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1조&2조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의 조별 라운드의 진행 상황 중, 1조와 2조에 대해 정리하는 페이지.
1. 1조
1.1. 1경기 브라질 4 vs 0 멕시코
어찌보면 세상에서 가장 모골이 송연한 스포츠 경기이다. 이 경기 휘슬이 울리는 그 순간, 정확하게 지구 정반대편에서는 6.25 전쟁이 개전되어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은 브라질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서 치러졌다.[4] 아직 경기장이 완전히 지어진 게 아닌지라 화장실도 모자라고, 관중의 입장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81,649명의 관중이 몰려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을 지켜보았다. 브라질이 이 월드컵에 쏟는 관심은 정말 대단했다.
전반 30분, 몇 차례의 기회를 놓치던 브라질이 선취골을 기록했다. 브라질의 스트라이커 아데미르가 수비형 미드필더 다닐루 아우빙의 패스를 받아 골을 기록한 것이었다. 열광하는 브라질 관중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라디오 중계진들과 사진 기자들이 경기장에 난입하는 바람에 잉글랜드 출신의 주심 조지 리더는 경기를 재개하기 위한 고생을 따로 해야만 했다. 당시 리더는 54살의 최고참 심판이자 심판 중 최고 연봉 수령자였지만 이런 식의 소동이 아주 흔한 일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경기는 속행되었고 전반은 브라질이 한 점 차로 리드한 가운데 끝났다. 브라질은 겨울인지라 전반이 끝날 무렵에는 해가 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후반 20분, 브라질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이르 다 호사가 멕시코의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왼발로 강력한 땅볼 슈팅을 날렸고 멕시코 골키퍼 안토니오 카르바할[5] 은 급히 왼쪽 다리를 뻗어보았지만 이를 막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데미르는 뒤이어 다시 찬스를 잡았지만 공은 아쉽게도 골대를 때리고 말았다.
후반 26분, 바우타자르는 마네카의 코너킥을 머리로 받아넣어 세 번째 골을 성공시켰고, 34분에는 아데미르가 골대를 맞춘 것을 만회하듯 자이르의 크로스를 받아 결국은 쐐기골과 더불어 자신의 두 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최종 점수는 4대 0. 브라질은 첫 경기에서 기분 좋게 승리를 챙겼다.
1.2. 2경기 유고슬라비아 3 vs 0 스위스
유고슬라비아와 스위스의 경기는 벨루오리존치의 인디펜덴시아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경기 전의 예측을 잠시 짚어보면 유고슬라비아는 2년 전 올림픽 무대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스위스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칠 것이라고 했다. 이 경기가 시작되기 전 작은 해프닝 때문에 시작이 늦어졌는데 그 이유는 코너 플래그의 분실이었다. 코너 플래그를 찾고 나니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서 그대로는 시합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명을 밝혔는데 이 경기가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조명을 사용한 시합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반에는 득점이 없이 끝났고 후반 14분 라이코 미티치가 선제골을 뽑았다. 그리고 25분에는 코스타 토마셰비치가 헤딩으로 추가골을, 후반 39분에는 티호미르 오그냐노프가 페널티 스팟 근처에서 왼발 슈팅으로 쐐기골을 넣어 3대 0으로 유고슬라비아가 낙승을 거두었다.
1.3. 3경기 브라질 2 vs 2 스위스
이 경기는 브라질이 이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마라카낭 경기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치른 경기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 경기에서 브라질의 감독 플라비우 코스타는 지지뉴, 다닐루 아우빙 등 일부 주전 선수들을 쉬게 하고 그 자리에 원래 구장의 주인인 상파울루 FC 팀 소속 선수들을 기용하는 나름의 팬서비스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 경기에 참가한 칠레 출신의 부심 세르히오 부스타만테는 26세로 월드컵 역사상 가장 어린 심판이었다.
브라질은 경기가 시작된 지 3분만에 득점에 성공하였다. 아데미르가 돌파를 시도했고 스위스의 골키퍼 조르제스 스투버가 그를 막기 위해 나왔지만 아데미르는 스투버를 제끼고 엔드라인 밖에서 다시 패스를 찔러주었다. 그 패스를 아무도 잡지 못해 뒤로 빠진 것을 늦깎이 공격수 아우프레두가 달려들어오면서 강력한 슈팅을 날렸고 골이 되었다. 브라질 선수들은 자신들의 안방에서 자신들의 플레이를 유감없이 펼쳐보였다. 특히 아데미르의 개인기가 눈부셨다.
하지만 전반 17분, 스위스의 반격으로 동점골이 만들어졌다. 브라질진영 오른쪽 깊숙한 곳에서 비켈이 땅볼 크로스를 날렸지만 스위스의 공격수가 그를 처리하지 못했고 뒤늦게 달려온 브라질의 수비수 주베나우가 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뒤에 있던 다른 공격수 개키 파통이 그걸 빼앗아 골을 넣었다.
스위스의 득점 이후 리드를 되찾으려는 브라질의 공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전반 32분 바우타자르가 다시 한 번 코너킥을 헤딩골로 연결하였다. 지난 경기에 이은 연속 헤딩골이었다. 스투버가 몸을 최대한 뻗어보았지만 공은 스위스 골문의 왼쪽 상단 구석을 뚫어 막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브라질은 스위스의 골문에 슈팅을 계속 날려댔지만 스투버의 연이은 선방으로 더 이상 달아날 수 없었다.
후반에도 일방적인 브라질의 공격이 계속되었지만 스투버는 더욱 힘을 내었고 오히려 종료 2분전에 재키 파통의 동점골로 다 잡은 승리를 놓치게 되었다. 결국 양 팀은 2:2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었고, 경기 이후엔 플라비우 코스타의 선수 기용 방침에 불만을 품은 기사들이 속출하였다.
1.4. 4경기 유고슬라비아 4 vs 1 멕시코
브라질과 스위스가 상파울루에서 경기하느라 여기는 한산하기는 개뿔.. 11,000여명의 관중이 몰려와 이 경기를 관람하였다.
멕시코는 첫 상대였던 브라질에게 4골을 먹힌 충격이 컸기 때문인지 수비수 3명을 전원 교체하여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오히려 첫 골은 전반 19분, 유고슬라비아의 보베크가 기록하였다. 밀루티노비치의 크로스가 옆으로 빠지자 달려오면서 그대로 논스톱 슛. 골로 연결되었다. 3분 후에는 제이코 차이코프스키가 형 즐라트코 차이코프스키의 패스를 받아 득점에 성공하였다. 계속된 유고슬라비아의 공격 속에 멕시코의 골키퍼 안토니오 카르바할은 지쳐갔다.
후반 6분에는 제이코 차이코프스키에게, 36분에는 토마세비치에게 한 골 씩을 더 얻어맞고 멕시코는 그렇게 침몰하였다. 그나마 경기 종료 직전 엑토르 오티스의 페널티 킥으로 영패를 면한 것이 위안거리.
1.5. 5경기 브라질 2 vs 0 유고슬라비아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2승, 브라질은 1승 1무였던 관계로 브라질은 이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조 1위가 되어 결승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 1위만이 결승 리그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브라질에겐 무승부도 소용없었다. 그들의 염원을 담아 14만 2천여 명의 팬들이 마라카낭 경기장에 모여들었고 이는 당시 최다 관중 동원 기록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브라질은 최정예 멤버를 꾸려 유고슬라비아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이 때 사고가 생겨 유고슬라비아 선수들의 입장이 지연되었는데 유고슬라비아의 스트라이커 라이코 미티치가 입장을 위해 경기장 안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철제 대들보에 머리를 부딪혔고 이로 인해 이마에 큰 상처가 생긴 것이었다. 웨일스 출신 주심 그리피스가 경기 입장에 지연이 생기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미티치는 밖에서 치료를 받았고 유고슬라비아는 일단 열 명으로 시합을 시작하였다.
브라질은 전반 3분, 아데미르의 선제골로 앞서나갔다. 문전 혼전 상황에서 지지뉴가 아데미르에게 흘려준 볼을 아데미르가 놓치지 않고 오른발로 차 넣은 것이다. 마라카낭 스타디움은 난리가 났다. 그리고 미티치가 경기장에 입장한 것은 시작한 지 무려 20분이 지난 후였다.[7]
하프 타임 때에는 유고슬라비아 골키퍼 므르쿠시치가 유니폼을 갈아입고 왔는데 므르쿠시치가 처음 입었던 유니폼이 흰색 긴팔이었는데 브라질의 당시 유니폼이 같은 흰색이었기 때문에 심판이 헷갈린다는 이유로 므르쿠시치에게 유니폼을 갈아입으라 했기 때문이다.
후반 4분에는 지지뉴가 골을 기록하였지만 치쿠의 위치가 오프사이드로 판정되었기 때문에 무효 처리되었는데 지지뉴의 슈팅은 깔끔하게 므르쿠시치가 지키는 골문의 왼쪽을 뚫었지만 지지뉴가 슈팅을 하는 순간 치쿠가 수비수보다 앞에 있었기 때문에 오프사이드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8] 이후의 시합은 양팀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고 결국 후반 24분, 지지뉴가 아까의 오프사이드에 분풀이라도 하듯 골을 성공시켰다.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브라질을 응원하는 브라질 축구팬들의 응원은 정말 장관이었다.
결국 브라질은 2:0으로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결승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고 이로써 20년 전의 패배도 고스란히 설욕하였다. 그리고 다른 조에서 이탈리아가 수페르가의 비극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스웨덴에게 밀려 탈락하고 잉글랜드가 우쭐대다가 미국에게 덜미를 잡힌게 원인이 되어 스페인에게 밀려 탈락하자 내심 우승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칫국의 최후는 처참했다.
1.6. 6경기 스위스 2 vs 1 멕시코
이미 탈락이 확정된 팀들의 경기였기 때문에 경기장은 한산했다. 볼거리라면 두 팀의 유니폼이 당시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비슷했기 때문에 멕시코의 유니폼이 평소와 다른 흰색과 파란색의 줄무늬 유니폼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선제골은 전반 10분 스위스의 르네 바데어의 골이었다. 헤딩 경합으로 공중에 뜬 볼을 논스톱으로 슈팅을 때려 카르바할의 방어를 뚫었다. 전반 44분에는 앙투넨의 슈팅이 다시 한 번 카르바할의 방어를 뚫으면서 스위스가 승리를 거의 굳혔다. 멕시코는 경기 종료 직전 주장 카사린의 만회골이 나왔지만 경기를 뒤집기에는 늦었다.
멕시코는 초대 대회인 1930년에 이어 이번에도 3전 전패로 마감하였다.
2. 2조
2.1. 1경기 잉글랜드 2 vs 0 칠레
2조의 개막전은 잉글랜드와 칠레의 경기였다.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으로서 얼마나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줄지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하지만 기대에 걸맞지 않게 공방전을 거듭했고 모두가 기다리던 잉글랜드의 골은 전반 39분, 스탄 모르텐슨의 헤딩골로 나왔다. 그리고 후반 6분, 윌프 마니온이 오른발 슈팅으로 추가골을 만들어냈고 잉글랜드는 2:0으로 승리하였다.
2.2. 2경기 스페인 3 vs 1 미국
같은 시각 또 다른 유럽의 강호 스페인은 미국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사실이 일어나고 말았다. 미국의 파리아니가 스페인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철통같은 우주 방어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결국 스페인은 미국의 방어를 뚫어내고 후반 35분, 동점골을 넣고야 말았다. 미국은 이 골로 힘이 빠진 듯 보였고 2분 후 바소라의 발리킥으로 스페인이 역전하고 말았다. 후반 44분에는 사라의 쐐기골로 3:1로 스페인이 승리를 거두었다.
2.3. 3경기 스페인 2 vs 0 칠레
처음 경기의 주도권은 칠레가 잡았다. 칠레는 이 경기에서 패배하면 끝이라는 위기감이 있었고 어떻게든 스페인을 잡으려고 초반부터 맹공을 펼쳤다. 하지만 오히려 선제골은 스페인의 바소라에게서 나오고 말았다. 선제골을 먹힌 후에도 칠레는 포기하지 않고 맹공을 펼쳤지만 스페인의 새로운 골키퍼 안토니 라마예츠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11] 그 와중에서 전반 30분, 스페인의 사라에게 한 골을 더 허용하여 칠레는 2:0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경기가 그 이후 다소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큰 일이 없이 그대로 진행되었고 칠레의 세르히오 리빙스톤 골키퍼도 좋은 선방을 보여주면서 결국 경기는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이로부터 64년 후 두 나라는 브라질에서 다시 개최된 월드컵에서 같은 경기장에서 만났고 칠레가 똑같은 스코어로 복수하면서 스페인을 조별리그가 끝나기도 전에 광탈시켜 버린다.
2.4. 4경기 미국 1 vs 0 잉글랜드
'''잔디 위의 기적 (Miracle on Grass)'''
다윗과 골리앗의 시합. 잉글랜드는 이 경기에서 파란 셔츠를 입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팀을 대충 만들어서''' 아마추어가 많은[12] 미국을 상대로 잉글랜드가 어떤 경기력으로 밟아줄지에만 쏠려 있었다. 전 경기에서 잉글랜드가 칠레를 상대로 2골 밖에 못 넣은 것은 브라질에 적응이 제대로 안된 탓이었고 미국을 상대로는 화끈한 골 폭풍을 선보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상대로 대부분의 시합은 미국의 진영에서 진행되었고 미국의 골키퍼 프랭크 보기는 무지하게 바빴다.
하지만 전반 38분, 몇 개 안되던 미국의 공격에서 월터 바르가 잉글랜드 진영 오른쪽에서 쏜 슛이 흘러나오자 조 게이텐스가 다이빙 헤딩슛으로 잉글랜드에게 카운터 펀치를 먹였다. 이것이 이 경기에서 미국이 유일하게 공격을 한 장면이었다. 이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서도 선제골은 미국이 넣었지만 스페인이 3골을 넣으면서 역전했던 적이 있으니 잉글랜드도 곧 그리 할 거라 생각했다. 먹히기 전이나 먹힌 후나 잉글랜드의 파상공세는 변하지 않았지만 스페인을 상대로 예방주사를 맞았는지 하프백 찰리 콜롬보를 축으로 한 미국의 수비는 오히려 잉글랜드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켰고 결국 미국이 잉글랜드를 꺾는 역대 월드컵 역사에 남을 대 이변이 완성되었다. 월드컵 시즌이 되면 나오는 월드컵 역사에서 이변 시리즈 첫 번째를 장식하는 경기가 바로 이것이다. 대충 만든 팀이 슛 고작 1개로 세계 최정예를 눕힌 것이다[13] .
오죽하면 미국의 일부 신문은 미국이 잉글랜드를 1대 0으로 이겼다는 기사를 믿지 못하고 잉글랜드가 미국을 10대 0으로 이겼다고 추측성 오보를 냈다가 정정하기도 하였다.
2.5. 5경기 스페인 1 vs 0 잉글랜드
유럽의 두 축구 강국이 만났기 때문이었을까? 7만 4천명이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입장하였는데 이는 홈팀 브라질의 경기를 제외하면 이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관중이 입장한 경기였다. 경우의 수를 따져보면 스페인은 이미 2승을 거두었고 잉글랜드는 1승 1패를 거둔 상황이었다. 그리고 골득실을 따지면 스페인은 2경기에서 +4, 잉글랜드는 +1. 즉, 잉글랜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무조건 2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만 결승 리그에 진출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이기고도 3시간 후에 열리는 미국과 칠레전의 경기 결과도 지켜봐야했다. 잉글랜드가 스페인을 2골 이상 차이로 이긴다 해도 미국이 칠레를 5골차 이상으로 잡아버리면 결승리그에는 미국이 올라가는 거였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잉글랜드의 에이스 스탠리 매튜스가 처음으로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 그만큼 잉글랜드는 절박했다.
하지만 신은 잉글랜드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일단 스페인의 골키퍼 안토니 라마예츠는 잇단 선방으로 잉글랜드 공격수들의 기를 꺾었다. 게다가 운까지 따르지 않았다. 재키 밀번의 슈팅이 스페인의 골네트를 흔들었지만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취소가 되었다.
전반은 치열한 공방 속에 이렇게 0:0으로 끝났다. 하지만 후반 3분, 잉글랜드를 좌절에 빠뜨리는 상황이 일어나고 말았다. 스페인의 알론소가 올린 크로스를 받은 가인사가 헤딩으로 잉글랜드의 수비수 로리 휴즈를 무력화 시키며 텔모 사라에게 패스해준 것을 사라가 간단하게 골을 넣은 것이다.
결국 이 시합은 스페인이 잉글랜드를 꺾었고 스페인이 결승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다.
2.6. 6경기 칠레 5 vs 2 미국
미국이 잉글랜드를 꺾기는 했지만 이미 전 경기에서 스페인이 결승 리그에 올라가는 것이 확정되었던 터라 이 경기는 시작하기도 전에 김이 빠져버렸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스페인전이나 잉글랜드 전에 비하면 다소 힘이 빠진 상태였다.
칠레가 이 시합에서 먼저 2골을 넣으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미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2골을 넣으며 동점을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칠레는 후반 9분부터 잇달아 3골을 넣으며 미국의 추격 의지를 뿌리쳤고 결국 칠레가 5:2로 승리를 거두었다.
3. 4강 진출팀
1조 1위 : 브라질
2조 1위 : 스페인
[1] 괄호 안은 한국시간[2] 정확히 6.25 전쟁이 발발한 시간이다! [3] 원래 이 대회부터 등번호가 있었지만 이 때의 등번호는 선수에 매겨진 것이 아니라 포지션에 따라 매겨졌고, 현실적으로 모든 경기에 포메이션이 남아있지 않아 등번호의 기재는 생략했다[4]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의 개막 경기는 월드컵 개막 8일 전인 6월 16일에 히우지자네이루 주 올스타팀과 상파울루 주 올스타팀의 시합으로 치러졌다. 경기는 히우지자네이루 올스타팀이 3대 1로 승리했으며 개막 첫 골의 주인공은 지지였다[5] 아마 역대 모든 골키퍼들 중 A매치 데뷔전을 가장 바쁘게 보낸 골키퍼를 뽑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울 골키퍼일 것이다. 카르바할은 당시 21살의 젊은 골키퍼였고 브라질과의 이 경기가 그의 A매치 데뷔전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1966년 월드컵까지 4번의 월드컵에 더 출전하여 로타어 마테우스, 잔루이지 부폰과 더불어 월드컵 5회 출전 기록을 가진 선수로 역사에 남게 된다. 하지만 호르헤 캄포스와 더불어 멕시코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손꼽히는 실력자였지만 멕시코는 그가 출전했던 5번의 월드컵에서 단 한번도 1라운드를 통과하지 못했다[6] 공격수 제이코의 형[7] 이 시대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운동장을 오래 비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8] 공과 상관없는 선수가 오프사이드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 시기는 2006년 독일 월드컵으로 상당히 뒷이야기이다[9] 본명은 호세 곤살보 팔콘. 3형제 중 둘째로 3형제가 모두 축구 선수로 활약하였다. 형 훌리오-통칭 곤살보 Ⅰ는 카탈루냐 대표팀에서만 뛰었지만 곤살보 Ⅱ는 동생 곤살보 Ⅲ와 함께 월드컵 대표로 선발되었다[10] 본명은 마리아노 곤살보 팔콘. 3형제 중 막내[11] 그로 인해 라마예츠는 마라카낭의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는다[12] 그도 그럴것이 당시 미국은 징병제를 하고 있었고 월드컵에는 영 관심이 없었던지라 불법체류자나 유학생이나 되는대로 미국 국적을 줘가면서 선수로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골게터 조 게이텐스는 원래 아이티 사람이였다.[13] 다른 의미로 본다면 이렇게 급조된 팀을 만들어 놓고도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미국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치지 않을수가 없다. 그만큼 인적, 물적자원은 물론, 인프라도 제대로 발달되고 갖춰져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