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구성국
1. 개요
가야의 구성국을 정리한 문서.
2. 구성국
- 변한 이후 건국 시기 (42~115):구야(금관), 반로(대가야), 고자(소), 안야(아라), 성산, 고령, 고순시, 미오야마, 주조마, 낙노, 미리미동, 감로, 독로, 접도, (다벌), (비지), (초팔) 총 14~17여개국
건국부터 신라와의 전쟁까지 시기로 변한의 체제가 거의 유지되어있으며 맹주는 없다
- 초기 (116~215): 구야(금관), 반파(대), 고자(소), 안야(안라), 성산, 고령, 비자발(비화), 감로, 독로,미오야마, 고순시, 주조마 , 낙노, 미리미동, 접도, 다라, 탁순, 사물, 골포, 칠포, 보라 총 21여개국
- 전기 (285~400): 구야(금관),반파(대) , 고자(소), 안야(아라), 성산, 비자발(비화), 다라, 탁순, 사물 총 9여개국
포상팔국의 난 이후 그 여파로 대부분의 가야가 구야국,안야국에 통합되었으며 낙랑,대방에 철을 수출하고 백제,왜와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맹주는 구야와 안야의 공동 체제이나 구야국이 안야국보다 조금 앞섰다
- 와해기 (400~475):남가라(금관), 반파(대), 고자(소), 안라(아라), 비자발(비화), 다라, 탁순, 사물, 잡라, 탁, 대사 총 11여개국
- 중기 (479~532): 남가라(금관), 대가라(대가야),구차(소가야), 안라(아라), 다라, 거열, 임례, 자타, 걸손, 졸마, 사이기, 산반하, 탁순, 탁기탄, 사물, 상기문, 하기문, 상다리, 하다리, 모루, 대사, 사타 총 22개국
- 후기 (529~548): 대가라, 구차(소), 안라(아라), 다라, 거열, 임례, 자타, 걸손, 졸마, 사이기, 산반하, 사물 총 12개국
백제가 영산,섬진강 일대의 가야 7국을 모두 섬멸하고 전라도를 장악했으며 신라 또한 가야 진출을 시작해 금관가야가 멸망했다. 이 시기 안라회의를 통해 안라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대가야는 맹주의 지위를 거의 다 잃어 안라국이 가야를 이끄는 시기이다
- 말기 (554~562): 대가라,안라(아라),다라 총 3개국
소가야가 멸망했으며 사비회의, 독산성전투로 인해 안라국은 백제의 식민지 격으로 전락한다.
이후 관산성 전투를 기점으로 대가야마저 쇠퇴했으며 신라가 가야 진출을 가속화하여 거열국을 비롯한 가야의 소국들이 모두 멸망한 상황이다.
이후 관산성 전투를 기점으로 대가야마저 쇠퇴했으며 신라가 가야 진출을 가속화하여 거열국을 비롯한 가야의 소국들이 모두 멸망한 상황이다.
2.1. 초기 구성국
위의 기록에 따르면 변진 지역에는 24개 국가가 있었던 듯 보이나, 개중에 '사로국'(신라)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때 진한의 국가들까지 한꺼번에 센 듯 하다. 일반적으로 앞에 변진이 붙은 12개 국이 초기의 가야로 추정된다.변진도 12개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은 번예(樊濊)가 있고, 그 다음은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 이니 '번', '진한'을 합쳐 이십 사개국이다. 이 중에 큰 나라는 4천 ~ 5천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6백 ~ 7백호가 되어 총 호수가 45만호가 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
2.1.1. 전기 가야
[image]
김해 금관국(금관 가야) 중심이었던 4세기 이전의 가야 연맹.
2.1.2. 후기 가야
[image]
해당 지도의 참고자료 -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김태식 저서, 푸른 역사, 2002년. 위의 자료도 똑같다.
고령 반파국(대가야) 중심이었던 5세기 이후의 가야 연맹.[14]
2.2. 삼국유사의 6가야
삼국유사에 언급된 6가야가 가장 유명하며 1970년대쯤까지는 가야가 6개 정치세력으로 구성되었다고 정설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적어도 10개 이상의 독자적 세력이 존재했던 것이 증명되어 학계에서는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정작 이 중 고령가야, 성산가야 등은 현재는 실제 가야 계통 국가조차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전기가야만 해도 최소 15국이 넘고 후기가야 번창기 당시에는 22개국에 달하기 때문에 합치면 35국 정도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먼 훗날인 후삼국시대 지방 호족들이 반신라 기치를 내걸면서 몇몇 영남 지역의 호족들은 가야의 후손임을 기치로 내걸었는데, 그것이 고려 초에 6가야로 명칭이 굳어진 것을 일연이 삼국유사에 기록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육가야조이고, 가야 시조를 논할 때 6개의 알에서 6명의 알, 6개의 가야라고 하는데 어째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산 가야까지 7가야이다(...). 이는 본조사략판 5가야에서는 대가야와 소가야가 빠지고 비화가야가 그 대신 들어가는 것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고고학적으로는 고령 대가야, 고성 소가야, 창녕 비화가야 모두 실제로 존재한 나라가 분명하다.
그리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범위를 특정하고 있는데, 가야산 이남, 낙동강 서쪽으로 한정하고 있어, 당장 육가야조랑 충돌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산 가야, 고령 가야가 있다는 위치가 엄연히 가야산 이북이고, 그리고 낙동강 동쪽에 비화 가야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 현재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의 영역 범위는 특정 시점, 즉 6세기 중엽의 가야 영역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다. 가야는 수백년동안 존재했고 그 범위도 조금씩 바뀌었으니. 그리고 애초에 삼국유사 자체가 관찬 정사도 아니고, 엄격한 사료 비판을 추구하는 사서가 아님을 유의하자.
현재 알려진 것으로 삼국유사의 6가야 중 금관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대가야, 아라가야는 가야 계통의 국가가 맞다. 성주(성산가야), 상주(고령가야)에 있던 소국들은 일찍부터 경주에서 시작한 신라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가야로 불린 일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에서 말했다시피 나말여초 이 지역 호족이 신라에 대항하여 가야를 참칭하면서 삼국유사에는 6가야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런 이름들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가락국 수로왕 건국 신화에 덧붙여진 6란(六卵) 설화에 덧붙여진 것인데, 그 6가야의 개념은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후고구려나 후백제와 같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가야' 형태의 국명은, 그들이 소국으로 존재할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옛날에 가야연맹 중의 하나인 금관국(金官國), 아라국(阿羅國), 고동람국(古冬攬國), 성산국(星山國,) 비화국(非火國)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이다.(http://tour.gimhae.go.kr/08history/09_01.jsp)
6가야는 42년에 건국되었으며 금관가야는 532년, 대가야는 562년. 소가야는 554년경, 아라가야는 561년경에 멸망했으나 성산, 고령가야는 알 수가 없다. 물론 성산가야는 400년 경, 고령가야는 비슷한 위치의 가야인 변진 감로국이 멸망하는 231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몇몇 사람들은 성산가야와 고령가야가 같은 존재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확실한 게 아니다.
본조사략의 5가야 목록은 가락국기 6가야 기록에서 바로 이어진다. 다른 목록은 가락국기의 소개와 겹치는데 대가야와 소가야가 빠지고 비화가야가 포함된 것이 차이점.
2.2.1. 금관국[17]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국가.
시조는 김수로왕[18] 이다. 4세기 이전에는 명실상부한 변한-가야의 으뜸 국가로, 한때 경주시-울산 권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사로국(신라)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던 국가. 2세기 ~ 4세기 낙동강 하구의 철 매매를 통해 부를 축적했고 이를 통해 가야에 지배력을 행사할 만큼 국력이 신장된 것으로 추정된다.[19]
그러나 400년경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큰 타격을 받아서 멸망까지는 아니지만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이후 가야의 주도권은 낙동강 상류 내륙의 반파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6세기 초에는 금관국 왕이 신라의 수도 경주시에 입궐하는 등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가 531년경 일본서기에 기록된 '혼인동맹 결렬 사건'으로 인해 대가야의 통제력이 흔들리고, 금관국과 탁순국 등 신라와 인접한 소국은 더이상 신라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532년 마침내 금관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면서 병합되었다.
2세기 ~ 3세기에는 구야국으로, 4세기 ~ 5세기에는 가라, 임나, 수내라, 소내라[20] 등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에서 금관국이라고 하였다. 금관국은 주로 4세기 이후부터 멸망 이전까지 사용된 이름으로 보이며, '가라'가 고령 반파국을 가리키는 명칭이 된 이후 남쪽의 가라라고 해서 '남가라'라고 칭해진 것으로도 보인다. 가야 후기에 반파국이 주도권을 잡은 뒤에도 이진아시 신화나 '가라'(반파국) - '남가라'(금관국) 등의 이름으로 보아 다른 가야계 국가들과 금관국과의 연결 고리는 꾸준히 강조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몰락한 뒤에도 '원래 맹주'로서 한동안 가야 국가들 중에서는 무언가 주변에 어필하는 힘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왕 구형왕(김구해)은 김유신의 증조 할아버지(김구해 - 김무력 - 김서현 - 김유신)로 금관국 왕족은 '신김씨'로서 신라의 주요 귀족가문으로 정착한다.
2.2.2. 반파국[21]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었던 국가.
흔히 '''대가야'''로 알려진 국가. 『삼국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변진반로국'의 이름과 거의 흡사[22] 해서 반로국의 뒤를 잇거나 명칭을 바꾼 국가로 생각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전기 가야 시기에는 여러 소국 중 하나 정도의 위상이었지만 5세기 이후 '가라'라는 대표성있는 이름을 금관국에서 탈취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금관국은 이 시기에 대한 일본서기 기록 등에서 '남가라'로 나타난다.
그전에도 고령에는 소국이 있었지만 5세기 들어 성장하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에는 백제가 고구려에 털리는 혼란기인 틈을 타서 지금의 전남 동부 산지와 섬진강 일대, 광양만 앞바다까지 진출하고, 가야 일대 대부분 지역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이나,[23] 고구려가 내전과 돌궐과의 싸움으로 전성기가 끝나고 다시 백제가 국세를 회복하여 섬진강 일대로 압박을 가해오고 6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의 힘싸움 사이에 줄타기 외교로 버티다가 550년대에는 백제 편을 들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에게 백제와 함께 세트로 깨지고, 결국 이사부, 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562년 멸망한다. 이 나라가 신라에 정복되는 서기 562년을 일반적으로 '가야'가 완전히 소멸한 해로 파악한다.[24] 고령에는 신라 정복 이후로도 기존 고령 스타일의 묘제가 규모는 줄지만 계속 남아있어 토착재지세력은 신라에서도 상당기간 귀족으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2.3. 안라국[25]
安羅國. 현재의 함안군에 위치했으며, 흔히 아라가야(阿那加耶)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이며, 《호태왕비문》과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로서 등장한다.(호태왕비의 안라인수병 구절을 안라국으로 파악한다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선 《가락국기》를 인용해서 아시량국(阿尸良國)이라 기록했다.
특이하게 명칭 논란이 많은 곳으로, 아라가야, 안야국, 안라국 등이 대립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아나가야', 삼국유사 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 일본서기에는 안라와 아라가 같이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원삼국시대 명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 된 변진안라국에서 따와 안라국으로, 삼국시대에는 아라가야로 나눠 그 구분하는 경향도 있다.
반파국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하는 후기 가야 때도 가야세계의 서남쪽에서 나름대로 독자적 권역을 유지했고, 안라왜신관을 통해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주권 보존을 위해 줄타기 외교를 시도했던 부분적 기록이 일본서기에서 간접적으로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531년경에 백제가 안라에 성을 쌓을 정도로 백제 치하의 영향권에 놓이기도 하고, 나중에 관산성 전투로 백제가 깨진 이후 신라가 561년 이 지역에 왜군을 견제하기 위한 성을 쌓는 걸 봐서 그 시기를 전후해서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블로그 참조.
2.2.4. 고자국[26]
古資國.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 소가야로 알려져 있는 나라. 고사포국, 고자미동국, 고차국 등 여러 표기가 있다. 가야국가 중 가장 바다에 가까운 지역에 자리잡았고 소가야계 유물이 서울 풍납토성, 신라, 일본 북규슈 지역에서도 다수 출토되는 등 작지만 활발한 해상교역을 펼쳤던 나라다.
2.2.5. 벽진국[27]
碧珍國. 지금의 경북 성주군에 위치하였던 국가로 비정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 이후부턴 신라의 영향을 받은 신라토기와 신라형 장신구가 잔뜩 나와서, 가야에 속한 적이 있는지 의문이 있다.(김세기 (2014년), 고분 자료로 본 삼국 시대 성주 지역의 정치적 성격) 《삼국사기》에 "본피(本彼)"라 나오나, 여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특히나 신라 6부 중 하나인 진지부의 이름이 본피부라 6부의 기원을 진한 소국으로 보는 연구자들은 이 지역을 본피부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2.2.6. 사벌국[28]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29]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 연맹의 하나... 지만 6가야 중에서도 가장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사벌국 문서 참조.
2.2.7. 비지국[30]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불사국(不斯國)"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다른 가야가 거의 변한 영역이었던 것과 달리 경계에 가까운 창녕지역의 특성상 기록마다 진한과 변한을 왔다갔다하는데, 삼국지에 표현된 원삼국시대에는 진한 소속이었으며, 신라와 가야 분화기에 가야로 넘어와 비화가야로 불리다가, 다른 가야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인 5세기 말쯤에는 완전히 신라로 편입된다. 《삼국사기》에는 비사벌(比斯伐), 《삼국유사》에는 비화(非火)[31] , 《일본서기》신공기에는 "비자발(比自鉢/ひしほ/pisipo)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32]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이며, 나라 자체는 듣보잡이긴 한데... 문헌 기록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문헌 기록과 다르게 고고학 자료로 본다면 듣보잡 수준은 아니다. 창녕 지역에는 지역군 별로 봉분 직경 20m ~ 30m[33] 최대 40m급[34] 이상의 고총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창녕 박물관 뒤에 있는 교동 고분군만 가도 그 위세를 짐작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정도 급의 고분이 계성 고분군, 송현동 고분군, 영산 고분군 등 구역별로 존재하고 있다. 금동관 관모, 금제 이식, 환두 대도 등의 위세품과 토기류 등도 수백점에서 수천점 이상이 매납되었다. 토기의 양식도 독자적인 형태를 신라에 완전히 흡수되는 5세기 말까지 유지한다. 현재의 고고학적 연구성과로는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써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창녕 지역에 많은 지원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정복한 뒤 창녕 척경비를 세워 유명하다.
2.3. 기타 가야 제국
2.3.1. 다라국[35]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던 나라. 합천군 쌍책면 다라리가 다라국의 이름을 이은 것으로 비정된다. 옆의 성산리에 있는 옥전 고분군이 다라국의 수장급 묘지로 생각된다. 초기에는 창녕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후기에는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대가야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옥전 고분군에서 대가야 토기와 위세품 뿐만 아니라 백제 관모나 신라 마구와 이식 등의 위세품도 출현하고 있어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이들과 균형적인 외교를 펼치고, 어느 세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이권을 챙긴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스위스 같은 포지션...이러한 현상은 합천 지역이 가야, 신라, 백제 이들 세력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대가야로서는 합천 지역이 넘어가면 적이 코 앞에 들이 닥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흥망을 좌지우지 되기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신라의 경우 가야를 넘어 전라도 동남부 지역의 백제 지역으로 진출 할 수 있는 전진 기지로 이용 할 수 있다. 백제는 가야를 정복함과 동시에 신라의 서진을 막을 수 있다. 이곳에는 대규모의 철 생산 유적 또한 존재하고 있어 가야의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 인 것으로 생각된다.
2.3.2. 초팔국[36]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에 있던 나라. 역시 다라국과 비슷한 시기에 대가야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본기에는 원삼국시대에서도 극초기인 파사 이사금 때에 다벌국, 비지국과 함께 정복되었다고 쓰고 있으나, 후대의 일을 가져다 붙인 것으로 보이며 그 기년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분지 지형으로 가히 미나스 티리스를 연상시킨다.
일본서기에는 다라국이 나오고 실제 다라리라는 지명이 지금도 내려와서 현재 고고학계는 이 지역 정치체를 다라국으로 보고 있다.
2.3.3. 탁순국[37]
<양직공도> 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의 '탁순국(卓淳國)'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녹순(㖨淳)이라고도 하는데, 녹과 탁이 통하는 것을 놓고 신공황후 신라 정벌 기사의 녹국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탁순 = 녹순 - 녹국 - 탁기탄 = 녹기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1970년대까지는 '달구벌'의 음차라는 설이 주류를 차지하여 대구광역시설이 득세하였으나, 최근에는 창원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일각에서는 의령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무튼 일본서기 기록의 정황상 가야지역에서도 신라와 가까운 동쪽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된다.
시조와 왕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리사등이 마지막 왕으로 추정되는데, 숭신 천황기의 '도노아아리사등'과의 관계 문제 등으로 인해 '고유 명사가 아니라 일반 관직명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4세기의 말금한기(末錦旱岐)를 군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가야의 군주명으로 '한기'가 쓰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말금'을 '마립간' = '매금'과 통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가야의 군주를 일컫던 '한기'를 포함해 일반 군주 칭호만 두 개 이어지는 괴이한 칭호가 된다.
일본서기 신공기 46년(366년)기사에선 백제가 왜와 교류하기 위해 탁순국이 도와줬으면 한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탁순국의 말금한기는 백제 사신에게 왜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백제 사신의 말을 왜 사신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탁순 사람 과고를 보내어 왜국 사신의 시종을 백제에게 안내하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고 심지어 신공기 49년(369)년 기사에서 탁순국이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는 기사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로 보아 일본과 백제 사이에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지만,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자 백제와는 여러가지로 안 좋은 관계가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안라회의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보게 되면 아리사등이 친신라정책을 펼치던 대가야의 뜻을 거스르고 신라의 스파이들을 모두 내치는 것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기 가야 연맹에서 나름대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창원 반계동 고분군이 탁순국과 '관련' 되어 있다. 탁순의 중심 고분군으로 비정하기에는 유구의 크기나 유물의 부장량이 적다. 반계동 고분군 보다는 규모와 유물 부장면에서 탁월한 창원 가음정동 고분군이 탁순의 중심 고분군으로 설정 되는것이 옳다고 본다. 23호분에서는 고령 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 꼭지 뚜껑 단각고배 등이 출토되어 대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수 있고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계 등의 철기들이 출토되어 금관국과 더불어 철기 생산의 요충지 였음을 알수 있다.
2.3.4. 탁국[38][39]
아래의 탁기탄과 같은 나라라는 설과 별개의 나라라는 설이 있다. 탁국의 마지막 왕으로 함파한기(函跛旱岐)가 있었는데, 6세기 신라가 가야를 접수하려는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보이자 그가 신라에 내응해 탁국이 멸망했다고 한다.
2.3.5. 탁기탄[40]
6세기 가야의 멸망과정 중에 '''신라에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 ('''백제에 먼저 망한 가야는 많다.''')
정확한 위치는 여러 설이 있는데 신라와의 경계지역인 낙동강 주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로 밀양,부산,김해,영산으로 추정
2.3.6. 기타 문서가 있는 가야
[1] 구야국, 금관가야[2] 대가야[3] 아라가야[4] 소가야[5] 성산가야[6] 고령가야[7] 비자벌(比自火)또는 비화가야[8] 多羅國[9] 草八國[10] 卓淳國[11] 㖨國[12] 탁기탄과 같은 나라라는 설이 있다.[13] 啄己呑[14]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해안 지역에 위치한 금관 가야가 약화됨으로써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가 그 대신 가야 연맹을 주도하게 된 것이 원인.[15] 여기에 합천 박물관이 있다. 홈페이지 : http://mus.hc.go.kr/main/[16] 진주목과 거창현의 옛 지명이 거열이므로 서로 겹친다. 거열은 거타라고도 한다. 자타는 코타라고 읽힌다.[17] 구야국, 금관가야[18] 김해 김씨의 시조[19] 후기 주도권을 잡은 대가야에는 금관국과 대가야의 시조가 본래 형제라는 건국 신화가 있는데 이는 금관국이 가야 일대에 영향력이 컸고, 몰락한 뒤에도 부잣집은 삼 년은 간다는 말처럼 가야권 안에서 상징적인 역사성을 인정받았으며, 동시에 후기에는 사실상 주도권이 대가야에게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20] 순우리말 쇠나라에 해당하는 고대 한국어의 음차로 지금의 '김(金)'해 명칭과의 연관성을 추정하기도 한다.[21] 대가야[22] 반로국(半路國) / 반파국(伴跛國)[23] 단 안라국, 고자국, 쇠퇴했지만 명맥은 유지하던 금관국과 탁순국 등 남동쪽의 일부 나라들에는 고령계 토기가 거의 침투하지 못한 것을 봐서 반파국의 전성기에도 반파국은 내륙 소국들만 확실히 통제했고 먼 지역은 문헌기록상으로 약간의 영향력은 있었지만 거의 따로 놀았던 것으로 보인다.[24] 여러 가야계 소국의 멸망 기사가 하나하나 문헌에 남아있지는 않아서, 대가야가 딱 마지막으로 멸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네 대장격인 대가야가 어이없이 무너지면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대거 항복해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5] 아라가야[26] 소가야[27] 성산가야[28] 고령가야[29] 혹은 경상남도 진주시의 자타국으로 추정되기도 한다.[30] 비자벌(比自火)또는 비화가야[31] 비화가야라고도 불린다[32] 고대 일본어의 ハ행은 h음이 아니라 p음, 순음퇴화 이후에 지금의 음으로 변화했다.[33] 이전 문서에는 10m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직경 10m 정도는 아주 흔하다(...). 물론 창녕군은 영남 지역에서 가장 큰 고총군을 보유하고 있다.[34] 낙동강 이동 지역에는 경주와 의성, 창녕 뿐이다. 고총의 크기 = 국력 혹은 정치력으로 완벽히 등치시킬 수 없지만, 최근의 연구성과는 고총과 국력, 묘주의 위계가 어느 정도 상관 관계가 있다는걸 말해주고 있어, 창녕 정치체, 즉 빛벌의 국력이 상당헀음을 알게한다.[35] 多羅國[36] 草八國[37] 卓淳國[38] 㖨國[39] 탁기탄과 같은 나라라는 설이 있다.[40] 啄己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