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만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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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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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완공된 구 주한 대만 대사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83-7[1]소재. 단교 이후에는 중국이 대사관으로 쓰고 있고 2011년에 새건물로 재건축했다.
1. 개요
2. 비교표
3.1. 국부천대냉전 시기까지
3.2. "대만"과의 수교?
3.3.1. 과정
3.3.2. 대만 측의 '한국 배신론'
3.3.3. 한국의 배신이 전부인가?
3.4. 단교 이후
4. 반한 논란
4.1. 대만은 반한이다?
4.2. 대만은 친한이다?
4.3. 한국의 반응
5. 문화교류
5.1. 대만에서 한국 대중문화
5.2. 한국에서 대만 대중문화
6. 언론
7. 경제
7.1. 1인당 경제력
8. 참고할 만한 자료
9. 외부 링크
10.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어
한국-대만 관계
(단교 이전) 한중관계(韓中關係)[2]
중국어(정체)
中韓關係
臺韓關係
대한민국대만의 외교 관계를 서술한 문서이다.
양국은 단교하기 전까지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러한 우호관계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화민국은 청나라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정부였다. 과거 일제강점기 중화민국 정부인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3] 현재 중화민국이 통치하는 타이완 섬 자체는 청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청일전쟁 이후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었다.
중화민국 역시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동안 중일전쟁 등 '''일본에게 제국주의 침탈을 겪은 나라여서,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차이가 있다면,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을 혐오하였고 창씨개명을 싫어하였지만, 대만은 일제강점기 때 대만인의 창씨개명을 금지시키고 일본이 대만의 골수 친일파들에게만 창씨개명을 해주었고 창씨개명한 대만인들은 이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었다.
일제통치 시절의 이런 인연으로 중화민국은 1948년 대한민국과 최초로 수교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마오쩌둥장제스를 쓰러뜨리며 중화민국은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고 중국 대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하에 놓이며 공산주의 국가로 변했다. 냉전 시절에는 신생 공산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북한에 대항, 진해에서 이승만장개석이 아시아 반공연맹을 창설할 정도로 반공주의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1992년, 냉전이 종식되고, 노태우 정부의 이른바 북방정책이 박차를 가함에 따라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교하면서 맹방관계가 끝났다.

2. 비교표


항목
대한민국
대만
면적
100,401km²
35,980km²
인구
51,833,175
23,694,089
1인당 GDP
$30,644
$26,910
명목 GDP
$1조 5,868억 (10위)
$6,355억 (21위)
국방비
430억 달러
105억 달러
IMF 분류
선진국
선진국

3. 역사



3.1. 국부천대냉전 시기까지


과거 타이완 섬(대만 섬)은 각종 유럽 국가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간은 중국 청나라의 지배에 놓인 땅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타이완 섬은 일본 제국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한국은 독립했고, 대만은 승전국이었던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그래서 다시 중국 땅이 되긴 했지만, 당시 중국은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정부가 서로 싸우던 상황이었고, 2차대전 당시까지의 중국 지배자였던 장제스가 라이벌 마오쩌둥에게 패배하여 타이완 섬으로 피신한 후, 중국 대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 하에 놓이고, 도망친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대만 섬을 장악하면서 애매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중화민국의 경우 청나라 멸망 이후 중국을 지배한 국가였다. 쑨원장제스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과 운용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재지도 중화민국에 위치해있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이나 연호 같은것도 당연히 중화민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뒤처리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수교한 첫번째 국가가 바로 중화민국이었다.
그런데 국공내전 이후 장제스는 공산당 마오쩌둥에게 패배하여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갔고,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져 중화민국과 분리되었다. 대한민국의 외교공관도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에 있었다가, 중화민국 정부를 따라 타이베이로 옮겼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토일부가 공산당에 점령당한 분단국가가 되었기에, 반공동지로서 유대감을 가져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고 군사적인 면에서 교류도 상당부분 있었다. 대만은 한국과 달리 비율이 흠좀무스러워서 그렇지 엄연한 분단국가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화교는 출신상으로는 산동성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나, 대부분이 중화민국 국적을 갖고 있다.
한국과 중화민국의 군부 및 정계 지도자 중에는 옛 일본육군사관학교 혹은 황포군관학교 등의 동창, 동문들이 많았다. 과거 예편한 국군 고위 장성이 가는 곳이 중화민국 대사인 이유가, 일본육군사관학교나 황포군관학교 동기들을 통한 중화민국과의 친교 확대문제라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실제로 육군 대장 출신으로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했던 정일권이 주요 대만통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장개석조차도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생 출신이다. 일본육사는 당대 아시아 최고의 군사교육기관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강력한 항일 애국자였던 장개석도 추천서까지 받아가며 말 그대로 기를 쓰고 일본육사에 입교했다. 제대로 군사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은 당대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열강반열에 든 일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오합지졸인 국부군 장성들을 보며 기가 차서, '너희가 우리 군대에 있으니까 사단장, 군단장을 해먹지 일본군이었으면 대대장도 못했다!'고 일갈했을 정도다. 실제로 안습하게도 장개석 외에는 국부군 고위 장성 가운데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장성이 없다시피 했다. 어찌보면 일본 육사에서 공부한 장개석이 2차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킨 걸 보면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 비슷한 경우론 호찌민과 보응우엔잡이나 후엔 오사마 빈라덴을 키워준 미군들도 있고..
역대 중화민국 대사들을 보면, 김홍일, 최용덕, 김신 등 옛 국부군에서 교육받거나 복무한 광복군 출신 고위 장성들이 주로 역임하였다. 특히 김홍일(1951~60), 김신(1962~70)의 경우 이례적이라 할 만큼 장기간 재임하였다. 즉 군부 인사의 학연을 통한 친교확대라기보다, 광복군 및 국부군 출신 한국인과 중국 국민당 간의 밀접한 관계를 통한 친교가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중화민국은 한국 입장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는 우방국이었으므로, 무게감 있는 인물을 대사로 파견하는 것이 관례적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신생국가였던 대한민국에서 엘리트 계층은 단연 군인들이었다. 군사정변 직전 기준으로, 해외 교육 및 연수 경험자가 외무부보다 국방부에 더 많았다. 흠좀무(...) 정일권뿐 아니라 백선엽, 유재흥 등 중장 이상의 고위 장성들은 세계 각지의 대사로 파견되었다. 지금도 레바논 등 분쟁지역 국가의 대사들에 군 장성 출신들이 임명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국교단절 전까지 한국에게 중국 = 대만(중화민국)이었고, 대만으로 중국어를 배우러 유학가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 관련 학과, 특히 중국어나 동양철학 전공 선생님들의 경우 2000년대 기준으로 대다수가 대만 유학파 출신이었다[4]. 중국 유학파들은 한중수교 이후 세대들.
한국의 1970년대의 백과사전에서 '국기' 항목을 찾으면 세계의 국기가 쭉 나오는데 거기엔 청천백일기가 나오고 밑에 '''중국'''이라 적힌 사례도 흔했다. 도올 김용옥이 자신의 논어 해설 저서에 대만 유학 경험을 써놨는데 대만을 그냥 중국으로 부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간 줄로 착각하기가 쉽다(...).
냉전 시대에 한국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공산당의 준말로서 "중공"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민국', 즉 대만을 일컫는 말이었다. 중공과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대만을 ''''자유중국''''으로 칭하고, 대륙의 중공 정권은 그냥 '중공', '공산중국'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1공화국 시절엔 '국부중국'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물론 지리적 명칭인 대만/타이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긴 했으나, '자유중국' 혹은 정식 국명인 '중화민국'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공산권과 대립하는 동아시아의 반공진영 국가에게 의례적으로 '자유'라는 이름을 붙여주곤 했다. 그나마 자유중국, 자유월남(남베트남)은 남이 불러준 이름인데, 민주주의와는 백만년은 동떨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나,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본인들이 주장한 이름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중화민국은 참전 의사를 밝혔으나, 누가봐도 대륙 수복을 목적으로 하는 참전이기에 참전하지 못하고 물자 지원만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중화민국군을 참전시켜 대륙 남부를 공격해 중공을 교란시키는 작전도 고려했으나 해임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80년대 후반부터 단교 직전까지,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에게 있어 엄청난 귀빈이었다.
일단 동아시아에선 일본 다음으로 존재감이 크기도 하고(...) 실제로 중화민국과 수교한 국가 중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단교 직전인 1990년 기준으로, 서울에는 미국, 소련, 프랑스, 서독, 영국, 일본, 이탈리아 등 이른바 세계 열강의 대사급 외교관이 상주하여, 중화민국 외교관이 대사 자격으로, 강대국 대사들과 대등하게 접촉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중공에 밀려 수교국을 대거 상실한 다른 나라에선, 중화민국 외교관은 중화민국 대사가 아니라 타이베이 대표일 뿐이었다.
대만 입장에선 당시 서울보다는 로마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다. 현재까지 바티칸에는 중화민국 대사관이 있으며 지금까지 유럽 내 유일한 중화민국의 대사관이다. 이 대사관은 바티칸 땅이 좁아서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그러므로 주 교황청 중화민국 대사는 당연히 어엿한 한 나라의 대사 자격으로 교황청 주재 타국 대사들과 접촉할 수 있다. 한국은 1989년 이전에는 공산권 국가와 전혀 외교관계가 없었으며, 이탈리아바티칸은 공산권과도 꽤 접촉을 한 나라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주 교황청 대사와 주 이탈리아 대표는 겸임이 아닌 별개의 인물들이고 공관도 별개이며 주 교황청 대사는 어디까지나 바티칸에서 활동하는 외교관이라 주 이탈리아 외교관들과의 관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주 이탈리아 대표는 역시나 중화민국 대사가 아닌 타이베이 대표 취급을 받으니 불이익이 따른다. 바티칸이 한국보다 더 낫다는 식의 설명은 사실 어불성설인 셈이다.
또한 이런 대만의 한국에 대한 귀빈 대접은 미국, 일본 등 주요 강대국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80년대 이후의 일이고 국제 사회에서 대만의 지위가 한국보다 훨씬 높았던 40년대 말~60년대 초만 해도 한국 외교사절에 대한 중화민국/대만 외교 당국의 갑질은 지금의 중국이 한국에게 하는 갑질 정도는 차라리 애교로 보일 정도로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튼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나름대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1971년 중화민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와 전 중국의 대표자격을 빼앗기며 UN에서 추방당할 때 한국이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공산권의 반대로 참관국(옵저버)이었을 뿐, 가맹국이 아니라 반대표를 던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맹국이 됐더라도 워낙 스코어 격차가 커서 큰 도움은 되지 못했겠지만.
유엔의 중화민국 축출은 월남의 멸망과 함께 한국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엄밀히는 장제스의 일당들을 축출한 것으로, 이 당시에 유엔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사라진 중화민국의 후신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 입장에선 북한의 동맹국인 '중공'이 가입했으니 정전협정 무효화→북한정권 승인 및 대한민국 불인정→정전협정 파기→적화통일 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나돌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했고, 북한은 중국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다만 수교 때도 국가적인 관계는 친밀했지만, 국민간의 정서 부분에서는 특별히 크게 친밀하거나 사이가 나빴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단교 이후나 이전이나 데면데면한 느낌에 더 가깝다.

3.2. "대만"과의 수교?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은 "대만"과 수교를 한 적이 없다. 한국은 단지 1948년 당시의 "중국"인 중화민국과 수교를 했고, 이듬해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베이로 옮겨간 후 그 외교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다. 1992년 이후엔 주중대사관이 타이베이에서 베이징으로 옮긴 셈이지만, 2012년에 한중수교 20년을 기념하는 것은 현재 "중국"인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는 1992년에 이루어진 것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외교관계를 맺었고 그 외교관계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바티칸 등 얼마 안 된다. 현재 중화민국의 수교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 중화민국과 수교했거나 단교했거나 둘 중 하나다. 이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구별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중국'과 처음 수교한 뒤에, 수교하지도 않았던 '대만'이라는 나라와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라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화민국의 후계국가로 아직까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UN)은 1971년 이래 중화인민공화국을 중화민국의 후계국가로 인정하며 지금의 중화민국을 따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은 1979년 이전의 대만수교사를 미중관계에 집어넣고 1979년 이후의 관계는 따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1992년 수교로 기록했으며, 1948년 수교한 중화민국과 단교함으로써 그 외교관계가 끝났다고 설명한다. 즉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관계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 다만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측의 입장을 반영한 것 때문일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각국과의 수교 연표를 작성할 때 자신의 전신(이라 주장하는) 중화민국과 해당국 간의 관계는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교 몇 년 기념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관계만 따진다. 한국은 일부 국가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수교 시기가 아닌 조선 왕조대한제국 시기 때로 한다. 예를 들으면 한미수교 백주년 행사는 1882년 조선과 미국의 수교 조약을 기준으로 했다. 영국과의 수교 기준점도 1880년으로 잡는다. 그래서 2010년한영수교 130주년이었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도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시기를 기점으로 삼는다.
반면 한러수교 20주년 기념 행사는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제국의 조러수교가 아닌 1990년 대한민국과 소련의 수교를 기준으로 했다. 이후 1991년 소련이 해체됐을 때 러시아를 소련의 후계국으로 인정해서 별다른 수교절차 없이 계속 외교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반면 구소련의 다른 구성국가들은 독립 시점에 맞춰서 따로 국가승인과 수교 절차를 밟았다.
이렇게 기산 시점을 다르게 보는데 대해서 '''국가체제 변혁'''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2번의 국가체제 변혁(러시아 제국→소련→러시아 연방)을 거친 러시아와 달리, 미국과 영국 같은 경우 과거 조선과 수교를 맺을 때나 지금이나 국가체제의 변경이 전혀 없는 나라라는 것을 근거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간단히 반박이 가능한데, 예를 들어 덴마크1902년 대한제국과 우호통상 조약을 맺을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왕조를 유지 중임에도 수교 연도는 1959년으로 잡고 있다. 반대로 대한제국 시기 왕국이었다가 2차대전 후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와의 수교 연도 기산점도 반박의 근거가 된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러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과 '''적대관계였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러시아와 중공은 과거엔 명백히 대한민국을 포함한 서방진영의 적대 공산국가였다. 북한을 도와 6.25 전쟁이 일어나게 한 데다, 직접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전쟁에 참전하여 국군과 미군과 전쟁을 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는 기존의 수교 자체가 있었어도 무효화될 수준의 사건으로, 기존의 국가와 조약을 맺었어도 적대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재정립하고 새로이 수교를 맺은 시기를 수교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같은 사례로는 2015년 기준으로 한일 수교 50주년이 있다. 기사 참조. 한일 국회의 의원들 차원에서 수교 50주년 기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기준으로 둔 것이다. 원칙적으로 '수교'의 기준을 근대적 조약으로 보면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기준으로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이전의 한국은 이념 사상이고 국제관례의 입장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일본을 '식민 지배의 원수'이자 '적대국'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일제의 침략으로 강화도 조약 당시의 조약관계가 무효화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적대국 관계에서 기존의 모든 조약을 효력 정지하며 수교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으니 1965년이 한일 수교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 견해는 앞의 견해보다 그럴듯 하긴 하지만 여전히 반박이 가능하다. 앞서 예를 든 덴마크1902년 대한제국과 우호통상 조약을 맺을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왕조를 유지 중임에도 수교 연도는 1959년으로 잡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덴마크는 대한민국과 전면적으로 적대관계였던 적이 없으며, 오히려 6.25 전쟁 때는 대한민국에 의료지원을 해준 국가이기도 하다. 다만 2012년에 비공식적으로 수교 110주년 행사를 열기는 했다.
이에 덴마크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덴마크 보호령이 되어 사실상 추축국으로 떨어졌던 역사가 있고 따라서 '''추축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에서 1902년의 수교 사실을 무효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견해는 자체적으로 아주 '''심각한 모순'''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과 함께 완벽하게 추축국의 주요 일원이었던 '''독일''', 이탈리아의 사례로 즉각 반박이 되기 때문이다. 덧붙여 오스트리아의 사례 역시 같은 시기에 나치 독일이 주도한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사실상 나치 독일 그 자체로서 추축국 소속이었다는 점 역시 반박의 근거가 된다.
하여간 1959년 수교할 때 한국-덴마크 수교 관계에 대해 자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이 전부 사망한 지금 상황에서 어떠한 기준을 잡고 기산점을 잡은 것인지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3.3. 단교



3.3.1. 과정



"너무 슬프구요, 우리가 나라가 없는 게 너무 안됐어요."[5]

/ "착잡합니다."

-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에서 취재에 응한 한서학교 학생들의 말

위는 당시 한국이 대만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단절했을 때 MBC 뉴스데스크 보도 영상이다. 진수지 대사의 당시 이름 표기가 한국식 한자로 김수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한·중 외교관계 수립으로 …(중략)… 대만은 이번에 세 번째 타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1971년 유엔에서 쫓겨난 것이고, 두 번째가 미중 수교, 세 번째가 한중 수교라는 것입니다. - 첸지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의 국제정세 문제에 관한 연설(’92. 09. 05.)

그러다가 1988년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가 공산권과 외교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면서 한국-중국 및 한국-대만 관계에 변화의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소위 북방정책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외교 노선에 따라 한국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한 데 이어 1990년 10월에는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정점을 찍게 된다. 당시 국내외 외교 관측통들은 한소수교가 한중수교보다 먼저 이루어진 데 대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북한이 소련보다는 중국과 더 가까웠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한중수교 추진 중엔 한중 양국이 대만과 북한의 눈치를 많이 보았었다.
이제 북방정책의 마무리라 할 수 있는 한중수교를 남겨 놓은 가운데, 1991년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단장으로 한 대규모 민간 사절단[6]이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게다가 1990년을 전후하여 이미 상당한 양의 중국산 농산물이나 제품들이 국내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했는데, 오죽하면 농민 단체에서 중국산 농산물 수입 규제를 요구했을 정도였다. 중국에서도 한국제 상품이 시판되는 등 경제적 교류는 이미 상당 부분 진척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급증하는 한중간 경제, 민간 교류와 별개로 양국의 수교 문제는 1991년까지만 해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는 양국이 북한과 대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은 한국과 수교할 경우 이에 반발한 북한이 친소로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한중 수교에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내부적으론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서방권의 외교 압박에 직면하면서 국제적 고립을 타개할 수단 중의 하나로 친미국가인 한국과의 수교를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이 급속히 와해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한국은 노태우 정부의 사실상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안에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북방정책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했고, 중국 역시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대만을 아시아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는 동시에 제3세계 저개발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수교국을 늘려 나간다는 대만의 이른바 은탄(銀彈)외교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한중 상호 수교에 대한 양국의 공감대는 일찌감치 형성되어 있었다.
대만은 빈곤한 제3세계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원조함으로써 수교국을 늘려 나가 나중에 이들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자신들이 UN에서 축출되었던 과정을 뒤집어서 UN 총회 표 대결을 통해 UN으로 복귀할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서울은 대만이 제3세계 국가들과 외교 접촉을 하는 데 주요 창구 중 하나였는데, 만일 한중 수교가 이루어질 경우 이 주요 창구가 막히게 된다.
게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이 새로 출범하면서 북한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사라졌다. 신생 러시아 연방은 더 이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므로 종전처럼 동지 의식을 바탕으로 한 의리 외교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소련 붕괴 전후로 불거진 경제난, 민족 갈등 등 체제 전환에 따른 후유증을 수습하느라 중국을 견제하러 나설 처지가 안 되었다. 때문에 북한은 중국이 어떻게 나오건 간에 중국의 입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중수교는 초읽기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한중 수교가 가시화되면 북한과 대만이 견제에 나설 게 불 보듯 뻔한지라 한중 외교 당국자들은 북한과 대만을 설득하여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비공개로 직접 수교 교섭을 벌여야 했다.
1992년에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교섭을 할 때 중국 측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국원칙을 들이대며 대만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외교에서 최우선 원칙으로 대한민국에만 요구한 것은 아니다. 당장 미국도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화민국(대만)과는 단교하였다.
흔히 중화인민공화국에서만 하나의 중국 원칙을 외교적으로 강요한 걸로 알지만, 실제로는 중화민국(대만)도 과거에 똑같이 하였다. 실제 대만이 전 중국의 대표 자격으로 중화민국이란 국호 아래 유엔 상임이사국을 맡고 있던 1950~1960년대에는 '하나의 중국'원칙을 내걸면서 중국을 왕따시키기도 했다. 1952 헬싱키 올림픽 때는 중국이 참가했다고 일방적으로 불참했을 정도였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중국의 UN 가입도 계속 반대하다가, 1970년대 들어서 미국및 서유럽 국가의 정책변화와 1960년대 이후 대폭 늘어난 제3세계 국가들의 중국 지지로 표대결에서 참패하면서 중국의 UN가입이 확실시되자, 아예 선수를 쳐서 '''중화민국은 UN에서 자진탈퇴'''했다.
당시 미국은 차이니즈 타이완 혹은 타이완 리퍼블릭 이란 명칭으로 UN에 잔류할 것을 권고했지만 장제스는 무시하고 유엔탈퇴를 강행했다. 그리고 이것이 타이완 외교의 최악의 자충수로 지금까지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당시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상 중화인민공화국이 UN에 가입해서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확실했지만, 강제로 대만을 UN에서 내쫓는 것까지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만일 타이완이 이름이야 어떻든 UN에 잔류했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홍콩 반환 문제가 걸려있던 영국은 전부터 친중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독자노선을 부르짖던 프랑스도 중국과 관계가 무난했다.
그리고 중소결렬 이후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이 소련 견제를 위해서 중국과 손 잡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정책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기본적으로 전 인류의 거진 1/4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대신에, 인구 1000만 명(당시) 규모의 소국 중화민국이 UN상임이사국임이 힘의 균형 면에서 부적절하기도 하고.
한국과 중국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대만 측은 몇달 전부터 한국 쪽 공식/비공식 루트를 총동원하여, 중국과의 수교에 대해 문의해왔다. 비록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더라도 대만이 한국과의 수교는 끊지 않을 것이라며, 국교 유지에 필사적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책사로 통했던 박철언의 회고에 따르면 이 당시 한국의 정, 관, 군계 유력인사 치고 대만 정부로부터 국빈으로 초대를 받아 대만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 강조되지만, 대한민국은 당시 중화민국에 있어 최후의 대국이었다. 중화민국 외교관이 외교부장(외무부 장관)으로 가는 엘리트 코스의 마지막 관문이 바로 주한대사였다.[7]
그렇지만 한중수교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해,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에 대해 외교적 판정승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기에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중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기 일주일 전인 1992년 8월 15일. 결국 한국 외무부는 중화민국 대사를 소환해 비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수교, 중화민국과의 단교 계획을 밝힌다. 이는 전세계에서 제일 먼저 알린 것이며, 미국의 24시간 전 통첩보다는 여유가 있었다. 일본은 단교 열흘 전 통첩했다.
한편 첸푸(錢復) 외교부장은 주한 대사관으로부터 한중수교 합의를 통보받은 후 8월 19일 입법원 대표들을 외교부로 불러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다는 사실을 통지하고 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입법원 의원들은 외교부장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를 즉각 언론에 누설하였고, 대만 내 여론은 격분했다. 한국 정부는 대만 소식통을 통해 한중수교 뉴스가 전해지자 처음에는 즉각 부인했다가 결국 하룻만에 이를 번복하여 한중수교 사실을 시인했다. 이 때 대만에 유학중이던 한국외대 중국어과 학생이 대만인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8월 21일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에게 단교 문서를 전달한다. 1971년 유엔 축출 때와 마찬가지로, 중화민국측에서 선수를 쳐 대한민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중국과 수교를 맺은 24일, 중화민국 대사관에 72시간 내에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은 6시간 만에 국기 하강식을 갖고 한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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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주한 중화민국 대사 진수지(金樹基). 한중수교 및 중화민국과의 국교단절 당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대사관에서 내릴 때 한 발언이다. 실제로 당시 중화민국 국적화교들이 눈물로 진 대사를 배웅했으며, 일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리에 나가 한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중화민국 국적의 화교들은 중국 정부와 그렇게 관계가 나쁘진 않다. 심지어 중화민국과 수교 중인 시절보다 더 낫다는 평가다. 사실 이런 원인 중 하나는 한국의 중화민국 국적 화교들이 본국 거주민과 달리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고, 본국은 '중국인' 정체성을 버려 가면서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도 있다. 그러니 중국인이란 정체성을 찾다 보면 비록 반공주의자 화교라도 대륙 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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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내려가는 청천백일기. 관련기사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에서 비난 성명을 발표했으나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중화민국이 철수한 대사관은 곧바로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 탈바꿈했다. 대만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철수하는 한이 있어도 대사관 건물만은 자신들의 소유라 주장했지만, 중국이 내세운 조건에는 대만과의 단교 외에도 '수교국 내 존재하는 대만 재산은 모두 중국으로 귀속된다'는 것이 있었다. 전 중국의 정통성을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진다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사관 건물도 주인이 탈바꿈한 것.
이 곳은 본래 청나라외교공관이었고, 일제강점기 때에도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쓰였다. 중화민국과 일본제국은 외교관계가 있었던 나라기에 중화민국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서울(경성)에 공관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독립한 뒤, 청나라 시절 때처럼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던 것인데 중화인민공화국 측으로 넘어가고 만 것이다. 한편 문제의 중국 대사관은 재건축 문제로 종로구 효자동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2014년 1월에 복귀했다. 복귀 후 개관식 개최.
미국의 경우 중화민국 국적의 화교 사업가에게 매각하는 식으로 눈가리고 아웅했지만, 그 덕분에 중국 내 미국 자산이 동결되는 보복조치를 당했다. 미국도 당했는데 1992년의 대한민국은(...). 다만 사우디의 경우, 국왕의 배려로 중화민국 대사관이 곧장 타이베이 대표부로 간판만 바꿔달 수 있었다. 당연히 중국측은 격분했지만, 사실 수교 전까지 별다른 이해관계도 없는데다 산유국 +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에게 중국이 특별난 보복을 취할래도 취할 것이 없었다(...).

3.3.2. 대만 측의 '한국 배신론'


한국과 대만은 과거 상황상 동질성이 있고 사이가 좋았으므로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도 작용했다. 북한-남한, 중국-중화민국의 대치상황에, 서로 자본주의 국가고 대치하고 있는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며, 심지어 1980년대 말에 들어와서야 민주화가 진전됐다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냉전 시절에도 대만을 우리의 우방이라고 보기엔 대만의 과거 행적이 그렇게 우리에게 호의적인 모습이 아니었고, 대만인들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승인하지 않았던 한국이 1988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호칭을 '''중공'''에서 '''중국'''으로 변경했을 때, 중화민국 측은 당연히 항의했다. 중화민국이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라는 원칙을 훼손하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 강조되지만, 여타 소국들과 달리 한국은 차례 차례 단절되어 가는 중화민국 외교에서 최후의 대국이었기에 그러한 조치가 중화민국 입장에서는 중대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중화민국 수교국 중 최후의 대국이었기에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한국 외교관에 대한 대만의 대접은 거의 국빈 수준이었다고 한다. 타이페이 총통부 근처에 대만 국빈관이 있는데 그곳의 최다 사용 국가가 한국이라고. 때문에 마지막으로 걸고 있던 기대가 무너지자 맹렬히 증오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대한민국이 '중화민국 외교상 최후의 대국'이라고 하기에는 어폐라는 주장이 있는데, 근거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한국보다 인구도 더 많고, 면적도 더 넓다는 것을 댄다. 더불어 남아공이 단교한 시기는 1996년 중국과 수교 접촉을 가진 뒤, 1998년 정식으로 단교했으므로 한국보다는 대만과의 수교 관계가 길었다는 것.
그러나 1992년 기준 한국 4300만, 남아공 3900만으로 1990년대 초까지는 한국이 남아공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 남아공 인구가 한국 인구를 추월한 것은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여기서 대국이라는 말은 단순히 인구와 면적만 따지는 게 아니다. 국제적 영향력이나 상징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조차 UN 축출, 미중수교와 대등한 타격으로 평가한 것이 한중수교였다. 그만큼 중화민국에서 대한민국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당장 40년 넘게 수교했던 맹방이었던데다, 이해관계가 밀접한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한 수교국이었으며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경제대국으로 성장세를 보였던 것이 1992년의 대한민국이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중화민국 외교관이 외교부장으로 영전하는 엘리트 코스의 마지막 관문이 주한대사였으며, 중화민국 정부 역시 한중수교 저지에 필사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이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경제력뿐 아니라, 정치외교적 측면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로 오랫동안 국제적 고립 상태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는 넘사벽이었다. 게다가 그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줬던 중화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비판받기도 했다. 당시 남아공은 데 클레르크 집권 이후 넬슨 만델라 석방,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종식 노력, UN 재가입을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로 복귀하고 있던 터였다. 앞서 언급이 되어 있지만, 남아공도 몇 년 후에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으로 갈아탔다.
단교 당시 중화민국 주한 대사는 진수지(金樹基)였는데, 그의 입장에서도 한중수교는 그야말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한대사 자리는 외교부장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관문이었으나 단교로 인해 진 대사의 외교부장 영전도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중수교와 한국-중화민국 단교 가능성을 진수지 대사가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당시 한국이나 대만의 외교가에서 한중수교와 그로 인한 한국-대만 단교는 기정사실이고,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진수지 대사 자신도 주한대사 내정 소식을 들은 직후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처사"라고 격하게 반발했다고 할 정도.
사실 한국 대사로서 진 대사의 활동 자체가 어떻게든 한중수교와 한국-중화민국 단교를 자신의 임기 이후로 늦추고, 무사히 외교부장으로 올라가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결국 진 대사는 외교부장이 되지 못했고, 장징궈의 사생아 장샤오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참고로 당시는 공식적으로 장징궈의 자식임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3.3.3. 한국의 배신이 전부인가?


이에 대해 한국 배신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배신이라고 하기 위해선 양국의 신뢰가 긴밀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국가 대 국가 레벨이 아닌 민간 레벨에서 수교 시절의 대만은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던 때가 제법 있었다는 것이다.
당장 1960년대에 월드컵 축구 아시아 지역예선으로 원정을 간 한국 대표팀이 편파 판정에 항의하자, 중화민국 관중들이 난입해서 선수를 폭행하는 깽판을 저지른 적도 있다. 그 이후인 80년대만 해도 대만이 한국을 얼마나 깔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몇 가지 있다. 먼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때 대만 언론이 한국을 방문 후 그때부터 한국의 부정적인 면만 집중적으로 방송에 내보내서 부각시켰다.
서울이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닐 때, 개최지 결정 투표가 예정되있던 독일 바덴바덴 현지 분위기는 초기에는 '서울은 딱 3표 나오겠다'였다고 한다. 그 3표는 각각 한국 + 미국 + '''대만'''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실제로 대만은 1988 서울 올림픽 개최에 대해서 '''반대표'''를 던졌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은 절대로 올림픽을 개최하면 안 된다'''며 노골적으로 일본 나고야 올림픽을 공개 지지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서울이 24회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자, 이후 중화민국 언론은 일부러 쓰레기가 많이 쌓여있는 서울의 종로 등의 뒷골목을 활보하며 더러운 거리의 도시라는 식으로 한국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방송을 올림픽 특집으로 꾸미고, 서울 시내 달동네를 보여주며 이런 가난한 나라에서 올림픽을 한다는 투의 방송을 내보냈다. 한국이 88 올림픽 이후 의외로 선전하자 대만 언론이 '''한국의 비리로 점철된 검은 올림픽'''이라고 억지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대만 거주 한국인들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
특히 대만의 반한 감정 문제에서 88 서울 올림픽의 사례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79년 미국과 단교하면서 (88년 올림픽 유치전이 본격화된) 80년대 이후의 대만은 외교적으로 거의 완전히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당장 바덴바덴 IOC 총회가 열린 81년 기준으로 대만에게 남아있던 수교국 중 인구 천만급 이상의 어느 정도 존재감 있는 국가는 한국 외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남아공 정 뿐이었던 것. 게다가 지정학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사우디나 남아공과 대만의 관계가 소 닭 보는 관계에 가까웠다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장기간 유지해온데다 지정학적으로는 대만의 이해관계 및 안전 보장에 직결되는 동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수교국으로서, 대만 외교가에서 한국의 중요성은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이 막대했던 것이다.
바덴바덴 현지 분위기에서 '서울은 딱 3표 나오겠다'고 했던 것 역시... 한국은 당사국이고, 미국은 당시 경제적 전성기를 누리며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냐고까지 평가받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에 표를 줄 가능성이 높고, 대만의 경우 한국과의 외교 관계를 긍정적으로 유지해두는 것이 필요한 입장이니 표를 줄 가능성이 높다는 정세 예측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표결 결과를 보면 한국 서울이 예상보다 훨씬 큰 격차로 일본 나고야를 따돌리고 승리한 상황에서 정작 당연히 한국을 지지할 것이라고 여겨지던 대만은 오히려 일본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이후 올림픽 개최까지 지속적으로 한국의 올림픽 개최에 대해 극히 적대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는, 거꾸로 생각해보면 한국과의 외교관계 경색 -> 국제 외교가에서 대만의 행보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한국의 올림픽 개최, 최소한 성공적인 개최는 막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대만의 입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설명된 바와 같이, 이는 당시 대만이 겪고 있던 국제적 영향력 상실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냉전의 한복판이던 60~70년대를 기준으로 보면 일단 공산 진영이던 중국과 북한은 빼고, 동아시아 자본주의 진영에서 대만이 누리는 지위는 지역 최강국인 일본의 뒤를 이은 서열 2위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의 성장과 냉전 구도의 완화, 중국의 국제 외교 무대 복귀 등이 겹치면서 80년대 들어 대만의 국제적 영향력 및 지역 내에서의 위상이 급추락할 위기에 직면했던 것.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올림픽 개최'는 큰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국가는 일본뿐이었고, 도쿄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일본은 자국의 강화된 위상을 세계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대만의 입장에서 보면 (대만은 개최해보지 못한) 올림픽을 한국이 성공적으로 개최할 경우 일본의 뒤를 이어 동아시아 2위 국가의 위상을 세계에 각인시키게 될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곧 대만의 국제적 위상 실추(= 동아시아 3등 국가로의 전락)으로 이어질 것이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런 우려가 틀린 우려도 아니었다. 물론, 한국의 부상 하나에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라 냉전 국면의 해소 및 중국의 초강대국 부상의 영향이 더 크긴 하지만, 실제로 80년대 이후 대만은 국제적 영향력에서 한국에 완전히 추월당해버린 것이다. 다만 올림픽 개최 하나를 붙잡고 트집을 잡는 정도로는 이런 국면을 역전시키기에 턱없이 모자랐던 것 뿐이다.
이 사례들은 한국과 대만이 단교를 하기 전의 일이지만 이때부터 이미 대만은 한국을 비하하는 방송을 자주 했었던 상태였으니, 단교가 곧 대만의 한국 혐오와 직결된다고 보기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대만은 단교 이전부터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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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및 중화민국과의 단교에 대한 대만인들의 유별난 분노는 애증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국 주제에 종주국을 배반하다니!'라는 봉건적인 중화사상도 기저에 깔려 있다는 평가도 있다. 대만인들도 사실 본성인들 자체가 중국 주류 민족인 한족이고, 외성인들은 중국인(대륙)의 정체성을 가졌으며, 냉전 기간 동안 부국(富國)이었기에 한국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깔보는 시선이 많다.
중국 국민당이 대륙의 합법 정권이었던 시절부터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지만 동시에 장제스광복군을 이른바 '한국 광복군 행동준승'에 의거, 국민당군의 휘하에 두려 했다. 1941년 임시정부와 국민당 정부 사이에 합의된 행동준승에 의하면 광복군은 국민당 정부의 허락 없이는 총알 한 발도 쏠 수 없는 군대였고, 심지어 광복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진격하더라도 여전히 군의 통수권은 장개석에게 있었다. 결국 무늬만 대한민국 광복군이지, 사실상 국민당 정부군의 조선인 부대나 다름없는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광복군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이탈하거나, 합류를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걷던 단체들이 많았다. 하지만 국민당 정부의 지원 없이는 갓난아기처럼 무력하기만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해방 이후에도 중화 사대 관계에 의거하여 한국을 자국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물론 국공내전에서 패하면서 그게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냉전 하에서 양국의 외교 협력과는 별개로, 대만인들은 당시 대만이 한국보다 빨리 경제 성장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 만만하게 보면서 깔보는 정서가 있었다고 한다. 조금 더 얘기하자면 한국에서 컬러 TV가 1980년대에나 보급된데 반해서 대만에서는 1970년대에 컬러TV가 보급되었고 해외여행자유화는 한국에서 1989년에나 이루어진데 반해 대만에서는 1979년에 시행했고, 자동차 대중화도 한국은 1980년대 중후반에나 시작된데 반해 대만에서는 이보다 5년 더 앞서서 시작되었다.
물가 상승 문제나 경상수지도 한국보다 대만이 더 우월했다. 한국은 물가 상승률이 한 자릿수대로 떨어진 것이 1980년대에나 이루워진데 반해 대만은 이미 1960년대에 물가 안정을 이룩했고, 대만이 이미 1970년대에 경상수지 흑자가 이루어진 데 반해 한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서야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게 되었으며, 그나마도 3저 호황이 끝나면서 다시 적자로 돌아서면서 IMF 외환 위기 이전까지는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빈부 격차도 한국에 비해 대만이 훨씬 더 적었다. 이걸 한국이 2000년대에 따라잡고 봉급 수준도 대만의 2배 이상으로 뒤집은 것이다.
그렇게 예전에는 자기네 중화민국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자부하는 한국이 단교를 해버리니 화가 난 거고, 나중에 한국 경제나 문화가 자기들을 추월하니 반감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 단교 문제로 따지면 일본이 먼저 대만과 단교해버렸었음에도 대만은 일본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감을 가지지 않고 여전히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축출당할 때는 프랑스 경찰들이 대만 대사관에 개를 풀어서 짐승처럼 쫒아냈을 정도다.
이렇게 중화민국의 국제적 지위의 추락과 반비례하여 위세가 높아져가는 한국의 단교 역시 반발을 촉발시킨 것이다. 즉, 영향력 있는 단교국들 중에서 가장 만만해보이는 나라였던 한국까지 중화민국과 단교한데다가 단교한 지 10년여 년이 지난 뒤로는 1인당 국민 소득과 봉급 수준마저 한국이 대만을 추월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던 것. 쉽게 말하면 '''열폭'''이다.
다음으로, 중화민국이 한중 수교 가능성을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다. 이미 80년대 후반 한국이 북방 정책을 추진할 때부터 한중 수교 가능성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냉전이 격화되던 1980년대 중반에도, 프랑스가 북한과 수교를 추진하자 한국 측에서는 프랑스와 북한의 수교를 승인하는 대가로 한국과 중국의 수교를 중재해줄 것을 프랑스에 요구한 바 있다.
이렇게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와 중국 관계는 당시에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수 반공 성향의 샤를 드 골 대통령 시기에 일찌감치 중공을 승인하고, 중화민국과 단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념과 종교에 구애받지 않는 실사구시적 외교가 전통이었고, 또 당시 대통령이 사회당 출신으로 비교적 북한에 유화적인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덩샤오핑의 집권 이후 중국과 경제 교류는 물론 헬리콥터, 미사일, 레이더 등 군사기술까지 이전해 줄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이런 군사 협력은 1989년 천안문 사태로 파탄나기는 했다.
그런데 한국의 요청을 받은 프랑스 측에서는 중국 대신 폴란드와 수교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프랑스가 북한과 수교함으로써 한국이 입게 될 외교적 손실을 커버하려면 북한-프랑스, 한국-중국의 교차 수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버텼다. 결국 프랑스는 북한과의 수교를 단념하고, 파리 주재 북한 통상 대표부를 일반 대표부로 승격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고, 한국은 몇 년 후에 프랑스의 중재 없이 중국과 수교하게 된다. 그리고 '''북한과 프랑스는 아직도 미수교 상태이다'''.
특히 1990년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자, 대만 내에서도 한중 수교는 시간 문제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당시의 외교 관측통들은 한소 수교보다 한중 수교가 먼저 성사될 것으로 예측했는데, 한소 수교가 먼저 이루어지고 한중 수교가 나중에 이루어진 걸 보면 당시 한국 정부가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 정리를 상당히 조심스럽게 추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중국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서 조심스럽게 추진한 것도 있다.
주(駐) 타이베이 한국 대표부의 조백상 대표도 이 점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대만에 대해 저자세를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물론 한국 내의 전통적인 반공, 반중공 논리에 입각한 이들 가운데는 대만과의 단교를 명분적, 도덕적인 잘못으로 간주하는 관점도 존재한다. 조선일보 2016.5.12. 칼럼 "타이완을 홀대해서는 안 되는 까닭"[8] 다만 일반적으로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 중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현 정권을 친중(공)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당시 한국-중공 수교, 한국-중화민국 단교 당시의 정권을 같은 잣대로 비난하지 않으며 '중공'을 '중국'이라고 부른다.
사실 대만인들은 신세대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처럼 젊을수록 단교 건에 대한 배신감 역시 약하다. 밑에서도 설명할 국민당의 무리수 선거 광고도 결국에는 선거 참패로 이어지면서 역설적으로 대만인들의 한국 경제에 대한 열폭 감정의 약발이 미미해졌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마잉주 집권 이후로는 대만 정치권에서도 우선 순위는 낮지만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은근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3.4. 단교 이후


여전히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어느 정도 비공식적인 교류는 유지하고 있다. 양국의 대사관이 철수하긴 했지만, 대신 대표부 성격의 외교 기구가 상대국에 위치해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부는 타이베이에 위치해 있으며, 중화민국의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네거리의 동화면세점 건물에 위치해 있다. 타이베이 대표부주한국대만대표부 문서 참고.
또한 부산광역시 중앙역 바로 앞에 부산사무처도 두고 있다. 문화교류도 어느정도 활발하며 특히 90년대 말부터 한국노래와 드라마, 게임이 대만에서도 인기를 얻었고 현재도 대만 거리를 걷다보면 한국노래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격화되면서 중공단교하고 자유중국과 재수교하자는 의견도 있다. 특히 코로나19 범유행 시기 이러한 반감이 더 커졌다. 그러나 현재 중국과의 무역에서 얻고 있는 이익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미국부터 대만과 재수교했을 것이다.'''

4. 반한 논란



4.1. 대만은 반한이다?


대만은 일본 못지않게 혐한이 심각한 국가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대만 웹만 보더라도 일본의 혐한을 따라서 한국 흉보기를 하거나, 한국의 여러 문제점을 과대평가하는 혐한은 널려 있다. 대만은 한류로 인해 한국 문화에 대한 친근감은 있지만, 단교과정에서의 앙금과 한국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대만인들의 대한감정이 절대로 좋은게 아니다. 걸핏하면 한국에 대한 험담이나 악의적인 보도가 쏟아져 나오는게 대만언론이다.
대만 내의 반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원인들이 있다. 우선 한국인들에게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상술되어 있는 대만에 대한 한국의 단교가 있다. 단교 이외에도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 모르는 원인들이 있다. 예를 들어 대만은 한국을 라이벌로 생각하는 일이 많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어이없어보이지만, 한국이 예전에 한국 스스로를 일본에 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만도 스포츠, 경제 등의 분야에서 한국에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견주는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이 경제적으로 앞섰는데 한국이 이를 추월한데다가 한류열풍으로 한국의 인지도와 국제위상은 수교국이 20개 이하인 대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앞서고 있으니 이를 부러워하면서 열폭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image]
한국과 대만 10대 기업 비교. 가운데 숫자의 단위는 억 미국 달러.[9]
그나마도 이 표는 2013년부터 대만이 경제위기를 맞아 대기업이 침체를 겪으면서 의미가 없게 되었다. 사실 저 비교표만 봐도 일반인이 우리나라에서 한번이라도 들어본 기업은 HTC, Foxconn, 에이서, TSMC 정도 기업들을 들어봤을 것이다(...). 몇개만 살펴보자면...
HTC는 대만의 자존심과도 같은 스마트폰 기업으로 한때는 잠시나마 안드로이드 OS 체제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현재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래서 별명이 '''H'''elp '''T'''his '''C'''ompany(...)
Foxconn은 국내에서는 애플의 하청업체로 유명한 기업이다. 최근 삼성전자와의 경쟁 끝에 샤프전자 인수에 성공했다. 물론 이번 인수전 승리엔 일본 관료들의 삼성 배척 운동(...)이 한몫했다. 그뒤엔 폭스콘 회장이 삼성전자에 샤프패널 공급을 끊어버리면서 삼성TV 저가형은 눈물을 머금고 중국제 패널을 갖다 쓰다가 최근에 엘지디스플레이와의 TV용 대형 LCD 공급계약 체결이라는 결과를 뽑아냈다..
에이서의 경우는 90년대 한국 진출하여 수익성이 부진하자 그야말로 야반도주하듯이 철수하여 구매자들의 A/S문제라든지 무수한 문제를 일으켰고 2000년대 와서 한국에 재진출했다가 야반도주한 놈들이 뭔 낯으로 돌아오냐며 욕퍼먹고 막장기업이라느니 대만답게 개판이라는 비난과 같이 대만기업 이미지 악화에 기여하고 말았다. 또한 10만원~20만원대에 팔리는 인텔 아톰 프로세서 또는 셀러론 프로세서가 탑재된 중소기업 태블릿PC나 노트북의 경우 대만제 ODM과 중국제 ODM이 공존하기도 한다.
2020년 7월에는 대만 반도체 회사인 TSMC삼성전자시가총액을 추월했지만 TSMC를 빼면 격차는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10위까지 기업 시가총액으로 따지면 위 차트보다 더 벌어졌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도요타 시가총액 2배지만 일본 경제와 한국 경제 차이가 여전한 것과 비슷하다.

위 영상은 대만 정부가 중국과 체결한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의 서비스 부문 추가 비준이 중국에 비판적인 민진당 등 야권, 학생단체의 반대로 지연되는 동안 한중 FTA가 체결되어 중국 시장을 한국에게 빼앗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국에 대한 경제 라이벌 의식에 호소하면서 "경제 발목잡는 야당을 심판하자"는 의도였지만, 막상 해당 선거(2014년 지방공직인원선거-한국의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이 참패하면서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애국심 마케팅이라 널리 욕을 쳐먹은 것은 덤이었다. 한중 FTA를 막는게 아니라 민진당을 선거에서 참패시켜 동력을 상실케 해 ECFA 확대를 빠르게 하자는 것[10]이었지만, 현실은 반대로 국민당이 민진당한테 관광당했으니(...) 실제로 ECFA 서비스/투자협정은 국민당의 지방선거 참패 이후 비준동의안이 멈췄다.
일단 대만의 지자체에서 '''"한중 FTA를 막읍시다!"'''라는 공약을 내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국과 중국이 맺는 경제협정을 제 3국의 일개 도시(市)의 지자체에서 뭘 어떻게 말리려고 한다는 것인가? 애초부터 일개 지자체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닐 뿐더러, 된다면 내정간섭이다. '''중화민국 총통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도 제대로 간섭하비 못하는 것을 제 3국의 일개 지자체의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는 것 자체가 그저 어이가 뺨을 치는 소리다.'''
그리고, 가끔 한국에 대해 잘못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는 한국인들이 공자 한국인설을 주장한다는 말이 있다. 최근 마잉주 총통에게 한국 유학생이 직접 공자의 한국인설을 제기한 루머에 대해서 바로 잡아달라고 탄원하기도 하였다. 물론, 일부 환빠 성향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한 사례는 있지만 그런 사례는 공자에만 그치진 않는다. 그리고 이 주장은 말할 가치도 없는 마이너한 주장일 뿐이다.
그 밖엔 한국이 강릉시 단오제를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단오의 기원국인 중국 측이 "단오를 한국에 빼앗겼다" "한국이 단오절을 자신들의 명절이라고 세계에 알리고 있다"는 오해도 환빠로 인한 오해와 함께 널리 퍼진 오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조선풍으로 각색(현지화)한 '예수의 일생' 연작 그림을 "한국이 예수마저 한국인이라 거짓부렁한다"는 유튜브 영상도 있다. [11] 심지어 '''환빠를 깔 목적으로 디시에서 만든 '환빠가 생각하는' 세계지도가 역시 대만을 통해 퍼지면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세계지도로 알려진 경우도 있다.''' 위와 같은 억지스런 왜곡과 오해가 하나의 인터넷 문화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주리시(朱立熙) 대만 지한원장에 의하면 젊은 세대는 그래도 한류 등의 영향으로 비교적 친한적인 편이나 대만의 고령층은 한국에 대해 중화사상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여기에 더해 일제시대 당시 조선의 경제력이 대만보다 열악했던 점 및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의 경제력이 한국보다 앞서 있었던 데 따른 멸시감과 우월의식도 한몫 한다. 그리고 단교 전 양국 간 갈등을 목격한 40-50대의 경우 특히 한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대만 정치권에서 자신들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서 국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는 목적과 선정적인 대만 언론매체들이 이를 조장했다는 것. # 사실 대만 언론의 선정성 경쟁은 한국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가 않다. 인구가 한국의 절반 정도 수준인 국가에서 지상파 방송사가 5개인데다가, 종합편성채널이 20개, 보도채널이 9개나 될 정도니 자연히 방송사들은 수익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선정성 경쟁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야말로 복마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신문이라고 해서 사정이 특별히 다르지는 않다. 대만/문화항목 참조.
대만에서 유년시절 5년을 거주했으며, 대만인들을 대상으로 한국 컨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한국인 유튜버가, 2020년 7월에 업로드한 한국에 관련된 루머들을 해명하는 영상의 상위 코멘트에는 해명한 내용들을 오히려 재반박하거나 한국인 입장에서 매우 보기 거북한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인 PTT에는 한국 관련 이슈나 사건 사고들이 자주 게시되는데, 불미스런 사건이나 사고에는 특히나 수많은 코멘트가 등록된다. 상당수가 한국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댓글이니, 굳이 찾아서 열독을 권하지는 않는다.
사실, 위의 유튜버는 다른 동영상에서 대만인들에게 약간의 불만을 드러내었다. 대만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었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사람도 늘었지만, 한국 관련 악성 루머나 오해에 대한 해명을 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관련 컨텐츠를 업로드하는 대만 유튜버들도 늘었지만, 어디까지나 한국 화장품, 한국 여행, 한국 연예계 소식으로 '돈을 벌기 위한 비즈니스' 차원의 내용이 주를 이루며, 철저하게 비지니스에만 이용되고, 비하와 루머에 해명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한국의 위치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낸다.
게다가, 대만 내 한류의 유행과, 대만의 혐한 감정을 절대적으로 결부짓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2010년 양수쥔 사건으로 대만 전역에서 혐한 분위기가 확산되고, 정치권과 언론에서 불을 지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인터넷에서 루머들을 확산하고 공유했던 연령대가 당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이 현재 대만의 20~30대이다.
2010년 같은 시기에도, 한국의 가수들이 대만차트에서 상위를 차지했었고, TV에서는 한국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현 시점에서도 대만의 젊은 세대에 혐한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대만의 반한 감정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과 대처 역시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대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나머지, 대만의 반한 감정 이유를 단순히 단교와 열등감 정도로 해석하려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들은 대만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다.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한중수교 시기 자체를 잘 모르듯이, 대만의 20~30대들도 단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문화와 경제적인 부분에서 한국이 앞서있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고, 개의치도 않는다. 최소한 대만의 20~30대에게는 단교와 열등감은 거리가 먼 단어인 것이다.
현 대만의 젊은 세대들의 반한감정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는 ''''스포츠, 전자산업, 범죄 및 사건'''' 이다. 특히 이 중에서 스포츠가 가장 심각한데, 기본적으로 대만인들에게 한국 스포츠는 '심판을 매수하는 치졸한 방식으로 승부하고, 선수들은 페어플레이 정신이 없고 반칙을 일삼으며, 이런 식으로 더럽게 승리하여 거만한 태도를 취한다'는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당연히, 한국인 입장에서는 루머로서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무시하지만, 대만 정치권과 언론의 뿌리깊은 부채질에 의해 이러한 이미지는 뿌리깊게 각인된 상태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과 더불어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그 감정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대만 정치권에서는 이 반한 감정을 또 한 번 정치질에 이용하였다. 당연히 2010년 양수쥔 실격판정은 한국과 전혀 무관했으나, 당시 인터넷을 이용하던 주류층이던 젊은 대만인들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타이베이시의 한국인 초등학교가 테러를 당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마잉주 총통이 직접 나서서 사태 진화를 나서고, 양수쥔 선수가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에게 사과했으나, 아직까지도 잘못이 한국측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대만인들이 많다. 실제로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신아람 선수가 오심을 당하자, 양수쥔 사건의 인과응보라고 조롱하는 대만의 여론이 주류였다.# 박인비 선수 역시 이러한 스포츠 반한감정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전자산업으로 기인한 반한 감정으로는, 삼성전자와의 해프닝이 가장 크다. 삼성전자의 공격적인 반도체 업계 진출과 치킨게임의 가장 큰 희생자가 대만이었고, 이 밖에 대만에서 굉장한 이슈가 되었던 '''삼성의 후기 조작사건'''(三星寫手門事件)# 등으로, 스포츠 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에서도 부정적인 편법을 일삼는 이미지가 쌓이게 된 것이다.
이 밖에, 대만 언론에서는 이러한 반한 감정을 이용하여, 한국에 관련된 '''자극적이고 편향된 기사나 보도'''를 자주한다. 특히 한국에서 대형 사건이 발생하거나, 한국인이 대만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전 방송사가 앞다투어 이를 보도한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자극적인 보도를 빈번하게 접하는 대만인들의 입장에서는, 한국과 한국인은 부정과 사기를 일삼는 것을 모자라, 대만과 대만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모습과 이미지로 각인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이런 한국과 한국인에게 반한 감정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는 당위성까지 내재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과 대만인들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단순히 단교와 열등감으로 인해 반한 감정이 폭발한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은, 이 뿌리깊은 갈등의 골을 해결하는 데에도 결코 좋지 않으며, 요즘에는 이러한 한국인들의 반한감정 인식에 또다른 불만을 품는 대만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대만인이 한국에 가지고 있는 오해와 루머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풀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반한 감정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한류의 유행으로 반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관점도 지양해야 한다. 시진핑은 미국 드라마를 즐겨보며, 김정일도 영화광으로 미국 영화를 즐겨 보았고, 아베는 한국 음식을 아주 좋아한다. 대만과 한국의 젊은 층들이 교류하는 폭과 빈도가 가장 활발하는 현 상황을 좋은 기회로 활용하여, 서로간의 오해와 루머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기회와 여건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

4.2. 대만은 친한이다?


본 문서에서 과장되게 서술된 것과 다르게 대만 내 친한 감정에 비교하면 대만 내 반한 감정은 극히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다. 자극적인 소재를 원하는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과장되게 표현된 것이 국내 네티즌들에게 여과없이 전달된 것.
앞에 언급된 공자 한국인 설이니 하는 것들은 주로 미디어가 부풀리는 것이다. 앞에 언급이 되어 있지만 대만의 미디어의 선정성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그 수준을 뛰어 넘는다. 한국 종편채널들의 자극적인 보도는 애교 수준일 정도. 한국에서는 인터넷에나 올라올 '대륙의 기상' 따위의 내용이 메인 뉴스에 여러 꼭지 방송되는 수준이고, 대만 미디어의 저질스러운 수준을 모르는 한국 네티즌들이나 한국의 언론사들이 이런 내용을 보고 방송사 뉴스가 저런 걸 얘기할 정도면 반한감정이 되게 심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정치적인들의 언사가 여과 없이 한국쪽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부분이 있다. 대만은 오랜기간 경제침체를 겪고 있고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다. 총통 선거에서는 늘 경제 문제가 이슈가 되는데 대만하고 경제력이 비슷하면서 가까운 국가가 한국이다 보니, 선거 시즌만 되면 정치권에서는 허구헌 날 한국 까는게 일상다반사다.
게다가 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언론이 이를 비판해서 보도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대만 언론은 대놓고 정파가 갈려있기 때문에 자기 정파의 주장을 마구잡이로 보도한다. 즉, 정치권과 언론이 반한감정에 앞장 서고 있는 셈인데 대만의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인이 봤을 때는 언론과 거물권 정치인들을 통해 나오는 주장들이 대만 국민 다수의 의견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이미 반한 문단에서 언급되듯이 정치권이 지방선거에서 한중FTA를 막자는 주장을 하는게 오히려 국민들에게 까이는 실정이다.
의심이 된다면 직접 대만을 방문해 보는 것을 권한다. 절대 대다수의 대만 사람들은 한국인들에게 친절하면 친절했지 절대로 적대적이지 않다. 이것은 한국인 관광객에게만이 아니라 대만에 장기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다. 적대적이기는커녕 오히려 한류의 영향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상당히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90년대 후반부터 클론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래로 가요와 드라마 부문에 있어서 만큼은 일본을 완전하게 밀어내는데에 성공을 거두웠으며 현재도 대만 거리를 걷다보면 한국노래를 쉽게 들을 수 있다. TV를 틀때 한국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이 나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정말로 혐한이 심하다면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
2013년 방영된 꽃보다 할배와 여행사들의 대만 붐 조성으로 한국-대만간 민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양국 방문 관광객 증가와 한국-대만 워킹홀리데이 쿼터수 증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유튜브 영상에 따르면, 2019년 현재에는 한국이 모든 분야에서 대만을 추월했으며 대만인들도 이를 인정하여 인터넷 상에서도 혐한감정이 거진 사라졌다고 언급하고 있다.[12]
대만민의기금회의 2018년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인 중 한국에 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58.4%, 비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33.8%로 반한감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호감을 가진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2017년 조사(호감 48.6%, 비호감 41.7%)와 비교했을 때 호감을 표시한 비율이 오히려 더 높아진 편이었다.
반한 감정에 대해 추가적으로 언급하자면 한국에서는 90년대 초의 단교를 단골 소재로 얘기하는데 정작 대만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는 소재다. 앞선 문단들에서 서술된 내용 중에서 특히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경제적인 수준에서 한국보다 훨씬 앞선다고 생각했는데 뒤쳐졌다는 것과 중국인으로 교육 받은 세대들의 중화 사상이 반한 감정의 주요 요인이다. 대만 사람들과 오랜 기간 알고 지내도 그들이 먼저 단교 얘기를 꺼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도 유독 한국인들 위주로 단교가 반한 감정의 매우 큰 원인인 것처럼 얘기한다. 심지어 오랜 기간 대만에서 거주한 사람들도 그런 얘기를 할 정도.
그런데 인터넷상의 과격론자들조차 한국을 깔 때 단교한 배신자의 나라 같은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다. 위의 한국 배신론 관련 문단에서도 언급되지만 상대방은 단교에 대해 별 언급이 없는데 반한감정에 대한 종합적인 이유를 분석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단교를 명분적, 도덕적 잘못으로 간주할 이유가 없다.
반한 감정의 주요 원인이 단교라면 단교를 한 타국에 대한 반감이 적다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심지어 최근에는 중국으로 돈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빈국들의 ''배신''에 대해 별 관심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 나라들도 대만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경제적 지원을 받고서도 일방적 단교를 했지만 규탄대회는 커녕 관심조차 없는게 실제 대만사회의 현실이다.
반한론 항목에서는 유튜브 댓글이나 PTT같은 익명 커뮤니티 댓글을 근거로 혐한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나 이를 한국에서의 유튜브 댓글과 디씨인사이드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그대로 대입시켜보면 한국도 똑같이 제노포비아가 만연한 나라라고 비판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키보드 두들기는 극단적 무리의 언행에 비추어 한 나라를 판단하는 건 한국어 좀 배운 외국인이 네이버 뉴스 댓글을 읽고서 한국은 이런 나라구나 하고 판단하는 것과의 동급인 실책이다.

4.3. 한국의 반응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류 등의 영향으로 반한감정이 상당히 희석되었지만 최근 여러 이슈들로 반한감정이 촉발된 전례가 있다. 또한 한국 언론들이 으레 그렇듯 대만 언론도 자극적인 사실들만 강조해서 말함으로써 대만의 반한감정에 불을 지폈다고 할 수 있다.
2000년 이후로 대만의 반한 감정이 한국에 많이 알려졌고, 11월에 대만의 아시안 게임 반한 사태로 인해 한국인들의 대만에 대한 감정도 나빠진 면이 있다. 대만의 아시안 게임 반한 사태에서 중화민국 정부는 양국 국민들의 반응과 달리 공식적으로는 한국 탓이라는 말은 한 적은 없다. 다만 당시 우둔이 행정원장이 욕한 적은 있다(...). 그리고 계속 문제가 커지자 진정시키겠다고 한국에 통보했다.
다만 최근 미세먼지, 중국 어선의 서해 불법 조업, 사드 보복 등으로 한국에서 반중 감정이 나타나는 상황의 영향으로 대만에 대한 인식이 이전에 비해선 좋아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양안관계에서는 거의 일방적으로 대만을 옹호한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건 민간분야의 얘기이고 정부 차원에서는 1992년 이래로 수교관계를 가진 만큼 공식적인 정치외교면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

5. 문화교류



5.1. 대만에서 한국 대중문화


'''정작 대만에서는 한국 문화의 수용도가 꽤 높은 편이며 심지어 우호적인 수준까지 왔다.''' 그것도 외교관계가 있었을 때는 안 그렇다가 없어진 지금 이렇게 된 것.
1990년대 말부터 대만 지상파 TV의 저녁 시간대에는 한국 드라마(중국어로 한쥐(韓劇)라고 부른다.) 여러 개가 방영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중화 문화권에서 한류 열풍의 시작을 알렸다. 사실 '''해외에서 부는 한국 대중문화 열풍에 대해서 한류(韓流)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곳이 대만이다.''' 그리고 최초의 한류 스타는 바로 클론으로 한때 대만 연예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월드컵 송은 현지 여가수가 번안해서 불러 크게 히트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한류 현상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보도도 거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특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대폭발하던 시점부터 국내언론들이 "한류"라는 표현을 대거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대중음악 인기도 대단하다. 1990년대 후반 1세대 아이돌이 전성기였던 시절, 대만의 레전드급 영화배우 겸 가수 서회옥이 당시 한국에서 유행했던 수많은 곡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 클론의 도시탈출, 디바의 왜불러[13]가 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정말 많다'''.#
슈퍼주니어는 대만 내 현지 음원/음반 차트 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단교 이례 최초로 대만에서 한국 유명인사에게 전용기를 보내주었고, 가장 큰 공연장에서 최다 공연 횟수를 기록했다. 또한 외국 가수 최초로 자국 가수를 제치고 금곡장 대상을 두차례 거머쥐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골든디스크나 서울 가요대상에서 대만 가수가 음반대상을 탄 격이다. 라디오나 길거리, 음식점에서도 '''한국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오는데, 광저우 아시안게임 태권도 사건 때에도 소녀시대, 원더걸스 불매운동이 이슈가 되고 '''"소녀시대, 원더걸스가 와도 용서해 줄 수 없다!"''' 같은 웃긴 구호까지 등장했다.
대만에서의 한국 대중문화가 그들이 옛날부터 심취해 있던 일본이랑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을 수준까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K-POP만 놓고 보면 일본보다 많이 정착되었을 정도다.
특히 2015년에 자국 출신인 쯔위걸그룹 TWICE의 멤버가 되어 한국 연예계에 데뷔한 후로 이러한 모습을 잘 알 수 있는데, 쯔위가 아시아 아이돌 팝의 선두주자인 K-POP의 메이저 기획사에서 데뷔한 사건을 가지고서 몇 달 내내 언론 메인에 걸고, 그걸로 '''"왜 대만에는 월드스타가 안 나오는가?"'''로 언론(!)에서 갑론을박한 것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대만의 주목도가 굉장히 높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사실 대만 자국 내에서 활동하는 스타가 보기 힘든 건 대부분의 대만 출신 연예인들이 중국이나 홍콩, 일본, 한국 등으로 가서 활동하는 사례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한국여행업협회(KATA)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8월 한국을 방문한 대만 관광객의 수는 7만 9,400여명으로 1년 전(2015년)보다 3.1배, 2년 전(2014년)보다 33% 증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2015년 통계는 메르스 사태로 외국 관광객이 격감하여 평소보다 차이가 커졌던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쯔위가 대만인들의 한국 관광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결과라는 평가도 있다.
2018년에는 대만에서 한국 영화도 수용도가 굉장히 높아졌다. 신과함께-죄와 벌, 신과함께-인과 연 두 편 모두 '''대만 박스오피스 1위'''를 거머쥘 정도로 대만에서 한국 영화도 수용도가 높다. 이런 텐트폴 무비의 대만 흥행 성공으로 인해 한국 영화들이 2017년 이후로 신나게 대만에 상륙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극장판 또봇 : 로봇군단의 습격같은 작품도 2018년 대만 수출이 되기도 한다. 2020년 한국 애니메이션 마왕의 딸 이리샤가 대만에 개봉[14]하여 좋은 평가를 얻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Top 10에 진입도 못 해봤는데 대만에서는 박스오피스 9위까지 했다.
2018년 11월 말에는 연간 기준으로 한국을 방문한 대만인의 수가 처음 1백만명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2020년 8월 22일에 타이베이에서 카카오프렌즈 매장이 오픈했다.#

5.2. 한국에서 대만 대중문화


1980-90년대 당시에 포청천 등 사극을 중심으로 대만 드라마가 인기를 끌기도 하였고, 호소자 시리즈 등의 대만 영화도 상당수 흥행하기도 했으며,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순까지 영건이나 채지충의 중국고전만화시리즈, 접지전사 등의 대만 만화도 흥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화는 접지전사 이후로 수입되는 만화가 그리 없는 상황이다. 물론 현재 네이버 웹툰에서 아만의 백귀야행지가 연재되는 등 아예 없지는 않다. 가뭄에 콩나듯해서 그렇지(...) 참고로 백귀야행지의 평점은 9.9점대로 꽤 좋은 편이다.
방송 역시 무분별한 개방에 따른 방송사의 영세화로 프로그램의 질이 나빠지면서 사그라들었다. 일부 대만 드라마가 알려지는 경우가 있지만 딱히 인기를 얻지는 못하는 수준. 영화역시 불법공유로 시장이 망가지면서 거의 중국 쪽에 의존하게 된 상황. 덕택에 '''포청천도 중국이나 홍콩에서 만든 드라마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에서 오래 일한 외국인 강사들은 타이완(대만)과 타이(태국)를 잘 구분 못하는 어린 한국인 학생들이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대만과 타이를 헷갈리는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도 종종 있다고. 별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세 유럽 시기에 본인이 최초의 포모사 출신 유럽인이라 사기쳤던 백인(...) 조지 살마나자르(1679?~1763)는 본인의 허풍에 대한 영감을 다른 역사학자들이 저술한 샴 왕국에 대한 논문에서 얻었다고 한다.
반대로 대만을 '중국'과 완전히 별개로 인식해서 대만에서 중국어를 쓴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중공을 중국이라 부르면서 생긴 문제.
2015년 이후로는 나의 소녀시대를 필두로 대만 영화들도 한국 영화 시장에 개봉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영화들이 대만 영화 시장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하는 등 주류 영화로 자리잡을 동안 대만 영화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철저하게 비주류인 것이 걸림돌이다. 대부분 독립영화 취급으로 아트하우스 상영관에만 제한적 상영에 그치거나 아예 실제 개봉을 못하고 영화제 초청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다.
대만의 한류열풍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F4, S.H.E, 비륜해(飛輪海), 주걸륜(周杰倫) 등 한국에서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얻은 대만 연예인들도 있다. 특히 주걸륜이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說的秘密)>은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했으며, 대만 여행에서 이 영화의 촬영지를 방문하는 여행객들도 있다.
이와 별도로 한국 오덕계의 친대만 성향이 적지 않다. 게임계에서는 반교 -Detention-환원 -Devotion- 두 작품으로 연달아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한 개발사 레드 캔들이 잘 알려져 있다.
저가 항공사들이 대만행 항공 노선을 대폭 확충하면서 대만이 한국인들의 인기 여행지로 자리잡았으며 여행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대만의 미식 문화가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버블티지파이 같은 대만의 길거리 음식을 한국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대형마트와 편의점에서는 펑리수, 누가 크래커 같은 대만의 디저트를 수입해서 판매하기도 한다.

6. 언론


한국 언론들이 워싱턴 D.C, 도쿄, 베이징, 모스크바, 런던, 파리, 베를린, 홍콩 등에는 특파원을 보내지만 타이베이에는 왜 특파원이 없을까 싶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바로 '''중국 공산당의 압력 때문'''이다. 주한중국대사관하나의 중국 압력을 넣어 한국 언론사들이 타이베이에 주재원을 보내지 못하게 공산당이 지속적으로 뒤에서 감시하고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타이베이, 가오슝 등 대만의 도시에 해외 지사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보도되는 대만(중화민국) 관련 소식은 대개 '''홍콩신문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발'''인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은 중국의 압력 때문에 대만 소식은 주로 SCMP를 통해 보도되는 것을 한국이 하루 이틀 있다가 보도하는 형식이다.
연합뉴스에서 2009년에 한국언론 중에선 처음으로 타이베이에 특파원을 파견한적이 있었지만 통신원으로 대체된 상태다.

7. 경제


아무리 단교를 했다 하더라도 한국과 대만은 비공식적으로 교류를 하고있으며 사실 정치적인 교류도 어느정도 이루어지기도 하다.[15] 특히 IT산업. GIGABYTE, MSI, ASUS 등의 부품회사들이 많이 교역하고 있으며, 한국 관광에서도 중국, 일본, 미국 다음으로 많이 입국하는 나라가 대만이다. 반대로 2014년 기준 대만 입국 관광객 역시 중국, 일본 다음으로 한국 3위다. 다만 대만에서는 홍콩/마카오에서 온 관광객을 중국 대륙에서 온 관광객과 따로 분류하는데, 이에 따르면 홍콩/마카오 관광객이 3위이고 한국이 4위.
한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대만 브랜드는 바로 버블티 회사 공차이다. 다만 잠시 한국법인이 인수하여 한국 브랜드였다가 후에 미국자본이 인수하여 미국 기업으로 바뀌었다. 17년에 공차 코리아가 본사를 인수했기 때문. 휠라와 비슷한 케이스다. 또 자이언트같은 자전거 회사들도 꽤나 유명.
그런데 이게 상품교역이나 인적교류에만 치중된다. 대만과는 투자보장협정(BIT)과 자유무역협정이 없기 때문에 전면적인 교류 확대에 장애물이 있다. 원래 1980년대 BIT를 한국-대만 간에 체결할 뻔했지만 중국 대륙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대만 처리문제가 걸려서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안습.
대신 2010년대 들어 BIT 체결 및 TPP를 통한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등이 진지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중국 대륙 정부의 견제가 좀 있지만, 이쪽은 한중 FTA를 먼저 해서 괜찮다. 그리고 대만과 외교관계가 단절되면서 대만 측이 한국 선박항공기의 항로 진입을 통제하는 등 양국 간 경제 갈등이 약간 있는데다 단교 관계라 정부간 외교/통상협의가 제한되는 등 애로사항이 꽤나 많다. 2016년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후보자(현 장관)의 인터뷰 내용.
일반 국가와 미승인국과의 외교관계는 대표부급 관계이므로, 외교관이 아니라 민간 자격이기때문에, 통상 협상에서 전권 위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통상 협상에서 전권대사를 따로 뽑아 특사 형식으로 파견하고 협상을 하는데, 절차가 복잡하다. 이런 식으로 한국-대만 BIT나 FTA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제한사항이 있어 일단 다른 방법을 찾는 듯하다.
2010년대 들어서 인적교류는 관광이 대부분이다. 무역 수준은 연 300억 달러 수준에서 수년째 정체되고 있다. 비즈니스는 비활성화 되어 있는데, 한국-대만 간 컨벤션센터 교류도 없다. 예를 들어 대만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대의 IT 행사인 컴퓨텍스 타이베이(난강전람관)에서 시행)에는 한국 회사가 거의 참가하지 않는다. 정작 일본이나 중국, 미국, 독일 회사 등은 잘만 참가한다. 한국에서 하는 지스타나 기계산업전 등에도 대만의 회사들이 경쟁력이 있음에도 많이 참가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신산업 행사에는 기가바이트아수스 등이 참가하기는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대만간 상호간 공장 설립이나 기업 M&A, SOC 민자사업 투자에는 서로 소극적이다.
2015년 자유무역협정은 한국과 대만이 2015년 9월 동시에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하고 TPP 가입국 및 상호간 협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BIT가 체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네이버 주식회사가 대만 핀테크 기업을 인수하여 네이버페이를 만들고, 대만의 유안타그룹이 동양증권을 인수해서 유안타증권을 만드는 등 BIT가 없음에도 일단 제한적으로 기업교류가 있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서로 간 국명 문제로 트러블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추진하는 TPP에는 대만이 '중화민국'으로 가입하는 것을 추진중인데, 양자협정인 BIT에 있어서는 대만의 정식국명인 중화민국을 쓸 것이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견제를 받은 WTO 국명인 "대만, 팽호, 금문, 마조 개별관세영역"을 쓸 것이냐 하는 등 기술적 문제가 있다.
2015년 12월 13일 연합뉴스가 중화민국에 르포 취재를 갔는데 민주진보당 측에서 "5대 교역 상대국인 한국과의 무역 교류를 강화할 예정이며 TPP 동반 가입을 위한 협력 방안도 검토할 것이다."라며 대한민국과의 동반 TPP 가입 의사를 확실시하였다. 2차 TPP 가입국 중에서 대한민국이 가장 무역협상 경험이 풍부하다보니 한국과 중화민국이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듯. 기사 2016년 차이잉원 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무역협상 방식을 배우겠다고 한다.
일단 2015년 투자보장협정을 시도하는 모양이다. 또한 2015년 한국거래소(KRX)가 자본시장 국제화를 위해 ETF 교차거래를 위한 '''첫 파트너'''로 대만의 대만증권거래소(TWSE)를 선택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2010년대들어서 다시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2016년부터 KRX - TWSE 간 ETF 교차거래가 시작된다. 2015년 10월 27일 이런 내용을 담은 기사가 공식 발표되었다. 한국거래소에서도 "'''우리나라와 경제 환경이 유사한''' 대만거래소와 대표지수(Taiwan 50) 추종 ETF 교차상장을 먼저 추진하고 이후 다른 지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2월 13일 다시 기사가 나왔다.
상당히 큰 변화로, 유안타그룹이 한국 동양증권을 인수하여 유안타증권이 된 이후로 한국 텔레비전 광고방송, 인터넷 광고, 심지어 한국 길거리 등에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상당히 많이 노출되고 있는 등, 한국 내에서 대만의 입지가 다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이야기한 한국거래소-대만증권거래소 주식시장 ETF(대만 : KOSPI200 ETF, 한국 : 가권지수 ETF) 교차상장은 2016년 10월 7일에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대만증권거래소 보도자료 한국거래소 상장기념식 이에 따라 2016년 10월 6일 대만 정부에서 한국의 KOSPI200 선물상품이 적격상품으로 인증받으면서 한국-대만 간 금융투자 분야에서도 시장 확대가 기대된다. 그리고 최근 사드 배치로 중국간에 관계가 냉각되자 중국 관광의 대체제로 대만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

7.1. 1인당 경제력


1인당 GDP(명목)
연도
한국
대만
한국:대만[16]
1980
1,761$
2,367$
0.74
1985
2,538$
3,295$
0.77
1990
6,732$
8,178$
0.82
1995
12,742$
13,076$
0.97
2000
12,257$
14,876$
0.82
2005
19,402$
16,503.$
1.18
2010
23,087$
19,261$
1.20
2011
25,096$
20,911$
1.20
2012
25,466$
21,269$
1.20
2013
27,182$
21,887$
1.24
2014
29,249$
22,638$
1.29
2015
28,732$
22,373$
1.28
2016
29,296$
22,572$
1.30
2017
31,577$
24,389$
1.29
2018
33,319$
25,007$
1.33
1인당 GDP(PPP)
연도
한국
대만
한국:대만[17]
1980
2,190$
3,473$
0.63
1985
4,131$
5,855$
0.71
1990
7,548$
10,088$
0.75
1995
12,134$
15,606$
0.78
2000
16,517$
21,675$
0.76
2005
23,468$
28,933$
0.81
2010
30,984$
38,583$
0.80
2011
32,546$
40,777$
0.80
2012
33,789$
42,251$
0.80
2013
35,309$
43,831$
0.81
2014
36,882$
46,318$
0.80
2015
38,111$
47,061$
0.81
2016
39,484$
48,169$
0.82
2017
41,330$
50,520$
0.82
2018
43,289$
53,074$
0.82
IMF 2019년 10월 자료
6.25와 같은 전란을 국토에서 직접 겪지 않았고, 본토에서 가져온 자산을 통해 경제발전의 상황이 더 좋았던 대만이 2003년까지는 1인당 GDP에서 줄곧 앞서왔다. 외환위기 직전에 한국이 거의 넘어설 뻔 했으나, 이후 IMF가 동아시아를 휩쓰는 동안 대만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위기를 버텨내며 차이는 다시 벌어졌다. 원화가치 절상과 대만 달러 절하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며 1인당 명목 GDP에서 한국이 대만을 추월하는 것은 2004년에 이루어진다. 이후로도 차이가 서서히 벌어지며 2018년 기준 한국의 1인당 명목 GDP는 대만에 비해 33% 더 크다.
반면 PPP로는 대만이 아직까지도 한국보다 약 25%정도 높게 측정되며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양안관계 및 대만 경제의 특성으로 인해 명목 GDP가 저평가되는 현상이 지속되는 한은 이러한 상황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8. 참고할 만한 자료



9. 외부 링크



10. 관련 문서


[1] 도로명주소로는 명동2길 27.[2] 여기서 '중(中)'은 대만을 지칭한다. 한국과 중화민국이 단교하기 전까지의 한중관계는 대만과의 관계를 지칭했다. 현재는 한중관계라고 하면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지칭한다.[3] 이를 증명하듯이 중화민국의 총통이었던 쑨원장제스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이다.[4] 그보다도 앞선 세대 중에는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을 때 중국 대륙 유학을 한 경우도 있다.[5] 이는 대만이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에 의해 '''유엔에서 중국의 합법적인 유일한 대표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정됨'''에 따라 사실상 강제 축출되었기 때문이다.[6] 이명박 전 대통령도 이 사절단에 포함되어 있었다.[7] 이 코스를 밟은 사람은 실제론 딱 두 명이었다. 사실 많을 수가 없었다. 중화민국이 '미국과 국교가 없으면서 한국과 국교가 있었던 기간'은 13년 남짓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당시 외교부장 첸푸는 주한 대사 경험이 없다. 두 명 중 한 명은 주한 대사 후 외교부장이 됐는데, 외교부장 후에 주미 대표가 됐다.[8] 다만 이 칼럼을 쓴 사람은 진보적 법학자이자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가 구설수로 사퇴한 안경환이었다.[9]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색해보일 수 있으나 한국전력공사 역시 매출액으로 보면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기업이다. [10] 자유무역협정 항목에 "경쟁적 자유화 효과" 문단 참고.[11] 실제로 천주교의 현지 토착화의 포교 정책을 알면 이렇게 말을 절대 못한다.[12] 지금은 삭제된 영상이라 내용을 서술하자면, 한국의 이슈에 대한 인터넷 댓글을 읽어주는 내용이다. 인터넷 댓글이 여론을 반영하지는 않지만, 채널 주인의 말로는 대만 인터넷상에서 반한적인 댓글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어느 나라나 인터넷상에서는 과격해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실제 여론으로서의 반한은 과거보다는 훨씬 묽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채널 주인은 현재 대만 거주중이며, 일반화를 피하기 위해 대만인에게 검수를 받는다고 한다.[13] 홍콩의 가수 겸 배우인 두덕위도 영어와 광동어로 번안해서 불렀다.[14] 심지어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대만에서 '''한국어 개봉'''했다! 한국어 예고편[15] 물론 중앙정치 차원은 중국의 존재감이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인 측면에서보나 너무 존재감이 강하기 때문에 주로 지자체 단위로 교류가 이루워지고 있다.[16]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17]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18] 서울부산에 사무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