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출

 

'''일제강점기 시절'''
'''월북 이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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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신불출, 나품신, 신일선, 성광현
申不出
(1905년 3월 25일 ~ 1976년 8월 2일, 향년 71세)
1. 소개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3.2. 그 외 작품


1. 소개


"만담은 웅변(연설)도 강연도 아니고 재담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장난은 더더욱 아니올시다. 말의 예술인 만담에는 사람의 가슴을 찌를 만한 그 어떤 진실이 필요하외다."

"모란봉에 올라 돌을 던지니 장에 맞더라. 두번째도 장, 세번째도 장, 간장 · 고추장 · 청국장을 빼면 무슨 장(長)이 남나?"

일제강점기 유명한 만담가이자, 연극인, 독립운동가이다. 개성 출신으로 본명은 '''신흥식'''[1]이며, 일본식 이름은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2] 혹은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 창씨개명 때 에헤라 놀아라 투로 '''일본에 항의하기 위해 일부러 엉터리로 지은 이름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창씨개명을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이름을 정한 일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2. 생애


예명인 불출은 ‘이렇게 일본 세상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세상에 나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의미의 불출(不出). 데뷔 초기에 실수가 많아서, 삶에 고난이 많다는 의미의 단어를 딴 신난다(申難多)라는 예명도 있었다. 불출이란 이름도 난다와 같은 의미에서 팔불출의 패러디[3]로 그래서 나왔다는 소수설도 있다.
조선 말기 명창 재담가 박춘재의 공연을 보고는 만담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대 일본유학을 가서 연극을 배웠다. 배우 심영과 달리 일제강점기에 풍자극으로 고초를 많이 겪은 케이스다. "''''''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이므로 우리는 ''''''(倭)를 없애버려야 한다"[4]라는 드립이 대표적. 주로 SP판에 녹음한 만담 음반으로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1930년대 "노들강변"이란 유행곡을 작사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30년대 말에는 아예 대놓고, 도조 히데키, 히틀러, 무솔리니를 풍자한 <망둥이 3형제>를 발표해 금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좌익계열 만담가로 활약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조선영화동맹에 가담하였다.

태극기 중앙의 붉은빛은 공산주의이고, 파란색은 파쇼이며, 그 주변의 4괘는 소련, 미국, 중국, 영국의 4개 연합국입니다. 이 국기를 만들 때부터 우리 민족은 남북이 갈리고 숙명적으로 4개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어 있었죠.… 우리 속담에 ‘큰 코 다친다’는 말이 있는데 코가 더 큰 미국이 결국 쫓겨나게 될 겁니다.

1946년 6월 10일부터 3일간 조선영화동맹과 예술통신사가 주관한 6.10 만세 운동 20주년 기념주간 행사에서 태극기의 4괘를 강대국으로 묘사하면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만담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 김두한과 그의 부하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왼쪽 어깨와 왼쪽팔, 옆구리에 총을 맞았으며 도망을 가다가 과다출혈로 쓰러졌고, 김두한과 부하들은 쫓아가 쓰러진 신불출을 죽이려고 했으나, 목격자들 때문에 김두한 일행들은 신불출을 죽이지 못했다. 신불출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후 신불출은 치안 교란, 연합군 비방 등으로 미군정에게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고, 2만원의 벌금 또는 징역 1년 형을 받게 된다.
1947년[5] 월북해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비난하는 만담을 해댔고[6], 6.25 전쟁 때 대남 선무 방송에도 참여하였다.
1955년 8월 13일에 인민배우 최승희에 다음가는 공훈 배우의 칭호를 받았으며,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를 거쳤고, 1961년에는 신불출 만담연구소를 만들어 소장에 취임하였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으나, 1967년뇌출혈로 안면마비가 와서 1969년에 사망했다는게 북한 당국의 공식 기록이다.
신불출이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북한의 경직된 관료체제[7]를 비판하고, 대본을 사전검열하는 것이 대단히 불편하게 여겨서 특별히 무검열을 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간 본명과 생몰년조차도 정확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도 있다.
탈북자인 김영순[8]의 말에 따르면 정치적인 이유[9]1962년숙청을 당하여 요덕 수용소를 거쳐 1976년경에 사망했다고 한다. 김영순이 그를 본 것은 죽기 직전인 1972년으로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도 만담으로 동료 수감자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을 정도였지만, 결국 영양실조아사했다.
그 외에도 수감 당시에 납북 어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만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같은 시대를 지낸 정상진 전 북한문화선전상 제1부상의 증언도 비슷하다. 그러나 북한에서 숙청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그러하듯, 확실히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일례로, 김정일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김영주의 경우도 오랫동안 "숙청 후 탄광행" 설이 있었지만 단순히 한직으로 물러났을 뿐 '''아직도 살아있다'''.
다만 김정일도 그의 만담을 좋아하여, 1995년에 그의 만담집을 출간하는 등 최소한 공개적으로는 숙청이 알려지지 않고, 격하도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정말 입담 하나는 대단했던 인물.# 지식채널 e에도 나왔다.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2002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선 희극인 김종국이 신불출 역을 맡았다. 자세한 내용은 신불출(야인시대) 참조. 정작 배우 본인은 신불출과는 극과 극으로, 유오성[10]과 함께 대표적인 보수 성향 연예인이다.

3.2. 그 외 작품


2013년,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에서 추방당한 찰리 채플린이 꿈속에서 검열없는 나라를 찾아다니던 중 우연히 미군정기 한반도에 들렀다가 신불출을 만난다는 내용의 희곡 '레드 채플린'이 발표되었다.
영화 '동주'의 제작자인 신연식 감독은 '동주'를 시작으로 20세기 한국 예술인들의 삶을 영화화한 '예술인 프로젝트'를 장기간 진행할 계획인데, 3편으로 신불출의 젊은 시절을 영화화한다고 한다.

[1] 혹은 남한에서는 본명은 신영일로 알려졌고, 북한에서는 본명이 신상학으로 알려져 있다.[2] 玄(검을 현)과 田(밭 전)을 합치면 畜(가축 축)이 되고, 牛(소 우)와 一(한 일)을 합치면 生(날 생)자가 된다. 즉, 일본의 욕설인 '칙쇼(畜生)'를 파자한 것이다.[3] 이 때문인지 야인시대에서 자기 이름인 불출을 가지고 개그를 치는 모습이 나온다.[4] 조사 "왜"와 한자 "왜(倭, 즉 왜구)"를 이용한 말장난 [5] 홍명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있다.[6] 여담이지만, 시대가 정확히 겹쳐서 이승만은 대놓고 신불출의 주된 조롱거리가 된다. '나라 판 돈 꿀떡, 하는 짓은 개떡, 동포들이 미워하니 먹을 것은 양(洋)떡, 나자빠질때는 모두 벌떡벌떡'.[7] '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이가 너무 많은 북한의 관료체제.[8] 최승희의 제자, 성혜림의 동기.[9] 남로당 잔당.[10] 작은형이 유상범미래통합당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