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풍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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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개성특별시에 존재하는 구역. 개성특별시의 교외지역으로, 고려왕조 시대의 왕릉과 유적이 많다.
개풍군이었던 2003년 6월에 개성직할시에서 분리되어 황해북도로 편입되었으나 3개월 뒤 개성직할시가 황해북도의 특급시로 격하될 때 개성특급시에 편입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성특별시 승격 이후인 2020년 4월 경 구역으로 복구된 것으로 확인됐다.
직선거리 기준으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의 행정구역이었다. 김포시의 애기봉전망대나 파주시의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북한 땅이 이곳이다. 서울시계까지의 최단 직선거리도 약 24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1] 하지만 이 림한리는 현재 판문구역에 속하게 되었다.
해풍 김씨의 해풍이 여기의 옛 지명이다.
2. 역사
고려 이전 신라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개풍군 지역이 개성군이었고, 지금의 개성특별시 중심부는 송악군이었다. 개성특별시/역사 문서도 참조.
고려시대에 왕건의 연고지 송악이 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사실상 개성과 송악은 같은 도시를 이르는 명칭으로 혼용되었고 개풍군 지역은 수도 개경의 외곽 지역이 되었다.
원래 개풍군 전역이 개성군이었으나, 1930년에 개성군의 중심부 송도면(松都面)이 개성부로 승격됨에 따라 부외(府外)지역을 개풍군으로 개칭했다. '개풍'이란 명칭은 기존 명칭인 '개성'과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개성군에 병합된 옛 고을 '풍덕'에서 앞 글자를 딴 것이다. 광복 당시에는 14면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군청은 개풍군 영역이 아닌 개성시 용산동에 두고 있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영남면·영북면·북면을 제외하고는 38선 이남이어서 남한 지역이었지만 1953년 휴전협정으로 전 지역이 북한 영토가 되었다. 북한은 토성면 토성리를 개풍읍으로 바꾸어 군소재지로 삼았다. 개성직할시가 설치되자 개성직할시에 속했다가, 2003년 6월 2일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다.
그 사이 2002년 11월 13일 판문군이 폐지되면서 판문군에 있던 상도리, 대련리, 화곡리, 령정리, 신흥리, 월정리, 조강리, 림한리, 덕수리, 대룡리가 개풍군에 흡수되었다.
2003년 9월 개성시가 황해북도 산하의 특급시로 격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3년 10월에는 개풍군 해선리 전역과 연릉리, 고남리, 오산리, 상도리 일부가 개성특급시에 편입되었다. 이어 2004년 2월에는 개풍군으로 편입되었던 구 판문군 영역의 상도리, 대련리, 화곡리, 령정리, 신흥리, 월정리, 조강리, 림한리, 덕수리, 대룡리 등 10개 리, 그리고 장풍군으로 편입되었던 선적리가 개성특급시로 편입되었다.
2005년 9월에는 개풍군 개풍읍을 개풍동으로 승격하는 대신 개풍군을 완전히 폐지해 개성특급시로 편입시켰다. 돌고 돌아 장풍군을 제외하고는 다시 개성으로 환원된 셈이다.[2]
이 때문에 2008년 유엔이 시행한 인구 센서스에서도 개풍군은 찾아볼 수 없다.[3]
그러다가 2020년 4월 로동신문을 통해 개풍구역으로 복구되었음이 확인됐다.[4] 다만 2002년 포함됐던 구 판문군 일부 지역이 다시 판문구역으로 떨어져 나갔다. 2003년 10월 개성시로 편입됐던 해선리, 연릉리, 고남리, 오산리는 개풍군으로 환원되지 않고 그대로 개성시에 잔류한 것으로 보인다.[5]
3. 교통
철도역으로는 경의선 개풍역(개풍동), 려현역(려현리)이 있다. 철도지선이 3갈래로 지나가는 나름 교통의 요지이다.
4. 기후와 풍토
아무래도 서울특별시보다는 춥다. 남부 평야지대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지만 영남면, 영북면 등 북부 산지는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물론 북한에서야 강원도~함경남도 동해안 일대와 더불어 가장 따뜻한 기후에 속한다. 경기도 파주시 정도가 가장 비슷한 느낌이다.
5. 산업
개풍군은 개성인삼의 본산지이다. 아울러 복숭아의 재배도 흔하다.
6. 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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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
경기도에 속한 군으로, 본 군의 예성강 연안은 옹진군과 강화군이 1995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된 이후 경기도의 최서단 지역으로 되었다.
6.1. 구 개성군 지역
- 남면(南面)
면소재지는 신리이다. 1914년 개성군 상남면과 하남면이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남서쪽으로 한강에 접하며, 서쪽으로 예성강을 건너 연백군을 바라본다.
소속 리 : 신(新)·군은(軍隱)·창릉(昌陵)[7] ·후석(候石)·율응(栗鷹)·조제(照濟)·옥산(玉山)·장산(狀山)·수우(修隅)
소속 리 : 신(新)·군은(軍隱)·창릉(昌陵)[7] ·후석(候石)·율응(栗鷹)·조제(照濟)·옥산(玉山)·장산(狀山)·수우(修隅)
- 북면(北面)
면소재지는 여현리이다. 1914년 개성군 강남면과 북서면이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광복 후 면 남부지역이 남한지역이었으나, 6.25 전쟁 후 북한지역이 되었다. 서쪽에 예성강이 흐른다. 여현리의 려현역은 38선 바로 북쪽에 있어서 한때 남북 간의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여현리에 종유동굴이 있다.
소속 리 : 여현(礪峴)·일삼소(一三所)·이소(二所)·용현(龍峴)·가토미(加土尾)·식포(食浦)
소속 리 : 여현(礪峴)·일삼소(一三所)·이소(二所)·용현(龍峴)·가토미(加土尾)·식포(食浦)
- 상도면(上道面)
면소재지는 풍천리이다. 1914년 개성군 군북면이 상도면으로 개칭되었다. 구릉이 기복되는 지대로, 왕릉은 아니지만 풍천리에 조선 태조의 첫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齊陵)이 있다.
소속 리 : 풍천(楓川)·삼인(三仁)·상도(上道)·양사(羊司)·연동(蓮洞)·대릉(大陵)
소속 리 : 풍천(楓川)·삼인(三仁)·상도(上道)·양사(羊司)·연동(蓮洞)·대릉(大陵)
- 서면(西面)
면소재지는 광정리이다. 서쪽으로 예성강이 흐른다. 개성리 산162 소재 백송은 천연기념물 81호이나, 미수복지역에 있음을 사유로 해제되었다. 강리에 개풍향교가 있었다. 연산리에 고려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碧瀾渡)가 있다.[8]
소속 리 : 광정(光井)·연산(蓮山)·강(江)·개성(開城)[9] ·전포(錢浦)
소속 리 : 광정(光井)·연산(蓮山)·강(江)·개성(開城)[9] ·전포(錢浦)
- 영남면(嶺南面)
면소재지는 용흥리이다. 1914년 개성군 영남면이 동부면을 흡수하여 형성되었다. 개성 시가지 북쪽에 있다. 용흥리에 복원된 영통사가 있다. 또한 영남면에는 고려시대에 현화사가 있었다.
소속 리 : 용흥(龍興)·소릉(昭陵)·반정(伴程)·심천(深川)·현화(玄化)·대원(大院)
소속 리 : 용흥(龍興)·소릉(昭陵)·반정(伴程)·심천(深川)·현화(玄化)·대원(大院)
- 영북면(嶺北面)
면소재지는 길수리이다. 길상리 천마산에 대흥산성이 있으며, 부근에 박연폭포가 있다.
소속 리 : 길수(吉水)·길상(吉祥)·고덕(古德)·월고(月古)
소속 리 : 길수(吉水)·길상(吉祥)·고덕(古德)·월고(月古)
- 청교면(靑郊面)
면소재지는 양릉리이다. 개성의 바로 남쪽 교외이므로 왕릉과 유적이 많다. 소설가 박완서의 출신지.
소속 리 : 양릉(陽陵)[10] ·탄동(炭洞)·배야(排也)·유릉(裕陵)[11] ·광답(廣畓)·묵송(墨松)
소속 리 : 양릉(陽陵)[10] ·탄동(炭洞)·배야(排也)·유릉(裕陵)[11] ·광답(廣畓)·묵송(墨松)
- 토성면(土城面)
면소재지는 토성리이다. 1914년 개성군 중서면이 서부면을 흡수하여 형성되었고, 1938년 토성면으로 개칭되었다. 토성리는 토성역의 소재지로, 북한 치하에서 개풍군의 중심지가 되었다(개풍읍). 개성의 서쪽 교외이므로 왕릉과 유적지가 산재하는데, 여릉리에 고려시대에는 국청사가 있었고, 현재 고려 태조 왕건의 릉인 현릉(顯陵), 공민왕의 현릉(玄陵),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이 소재한다.
소속 리 : 토성(土城)·여릉(麗陵)·곡령(鵠嶺)·연하(煙霞)
소속 리 : 토성(土城)·여릉(麗陵)·곡령(鵠嶺)·연하(煙霞)
6.2. 구 풍덕군(豊德郡) 지역
풍덕은 원래 '해풍(海豊)'과 '덕수(德水)'의 두 고을이었다가, 조선 세종 때 통폐합되면서 해풍의 '풍'과 덕수의 '덕'을 따서 명명되었다.
- 광덕면(光德面)
면소재지는 고척리이다. 1914년 풍덕군 서면과 군중면의 일부가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남서쪽으로 한강을 건너 강화도를 바라본다. 과거 경천사가 중련리에 소재해 있었고 경천사 10층 석탑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소속 리 : 고척(高尺)·중련(中連)·광덕(光德)·황강(黃江)·사분(寺盆)
소속 리 : 고척(高尺)·중련(中連)·광덕(光德)·황강(黃江)·사분(寺盆)
- 대성면(大聖面)
면소재지는 풍덕리이다. 1914년 풍덕군 군내면과 군중면의 일부가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구 해풍현 및 풍덕군의 중심지로, 남서쪽으로 한강을 건너 강화도와 마주한다.
소속 리 : 풍덕(豊德)·대성(大聖)·삼달(三達)·고도(古都)·산귀(山歸)·지내(池內)·구읍(舊邑)·신죽(新竹)
소속 리 : 풍덕(豊德)·대성(大聖)·삼달(三達)·고도(古都)·산귀(山歸)·지내(池內)·구읍(舊邑)·신죽(新竹)
- 임한면(臨漢面)
면소재지는 월암리이다. 1914년 풍덕군 서면이 임한면으로 개칭되었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면의 이름 역시 두 강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남쪽은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를 바라보고 동쪽은 임진강을 건너 파주를 바라본다. 대체로 평야지대이고 인삼과 배추가 많이 나서 6.25전쟁 이전에는 배추를 서울로도 많이 반출했다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정곶리(림한리)는 북한에서 서울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서울시청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37.9km[12]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 및 자유로 성동IC 구간에서 임진강 건너 보이는 땅이 바로 이곳이며, '곶'이라는 이름답게 서울 쪽을 향해 삐죽 튀어나와 있다. 월암리에 민제의 묘가 있다.
소속 리 : 월암(月巖)·사동(仕洞)·채련(採蓮)·가정(佳井)·정곶(丁串)·유천(柳川)·상조강(上祖江)·하조강(下祖江)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정곶리(림한리)는 북한에서 서울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서울시청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37.9km[12]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 및 자유로 성동IC 구간에서 임진강 건너 보이는 땅이 바로 이곳이며, '곶'이라는 이름답게 서울 쪽을 향해 삐죽 튀어나와 있다. 월암리에 민제의 묘가 있다.
소속 리 : 월암(月巖)·사동(仕洞)·채련(採蓮)·가정(佳井)·정곶(丁串)·유천(柳川)·상조강(上祖江)·하조강(下祖江)
- 중면(中面)
면소재지는 대룡리이다. 옛 덕수현의 소재지. 임한면과 마찬가지로 동쪽으로 임진강을 건너 파주시 탄현면과 접하며, 임진강을 사이에 둔 둘 사이의 최단거리는 불과 650m에 불과하다.
소속 리 : 대룡(大龍)·식현(食峴)·덕수(德水)·송산(松山)·천덕(天德)·창내(倉內)·동강(東江)
소속 리 : 대룡(大龍)·식현(食峴)·덕수(德水)·송산(松山)·천덕(天德)·창내(倉內)·동강(東江)
- 흥교면(興敎面)
면소재지는 영정리이다. 1914년 풍덕군 군남면과 동면이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남서쪽으로 한강을 건너 강화도를 바라본다. 흥교리에 조선 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이 있다.
소속 리 : 영정(領井)·흥교(興敎)·궁천(宮川)·사곡(仕谷)·지현(芝峴)·조문(照門)·흥천(興天)
소속 리 : 영정(領井)·흥교(興敎)·궁천(宮川)·사곡(仕谷)·지현(芝峴)·조문(照門)·흥천(興天)
6.3. 구 개성군 + 풍덕군 지역
- 봉동면(鳳東面)[13]
면소재지는 봉동리이다. 1930년 개성군 동면(고두산·대조족·발송·백전리)과 진봉면(봉동·도평·지금·흥왕리)이 합병되어 형성되었으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는 동면이 개성군, 진봉면이 풍덕군 지역이었다. 서울·장단 방면에서 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런 입지조건 때문에 현재 개성공단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봉동리에 경의선 봉동역이 있으며, 흥왕리에 흥왕사터가 있다. 해발 200m인 덕물산(德物山)에는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다.[14]
소속 리 : 봉동(鳳東)·고두산(高頭山)·대조족(大鳥足)·도평(都平)·발송(鉢松)·백전(白田)·지금(芝金)·흥왕(興旺)
소속 리 : 봉동(鳳東)·고두산(高頭山)·대조족(大鳥足)·도평(都平)·발송(鉢松)·백전(白田)·지금(芝金)·흥왕(興旺)
[1] 심지어 림한리 일대에 한강이 흐르는데, 강 건너편에는 자유로(성동IC 일대)가 있다.[2] 남성욱·황주희, 『북한 행정구역 개편의 함의와 행정통합에 관한 연구』, 통일정책연구 제27권 1호, 2018, p.127.[3] 북한 조선중앙년감을 참고하여 연합뉴스가 매년 만드는 북한연감에 따르면 개풍군은 2016년판부터 사라졌다.# 하지만 연합뉴스 북한연감은 업데이트가 다소 늦는 경우도 있고, 오류도 간간이 보인다.[4] "두벌농사면적을 지난해보다 더 늘인 '''개풍구역의 의포, 풍덕, 신성협동농장'''에서는 벼모판씨뿌리기와 앞그루감자심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조건에 맞게 농장원들이 모든 영농공정수행에서 주체농법의 요구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 2020년 4월 1일, 로동신문[5] "'''삼거, 박연, 해선협동농장'''에서는 지난 시기 두벌농사면적을 단계별로, 계획적으로 늘이고 수확고를 올린 경험에 토대하여 올해에 소출이 높은 우량품종들을 배치하였다." - 2020년 4월 1일, 로동신문[6] 1944년 호구조사[7] 고려의 추존왕인 세조 왕륭의 왕릉인 창릉에서 이름을 따왔다.[8] 예성강 바로 건너편이 바로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벽란리다.[9] 개성특별시/역사 문서 참조. 삼국시대의 개성이 바로 이 곳이며, 고려의 도읍 이래 현 개성시내는 원래 '송악'이라 불리는 별개의 고을이었다.[10] 고려 20대 국왕 신종의 왕릉인 양릉에서 따왔다.[11] 고려 16대 국왕 예종의 왕릉인 유릉에서 따왔다.[12] 서울시청에서 동두천시청, 가평군 대성리역, 용인시 에버랜드, 인천광역시 송도국제도시 및 영종도 등과의 직선거리와 비슷하다.[13] 전라북도 완주군의 봉동읍(鳳東邑)과 같은 한자를 사용한다.[14] 덕물산은 중부지역 무당들의 제일가는 성지였다. "택리지" 등에 의하면 사당 곁에 침실을 꾸며서 민간의 처녀를 뽑아 신령의 '아내'가 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나, 조선 말기에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