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 상륙작전

 


1. 개요
2. 준비
2.1. 제1 유격대대의 편성과 훈련
2.2. 작전 발령과 출동 준비
3. 작전 경과
3.1. 상륙 개시
3.2. 북한군의 반격
3.3. 한국군, 미군의 구출 시도
3.4. 철수 완료
4. 결과
5. 작전에 대한 열악한 지원
6. 잘못 알려진 부분
7. 장사 상륙작전의 진실
8. 여담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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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상륙작전 개시 당시의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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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상륙작전희생자 위령비


1. 개요


6.25 전쟁 초반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린 상황이었던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실시에 맞추어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한 기만작전의 일환으로 서해안의 인천과 정반대 방향인 동해안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위치한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일대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전개된 양동작전.
학도기간대원으로 구성된 육본 독립 제1 유격대대(대대장 이명흠 대위)[1] 772명[2]이 중심이 되어 수행한 작전이다. 9월 15일 새벽 05시경 북한군의 공격으로 부대 수송을 맡은 LST 문산함이 좌초하고 다수의 탄약을 유실하는 등 작전 개시 초반부터 난관에 빠졌으나, 악전고투 끝에 09시경 전 대대가 상륙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주 보급로인 7번 국도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9월 19일 구조작전이 진행되어 철수할 때까지 전사 139명, 포로 39명의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4일 넘게 방어를 지속하여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과 낙동강 전선 동부의 북한군 전력 약화에 큰 공을 세웠다.
작전이 있었던 영덕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한켠에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과 전승기념공원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오늘날에는 동해선 장사역이 개통하여 동해안을 낀 휴양 관광지가 되었다.

2. 준비



2.1. 제1 유격대대의 편성과 훈련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육군본부 계엄민사부 동원과장 이명흠 대위가 편성한 제1 유격대대였다. 이명흠은 육사 5기 출신의 정훈장교로, 개전 이후에는 각종 선무공작을 수행하면서 북한군의 유격전(게릴라전)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군에는 항일투쟁,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통해 유격전 경험이 풍부한 인력이 많아 유격전을 적극 구사하였다. 정규군의 전면공격 이전에 유격대를 투입해 후방을 교란하는 통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여러 차례 큰 곤경을 겪었다.[3] 이를 절감한 이명흠은 개전 초부터 육군본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 작전교육국장 강문봉 대령[4]에게 유격대 편성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육군 수뇌부가 유격대 편성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1950년 8월에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과 남한 및 유엔군 사이의 전투가 격화되자, 전방에 집중되는 북한군의 압력을 덜고 반격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유격전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되어, 이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한국 청년들은 유격전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호언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윗분의 뜻이 분명해지자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도 긍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육군은 이에 따라 육군본부 직할로 다양한 유격대를 편성하고 낙오병, 예비병력 등을 긁어모아 잡다한 단기 소규모 작전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강문봉도 이에 맞춰 8월 중순에 이명흠이 희망하던 유격대 편성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병력자원을 조달할 지역이 경상남북도와 제주도로 한정되어 있어서, 가용한 청년들은 손실이 극심한 정규군을 보충하기에도 벅찬 지경이었다. 정규군과는 별도의 경로로 모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명흠은 그래서 대한애국단 단원들 수 명을 거느리고 대구역 광장 등 대구 시내로 나가 직접 모병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대구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학교는 모두 휴교하여 청년 및 학생들이 다수 배회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 모병에 적극 응했다. 예상보다 많은 청년들이 자원을 했기 때문에, 이명흠은 특히 사상이 건전하고 키 크고 담력 있어 보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병력을 선별했다고 한다.[5] 이들은 8월 24일에 대구역에서 화물열차로 밀양역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이들은 독립군 출신인 최윤동[6] 전 의원이 독자적으로 모병한 청년들과 합류한다. 이렇게 모인 총 760명의 병력으로 1950년 8월 27일에 밀양에서 독립 제1 유격대대, 이른바 '명(明)부대'[7]가 3개 중대 편제로 편성되었다.[8] 여기서 확인된 학도병의 수는 677명이며, 나머지는 기간이 되는 정규 장교 및 부사관이다.
그러나 당시 급박한 전황 속에서 보급 순위에서 밀리는 유격대대는 개인화기조차 전혀 지급받지 못한 채, 구보 등 체력단련과 정신교육 중심으로밖에 훈련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며칠 뒤인 8월 31일 이 부대는 강문봉 대령 지시로 부산의 육군본부로 이동하게 된다. 이들은 부산 문현동에 위치해 있던 육군본부[9]에서 숙식하며 조금 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여기서 부대원들은 아직 정식 군번은 받지 못하지만, 일단 임시로 강문봉 명의의 '육본직할 유격대원'이라는 대원증을 발급받는다. 그리고 유격전에 필요한 간단한 소화기 사용법 및 교량, 토치카 등의 파괴 방법 등을 교육받았다. 후방에서 적으로 위장할 때를 대비해 북한 출신 대원들을 교관으로 삼아 북한군 군가도 학습하였다. 이때 훈련에 이용된 화기들도 대부분 모신나강 소총과 PPSh-41 기관단총, 맥심 기관총 등 노획된 북한군 무기들이었다. 물론 물자부족이 실질적인 이유였으나, 표면적으로는 유격전 도중 적의 보급물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0]

2.2. 작전 발령과 출동 준비


1950년 8월 말, 인천 상륙작전의 결행이 결정되자 유엔군 및 한국군은 여러 기만작전을 동시에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서해안에서 군산 기습작전이 준비된 것과 마찬가지의 작전을 동해안에서도 결행하려고 했다. 군산 기습작전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인천 상륙작전 2일 전인 9월 13일에 웨어(James H. Wear) 소령이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직할 침투중대(Raider Company)와 영국 해군의 자원병들로 이루어진 혼성 특수부대가 영국 해군의 방공호위함 HMS 화이트샌드베이(Whitesand Bay)의 지원을 받아 군산 인근 해안에 공격을 감행한 소규모 양동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해안 방어부대의 반격을 받아 3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곧장 퇴각하였다.[11] 이와 같이 잘 훈련된 소규모 특수부대가 동해안 요충지에 치고 빠지기 식의 작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군은 제8군 직속으로 새로 창설된 레인저 중대(Ranger Company)를 투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검 결과 이 부대는 아직 훈련이 완료되지 않아 실전 투입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는다. 대신 유엔군 총사령부에서는 한국군 육군본부를 통해 영덕-포항 등 동해안 전선을 담당한 제3사단에서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상륙작전을 벌일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문제는 9월 초에 포항 일대의 전선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형산강 전선에서 북한군 제2군단은 제5사단 병력은 물론, 제766부대와 제12사단 병력이 총동원되어 전선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다. 실제 제5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계속 압박을 가해 경주와 영일비행장으로의 돌파구를 뚫기 일보 직전에 있었다. 이미 사단 전 전력이 제2군단 저지에 투입된 제3사단으로서는 1개 대대 차출도 곤란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안은 한국 육군 입장에서도 매우 매력적이어서 그냥 포기하기는 아까웠다. 이때 육군에서 주목한 것이 제1 유격대대였다. 일설에는 제3사단에서 예하 병력을 빼내기 곤란하자 대신 유격대대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도 한다.[12] 편성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제1 유격대대를 부산의 육군본부로 불러들인 것도 이런 양동작전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강문봉은 이러한 작전 내용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가 9월 10일 무렵에야 이명흠을 호출하였다.[13] 강문봉은 이 자리에서 뜬금없이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위치한 적 후방인 장사 해안에 상륙하라[14]는 지시를 내린다. 이명흠은 이제 막 2주 남짓밖에 훈련을 받지 않은 이 부대가 상륙작전을 수행하는건 무모한 짓이라고 항변하였다. 하지만 강문봉은 전선에서 빼낼 정규부대는 전혀 없으며, 포항 지구 전선을 압박하고 있는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력을 꺾기 위해서는 후방 보급 차단이 불가피하다고 무조건 실행을 명령하였다. 당시 인천 상륙작전 준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던 이명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륙작전이었지만, 육군본부가 다음의 작전명령 제174호로 출동을 정식 명령했으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군사극비'''

육본 작명 제174호, 육군본부 경남부산, 4283[15]

.9.10.16:00

1. (1) 적 약 2개 사단[16]

은 포항(1234-1461) 안강(1220-1455)선을 점령하고 계속 남침을 기도하고 있음.

(2) 아군 제3사단은 차 적에 대하야 맹렬한 섬멸을 전개하고 있음.

1. 군은 일부 부대를 이동하려 함.

1. (1) 육본 직할 유격대장은 예하 '''제1대대를 D일 H시 P장소에 상륙을 감행'''시켜 동대산(1225-1493)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제1군단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

(2) 세부는 작전교육국장으로 하여금 지시케 함.

…(후략)…

위의 명령서 내용에서 보듯 명령서에 시간과 장소는 적시하지 않았고, 이후 구두로 '''9월 15일[17]에 장사 해안에 상륙'''하도록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부대는 9월 12일부터 본격적인 출동준비에 들어갔고, 작전 불과 2일 전인 이때야 비로소 제1군단으로부터 전투물자를 지급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9월 13일, 출동 전날에 작전을 위한 부대 재편성이 있었다. 기만작전의 성격상 이 부대는 대대급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으로 위장하였으며, 당초 3개 중대, 이후 180명씩 4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던 각 중대는 '연대'로 호칭하였다. (1중대→제28연대, 2중대→제29연대, 3중대→제32연대, 5중대[18]→제37연대) 정규 장교인 지휘관들에게도 모두 임시 계급을 부여해 이명흠 대위는 '임시 소장' 계급을 달았고, 각 중대장들도 임시 대령(또는 중령) 계급을 부여받았다.
9월 14일에는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정식 출정식'''까지 거행하였다.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는 부대들의 경우 보안을 유지하며 조용히 빠져나간데 반해, 이들의 출정식에는 무려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육군본부의 고위 장교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출정식 이후에는 육군본부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뒤, 트럭을 타고 부산항 제4부두로 이동했다. 이것도 일부러 백주대낮에 대로를 따라 실시하여 시민들의 환송까지 받을 정도였다. 편성된지 3주밖에 안 되는 학도병 중심의 대대급 부대의 출정을 사단급 부대의 대규모 작전이라고 의도적으로 과시, 역정보를 흘리려는 성동격서라 할 수 있었다.
기만술책은 부두에서도 계속되었다. 부두에는 미군 병력도 대기하고 있었는데, 대대는 탑승할 문산호를 지정받은 뒤에 미군과 번갈아 승선과 하선을 수 차례 반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역시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북한 간첩들에게 장사 상륙작전이 사단급 한국군 병력뿐 아니라, 미군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작전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기만술책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최종적으로 16시까지 모든 조치들이 완료되어 출항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기만까지 신경 쓴 그럴듯해 보이는 작전 이면의 지원 계획은 형편없었다. 무엇보다 상륙작전 성공에 필수적인 화력 지원이 매우 부실했다. 당초에 유격대대의 투입을 제안한 제3사단은 훈련이 부실한 이 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미 육군에서도 1개 전차중대와 1개 전투공병소대를 참여시키고 미 해군은 강력한 예비포격을 퍼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과 낙동강 전선의 방어에 역시 전력이 대거 투입된지라 유엔군 총사령부는 이 요청을 단칼에 거절한다. 게다가 막강한 화력의 중순양함~구축함 다수를 이끌고 동해안 포격지원 임무에 투입된 미 해군 95.2기동전단(Task Group 95.2)[19]은 9월 15일에 삼척을 포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 바람에 (미군 레인저를 이용한) 상륙작전 논의 초기부터 관여되어 있던 95.2기동전단 전단장 하트먼(Charles C. Hartman) 소장은 아예 상륙작전이 취소된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대신 미 해군은 글리브스급 구축함 USS 엔디코트(Endicott)(DMS-35) 함 1척만을 지원해준다. 만약에 상륙 당일 삼척 포격 대신에 95.2기동전단이 일부라도 추가 지원에 나섰더라면 장사 상륙작전의 결과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란 점에서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LST 문산호에 탑승한 병력은 본래의 제1 유격대대 병력 외에도, 육군본부에서 통신지원차 파견한 제51 통신대 소속의 통신병 12명, 문산호 선원 42명, 해군 헌병 5명이었다. 또한 육군본부는 대대의 부족한 실전경험을 보완하고자 개전시 제1사단 12연대장이었던 전성호[20] 현역 대령을 전술고문으로 임명하고 연락병 3명을 배속시켰으며, 과거 국민혁명군 출신으로 실전경험이 있던 박영선을 정략고문으로 임명하는 등 총 3명의 민간인도 탑승시켰다. 미 해군 소속으로는 엔디코트 함에서 통신을 위해 파견한 연락장교 1명(해리슨 중위)과 부사관 1명(쿠퍼 상사), 통역 1명이 탑승했다. 이들 총 841명이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3. 작전 경과



3.1. 상륙 개시


9월 14일 16시에 상륙부대를 싣고 부산항을 출발한 LST 문산호는 지원을 맡은 미 해군 엔디코트 함[21]과 해상에서 합류하여 작전 지역으로 이동했다. 문산호에는 엔디코트 함과의 통신을 위해 2명(해리슨 중위, 쿠퍼 상사)이 파견나와 있었으나, 이들이 갖고 온 통신장비는 SCR-300 워키토키 1조가 전부여서 불안 소지가 매우 높았다. 게다가 바로 9월 13일에 태풍 케지아(Kezia)가 일본 규슈 지방을 직격하고 동해상으로 빠져 나간 뒤여서, 바다의 사정도 몹시 안 좋았다. 문산호는 천신만고 끝에 9월 15일 새벽 05시 경에야 장사동 해안 외곽 4㎞ 지점에 도달했으나, 해안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있었고 아직도 파도가 매우 높아 정확한 상륙지점을 분간하기도, 해안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렇게 장사동에 도착한 문산호는 새벽 5시 30분경 선미 닻을 내리고 접안을 시도하지만 높은 파도로 인해 닻이 끊어져 버리면서 바람에 의해 해안선에 평행으로 놓이며 좌초되버린다
이렇게 문산호가 해안 인근에서 좌초되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장사동 인근 고지에 위치한 북한군 방어부대가 문산호를 먼저 포착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상륙부대에게는 운이 나쁘게도, 장사동 일대에는 포항 일대의 격전 와중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제5사단 제12연대 예하 병력이 전선에서 물러나 예비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장사동은 해안가 마을 주변이 고지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라, 기습을 달성하지 않는 이상 이들 고지에 자리잡은 북한군 방어부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곳이었다. 악천후로 기습상륙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문산호를 향해 집중포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어부대의 박격포탄이 지근탄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정상적인 접안이 불가능해지자, 이명흠은 7명의 특공조를 차출하여 해안으로 밧줄을 들고 헤엄쳐 가서 백사장의 소나무에 연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특공조들은 강풍과 파도, 맹렬한 사격에 휘말려 전사하기를 반복했으며, 결국 추가 특공조들이 편성된 끝에 해안과 4개의 밧줄을 잇는데 성공한다.
이명흠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하여 해안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 밧줄을 붙잡고 2중대에게 상륙을 개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사이에 문산호는 계속 집중포화를 얻어맞아 05시30분부터 선미의 기관부 등이 고장, 침수되며 통제력을 잃고 기울어진채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06시 경이 되자 암초에 들이받혀 해안 부근에 그대로 좌초되고 만다. 이 상황에서 제1 유격대대 대원들은 지휘관의 독려 하에 계속 상륙을 이어갔다. USS 엔디코트 함이 이 과정에서 5인치 함포, 보포스 40mm 포 등을 총동원해 지원사격에 나서서 그나마 작전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제일 먼저 상륙에 나선 1중대(제28연대로 위장) 대원들이 상륙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던 북한군의 해안 토치카 3곳을 파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대대는 09시까지 상륙을 완료하여 잔적 소탕과 교두보 확장, 북한군의 역습 대비를 시작했다. 2중대(제29연대로 위장)는 200고지 우측으로 우회하며 이 일대에 구축된 북한군의 해안 방어진지 공격에 나서서 차례로 무력화시켰다. 이어 대대 전력을 정비하고 200고지에 지휘소를 차린 이명흠은 나머지 병력을 이용해 271고지를 공격, 이곳까지 확보해 교두보를 공고히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초기 상륙과정에서의 피해는 막심했다. 정확한 사상자 집계는 어렵지만 대대 부관을 맡은 백운봉 중위(당시 임시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전사 60여명, 부상 90여명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다. 지휘관급 장교들의 손실도 뼈아팠다. 상륙부대 중에 최고참 장교는 전술고문으로 배속된 전성호 현역 대령이었는데, 그도 상륙 당시의 혼란 속에서 전사하였다.[22] 전성호 대령은 다른 지휘관들이 모두 현역 위관급인데 반해 유일하게 영관급 장교이자 연대급 부대의 지휘 경력이 있는 인물이어서 안타까운 손실이었다.[23] 또한 상륙 직후 적 진지 제압을 이끌었던 1중대장 이영훈 중위(임시 대령)도 이 와중에 전사하였다. 더군다나 가뜩이나 부족했던 탄약과 물자 상당수가 강행상륙 과정에서 바다에 유실되고 말았다.
대신 이 과정에서 상륙부대는 북한군 39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했으며, 토치카 9곳을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북한군의 직사포 2문[24]과 포탄 450상자, 지프 1대, 기관총 45정, 로켓포 1문, 따발총 5정 등을 노획했다.

3.2. 북한군의 반격


앞서 이야기했듯이 북한군 제2군단은 장사 상륙작전이 전개될 당시 이미 예봉이 꺾인 상황이었다. 9월 6일에 북한군 제5사단이 형산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경주 및 영일비행장 방면으로 밀어붙일 때가 공세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제3사단은 미군 제24사단 병력을 지원받아 반격에 나서서 14일까지 다시 북한군을 형산강 북쪽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한다. 북한군 제2군단은 그간의 거듭된 공격으로 주 전력을 대거 소진해버려서, 이 시점에는 형산강 북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역습에 대비하며 재정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장사동에 상륙작전이 전개되었으니 북한군은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장사동은 제2군단의 주 보급로 중의 하나인 7번 국도 도상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치할 경우 보급 곤란은 물론 역포위되어 섬멸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교두보를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에 맞추어 낙동강 전선에 포진한 한국군은 전면 반격에 돌입하였고, 형산강 전선에서도 9월 16일부터 한국군 제3사단은 형산강을 도하하여 포항을 탈환하려는 공격을 거듭 시도했기 때문이다.
북한군 측에서는 초기에 한국군의 상륙 규모를 약 2개 연대로 과대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25] 그래서 제5사단 예비대인 제12연대는 물론 심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장사동으로 급파한다. 정확한 동원 부대는 불분명하나 동일한 규모로 2개 연대급의 병력을 반격부대로 차출했던 것 같다. 여기에 이미 상당수가 파괴되어 몇 대 남지도 않은 귀중한 T-34 전차 4대까지 급파했다고 전해진다.
반격은 상륙 2일 후인 17일 아침부터 본격화된다. 9월 17일 06시, 북한군은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3중대(제32연대로 위장)가 방어하고 있던 218고지 정면에 공격을 집중했다. 그러나 이곳은 방어측에 유리한 지형이고, 유격대원들이 예상을 뛰어넘어 완강히 저항하자 북한군은 공격 40여 분만에 일단 퇴각하였다. 북한군은 다시 포격을 재개하고 1중대가 방어하는 125고지 방향으로 공격방향을 전환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또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북한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또 다시 퇴각한다. 이명흠은 북한군의 증원이 예사롭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고, 1중대와 3중대 병력을 200고지로 철수시키고 대대 지휘소를 좌초된 문산호로 옮겼다.
18일이 되자 북한군은 다시 05시 경 220고지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의 증원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고, 반면 제1 유격대대는 탄약이 점점 고갈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선을 고수하기는 더욱 더 어려워졌다. 결국 이명흠은 협의된 대로 19일 아침에 철수작전을 진행하기 위해 미 해군 95.2기동전단의 지원 포격 속에 단계적으로 해안으로 병력을 퇴각시켰다. 북한군은 미 해군의 함포사격 때문에 9월 18일에 제1 유격대대를 곧장 추격, 섬멸할 수는 없었으나 점점 더 해안 방향으로 압박을 가하며 최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3.3. 한국군, 미군의 구출 시도


북한군이 받은 충격과는 별개로 상륙한 제1 유격대대의 상황도 매우 심각했다. 인력, 장비 양면의 손실이 매우 큰데다가 LST의 좌초로 적시에 이탈할 가능성이 사라졌으므로, 북한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설 경우 버텨내기 어렵다는게 명백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본 USS 엔디코트 함은 우선 동해안 일대에서 포격지원 임무를 수행하던 95.2기동전단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전단장이던 하트먼 소장은 이 소식에 대단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하트먼 소장은 상륙작전이 취소되었다고 생각하고, 명령대로 이날(9월 15일) 삼척 포격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사 상륙작전이 강력한 화력을 보유한 자신과의 지원 협의 없이 전격 감행된 것을 의아해했다고 한다. 하트먼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삼척 포격 임무를 중지시키고 기함인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USS 헬레나(CA-75) 함 등을 이끌고 장사동 인근 해역으로 남하, 이날 늦게 도착했다.
하트먼 소장은 도착 직후 상황 파악을 위해 헬리콥터를 띄웠으나 기상 악화로 전황 파악에는 실패했다. 그러다가 날씨가 좀 호전되자 다시 헬리콥터를 띄워 문산호에 연락장교로 파견했던 해리슨 중위와 쿠퍼 상사를 구출해냈다. 이들이 복귀하면서 미 해군은 전황을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의 증언을 통해 해안 상황이 다수의 부상자가 섞여 있는 매우 위급한 상황이며, 북한군이 여전히 주변 지형지물을 장악하고 있어 곧 상륙부대를 격퇴하기 위한 증원부대가 올 수 있음을 확인했다. 하트먼 제독은 전단이 보유한 자원만으로는 독자 작전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전단의 함정들이 해안 포격 지원을 지속하는 사이에 좌초한 문산호를 끌어내고 상륙병력을 구조할 수 있는 선박들을 추가 파견해줄 것을 한국 육군과 해군에 요청했다.
한국군도 나름의 구출작전에 착수하였다. 해군은 구조용 예인선 LT 1호에 미 육군의 스페어(Frank Speir) 소령[26]을 탑승시켜 상륙 당일인 15일 22시 경에 출항시켰다. LT 1호는 다음날 16일 07시 경에 상륙 해역에 도착했으나, 문산호가 너무 암초에 깊이 박혀 예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이날 저녁에 다시 귀환하였다. 한국 해군이 보유한 빈약한 전력 중 하나인 JMS급 소해정[27] 304정(태백산정)[28]도 출동했으나 악천후에 곧 돌아갔다.
한국 해군의 자원만으로는 예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9월 17일에 하트먼 소장은 이번에는 헬리콥터 편으로 이명흠 대위를 직접 USS 헬레나 함으로 불러들인다. USS 헬레나 함에 연락장교로 동승하고 있던 해군의 정익조 소령의 통역으로, 하트먼은 구조의 어려움에 대해 양해해달라고 하면서 추가 지원사항을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명흠은 심각한 탄약과 식량 부족을 호소했다. 하트먼은 이에 지속적인 함포 지원을 약속하고 휴대용 식량을 함께 실어 이명흠을 돌려 보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전술했다시피 제1 유격대대는 열약한 사정으로 북한군 화기를 노획해 쓰고 있어서 탄약도 북한군의 7.62x54mm R 탄약 등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USS 헬레나 호는 동해안에서 화력지원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해안의 한국군과 미 군사 고문단에게 물자를 실어 날라주면서 노획 무기와 탄약을 받아 기념품처럼 한켠에 쌓아놓고 있었다. 이 덕분에 많지 않은 양이나마 제1 유격대대에 필요한 물자 보급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상황은 절망적이어서 해군본부는 9월 18일 아침, 육군본부에 "현 상륙부대를 구출하려면 증원부대를 증파하거나 또는 철수하는 것이 타당함"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육군본부는 인천 상륙작전 이후 서울로의 진격과 낙동강 전선의 반격에 온 정신이 팔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보다못한 해군본부는 독단으로 김형봉 중위를 책임자로 해 LST 조치원호를 출항시켰다. 아울러 18일 15시 경에는 항공기를 보내 LST 2척이 구출을 위해 현장으로 가고 있으니 상륙부대는 계속 장사동 일대를 고수하라는 전단과 함께 약간의 탄약, 의약품도 투하하였다.

3.4. 철수 완료


해군본부 작전명령 갑 제151호에 따라 급파된 LST 조치원호는 9월 19일 06시 경에 부근 해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조치원호는 승선한 해군장교들과 민간인 선장 모두 이런 상륙작전 지원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현장에 도착해서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자 16일에 파견된 미 육군의 스페어 소령이 직접 나섰다.
스페어 소령은 소속은 육군임에도 LST 조함 경험도 있을 정도로 상륙작전 경험이 풍부했고, 전황을 냉철하게 파악했다. 그의 조언으로 철수 순서는 제28연대(1중대)-제37연대(5중대)-사령부-제32연대(3중대)-제29연대(2중대)로 정해졌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민간인 선장은 겁을 잔뜩 집어먹어 배를 포화가 난무하고 어디에 암초가 있을지 모르는 해안으로 몰고 가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스페어 소령은 선장을 설득하고 때로는 직접 조타하기까지 하며 문산호가 좌초한 지점 북쪽 360미터(400야드), 해안으로부터는 약 30미터 되는 지점에 착안시킨다.
문제는 조치원호가 제대로 된 LST가 아닌 관계로 더 이상 해안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상륙 때와 마찬가지로 밧줄을 연결해 병력들이 이걸 붙잡고 와서 승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승선 시간이 상당히 소요됨에 따라 그만큼 적의 공격에 많이 노출될 것이고, 상륙 당시에 이미 큰 피해로 충격을 입은 유격대원들로서는 다시 해내기 쉽지 않은 임무였다. 스페어 소령은 이때도 본인이 직접 밧줄을 잡고 해안으로 상륙하여 유격대원들의 동요를 막고 승선을 독려하였다. 스페어 소령은 국적과 군종을 초월한 이러한 용맹한 활약을 인정받아 미 육군 장교임에도 해군 십자훈장(Navy Cross)을 수여받았다.#[29] 이에 따라 06시 30분 경부터 철수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조치원호가 해안으로 접근하면서 북한군 진지에서도 비상이 울렸다. 북한군은 처음에 이것이 철수작전이 아니라 증원부대가 상륙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철수 조짐이 보이자 더 기세를 올려 해안으로 화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다 강력한 화력지원이 이어졌다. 상륙 때는 공군 지원이 전혀 없던 것과 달리 3대의 항공기가 지원을 나와 북한군 진지에 계속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미 해군 95.2기동전단의 화력은 가공할만한 수준이었다. 기함인 USS 헬레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강의 중순양함으로 꼽히던 볼티모어급으로, 8인치 함포 총 9문(3연장 포탑 3기)과 5인치 부포 12문(2연장 포탑 6기)을 갖추고 있어 이 한 척이 퍼부을 수 있는 화력만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30]
이러한 화력지원에 힘입어 철수 과정에서의 피해는 상륙 때보다는 적었다. 그럼에도 미 해군장교 1명이 부상을 당하고 유격대원들 가운데도 전사 9명, 부상 12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북한군은 화력이 크게 열세였지만 그래도 박격포탄이 조치원호를 정확히 가격하여 승선한 유격대원 가운데서도 사상자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당초 철수 완료 목표시간은 12시까지였으나, 이때까지도 승선이 완료되지 않아 약 60명이 해안에 남아 있었다. 겁을 먹어 빨리 빠져나가려는 조치원호 선장의 독촉과 한 명이라도 더 철수시키려는 이명흠 대위의 실랑이가 이어진 끝에, 30여 명이 더 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시가 넘어서자 썰물로 접어들며 더 지체하다가는 배가 빠져나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철수를 진두지휘하던 스페어 소령도 더는 버틸 수가 없어 결국 일부 병력을 뒤에 남긴채 퇴각을 명령한다. 이에 13시 33분경 조치원호는 후비대로 최후까지 해안에서 적을 저지하던 29연대 5대대(제1 유격대대 2중대 5소대) 39명을 뒤에 남기고 해안을 빠져나온다. 이들은 모두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철수에 성공한 병력들은 약 640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조치원호를 타고 이튿날인 9월 20일 새벽에 부산항에 입항했다.[31]
조치원호 입항 이후 이명흠 대위는 작전결과 보고를 위해 당일 육군본부로 출두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 의하면 강문봉 등 관계된 장교들을 만나자, 이들은 모두 '''이명흠이 왜 살아 돌아왔는지 크게 놀라고 당혹'''해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문산호를 그대로 버리고 온 죄를 물어 군법회의에 회부, 총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및 미국 해군이 적극적으로 구출에 나섰던데 비하면 너무나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한국 육군 쪽에서는 제1 유격대대를 여차하면 버리는 카드로 인식하고, 아예 적 후방에서 최후까지 옥쇄해서 북한군을 더 괴롭히는걸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4. 결과


상륙작전 자체의 엉성함과 예정을 훨씬 넘겨서 지속된 전투등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투로만 적군 270명 사상에 포로 4명을 잡았으며, 방어시설인 토치카 11개소를 파괴하고 주 목적인 교통로 차단을 위해 교량 2개소와 도로 6개소를 파괴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적군 보병무기를 노획해서 전투에 활용했다.
하지만 진정한 효과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양동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해안에 2개 연대가 상륙한 것으로 적이 오판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군은 치열한 낙동강 전선에서 정예부대를 빼 장사리 상륙부대로 돌렸기 때문에 마지막 발악으로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려는 적의 압박을 동해안에 한정해 크게 줄여주었다.
2018년 6월 25일, 대한민국 해군은 민간인 신분으로 전사한 황재중 선장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고인의 외손녀인 고양자씨가 세종대왕함에서 수령하였다. 영상 이어 2019년, 문산호에서 전사한 황재중 선장을 비롯한 선원 11명 전원에게 화랑무공훈장 수여가 결정되었다. 기사

5. 작전에 대한 열악한 지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친필로 장사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작전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의 성공은 부대원들의 엄청난 혈전끝에 이룩한 것'''이며, 작전의 구성이나 지원면에서는 욕이 안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상술되어 있지만 학도병을 전선에 투입시켰고 '''이는 소년병의 투입으로 현대 기준에서 전쟁범죄'''다.[32] 자세한 상황은 보면 볼수록 참담한데,
  • 부대원의 대부분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으로, 훈련기간은 고작 2주에 불과했다. 즉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콩 튀듯이 흩어지거나 적군에게 항복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기가 엄청나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병력을 가지고 앞서 언급했듯이 수적으로 엄청나게 우세하며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는 조선인민군 정예부대를 상대로 며칠간 혈전을 벌인 것이다.
  • 위에도 적었지만, 지급된 전투복과 무기는 모두 노획물자였다. 당시 한국군에도 무기를 비롯한 물자가 모자랐다는 사정이 있고 노획무기는 적지에서 탄약을 노획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원이 미흡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 부대의 유일한 지원장비는 LST 1척[33]으로, 해당 함선은 상륙전용이라 원양항해에는 부적합하며, 고작 1척으로 상륙과 이후 철수를 모두 담당해야 하므로 유사시 탈이 나기 쉬우며, 이 점은 현실화되었다. 덕분에 상륙 초기부터 적의 집중사격으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고 그나마 없는 탄약과 장비를 망실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동행했던 구축함 엔디코트 함이 문산호를 선도하며 최대한 화력지원을 해 주어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였다.
  • 유사시 지원대책에 대한 사전 준비가 사실상 전무했다. 당장 상륙선이 좌초하면서 무전기가 바닷물을 먹어서 상태가 영 안좋더니 곧 고장나서 공군의 지원이나 함포사격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예비로 쓸만한 함선도 없어서 문산호가 좌초되자 대신 이들을 구출할 함선을 찾아내는데 시간이 걸렸으며, 구출에 나선 조치원호를 근접 호위할 전력도 매우 부족했다. 덕분에 조치원호 근방에 박격포탄이 떨어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40여 명이 철수하지 못하고 포로가 된 것이다.
  • 참전 용사들의 말에 따르면 출발 전에 육군본부 작전참모(강문봉)가 "너희들이 주공으로서 국가를 살릴 수 있다."는 말과 문산호 뒤를 따르는 수백 척의 배를 보고 영웅 된 기분이라고 생각했지만 해가 지고 난 이후에 다시 보니 따라오던 배가 한 척도 없었다고 한다.
  • 3일간의 전투만 진행한다고 딱 3일간의 전투물자만 지급했다. 때문에 상륙 당시의 혼란 및 철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의 주력부대와 교전하는 막장사태가 벌어지자 식량과 탄약이 모자르게 된다. 이 상황에서 무려 4일간이나 버틴 것이 기적이다. 다행히 상륙 후에나마 미 해군의 95.2기동전단이 발벗고 달려와 화력지원은 물론, 식량과 탄약도 일부 보급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미 해군 순양함, 구축함의 지원이 없었으면 전투력이 빈약한 유격대대는 철수 준비가 완료되기 전에 북한군의 반격에 전멸했을 것이다.
  • 해당 작전이 끝나고 서울을 탈환한 후 북진작전이 시작된 시점인 1950년 10월 5일에서야 부대원들에게 입대명령과 036군번이 내려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그 때까지는 법적으로는 군번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싸운 셈이다. 부대원들은 장사 상륙작전이 끝나고 부산항에 도착한 후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가 창설돼서 자신들이 거기 속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후 부대원들은 11월 말까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서 적 패잔병 소탕 임무에 종사하다가 12월 19일 자로 서울에서 부대가 해체되고 일부 인원은 장교 지원, 대부분은 사병으로 2사단 32연대에 편입되었다. 당시 부상으로 입원해 있던 이명흠 부대장이 나중에 이를 알고 극력 항의했으나 조치는 되돌려지지 않았다.

6. 잘못 알려진 부분


1997년 3월 해병대 수색대가 좌초된 문산호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잊혀졌던 '장사 상륙작전'이 밝혀진 것으로 표기하는 뉴스 기사들이 있으나, 사실은 영덕군과 '영덕 장사 상륙작전 유격 동지회'가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문산호 인양작업에 착수한 것에, 해병1사단 수색대원 12명이 수색 작업에 투입된 것이다. 1997년 3월 조선일보 뉴스 기사
또한 학도병 대부분이 전사한 전투, 전문가들도 잘 모를정도로 잊혀진 전투 등으로 뉴스기사들에 묘사되고 있으나, 국방부의 기록물이나 언론의 출판물, 심지어 80년대 반공만화물에서 까지 장사 상륙작전에 대한 서술과 묘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긴 하지만, 전문가들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수준의 완전히 잊혀진 작전인 것은 아닌 것이다.

7. 장사 상륙작전의 진실



  • 순삭밀톡 장사상륙작전
위에서 장사 상륙작전의 목적이 인천 상륙작전 이라 설명되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영상에서도 나와있듯이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에는 이 작전이 미 8군을 지원하기 위한 교란 작전이라고 설명되어 있지 그 어디에도 인천은 없다. 또한 여러 잘못 알려진 사실들과 위에 있는 학도병에 대한 각종 오해들도 잘 설명하고 있으니 한번 영상을 보고 이 문서를 다시 생각해보기를 추천한다.

8. 여담


2019년 해당 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개봉되었다. 김명민(이명흠 역)과 메간 폭스(가상의 종군기자 매기 역)가 주연으로 나온다. 상륙작전 유적지에 묘가 하나 있는데 그 묘는 가묘이고, 발굴한 유해들은 모두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장돼있다.

9. 관련 문서



[1] 작전 투입 이전에도 제1 유격대대로 불리기는 하였으나, 상륙작전 수행 중이던 9월 18일 00시 부로 정규부대 편성 명령이 정식으로 발령되었다. (국본 「일반명령」(육) 제72호) 이때 부대원들도 정규군으로 입대 조치되어 군번 0365427~0366157번이 배부되었다.[2] 부대원이 총 772명(간부 및 기간병 포함)이어서 당시 '772부대'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772부대는 1951년 2월에 제1 유격대대가 육군 정훈 제1대대로 전환될 때 이명흠 부대장이 장사 상륙작전에 참전한 이들을 기리며 붙인 이름이다.[3] 대표적인 유격대가 바로 영화 〈포화 속으로〉의 모티브가 된 오진우(영화 속에서는 '박무랑'이라는 이름으로 차승원이 연기)의 제766부대였다. 제766부대는 개전시 후방인 정동진 상륙작전을 감행한 이래 동해안 지역을 따라 급속 남진하면서, 한국군이 미처 방어선을 정비하기도 전에 연이어 허를 찌르며 전선을 돌파하여 심각한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4] 후일 1956년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전횡을 일삼던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당했을 때 암살의 실질적인 배후로 지목된다.[5] 대구에서 모병한 인원 수는 명확하지 않다. 200명부터 560명까지 여러 설이 있다.[6] 운남육군강무당(雲南陸軍講武堂)을 졸업하고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대구에서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7] 이명흠(李明欽) 대위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딴 것이다. 사실 이렇게 부대장의 이름을 따서 'OOO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는 구(舊) 일본군의 관습이지만, 당시는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강점기의 문화가 짙게 남아있었고 어떤 것이 일제 영향이라거나 그런 걸 구분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8] 밀양에서 편성되었다는 이유로 밀양 유격대대라고 불리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측 자료에서는 'Miryang Guerrilla Battalion'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9] 현재 문현금융단지가 위치한 자리로, 과거에는 이곳에 육군 정비창이 있었고 6.25 전쟁 피난 시기에는 육군본부가 임시로 자리잡았다.[10] 국민방위군 사건의 국민방위군중 극히 일부가 연대로 편제 되었는데, 이들의 무장이 일본군 장비와 함께 북한군 노획 무기였다. 물론 국민방위군이 유격전을 수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미군 장비는 국군을 줘야 하니, 2선급 장비로 무장 시킨 것이다. 장사 상륙작전 부대와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11] 이들은 퇴각 후에 본 공격인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12] 아이디어를 낸 인물이 제3사단 사단장이던 김석원인지, 실질적으로 사단장 역할을 수행하던 이종찬인지 아니면 다른 참모장교인지는 불분명하다.[13] 이명흠 대위 본인은 훗날 회고에서 강문봉이 자신을 호출한 날은 12일이라고 주장하였다.[14] 생존자 중에는 원래 목표는 조금 더 북쪽에 있는 강구였으나 좌초 때문에 장사동에 상륙했다고 증언한 이도 있다. 당시 특공대원들에게 정확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15] 당시에는 서기가 아닌 단기(檀紀)를 쓰고 있었다.[16] 북한군 제5사단과 제12사단이 주축이었다.[17] 장사 상륙작전이 결행된 날짜를 일부 기록에서는 9월 14일로 적고 있다. 이것은 이명흠 대위가 사후에 증언록에서 9월 13일 출정, 14일 상륙으로 잘못 기술한 결과로 발생한 착오이다. 전쟁 중에 국방부에서 출간한 『한국전란 1년지』(1951)에서는 출발일은 없으나 상륙일이 15일로 되어 있고, 해군본부 전사편찬관실에서 펴낸 『대한민국 해군사』(199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펴낸 『6·25 전쟁사 6: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2009) 등 당시 공식문서들을 참조하여 최근에 저술된 기록에서는 9월 14일 출정, 15일 상륙으로 확정하고 있다.[18] 4자 금기에 따라 4중대 대신 5중대가 있었다.[19] 유엔군 총사령부는 인천 상륙작전을 즈음해 한반도 연안을 꽁꽁 틀어막기 위해 대만 해역에 있던 미 해군 함대를 불러들여 제95기동부대(Task Force 95)를 편성, 투입하였다. 이 가운데 서해를 담당한게 95.1기동전단, 동해를 담당한게 95.2기동전단이었다.[20] 전성호 대령은 독립운동가 집안(부친은 간도 룽징(龍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전재일) 출신으로, 본인도 만주에서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휘하에서 지청천, 김좌진, 황학수 등과 함께 무장 항일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1896년 생으로 이미 광복 당시에 50세에 이를 정도였으나, 육군사관학교 1기로 임관하여 현역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이 나이면 김홍일 장군보다도 연배가 높았고, 채병덕, 이종찬, 김백일 등 당시 주요 지휘관보다는 20년 이상 연장자여서 육군 내에서도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당장 개전시 제12연대의 상급부대였던 제1사단 사단장 백선엽은 24세나 어릴 정도였다. 이 때문에 전성호 대령은 야전 지휘관에서 곧 물러나 이런 고문 역할로 돌려지게 되었다.[21] 전후 회고에서 이명흠 대위는 자기들을 호송했던 구축함이 영국 해군 Q-34 함이라고 주장했다.[22] 기록마다 전사 경위에 차이가 있다. 일설에는 문산호 선장실에서 작전회의를 하다가 박격포탄이 선장실에 낙하하는 바람에 대퇴부 과다출혈로 전사했다고 하며, 또 다른 설에는 밧줄에 의지해 상륙하는 과정에서 적의 사격을 받아 사망했다고도 한다. 조각배를 타고 남쪽으로 구원을 청하러 가다가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는 주장도 있다.[23] 전성호 대령은 사후 육군 준장으로 추증되었으며, 독립운동 공적을 함께 기려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4] 북한군이 다수 장비하고 있던 소련의 45㎜ 대전차포 (M-42)로 추정된다.[25] 당시 평양방송에서 한국군 2개 연대가 동해상에 상륙랬다고 보도했다고 한다.[26] 미 상륙전 훈련센터 소속의 상륙작전 전문가로 경험이 풍부한 장교였다. 그는 MIT를 나온 학군장교로 유명한 수륙양용차인 DUKW를 고안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27] JMS는 Japanese Minesweeping Ship의 약자로, 말 그대로 원래 노획한 일본 해군의 함정을 미군이 한국에 인도한 것이다. 이 함정은 일본 해군에서는 150톤급 예선(부설정형)으로 분류되던 것이었으며, 예인, 기뢰부설, 소해 등 다목적으로 쓰였다. 1946년 10월 경에 한국 해군으로 인도되었다. 참고: 오진근 외 (2006). 『해군창설의 주역 손원일 제독 (상/하)』. 한국해양전략연구소.[28] JMS-304 태백산정은 일본 해군 소속 시절 선명은 예선(부설정형) 공칭 제 1373호로, 배수량 180톤 짜리였다.# [29] 6.25 전쟁 중에 이처럼 미 육군 장병이 해군 십자훈장을 받은 경우는 딱 3명이 있었다고 한다.[30] 삼척 포격 당시에는 95.2기동전단에 무려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 함까지 지원을 나와 있었는데, 이후 전개된 장사 상륙작전 화력 지원 임무까지 미주리 함이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31] 정확한 철수인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640~725명 등으로 엇갈린다. 640명 귀환은 해군본부의 작전경과보고서에 담겨진 내용이다. 당초 840여 명의 상륙병력 중에 39명의 포로를 비롯해 상륙 및 철수 과정에서 1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상륙 후 지상전에서 발생했을 사망자, 미 해군 헬리콥터로 후송된 일부 중상자 등을 감안하면 640명 귀환 쪽이 더 현실적인 숫자로 보인다.[32] 당시에는 이를 금지하는 국제법이 없었지만 현재는 UN 아동권리협약 등으로 금지되어있다.[33] 본문에 언급했듯 징발된 해운회사 선박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많은 LST들이 우방국 해군 및 민간 업자들에게 무상 혹은 저가로 공여되었기에 상선으로도 많이 쓰였다.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 이런 풍경이 잘 묘사되는데,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LST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 만큼 흔했음을 알 수 있다. 문산호는 비록 군에 징발됐지만 선원들은 여전히 민간인이었는데, 본 작전에서 인민군에게 피격되면서 선장 등 선원 여럿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현재 침몰한 잔해의 인양 혹은 해상 공원화가 추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