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역사
1. 고대
대략 4만 년에서 2만 년 사이에 현생인류가 처음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며 8,000여년전부터 포도 재배를 비롯한 농경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3,000여년전이 되면 후르리아(Hurria)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2000년경 이후에는 히타이트 문명의 영향으로 청동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에 조지아가 드러난다. 조지아 서부에서는 그리스 신화에서 이아손이 아르고 호를 타고 황금양을 찾기 위해 갔던 흑해 연안의 '''콜키스 왕국'''이 기원전 6세기부터 융성하며, 그리스-스키타이계 보스포루스 왕국과 교류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조지아 동부에서는 카르틀리 왕국 이른바 동(東)'''이베리아 왕국'''[1] 이 나타났다.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당시 중동에서 융성했던 메디아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등의 공격을 받으며 사트라프가 부임하는 속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를 공격하는 동안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 지역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대신 페르시아의 중심부만 타격했기 때문에 콜키스와 동이베리아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베리아 왕국은 기원전 2세기 이후 아르메니아가 커지면서 많은 영토를 잃었고 콜키스는 폰토스 왕국에게 멸망당했다. 그러나 곧바로 '''로마 제국'''이 캅카스로 오면서 폰토스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이베리아도 로마의 보호국이 되었다. 원래 조지아인들은 메디아인들의 영향으로 미트라교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있었다. 이후에 카파도키아에서 건너온 성녀 니노(წმინდა ნინო)의 설교를 통해서 334년에 기독교로 개종한 호스로 왕조의 미리안 3세(მირიან III)는 337년에 기독교를 국교화하였으며, 이를 통해 이베리아를 비롯한 조지아는 오늘날까지 정교회 신앙을 지켜온 유구한 기독교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2] 서부 일대는 라지카라고 불렸는데, 이 땅을 놓고 사산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크게 싸우기도 했다. 이는 이른바 라지카 전쟁(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문서 참고)으로 불린다. 이후 5세기 말 바흐탄그[3] 1세 고르가살리 공이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이베리아 왕국을 복원하였다.
2. 중세
이후 로마가 차츰 쇠퇴해 가자 콜키스에 독립국이 세워지기도 하고 페르시아가 이베리아를 통제하는 등의 일이 이어지다가, 이어 아랍인들이 조지아를 차지했다. 9세기 초 동로마 제국이 아나톨리아와 레반트 일대의 아랍인들을 밀어내며 확장하는 사이에 이웃 아르메니아와 함께 바그라티온 왕조도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후 조지아의 역사는 조지아 왕국이 건설되면서 동 이베리아판 레콘키스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백년에 걸쳐 정복과 확장이 계속되었다.
11세기 셀주크 투르크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주력군을 허물고 아르메니아를 초토화시킬 때도 조지아 왕국 역시 국토의 대부분이 튀르크군에게 유린당하면서 확장이 중단되는 듯 했다. 그러나 '건설자'라 불리는 바그라티온 왕조의 다비트 4세(재위 : 1089 ~ 1125)가 그동안 셀주크 제국에 바쳐오던 공납을 중단하고 오세트인의 도움을 받아 셀주크 태수들이 장악하던 영토들을 탈환하기 시작한다. 1121년 셀주크의 술탄 마흐무드가 조지아 왕국의 지속적인 확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다비트 4세가 지휘하는 조지아군 5만여 명이 오히려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1122년 트빌리시를 재정복하였다. 다비트 4세는 조지아의 군소 토후국들을 통합해 강력한 통일 국가를 건설한 뒤, 쉬르반을 정복하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일대마저 영향권에 넣었다. 그는 1103년 조지아 정교회를 부흥시키는 여러 정책을 세우고 동시에 흑해 북부의 유목 민족인 쿠만족 난민 4만여 명을 일부러 국경 산악지대에 정착시키는 정책도 세웠다. 셀주크 토후국들과 조지아 왕국 사이에 정착한 쿠만족 난민들은 셀주크 튀르크 군과 계속 싸우면서 조지아의 국경을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다비트 4세의 증손녀 타마르 여왕(재위 : 1184 ~ 1213)의 치세 대에는 셀주크 튀르크족을 계속 격파하여 이란 북서부 일대의 아르빌과 '''타브리즈'''를 정복하고 봉신국으로 삼았다. 동로마 제국이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잠시 멸망당했을 때 세워진 오늘날의 터키 동부에 해당하는 폰토스의 트레비존드 제국을 보호령으로 삼으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봉신국들이 바치는 조공으로 조지아 왕국은 건축, 문학, 철학과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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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세
1220년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조지아 왕국의 전성기는 끝을 맺는다. 조지아 왕국의 지배를 받는 여러 민족들이 몽골군의 약탈과 학살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조지아 왕국 역시 나흐츠반을 비롯한 많은 영토를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에 양도해야만 했다. 그나마 루수단 여왕의 노력으로 형식적으로 일 칸국의 번국으로 복속되었고 나름대로 준독립국으로서 유지는 되었다.
1259년부터 조지아는 다비트 나린의 지휘 하에 일 칸국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70여 년간 꾸준히 일 칸국과 전쟁을 벌이며 과거 조지아 왕국의 국토를 조금씩 회복하는 듯 했다. 일 칸국을 무찌르고 1330년대부터 다시금 지역 강국으로 위치를 굳히는 듯 했던 것도 잠시... 14세기 말 '''티무르 제국'''이 킵차크 칸국과 싸우는 와중에 그 길목에 있던 조지아 왕국이 초토화되었다. 십여 년에 걸친 티무르 제국의 약탈과 파괴로 두 차례의 동 이베리아 레콘키스타를 통해 부흥했던 조지아 왕국은 완전히 붕괴하였다.
15세기가 되면서 조지아의 든든한 동맹국이던 동로마 제국과 테오도로 공국 모두 멸망해버리고, 제노바 공화국은 조지아 왕국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조지아의 흑해 무역 이권을 가로채기 위해 해안 요새를 두고 조지아인들과 싸움을 벌였다. 이 와중에 조지아 주변은 모두 무슬림 세력으로 둘러싸이게 되었으며 조지아는 분열되었다. 이후 조지아는 캅카스 일대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두 강대국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의 싸움터가 되어 서부 지역인 이메레티와 아브하제티, 메스케티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카르틀리와 카케티 등의 동부 지역은 사파비를 비롯한 이란 왕조들의 일부로 편입되어 버린다.
그 와중에 사파비를 비롯한 이란 왕조들은 조지아에서의 지배를 굳히려 조지아인들의 저항을 꺾어놓으려고 무단히 애썼으며, 이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지아인들의 저항과 뒤를 이은 이란의 보복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사파비 왕조의 후궁과 노예 병사 절대 다수는 조지아인 노예였으며, 이스파한의 주민 대다수는 명목상으로는 이란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쉬아 이슬람으로 개종한 조지아인의 후손이다.[출처:] 하지만 18세기로 가면서 조지아인의 저항의식도 계속되는 탄압을 겪으면서 조금씩 사그라졌고 박해를 견디다 못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케이스도 늘어나면서 오스만과 이란의 지배를 인정하는 쪽으로 가는 듯 싶었다.
4. 근대
그러다가 나디르 샤가 사망하고 이란이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페르시아에 복속됐던 동부 조지아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일소되었다. 때마침 북쪽에서 기독교 제국 러시아가 나타났고, 1783년 게오르기예프 조약을 통해 이란의 속국이던 카르틀리-카헤티가 러시아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4] 그러나 조지아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카자르 왕조가 조지아를 침공했고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은 러시아에 원조 요청을 했지만 러시아는 관망했다.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은 열세 상황속에서도 분전해 카자르 왕조는 한때 철군까지 고려했지만 결국 조지아군은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트빌리시가 함락, 큰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는 뒤늦게 병력을 파병했지만 동부 조지아는 인적, 물적으로 큰 피해를 입어 조지아가 러시아에 합병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됐으며 조지아와 러시아 사이의 1차적 악연의 시발점으로 손꼽힌다.#
이후 카르틀리-카헤티에서 일어난 내전을 빌미로 1801년 러시아는 카르틀리-카헤티를 자국의 일부로 편입했다. 조지아를 빼앗긴 이란 카자르 왕조는 러시아에게 전쟁을 걸었으나 러시아에게 무참히 패해 1813년 굴리스탄 조약으로 조지아는 물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까지 할양해야 했으며 서부의 이메레티 왕국도 1810년 저항 끝에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던 바그라티온 왕조는 무대에서 퇴장한다. 이후 서쪽의 다른 공국을 합병하고 오스만과 이란과의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추가로 영토를 확보하면서 1878년 조지아 남서부 아자리야 지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할양받으면서 지금의 조지아 지역은 완전히 러시아령이 되었다. 수 세기만에 이루어진 조지아의 재통일이었으나 그 주체는 조지아가 아닌 러시아였고 이미 조지아는 독립을 잃은 상황이었다.[5]
러시아 제국에서는 중앙아시아 지역 무슬림들에게 낮은 세율로 관용했던 것과 다르게 카프카스 지역 무슬림들에게는 기독교 개종을 강요하거나 추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카프카스 산악 지대에서 무슬림 민족들이 봉기하면 진압하기도 힘들었을 뿐더러,[6] 해당 지역은 망해가는 과정에서도 나름 지역 강국은 되던 오스만 제국과 붙어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위험했다. 조지아 동부의 조지아인들은 사파비 제국 등의 압제 하에서 명목상 시아파 이슬람을 믿었으나,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된 후 금세 정교회로 재개종했다. 조지아 서부 구 오스만 영토의 순니파 무슬림이던 아자르인, 라즈인 등등은 정교회 선교에 좀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상당수가 정교회로 개종했고, 조지아 남부 오스만 국경 지대의 메스케티 튀르크인들은 개종 및 강제이주를 거부할 수 있었다.[7]
러시아 제국의 조지아 통치는 영 아니어서 반란이 일어나곤 했다. 원래 자유 농민이 대다수였던 조지아에 농노제를 강요하고 자유민들에게 농노의 족쇄를 채웠기 때문. 그렇게 농노제를 강제로 이식하다가 갑자기 1861년에 농노 해방을 선언해서 조지아인들의 어이를 털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1861년의 농노 해방을 시작으로 하는 대개혁이 일어나서 정치, 행정, 사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가 있었지만, 농노 해방과 대개혁의 결과는 농민에게나 귀족에게나 시원치 않았다. 문화 사회적으로도 처음에는 양대 이슬람 제국, 오스만과 페르시아에서부터 같은 정교회권의 이웃 수장국 나라가 '해방'시켜주는 모양을 취하더니 나중에 가선 조지아 정교회의 독립 조직, 사제단을 러시아 정교회 아래 아예 흡수해버리려 시도해서 격렬한 반발을 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1918년 조지아는 이 틈을 타 조지아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인근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잠깐 독립했으나 1921년 붉은 군대가 평화협약을 깨고 침공하면서 다시 소련에 합병되었다. 참고로 이 작전을 주도한 건 레닌이 아니고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과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였다고 한다(...).
5. 현대
소련 치하에서 조지아는 일부 영토를 다른 국가나 연방 내 다른 국가에 이양했고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 소련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숙청을 겪었다.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이 오랫동안 소련의 지도자였으나 스탈린은 자민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자비롭게 봐주지는 않아서 조지아 민족주의 세력들을 탄압했고 이 때문에 수만명이 죽어나갔다.[8]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요리 등 조지아의 문화가 소련 전역에 퍼질 수 있게 된 것도 스탈린의 공(?)인지라 조지아 내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이 승리한 이후로 조지아 내에서 조지아인들이 소련 전역을 넘어 세계 만방에 이름을 떨친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에 반발해 조지아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9]
여하튼 그 이후로 조용하게 휴양지로 이름을 날리는 동네가 되었지만 80년대가 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시위가 빈발했고 1989년 소련군이 평화시위를 무력진압하자 이런 분위기는 더 심해졌으며, 1991년 조지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ზვიად გამსახურდია)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바로 축출되고 내전이 일어났으며, 여기에 압하스와 남오세티야 분리주의자들까지 끼어들면서 혼란은 더해졌다.
내전 이후 소련 외무장관을 지냈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가 권력을 잡고 친서방정책을 표방해 서방의 지원을 얻어냈다. 그러나 셰바르드나제의 치하에서 부정부패는 극심했으며 부정선거가 치러지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끝에 셰바르드나제는 사임하고 미헤일 사카슈빌리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사카슈빌리의 치하에서 반독립 상태이던 아자라 자치 공화국의 아바시제가 축출당했고, 이어서 2008년 서방세계, 특히 미국과 유럽 연합의 힘을 믿고 베이징 올림픽 도중에 남오세티야 지방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문제는 남오세티야 뒤에는 러시아가 있었고, 남오세티야의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주둔한 러시아군을 죽이는 미친 짓을 저지른 바람에 진노한 차르 푸틴이 러시아군을 출동시켜 조지아를 털었다는 거다. 이후 조지아는 러시아와 외교관계가 단절되고 남오세티야와 압하스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이때부터 조지아는 러시아어 이름 '그루지야'를 옮겨서 쓰는 나라들한테 차라리 나라 이름을 영어 '조지아'로 써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2011년 들어 개혁 지연과 부정부패 문제 등이 겹쳐 사카슈빌리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데다가, 경제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조지아는 러시아가 수출입 1위'''인 나라라서 조지아로서는 러시아를 무작정 적대할 수도 없다.
2013년 10월 2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친러파 야당 후보 기오르기 마르그벨라슈빌리 제1부총리가 62%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차기 정부에서는 좀 더 러시아에 다가가는 정책을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버락 오바마 정부 이래 미국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을 조지아 국민들로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다만 이번 대선 이후 조지아의 정치체제가 의원내각제로 개헌하여, 총리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대통령이 친러파로 바뀌었다고 조지아를 100% 친러국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10] 그러나 이전처럼 대놓고 반러 친서방 정책을 취하기는 어려워 보이며 경제적으로 중요한 수출입 파트너인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갈 듯하다.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 몰도바와 함께 유럽 연합과의 포괄적 경제협력협정을 맺었는데,[11]# 아무래도 이 나라가 러시아와 같이 가는 건 어려워 보인다. 특히 러시아가 최근 들어 국경 근처에 장거리 미사일들을 설치하고 군사 훈련을 자주 하자 불안해한 나머지 미국, 유럽 등과 합동군사훈련을 했다. 조지아 내에서도 러시아가 침략해올지 모른다며 반러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정부시위가 일어나면서 현총리가 사퇴하는 일이 발생했다.#
2018년에 조지아는 미국-나토와 함께 연합훈련을 했지만, 러시아는 8월 2일에 압하스에서 기갑훈련을 하는 등 맞불훈련을 했다.# 2018년 의원내각제 전 마지막 직선제 대선에서 미헤일 사카슈빌리 사면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2019년 정교회 국가 의회 간 모임인 '정교회 의회 간 회의'(IAO)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하원 의원 세르게이 가브릴로프가 제26차 IAO 총회를 트빌리시의 조지아 의회에서 개최하면서 의장석에 앉은 것이 화근이 된 계기로 친러정권 반대시위가 벌이고 있다.#
결국 정부가 선거제도 중 봉쇄조항 5%를 없애기로 했다.# 야당 대표를 체포하자 다시 시위가 커졌다.# 9월에 결국 총리는 사임하였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당시 조지아는 중립을 지켰으나 간접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도왔다. 아르메니아는 내륙국이라 조지아의 항구를 이용하는데, 조지아는 자국 항구로 들어오는 아르메니아 지원물자를 막아버렸다.
[1] 당연히 이베리아 반도와는 다른 지역이다. 대신 서로 이름이 겹친다는 점 때문에 상호간 호감과 호기심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던 듯 하다. # 또한 이베리아 반도와 구별하기 위해 이 지역을 캅카스 이베리아 혹은 동(East)이베리아 혹은 I'''v'''eria라고도 한다. 공교롭게도 과거 아제르바이잔의 이름은 알바니아와 겹친다.[2] 이베리아가 기독교를 수용한 시기는 문헌에 따라서 317년, 319년, 324년, 330년으로 차이가 난다. 때문에 301년에 아르샤쿠니 왕조의 트르다트 3세(Տրդատ Գ) 치세에서 기독교를 국교화한 아르메니아가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간주된다.[3] '바흐탕'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조지아어에는 [ŋ\] 발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바흐탄그(ვახტანგ, Vakht’ang)'에 가깝다.[출처:] 영어 위백 :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thousands of deportees and migrants from the Caucasus, that Abbas and other Safavid rulers had permitted to emigrate en masse, settled in the city. So now the city had enclaves of Georgian, Circassian, and Daghistani descent. Engelbert Kaempfer, who dwelt in Safavid Persia in 1684–85, estimated their number at 20,000. ... The royal court in Isfahan had a great number of Georgian ḡolāms (military slaves), as well as Georgian women. Although they spoke both Persian and Turkic, their mother tongue was Georgian.[4] 이교도인 이란이나 오스만에게 복속되느니 같은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에 접근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는데, 점점 러시아에 예속되어 갔고 러시아의 지배도 이란보다는 나았지만 오스만에 비해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5]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조지아인들이 마음 놓고 정교회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것 또한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조지아인이든 러시아인이든 간에 소련 치하에서 정교회 박해를 당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6]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사례를 생각해보자...[7] 그러나 이후 스탈린 시대가 되면서 조지아와 터키 국경 지대에 거주하던 터키인들은 거의 전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들의 경우 스탈린의 암묵적인 지시였는지는 몰라도 러시아 제국 내에서 소수민족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해서, 강제 이주 당한 지역이 카자흐스탄이면 카자흐인으로 분류되고 우즈베키스탄이면 우즈베크인으로 분류당했다.[8] 다만 조지아 민족주의 세력들을 탄압하기는 했어도 자기와 연이 있는 사람은 옛 우정을 생각해주었는지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이 없는 사람은 시베리아로 끌려나가서 강제노동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9] 조지아인들이 흐루쇼프를 싫어하게 된 또다른 이유로는 국가 무신론 강화에 따른 정교회 탄압 재개가 있다. 처음에 정교회를 탄압했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정교회 탄압을 어느 정도 완화한 스탈린과 달리, 흐루쇼프는 스탈린 정권 초기와 같은 강력한 국가 무신론을 부활시켜 훗날 본인이 실각할 때까지 그러한 국가 무신론을 계속 추구했기 때문이다.[10]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하여 국방권과 외교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에, 대통령 중심제에 의원내각제를 가미했다고 보면 된다.[11] 러시아는 이에 대해서 반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