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1. 개요
子息 / Child
"양육의 과정이 너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로 기쁨입니다."
- 어떤 어머니
부모의 반댓말. 부모의 아이를 부모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빈말로 웬수와 이음동의라는 말이 나돈다. 어떻게보면 원수보다 더 못된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원수야 미워하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자신의 자식을 끝까지 미워만 할 수 있는 부모도 막장부모들을 제외하면 별로 없다. 이 대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 길 바란다."너는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1]
- 부모님들이 늘상 하는 관용적인 표현.
하지만 자식이 태어나기까지의 인과관계를 살펴보면 순전히 부모의 의사로 진행되는 터라 사실상 부모의 자업자득이며 외모든, 지능이든, 건강이든, 성격이든 자식에게 하자가 있다면 십중팔구는 부모가 그 원인이다.[2]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불효라는 말도 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3] 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4]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은, 자연에서 멸종하고 만다. 번식은 인간이 우주에서 지금까지 생존하게 할 수 있게 해준, 유일하고 반박불가한 수단이기 때문이다.[5] 번식의 결과물이 자기보다 먼저 죽어버리면 절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는 자식을 낳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식이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부모의 인생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모든 부모들에게 있어 자식이란 나이를 몇을 먹어도 어린애인 존재로서, 부성애와 모성애가 향하는 대상이다. 부모 앞에서 그 자식을 욕하면 큰일나는 이유.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은 자식이 어렸을 때는 부모의 뜻을 따르지만 자라서는 제 뜻대로 행동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철이 들어서 바르게 행동하면 좋지만 밖에서 사고나 치고 다니면 속이 탄다. 더불어 부모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늘 어린아이 같은 존재.
자식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부모의 본질도 같이 이해하도록 하자.
1.1. 욕설로써의 사용
욕설로 많이 쓰인다.(ex: 이 자식, 저 자식, 개자식, 짜식[6] ) 욕으로 쓰인다는 건 내 자식 급이라는 얘기의 의미이며 특히 접두어가 붙으면 그 사람의 부모를 욕보인다는 것이다. 개자식이면 개의 자식이니까... 다만 개새끼나 씨발놈보다는 어감이 좀 덜해서인지 TV 드라마에서는 종종 들을 수 있는 욕설 중 하나이다.'''이 자식 안 되겠어. 하루 빨리 수를 써야지.'''
1.2.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생을 마감했을 경우
보통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사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간혹 불의의 사고나 질병, 혹은 자살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남겨진 부모의 슬픔은 상상을 초월한다.[7] 특히 자살로 사망했을 경우 자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후회감까지 더해져 슬픔이 더욱 배가 된다. 어떤 부모들은 자식이 사망하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며, 병이 있는 부모의 경우 치료를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8] 자세한 것은 참척 항목 참고. 요절 항목을 참고해 보아도 좋다.
2. 출산과 자식에 대한 고찰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마치 기독교인이 신에 대비해 스스로를 극도로 낮추는 것처럼 부모가 신에, 자식이 그 피조물에 해당하는 포지션에 위치해있는 경우가 있으나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이 사회에 걸맞는 인간임을 간증하기 위해 저렇듯 과장해서 자식이 부모에 효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집착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으나 부모가 자식에게 많은 노력을 하고 시간과 돈 등을 소비하면서 자식을 키우며 부모는 많은 희생을 하는데 그런 부모에게 자식이 효를 다 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회의를 보일 시엔 패륜으로 매도 당할 때도 있고 완전히 매장을 당할 수도 있다. 인류 문화적으로, 21세기 이전까지는 우리 관점으로 아동 학대로 보일 일이 흔했고 그런 일에 자각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당장 10살도 안 된 아이한테 무거운 봇짐을 모두 들게 하는 게 양반의 풍속이었다.
현대에 대두된 개인주의적 관점에 의거하면 근대까지만 해도 '''자식은 번식 본능의 부산물 내지, 미래의 집안 일꾼(노동력),[9] 늙고 병들었을 때 간병해주고, 부모를 경제적으로 부양해줄 노후 대책, 그리고 가문 세습을 위한 것이었다.'''[10] 가문 및 재산, 관계의 세습을 위한 유기적 관계로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성을 의거하는 이러한 의식은 최근에서야 흐려지고 있다. 현대 들어서는 핵가족화되면서 개개인에 천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여태까지는 그저 의문 없이 당위로 여겨지던, 소위 대를 잇고 수발을 받는 시스템에 회의를 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자식의 탄생에서 당사자인 자식의 의사는 전혀 반영될 수가 없고 순전히 부모의 의사에 의해 강제적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자각한 자식 본인 및 부모의 도덕적, 심리적 부채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11][12]
실제로 선진국일수록 출산율이 급격하게 저하하는 건 이런 이성적 사고가 크게 작용한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출산률의 저하 및 급증은 그 세대의 생의 욕구, 즉 생을 영위하게 되는 상황 및 개인적인 삶의 만족 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례로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6.25 전쟁 이후 국가 및 국민 전체에게 있어 망가진 삶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다시 일어서겠다' 혹은 '절대로 내 자식들은 이런 꼴을 당하게 하지 않겠다'는 갱생에 대한 의지가 자연발화된 과정으로서 발견되고 있다. 즉 출산율은 현 세대(부모가 될 수 있는)의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 및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증감여부[13] 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노예가 세습적으로 대물림되는 노예인 자식을 낳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최근의 일로, 자식이 어느 정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책임질 수 있을 자신이 있을 때만 낳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낳지않는 것이 낫다는 것. 이른바 '낳은 죄'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제3세계에서 낳은 아이가 굶어 죽든 말든 별 생각 없이 섹스하고 임신하면 낳고 보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라는 존재를 아예 의도하지 않고, 본능대로 살다보면 생길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 현재도 미국 등의 빈민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에서는 오히려 이를 악용해서 양육비 셔틀로 자식을 낳는 저소득층들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자식에 대한 책임의식의 결여로 인해서 고대사회부터 출산은 그들을 책임질 수 있는 온전한 형태의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시작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으며, 이 가정은 '결혼'에서 시작하였다. 즉 '결혼'을 한 상태의 성인은 상대방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으며, 이러한 책임 의식을 가진 상황에서만 '자식'을 낳는 것이 올바른 형태였던 것.[14]
한국의 경우, '덮어놓고 주렁주렁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는 식의 70, 80년대의 슬로건은 가정 및 인간의 몸에 대한 사회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표상으로 연구되는 주제이지만, 먼저는 극도의 사회-문화-경제적인 발전 하에서 '한 가정이 책임질 수 있는 자식의 수'를 네 명, 세 명, 두 명으로 규정하는 의식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이기도 하다.[15]
시민의식이 발달한 사회의 경우, 자식이란 곧 내가 개인으로서 책임져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도,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및 상황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질 경우 도리어 더한 무게를 짊어지게 될 여부가 있기 때문에 되도록 피하려고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한국 사회에서 자식에 대한 애정은 높지만 도리어 시간이 지날 수록 출산율이 저하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 자신의 반신과 같고, 자신의 삶을 이어서 살아갈 존재(자식)를 귀하게 여기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을 하나의 삶에 있는 부채나 노후를 위한 보험 등으로 여기기보다 삶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 기쁨, 환희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각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16] 물론 이것도 결국은 태어날 자식의 의사가 어떻든 부모가 자기 만족을 위해 낳는다는 것을 강력하게 긍정하는 것일 뿐이긴 하다.
사실 본능적인 혈연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이미 세상에 흘러 넘칠 정도로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는 입양을 하는 것이 선행이 될 것이다. 한국은 혈연 중심의 사고 방식이 유독 강해 입양아 수출율(...)은 높은데 입양률이 낮은 편.[17]
제3세계의 경우 선진국 및 개발도상국들과의 문화적/사회적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며, 이에 따라 '버려지는 자식'에 대한 태도 또한 매우 다르다. 아프리카라의 심각한 빈곤국 등을 살피면 보건 및 윤리의식 자체가 선진국과는 다르다. 자식을 낳는 것이 온전한 형태의 가정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흔한데, 미숙한 피임 및 책임의식이 결여된 상황에서 자식이 발생하는 경우가 전체 출산율에서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18]
현실적으로 본인의 삶을 유지할 경제력 마련도 힘든 상황에서, 출산한 아이를 책임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십중팔구 아이 유기로 이어진다.[19] '자식'에 대한 의식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내지는 내 삶의 아주 큰 보람'인 선진국 및 시민사회와는 매우 다른 양상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는 개념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는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하고, 성장한 후에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자식의 의무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학 및 심리학에서는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지도 않고, 그렇게 했다가는 부모자식 관계가 파탄나기 십상이라고 한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입각해 행동하는 경향과 개인주의가 강해졌고 정보의 양도 많다. 그렇다보니 자식들도 부모 외에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삶에 필요한 정보를 취득할 수 있어졌으며 새로운 이념이나 사고관을 접할 기회도 많아졌고 뭔가에 대한 호불호를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아졌다. 그래서 옛날에는 부각되지 못했던 갈등들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20]
실제로 교육 문제로 인한 부모자식 간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방송에 나온 사례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부모 스스로의 목표를 정해 두고 자식에게 그것을 강요하면서 생겨나는 갈등이 많다.[21]
특히 배움에 한이 맺혀서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이 경우 부모의 교육에 대한 신념은 강하지만 자기도 안 해본 공부이기 때문에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를 잘 모른다. 그나마 공부 잘하는 자식을 뒀다면 큰 탈은 없겠지만 자식이 공부에 소질이 없을 경우 엄청난 갈등과 스트레스를 일으키게 된다.[22]
배움 외에도 부모가 원하는 자식상과 현재의 자식이 일치하지 못해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엄마도 사람이야의 케이스처럼 자식이 다 컸는데도 불구하고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은채로 부모에게 빈대붙어서 사는 경우라면 원하는 자식상 이전에(...) 그 자식 개인의 성향 문제를 거론해봐야 하지만, 단순히 호불호 차이라던가 이념 차이 등으로 발생하는 문제들 ─ 진로 문제 갈등이라던가 직업 문제 갈등이라던가 혼수 문제 갈등이라던가 ─ 의 경우에는 부모가 원하는 자식상 VS 실제 자식의 대립으로 연장전이 이어질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이 경우 둘 다 한 발씩 물러서서 서로의 입장을 다시 조망해보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럴때에는 부모와 자식 양측 모두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공부의 속성에 대해 이해하고 합의하는 것이 가장 좋다.[23] 하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공부 자체를 강요하기보다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아이에게 올바르게 납득시켜서 스스로 공부를 하게 만드는 편이 좋다. 뿐만아니라, 부모도 자식 못지않게 공부법, 적성, 전망 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최근에는 심각해진 청년실업과 미래의 부모 부양 문제로도 자식 - 부모간의 갈등의 골이 생기거나 더 깊어진다고 한다. 부모가 언제까지고 자식을 받쳐줄 수는 없는데 자식이 '''어느 방면으로든''' 취업을 못하고 집에서 취준생/고시낭인/백수/니트로 눌러앉아버리면 부모고 자식이고 답이 없는데다가(...) 저 상황이 고착화되면 양방 모두에게 큰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 돈이 원없이 있다면야 이런 골은 당연히 해결되지만[24] 보통은 없기 때문에 갈등이 더욱 심화된다. 그 외에도 다른 집 자식들과의 비교로 인해 발생하는 부모의 질투로 자식들이 구박받는 경우도 많다.[25] 집단주의 + 경쟁주의 + 취업난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비교 문제도 더욱 강해져서[26] 비교당하는 자식들의 고충호소도 늘어나는 상황.[27]
최근에는 부모 - 자식간의 정서적 분리가 중요하다는 말도 대두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가 완전히 분리되어 알아서 살아가는 독립적인 개체로 완전히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요구하고 행동을 강제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
모성애 담론과도 자식은 어느 정도 연결되기도 한다. 부모, 특히 자식을 배고 출산하는 쪽이 여자인지라 모성애 쪽이 부성애 쪽보다 더 강조되기도 하고, 모성애 비판론이 생길 정도로 여자에게 육아적 책임이 떠넘겨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그러나 모성애가 절대적인건 아닌게 낳아놓고도 모성애를 못 느껴서[28] 고민하는 어머니들도 있고 어머니 쪽이 오히려 아동학대를 자행하는 와중에 모성애를 보여주지 않는 경우도 있고, 여자 쪽이 오히려 낙태에 더 찬성하는 의견, 즉 여자가 통념대로 남자보다 더 자식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도 존재하기 때문이다.[29]
3. 일부 불완전한 관계
3.1. 생이별
“태어난 지 4일 됐어요”…버려지는 베네수엘라 아이들[30]
자식과 부모가 이별하는건 정말 슬픈 일이고,특히 생이별하는 건 더욱 더 비극이다. 그래서 어려서 헤어지고(특히 키울 형편이 안되어서 교회 앞에 업둥이로...) 나중에 찾는 것은 수많은 매체에서 나왔으며,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자식들이 어려서 헤어진 부모들을 찾는건 더욱 더 슬프다.
대부분의 자식은 부모의 슬하에서 키워지는 게 당연하지만, 일부는 부모에게서 버려지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이 버려진 자의 인생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위험은 생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 이겨내고 성공한 케이스도 많지만, 전 세계와 모든 문화권을를 막론하고 삶이 불우한 케이스를 찾을 경우 손꼽히는 위치는 바로 이 "버려진 자식"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복지와 인권에 대한 인식 때문에, 뉴스에 나올법한 말그대로 '버린다'기 보단, 더 좋은 양부모를 만나라고 다른 곳에 입양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미혼모/미혼부에 대한 인식과 당사자들의 육아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양육을 포기하여 '고아 수출 상위권 국가[31] '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으며, 특히 입양절차의 비현실성 때문에 베이비 박스를 통해 아이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니 '''제발 계획과 마음의 준비 없이 자식을 만드는 일은 절대 하지 말자.''' 애당초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고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해도 좋은 부모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계획도 없고 마음의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출산을 한다면 당연히 막장 부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혈육과 뿌리를 알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해외입양아들이 후에 장성해서 자신의 생모를 찾아 오는 뉴스도 간간히 볼 수 있다.[32]
3.2. 아동 학대
아이를 낳고 무책임하게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악독한 짓으로 자식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최악의 경우도 있다. 이건 불완전이 아니라 비정상에 가까운 범주. 이곳, 저곳 참조.
3.3. 양자(養子)
이 경우는 현대에는 잘 없지만, [33] 불과 예전만 해도 꽤 있던 경우로, 쉽게 말하자면 아들이 없어서 동성동본인 조카뻘 남자아이를 그냥 자기 아들로 삼는 것이다. (보통 남동생이나 형의 아들을 양자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은 생이별은 아니지만, 평소에 친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불안감이나 외로움 등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도 그냥저냥 잘 사는 경우도 있으니 케바케.
4. 관련 문서
[1]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세한 것은 임신, 성관계 문서를 참고하자. 다리(건축물)과 발음이 같다는걸 이용한 장난.[2] 사실 영유아기까지만 해도 자식은 절대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부모의 양육태도, 사고관, 부모가 해주는 경험 등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문제대처방식도 부모에게 크게 영향을 받는데 자식에게 지나치게 과민반응하는 부모나 자식에게 지나치게 무정한 부모(츤데레 부모도 포함한다. 속은 표현하고픈게 많지만 여러 이유로 참는 부모들 )를 보고 자라는 자식들의 문제대처방식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며, 이를 자기 자식에게 똑같이 대물림하는 끔찍함(...)으로 이어진다. 또한 부모가 자식의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대처법을 내놓지 못하거나 대처법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안 하고 무관심/격한 거부반응(왜 너만 그러냐 하는 식의 분노나 원망 등)/정서뿐인 반응(슬퍼하거나 분노할 뿐 제대로 된 대처법을 내놓질 못하는 반응) 등을 내놓으면 자식은 (이에 대해 반응을 어떻게 내놓든 간에) 부모에게 불신감을 가지고 부모의 역할수행과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또한 부모가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라던가 부모가 어른을 대하는 태도,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라고 가르치는 태도도 자식의 대인관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사실상 양부모건 친부모건 (+ 부모 역할을 부모 대신 쭉 해주는 친인척이건) 자식이 가장 먼저 모델링하는 건 부모이기 때문(...)[3]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4] 물론, 자식도 자신의 부모가 막장이 아닌 이상 부모가 죽으면 가슴에 묻기는 마찬가지다. 보통은 부모가 먼저 죽기에 자식이 부모를 가슴에 묻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불행한 사고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5] 사실 대부분의 생물 공통사항이며 인간도 다른 생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에 쓰이기도 한다. 동시에 온갖 비극과 희극이 반복되는 이유기도 하다.[6] 더 많이 쓰는 새끼는 자식보다 더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7] 이는 자식들도 마찬가지로 부모 한쪽이나 동시에 세상을 떠나거나 이혼하면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특히 부모가 막장부모였다면 마음의 상처와 동시에 부모에 대한 불신까지 이어진다.[8] 2008년 9월 사망한 안재환의 어머니는 평소 암을 앓고 있었는데, 안재환이 사망한 후 너무 큰 상실감에 식사도 거부하고 항암치료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년 6개월 후 사망했다.[9] 모성애가 서구권에서 강조되던 근대 역시 산업혁명 등으로 인해 나라에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해지고 이를 양성할 필요성이 생기자 노동력 양산 목적으로 여성들에게 이를 강요하며 자식 세대를 차출하기를 요구했다는 말이 있다.[10] 그렇기에 자식이 다 커서도 부모에게 우호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지속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서 효 사상이 생겨났다는 말도 있다. 어찌보면 효야말로 부모가 자식에게 들어놓는 '앞으로의 태도' 에 관한 보험인 셈일지도?[11] 쉽게 말해 과거에는 자각을 하더라도 그냥 도로 덮어버리던 부모 자식 관계의 불편한 진실을 21세기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전근대에도 이런 사실을 자각하고 반출생주의 등의 사상을 주창한 사람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민족의 번영을 저해하는 사상이라며 극심한 배척을 받았다.[12] 더불어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이유가 단순히 낳아줘서가 아니라는 사실도 대두되기 시작했다. 정말로 모든 사람이 단순히 낳아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에게 크나큰 감사함을 느낀다면 단순히 양육이 귀찮다고 자식을 버리는 막장 부모에게조차 자식이 감사함을 느껴야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을 당한 자식은 부모에게 증오와 원망만을 품을 뿐이다. 그러니 자식이 감사함을 품는 건 낳아줘서라기보단 부모가 낳아준 후에 자기 삶을 제대로 책임져줬기 때문에 + 여러가지 정서적 보조를 해줬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자식 입장에서도 아무리 잘 비호받았어도 고마움을 전혀 못 느끼고 이를 단순한 자연의 섭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식도 있고, 부모에게 이를 갚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는 자식도 있으며 언젠가는 부모를 내가 책임져줘야 한다는 걸 의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자식들도 있다. 다만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형은 나중에 가정을 꾸리고 나서 처자식보다 부모를 우선시하다가 가정불화를 겪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13] 예를 들어 아이를 낳았을 때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가? 이 아이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와 상황을 줄 수 있는가? 등의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이 본인에게서-사회에게서 얼마나 나올 수 있는지[14]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이러한 결혼관계 외에서 태어난 사생아 등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터부시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도 옳은 건 아니다. 사생아가 무슨 죄가 있겠나, 오히려 그런 사생아를 만든 막장 부모의 잘못이지. 영아사망율이 높던 시절의 소위 '인지'한다는 개념도 이와 관계가 있다. 인지하지 않은 아이는 제대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성의 없는 집단 돌무덤이라든가.. 아이들이 툭하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감정 효율성'의 논리로 저런 식으로라도 억지로 정을 떼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15] 지금은 오히려 출산율 저하 때문에 문제지만.[16]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모리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자식을 낳고 기른 경험이 스스로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여겼으며,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하더라도 그 경험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대변했다.[17] 물론 한국 가정 내에서도 기꺼이 입양아를 거둬 기르는 사람들이나 입양아를 거둬서 정서적인 치료까지 손수 진행하는 열성적인 양부모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혈연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심한 한국 사회에서 양부모는 보기 드물다. [18] 이는 자식의 존재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결혼한 부모, 가정과는 다르다.[19] 50, 60년대에 극빈국이었던 한국에서는 수많은 아이를 낳아도 기를 수가 없어서(혹은 낙태 및 유산시도가 실패해서)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는 상황이 매우 많았으며 '최다 아이수출국'이라는 오명을 가지게 되었다. 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 가정에서도 낳은 아이를 입양보내는 마당에 의도하지 않은 출산으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다.[20] 옛날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가하는 통제가 굉장히 엄격하고 기계적이었기에, 자식들은 오래전부터 부모에게 통제받는 것을 거의 당연시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니 자식으로써 부모에게 반대하는 의견을 꺼내는 것이 꽤나 힘들었다. 그러나 요새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제법 자유를 많이 주는 편이고, 사회 인식도 많이 바뀌었기에 (즉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변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아동 학대 신고조차 꿈도 못꾼 일이니.[21] 자식이 어리고 뭘 모를 시절에는 부모의 말이 절대적인 이치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으니 당연히 이를 따르지만, 자식도 여러가지를 배우고 자라나면서 스스로의 사고관이 확립되기 마련이다. 이 때 자식의 사고관과 호불호가 부모의 사고관과 호불호, 그리고 부모의 목표에 상충할 경우 본격적인 갈등이 일어난다. 물론 부모로써는 인생의 선배로서 자식이 힘든 길을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며 자신이 세운 목표가 낫다고 여기고 자식이 아직 뭘 모른다고 할 수도 있으며, 자식이 욕망만 앞서서 잘못 나가는 것을 두고볼 수 없기에 그러는 경우도 있다. (실재로 자식이 지나치게 과소비를 한다던가, 도박 등 위험한 곳에 빠졌다던가 하면 자식이 옳다고 우기는 것에 대한 당위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망치는 길이므로) 그렇지만 단순히 서로의 이념이 상충하는 경우에도 부모의 생각만 믿고 자신의 생각만을 마구 밀어부치며 자식과 공감대를 포기해버리는 부모들도 많다. (이런 부모들은 왜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이해를 못해? 라고 자식에게 계속 말한다. 그러나 자식도 이미 자기만의 이념, 사고관, 목표가 생겨버렸고 그걸 유지하고자 하는데 이제와서 부모의 강요가 귀에 닿을까?) 이럴 경우 부모와 자식은 더욱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22] 공부 외에 다른 쪽으로는 재능이 있어서 그걸로 부각받아서(...) 취급이 나아지는 케이스도 있지만 그런 재능이 있어도 공부 못한다고 쿠사리먹고 재능을 죽이는 케이스라던가 공부도 못하고 다른 쪽으로도 못해서 이도저도 아닌 케이스의 경우 받는 스트레스도 엄청나고 미래에 대한 부담감도 엄청나게 다가온다. 특히 요즘과 같이 일명 '''취업난''' 시대의 경우 눈에 띄는 스펙을 쌓지 못하면 일할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 [23] 일단 공부를 출세의 수단으로 여기는 순간 타락한다는 것부터 이해해야 한다.[24] 경제적 독립이나 부모에 대한 부양이나 미래의 생활 유지나 모두 돈이 있어야 해결되는것이고, 역으로 저것들을 다 해결할 정도로 돈이 썩어넘친다면 고민할 필요따윈 없어지기 때문. [25] 주로 쓰이는 클리셰로는 '다른 집 애는 ~대학교 합격했다는데' , '다른 집 애는 몸매 관리도 잘 하고 이성친구/예비 배우자도 가지고 있다는데~', '다른 집 애는 어디 좋은 데 취직했다는데' , '다른 집 애는 시험 잘 봤다는데' 등등등(....) [26] 일종의 조바심에서 기인하는 문제라 볼 수 있다[27] 독립이 답이긴 하지만 현대 사회는 청년층이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독립하기에 매우 어려운 환경이기에 부모의 지원이 초기에 받쳐주지 않으면 독립해서 살아가기가 힘들다. 일단 개인 목돈을 쥐어줄 직업부터 찾기가 너무 어려운 상황이고 떨어져 살아갈 월셋방 구하기도 힘들다(...) 또 혼자 사는 건 생각보다 꽤 많은 노동력 소모와 정신적 소모를 가져오기에 (부모가 다 해줬던 걸 일일히 혼자서 다 해야한다고 생각해보자. 스트레스가 바로 밀려오지 않는가...?) 부모 문제만 빼면 기존에 살던 집이 너무 편해서 부모를 싫어하면서도 집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불평하는 태세를 유지하면서도 집에 눌러앉아 부모와의 갈등을 지속하기도 한다. 한편 부모 입장에서도 분리가 안 돼서 골칫거리인 자식들을 독립시키고 싶어하지만 요즘은 중산층이라 불릴만한 부모 세대도 줄어들어서 일단 '''독립하는데 쓰라고 내어줄 돈도 부족하기도 하고''' 자식이 돈 받고 나가서 엄한 데 써버리지 않나 하거나 혼자 살다 힘들거나 위험한 일을 당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나 우려도 따라오고, 한편으로는 자식을 아직도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지배욕 등등이 합쳐져서 나가려는 자식을 쉬이 내보내지 않기도 한다.[28] 보통 원치 않은 임신-출산행일 경우에 한하는 케이스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자기가 출산과 육아를 계획하고 낳아놨는데도 정작 아이에 대해 애정이 안 생기는 경우가 있다. 더 심한 경우 산후우울증에 걸려 아이를 방치/학대/사망에 이르게 하는 케이스도 있을 정도.[29] 사실 이런 경우 어머니도 고생하지만 자식 역시 마찬가지로 고생한다. 어머니 쪽은 최소 낳느냐 마느냐라도 택할 수 있지만 자식은 말 그대로 자기 의사는 철저히 배제당하고 오로지 부모의 의사에 의해 대뜸 세상에 배출된(...) 케이스인데 어머니 쪽에서 애정이 안 생긴다느니 어쩌냐느니 하는 이유로 취급을 나쁘게 하면 그 피해를 영문도 모른 채로 고스란히 받기 때문. 심한 경우 과거 자식을 정서적·육체적으로 학대한 막장무보 케이스에 속하는 어머니들이 나중에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달라 요구하거나 이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 식으로 나와서 상처받는 자식들도 제법 있다.[30] 왜 하필 베네수엘라 아이들이 버려지는지에 대해서는 베네수엘라/경제 항목 참조.[31] 유기된 아기들의 수가 국내의 입양수요보다 더 많아서(…) 해외로 보내서 그렇다고.[32] 그러나 열심히 찾은 생모에 대한 진상이나 친가족의 태도를 보고 실망해서 돌아서는 경우도 있고, 생모에 대해 자기를 버린 존재라 생각해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람들도 있다. 결론은 이쪽도 케바케.[33] 애초에 현대에는 남아 선호 사상은 커녕 아예 애를 안 낳으려고 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