속이려 들었고, 그것이 먹히지 않았을 때도 무차별 무력진압이라는 카드를 꺼내지도 않았다. 결국 일본 측이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승무원을 제외한 인질 전원이 한국에서 풀려나게 되어 이것이 일본 측의 호감을 사게 된다. 이 점은 이후 한일간 외교교섭들에서도 한국 측에 유리하게 작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요도호 탑승자 중의 한 명인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는 1911년생으로, 일본에서는 최근까지도 요도호 사건 관련의 방송에서 이 히노하라가 당시 피랍된 기내의 상황 설명에 증언자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17년 7월 18일 만 105세로 사망. # 성인병 전문가로 일본에서는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책도 많이 쓰고 감투도 많이 썼다. 84세 때인 1995년 자신이 원장으로 있던 성누가병원을 옴진리교 가스테러 사건때에 개방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사건 당시 인질로 북한에 갔던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일본으로 귀국하자마자 평생 까임방지권을 얻게 되었다. 목숨까지 희생될 가능성은 적었지만 미수교국인 북한과의 협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적어도 수 개월간 인질 생활을 감수해야할 가능성이 높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에 영구 억류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은 처음에 야마무라 차관과 조종사들을 북한에 억류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야마무라 신지로는 나중에 농림수산성 장관을 지내는데… 이후 중의원 당선도 되고 잘나가다가 1992년 외교사절로 재방북을 하루 앞둔 때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차녀의 칼에 찔려 사망하게 된다..
4. 북한으로 망명한 적군파 조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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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미야 타카마로
- 코니시 타카히로 (小西隆裕) - 현재도 북한 거주중. 국제지명수배중이다. 타미야 사망 뒤 멤버들의 리더격인 듯 하다.
- 오카모토 타케시
- 타나카 요시미 (田中義三) - 북한을 벗어나 태국 등에서 범죄에 가담하다가 2000년 일본에 송환되어 수감 중 2007년 병으로 사망했다.
- 우오모토 (아베) 키미히로 (魚本 (安部) 公博) - 현재도 북한 거주 중. 일본인들을 북한으로 납치하는 북한 공작원 활동에도 관여하여 인터폴에서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 와카바야시 모리아키 (若林盛亮) - 북한 거주 중. 2010년 일본의 어느 사이트에 'ポン太さん'[9] 이라고 불리는 드러머의 추모글을 올렸다. 부인은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인 납북 사건의 용의자로 국제 지명수배 중이다.
- 아카기 시로 (赤木志郎) - 북한 거주 중. 현재 인터폴에서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 요시다 킨타로 (吉田金太郎) - 1985년에 병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지만, 상세한 것은 불명이다. 북한의 악명높은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 시바타 야스히로 (柴田泰弘) - 사건 당시 16세(고2)로 나이가 제일 어린 멤버였으며 85년 타미야 타카마로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돈과 사람을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고 극비 귀국, 타인으로 변장하여 공작원 활동을 펼쳤으나 85년 위조여권 혐의로 체포. 복역 뒤 오사카에 살고 있었지만 2011년 사망했다. 자녀들은 한참 후인 2004년 경 일본으로 귀국했다.
5. 적군파 주범들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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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트위터 계정
트위터 프로필 사진에 있는 최근 모습.
최근 적군파 범인들이 '''북한에서 트위터를 개설한 사실'''이 알려졌는데, 북한 내에서 인터넷에 활발히 접속할 정도로 매우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위터 글에 의하면 일본의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도 자유롭게 듣고 보고있으며 미국 등의 외국 영화와 매체 또한 자유로이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직접 업로드가 아닌 그들의 지원자라는 인물에게 메일로 올릴 글을 보내고 다른 이들의 답글이나 질문도 메일을 통해 송신하는 방식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자 시이노 노리타니(椎野礼仁)[10] 는 2015년 현 리더인 코니시 타카히로가 NHK 뉴스를 통해 아랍의 민주화 운동에 트위터가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을 보고 '트위터를 해보고싶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트위터 프로필에는 "1970年赤軍派によるyodo号ハイジャック。「我々は明日のジョーである!」と北朝鮮に渡って40数年、体もyobo yobo[11] 、拉致容疑でyobo yobo、でもyodoはyodo! 何でも聞いて&言ってください、何でも受け入れ&答えます。拉致疑惑と帰国、朝鮮での生活あれこれ、日本のこと、何でもありでいきます。[12] 라는 어딘가 정신나간 문구가 쓰여져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트위터는 생존해있는 요도호 멤버들과 국제지명수배된 그들의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올리고있고, 글 마지막 문단엔 글쓴 본인의 이름을 써넣는다.
2016년 4월 15일자 트윗으로 '''분명히 하이잭 사건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소중한 건 교훈이다. (중략) 하지만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어. '낙원'따윈 모르지만 북한에 온 것은 정답이었다.'''라는 글을 올려 충격과 공포를 주고있는 중.
또한 "당신들이 북한에서 골칫거리 취급 받는 건 알고 있나요? 목숨이 남았을 때 귀국하는 게 어떨까요"라는 일본인의 질문에 '''북한에 민폐만 끼쳐 죄송할 따름이다. 한국과 일본에게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한 요도호 사건의 재평가를 하루라도 빨리 실현하기 위해 귀국하고 싶다 '''라는 글을 올리거나 '''"북한에선 의료와 교육이 우리 망명 외국인에게도 모두 무료라 감사하다"''', '''"매스컴은 20년전 비참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정보만 계속 내보내고 있다"'''라는 등 북한에서의 생활을 찬양하는 트윗을 올리면서 일본인들에게 각종 어그로를 끌고있는 중이다.
'안락한 망명객으로 (북한에서) 평생 살 생각은 없으며 귀국하는 게 목표'라는 글을 보아 일본으로 되돌아 가고 싶어하는 것 같긴 하다. 일본의 반응은 "돌아오지 말라"며 매우 싸늘한 분위기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은 평양의 '일본인 마을'이라고 적혀있으며, 납북 일본인들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사실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는 별개로 그들이 "여기 온 것은 실수였다"나 "북한의 대우는 엉망이다"라고 제대로 발언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북한'''이라서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목숨이 날아갈 테니 말이다. 아니면 드레스녹처럼 실제로 제법 호의호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
6. 기타
- GTO에서는 오키나와 수학여행 당시 오니즈카 에이키치가 아마쿠사 시로의 보물을 찾는답시고 학생들을 태우고 달린 어선의 이름이 요도호(よど号)다.[13] (97화). 이 사건에 연루된 비행기 이름의 패러디인 듯. 어느 정도 뜻이 통하는게 자기 보물 찾겠다고 학생들을 이 배에 태우고 무인도로 납치하듯 데려가서 거의 반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터라... 또 아이자와 미야비를 두고 가짜 인질극을 벌일때 테러집단으로 오인(?) 받아 포위되자 진짜 비행기 들고 북한으로 날라야하나며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 풀 메탈 패닉의 만화판에서는 실제로 수학여행을 가는 주인공 사가라 소스케가 다니는 진다이고교 학생들이 탄 비행기가 실제로 북한 정부의 사주를 받은 공작원 가우룽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당한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중국 연변의 '한카 자치주'로 변경되지만.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8년 8월 12일 방영분의 익스트림 서프라이즈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
- 범인들에겐 평양에 가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인질들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빨리 풀어주었다 보니 하이재킹 사건 치고는 비판이 덜 가는 편이다. 사실 같은 적군파 출신자가 일으킨 여러 사건들에 비하면 굉장히 무난하게 끝난 것이기도 하다.
- 일본 방송에서 이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캐스팅이 굉장히 화려한데, 일본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이 다수 출연한다. 한국측 고위관료로는 정래혁 국방부장관 역으로 일본 유학파로 일본어에 능통한 김응수가 출연했다.
[1] 해당 기체는 1965년에 일본항공에 인도된 기체였으며 등록 번호는 JA8315. 1975년까지 일본항공이 운용하다가 해외로 매각했다. 2019년 현재 하네다 발 후쿠오카 행은 JL303~335편이다.[2] 김포관제소 측은 기존의 항로를 무시하고 북쪽을 향해 나아가는 항공기의 정체를 처음엔 이상하게 여겼지만 곧바로 일본 교통성으로부터 당일 발신이 와 곧 납치된 여객기라는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3] 사실 707도 처음 창설되었을 때는 특전 사령관 친위대 목적이었지 대 테러 임무가 부여된 건 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 시기의 일이다.[4] 이 때 만약 대한민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했다면 사건이 해결됐을거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애초에 테러리스트가 장난감 무기를 들고 있을거라는 걸 예상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 정부가 무력 진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말마따나 무력진압하려 했으면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했을 때 진압했을 것이다.[5] 항간에는 이들 중 몇몇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는데, 몇몇 사망자는 북한에 적응을 못해서 나중에는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져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6] 이들은 전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이었으며 북한까지 오게 된 경위는 불분명하였다.[7] 다만 조총련등과 연계하여 일본 서해안지방에 나타나 납치당한 일본인의 수는 해마다 있었고 김일성 사망이후부터 북한측의 일본공작활동은 급감하게 된다.[8] 위에 설명한대로 북한이 '''자기가 한 말도 번복하는 추태를 보임으로써''' 북송이 인도주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9] 일본의 유명 스튜디오 뮤지션. #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며 다양한 뮤지션들과 작업했다. 와카바야시 모리아키로 60년대 후반 '하다카노 라리즈(裸のラリーズ)'라는 사이키델릭 록,노이즈 록밴드의 베이스 주자였고 교토 출신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0] 대학생 시절 신좌익운동을 펼쳤으며 평양에 자주 드나들며 요도호 멤버들과 자주 교류하는 편집자.[11] よぼよぼ, 일본어로 늙어서 쇠약해진 모양 등을 뜻한다. 비틀비틀.[12] 1970년 적군파에 의한 yodo호 하이잭.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라며 북한에 건너간지 40주년, 몸도 yobo yobo, 납치 혐의로 yobo yobo, 하지만 yodo는 yodo! 뭐든지 묻고&얘기해주세요. 무엇이든 받아들이고&대답하겠습니다. 납치의혹과 귀국, 북한에서의 생활 이것저것, 일본 얘기는 뭐든 가능합니다."[13] 한국판에서는 파도호로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