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F 피오렌티나/역사
1. 개요
2. 창단
3. 창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4. 첫 스쿠데토와 황금기 1950~60년대
5. 암흑기의 시작? 1970년대
6. 1980년대 폰텔로 시대
7. 체키 고리 시대 : 팀 역사상 두 번째 강등과 세리에 7공주 시대, 그리고 파산
8. 파산 후 재창단, 델라 발레 시대
9. 2004/05 시즌
10. 2005/06시즌
11. 2006/07 시즌
12. 2007/08 시즌
13. 2008/09 시즌
14. 2009/10 시즌
15. 2010-11 시즌
16. 2011-12 시즌
17. 2012-13 시즌
18. 2013-14 시즌
19. 2014-15 시즌
20. 2015-16 시즌
21. 2016-17 시즌
1. 개요
ACF 피오렌티나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창단
피렌체의 유력한 귀족 집안 출신인 루이지 리돌피 후작(Marchese Luigi Ridolfi)은 영국여행 도중에 축구라는 스포츠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는 그 즉시 귀국해 자신의 축구팀을 만들기로 하고, 당시 피렌체에 있던 두 개의 작은 클럽인 팔레스트라 진나스티카 리베르타스(Palestra Ginnastica Libertas)와 클루브 스포르티보 피렌체(Club Sportivo Firenze)를 합병해 새로운 축구팀을 만들었다. 1926년 8월 26일의 일이었다.
새로 생긴 클럽의 이름은 '꽃'을 뜻하는 라틴어인 '피오렌티나(Fiorentina)'로 정해졌고 비아 벨리니(Via Bellini)에 있는 경기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또한 유니폼은 기존의 두 클럽의 색상을 조합한 빨간색-흰색이 채택되었는데, 지금의 보라색(Viola) 유니폼으로 바뀐 것은 1929년이 되어서였다. 보라색은 피렌체의 꽃인 백합을 본딴 색으로 백합은 피오렌티나의 문양에도 나타나 있다. 경기장은 피오렌티나의 고위층 출신으로 이탈리아 축구협회장과 UEFA 회장직을 역임한 아르테미오 프란키(Artemio Franchi, 1983년 8월 12일에 교통사고로 사망)를 기리기 위해 1991년 11월에 그의 이름이 경기장에 헌액됐다. 완공 당시에는 파시스트 지도자의 이름인 조반니 베르타(Giovanni Berta)라고 불리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부터는 '피렌체 공설 운동장(Stadio Communale di Firenze)'이라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1931년 9월 13일에 초대 구단주 리돌피에 의해 완공되었으며, 그후로 계속 피오렌티나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47,290명 수용의 축구전용구장이다. 34년과 90년에 걸쳐 두번의 월드컵을 치루어낸 전통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후 2001/02 시즌에 강등당할 때까지 두 번의 강등을 제외하고 수십 년간 세리에 A의 붙박이 팀으로 자리잡았으며, 그 동안 피오렌티나는 2번의 리그 우승과 6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일궈냈으며, 이탈리아 팀으로는 최초로 UEFA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함으로써 사상 첫 유럽 클럽대항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3. 창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피오렌티나는 1926년 창단 후 하부리그에서 출발했으나, 창단한 지 겨우 5년 만인 1931년 세리에 A에 첫 발을 디뎠다. 세리에 A에서의 첫 시즌인 1931/32시즌 우루과이의 스트라이커 페드로 페트로네의 활약에 힘입어 4위를 기록한 뒤 여섯 시즌을 세리에 A에서 보내다 1937/38시즌 처음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1년 만에 재승격했고, 이듬해인 1939/1940 시즌에는 코파이탈리아에서 제노아 CFC를 꺾으며 '''클럽 역사상 첫 우승 트로피'''를 따냈다. 하지만 40년대에는 세계대전과 다른 복잡한 사정으로 인하여 성공을 이어가지 못했다.
4. 첫 스쿠데토와 황금기 1950~60년대
1950년대와 60년대는 피오렌티나의 최대 전성기로 꼽힌다. 1950년부터 꾸준히 중상위권을 유지해오다 1955/56시즌 AC 밀란을 승점 12점 차로 따돌리며 '''클럽 역사상 첫 스쿠데토'''에 성공하였다. 1956/57시즌 현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 유로피언컵 결승에 올랐으나 당대 최고의 팀 레알 마드리드에 0-2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4시즌 연속 세리에A 준우승 후 1960/61시즌 코파 이탈리아와 UEFA 컵위너스컵 결승에서 각각 SS 라치오와 레인저스 FC를 꺾고 우승하며 더블을 이루었다. 1961/62시즌에도 UEFA 컵위너스컵 결승에 오르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결승에서 0:3으로 패하며 대회 2연패에 실패하였다. 1965/65시즌 카탄자로를 꺾고 코파이탈리아 3번째 우승을 거두었고, 1968/69시즌에는 브루노 페사올라 감독과 62'월드컵에서 부상당한 펠레 대신 참가해 우승을 차지한 아마릴도, 14골을 넣은 마리오 마라스키의 힘으로 칼리아리와 AC밀란과의 3파전 끝에 '''두 번째 스쿠데토'''를 기록하였다.
5. 암흑기의 시작? 1970년대
1970년대에는 50년대와 60년대에 비하면 코파이탈리아 우승 1번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성과가 없었다. 지안카를로 안토뇨니라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이자 걸출한 플레이메이커[1] 를 배출했을 뿐 1974/75시즌 AC 밀란을 꺾고 4번째 코파이탈리아 우승을 기록한것을 제외하곤 리그에서 대부분 중위권으로 평범한 시즌을 보냈다. 심지어 1970/71시즌[2] 과 1977/78시즌 골득실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강등 위기를 탈출하기도 하였다.
6. 1980년대 폰텔로 시대
1980년 5월 2일 피오렌티나는 플라비오 폰텔로 가문에 인수되었다. 폰텔로 가문은 팀을 인수하자마자 다니엘 베르토니와 렌조 콘트라토를 영입했다. 팀을 인수한 첫 시즌인 1980/81시즌 전반기 꼴찌로 추락하자 파올로 카로시 감독이 경질되고 지안카를로 데 시스티로 교체되었다. 데 시스티 신임 감독은 후반기 14경기 무패행진을 기록하며 순위를 5위로 끌어들였다. 1981년 폰텔로 구단주는 응원가와 엠블럼을 교체했는데 이는 팬들의 반발을 샀다. 1981년 여름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와 에랄도 페치, 다니엘레 마사로가 영입되었다.
1981/82시즌 최종전까지 가는 끝에 유벤투스에 승점 1점이 뒤져 아쉬운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지안카를로 안토뇨니가 머리 부상으로 4개월 결장한 것과 최종전 피오렌티나가 칼리아리와 0-0으로 비기는 와중에 유벤투스가 석연치 않은 페널티킥으로 1-0으로 이긴것을 생각하면 두고두고 아쉬웠다. 이로 인하여 유벤투스와 피오렌티나는 서로 앙숙의 관계가 되었다.
1981/82 시즌 준우승 이후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센터백이자 캡틴 다니엘 파사레야와 셀레스테 핀을 영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시즌과 같은 성적은 나오지 못했다. UEFA컵과 코파이탈리아 컵대회에서 일찍 고배를 마셨고, 세리에A는 5위에 그쳤다.
1983/84 시즌에는 가브리엘레 오리알리와 파올로 모넬리를 영입했는데 시즌 중반까지 유벤투스와 스쿠데토를 다투다 안토뇨니가 부상을 당했고, 결국 3위로 마쳤다. 그러나 1984/85시즌은 브라질 대표팀의 스타플레이어 소크라테스를 영입했음에도 9위에 그쳤다. 지안카를로 데 시스티 감독이 건강 문제로 물러났고, 페루치오 발카레기[3] 감독이 임시로 감독을 맡아야 했다.
1985/86 시즌은 알도 아그로피 감독이 팀을 이끌었고, 30경기에서 23실점만 내준 탄탄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4위를 기록했다. 또한 니콜라 베르티와 세르히오 바티스티니, 그리고 로베르토 바지오 등 유망주들이 영입되었다. 그러나 29골 밖에 넣지 못한 공격력이 시즌 내내 고민이었고, 29골 중 11골을 센터백 다니엘 파사레야가 기록하였다.[4] 그리고 아그로피 감독이 페루자 시절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려 자격정지를 받았고, 결국 에우제니오 베르셀리니가 새로운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파사레야가 인테르로, 골키퍼 조반니 갈리와 공격수 다니엘레 마사로는 밀란으로 떠났다.
라몬 디아스가 영입된 1986/87 시즌, 시즌 내내 하위권에 처지며 강등위기를 겪었으나, 장기 부상에 시달리던 로베르토 바지오가 29라운드 챔피언 나폴리 원정에서 프리킥으로 1-1 동점골을 넣으며 간신히 잔류를 확정지었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지안카를로 안토뇨니가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1987년 베르셀리니의 뒤를 이어 스벤예란 에릭손이 새 감독이 되었다. 1987/88시즌 홈경기에서 1패만 당한 것에 비하여 원정에서 승점 7점[5] 밖에 따내지 못하는 바람에 8위로 마감하였다. 그렇지만 로베르토 바지오가 첫 풀시즌을 소화하며 6골을 득점, 본격적으로 포텐을 만개하기 시작하였다.
1988/89시즌 둥가와 스테파노 보르고노보가 영입[6] 되었고 니콜라 베르티와 라몬 디아스는 인테르로 떠났다. 영입생 보르고노보와 슈퍼유망주 로베르토 바지오 공격듀오는 "B2"라는 듀오를 형성하며 팀의 45골 중 29골[7] 을 합작했다. 승점 68점 중 58점을 따내며 우승한 인테르를 4:3으로 이긴 경기도 있었지만, 44골이나 실점한 불안한 수비로 순위는 7위에 그쳤다. 그렇지만 AS 로마와의 UEFA컵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며 UEFA컵에 진출하였다.
1989년 벤피카로 떠난 에릭손의 뒤를 이어 브루노 조르지가 새 감독이 되었다. 바조의 파트너 보르고노보는 밀란으로 임대복귀했다. 오스카르 데그티시아와 주세페 볼페치나, 스테파노 피올리, 레나토 부소, 루보스 쿠비크, 주세페 이아키니, 마르코 나피 등이 영입되었다.
많은 영입과 에이스 바지오가 세리에 득점 2위인 17골을 넣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1989/90시즌 내내 강등위기를 겪어야 했고, 최종전에 이르러서야 12위로 잔류를 확정지었다. 이 과정에서 브루노 조르지 감독이 시즌을 마치지 못한채 경질되었고,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가 임시로 감독을 맡으며 잔류를 이끌었다. 리그에서의 부진과 달리 UEFA컵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FC 소쇼-몽벨리아르, 디나모 키예프와 AJ 오세르, SV 베르더 브레멘을 꺾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 상대는 유벤투스였는데 1차전 원정에서 1-3으로 패하고, 2차전 피렌체가 아닌 아벨리노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0-0으로 비겨 우승에 실패하였다. 결승전이 끝난 뒤 다음날 폰텔로 구단주가 로베르토 바지오가 라이벌 유벤투스[8] 로 이적한다고 발표하자 팬들은 폭발했다. 분노한 피오렌티나의 팬들은 거리로 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안그래도 폰텔로 구단주는 다니엘 파사레야, 로베르토 마싸로, 조반니 갈리 등 중요 선수들을 모두 팔아치워 피오렌티나 최대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던 참이었는데 바지오의 라이벌 유벤투스 이적은 피오렌티나 팬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서포터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 폰텔로 패밀리는 10년만에 물러났고, 영화재벌인 마리로 체키 고리가 새로이 클럽을 사들였다. 사실 폰텔로 패밀리는 바지오 외에도 다니엘 파사레야, 로베르토 마싸로, 조반니 갈리 등 중요 선수들을 모두 팔아치워 피오렌티나 최대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던 참이었다.
7. 체키 고리 시대 : 팀 역사상 두 번째 강등과 세리에 7공주 시대, 그리고 파산
1990년 폰텔라를 대신하여 영화제작자 마리오 체키 고리가 피오렌티나를 인수했고,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었던 세바스치앙 라자로니가 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바지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마시모 오를란도와 디에고 푸세르가 영입되었다. 1988/89시즌 활약했던 스테파노 보르고노보가 완전이적으로 영입됐다. 그러나 지난 시즌과 같은 12위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마무리되었고 라자로니 대신 루이지 라디체가 새 감독이 되었다.
1991/92시즌 브라질 대표팀 공격수 마지뉴[9] 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마르코 브란카 등을 영입했다. 현재 형태의 엠블럼이 이때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아르테미오 프란키를 기념하며 홈구장명이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1991/92시즌 바티스투타가 첫 시즌 13골을 득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12위라는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다.
1992/93시즌을 앞두고는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브리안 라우드루프, 프란체스코 바이아노를 영입했다. 그리고 마리오 체치 고리 구단주가 아들 비토리오에게 구단을 물려주었다. 전반기 피오렌티나는 화끈한 공격력을 선보이며 상위권에 위치하였다. 안코나에 7:1 승리를 거두었지만, AC 밀란에 홈에서 3:7으로 지는 등 이길 때 화끈하게 이기고 질 때도 화끈하게 졌다. 13라운드까지 밀란에 이어 승점 15점으로 2위를 기록하고 있다가 새해 첫 경기 14라운드 홈에서 아탈란타에 0-1로 져 6위로 내려가자 갑작스럽게 비토리오는 피오렌티나를 멀쩡히 잘 이끌고 있던 루이지 라디체 감독을 해임시키고 알도 아그로피로 교체하였다.
갑작스러운 감독 교체로 혼란에 빠진 피오렌티나는 라디체 감독 경질 후 20경기에서 단 3승 만을 기록하며 점점 하위권으로 쳐지기 시작했고, 이후 한번 더 감독 교체를 단행하며 루치아노 키아루지를 임시감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최종전에서 포지아를 상대로 홈에서 6:2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디네세가 로마와 1-1로 비기며 우디네세-브레시아에 골득실에서 앞섬에도 불구하고 승자승에서 밀려 16위를 기록하며 브레시아와 함께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 1939년 이후 54년 만에 강등이었다. 바티스투타와 바이아노가 각각 16골과 10골을 기록하며 분전했으나 팀의 강등을 막진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신임 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의 지도와 팀에 잔류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슈테판 에펜베르크, 그리고 새로 영입된 유망주 안젤모 로비아티와 골키퍼 프란체스코 톨도 등의 맹활약에 힘입어 세리에 B에서 우승을 차지, 강등 1년 만에 세리에 A 복귀에 성공하였다.
세리에 A로 돌아온 후, 에펜베르크와 카로비 등이 팀을 떠났으나 벤피카에서 유망주 후이 코스타와 새로운 세계 챔피언 브라질 대표팀의 수비수 마르시우 산투스를 영입하였다. 피오렌티나는 간판 골게터 바티스투타가 개막 후 11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세우며 1994년을 3위로 마감했지만 DTD의 법칙을 무시할 수 없는지 점점 힘이 빠지는 모습을 보이며 10위로 내려갔다. 나폴리와 토리노에 각각 5:2, 6:3의 대승을 거뒀지만, 라치오 원정에서 2:8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61골을 득점한 공격력에 비해 57골을 내준 수비는 매우 헐거웠다. 바티스투타가 26골을 넣으며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고, 후이 코스타는 데뷔 첫 시즌에 9골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브라질 국대 수비수 마르시우 산투스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시즌 종료 후 아약스로 이적했다.
1995/96시즌에는 유럽대항전 복귀를 위하여 수비를 대거 보강했다. 수비수인 파스콸레 파달리노, 로렌조 아모루소, 미켈레 세레나와 미드필더 슈테판 슈바르츠를 영입했다. 1995/96시즌 세리에 A에서 3위 라치오와 승점이 같은 4위를 차지했고, 코파 이탈리아에서 아탈란타 BC를 홈과 어웨이에서 각각 1-0, 2-0으로 꺾으며 5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UEFA 컵위너스컵에 진출에 성공,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1996/97시즌 벨기에의 공격수 루이스 올리베이라가 영입되었고,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바티스투타의 2골로 AC 밀란을 2:1로 꺾고 우승했다. 1990년 UEFA컵 준우승 이후 오랜만에 출전한 유럽대항전 컵위너스컵에서 준결승까지 올랐으나 대회우승팀 FC 바르셀로나에 막혀 우승에 실패했다. 유럽대항전 병행의 여파로 리그에서는 9위에 머물렀다. 유럽대항전 진출 실패로 라니에리 감독은 발렌시아 CF로 떠났고, 후임으로 알베르토 말레사니가 임명된다.
1997/98시즌 에드문두가 영입된 가운데 세리에 A 5위를 차지하며 UEFA컵에 진출했다. 그러나 말레사니는 라커룸에서 구단주 비토리오에게 욕설을 듣는 등, 구단주와의 불화로 한 시즌 만에 팀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최고의 명장 조반니 트라파토니가 새 감독이 되었다.
1998/99시즌에는 모레노 토리첼리와 토마스 레프카가 영입된 가운데, 피오렌티나는 전반기 홈에서 전승을 거두며 21라운드까지 선두를 차지하며 30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그 우승경쟁이 한창인 중요한 시점에 간판 공격수 바티스투타의 부상과 에드문두가 리우 카니발을 위해 팀을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승점을 점점 까먹기 시작했고, 마지막 15경기에서 단 3승만 기록하여 점차 우승경쟁에서 밀려나 가까스로 3위를 기록,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는데 그쳤다.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여 파르마와 대결했는데, 1차전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2차전 홈경기를 2:2로 비기며 원정다득점으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UEFA컵은 16강에서 스위스의 그라스호퍼에 원정 1차전에서 2:0으로 이겨놓고 홈 2차전에서 0:3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시즌 도중 팀을 이탈한 에드문두는 우승 실패의 원흉으로 꼽히며 방출되었다.
1999/2000 시즌에는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와 엔리코 키에사, 그리고 안젤로 디 리비오가 팀에 합류하였다. 1999/2000시즌은 리그에서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며 7위로 UEFA컵 진출에 그쳤다. 바티스투타는 리그에서 득점랭킹 2위인 22골을 기록하며 고군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승도전에 실패하자 우승 야망과 팀의 재정난 문제로 인하여 팀을 떠날 결심을 한다. 한편 챔피언스리그에서는 3차예선에서 폴란드의 비제프 우치를 꺾었고 1차 조별리그에서 FC 바르셀로나, 아스날 FC, AIK 포트볼와 한 조가 되어 바르셀로나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며 2차 조별리그에 진출했다. 웸블리에서 치뤄진 아스날 원정 1:0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2차 조별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발렌시아 CF, 지롱댕 보르도와 한 조가 되었는데 조1, 2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발렌시아와 1승1패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꼴찌 보르도에 2번 모두 비기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 후 트라파토니는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으로 떠났고 파티흐 테림이 새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9년 간 간판 공격수로 활약했던 바티스투타는 우승을 위해 팀에 400억원의 이적료를 남기고 AS 로마로 이적했다.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벤피카에서 누누 고메스를 영입했다.
2000/01 시즌 파티흐 테림 감독은 공격적인 축구로 팬들의 호감을 샀다. AC 밀란을 홈에서 4:0으로 이기는가 하면, 유벤투스 원정에서 3:3으로 비기기도 했다. 리그에서 성적이 점점 하락하긴 했지만 코파 이탈리아 준결승에서 AC 밀란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나 체치 감독이 재정난을 이유로 팀에 대한 투자를 원하는 테림 감독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게 되자, 테림 감독은 코파 이탈리아 결승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사임하고 로베르토 만치니가 감독을 맡게 되었다. 만치니 감독은 리그를 9위로 마치고,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2년 전 만났던 파르카를 상대로 1차전 어웨이에서 1-0으로 이기고 2차전 홈에서 1-1로 비기며 코파이탈리아 6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코파이탈리아 우승의 기쁨도 잠시...
다혈질에 욕심이 많은 비토리오 체치 구단주는 하프타임때 라커룸으로 찾아와 알베르토 말레사니 감독에게 욕을 퍼붓고, 팀내의 선수, 감독은 물론 클럽 출신 최고의 스타였던 지안카를로 안토뇨니를 비롯한 여러 고위층 임원들과도 자주 불화를 일으켜 팀에서 내쫓는 등, 구단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벌이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정계 도전 실패와 방만한 경영으로 돈을 이리저리 빼돌려 팀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결국 비토리오는 5000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빚을 남긴 채 임금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며 2001년에 구단주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이 여파로 피오렌티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여 프란체스코 톨도와 후이 코스타를 각각 인테르와 AC 밀란으로 팔아야만 했다.
암운이 드리워진 2001/02 시즌, 수페르코파에서 AS 로마에 0:3으로 패했고, UEFA컵에서 3라운드 OSC 릴에게 떨어졌고, 안그래도 선수층이 부족한 상황에서 주전 공격수 키에사 등 여러 선수들이 부상당하는 악재가 발생하였다. 결국 피오렌티나는 세리에 A에서 18개 팀 중 17위를 기록하며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재정 문제로 피오렌티나는 2002년 6월 행정관리 체제가 되었고, 세리에 B 참가가 거부당했다.
8. 파산 후 재창단, 델라 발레 시대
명품 구두 브랜드 토즈와 호건(Hogan). 로저 비비에르 등의 신발과 가죽 사업가인 디에고 델라 발레(Diego Della Valle)가 새 구단주로 부임하여 ACF 플로렌티아 비올라(Associazione Calcio Fiorentina e Florentia Viola)라는 이름으로 2002년 8월에 즉시 재창단되었고 이탈리아 4부리그에 속하는 세리에 C2에 참가했다. 재창단한 클럽에 남았던 선수는 오직 안젤로 디 리비오뿐이였다. 디 리비오와 30골을 넣은 크리스티안 리가노 덕분에, 상당히 쉽게 세리에 C2를 우승하였다. 3부리그로 올라가야 했지만, 칼초 카타니아 사건으로 인하여[10] 세리에 B 출전팀 수를 20개팀에서 24개팀으로 늘린 덕분에 3부리그를 건너뛰고 세리에 B에 참가하게 되었다. 2003년 오프 시즌에, 클럽은 피오렌티나 명칭과 유니폼 디자인에 대한 권리를 다시 사왔고 ACF 피오렌티나(ACF Fiorentina)로 다시 재개명하였다. 2003/04 시즌에 6위로 마감하였고,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세리에 A 15위 페루자를 1승1무로 누르고 2년 만에 세리에 A로 돌아왔다.
9. 2004/05 시즌
다리오 다이넬리, 조르조 키엘리니(임대), 토마스 위팔루시, 나카타 히데토시, 파브리시오 미콜리, 마틴 외르겐센, 하비에르 포르티요(임대), 엔조 마레스카 등 폭풍영입을 단행했다. 하지만 시즌 마지막 날까지 강등권 싸움을 벌이며 두 번의 감독 교체가 있었다. 디노 조프가 소방수로 나선 가운데 최종전 전까지 강등권 19위에 놓였다. 강등권 경쟁팀 브레시아와의 단두대매치에서 3:0으로 이겨 브레시아를 강등시키고 파르마-볼로냐를 승자승으로 제치며 16위를 기록, 간신히 강등을 피했다.
10. 2005/06시즌
2005년 여름, 델라 발레 구단주는 판탈레오 코르비노를 새 단장으로 임명하였고 체사레 프란델리를 다음 시즌 감독으로 내정하였다. 여름 이적 시장에 루카 토니와 세바스티앙 프레이. 알레산드로 감베리니, 리카르도 몬톨리보, 마누엘 파스쿠알을 영입한다. 이 과감한 영입으로 승점 74점을 기록하며 리그 4위와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얻게된다. 토니는 38경기에서 31골을 넣으며, 1958-59 시즌 안토니오 발렌틴 안젤릴로 이후 30골 이상을 넣은 선수가 되었으며,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였다. 하지만 2006년 7월 14일에, 피오렌티나는 2006년 칼초폴리 사태[11] 로 인하여 세리에 B로 강등당하고 승점 12점을 감점당했다. 이에 피오렌티나는 항소를 통하여 세리에 A로 복귀하였지만, 2006-07 시즌에 승점을 19점이나 감점을 당한 채 시작해야 했고 2005/06시즌은 승점 30점을 감점당하여 챔피언스리그 진출권도 박탈당하고 최종 순위는 9위가 되었다.
11. 2006/07 시즌
-19점으로 시작했으나, 시즌 도중 피오렌티나의 징계는 이탈리아 법원에서 항소를 통해 -19점에서 -15점으로 감소하였다. 이런 악재에도 불구하고, 피오렌티나는 21승10무7패 승점 58점, 6위로 UEFA 컵 진출권을 확보하였다. 승점감점이 없었다면 라치오, AC밀란을 제치고 3위를 했을 승점이었다. 이적생 아드리안 무투와 지난시즌 유로피안 골든슈 루카 토니가 환상의 궁합을 보이며 32골을 합작했고, 세바스티앙 프레이 골키퍼를 필두로 파스쿠알, 위팔루시, 감베리니, 다이넬리로 구성된 수비진이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2. 2007/08 시즌
주포 루카 토니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A 4위로 AC 밀란을 5위로 누르고 9년 만의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UEFA컵에서는 로젠보리, 에버튼, PSV를 꺾고 4강까지 진출했으나 레인저스에 홈어웨이 모두 0-0으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파비오 리베라니와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실축으로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루카 토니의 공백이 우려되었으나, 아드리안 무투가 모든 대회에서 23골(리그 17골)을 득점하였고, 지암파올로 파찌니와 다니엘 오스발도 등 다른 공격수들도 결정적일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오스발도는 유벤투스 원정에서 추가시간 역전 결승골과 최종전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짓는 오버헤드킥 결승골을 넣었다.
13. 2008/09 시즌
2008/09시즌을 앞두고는 펠리페 멜루와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후안 마누엘 바르가스를 영입했다. 몬테네그로 국적의 유망주 스테반 요베티치도 이때 입단하였다. 질라르디노는 데뷔전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극적 동점골을 기록하는 등 전체 25골(리그 19골)을 득점하였고, 무투와 좋은 호흡을 보였다. 질라르디노의 활약으로 입지가 좁아진 지암파올로 파찌니는 겨울이적시장에서 삼프도리아로 이적했고 파블로 오스발도는 볼로냐 FC로 이적했다. 유망주 요베티치 역시 후반기 좋은 활약을 보이며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2008/09시즌 역시 지난시즌과 마찬가지로 4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다시 성공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온 챔피언스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올림피크 리옹,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 한 조가 되어 조3위에 머무르며 UEFA컵에 나가게 되었고, UEFA컵에서는 32강에서 AFC 아약스에게 탈락하였다.
14. 2009/10 시즌
여름이적시장에서 펠리페 멜루가 25m의 이적료로 유벤투스로 떠났고, 즈드라브코 쿠즈마노비치는 Vfb 슈투트가르트로 이적했다. 그리고 미드필더 마르코 마르키오니, 수비수 로렌조 데 실베스트리와 체사레 나탈리를 영입했다.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에서 스포르팅 리스본을 원정다득점을 꺾고, 본선에 진출하였다. 조별리그에서 리그앙의 강자 올림피크 리옹과 EPL의 리버풀 FC, 헝가리의 데브레첸과 한조가 되었다. 리옹과 첫 경기는 0:1로 패했지만 2라운드 리버풀과의 홈경기에서 스테판 요베티치의 2골로 2:0 승리를 거둔다. 약체 데브레첸과의 3, 4차전은 난타전 끝에 4:3, 5:2로 승리하며 사실상 16강을 예약했고, 리옹과의 5차전에서 1:0 승리를 거둠으로써 조1위에 올랐다. 그리고 6차전 리버풀 원정에서 2:1 역전승을 거두며 조1위를 차지하였다.
겨울이적시장에서 마르틴 요르겐센이 친정팀 오르후스로 떠났고, 맨유 입단이 예정되어 있던 세르비아의 유망주 아뎀 랴이치가 맨유 이적이 불발되자, 8m에 영입했다.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상대하게 되었는데 1차전 심판의 오심으로 억울하게 1-2로 패했고, 2차전에서 3-2로 이겼지만 원정다득점에서 뒤져 탈락하였다.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선전과 달리 리그에서 13승8무17패, 그 못한 페라라-자케로니의 유벤투스보다도 못한 11위에 그쳤다. 그 이유는 2010년 1월 아드리안 무투가 금지 약물인 시부트라민을 복용한 사실이 밝혀져 1년 출장정지를 당한 점이 컸다. 전반기 9승을 거두었던 피오렌티나는 이 사건 이후 후반기 단 4승에 그치며 유럽대항전조차 나가지 못하고 말았다.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하필 트레블을 기록한 인터 밀란에 막혀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시즌을 마친 뒤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은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후임으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내정되었고, 시니사 미하일로비치가 새 감독이 되었다.
15. 2010-11 시즌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떠난 체사레 프란델리의 뒤를 이어 칼초 카타니아의 감독이던 시니사 미하일로비치가 감독을 맡게 되었다. 아르투르 보루츠와 가에타노 다고스티노, 펠리페, 알레시오 체르치가 영입되었고, 마시모 고비는 파르마로 이적하였다. 요베티치가 십자인대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려야 했고, 무투는 10월이 되어야 징계가 풀리고, 여러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리는 등 악재가 많았다. 주전골키퍼였던 세바스티앙 프레이도 시즌 아웃을 당하며 셀틱에서 이적한 아르투르 보루츠가 주전 골키퍼를 맡아야 했다. 초반 7경기에서 1승2무4패에 그치며 힘겨운 출발을 보였다. 겨울이적시장에서 발론 베라미과 네투를 영입했고, 마리오 볼라티를 이적시켰다. 피오렌티나는 초반 부진을 딛고 점점 본 궤도에 오르며 나아지기는 했지만 결국 12승15무11패, 9위로 마감하였다.
16. 2011-12 시즌
겨울이적시장에서 마티아 카사니, 우싱 카르자, 안드레아 라짜리, 지아니 무나리, 마티야 나스타시치를 영입했고, 세바스티앙 프레이, 아드리안 무투, 가에타노 다고스티노, 마르코 도나델, 마르코 산타나가 팀을 떠났다. 시즌 개막 후 지지부진한 경기력이 이어지고 11월 키에보 원정에서 0-1로 지자 시니사 미하일로비치 감독이 경질되고, 델리오 로시로 교체되었다. 델리오 로시로 교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겨울이적시장에서 알베르토 질라르디노가 제노아 CFC로 떠났고, 유벤투스의 먹튀 아마우리를 임대해온다. 또한 무직이었던 유능한 스카우터였던 에두아르도 마시아를 영입하면서 코르비노의 보조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유벤투스와의 홈경기에서 굴욕적인 0:5 패배를 당했다. 다행스럽게도 AC 밀란[12] 과 AS 로마 원정에서 거둔 뜻밖의 승리를 거두며 반등하는 듯 했다. 그러다가 36라운드 노바라와의 홈경기에서 경기 도중 델리오 로시가 교체되면서 자신을 조롱하는 제스처를 취한 아뎀 랴이치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 사건 이후 곧바로 델리오 로시는 경질되었다. 남은 2경기는 구단 이사 중 한 명인 빈센초 구에리니가 감독대행을 맡아 레체 원정에서 1:0 승리를 거두며 잔류를 확정지었다. 지난시즌 십자인대 부상으로 통째로 날렸던 스테판 요베티치는 14골을 넣으며 포텐을 만개, 사실상 팀의 공격을 혼자 이끌었고, 유망주 마티야 나스타시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시즌 종료 뒤 리카르도 몬톨리보는 재계약 오퍼를 거부하고 이적료 없이 AC 밀란으로 떠났다. 또한 판탈레오 코르비노 단장도 더 이상 피오렌티나에 머무를 생각이 없다면서 단장직 사임을 발표하게 된다. 이제 남은 단장은 코르비노의 보조자였던 스페인 출신으로 유명한 스카우터였던 에두아르도 마시아 뿐이었다.
17. 2012-13 시즌
시즌을 앞두고 새로운 단장으로 다니엘레 프라데가 선임됐고 에두아르도 마시아도 단장으로 승격되면서 기존의 판탈레오 코르비노의 독단적인 단장체제를 2인 체제로 바꾸게 됐다, 새로운 감독으로 빈첸초 몬텔라가 선임되었다. 프런트와 수장이 새로 바뀐 피오렌티나는 많은 선수를 데려왔다. 파쿤도 론카글리아(보카 주니어스, 무니르 엘 함다우이(AFC 아약스), 후안 콰드라도[13] (우디네세), 마티아스 페르난데스(스포르팅 리스본), 에밀리아노 비비아노(US 팔레르모, 임대), 보르하 발레로(비야레알 CF), 곤살로 로드리게스(비야레알 CF), 알베르토 아퀼라니(리버풀 FC), 다비드 피사로(AS 로마), 지울리오 밀리아치오(US 팔레르모, 임대), 네나드 토모비치(제노아 CFC), 스테판 사비치(맨체스터 시티), 루카 토니(알 나스르(UAE))를 영입했다. 반면 아르투로 보루츠, 페르 크롤드럽, 리카르도 몬톨리보, 우상 카르자, 발론 베라미, 마티야 나스타시치, 알레산드로 감베리니, 알레시오 체르치, 체사레 나탈리, 후안 마누엘 바르가스(임대)가 팀을 떠났다. 루카 토니는 2007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뒤 5년 만의 피렌체 컴백. 그리고 맨시티는 나스타시치를 데려가기 위해 14.8m에 스테판 사비치를 얹는 딜을 했다.
엄청난 선수 영입을 통해 전력이 대폭 강화가 된 피오렌티나는 스테판 요베티치를 필두로 좋은 공격력을 과시하며 2012년을 10승5무3패, 4위로 마쳤다. 그러나 새해 첫 경기 꼴찌로 강등된 페스카라에 홈에서 0:2로 패하고, 우디네세와 카타니아 원정에서 패해 1월에만 1무3패로 부진하였다. 전반기는 인테르와 라치오와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경쟁을 하는 양상이었지만, 후반기 두 팀이 DTD를 시전하며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이를 틈타 전반기 극심한 부진을 겪은 AC 밀란은 전반기 한때 피오렌티나와 승점 12점차까지 벌어졌었으나, 후반기 단 1패만을 기록하며 중위권에서 단숨에 3위까지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1월에 극심한 부진을 겪은 피오렌티나는 2월부터 다시 승수를 채우기 시작했지만 후반기 밀란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마지막 라운드에서 피오렌티나가 페스카라에 5:1로 이기는 동안 AC밀란이 시에나 원정에서 극적인 역전승으로 3위를 차지하며[14]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고, 피오렌티나는 4위로 유로파리그에 나가게 되었다. 3년 만의 유럽대항전 복귀 확정.
겨울이적시장에서 주세페 로시를 데려왔는데 마지막 경기에서 교체출장하였다.
18. 2013-14 시즌
같은 리그 내 유벤투스 간다던 요베티치를 결국 맨시티에 30m 다 받고 판 후 주세페 로시와 마리오 고메즈와 일리치치, 암브로시니, 그래도 아직은 기대할만한 호아킨 산체스를 영입하며 비록 랴이치를 AS 로마에 팔았지만 스쿠데토를 노릴만한 수준으로 팀을 끌어올렸다. 지난 시즌 챔스권 경쟁을 보아 순조롭게 상위권까지 순항할 것으로 보였으나 갑자기 다른 팀들이 다 각성하고, 특히 AS 로마는 10라운드까지 '''전승'''을 달리고, 승격팀인 헬라스 베로나가 챔스권까지 올라와 깽판을 벌이는 등 리그가 난전 양상이 되어 치열한 상위권에서 고전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SSC 나폴리, 인테르에게 전반기 경기를 내주고 이겨야 할 상대에게 비기고 얇은 스쿼드에 마리오 고메즈의 부상 등 악재가 겹치고 겹쳐 또 유로파권에서 거의 시즌 대부분을 보냈다. 주전 공격수인 마리오 고메즈가 부상인 동안 승점 기회를 많이 날려먹었다. 또 AS 로마에게도 패하며 강팀약, 약팀강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강팀 중 잡아낸 건 유베뿐으로 그나마도 후반기 경기에서는 리벤지당하며 4위로 시즌 마감. 아무래도 이름값으로는 전설의 투톱이였는데 실제로 전설속에만 존재했던 점이 아쉬웠다는 평가. 그나마 시즌 최고의 수확인 콰드라도가 있어서 나쁘지는 않은 시장이였다.
그나마 코파 이탈리아에서 결승까지 진출하여 13년만에 우승을 노려보았으나 나폴리에게 석패.
유로파리그에서는 48강 조예선에서 CS 판두리 타르구 지우(루마니아), FC 파송스 데 페헤이라(포르투갈, FC 드니프로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우크라이나) 같은 쉬운 상대들을 만났다. 3전전승을 달리며 32강 진출은 전혀 문제없어 보인다. 예상대로 거뜬하게 32강에 진출, 덴마크 에스비에리 fB와 16강을 다투게 되었다. 예상대로 쉽게 16강에 진출했으나 아쉽게도 16강 상대는 리그 챔피언이자 올 시즌도 리그 우승이 거의 확정된 유벤투스 FC가 되고 말았다. 원정에서 1:1로 비기며 선전했으나 안방에서 0:1로 패하며 탈락했다.
19. 2014-15 시즌
쥐세페 로시의 장기 부상, 마리오 고메즈의 먹튀화와 맞물려 전반기 피오렌티나는 득점력 부족 현상을 겪으며 세리아 중위권으로 추락했다.
겨울이적시장에서 알레산드로 디아만티와 알베르토 질라르디노를 광저우 에버그란데에서 데려왔고, 후안 콰드라도를 첼시 FC에 31.5M에 판 뒤 첼시로부터 완전이적 조건이 포함된 임대로 데려왔다.
살라와 디아만티가 영입된 뒤 팀 공격의 활로가 풀리며 중위권 신세를 탈출하고 챔피언스리그 진출 경쟁을 했다. 2015년 이후 시작된 AS 로마의 급격한 부진과 맞물려 2위까지도 노려볼 수도 있었다.
코파 이탈리아는 8강에서 AS 로마를 꺾으며 4강까지 올랐고 4강 1차전 유벤투스 원정에서 모하메드 살라의 단독돌파 골로 2-1 승리를 기록했으나 홈에서 열렸던 2차전에서 어이없게 0-3으로 참패하며 탈락했다.
유로파리그는 토트넘 핫스퍼-AS 로마-디나모 키예프를 꺾고 4강까지 진출했으나 세비야에게 1차전 원정에서 0-3으로 참패하면서 2차전 홈경기에서 4점차로 이겨야하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결국 2차전도 2:0으로 지며 떨어졌다..
리그에선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세 대회 모두 의미있는 성과를 거둘 뻔 했지만 모두 한 끝차가 부족했다. 유로파리그야 4강 상대팀이 유로파 끝판왕 세비야 FC를 상대하며 어느 정도 참작이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4월에 코파 이탈리아에서 유벤투스에 홈 업셋당하고 나폴리-베로나-칼리아리-유벤투스를 상대로 폭풍 4연패를 당한 것이 몹시 뼈아팠다. 마지막 5연승을 거두며 4위를 했지만 그 이전 리그 4연패로 인해 이미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은 최종전보다 한참 전에 물건너간 상황이었다. 시즌이 끝나고 6월 9일 몬텔라 감독이 해임되었다. 몬텔라의 바이아웃을 두고 겨울 이적시장 무렵부터 보드진과 갈등이 있었는데, 월요일까지 답변을 주기로 보드진과 합의해놓고는 마다가스카르(...)로 통보없이 휴가를 가버렸다. 이에 보드진이 열받아 경질했다. 통수 맞기에 익숙해진 피오렌티나 팬들이지만 몬텔라에 대한 여론은 가히 최악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
2015년 6월 21일 피오렌티나 공식 홈페이지에 파울로 소사 감독선임을 발표했다.
임대와서 활약했던 살라 또한 잔류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면서 팀을 흔들고 있다. 어째 근 5년간 피오렌티나에서 좀 날린다 싶은 선수는 죄다 떠나고 있는데,[15] 희한하게도 그 선수들 대부분은 기대치만큼 크지 못했다.
또한 이 때 그 동안 프라데와 함께 일 잘했던 마시아가 레알 베티스 단장으로 가게 되면서 서서히 로마에서 욕 먹었던 프라데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주세페 로시의 부상, 마리오 고메즈의 먹튀짓, 쿠마 바바카르의 부상등이 복합적으로 겹치긴 했다. 이로 인해 리그 최다골을 기록한 선수가 미드필더 요시프 일리치치의 8골이었으며 시즌 전체를 포함해도 10골을 넣은 일리치치와 고메즈의 몫이었다. 팀 내 리그 골 2위는 수비수 곤살로 로드리게스... 겨울에 합류한 질라르디노와 살라[16] 덕분에 체면은 치렀다. 게다가 질라르디노는 적은 출장기회에도 준수한 활약을 보였고 고메즈를 벤치로 보내는 활약까지 했다.
20. 2015-16 시즌
결국 살라도 떠나고 말았다. 살라는 피오렌티나를 자신의 빅클럽 이적의 교두보 발판의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이런 그의 이런 행동과 이적 시장에서 피오렌티나가 살라 건으로 여러 클럽들과 엮이면서 복잡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적 시장 플랜이 매우 꼬였고 또한 그의 에이전트가 피오렌티나를 조롱하면서 살라는 피오렌티나의 후반기 영웅이었다가 역적으로 돌변했다.
필요 이상으로 로테급 선수들만 많은 상황, 즉 쩌리들이 넘치는 상황에서(...) 감독까지 예상치 못한 불화로 나가버린 상황이다. 일단 감독을 빠르게 선임하고 쩌리들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믿음직하지 못한 오른쪽 풀백과 네투가 프리로 풀린 상황에서 타타루시누와 경쟁할 NO.2도 필요한 상황이다. 그밖에 챔스권을 위해선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상황. 감독 물망엔 파울루 소자바젤 감독이 오르고 있다. 결국 파울루 소자 감독이 피렌체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7월 1일. 쩌리들의 계약 만료로 주급이 무려 8M이나 절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외로 이적시장은 좀 실망적인 편이었던 것이 공격수나 미드필더의 보강은 나름 괜찮은 편이었지만 엄청난 주급을 받아대던 방출 명단 대상의 방출이 늦어지는 바람의 여파인지 중앙 수비수 포지션과 오른쪽 풀백의 믿음직한 주전의 보강이 실패한 바람에 수비 포지션의 걱정이 생기게 되었다.[17]
하지만 피오렌티나에서 활용도가 애매하다는 평가를 듣던 마르코스 알론소가 주장인 파스쿠알을 백업으로 밀어내는 등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했고 이적시장 때 처분대상으로 취급되는 편이었던 제노아에서 임대복귀한 파쿤도 론칼리아가 다시 주전을 잡을 정도로 경기력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저번 시즌 후반기 때부터 경기력이 상승한 요시프 일리치치와 고메즈보다 좋은 경기력을 보이고 있는 영입생 니콜라 칼리니치 등 선수단의 분위기에 힘입어서 10월 4일 기준 리그 1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10월 26일 AS 로마 에게 패하면서 순위가 내려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A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높은 순위권에서 꾸준히 경쟁 중이라는 점, 그리고 올 시즌 유벤투스 FC 가 아직까진 부진한 상태이며, AC 밀란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데 비하면 아주 놀라운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AS 로마, SSC 나폴리, 인터 밀란과의 경쟁에서 한 두팀 정도를 밀어낸다면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가능할 기세.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이 팀들보다 먼저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될 듯 하다.
그리고 11월 1일 프로시노네 칼초와의 홈경기에서 4-1 대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리그 1위로 복귀했다.
23R 기준 14승 3무 6패, 승점 45점으로 3위를 기록중이다. 나쁜 페이스는 아니지만 1, 2위 나폴리와 유벤투스가 너무 잘 한다.
겨울 이적 시장에서 프라데와 마시아를 대신해서 2명의 단장이 왔지만 거의 영입이 될 뻔했던 리베르 플라테의 엠마누엘레 맘마나를 무능한 협상 능력으로 리베르 플라테를 분노하게 만들어 피오렌티나와 더 이상 협상을 끊어 버려 파울루 소자가 원하는 선수들은 죄다 실패함에 따라 수비 보강을 나이 있고 돈 안 드는 자유 계약 선수로 하자는 제안에 감독이 그딴 영입이면 감독직 때려치운다고 드러내게 된다. 더구나 몬텔라를 증오하게 된 델라 발레가 몬텔라와 프라데가 중심이 된 로마파들을 쳐낼 작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바로 이때부터였다.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16강에서 카르피에게 패해 탈락했다.
유로파리그에서는 I조 예선에서 바젤에게 밀려 2위로 32강에 진출했고 32강에서는 토트넘을 만났다. 그러나 토트넘은 지난 시즌 받은 수모를 제대로 갚아주면서 피오렌티나를 탈락시켰다. 유로파 바젤 원정에서 피오렌티나 최고의 기대주인 페데리코 베르나르데시치의 맹활약으로 2:0으로 앞서고도 파쿤도 론칼리아가 쓸데없는 퇴장으로 다 잡은 경기를 놓친 탓에 파울루소자는 론칼리아에게 큰 분노를 했고 그 여파가 토트넘으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유로파 리그 토트넘과의 2차전은 피오렌티나가 런던 원정이라는 점도 있지만 피오렌티나는 리그에서 상대팀들에 의해 약점이 노출된 3-4-2-1을 버리고 크리스티안 테요가 합류하면서 4-2-3-1로 테요와 베르나르데시치의 양 윙포워드의 빠르고 창의적인 플레이에 최근 쏠쏠한 재미를 보았으나 이 전술의 핵심인 테요를 유로파 리그에서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방압박에 취약한 약점을 드러낸 3-4-2-1을 썼고 이것은 토트넘같은 전방 압박이 무시무시한 클럽에겐 피오렌티나를 공략하기에 매우 좋은 상황이었다.
또한 빌드업 위주라서 그만큼 공격 전개가 느린 편인 이 전술의 핵은 바로 보르하 발레로와 요시프 일리치치인데 문제는 상대편 압박에 맥을 못 추는 트레콰르티스타인 일리치치가 제 몫을 전혀 해주질 못했다. 또한 일리치치는 팀의 스피드를 잡아먹는 주범으로서 스피드한 전개에는 취약한 단점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의외성과 강력하고 정확한 왼발은 정말 상대팀들에겐 무서운 무기이지만 그가 슛을 못하게 막는다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리치치가 반 시즌은 리그에서 가장 빛나는 활약을 펼쳤지만 그의 약점이 노출되었고 계속 부진 중이기 때문에 4-2-3-1에서 트레콰르티스타로 현재 보르하 발레로가 점차 중용받기 시작했다. 발레로는 비록 일리치치보다 득점력이나 파괴력에선 많이 밀리겠지만 개인 한정이 아닌 팀을 생각하자면 플레이메이킹 능력에선 일리치치는 발레로에게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또한 발레로는 팀 스피드도 살릴 줄 아는 축구를 펼치고 있으며 일리치치같이 탐욕을 부리거나 쓸데없이 기술 부리다가 빼앗기거나 그러질 않는다. 즉 오히려 팀에 있어선 일리치치보다도 더 공헌도가 높은 선수이고 밑에는 밀란 바델리와 마티아스 베시노라는 우수한 질의 미드필더들이 버티고 있기에 발레로를 굳이 아래로 내리고 일리치치를 쓸 이유가 전혀 없다.
또한 2차전에선 베르나르데시키마저도 부진한 활약 으로 원정에서 3:0으로 완패하고 유로파 리그에서 탈락하게 된다.
더구나 다음 리그 상대는 나폴리 그리고 며칠 뒤엔 로마 즉 3위 결정전에서 아주 중요한 갈림길에 선 상황이다. 이 2연전에서 피오렌티나의 앞으로의 운명이 갈릴 것이다.
5위로 2015-16 시즌을 마무리했다.
21. 2016-17 시즌
다니엘레 프라데를 내치고 다시 데려온 이는 바로 판탈레오 코르비노의 리턴이었다. 코르비노는 당시에 볼로냐 단장이었는데 그는 피오렌티나로 다시 복귀하길 원해서 볼로냐의 계약을 파기하고 피오렌티나로 오게 된다. 이로 인해 볼로냐와 피오렌티나는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오죽했으면 지금도 피오렌티나에겐 선수를 잘 안 판다.
파울루 소자와 구단 간의 약속과는 다르게 영입에서도 지지부진한 상황.. 거기에 첼시 FC에서 마르코스 알론소를 영입하는 바람에 왼쪽 윙백에서 큰 공백이 생기게 된다. 이로 인해 파울루 소자는 사실상 구단과 척을 지게 되면서 다음 시즌 떠날 것으로 보인다.
이적 시장이 끝나가던 때 알론소의 대체자로 우루과이의 명문구단인 페냐롤에서 막시 올리베라를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선수가 과연 알론소를 대체할 지 의문. 물론 알론소가 떠나기 전에 피오렌티나로 이적 후 무려 10시즌을 소화한 마누엘 파스쿠알이 프리로 팬들과 구단에 작별을 하면서 그의 대체자로 크로아티아의 명문구단인 하이두크 스플리트의 흐르보예 밀리치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알론소의 공백은 커보였고 어쩔 수 없이 밀리치 주전에 올리베라를 후보로 쓸 수밖에 없었다.
프리시즌 때 유망한 모습을 보여줬던 엔리코 키에자의 아들이자 피오렌티나의 유스에서 올라온 페데리코 키에자와 루마니아 최고의 레전드인 게오르게 하지의 아들이자 피오렌티나에 합류한 야니스 하지라는 유망주를 발굴한 것이 수확이었다. 또한 지난 시즌 막판에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크리스티안 테요를 이적 시장 거의 끝나갈 무렵에 간신히 다시 임대로 영입해 전력 누출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영입 - 다비데 아스토리(DF- 칼리아리 칼초로부터 의무 옵션 발동), 바르톨로미 드라곱스키(GK-Jagiellonia Bialystok), 케빈 딕스(DF-비테세), 야니스 하지(MF-비토룰), 흐르보예 밀리치(DF-하이두크 스플리트), 세바스티앙 드 마이오(DF-안데를레흐트), 크리스티안 테요(MF-FC 바르셀로나), 세바스티안 크리스토포로(MF-세비야 FC), 카를로스 살세도(DF-과달라하라), 막시밀리아노 올리베라(DF-페냐롤), 에르난 톨레도(FW-데포르티보 말도나도), 카를로스 산체스(MF-애스턴 빌라)
방출 - 마리오 고메즈(FW-볼프스부르크), 호세 마리아 바산타(DF-몬테레이가 완전 영입), 마르코 바키치(MF-스포르팅 브라가), 마티아스 페르난데스(MF-AC 밀란)[18] , 파쿤도 론칼리아(DF-셀타 비고), 레오나르도 카페찌, 니콜로 파찌(MF-FC 크로토네), 마누엘 파스쿠알(DF-엠폴리), 안테 레비치(FW-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쥐세페 로시(FW-셀타 비고), 마르코스 알론소(DF-첼시)
총평을 하자면 영입 면에서 유망주들을 많이 끌어 모았고 FFP의 문제를 야기하고 큰 똥을 뿌리고 터키로 임대 간 마리오 고메즈와 부상으로 허덕이던 쥐세페 로시를 처분하면서 몸집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즉 피오렌티나는 앞으로 이런 큰 돈 안 들이고 유망주를 끌어 모아 성장을 시켜 수익을 얻는 모델로 가는 듯 싶다. 그렇기 때문에 판탈레오 코르비노같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 명성이 높은 단장을 다시 불러들인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시즌 초반에 강팀들에게 패를 하고, 약팀들을 상대로도 무를 많이 캐는 등 다소 부진한 출발을 하고 있다. 결국 리그 8위로 마무리. 코파 이탈리아도 8강에서 나폴리에게 0-1로 져서 탈락했다. 결국 수자는 본인 스스로 사임을 했다.
22. 2017-18 시즌
ACF 피오렌티나/2017-18 시즌 항목 참조
23. 2018-19 시즌
ACF 피오렌티나/2018-19 시즌 항목 참조
24. 2019-20 시즌
ACF 피오렌티나/2019-20 시즌 항목 참조
[1] 클럽의 역대 최다인 341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고 1982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우승을 이끈 A매치 73회 출장을 자랑하는 클럽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고 있다.[2] 3승19무8패라는 흠좀무한 무재배를 기록했다.[3] 1966년에서 1974년까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유로 1968 우승과 1970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었다.[4] 해당시즌 디에고 마라도나와 같은 골 수였으며, 2000/01시즌 페루자의 마르코 마테라치가 12골을 넣기 전까지 세리에A 수비수 한시즌 최다득점 기록이었다.[5] 2승3무10패인데 이 2승이 챔피언 AC 밀란과 유벤투스이다. 그것도 첫 원정과 마지막 원정경기.[6] AC 밀란에서 임대[7] 바지오 15골, 보르고노보 14골[8] 라이벌이 된 까닭은 1981/82시즌 석연치 않은 준우승 때문이다.[9] 티아고 알칸타라와 라파 알칸타라의 아버지이다.[10] 카타니아의 부정선수 출전 문제로 한바탕 소송전이 있었다.[11] 2004/05시즌 강등을 피하기 위해 라치오와 짜고 경기했다는 의혹[12] 공교롭게도 아마우리가 피오렌티나에서의 데뷔골이자 결승골을 넣었는데 이 골은 유벤투스가 1위로 올라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3] 완전 이적 옵션이 포함된 임대 이적[14] 밀란과의 상대전적에서 1승1무로 앞서있어 밀란이 비길 경우 3위는 피오렌티나의 몫이었다.[15] 몬톨리보, 요베티치, 랴이치, 콰드라도 등등[16] 반 시즌만 치렀는데 팀 내 득점 3위인 리그 6골을 기록했다.[17] 소자 감독이 부임한 뒤로 포지션 플랜이 4-5-1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강이 필수인 포지션의 보강 실패로 3-4-3 포지션 플랜도 사용하게 되는 사태가 생겼을 정도이다.[18] 한 때 FM에서 -10의 포텐을 받았던 그 괴물 유망주였던 칠레 선수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