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2006년/신인드래프트
1. 개요
2006년 KBO 신인 드래프트 (공식 명칭: '''2006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는 1차 지명과 2차 지명으로 진행되었다.
2. 1차 지명
2005년 6월 5일까지 각 팀에서 팀별 연고지 내 고교 출신 선수 중 1명을 뽑았다.
3. 2차 지명
2005년 8월 31일 서울특별시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3층 거문고홀에서 개최되었다.
고등학교 및 대학교 졸업 예정자, 상무 소속 선수들 등 총 700명이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했다.[4]
3.1. 지명방식
1라운드부터 9라운드까지 진행되며 각 팀은 최대 9명의 선수를 지명할 수 있다. 단, 지명을 원치 않는 팀의 경우 해당 라운드에서 패스할 수 있다.
지명방식은 각 라운드마다 전년도 순위의 역순대로 지명하는 방식이다.
3.2. 지명 결과
- ※표시는 지명권 포기나 대학 진학으로 인한 지명권 소멸 등으로 지명팀에 입단하지 않은 선수.
- 볼드표시는 스탯티즈 기준 통산 war이 2 이상 되는 선수한테 부탁드립니다.
- 볼드표시는 스탯티즈 기준 통산 war이 2 이상 되는 선수한테 부탁드립니다.
4. 드래프트 평가
- 롯데 자이언츠: 1라운드, 그것도 전체 1순위[13] 에서 류현진 거르고 나승헌 결과적으로 보면 나승현이 2015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면서 롯데의 류거나는 최악의 삽질이 입증되었다.[14] 김문호는 그나마 2014년부터 조금씩 실력발휘를 하기 시작하고 있지만 김문호를 뽑고 놓친 선수가 민병헌이었다는 게 문제다.[15] 배장호는 1군에 간간히 등판하고 있고, 황성용(개명 후 황동채)이 가끔 1군 백업으로 보인 정도였으나 2015년에 은퇴했다. 한편 1차 지명자였던 손용석은 프로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10년간 홈런 1개도 못 치다가 2016년에 은퇴했다.
- 한화 이글스: 류현진을 뽑은 것만으로도 2006년 신인 드래프트 최고의 승자.[16] 류현진 때문에 1차지명으로 뽑히며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유원상은 2006 시즌에 아예 올라오지 못한 것은 물론 이후에도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다가 양승진과 함께 LG 트윈스에 트레이드되었다. 3라운드에서 정범모를 뽑고 8라운드에서 양의지를 패스한 것 역시 한화가 이후 포수 문제로 길이길이 골치를 썩히게 되는 요소가 되고 말았다는 의견[17] 결과적으로는 17시즌 후반기 잠시 부활하는 듯 싶다가 18시즌을 앞두고 주전경쟁에서 밀려났고, 구단에서 길을 터주려는 목적으로 윤호솔과 트레이드시켜 주어 NC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류현진은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어마어마한 이적료를 남겼다. [18]
- LG 트윈스: 군산상고 타선의 중심 황선일과 2선발 원종현 등 군산상고 돌풍의 주역들을 대부분 지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정작 그 중심에 있었던 차우찬을 지명하지 않고 경동고 투수 신창호를 뜬금지명했다. 드래프트 직전에 삼성과 선동열 감독이 신창호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자 원래 지명 계획이었던 차우찬 대신 지명을 하였지만 이는 완벽한 패착이 되고 말았는데, 이 지명에 대해서는 삼성 구단과 선동열 감독이 타구단을 낚기 위해 "우리는 신창호에 관심있음" 이라는 가짜 정보를 흘렸고 LG 프런트가 이에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19][20] 대부분의 선수들은 LG에서 뚜렷한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원종현은 NC로 가서 2014년에 불펜으로 나서 155km/h까지 찍으며 큰 힘이 되었고, 황선일도 결국 14시즌 끝나고 한화로 갔다가 방출되었고 1차 지명인 김기표도 2015시즌부터는 신생팀 kt로 이적했으나 1시즌 뛰고 은퇴, 유일하게 마지막에 지명한 최승준 한명이 15 시즌까지 남아있었으나 시즌이 끝난 후 fa로 영입한 정상호의 보상선수로 SK로 이적하면서 현재 팀에 남아있는 선수는 없다. 이후 차우찬은 16시즌 종료 후 FA로 LG에 이적을 했다. 결론은 실패한 드래프트. 하지만 여기에서 신고선수로 작뱅을 가져오면서 아예 실패한 드래프트라고는 볼 수 없겠다. 그리고 신고선수였지만 이해 최고 아웃풋이었던 김현수를 거액으로 영입했기에 LG 입장에서 자체적으로 픽한 드래프티는 모두 망하거나 타팀에서 포텐터지고 타팀에서 성공한 드래프티를 거액으로 모셔온 기묘한 드래프트다.
- SK 와이번스: 류거이. 다만 롯데와는 경우가 좀 다른 것이, SK 입장에선 바로 다음해에 안산공고 좌완투수 김광현을 1차 지명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언제 부상이 재발할지 모를 류현진을 1차 지명하는 모험을 하는 리스크를 피하려 했고, 정상호의 성장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박경완을 받쳐 줄 어린 포수를 지명하는 게 더 이득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그 이재원이 나승현과는 다르게 1군 주전으로 자리를 잡고 2010년대 중후반에는 타격 포텐도 터뜨리면서 완전 실패는 아니게 되었다. 물론 이재원이 오랜 기간 쌓아온 WAR보다 류현진이 7년간 쌓고 떠난 WAR이 2배 이상 높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패는 실패이며, 그마저도 이재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망했다. 2차 1라운드 지명으로 입단한 김성훈은 부상과 구단과의 불화가 겹치며 방출되었고 군 복무를 마친 뒤 삼성에 신고선수로 들어갔으나 거기서도 방출, 1년을 쉬고 2013년 말 한화에 신고선수로 합류해 재기를 노렸으나 그곳에서도 1년만에 방출되었다. 김성현은 2014시즌부터 세 시즌은 활약했지만 그 이후로는 백업급의 성적으로 주전을 차지하고 있어 팬들의 원성을 샀다. 김재현은 1군에서 살아남긴 했는데 SK 팬들은 그저 경쟁자가 없어서 실력에 비해 많은 출장 기회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명기도 이만수 감독이 2013년부터 밀어주면서 타격 재능을 서서히 피우고 있었지만 2016 시즌에 부진하다 다음 시즌에 노수광을 받아오며 KIA로 트레이드 되었다.
- KIA 타이거즈: 흉작은 아니었지만 선수들이 꾸준히 활약하지 못했다. 계약금 10억을 받아 관심을 모은 한기주는 광주동성고 시절부터 당한 혹사[21] 로 인해 여러 부상이 찾아오며 재활병동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이영욱을 상대로 2018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고 결국 201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손영민은 필승조였지만 혹사로 인해 구위가 하락했고 사생활 문제로 임의탈퇴 공시된 후 자취를 감추었다가, 2016년에 신고선수로 돌아와 정식선수로 승격됐다가 2018년에 결국 방출. 박경태는 좋은 모습을 보인다 싶으면 다시 부진하며 박경태러리스트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안았고, 그래도 오래 살아남긴 했지만 결국 2019 시즌 끝나기 직전에 김주형과 함께 방출당했다.
- 두산 베어스: 당시에는 폭망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 보니 대박[22] . 1픽인 신일고 좌완투수 남윤희가 미국으로 가고[23] 1라운드 김용성도 방출됐고[24] 민병헌만 겨우 건진 드래프트로 보였다. 하지만 2010년 경찰청에서 2년간 버프를 받은 양의지가 포텐을 터뜨리면서 신인상을 거머쥐었고 향후 10년간은 주전 포수 걱정을 덜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 따라 버프 받은 민병헌 또한 경찰청 제대 이후 2013년부터 타격이 폭발, 다음 해부터는 붙박이 국가대표 외야수가 되었다. 최주환도 계속 1군 주전을 호시탐탐 노리다 2017년 오재원의 부진에 주전으로 출전기회를 잡기 시작하여 2018년엔 포텐이 완벽하게 터지며 타선을 이끄는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시즌 두산 베어스의 최고 수확은 다름아닌 지명을 받지 못해서 신고선수로 입단한 김현수. 그는 2015년 시즌이 끝난 뒤 KBO 리그 선수 최초로 FA 자격을 얻어 MLB에 진출하게 된다. 비록 상위 지명은 실패했으나, 2015년 한국시리즈의 클린업 트리오를 3번 민병헌, 4번 김현수, 5번 양의지가 담당했고 2015년 한국시리즈 우승멤버, 국가대표까지 되는 등 그야말로 대풍작을 일궈내며 전년도 드래프트의 흑역사를 완벽하게 지워냈다. 일명 87베어스 or 06베어스 or 민김양 베어스. 그러나, 2018년에 민병헌은 롯데로, 김현수는 잠실 라이벌 팀으로, 양의지는 NC로 이적하며 민김양 트리오 모두 FA로 두산을 떠나게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최주환도 2020시즌 종료 이후 SK로 떠나면서 결국 두산에 남아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 현대 유니콘스: 연고이전 시도 후부터 꾸준히 1차 지명은 하지도 못했던 현대는 2차 지명에서 1라운드부터 7라운드까지 모든 선수들이 1군을 밟고, 팀 해체 후에도 넥센에서 다들 나름대로 활약하는 기염을 토한다. 특히 강정호의 활약은 말할 것도 없다. 황재균은 롯데로 이적한 후 각성하기 시작해 인천 AG 결승전에서 결승타를 날리며 AG 母子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영광을 얻었고 황재균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김민성의 포텐도 터지며 윈윈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2차 2라운드로 입단한 김세현은 2016 시즌에 제 역할을 찾은 듯, 세이브왕에 등극하면서 방화범의 악명을 떨쳐내고 맹활약하다 같은 시기에 입단해 대수비, 대주자로서 쏠쏠한 활약을 보여준 유재신과 함께 KIA로 트레이드 되었다. 김세현은 2017 시즌엔 팀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시켰으나 이후 두 시즌 동안 투수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정도로 망했고, 2차 드래프트를 통해 SK로 다시 이적했다. 유재신은 이적 후 대수비, 대주자로 여전히 계속 경기에 출전하며 가늘고 길게 살아남다가 2020 시즌이 끝난 뒤 은퇴하고 두산 베어스 코치가 되었다.
- 삼성 라이온즈: 1픽 김효남을 포함해 대부분의 선수가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나마 1라운드 차우찬 정도가 성공 케이스. 김상수는 나중에 터지기는 터지는데 삼성이 아니라 장원삼의 트레이드로 이적한 넥센에서 터졌다. 이외에는 김기태와 모상기가 간간히 보인 정도였으나, 김기태는 삼성의 투수난 때문에 잘하든 못하든 계속 올라오다 17시즌 이후 방출되었고, 모상기는 KT로 갔다가 은퇴.
5. 이모저모
- 2006년 두산 베어스의 1차 지명자인 신일고 투수 남윤희는 본인이 자진해서 지명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자비로 돌아다니며 테스트를 받아 해외에 진출하여 지명권이 소멸된 사례이다. 두산 베어스 구단에서도 안일하게 대응한 것이 남윤희의 아버지가 두산에 오랜동안 임직원으로 재직하였기에 당연히 계약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것...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5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아 더블에이까지 승급하였으나 결국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어깨 부상으로 방출당했다. 2012년 요미우리/닛폰햄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실패하고 귀국하여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지만, 교류전 출전 불가와 병역 문제로 인해 2013년 3월 퇴단하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25] 했으며 2017년도 2차지명에서 SK의 지명을 받으며 비로소 KBO 리그에서 뛰게 되었다. 그러나, 2년만에 선수에서 은퇴하고 SK 와이번스 스카우터로 전직했다.
- 청소년대표팀 출신에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였던 김현수의 미지명을 놓고, 동기인 남윤희의 해외진출로 인해 스카우트들이 신일고 출신을 안 뽑기로 담합했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그러나 김상수, 모상기, 박진원 등 2차 지명에서 신일고 출신만 3명이 뽑혔다.[26] 거기에 롯데에서 김현수와 김문호를 저울질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단순 루머로 치부되고 있다.
- 대구상원고의 좌완 투수 백정현이 돌연 유급을 하면서 논란이 빚어졌다. KIA에서 백정현을 지명할 계획이었는데, 유급 때문에 지명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 하도 팜이 부실한 삼성이 2007년 드래프트 1차 지명을 위해 백정현의 유급을 권했다는 설이 돌면서 문제가 커졌다. 결국 이 때를 기점으로 1차 지명자의 유급생 금지 규정이 도입되기에 이른다. 여담으로 백정현은 2007년 드래프트 2차 1라운드에 삼성에 지명을 받았다. 당시 무릎십자인대 파열(군면제는 덤)로 출전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의리를 지킨 선택이라는 루머도 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 추신수, 이대호, 김태균 등이 포함된 2001년과 함께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로 꼽힌다. 자그마치 세 명이 메이저리그의 문턱을 밟았으며(신고선수인 김현수 포함 4명), 류현진은 사이영상 경쟁을 하는 현역 중 아시아 최고 투수로, 강정호는 비록 막판 부상이 있긴 했지만 좋은 타격성적을 거두며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맞이했다. 그 외에도 KBO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선수들 역시 어마어마하게 많다.
[1] 2012년 남윤성으로 개명.[2] 계약금 '''역대 최고액'''[3] 연고지 문제로 1차지명에서 제외[4] 주의해야 할 것은 고교, 대학 졸업 예정자들은 전원 자동 지명 대상이다.[5] 김건국으로 개명[6] 기사[7] 2015년 12월 김세현으로 개명[8] 한양대 진학후, 4년 뒤 넥센에 지명.[9] 2013년 11월 황동채로 개명.[10] 입단 계약을 했으나 2006시즌 시작 전 선수단에서 제외.[11] 4년 뒤 KIA에 지명.[12] 후에 현철민으로 개명.[13] 라고는 하지만 1차 지명에서 대어급이 좀 빠진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당시의 나승현 정도면 전면드래프트 1라운드 상위권은 가능했지만 그 뒤에는 훗날 현역 메이저리거가 되는 사람이 네명이나 있었다는게 문제였다. 그래도 황재균은 2010년에 트레이드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14] 다만 당시에는 나승현을 1순위로 뽑는 것이 당연했던 상황인 것이, 류현진은 팔꿈치 수술 등으로 인해 부상 우려가 있었고 나승현은 0점대를 찍으며 날아다녔다. 당시 광주일고 3대천왕 나승현, 강정호, 김성현 중에서도 최고로 치던게 나승현. 당시 한 학교에서 한 명도 뽑히기 힘든 청소년 국가대표로 광주일고 한 학교에서 3명이 뽑힐 정도(전국 유일)로 최고로 잘 나가던 선수들이다.[15] 물론 당시 김문호는 민병헌과 함께 덕수고 타선을 이끌었고, 황금사자기 - 화랑대기 MVP를 탈 정도로 평가가 대단히 높았다. 2016 시즌 전반기에는 4할에 근접한 타율을 기록하며 타율 1위를 찍기도 했으나, 후반기에 체력 문제때문인지 붕붕 휘두르며 3할 초반까지 추락했다. 드래프트 12년 뒤인 2018년 FA에서 민병헌을 데려왔긴 했는데 타격성적이 심각하게 롤코를 타서...[16] 여러 뒷 이야기들이 있는데 자세한 건 류현진/프로지명 문서 참조.[17] 한화는 드래프트 픽을 비정상적으로 아끼던 이 시기에도 유독 포수 자원은 꾸준히 확보해 두는 경향이 있었다. 현재까지 한화의 포수 자원이 막장인 것은 가진 자원이 없어서가 아니며, 있는 자원을 막장으로 육성한 탓이 더 크다. 한화팬들에게 철밥통, 칰무원으로 불렸던 조경택은 2015년에 두산으로 갔다.[18] 여기서 많은 팬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류현진의 이적료는 모두 구장 리모델링 비용으로 다 탕진한 상태였다. 이후에 잡은 여러 FA 선수들을 마구 잡은것은 모두 류현진의 이적료가 아닌 구단에서 타온 돈이라는 것. 왜냐면 구단 운영상 흑자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리모델링이다 뭐다 어떻게든 처리했다.[19] 드래프트를 둘러싸고 이런 낚시정보를 흘리는 건 종종 있는 일이며, 자기들이 눈여겨 본 선수를 다른 구단에 빼앗기지 않기위해 루머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신창호가 150km/h에 가까운 속구를 뿌렸던 것은 사실이었으며, 매력적인 자원임에는 틀림없었지만 2차 1순위 지명을 받을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20] 결국 신창호는 얼마 못가서 방출되고, 서울 해치를 거쳐서 기아에서 있다가, 2016년에 방출되어서 연천 미라클로 들어갔다.[21] 지명 당시부터 팔꿈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거기에 서정환 감독이 2006년 팀의 4강 진출을 위해 한기주를 무리하게 굴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22] 이게 농담이 아닌 게, 2006 드래프트 출신들이 201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등 두산 베어스 호성적의 든든한 주역으로 자리잡았다.[23] 이후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방출되어 고양 원더스 찍고 군대로 갔으며, 2017년 드래프트에서 SK에 입단하게 된다. 11년을 날리고, 겨우 돌아온 셈이다. 그리고 양의지는 2018년 5월 KBO 첫 등판을 한 남윤성에게서 적시타를 뽑아낸다.[24] 2008년 방출된 뒤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고양 원더스에 입단한 뒤, NC 다이노스가 스카웃해가면서 프로 재입성에 성공했다. 이후 2014년 2차 드래프트로 kt로 이적했다가 2017년 트레이드로 롯데로 이동했다. 2018년에서야 1군 무대에 등판하는데 성공했고, 프로 데뷔 12년만에 첫 승을 따냈다. 선수 인생이 상당히 다사다난했다.[25] 어깨 수술 때문에 공익 판정을 받았다.[26] 비슷한 루머가 2001년 신인드래프트에도 있었다. 정근우가 지명을 받지 못하자 추신수의 미국 진출에 따른 보복 차원에서 지명을 안했다는 게 그 얘기. 그러나 당시에도 부산고 투수 김백만이 2차 1순위로 한화 이글스에 지명되었던 것을 보면... 사실 정근우는 체격이 작아서 스카우터들의 관심이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