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 위기/연표
1. 개요
1997년 외환 위기의 진행 과정을 다룬 연표이다.
위키백과 중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문서를 기반으로 일부 수정 및 보완을 하였다.
- 아래 내용 중 부도 관련 내용은 모두 굵게 표시한다.
1.1. 1997년
1997년 1월 23일 | '''한보철강(현 현대제철 당진공장) 부도 처리 확정''' |
1997년 1월 30일 | '''(주)한보''' 및 재계 순위 14위 '''한보그룹 최종 부도 처리'''[1] 이 한보그룹의 부도가 '''IMF 사태의 시발점'''으로 불린다. IMF 대신 한보 사태라 말해도 몸서리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한보 사태는 충격이었다. 한보그룹은 그 유명한 대치 은마아파트 신화를 만든 회사로, 은마아파트의 초대박이 터지면서 건설업 외에 철강 등의 사업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철소를 짓는답시고 돈을 마구 끌어 쓰고 뇌물을 뿌려서 5조 원대 제철소 건설을 했지만 결국 부도가 났고, 이것이 IMF 사태의 예고편이었다. 한보의 부실경영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부실경영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이었고 결국 한보의 부도처럼 부실경영을 하던 대기업들은 줄줄이 무너졌다. 이 때 직원들의 증언을 꼬투리 잡아 "머슴들이 뭘 알아"라고 한 대사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그리고 사과상자를 뇌물로 사용한 것도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으로 사과상자를 주면서 맛있게 드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사과상자가 국민들에게 알려진 건 95년 말-96년 초 전두환의 비자금을 은닉한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자택에서 사과상자 61억 원 어치가 나온 것이 시초이다. |
1997년 3월 19일 | 재계 순위 26위 '''삼미그룹 부도''' |
1997년 3월 21일 | (주)한보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4월 7일 | 한보 청문회 시작(4/7 ~ 4/25) |
1997년 4월 21일 | '''진로그룹 부도''', 진로그룹에 대한 부도유예협약 채택 |
1997년 4월 27일 | 진로그룹 6개 계열사 부도유예협약의 첫번째 대상으로 지정 |
1997년 5월 2일 |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20% → 23%) |
1997년 5월 15일 | 국내 최대 제빵업체 '''삼립식품 부도''', 수원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 |
1997년 5월 19일 | 대농그룹 부도유예협약 |
1997년 5월 30일 | '''한신공영그룹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5월 31일 | 한신공영그룹 부도 |
1997년 7월 2일 | '''태국 바트 화 폭락[2] 사실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실 가장 심대한 원인은 이것이다. 태국의 몰락으로 인해 동남아 경제가 파탄나고 이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
1997년 7월 15일 | 재계 순위 8위[3] 위의 이미지에서는 4위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8위였다. |
1997년 8월 14일 | 인도네시아 루피아 화 폭락 |
1997년 8월 15일 | 재경원 종금사에 외화자금 긴급지원 검토(3억$이상) |
1997년 8월 25일 |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 대책 |
1997년 8월 26일 | 대농그룹 4개사 가운데 미도파만 회생시키고 나머지는 매각, '''대농그룹 사실상 공중분해''',환율 900원 돌파 |
1997년 8월 27일 | 무역관련 자본자유화 폭 확대조치 시행 |
1997년 8월 30일 | 재경원 증시 안정대책 발표 |
1997년 9월 1일 | 무디스 방한 협의(9/1 ~ 9/5), 주식매매수수료 자율화 시행 |
1997년 9월 10일 | 산업은행 외환채권 발행(15억불) |
1997년 9월 19일 | ASEM 재무장관 회의 및 IMF/세계은행 총회 부총리 참석 |
1997년 9월 22일 | 진로그룹 6개사에 대한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10월 15일 | '''쌍방울그룹 부도''' |
1997년 10월 16일 | '''태일정밀 부도''', IMF 조사단 한국방문 |
1997년 10월 17일 | 대만 외환방어 포기 |
1997년 10월 18일 | 외국환 관리규정 전면 개정안 발표(외자유입 관련 자유화 조치) |
1997년 10월 20일 | 당정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근로자주식저축 1년연장, 한통주상장연기, 3년이상 투자 배당 소득분리과세) |
1997년 10월 21일 | IBCA, 현행 국가신용등급 유지 발표 |
1997년 10월 22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10월 23일 | 홍콩 증시 폭락 |
1997년 10월 24일 |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 장기 : AA- → A+ * 단기 : A1+ → A1 |
1997년 10월 27일 | 환율 1달러에 940원 돌파 |
무디스,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 장기 : A1 → A2 * 단기 : P1 → P2 | |
1997년 10월 28일 | 미국 다우 존스지수 하루 만에 7.2% 하락, 한국 종합주가지수 500선 붕괴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 '아시아를 떠나라' 라는 보고서를 띄움 강경식 부총리는 한국은행에 외환시장 개입중단을 지시(재판에서는 불인정) |
1997년 10월 29일 | 정부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연기금3조 규모 주식매입, 채권시장개방확대, 기업구조조정) |
1997년 10월 30일 | 외환시장 개장 8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또다시 폭등, 사실상 거래 중단 |
1997년 10월 31일 | 환율 급등으로 11월 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전국 주유소 북새통 진풍경 연출 |
1997년 11월 1일 | 재계 순위 24위 '''해태그룹 부도''', 유가 인상 |
1997년 11월 3일 | 해태그룹 화의절차개시신청,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23% → 26%) |
1997년 11월 4일 | 재계 순위 25위 '''뉴코아그룹 부도'''[4] 뉴코아는 한신공영그룹의 사위가 회장으로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한신코아백화점도 있었다. 뉴코아의 마트인 킴스클럽도 당시 회장의 성씨가 김씨였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부도 이후 한신코아는 사라졌고 뉴코아는 이랜드그룹에 인수되었다. |
1997년 11월 5일 | 블룸버그 "한국 가용 외환 보유고 20억달러" 보도 |
1997년 11월 6일 | 한국은행 실무진 한국은행 총재에게 IMF행 건의, 미셸 캉드쉬 IMF 총재 "한국 금융시장은 동남아 국가와 같은 위기상황 아니다"라고 언급해 한국의 신용도가 회복된 걸로 예측 |
1997년 11월 7일 | 주가 사상 최대 폭락 |
1997년 11월 10일 | 대미 현찰매도율(시중은행에서 고객들이 달러를 살 때 적용되는 환율) 1달러에 1,000원 돌파 |
1997년 11월 14일 | 강경식 부총리 르네상스 호텔[5] 1988년에 삼부토건 자회사 남우관광이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93년부터 르네상스 호텔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나 모기업 삼부토건의 경영난으로 2016년에 남우관광이 자산을 VSL코리아로 매각해 벨레상스 호텔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으나 결국 폐업했다.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먹방을 찍은 곳이 이 호텔 4층의 가빈 중식당이다. |
1997년 11월 16일 | 캉드쉬 IMF 총재 극비 방한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 |
1997년 11월 17일 | AMF(아시아통화기금) 관련 차관회의(마닐라), 외국언론들 한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가능성 시사,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지원 검토 중이라 보도하나 재경원 '사실무근'이라며 부인 |
1997년 11월 18일 | 한국은행 정부에 IMF구제금융 요청 촉구 |
1997년 11월 19일 | 김영삼 대통령 오후 5시 기자회견에서 IMF구제금융 지원요청 발표를 재가받으려던 강경식 부총리, 김인호 경제수석을 전격 경질하고 통상산업부 장관 임창렬을 신임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으로 임명 |
임창렬 부총리 금융시장 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종합대책(환율변동폭 확대, 부실채권정리기금 확충, 부실금융기관 조속한 정리, 채권시장 추가 개방) 발표하지만 IMF 언급하지 않고 이는 이후 IMF와의 협상에 난행 요소가 됨 | |
1997년 11월 20일 |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 방한, 1일 환율변동폭이 2.25%에서 10%로 확대되나 환율은 다시 확대된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해 사실상 거래 중단 |
1997년 11월 21일 | 김영삼 대통령은 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조순 한나라당 총재와 회담 |
오후 10시, '''임창렬 부총리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 발표''' | |
1997년 11월 22일 | 김영삼 대통령 구제금융 신청에 관한 대국민 특별 담화문 발표[6] 정확히 18년 후 '''같은 날'''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했다. |
1997년 11월 23일 | 재정경제원 IMF 협의단(단장 강만수 차관) 편성, IMF의 실무협의단 1진이 입국 |
1997년 11월 24일 | '''일본 야마이치증권 창립 반세기만에 파산 선고''' |
1997년 11월 25일 | IMF 실사단 공식활동개시, 국무회의 : 예금자 보호법 등 4개 법안 새행령 개정안 채결 금융시장 안정 및 기관투자가 주식매입 기반 확충 |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 장기(2단계) : A+ → A- * 단기(1단계) : A1 → A2 | |
1997년 11월 26일 | IMF 휴버트 나이스 대표단이 김포공항 도착, 금융시장 안정 및 기관투자가 주식매입 기반 확충 국내 최대 해외여행사인 '''온누리여행사 도산''' |
1997년 11월 28일 | 임창렬 부총리 일본 방문해 미쓰즈카 대장상과 원조회담에 들어갔으나 "IMF로 가지 않으면 지원은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옴 |
무디스, 한국의 신용도를 A1에서 A3로 낮춤. | |
1997년 11월 29일 | 종합주가지수 400선 한때 붕괴 |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 정부와 IMF간 '''지원 협상 사실상 합의''' | |
1997년 12월 2일 | 재경경제원(현 기획재정부), 고려종합금융[7] 고려증권과 같은 고려통상 계열. |
셰프라인 부도. | |
1997년 12월 3일 |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도착한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정부중앙청사에서 임창렬 재경부장관과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해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IMF 한국에 555억 달러 지원 확정. 이날은 대한민국이 '''IMF 관리 체제'''로 들어선 시점으로 보는 편이다. |
1997년 12월 4일 | 대기성차관협약(Stand-By Arrangement) IMF 이사회 승인 총 210억달러 승인 : 대기성차관 75억 달러,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 |
1997년 12월 5일 | '''고려통상 계열 고려증권 부도''' |
1997년 12월 6일 | 재계 순위 12위 '''한라그룹 및 영진약품 부도''', IMF 1차 지원금 56억 달러 제공 |
1997년 12월 7일 | 대우그룹, 쌍용자동차 인수 최종 확정[8] 이 일로 대우그룹은 삼성그룹을 뛰어넘고 재계 2위가 되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
1997년 12월 9일 | 경남모직, 동양어패럴 부도, 엘칸토 화의신청. |
1997년 12월 10일 | 환율이 3일 연속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하여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거래가 중단되고 기업어음(CP) 금리가 6일째 법정 상한선까지 치솟았으며 회사채 유통수익률은 법정 발행금리 상한선인 연 25%를 초과하는 등 금융시장 전반이 마비 |
무디스 한국국가신용등급을 준 Junk 수준으로 하향조정 * 장기(2단계): A3 → Baa2(준 Junk) * 단기(1단계): P-3 → N∙P(투자부적격) | |
삼성제약 부도. | |
5개 종금사 추가 업무정지(대한∙나라∙신한∙중앙∙한화종금) 종금사 거래기업 및 개인예금자에 대한 지원 은행신탁계정의 CP 매입 한시적 허용 외국인 주식투자한도(50%) 12월 11일부터 적용 등 | |
1997년 12월 11일 |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 장기(3단계) : A- → BBB- |
자본시장 전면개방 외국인 투자한도(1인당 한도 50%로) 확대 : 개인당 7%, 종목당 26% 한도(12/10발표) 한국은행,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자금지원 발표 14개 종금사관련 지원: 7조 3,000억 원(은행, 종금, 증권) 채권시장 개방확대 대기업 무보증, 보증회사채 개방(10% → 30%) 대기업 무보증 CB투자 한도 확대(30% → 50%) 중소기업 무보증회사채 및 CB 투자한도 폐지 | |
1997년 12월 12일 | '''극동그룹 계열 동서증권 영업정지,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12월 16일 | 정부 환율변동 제한폭 폐지(17일 시행), 제3차 경제대책회의 내용 발표 최고금리 확대 : 연 25% → 40%,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인투자 대폭 허용 등 |
1997년 12월 18일 | 제15대 대통령 선거, 야당의 김대중 후보 당선, IMF 2차 인출 이사회 승인 |
1997년 12월 19일 | 세계은행 및 ADB 자금지원 협상 완료 |
1997년 12월 21일 | 무디스,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하향조정 * 장기(2단계) : Baa2 → Ba1(투자부적격) |
IMF 협의단 방한 | |
1997년 12월 22일 | 미국 립튼 재무부 장관 입국, 재무부 금융기관 외채만기 연장을 위한 정부지급보증 국회 동의 |
1997년 12월 23일 | 대미 현찰매도율(시중은행에서 고객들이 달러를 살 때 적용되는 환율) 2000원 돌파,국공채시장 등 채권시장 전면개방 |
1997년 12월 24일 | 정부 IMF 구제금융 협상에 대한 신청 발표 |
1997년 12월 25일 | IMF 및 주요 선진국 자금 조기지원 발표, 1997년 12월말 및 1998년 1월말에 걸쳐 100억 달러 조기지원 약속 |
1997년 12월 27일 | 재계 순위 35위[9] 1996년 기준. 다른 부도 기업의 직원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청구그룹의 직원들은 특히나 고통을 당했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명의로 14억의 대출을 받고서는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회사가 감당할 빚을 직원들이 감당하게 되었다. (MBC, 동아일보). 나중에 청구는 다시 부활하여 다원이라는 철거 전문 업체에 인수되었는데 말이 '인수'지 실제로는 단물만 먹고 뱉은 격이라, 2013년 당시엔 짓던 아파트는 전부 완공 실패에 본사는 '''폐업한 피아노 학원'''이라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결국 청산됐다. |
1997년 12월 30일 | IMF 20억 달러 조기 지원(3차 지원) |
1997년 12월 31일 | 부실 종금사 처리를 위한 가교종금사(한아름종금)설립 완료 |
1.2. 1998년
1998년 1월 3일 |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 천명, 이론배당락지수 368.85, 실제 385.49(+9.18) |
1998년 1월 5일 | 노사정위원회 발족 |
1998년 1월 8일 | IMF는 한국정부 3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
1998년 1월 11일 |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재계 4대그룹 총수와 만나 재벌개혁 5개항 합의 |
1998년 1월 12일 | 미쉘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 극비 방한, 청와대가 접견내용 발표 |
1998년 1월 14일 | '''나산그룹 부도''' |
1998년 1월 16일 |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
1998년 1월 18일 | 재계 순위 31위 '''극동그룹 부도''' |
1998년 1월 21일 |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11]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대표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경제고문 |
1998년 1월 25일 | 김용환 수석대표 귀국 |
1998년 1월 30일 | 재경원, 종금사 1차 폐쇄 대상 10개사 명단 발표(한화, 쌍용, 경남, 고려, 삼삼, 항도, 청솔, 신세계, 경일, 신한종금), 감사원 외환위기 특별감사 착수, '''삼양식품 화의신청''' |
1998년 2월 1일 | '''파스퇴르 부도''' |
1998년 2월 3일 | S&P, 국가신용등급 3단계 상향조정 |
1998년 2월 6일 | 노사정 공동협약 체결 |
1998년 2월 8일 | 금융시장 안정 및 단기금융시장 개방계획 발표 |
1998년 2월 12일 |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신정부「100대 국정과제」발표, 청와대에서 IMF 외환위기 현장감사 실시 |
1998년 2월 15일 | 외국인에 대한 인수, 합병 제한 완화 |
1998년 2월 17일 | 10개 종금사 인가취소(첫 금융기관 퇴출), IMF 한국정부의 4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3단계 상향 조정 - B+ → BB+ | |
1998년 2월 19일 | BIS 8%미달 12개 은행 경영 개선 조치 |
1998년 2월 24일 |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퇴임 |
1998년 2월 25일 |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 |
감사원은 이경식 전 한국은행총재, 강경식 전 재정경제부 총리, 김인호 전 경제수석에 대한 특별감사 착수 | |
1998년 3월 2일 | 주식가격제한폭 8% → 12% |
1998년 3월 6일 | 뉴욕에서 단기채권 외채의 만기 연장을 위한 설명회 개최 |
1998년 3월 7일 | 국내 대학 중에서는 처음으로 '''단국대학교 부도''' |
1998년 3월 11일 | 1차 경제대책 조정회의(IMF체제 극복의 목표와 과제) |
1998년 3월 12일 | 단기외채 2백 18억 달러 만기 연장 |
1998년 3월 18일 | 국내 1호 백화점 '''미도파 부도''' |
1998년 3월 23일 | IMF 서울사무소 설치 |
1998년 3월 24일 | 세계은행 1차 구조조정차관 20억 달러 승인 |
1998년 3월 26일 | 무디스, 한국 장기신용등급 전망 상향조정 |
1998년 3월 27일 | IBRD 한국에 대한 1차 구조조정차관 승인 차관액 : 20억 달러 - 이자율 : 리보 +0.75% - 만기 : 15년(거치기간 5년포함) |
1998년 3월 30일 | 무디스, 한국장기신용등급(Bal) 전망 상향 조정 |
1998년 4월 1일 | 금융감독위원회 공식 출범 |
1998년 4월 3일 | 외평채 40억 달러 발행 |
1998년 4월 9일 | 외평채 40억 달러 발행 성공 |
1998년 4월 10일 | 감사원, 외환 특감결과 발표및 수사의뢰 : 강경식 김인호 출국 금지[13] 감사원은 외환위기의 근원이 재경원이 금융 감독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한국은행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초래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
1998년 4월 22일 | IMF에 한국은행 외화대출 벌칙성금리 인하 요청 |
1998년 4월 27일 | 외국인 투자유치 종합대책 발표 |
1998년 5월 2일 |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서면 답변서 제출, IMF 6차 의향서 합의(금리정책에 대한 신축성 확보) |
1998년 5월 3일 | 5차 경제대책조정회의, 외국인 투자업종개방 추가확대, 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 촉진방안과 중기비전 |
1998년 5월 9일 | 법무부, 강경식 체포동의요구서 임시국회 제출 |
1998년 5월 12일 | 재계 순위 28위 '''거평그룹 부도''' |
1998년 5월 14일 | 중기대출만기 연말까지 연장 |
1998년 5월 16일 | 법원, 강경식 영장실질심사 위한 구인장 발부,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폐지 |
1998년 5월 18일 | 검찰, 강경식, 김인호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혐의 구속 채권단 '''동아그룹 해체'''하고 동아건설만 남김 |
1998년 5월 20일 | 64조 원 규모의 금융 구조조정 재원(1차 공적자금) 조달 방안 마련 |
1998년 6월 5일 | 강경식, 김인호 구속 기소 및 환란 수사 결과 발표 |
1998년 6월 12일 | 5대그룹 간 빅딜 추진, 한국전력공사 등 9개 공기업 조기 민영화 확정 |
1998년 6월 15일 | 엔화 환율 8년 만에 최고치경신(1달러=146.85엔) |
1998년 6월 18일 | 금감위, 퇴출 대상 55개 기업 발표(5대 그룹 20개사, 6∼64대 그룹의 32개사, 비재벌 계열 3개사) |
1998년 6월 29일 | 금감위, 금융기관 구조개혁 조처(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 폐쇄 발표), 퇴출은행, 조건부 승인은행 발표 |
1998년 6월 30일 | 금융경색완화대책 발표 |
1998년 7월 1일 | 공기업 1차 민영화방안 발표, 재계 순위 32위[14] 1996년도에 우성그룹을 인수 시도할 때는 17위까지 올라갔던 기업이다. |
1998년 7월 3일 | 외환매입제한 폐지 |
1998년 7월 10일 | 개정 예금자보호법 시행, 환란 1차 공판을 발표 |
1998년 7월 11일 | 상업은행, 한일은행 합병 발표 |
1998년 7월 24일 | IMF 7차의향서 합의(재정적자 GDP 4% 확대) |
1998년 8월 12일 | 금감위, 20개 보험회사에 대해 경영 개선 조처 |
1998년 8월 17일 | 공기업 2차 민영화방안 발표 |
1998년 8월 19일 | '''4개 보험사 영업정지''' |
1998년 8월 25일 | 정부출연, 위탁기관 경영혁신 계획 발표 |
1998년 8월 28일 | 재경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및 기업교환(빅딜)에 대한 세제 지원 방안 마련 |
1998년 9월 4일 | 강경식, 김인호 보석 석방 |
1998년 9월 7일 | 재계, 사업구조조정 방안 발표 |
1998년 9월 10일 | 하나은행, 보람은행 합병 발표 |
1998년 9월 11일 | 국민은행, 한국장기신용은행 합병 발표 |
1998년 9월 20일 | 장은, 동방페레그린 증권 퇴출 |
1998년 9월 28일 | 대통령 경제기자회견 : 외환위기 재연 가능성은 없으며, 구조개혁은 지속추진 |
1998년 10월 7일 | 기아자동차, 현대에 낙찰 |
1998년 10월 19일 | 5대 재벌 계열 사업 구조조정 방안 발표 |
1998년 10월 28일 | 은행권, 117개 기업 워크아웃 대상 선정 |
1998년 12월 7일 | 정부·재계, 5대 재벌 구조조정안 합의 |
1998년 12월 17일 | 조흥은행이 현대종합금융, 강원은행과의 합병을 발표 |
1998년 12월 18일 | IMF 긴급보완금융(SRF) 18억불 IMF 자금 중 '''처음으로 상환''' |
1998년 12월 19일 |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 상향조정 검토 발표 |
1998년 12월 30일 | IMF 긴급보완금융(SRF) 10억불 상환 |
1998년 12월 31일 | 제일은행, 뉴브리지 캐피탈에 매각(지분 51%)하기로 합의 |
1.3. 1999년
1999년 1월 19일 |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조정 |
1999년 1월 25일 |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한국 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B+에서 BBB로) S&P, 한국 신용등급 투자적격 상향조정(BB+→BBB-), 국회에서 경제청문회 |
1999년 2월 12일 |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a1에서 Baa3으로) |
1999년 3월 21일 | 금융감독원, 퇴출 및 여신중단 대상 80개 기업 중 25개사 정리 |
1999년 4월 1일 | 제1단계 외환거래자유화 |
1999년 4월 14일 | 김대중 대통령, "구조조정 약속 안지키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 |
1999년 4월 19일 | 대우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대우중공업 조선 부문(현 대우조선해양) 매각, 김우중 회장 보유 주식 매각대금 3천억원 출연 등 구조혁신 방안) |
1999년 4월 21일 | 부실 5개 생보사(동아, 태평양(현 동양생명), 한덕, 조선, 두원) 공개 매각 절차 개시 |
1999년 4월 23일 |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
1999년 5월 6일 | 종합주가지수 800 돌파 |
1999년 5월 19일 | 미셸 캉드쉬가 방한해 롯데호텔에서 기자 회견 |
1999년 5월 20일 | 현대전자, 빅딜로 LG반도체를 인수 |
1999년 6월 21일 | 결심공판(26차공판), 검찰 강씨 징역 4년, 김씨 3년 구형 |
1999년 6월 30일 | 삼성자동차 (현 르노삼성자동차) 법정관리 신청으로 삼성자동차·대우전자 (현 동부대우전자) 빅딜 무산 |
1999년 7월 1일 | 정부, 긴급자원지급 40억 달러 조기 상환하기로 IMF와 합의 |
1999년 7월 19일 | 대우그룹의 12개 계열사에 대한 합의서로 워크아웃 공식 신청을 발표 |
1999년 7월 20일 |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 "김우중회장이 내놓은 담보는 처분대상" 발언 |
1999년 7월 23일 | 대우그룹 shock, 최대 하락폭 71.70포인트 |
1999년 8월 6일 | 대우그룹·GM 자동차 부문 전략적 제휴 양해각서 체결 |
1999년 8월 12일 |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 대책 마련(대우 구조조정 추진에 따른 금융시장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에 대한 대응 방안 강구해 8월 13일 시행) |
1999년 8월 20일 |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한 선고공판(27차공판)에서 무죄 판결 |
1999년 8월 26일 | 대우그룹의 유동성 문제 해결과 구조조정 추진을 위한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 돌입 |
1999년 9월 1일 | 현대전자 주가조작, 회장 이익치 shock |
1999년 9월 17일 |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털과 매각을 위한 주요 조건에 합의하고 투자약정서 |
1999년 9월 18일 |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 9개월 앞당겨 조기상환 완료 |
1999년 9월 19일 | 제일은행 투자약정서(TOI) 체결, 11월 금융대란설에 대비 금융시장안정대책 발표 채권시장 안정기금 설립키로 결정하고 1차로 다음달 초까지 10조 조성 대우채권 환매비율 19991110(80%), 20000208(95%)로 환매요구 폭주로 인한 대란 가능성 상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유럽, 아프리카 출국 |
1999년 10월 30일 ~12월 1일 | 대우그룹 12개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 계획 확정 |
1999년 11월 1일 | '''대우 회장 및 대우그룹 사장단 퇴진으로 대우그룹 사실상 해체''' |
1999년 12월 24일 | 대기성 차관 잔액 15억 달러 추가인출 중단 |
1.4. 2000년
2000년 2월 12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및 화의 신청 종결 결정 |
2000년 2월 14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양해각서를 하고 결과 체결을 못한 합의서 |
2000년 2월 17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졸업 및 파업 |
2000년 2월 18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및 화의 신청 종결 |
2000년 3월 14일 | 현대 정몽구 회장, 동생 정몽헌 회장의 해외출장 중에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 조치[15] 현대의 자동차 부분을 맡고 있던 정몽구 회장 측은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그룹의 금융 부문을 노리고 동생 정몽헌 회장의 측근이자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격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배제하려 한 것으로 사람들은 추측한다. |
2000년 3월 24일 | 귀국한 정몽헌 회장,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 회장의 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 |
2000년 3월 27일 |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 |
2000년 4월 15일 | 대우그룹이 대규모기업집단 지정에 제외되면서 공식 해체 |
2000년 4월 23일 | 투자신탁 회사 구조조정 공적자금 투입 결정 |
2000년 4월 24일 | IMF 협의단 체결 |
2000년 4월 25일 | 투자신탁에서 투자신탁증권 체제로 전환 |
2000년 5월 26일 | 현대투신 사태로 현대그룹 유동성 문제 표면화되자 채권단, 현대건설에 1000억원 긴급지원 |
2000년 5월 31일 |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 등 3부자 동반퇴진 및 5조 9000억원 유동성 확보 등 자구안 발표 |
2000년 6월 11일 | IMF 총재 호르스트 쾰러[16] 독일의 정치인으로 2000년부터 2004년 3월까지 국제 통화 기금의 총재직을 역임했으며 2004년 7월 1일부터 독일의 제9대 대통령에 재임했으나 2010년 5월 31일 중도 사퇴했다. |
2000년 6월 12일 | 최종 정책협의 종료 (동년 8월 IMF 이사회 승인), 프로그램 3년 동안 IMF와 정책협의 11회 실시 |
2000년 6월 13일 | 호르스트 쾰러 입국 |
2000년 7월 24일 | 한국기업평가, 현대건설 등 현대 8개 계열사 신용등급 하향조정 |
2000년 8월 6일 | 정부, 현대건설 워크아웃 돌입 경고 |
2000년 8월 13일 | 현대, 자동차·중공업 계열분리 및 1조 5000억원 자금조달 등 추가 자구안 발표 |
2000년 9월 1일 | 현대자동차 등 자동차 계열사 현대그룹에서 분리 |
2000년 9월 7일 | 정부개혁추진위원회를 발족 |
2000년 9월 12일 | 정부, 공적자금 40조원 추가조성 결정 |
2000년 9월 20일 | IMF 대기성차관 60억달러 조기상환 방침 발표, 00년 IMF연차총회시(체코 프라하) 정부대표 기조연설 |
2000년 10월 18일 | 현대건설, 5810억원 유동성 확보 추가 자구안 발표 |
2000년 10월 30일 | '''현대건설 1차 부도''' |
2000년 11월 3일 | 2차 29개 퇴출 대상 기업 발표, 삼성자동차, 삼성상용차, 진로종합식품, 진로종합유통, 우성건설 등, 현대건설은 채권단으로부터 퇴출 대신 '''조건부 회생''' 판정 |
2000년 11월 6일 | 대우자동차 1차 부도 처리 |
2000년 11월 8일 | 대우자동차 최종 부도 처리, 현대채권단은 현대건설 채무 만기연장 결의 |
2000년 11월 10일 | '''동아건설 부도''' |
2000년 11월 20일 | 현대건설, 서산간척지(총 3,082만 평) 매각 등 1조 2974억원 규모 자구안 발표 |
2000년 12월 3일 | IMF와의 대기성차관협약 및 프로그램 종료 |
2000년 12월 4일 | 김대중 대통령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했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선언 |
2000년 12월 17일 | 예금보험공사, 5개 부실은행에 공정자금 1분 투입 결정 |
1.5. 2001년
2001년 1월 8일 | 대기성 차관 조기상환 개시 |
2001년 1월 16일 | 산업은행, 회사채신속인수 대상에 현대건설 선정 |
2001년 3월 5일 | 현대건설, 출자전환 동의서 제출 |
2001년 3월 28일 | 채권단, 자본잠식 상태인 현대건설에 2조 9000억원 출자전환 결정 |
2001년 5월 11일 |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파산이 확정되어 '''동아그룹 해체''' |
2001년 5월 18일 | 현대건설, 임시주주총회 통해 5.99대 1 감자 결의 및 심현영 사장 선임 |
2001년 6월 | 현대 채권단, 2조 9000억원 출자전환 실시 |
2001년 8월 | 현대건설,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 |
2001년 8월 10일 | 정부 IMF에 조기 상환 |
2001년 8월 22일 | 김대중 대통령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방문 |
2001년 8월 23일 | 한국은행, IMF 구제금융 차입금 195억 달러 전액을 상환해 당초 예정보다 3년 빨리 '''IMF 관리 체제 종료''' |
[1] 이 한보그룹의 부도가 '''IMF 사태의 시발점'''으로 불린다. IMF 대신 한보 사태라 말해도 몸서리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한보 사태는 충격이었다. 한보그룹은 그 유명한 대치 은마아파트 신화를 만든 회사로, 은마아파트의 초대박이 터지면서 건설업 외에 철강 등의 사업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철소를 짓는답시고 돈을 마구 끌어 쓰고 뇌물을 뿌려서 5조 원대 제철소 건설을 했지만 결국 부도가 났고, 이것이 IMF 사태의 예고편이었다. 한보의 부실경영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부실경영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이었고 결국 한보의 부도처럼 부실경영을 하던 대기업들은 줄줄이 무너졌다. 이 때 직원들의 증언을 꼬투리 잡아 "머슴들이 뭘 알아"라고 한 대사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그리고 사과상자를 뇌물로 사용한 것도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으로 사과상자를 주면서 맛있게 드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사과상자가 국민들에게 알려진 건 95년 말-96년 초 전두환의 비자금을 은닉한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자택에서 사과상자 61억 원 어치가 나온 것이 시초이다.[2] 사실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실 가장 심대한 원인은 이것이다. 태국의 몰락으로 인해 동남아 경제가 파탄나고 이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3] 위의 이미지에서는 4위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8위였다.[4] 뉴코아는 한신공영그룹의 사위가 회장으로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한신코아백화점도 있었다. 뉴코아의 마트인 킴스클럽도 당시 회장의 성씨가 김씨였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부도 이후 한신코아는 사라졌고 뉴코아는 이랜드그룹에 인수되었다.[5] 1988년에 삼부토건 자회사 남우관광이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93년부터 르네상스 호텔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나 모기업 삼부토건의 경영난으로 2016년에 남우관광이 자산을 VSL코리아로 매각해 벨레상스 호텔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으나 결국 폐업했다.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먹방을 찍은 곳이 이 호텔 4층의 가빈 중식당이다.[6] 정확히 18년 후 '''같은 날'''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했다.[7] 고려증권과 같은 고려통상 계열.[8] 이 일로 대우그룹은 삼성그룹을 뛰어넘고 재계 2위가 되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9] 1996년 기준.[10] 다른 부도 기업의 직원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청구그룹의 직원들은 특히나 고통을 당했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명의로 14억의 대출을 받고서는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회사가 감당할 빚을 직원들이 감당하게 되었다. (MBC, 동아일보). 나중에 청구는 다시 부활하여 다원이라는 철거 전문 업체에 인수되었는데 말이 '인수'지 실제로는 단물만 먹고 뱉은 격이라, 2013년 당시엔 짓던 아파트는 전부 완공 실패에 본사는 '''폐업한 피아노 학원'''이라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결국 청산됐다.[11]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대표[12]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경제고문[13] 감사원은 외환위기의 근원이 재경원이 금융 감독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한국은행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초래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14] 1996년도에 우성그룹을 인수 시도할 때는 17위까지 올라갔던 기업이다.[15] 현대의 자동차 부분을 맡고 있던 정몽구 회장 측은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그룹의 금융 부문을 노리고 동생 정몽헌 회장의 측근이자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격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배제하려 한 것으로 사람들은 추측한다.[16] 독일의 정치인으로 2000년부터 2004년 3월까지 국제 통화 기금의 총재직을 역임했으며 2004년 7월 1일부터 독일의 제9대 대통령에 재임했으나 2010년 5월 31일 중도 사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