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중국대사관
[image]
주한중국대사관 전경[1]
'''중화인민공화국주대한민국대사관'''
'''中华人民共和国驻大韩民国大使馆'''
홈페이지[2]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에 설치한 외교공관. 본관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길 27 (명동2가)에 있다.
2. 역사
대사관의 역사는 1882년에 조선과 청나라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시작된다. 본래 이 자리는 포도대장 이경하의 집터였는데 이경하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유배를 떠나게 된 이후 청나라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는 위안스카이가 이 이경하의 집에 머무르며 조선의 실권자로 군림하게 되면서 사실상 대사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5년에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청나라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됨과 동시에 이 자리는 영사관으로 격하되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조선과 청의 외교관계는 끊어졌다.
1912년에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의 외교관계로 서울(경성)과 평양 등에 영사관이 설치되었는데 서울 영사관은 다시 명동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에는 주일중화민국대사관의 영사였다. 1940년에는 왕징웨이 정권이 들어서면서 왕징웨이가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의 영사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으로 중화민국 주일중화민국대사관 경성 영사관은 기능을 정지했고, 1947년에는 이 자리에 중화민국 임시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8월 13일에 초대 중화민국 대사 류위완이 방한해 친서를 전달했고, 중화민국은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였다. 1948년 11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특사를 파견하고 난징에 특사관을 설치했다. 1949년 1월 4일 중화민국은 미국(1월 1일)에 이어 대한민국을 국가로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명동에 있던 중화민국 임시 영사관이 주 대한민국 중화민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국공내전에서 패퇴하는 중화민국 정부를 따라 한국 대사관도 1949년 4월 21일에 난징에서 광저우로 옮겼다. 4월 23일 난징은 함락되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호텔을 빌려 대사관을 운영할 수 있게 해줬다. 참사관이 상하이 총영사가 교포 피난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고 대만으로 도망간 것을 해결하기 위해 상하이로 파견간 탓에 1등서기관이 대사 업무를 맡았다. 국부천대가 이뤄지자 한국 대사관도 이를 따라 타이베이로 움직였고 한국 대사관의 이동거리는 1만 킬로미터에 이른다.
냉전 시기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은 외교상 중요한 관계였다. 프랑스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했고 1970년대 들어서 일본과 미국마저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대한민국만이 중화민국의 외교관계에서 남은 메이저 국가였다.
1992년에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교 조건으로 중화민국(대만)과의 단교와 함께 서울의 중화민국 대사관을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 자리로 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조건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자신과 수교하려는 모든 국가에 요구하는 요구조건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를 수락해 서울 명동에 있던 중화민국 대사관 자리를 그대로 중화인민공화국에 내주었다.
[image]
내려가는 중화민국 국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기 일주일 전인 1992년 8월 15일에 한국은 중화민국 대사를 소환해 비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 사실, 중화민국과의 단교계획을 밝힌다. 그리고 21일 공식적으로 단교문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를 맺은 24일에는 중화민국 대사관에 72시간 내에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은 6시간만에 국기하강식을 갖고 한국을 떠났다.
대한민국은 주요 국가 중에서는 중화민국과의 단교가 굉장히 늦어서 대한민국의 단교 요구나 중화민국(대만) 대사관의 대처 모두 온건한 편이었다. 하지만 중화민국 정부측에서는 외교부 성명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행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의 단교 과정은 한국-대만 관계 문서의 해당 항목에 자세히 나와 있다. 다른 나라들은 물 끊고 전기 끊고 경찰 인력 투입해서 강제 퇴거시킨 사례도 있고 미국은 대사관을 중국한테 안 주고 대만 단체에게 매각해 기념관 등으로 쓰일 수 있게 해줬다가 중국에게 중국 내 자산 동결 같은 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중화민국은 다른 곳에 주한국대만대표부를 설치했다.[3]
중화민국 측의 대처와는 별개로, 당시 대한민국에 거주하던 화교들은 중화민국과 대한민국과의 단교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대사관 철수 당일 단교반대시위가 열렸고, 그 후에도, 수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나 중화민국으로 귀국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대사관을 곧장 쓰지 않고 용산구에 임시 대사관을 잠시 마련하여 6개월 간 그곳을 사용했다. 이후 여러가지 정돈을 미리 한 뒤[4] , 1993년 2월부터 해당 건물을 대사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중수교로 중국과의 교류가 크게 증가하자 기존 대사관 건물이 굉장히 비좁아져 2002년부터 잠시 종로구 효자동(대사관)과 남산(영사부)로 이전하고 명동 대사관 건물은 비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철거 후 신축을 계획했는데 당시 행정수도 문제로 대사관을 신축할 수 없어서[5] 계속 지연되었다가 2010년에 드디어 서울특별시의 승인을 받아 재건축을 시작했다. 이 대사관은 2013년에 완공되었고, 동시에 종로구 효자동으로 이사간 중국 대사관도 다시 명동으로 돌아왔다. 영사부는 여전히 남산에 있다.
출처: 조선일보
3. 영사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광주광역시 남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총영사관이 있다.[6]
- 중화인민공화국 주 제주총영사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청사로1길 10 (도남동)
- 관할지역: 제주특별자치도 관할
- 중국주서울관광사무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97, 고려대연각타워 1501호
- 주 부산 경제상무참사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해운대로394번길 25 (우동)
4. 대사
2020년 현재 기준으로 싱하이밍 대사 이다. 한반도 통으로 1992~1995년, 2008~2010년에 주한 중국대사관에 직원으로 근무 하였다.
4.1. 역대 공사 및 대사
대청제국 출사 한국흠차대신
- 서수붕(徐壽朋) 1898~1901
- 허태신(許台身) 1901~1904
- 증광전(曾廣銓) 1904~1905[9]
- 샤오위린(邵毓麟 소육린) 1949.1.4.[10] ~1951
- 왕동위안(王東原 왕동원) 1951~1961
- 류위완(劉馭萬 유어만) 1961~1964
- 량쉬자오(梁序昭 양서소) 1964~1967
- 탕중(唐縱 당종) 1967~1970
- 뤄잉더(羅英德 나영덕) 1970~1975
- 주우쑹(朱撫松 주무송) 1975~1979
- 딩마오스(丁懋時 정무시) 1979~1982
- 쉐위치(薛毓麒 설육기) 1981~1987
- 저우진(鄒堅 추견) 1987~1990
- 진수지(金樹基 김수기) 1990~1992
- 장딩옌(张庭延 장정연) 1992~1998
- 우다웨이(武大伟 무대위) 1998~2001 [11]
- 리빈(李滨 이빈) 2001~2005
- 닝푸쿠이(宁赋魁 영부괴) 2005~2008
- 청융화(程永华 정영화) 2008~2010
- 장신썬(张鑫森 장흠삼) 2010~2013
- 추궈홍(邱國洪 구국홍) 2014~2020[12]
- 싱하이밍(邢海明 형해명) 2020~
4.2. 국방무관
국방무관의 경우 소장이 온다. 수행무관들은 교관급 장교들이 온다.
[image]
2014년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 87주년 행사에 두농이 소장.[13] 대사관 측은 두농이의 계급을 소장이라 적었고 계급장도 소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데, 국방정보본부에선 두농이를 대교라고 적었다. 한국에서 주재 중에 진급한 것인지 오류인지는 불명.
5. 그 외
명목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로 간주되는 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인 홍콩, 마카오 주민들도 주한중국대사관의 영사부나 산하 총영사관에서 영사 업무를 받을 수 있다. 허나 실제로 영사업무를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해당 지역 주민들은 별로 없는 편.[14]
중화민국 대사관 시절부터 이 대사관 주변거리에는 서울에서 유명한 수입서적 딜러가 밀집되어 있어서 각종 분야에서 원서를 찾는 이들의 요람이 되었다. 또한 한국의 1세대 오타쿠(수도권 거주자 한정)들이 일본 서브컬쳐 관련해서 원서를 찾으러 가는 루트이기도 했다.
대사관 인근에는 중화민국 대사관 시절에 지어진 부속시설들이 몇 군데 남아있기도 하다. 대사관 뒤의 한성화교소학교와 대사관 길 건너편의 옛 중국 국민당 한국 지부 건물이 대표적이다. 한성화교소학교는 중화민국 측에서 아직도 운영 중인데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간의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로 자국 국기를 외부에 게양하고 있지 않으며[15] 옛 중국 국민당 한국 지부 건물은 현재 한 카페가 임대해 사용 중이다.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에 항의하는 탈북자 관련 단체들의 시위가 이 대사관 앞에서 종종 열린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격화되면서, 한국 내에서 홍콩 민주화세력을 지지하는 시위자들이 홍콩 경찰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 대해 항의를 하러 자주 가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1] 청사는 원래 중화민국이 쓰던 걸 그대로 쓰다가 업무량 증가 등으로 인해 대규모로 재건축했다. 중화민국 시절에 화교는 많아야 5만 남짓이지만 지금 한국엔 중국인이 100만에 가까우니...그리고 옛 청사의 모습은 한국-대만 관계 문서를 참고하길.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길 27에 위치한다. 비자나 여권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영사부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중구 퇴계로18길 103)에 위치한다.[2] 공식홈페이지는 한국어 페이지 관리가 2017년에서 멈춰 있는데 경제상무처, 중국문화원이 더 업데이트가 잘 된다. 그리고 이전 도메인이었던 chinaemb.or.kr은 링크가 죄다 명함천사라는 회사에 먹혔다(...)[3] 위치는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49 광화문빌딩[4] 이때 중화민국 측에서는 장제스 동상 등의 기념물들을 철거했다.[5] 만약 행정수도 이전이 확정된다면 대사관도 당연히 신행정수도로 이사가야 했기 때문이다.[6] 이 중 주 부산 총영사관은 과거 중화민국 영사관이었던 것을 한중수교 때 접수한 후 2000년대에 옮긴 것이고(대만은 이로부터 몇 년 후에 다른 곳에 주한타이베이대표부 관할 부산사무처를 설치) 주 광주 총영사관(이 총영사관은 호남 지방에 위치한 유일한 외교공관이기도 하다.)과 주 제주 총영사관은 처음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설치한 것이다. 참고로 영사관에서는 비자 발급을 해주지 않으므로 비자 발급을 원한다면 밑에 있는 비자센터에서 발급을 해야 된다.[7] 위치가 수영로교회 옆이고 개신교계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중국, 중국은 유학생들까지 전도하려는 종교계에 적대적인 시각을 가지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좋게 보지 못하고 있다(...).[8] 2019년 12월 5일에 광주 시민 단체가 전남대 인문대학에서 재한 홍콩인과의 간담회를 하려고 했으나, 이쪽에서 항의해서 취소를 당한 논란이 있다.[9] 제2차한일협약으로 인한 외교업무 중단[10] 국가승인과 동시에 대사임무 개시[11] 2004년부터 2017년까지 6자회담 중국측 대표을 맡았다.[12] 2014년 2월 부터 2020년 1월 30일까지 근무했던 최장수 대사 이다.[13] 각국 대사관은 자국의 건군 행사를 대사관에서 연다. 군사외교에서 중요하기 때문. 2014년에 자위대 창대 60주년 당시에 주한일본대사관은 롯데호텔에서 행사를 크게 진행하려다가 한국의 반발에 부딪혀 대사관에서 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14] 대만인들의 경우 주한국대만대표부가 별도로 있기에 굳이 이곳으로 올 필요를 못 느끼며 홍콩과 마카오 주민들은 친 중국 본토 성향이거나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니면 이곳에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15] 엄밀히 말하면 안 하는 것보다는 못 하는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