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로동당
1. 개요
1946년 11월 23일 서울특별시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등 3당 합당으로 결성되어 초창기에는 대중정당을 지향했으나, 결국에는 공산주의 정당. 3당 합당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의 계보를 잇는 정당이다.
잘 알려진 약칭은''' '남로당'. ''' 드물게 '남노당'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2. 결성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들은 불온 단체로 찍혀 강한 탄압을 받아 지하에 숨죽이면서 활동하였다. 대체로 반일 활동과 공산주의 조직화를 병행했다. 대표적으로 경성콤그룹 등의 조직들이 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공식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곧 이어 성립되는 미군정은 소련 군정과 반대로 사상의 자유를 용인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에 터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계기로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을 불법으로 규정한다. 이어 9월 총파업, 대구 10.1 사건(당시 명칭은 대구폭동) 등으로 미군정기 남한에서 좌익 정치 활동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좌익 정치 세력은 남한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재정비 하여 46년 11월에 3당 합당을 통해[1] '''남조선로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2] 초창기 남로당은 적어도 '대중 정당'으로 지향하려고 했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노동당'이란 개념이 공산당의 개념이 아니었다[3] . 대중정당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 이 무렵에 '조선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한 '''여운형이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부위원장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내 주도권 장악문제로 여운형과 박헌영은 지속적으로 갈등하였다. 여운형은 우익세력과 연대해서 좌우합작을 강조했지만, 박헌영은 좌우합작을 반대했다. 박헌영의 시각에서 봤을 때 우익세력들은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고로, 박헌영을 비롯한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여운형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 박헌영 경우는 여운형에 대해서는 아예 사회주의 자체를 포기한 '개량주의자'라고 인식했을 정도였다. 결국 강경파인 박헌영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남로당이 '대중적 정당' 목적으로 3당 합당되었을 당시 여운형, 백남운, 박헌영 서로간의 합당하려는 속내가 다 있었다. 여운형 쪽은 좌우합작을 위한 대중정치로 가기 위해 대중정당 확대를 위해 3당 합당을 원했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는 정판사 사건으로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어서 정치적으로 입지가 매우 좁아져 합법적인 정치활동 상태가 힘들었다.(정판사 사건 전후로 당시 대중들에게 '공산당'이라는 존재는 매우 부정적 인식으로 낙인찍혀있던 상황) 이런 상황에서 조공 재건파가 '합법적' 공간에서 활동할 수 없으니 3당 합당으로 이미지 희석시키기 위해 3당 합당에 응한 것. 3당합당 제안은 여운형에 의해 제시되었으나, 오히려 박헌영이 공산당 프락치를 심어두어 이를 통해 자기 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당을 편제하였다. 당권을 장악한 박헌영이 종래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비판했고, 여운형은 실의에 빠진 채 탈당과 함께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그러나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자, 여운형은 다시 좌우합작운동을 활발히 전개, 남로당 탈당세력(백남운이나 김성숙, 조봉암 등)을 주축으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고, 기존의 남로당 계열의 좌익과는 대립하였다.
3. 남한
3.1. 활동
처음에 남로당은 주로 합법적으로 남한의 공산화 공작을 계속하였다. 남로당 이전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미군정이 공산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남로당 결성 이전에 조선공산당 세력은 9월 총파업 등을 주도해 맞대응했었지만, 남로당 결성 이후 초기에 미군정과의 정면충돌은 피하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각종 파업 등을 주도하였다. 주요 공산주의 운동은 오히려 남한에서 활발하였다. 대표적으로 1946년 10월, 남로당 결성 이전이었던 조선공산당에서 개입한 대구 10.1 사건이 터지기도 한 만큼 한동안은 남로당이 여러면에서 우세했었다. 미군정이 1946년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약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1945년말 까지 이승만, 김구 계열을 적극 지원했지만, 민심들 여론은 최악이었다. 우익세력들은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약했으나,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때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이 본격적으로 전개 및 가시화되자, 남로당은 단독정부수립운동 노선에 반발하여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했던 좌우합작 세력등 중도파 세력들은 여운형 암살 이후 구심점을 잃었기 때문에 사실상 명망 있는 이승만이 주창하던대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4] 기정 사실로 되었다. 결국 중재 역할을 하여 유혈사태를 막고자 했던 중도파가 사라지면서 극좌와 극우 세력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기존의 파업활동을 넘어서 각종 테러나 무장폭동, 게릴라전, 노동자 총파업 등을 주도하면서 남한 정부를 흔들어 놓았다. 대표적으로는 1948년 2.9 총파업 사건이나 제주 4.3 사건, 1948년 여순사건이 발생했고, 14연대 반란군 가운데 주력은 이현상과 합류해 지리산으로 들어가 남부군(조선인민유격대, 즉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3.2. 단속/와해
남로당은 미군정의 1946년 9월 7일 박헌영 등 주요 간부들의 체포령으로 지하조직화 되고 궁지에 몰린 박헌영 일당은 '''월북'''하였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의 야체이카(세포조직)은 와해된다. 1950년 3월에는 남한 내 남로당 핵심 간부였던 김삼룡과 이주하가 검거되면서 완전 붕괴.
그런데 김삼룡과 이주하가 검거당한 과정이 상당히 어처구니없게도 우연하게 검거당했다. 김삼룡을 쫓는 과정에서 이주하를 발견하여 체포.
이후 남한 경찰은 자신들의 공로를 강조하기 위해 갖가지 무용담을 만들어 유포시켰다. 그럼에 따라 남로당원들은 자연히 월북할 수 밖에 없었다. 김삼룡과 이주하는 1950년 6월 북한에 의해 역시 북한에 수감되어 있는 조만식과의 상호교환이 제안되었으나 이는 남침 이전에 벌인 평화공작이자 북한의 기만 전술이었고, 결국 교환합의가 오가는 와중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총살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도 있다.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자신의 직계 부하인 김삼룡과 이주하를 받아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환 공세를 하였는데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자신의 라이벌이 될 만한 사람이자 북한의 저명한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부담스러워하여 소극적이어서 결국 부결되었다는 것이다. 상황적인 논리로만 보면 김일성과 라이벌 관계인 박헌영이 전쟁나기 전에 얼른 자신의 직계 부하들을 받아 오기 위해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승만의 적극성 여부인데 조선 최고의 민족주의자 여운형, 임시정부 최고의 실력자 김구 등에게 어떻게 대접했는지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논리이기는 하다. 이승만은 2인자를 인정하지도 않고 주요 독립운동가 중 실력자들과는 전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주로 경찰과 공무원, 청년들을 장악하여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조만식을 부담스러워했을 개연성 자체는 충분하다. 그러나 검거 시점인 1950년 3월이면 이미 전쟁 개시 시점이 확정된 상황이었고 박헌영이 그토록 직계 부하를 받아오는데 열심이었으면 굳이 3개월씩이나 시간을 끈 다음 전쟁이 임박한 6월에 가서야 맞교환을 제의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한 국가급 협상이 불과 며칠 만에 끝날 사항도 아니다.
이에 더해 남한에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남로당 당원이나 지지자들이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전향서를 찍어서 한국전쟁 중에 숙청당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에는 남로당과는 관계없는 무고한 양민들도 상당히 많이 죽었다. 정치의 'ㅈ'도 모르는 10대 중고교생들도 보도연맹에 반강제적으로 가입되어 학살당했다는 문건이 발견되었다.# 살아남은 극소수 구 남로당 당원 일부는 온건 사민주의 노선으로 전향하고 진보당, 사회대중당 등의 혁신계에서 활동하였다. 반면 혁명 노선을 고수해서 북과 연계한 지하조직 '통일혁명당'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으며, 아예 정치를 접고 생업으로 돌아갔으나 인민혁명당 사건 같은 독재 정권의 체제 유지용 조작 사건의 희생물이 되어 버린 인사도 상당하다.
박정희 같은 경우는 5.16이후 자신의 좌익 경력 때문에 미국이 공산주의자라고 의심하자, 미국의 의심을 씻기 위해서 집권 후 이승만보다 더 강경한 반공 정책을 펼쳤다. 2공화국 당시 활발히 전개되던 평화통일주창 단체들과 이승만 시절 지하에 숨어 있다가 4.19혁명에 뒤이은 대혼란으로 김일성 만세 시위가 날 정도로 활발했던 좌익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반공법을 제정하였다.
4. 북한
4.1. 활동
1950년 4월에는 북조선로동당과 통합, 하나의 조선로동당이 되었다. 동시에 북한 정부의 '무력 적화통일' 노선을 지지하는 단체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남한에서만 신경을 쓰는 사이 북한에서의 주도권은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황.[5] 실제로 남북조선로동당이 합당하여 탄생한 조선로동당의 창립기념일은 합당일이 아니라 북조선로동당(정확히는 조선로동당 북조선 분국)의 창립일로 지정되어 있다. 남로계를 완벽히 무시한 처사라 할 수 있다. 박헌영은 그래도 명목상의 부수상이었다. 월북한 남로당계 인물들이 수천에서 만까지 이르게 있었고 이들에게는 박헌영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월북 남로당계는 박헌영을 그야말로 우상숭배하듯 받드는 인물들이 많았으며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박헌영 헌시나 박헌영 선집이 자발적으로 발간되는 등 인기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헌영은 북한에 넘어오는 순간, 이미 정치생명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름뿐인 부수상 겸 외무상 자리. 박헌영은 실질적으로 김일성 눈치 보면서 정치 활동을 했었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1950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쪽 동지들이 호응하면 남조선 괴뢰는 무너집니다. 스탈린 동지만 도와주면 미국 애들 오기 전에 적화통일이 완료될 것입니다." 라며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정작 김일성은 그 주장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의도적으로 미제간첩 박헌영의 의도적 공화국 전복 기도로 포장하고 있나, 김일성은 박헌영의 '남조선 20만 남로당원 봉기설'을 믿은 것이 아니라 모택동과 스탈린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6] 또한 박헌영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계속해서 김일성과 미군에 휴전 내지 종전을 제안하였으나 김일성은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박헌영의 간첩질과 거짓말 때문에 조국통일전쟁이 실패했다' 라며 일방적으로 박헌영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이 주장이 거짓인 것은 여러 사료가 입증하고 있을 뿐더러, 간첩행위 자체가 김일성 일당의 일방적인 조작이다.
사실 한국전쟁, 6.25가 벌어지기 전부터 대한민국에는 위에 언급한 바 1948년 여순사건(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제정, 국군과 경찰까지 동원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는 잔혹한 토벌 작전을 강행했고, 결국 전쟁 발발하기 몇 달 전의 남로당 세력은 거의 전멸해 버렸다. 그러나 박헌영은 김일성의 지속적인 정치적 공격으로 위기로 몰렸고, 이러한 상황에서 '남로당 봉기설'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전후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서 "미제의 간첩"이란 누명으로 숙청당한다.[7]
4.2. 숙청
1951년을 기점으로 전선은 고착화 되었다. 전쟁을 지속해서 미군의 전비를 고갈시키고, 그 사이에 유럽 전체를 집어삼키겠다면서 휴전을 끝까지 거부한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했다. 유럽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은 마셜 플랜으로 역공당했다. 막대한 전비에 학을 뗀 소련 공산당은 승산없는 전쟁을 매듭짓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UN측에 정전협정을 제안한다. 이를 계기로 정전협정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자연히 미국의 전면 개입이 있기도 전에 적화통일을 한다는 북한의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었고 남한 내에 잠복한 20만 당원 총궐기를 주장하다가 입지가 극도로 좁아진 남로당계에게 덤터기를 씌우게 되는 계기였다.
남로당 숙청과정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게 남로당 2인자 리승엽이 '미제와 내통했다'는 혐의가 시초였다. 그런데 북한에서 리승엽을 '간첩'으로 내미는 증거가 남한에서 박진목과 만났다는 것인데, 그 전개과정에 있어서는 간첩행위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리승엽이 숙청당하고, '리승엽 간첩사건'으로 구실잡은 김일성은 이어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을 숙청할 빌미를 마련했다. 1953년 3월에 박헌영은 부수상직을 상실하고 구속당했다. 그리고 남로당 간부(리강국, 권오직 등)들도 연이어 구속당하게 된다. 휴전 협정 후 1953년에 김남천과 임화 등의 문학가들이 남로당 숙청이 시작되면서 총살당했다. 1953년~1955년까지 2년간 박헌영은 모진 고문을 받고 1955년 12월 북한 재판정에서 '미제의 간첩' 선고받았고, 재판끝난 즉시 남로당 간부들[8] 은 즉결처형당했다. 그러나 박헌영만은 즉시처형을 못했는데, '증거불충분'이었다. 박헌영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게 그를 급히 처형했다가는 소련과 중국의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56년에 8월 종파사건이 터지면서, 김일성이 즉결처형을 지시해, 1956년 7월 19일[9] 처형당했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남로당이 완전 숙청당했다[10]
5. 주요 인물 및 단체
- 박헌영 - 남로당의 수장. 전쟁을 일으키면 남조선에서 25만명이 봉기한다는 주장으로[11] 분명히한국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다. 김일성과 대립했다는 이유로 좋게 봐줄 이유가 없다.
- 여운형
- 이관술
- 허헌 - 남로당 당수. 합법적으로 정치활동 가능했던 시절, '얼굴 간판'용으로 자주 활동했다. 당시 허헌은 변호사 출신으로 김병로, 이인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시기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3인 중 한 명으로 대중들로부터 명망 있던 인물이었다.
- 권오석 - 영부인 권양숙 여사의 부친.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인이다.
- 김달삼
- 이덕구
- 김삼룡
- 이주하
- 리승엽
- 박갑동 - 1919년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나 1941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를 나왔고, 해방일보 기자이자 당 지하총책, 박헌영의 비서로 일했다. 1950년 6.25 전쟁 후 평양으로 8월 종파사건 당시 다른 남로당원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우익으로 전향하여 1992년에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을 결성한 뒤 반북운동을 하고 있다. 2020년 기준 남로당계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인물이다.
- 지창수 - 여순사건 14연대 반란사건 당시 주모자. 계급 상사.
- 박상희 - 박정희의 형이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인. 김종필의 아내 박영옥이 박상희의 장녀이다. 그러나 박상희는 남로당이 결성되기 이전에, 대구 10월 사건 때 경찰의 무력 진압 과정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정확히 보자면, 조선공산당 및 민전에서 활동했다고 보는게 맞다.
- 박정희 -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총책으로써 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을 침투시킨 혐의로 체포되었다. '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총살)을 구형받았으나 백선엽과 일제 육군사관학교 출신들[12] 의 구명 활동, 박정희의 전향서 제출 그리고 군 내부 남로당 조직원 숙청에 적극 협조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최종적으로 무죄방면되었다. 이 경력으로 박정희는 제5대 대선 당시 윤보선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또한 평생 박정희는 미국으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의심을 받았다.[13] 5.16 정변 당시, 2대 주한미군 사령관인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과 사상이 의심된다며, 쿠데타의 성격과 장래가 의심된다고 장면 총리에게 따진다. 하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 당시 미국대와 사관이 보낸 기밀이 해제된 문서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장 먼저 희생당할 사람으로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공정책을 일관적으로 고수하였다”는 평가와 “자신의 정권을 견고히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는 두 가지 평가로 엇갈린다.
- 신불출
- 심영
- 조선인민유격대
- 남부군
- 이재복 -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하는데 한 몫했다.
- 이현상
- 허성택
- 황철
[1]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2] 46년 6월 22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바뀌면서 사실상 분리되었고, 8월 29일 연안파의 조선독립동맹계열이 세운 조선신민당(남조선신민당은 이 조선신민당의 남쪽분국쯤 된다.)과 통합해서 북조선로동당<일명 북로당>이 되면서 기존의 조선공산당의 위치가 약화된 것도 영향을 받았다.[3] 당시 기준으로 '공산당' 이란 소련 공산당의 스탈린주의노선을 명확히 지지하는 이념 정당을 뜻하는 정당명이었고, '노동당'은 이보다는 좀 넓은, 즉 스탈린주의 이외에 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좌파 그룹을 모두 포괄할 수 있고 이념적 선명성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입장 대변을 우선시하는 대중정당을 의미하는 정당명이었다.[4] 분단을 인정하며 국가성립하고 통일을 이루자는 주장.[5] 45년 해방정국에서 한반도의 주요 정치단체들은 대부분 서울로 몰려 들었는데,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역시 서울이 수도가 될 거라는 생각이였는지 주요 인물들이 서울에 모였다. 물론 평남은 기독교와 조만식으로 대표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이 제법 세력을 형성하여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함경도는 토착 공산주의가 제법 강했던 지역이였는데, 토착공산주의세력인 조선공산당 중앙부와 단절되면서 김일성에게 흡수되었다.[6]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7]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의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 이나 《한국현대사의 라이벌》, 〈5. 박헌영과 김일성: 한국공산주의자운동의 두 지도자의 길 (이종석)〉 등을 참고하라.[8] 리강국 등-이들은 재판정 당시 증인석으로 있었다. 북한에서 박헌영을 숙청하기 위해 형식상 증인으로 끌어들였지만…[9] 1955년 12월에 처형당했다고 하지만, 당시 여러 정황 상 보면 7월 19일이 유력하다.#[10] 살아남은 사람으로는 박갑동이 있는데, 이 사람은 사형선고까지 언도 받았으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석방되어 북한을 기적적으로 탈출해 중국,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여 현재 일본 도쿄에서 살며 반북운동을 지휘중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남로당 중요간부 출신이라고 스스로 자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해방정국 시기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이자 남로당 하급간부 출신이다. 남로당 어떤 간부 명단을 봐도 안 나오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쓴 회고록과 주장들은 자신이 직접 겪은 회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사실관계 부분에 잘못된 정보들이 많으므로 걸러 들을 필요성이 있다.[11] 허나 이 주장은 대한민국 내에서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들이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에 의해 멸균 수준의 숙청이 진행되어 위축된 점을 감안하면 오판이었다.[12] 해당 인물들 중에서는 일본 전쟁범죄 협력으로 논란이 된 사람들도 존재한다.[13] "김정렬 회고록"와 “프레이저 보고서”에서 박정희에 대한 사상에 대한 미국의 의심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