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KCC 이지스/역사
1. 현대중공업 실업농구단(1978~1989)
1977년 11월 4일, 현대그룹은 남자 농구단을 창단하여 1978년부터 데뷔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사 그리하여 1978년 3월 24일, 창단식을 갖고 7번째 실업 농구단으로 창단하게 된다. 출처: 1978년 3월 25일 경향신문 기사[1] 초대 감독은 전 연세대 감독 이경재였다.
현대중공업 시절에는 1980년에 방열 코치가 감독으로 승진한 후 전 산은 코치 정광석이 왔으며, 1981년에 고려대 출신 이충희가 입단해 이문규, 박수교, 이원우[2] , 신선우 등 선배들과 함께 전성 시대를 누렸으며, 이 시기 대학 팀으로서는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올라왔던 허재, 김유택, 한기범의 중앙대를(편파 판정 의혹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충희의 경이적인 득점력을 앞세워 격파하기도 했다. 1986년에 방열 감독이 기아 농구단 창단으로 인해 떠나자, 정광석 코치가 감독으로 승진한 뒤에도 전성기는 이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이충희가 부상에 시달리다 1992년에 은퇴했으며, 김성욱이 미국 국적을 취득하며 한국을 떠났다. 또 나름 좋은 활약을 선보이던 임달식이 허재를 코트에서 두들겨 팬 후 1년 동안 선수 자격 정지를 당하고 그대로 코트를 떠나는 일 등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1994년까지 이문규와 이충희, 이원우 등 전성기 때 멤버들이 노쇠하면서 서서히 팀을 떠났고, 결국 이름만 명문인 구단으로 전락한다. 그 사이 팀 운영권은 1989년에 현대전자로 넘어갔다.
2. 현대전자 실업농구단(1989~1996)
1990년대로 넘어온 후 1994년부터 신선우가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중앙대 출신으로 당시 대형 센터로 취급받던 정경호를 영입하고 유도훈이 활약해주고 하면서 팀은 재기의 노력을 했는데, 프로화를 앞두고 우수한 선수들을 스카웃한 후 이렇게 스카웃한 이상민, 조성원을 몽땅 군 복무로 보내 버리는 과감한 일을 벌였다. 거기다 얼마 후 한양대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치던 추승균까지 스카웃하는 데 성공했고, 이들의 합류를 기다리며 프로 출범에 참여했다. 다만 프로농구 참여에는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서장훈의 진로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3. 대전 현대 다이냇(1996~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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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원년, 군대로 보낸 선수들이 아직 제대하기 전이었던 데다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도 그다지 좋은 선수를 못 뽑으면서 프로 원년인 1997 시즌에 현대 다이냇은 뒤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그저 상무 보낸 이상민과 조성원, 그리고 대학 졸업반인 추승균만 바라보며 유도훈과 정진영이 고군분투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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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군 복무로 보낸 선수들이 전부 복귀한 1997-98 시즌, 제대한 이상민과 조성원, 졸업한 추승균으로 이루어진 신예 3인방에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온 맥도웰과 든든한 센터 제이 웹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뽑으면서 약점이 보이지 않는 라인업을 구성, 정규 시즌에서 승승장구를 계속했다. 기아 엔터프라이즈와 대결한 챔피언결정전에서 허재의 미친 듯한 활약에 패배 직전까지 몰리기도 하나 조성원이 대폭발하먼서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97-98 챔피언 결정전의 MVP는 모두 알다시피 허재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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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99 시즌에는 기존 멤버에 새롭게 올라운더 외국인 센터 재키 존스를 영입, 앞선 시즌보다도 완벽한 베스트 5를 이루어냈다. 패스 능력이 출중한 재키 존스의 리바운드 후 롱 패스에서 이어지는 속공 레이업 혹은 조성원 추승균의 노 마크 3점이 잘 나오고 잘 먹혀서 경기에 안 나오면 심심했을 정도. 다시 기아 엔터프라이즈와 대결한 KBL 챔피언결정전에선 전 시즌보다 손쉽게 상대를 꺾으며 KBL 2연패를 달성했다. 특히 이상민-맥도웰이 픽 앤 롤 플레이는 상대 팀이 뻔히 알면서도 당하는 비기였다.
4. 대전 현대 걸리버스(1999~2001)
이후 팀명을 현대전자의 휴대전화 브랜드인 현대 걸리버를 따라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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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0 시즌. 현대는 재키 존스를 청주 SK 나이츠로 보내고 인사이드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보인 센터 로렌조 홀을 영입했다. 로렌조 홀은 당시 역대 최고의 하드웨어(203cm , 128kg)를 자랑하던 센터로서 몸싸움이 벌어지면 상대 팀 용병들이 뻥뻥 나가 떨어질 정도로 골밑 파괴력은 역대 최강급이었고, 이를 통해 정규 시즌에서 현대 걸리버스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KBL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청주 SK 나이츠의 서장훈과 이를 갈고 나온 재키 존스 라인업에 맥도웰과 로렌조 홀이 밀리면서 패배하고 만다. 이 시즌 이후 로렌조 홀과 재계약을 맺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로렌조 홀이 거친 플레이를 통해 여러 선수를 중상 입힌 일이 있다 보니 타 팀들의 반발이 심했고 현대를 제외한 다른 9개 구단이 합심해서 홀과 재계약하면 가만 안 있을 분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론 조건이 안 맞아서 재계약이 무산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암묵적인 영구 제명을 시킨 것이라고 한다. 로렌조 홀은 자기를 깡패 취급한다고 반발하기도 했지만 홀의 거친 플레이는 선을 넘는 경우가 많았고 변명의 여지가 없기는 했다. 이 린치에 가까운 플레이 때문에 특히 대구 오리온스가 손해를 많이 봤는데 신인 가드 김상우가 홀과 루즈볼을 다투다가 왼손 복합골절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었고, 전희철은 홀에게 가격당한 이마에 붕대를 감았고, 부상 후유증으로 몇 경기를 교체선수로 출장할 정도였으며, 후반기에는 이인규가 홀의 팔꿈치에 맞아 코뼈 골절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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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시즌에는 조성원을 트레이드로 보낸 후 맥도웰을 센터로 내세우는 스몰 라인업을 내세워 봤으나 맥도웰이 센터로서는 아무래도 스몰 사이즈라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한다.
2000-01시즌이 끝나고 구단은 KCC로 매각된다. 동시에 연고지를 전주로 이전했고, 팀명도 KCC 이지스로 바꾸었다.
5. 전주 KCC 이지스(2001~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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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C 이지스로 바뀌고 처음 맞는 2001-02 시즌. 당시 감독이던 신선우는 팀에 큰 변화를 가한다. 그때까지 함께 해온 맥도웰을 포기한 후,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모든 선수가 포스트업을 하고 외곽 슛을 쏘는 이른바 '''토탈 바스켓볼'''을 들고 나온 것. 이를 위해 다시 재키 존스를 재영입하고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하나 시즌 직전 재키 존스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팀은 나락에 빠져들고 만다. 하지만 재키 존스가 부상에서 돌아오자 토탈 바스켓볼이 제대로 작동하면서 팀은 연승을 거듭하고 3위까지 뛰어오르면서 가볍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6강 플레이오프에서 안양 SBS를 2경기만에 끝내고 서울 SK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3차전까지 2승 1패를 하고 4차전까지 잡으면서 챔프전을 목전에 뒀으나 4차전 서장훈의 원맨쇼, 5차전 석주일의 역전 3점슛으로 챔프전 진출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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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 시즌, 앞선 시즌에 보여준 게 있었고, 거기다 이현준을 오리온스에 내주고 누가 봐도 이현준보다 훨씬 좋은 전희철을 데려온 덕분에 팀은 우승후보 0순위로 꼽혔으나 막상 뚜껑을 열자 단숨에 '''꼴찌후보'''로 전락한다. 기존 토탈 바스켓볼의 핵심이었던 재키 존스가 마약 복용 혐의로 한국을 떠나게 되었고, 때문에 외국인 선수 두 명을 전부 물갈이 했는데 그 용병들이 죄다 망했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인천 SK 빅스에서 뛰었던 요나 에노사와 LG에서 뛰었던 칼 보이드를 데려왔지만 추락하는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대학 시절부터 해서 오리온스 때까지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플레이를 했던 전희철은 신선우 감독의 빡빡한 패턴 플레이 스타일 농구에 전혀 적응을 못하며 그냥 슛 덜 들어가는 외곽 슈터 역할밖에 못하고 결국 20승 34패, 9위로 시즌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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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 시즌에는 토탈 바스켓볼을 포기하면서 전희철을 보내고 다시 조성원을 데려오고(뒷돈 의혹이 많긴 하지만), 해외 리그에서 이미 훌륭한 득점력을 보여줬던 선수인 찰스 민렌드를 영입하면서 다시 한 번 강팀으로 군림했다. 거기다 당시 바닥을 벅벅 긁고 있던 모비스와의 변칙적인 외국인 선수 임대트레이드로 두고 두고 욕을 먹긴 했지만[4] 정규시즌을 39승 15패로 2위를 하고 4강에서 LG를 3전 전승으로 돌려보냈으며 TG삼보와의 챔프전에서 7차전까지 간 끝에 마침내 우승을 달성했다.
2004-05 시즌, 앞선 시즌에 우승을 달성한 KCC 이지스였으나 주전 멤버들은 몽땅 30대 이상의 나이에 부상에 시달리는 터라 KCC는 민랜드 하나 덕에 버티는 팀이란 말을 듣기도 했으며, 34승 20패로 정규 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상대가 시즌 후반기에 단테 존스의 태풍을 몰고 다니던 SBS스타즈였기에 KCC에 기대를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한데 어이없게도 시즌 내내 악평을 듣던 외국인 선수 제로드 워드가 3점 슛을 퍼부어대며 당시 단테 존스의 활약 속에 승승장구하던 SBS를 1승 3패로 침몰시켜 버렸고, 이를 통해 KCC 이지스는 또 한 번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TG삼보와 대결하게 된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제로드 워드는 여전히 3점 슛을 퍼부어 댔고 KCC의 선수들은 TG삼보의 김주성과 왓킨스 트윈 타워의 팔을 대놓고 잡아 끌 정도로 육탄공세를 펼쳤으나 결국 역부족으로 챔피언 결정전에서 패배한다.
5.1. 허재 감독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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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 시즌을 앞두고 신선우는 LG 감독으로 떠나버렸고, 뜬금없게도 대신 감독을 맡게 된 사람은 누구나 TG삼보의 미래 감독이 될 줄 알았던 '''허재'''였다. 선수로는 훌륭했던 자가 감독으로는 말아먹는 일이 많았던 만큼 코치 과정도 없이 바로 감독을 차지한 허재에 대한 우려가 많았는데, 일단 2005-06 시즌에는 치열한 6강 경쟁 끝에 SK, LG, KT&G를 따돌리고 정규리그 5위, 6강에서 kt를 업셋하고 4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여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어진 2006-07 시즌, 주전들의 노쇠화 속에 팀은 추락을 거듭하고 허재도 감독으로서 전혀 팀을 수습해내지 못하면서 KCC는 총체적인 난국 속에 꼴찌로 떨어진다. 1라운드 4승 5패로 출발은 전년도와 같았는데 이후에 문제가 생겼다. 2라운드에서 6연패를 당하며 2승 7패, 3라운드는 4승 5패를 기록했으나, 4라운드에서 2승 7패, 5라운드 1승 8패를 기록하였고, 창단 최초로 '''10연패'''를 당하는 등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창단 이후 최악의 시즌이었다. KCC는 이 시즌 결국 15승 39패로 창단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 시즌 허재 감독은 지난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너무 열정이 과도했던 탓에 일부로 벤치에서 앉아서 선수들을 지휘했던 것과 달리 이 시즌에는 흰머리로 도배된 채 벤치에서 괴로워하며 앉아있는 장면이 매우 잦았다. 특히 2007년 2월 6일에는 상대전적 3승 1패 우세를 기록하던 서울 삼성 썬더스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1쿼터 한 때 '''22-0(!!!)'''까지 리드 당하면서 머리를 감싼 것은 KCC의 올 시즌의 암울한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 장면. 이 경기에서는 68-108로 창단 후 최다 점수차 패배였다.
그렇게 패배를 거듭하다 10연패를 끊은 2월 21일 서울 SK 나이츠와의 경기에서 76-67로 승리하며 10연패를 끊은 이후에는 KCC 서포터즈에서 한 팬이 눈물을 흘린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며 감동의 도가니를 연출했다. 6라운드는 1패 후 2연승으로 출발했으나 시즌 막판에 또 다시 6연패로 결국 창단 후 최저 성적은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최종전에서는 KT&G를 상대로 잘 앞서가다 역전당한 1점차 패배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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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 시즌을 앞두고, FA로 풀린 서장훈과 임재현을 영입하는 큰 변화 속에 다시 강팀으로 올라서려 했는데, 그 와중에 그때까지 영원히 기둥일 것만 같았던 이상민이 팀을 떠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당시 KCC에서 FA로 풀린 서장훈과 임재현을 영입하면서 보호 선수 명단을 제출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FA로 잡은 선수는 무조건 보호 선수 명단에 들어가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KCC는 팀의 간판 선수인 이상민과 추승균 둘 중 한 명을 저울질하다 '설마 누가 이상민을 데려가려고?' 하는 생각으로 이상민을 보호 선수 명단에서 제외했다. 그런데 서장훈의 전 소속 팀이었던 서울 삼성 썬더스가 '''이상민을 보상 선수로 지명하고 말았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서장훈이 KCC로 오게 된 이유는 '학교 선배인 이상민과 같이 뛰고 싶어서'였다고. 지못미.
결과적으로 이상민을 대체하게 된 임재현은 허재의 학교 후배 챙기기냐는 비아냥 속에 '''봉사'''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게 되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서장훈은 여전한 위력을 발휘하면서 KCC는 앞선 시즌 꼴찌에서 단번에 정규 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상대는 토사구팽당했다며 이를 갈던 이상민이 있던 삼성 썬더스. KCC 이지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단 1승도 못 거두고 탈락하고 만다.
2008-09 시즌, 꼴찌로 떨어졌던 시절 덕에 얻은 드래프트 1순위로 하승진을 뽑은 KCC는 '서장훈과 하승진이 공존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확실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지목받았다. 하지만 웬걸, KCC는 팀플레이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모래알스런 모습 끝에 추락을 계속한다. 서장훈은 하승진으로 인해 자신의 비중이 지나치게 줄어드는 걸 용납하지 못했고,[5] 임재현은 여전히 눈 감은 포인트 가드 같이 뛰었으며, 하승진은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 채 키 큰 일반인스런 모습만 보여줬다. 결국 서장훈과 허재의 갈등이 이어지고 그나마 자리라도 차지해주던 하승진까지 부상으로 빠지면서 KCC는 '''붕괴 직전, 아니 붕괴 자체인 상태가 되고 만다.''' KCC는 3라운드 한 때 9승 14패로 정규리그 9위까지 추락하며 우승은 고사하고 부산 KT에게도 밀려 꼴찌로 추락할 위기에 놓였다. 이 당시가 허재 감독의 무능론과 경질설이 가장 극심하게 불거졌다.
그런데 시즌 도중에 KCC는 큰 변화를 겪는다. 하나는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의 트레이드로 서장훈을 보내고 강병현-조우현-정선규를 영입한 것, 현금을 주고 어음을 받은 격이라던 이 트레이드는 전자랜드의 득이라는 의견이 당시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KCC에 엄청난 득으로 작용한다. 또 하나는 임재현을 식스맨으로 내리고 드래프트 당시 허재가 왜 뽑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까지 듣던 신명호를 주전으로 올린 것, 이를 통해 느린 하프 코트 공격 위주에 수비는 좋지 못했던 KCC는 신명호-강병현-추승균으로 이어지는 앞선 수비의 압박과 거기서 파생되는 빠른 역습을 가진 팀으로 갑자기 완전 변신을 해버린다. 거기다 어음이라던 강병현은 현찰로서 활약해내면서 어이없는 턴오버와 나락에서 팀을 구하는 에이스 노릇을 뒤섞어서 보여줬고, 전성시대를 함께한 이상민도 없고 조성원도 없는 팀에서 추승균은 변함 없는 기둥으로 활약하며 에이스로서 팀을 이끌어 나갔다. 이런 변화 속에 KCC는 차츰 상승하기 시작한다.
부상에서 돌아온 하승진은 이런 갑작스런 팀의 변신에 전혀 적응을 못하면서 깽판까지 치기도 했지만, 허재의 구슬림 속에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는 서서히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거기다 식스맨 역할을 하게 된 임재현은 외려 부담이 줄어들자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고, 이를 통해 KCC는 한 경기 안에서 확실하지만 느린 높이 중심의 팀과 낮지만 빠른 스피드 중심의 팀으로 2단 변신을 해대면서 상대 팀을 연이어 격파, 우승 후보에서 꼴찌 후보로 전락했던 팀이 다시 우승 후보로 꼽히게 되었다.
결국 진출한 6강 플레이오프에선 KCC에 복수하겠다던 서장훈이 버틴 전자랜드를 외려 격파했고,[6] 4강 플레이오프에서도 동부에게 1승 2패로 뒤지다가 마지막 2경기를 잡아내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성공, 그리고 KBL 챔피언결정전에선 역시나 복수심에 불타던 이상민이 있던 삼성 썬더스마저 격파하면서 플레이오프 통합 17경기에 걸친 사투 끝에 통산 네 번째 우승을 달성한다. 소리없는 남자라던 추승균은 결승전 MVP를 받으며 자신의 가치를 새삼 드러냈다.[7] 참고로 그 시즌 성적인 31승 23패는 역대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팀 중 제일 좋지 않은 정규시즌 성적이었다.
그리고 2009~10시즌에 군입대한 신명호의 빈자리를 귀화 선수 드래프트 전체 1순위를 따내며 영입한 전태풍으로 채우면서 전년도보다 전력이 강화되었고, 폼 하락이 심해진 마이카 브랜드를 시즌 도중 트레이드를 통해 테렌스 레더로 바꾸며 아이반 존슨과의 듀오를 만들어버렸다. 5라운드에 하승진의 시즌 아웃 악재가 터졌지만 무난하게 순항하며 3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했다.
6강에서 삼성을 3승 1패로 물리치고, 4강에서 kt를 3승 1패로 보내버린 KCC가 챔피언결정전에서 마주한 팀은 울산 모비스 피버스. 2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지만 플옵에선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해볼만 하다는 분위기였으나 하승진의 부재가 발목을 잡고 말았다. 모비스는 하승진이 없는 점을 활용해 브라이언 던스톤과 함지훈을 통해 골밑을 완전히 장악함과 동시에 전년도 4강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레더와 존슨을 철저하게 막았고 이 과정에서 존슨의 멘탈이 터지며 2승 4패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2010-11 시즌에는 시즌 초반에는 하승진, 전태풍의 부상으로 2라운드 종료시에는 6승 12패로 8위까지 추락하며 플레이오프도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이후 26경기에서 무려 '''22승 4패'''를 기록하며 일약 정규 리그 3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여기서 3라운드 초반에 전태풍이 "3라운드 전승을 거둘 것이다." 라는 근자감은 덤... 다만 6라운드에서는 다소 주춤하며 34승 20패로 정규리그 3위를 기록했지만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를 꺾고 결승에 진출, 부산 kt 소닉붐을 격파한 원주 동부 프로미와 벌였다. 강은식과 추승균이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에서도 6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2패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통산 5번째 우승을 달성하였다. 시즌 종료 후, 5년간 코치를 역임했던 김광은 후임 코치인 천정렬에게 넘기면서 지도자계에서 은퇴함과 동시에 KCC본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2011-12 시즌은 디펜딩 챔피언인 만큼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으나, 정규 시즌은 1라운드 5승, 2라운드 6승, 3라운드 6승을 거두었으나, KGC와 동부, kt가 잘 나간 탓에 반환점을 돌 때는 지지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4라운드 5승, 5라운드는 4연패를 당하며 4승에 그쳤다. 6라운드에서도 1승 후 3연패를 당하는 등 좋지 않았지만, 막판 5연승 분전하였고, kt가 갑자기 막판에 5연패에 빠진 덕에 잠시 공동 3위까지 올랐으나 최종전에 승리하면서 상대전적 열세로 인해 그대로 4위로 마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PO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준 만큼 강력한 챔프 후보로 꼽혔지만, 정규 시즌 막판 당한 전태풍의 부상이 팀에 치명타로 작용하고 말았다. 상대였던 5위 모비스에 힘 한 번 못 써보고 3연패로 광탈.
2011-12 시즌이 끝나고 전면적인 리빌딩이 불가피해졌다. 하승진은 공익 입대가 예정되어 있으며, 전태풍은 한 팀이 혼혈 선수를 3년 이상 보유하지 못하는 리그 규정에 의해 팀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에 15년 동안 팀을 묵묵히 지켜준 추승균은 은퇴를 결정했다. 임재현과 용병을 제외하면 스쿼드에 고만고만한 B급밖에 남지 않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임재현조차 FA 자격을 획득했다. 대놓고 2013년 드래프트에 풀리는 대학 최대어 김종규를 노려야 되지 않나 하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허재는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무려 '''1.5%라는 확률을 뚫고 1순위를 뽑아버렸다.(!!!)''' 정작 여기서 뽑은 커트니 심스는 발목 부상이 길어졌다. 전문가들은 이 시즌 KCC를 창원 LG 세이커스와 함께 '''2약'''으로 예상했다.
예상대로 홈 개막전에서 서울 삼성 썬더스를 상대로 52:64라는 큰 점수 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고양 오리온스 상대로도 패배. 경기 후반에 한 점 차까지 따라갔으나 임재현을 제외하고는 해결사가 없었다. 득점을 너무 못해서 그렇지, 실점도 비교적 적었다. 결국 1라운드를 1승 8패로 마쳤는데 사실 1승도 KT가 그날 너무 못해서 빡친 전창진 감독이 작전 타임도 부르지 않는 등 최선을 다하지 않았었다. 2라운드에는 LG와 동부에 승리했지만, 3승 15패로 당연히 꼴찌. 그나마 06-07시즌과는 달리 두자리 연패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2군 선수를 올려도 엔트리를 못 만들어서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부터 이한권을 트레이드로 데려오고, 그마저 시즌 아웃당하자 '''1.5%를 뚫고 뽑은 1순위 심스를 SK로 보내는 대신 크리스 알렉산더와 김효범을 데려왔다.''' 프로농구 사상 최초의 1등 팀과 꼴찌 팀의 트레이드.
2012년 3라운드까지 보여준 모습은 막장 of 막장이었다. 공격, 수비 모두 기록상 최하위를 맴돌았으며, 전자랜드의 최다 패 기록마저 경신해 버릴 포스로 달려나갔다. 심지어 농구 팬들이 KCC는 아마(혹은 농구대잔치)로 보내버리고 상무를 대신 프로 리그로 올리자는 주장까지 했을 정도로 답이 없었다. 어쨌든 3라운드는 오리온과 LG를 잡고, 4라운드 역시 kt와 삼성을 잡으며 2승을 거두었다.
2월 6일 KT전, 8일 LG전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면서 시즌 3번째 2연승을 거두었으나, 그 후 2월 10일에는 KCC의 천적으로 군림하게 된 서울 SK 나이츠를 상대로 71:89로 패배하면서 또다시 3연승에 실패하였다. 이후 인삼공사를 가볍게 꺾고 오리온스를 상대로 4쿼터 대역전승에 성공했지만, 바로 다음날 체력 문제로 전자랜드에게 22점 차 대패, 또다시 3연승 도전에 실패하였다. 5라운드에서는 5승 4패, '''5할을 넘었다!''' 강병현이 온 뒤로는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TOP 3와 원주 동부를 제외한 팀에 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6라운드는 크리스 알렉산더의 부상 때문에 용병 1명(안드레 브라운)만으로 버티면서 7연패-1승(LG)-1패를 했고, 2012-13 시즌은 예상대로결국 꼴찌로 마무리했다. 그래도 전력이 과거 전자랜드의 기록을 넘볼 정도로 심각했던 것에 비하면 승수를 예상보다 많이 쌓은 편. 2006-07 시즌과는 달리 두 자리 연패는 없었지만, 5연패를 빼고 모두 1~8연패를 최소 한 번씩 해봤다.
2012-2013 시즌의 정규리그 상대전적은 상위권팀 1~3위 SK, 모비스, 전자랜드 모두 6패 압살, 4위 KGC 1승 5패 절대 열세, 5위 오리온스, 6위 삼성 2승 4패 열세를 기록했으며, 하위권팀 7위 동부에 1승 5패 절대 열세, 9위 KT 3승 3패 백중세, 8위 LG에게 4승 2패 우세를 기록했다. LG, kt 두 팀에만 무려 7승 5패를 거둔 덕분에 KCC가 13승이라도 했다. 그리고 KCC에 잡힌 이 두 팀은 결국 6강 경쟁에 밀려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서울 SK, 울산 모비스, 인천 전자랜드에는 전패하면서 세 팀이 상위권에 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13년 9월 30일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경희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민구를 지명하였다. 그리고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코치인 척 퍼슨을 영입했다. 척 퍼슨은 1987년 인디애나 페이서스 소속으로 신인왕을 수상했고, '라이플 맨'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NBA에서 정확한 슈터로 날렸던 인물인 데다 한때 래리 버드와 플레이오프에서 득점 맞대결을 펼치기도 하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LA 레이커스에서 코치를 하던 인물이라 국내 팬들은 '진짜 척 퍼슨이야?'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시즌 전 하위권 후보로 높게 점쳐졌지만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의 개막전에서 1점 차 터프한 승리를 거두더니, 이후 홈 개막전에서 전년도 정규 시즌 우승 팀인 서울 SK 나이츠를 압도적인 스코어로 이겨버렸다.[8] 중간에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게 43점 차 대패라는 굴욕을 당하지만, 이후 강병현을 주축으로 한 외곽 포와 용병 타일러 윌커슨의 엄청난 득점력, 로터리 픽 멤버 김민구의 합류로 11월 3일을 기준으로 6승 3패, 4위를 거두며 선전했다. 게다가 식물 용병이라 욕먹던 아터 마족을 버리고, BJ 리그와 풀 개런티 계약을 해지한 대리언 타운스를 영입했는데 2경기 연속 더블더블을 선보이며 전 용병과는 월등한 차이를 보이며 팀의 전력을 강화했다. 1라운드는 4연승 포함 6승 3패로 마쳤다.
하지만 2, 3라운드에 각각 3승, 4, 5라운드는 각각 2승만 거두고 5연패만 4번이나 하며 인삼공사와 삼성보다 오히려 아래를 달렸다. 2월 22일까지 17승 32패로 9위에 쳐졌다. 윌커슨은 평균 득점 20점 이상으로 꾸준히 제 몫을 해주었지만, 타운스는 심리적인 문제로 자신의 기량이 민폐가 될까 봐 자진 퇴출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팀은 타운스가 나간 뒤 델본 존슨을 대체 선수로 영입했다.[9]
이 와중에 KCC는 2월 6일 SK전을 이겼지만 8일 동부의 '''14연패 뒤 2연승'''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군산시에서 열린 경기에서도 맥없이 패하면서 '''KCC 창단 이래 최초로 LG에 6전 전패'''를 기록했다! 심지어 LG는 KT와 함께 전년 시즌 답이 없던 KCC의 보약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는 둘 다 독약이 되었다. 게다가 11/26 첫 대결에서는 둘과 같이 막장 경기를 만들며 남자 배구와 비교가 되게 만들었다. 전주 홈 경기였는데, 1쿼터 역대 최소 득점 기록을 기존 19점에서 14점(KCC 6-LG 8)으로 경신하며 63-68로 졌다. 그런데 이날 계양체육관서 열린 대한항공과 러시앤캐시의 배구 경기에서 3세트 스코어가 '''56-54'''였다.
2013-2014 시즌의 정규리그 상대전적은 상위권팀 1위 LG 6패 압살, 2위 모비스 1승 5패 절대 열세, 3위 SK 2승 4패 열세를 기록했으며, 중위권팀 4위 전자랜드, 5위 KT, 6위 오리온스에게 모두 2승 4패 열세를 기록했으며, 하위권팀 9위 KGC, 10위 동부에게는 4승 2패 우세, 8위 삼성에게는 3승 3패 동률을 기록했다. 특이점은 3위 SK에게 2승 4패로 선전했으며, 4-6위팀에게 우연의 일치답게 모두 2승 4패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뒤에는 팀의 몇 안 되는 볼거리 중 하나였던 외국인 선수 타일러 윌커슨과 재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또 하승진의 복귀에 따라 다시 대권을 노리려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강병현, 장민국과 김태술을 사인 앤 트레이드로 트레이드하는 데 성공해 김태술, 김민구라는 좋은 가드진을 형성했고, 하재필과 김일두를 맞트레이드하며 우승을 다시 노리나 했는데... 김민구가 음주운전 사고를 내며 시즌 아웃,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결국 2014-15 시즌은 완전히 멸망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남농계의 타어강'''. 원래 기아랑 같은 모기업 둔 남자 농구단이 걸려서 폭망해야 했는데, 그 팀이 아예 같은 모기업 산하 프로 팀들과는 2013년 이후 연관이 없었다. 반대로 KCC는 타어강 원조와 같은 동네 출신의 국제적으로 잘나가는 팀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하필 2013년 6월 2일 경기 직관 가고 시구했던 타어강 수원 분점과 같은 숙소를 쓰고 있었던 점이 작용했다.
하승진이 돌아왔지만 다른 선수들이 전혀 받쳐주지 못했으며, 기대했던 김태술도 본인의 장기인 리딩 능력마저 상실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민구의 공백이 KCC에게는 크게 타격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반에는 개막전에서 모비스를 이긴 LG의 14연승을 직접 끊어버리는 등 4승 3패로 5할을 넘겼고 1라운드는 4승 5패로 5위를 기록했지만 갑자기 9연패에 빠지며 11월 29일 기준으로 5승 15패로 서울 삼성 썬더스와 공동 9위에 랭크되었는데, 세부 지표 면에서 약팀의 전형적인 기록을 보여주었다. 툭하면 다실점 경기를 보여주며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고, 사실상 2012-13 시즌의 재림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서울 삼성의 경기력이 훨씬 안 좋았기 때문에 3라운드에서 3승 6패를 한 KCC는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8승 19패로 삼성과 두 경기 차이로 앞선 9위를 유지했다. 그 가운데 그 시즌 군산에서 열린 세 경기를 모두 패하고 말았다.(...)
결국 2월 6일 삼성에게 66-72로 역전패를 당했고, 2월 8일 LG에게 67-87로 완패하면서 다시 5연패로 위기에 빠지면서, 6라운드를 앞둔 2015년 2월 9일 허재 감독이 자진 사퇴하였다. 더불어 2010년부터 허재 감독을 보좌했던 천정열 코치까지 물러났다. 남은 경기는 추승균 감독 대행 체제로 치르게 되었고, 추 감독 대행을 보좌할 코치로는 정선규 스카우트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2월 11일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오리온스에게 52-78로 완패했고, 2월 13일 모비스전은 접전을 펼쳤지만 76-78로 석패했고, 2월 15일 동부에게 60-73으로 패했다. 2월 20일 삼성과의 단두대 매치에서 63-67로 패하며 삼성과 함께 공동 9위로 내려앉았다. 2월 22일 하승진의 1,900리바운드 달성에도 불구하고 KGC전도 71-76으로 패하면서 무려 시즌 최다 타이인 10연패에 빠졌다. 하지만 2월 26일 하승진의 활약으로 전자랜드를 82-78로 잡으면서 드디어 10연패에서 탈출했고 10전 11기 만에 팀 500승, 데뷔 6경기만에 추승균 감독대행의 첫 승을 이뤄냈다. 3월 1일 KT전은 77-92로 완패했고, 3월 3일 SK전도 75-89로 패했고, 최종전인 3월 5일 LG전은 접전 끝에 66-69로 석패하면서 3연패로 시즌을 마쳤다. 만약 이 경기를 KCC가 이겼다면 4위는 LG가 아닌 오리온스가 되었을 경기이기도 했으니...
결국 마지막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9위를 확정'''지었다. 이 시즌 KCC 농구단은 12승 42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 농구단이 KBL에 참가한 이래 최악의 성적'''이다.[10]
2014-15시즌 정규리그 상대전적은 상위권팀 1위 모비스, 2위 동부에게 6패 압살, 3위 SK 1승 5패 절대 열세, 중위권팀 6위 전자랜드 4승 2패 우세, 4위 LG 1승 5패 절대 열세, 5위 오리온스 6패 압살, 하위권팀 10위 삼성 3승 3패 동률, 8위 KGC 2승 4패 열세, 7위 KT 1승 5패 절대 열세를 기록했다. 특이점으로는 6위 전자랜드에게 4승 2패를 거둔 것이다. 전자랜드만 만나면 하승진이 활약하면서 골밑이 낮고 토종 빅맨이 주태수 말고 없는 전자랜드에게 강한 모습을 보인 듯 하다.[11] 전자랜드, 삼성 빼고는 모든 팀에게 열세를 보인 시즌이었다.
2014-15시즌을 총평하자면 'KCC 최악의 시즌' 한 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시즌 전 하승진의 공익에서의 복귀, 김태술의 FA 영입으로 우승 후보까지 전망되었지만 2014년 6월 김민구가 음주운전 사고를 내면서 팀의 추락의 전주곡이 되었고, 김태술, 하승진 등 주축 선수들의 부진, 용병마저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면서 12승 42패 9위라는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김태술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휴유증, 리딩 능력 상실, KCC의 세트 오펜스하고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평균 6.3점 3.7어시스트로 데뷔 후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하승진은 평균 12.6점 9.8리바운드 득점 국내 4위 리바운드 2위를 기록했지만 공익 가기 전 리그를 지배하던 모습은 아니었고, 부상으로 38경기 출장에 그치며 데뷔 후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그래도 신인 김지후가 평균 7.1점 3점슛 1.47개 3점슛 7위를 기록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위안거리였다. 용병은 타일러 윌커슨은 평균 17.9점 7.4리바운드 득점 7위를 기록했으나 작년의 득점력이 아니었고 수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민폐로 전락하고 말았다. 디숀 심스는 평균 11.9점 4.6리바운드를 기록했으나 여전히 수비에 문제가 많았고 용병 두 명이 수비에 문제를 보이면서 결국 9위로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상 용병 농사에 실패하면서 허재 감독의 사퇴, 12승 42패 9위라는 역대 최악의 성적을 찍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2015-16 시즌을 앞두고, 구단은 추승균 감독 대행을 정식으로 3대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5.2. 2015-16 시즌: 추승균 감독 첫 시즌. 16년만에 정규리그 우승!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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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2016-17 시즌: 전년도 1위팀의 극적인 몰락
'''이게 정말 지난 시즌 1위팀이 맞나요??''' 항목 참조.
5.4. 2017-18 시즌: 4강에는 올랐지만 뭔가 부족했던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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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2018-19 시즌: 추승균의 도중 퇴임과 정식 감독으로 승인된 오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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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2019-20 시즌: 전창진, 5년만에 감독으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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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20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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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구단에서는 KCC가 구단을 인수한 2001년부터의 역사를 설명한다.[2] '코트의 여우'라 불렸으며, 1993/94 시즌에 은퇴 후 현대그룹 문화실에서 근무하던 때에 뇌종양으로 쓰러져 1차 수술을 받았다. 1997년에 대전고 농구부 코치로 일했으나 2000년에 암세포가 다시 생겨 수술을 했다가 언어장애 등으로 고생했다. 2001년부터 휠체어 농구팀을 지도하다 2004년에 숨을 거두었다.[3] 99년에 준우승 하고 MVP 받은 안정환과 함께 한국에서는 유이한 기록이다.[4] '무스타파 호프와 2004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 ↔ R.F. 바셋 트레이드'였다. 이 시즌 KCC는 우승을 달성하고 그 다음 시즌에도 R.F. 바셋을 잔류시켰으나 2004-05 시즌부터 용병 자유계약제가 실시되는 바람에 보다 레벨이 높은 선수들이 유입, 바셋은 첫 경기부터 삼보의 왓킨스에게 탈탈 털리며 결국 두 경기만 치르고 짐을 싸고 말았다..만, 실제로는 바셋이 구단에 뒷돈을 요구했으나 구단에서 거절, 그로 인해 태업을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반대로 1순위 지명권을 받은 모비스는 양동근을 지명하며 팀의 주역으로 키워내는데 성공하는 등 우승의 대가 치고는 결말이 살짝 아쉬웠다. 이 트레이드 사건을 계기로 이후 한참이 지난 뒤에 외국인 선수를 트레이드하는 것도 외국인 선수 교체 횟수 소모에 반영하는 것으로 조항이 바뀌었다. 이 트레이드가 가능했던 이유 자체가 당시에는 외국인 선수를 트레이드하는 것은 외국인 선수 교체 횟수를 소모하지 않아서 이 허점을 교묘하게 찌른 거였기 때문이다.[5] 그냥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출전 시간이 20분대로 급락했다. 한창대의 선수, 게다가 여전히 국내 선수 중 손꼽히는 기량을 가진 선수가 로테이션 멤버가 된 것이다.[6] 물론 전랜의 전력이 KCC보다 한참 떨어졌던 것도 있다. 서장훈 트레이드 당시 전랜은 바닥권이었고, 언론에서는 "서장훈이 소속 팀을 플옵에 진출시키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서장훈 징크스 운운했는데 결국 이대로 된 것. 이후에 서장훈이 문태종과 함께 전랜을 정규 리그 2위로 끌어올리고 MVP 후보로까지 거론된 걸 생각하면 전랜 입장에서 서장훈 영입은 대성공이었다. 물론 KCC 입장에서도 어차피 쓰지 못할 트윈 타워를 포기하고 특급 유망주이자 훗날 손꼽히는 가드로 큰 강병현을 얻었으니 이른바 win-win 트레이드였다.[7] 09년은 전북 소재 농구단과 전라도를 연고로 한 야구단, 역시나 전주에 본거를 둔 축구단이 모두 우승한 해였다. [8] 게다가 이 패배는 SK가 1라운드에 거둔 유일한 패배였다![9]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410&article_id=0000121198[10] 심지어 '''최하위를 두번 기록한 2006-07시즌과 2012-13시즌보다 성적이 나쁘다!!!'''[11] 2006-07시즌에도 최하위를 했을 때 상대전적 4승 2패로 전자랜드의 발목을 잡아 6강 경쟁에서 낙오를 시킨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전자랜드는 모비스, kt에도 3승 3패로 전혀 꿇리지 않았을 정도로 상위권 팀들에는 강했으나 하위 3팀들에 아낌없이 퍼주는 바람에 결국 9위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