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특별시/역사

 


1. 개요
3.1. 행정구역 변천사
3.2. 당시 인구
3.3. 당시 건축
6. 광복 이후
7. 북한 치하의 개성
7.1. 개성직할시 - 북한 치하의 경기도
7.2. 개성특급시 - 개성공단과 개성관광
7.3. 개성특별시


1. 개요


개성특별시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서울, 평양, 경주와 더불어 한국사의 대표적인 4대 고도'''[1][2]
옛 고려왕조 400여년간의 수도이자 조선시대 대표적 상업도시였다. 그리고 분단 초기 대한민국의 영토였으나 6.25 전쟁 이후 북한에 빼앗긴 도시로, '''현 상황을 보면 그야말로 비운의 도시'''인 곳이다.

2. 삼국시대~태봉


원래 '개성'과 '송악'은 비록 가깝지만 엄연히 다른 고을이었다. 고려 이전 원래 개성은 대한민국 이북 5도 행정구역상 개풍군 서면 개성리(開城里)를 중심으로 한 개풍군 서부 지역이었고, 고려의 도읍 이래 개성시내 및 개풍군 동부 지역이 고려 이전의 송악에 해당했다.[3] 애초에는 위만조선의 영역이었다가 위만조선 멸망 후 서한 제국의 진번군이 설치되었으며, 이후 현지 주민들의 거센 반항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폐지되어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가 공손씨 정권이 대방군을 설치하면서 그 영역으로 들어갔었다. 그후 백제가 대방군으로부터 빼앗아 주된 북방 군사 거점으로 운영하다가,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게 되면서 처음으로 고구려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아신왕이 온갖 수단을 다해 왜와 연계해서 어떻게든 수복했었는데, 백제가 의외로 충북 충주 일대와 강원도 영서 지역보다 이 개성 일대를 우선 수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을 보면 '''이미 5~6세기 백제-고구려와의 쟁패 시절부터, 한성 일대 보호에서 개성 지역이 대단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기 475년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해서 개로왕을 죽인 사건 이후 백제는 두 번 다시 개성 지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되며, 이후 개성 일대는 고구려가 668년에 망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후 나당전쟁 후반부에는 격전지였고 결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지만 당나라가 여전히 732년까진 이곳의 신라 영유권을 공식적으론 인정하지 않았기에, 신라는 옛 백제 지역과는 달리 그때까진 이 지역에 직접 지배력을 관철하진 못하였다. 732년 이후부터는 신라가 서서히 패서 일대를 개척하게 되는데, 그 시기에 개성과 송악 둘 다 신라 9주 5소경한주에 속해 있었다.[4] 둘 중 '개성'은 삼국시대에 '동비홀(冬比忽)'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 전국 지명 한화 정책에 따라 개성군(開城郡)으로 바꿨으며, '송악'은 삼국시대에 '부소갑(扶蘇岬)'이었다가 757년 개성과 마찬가지로 경덕왕 때 송악으로 고쳤다.[5] 694년 신라 효소왕이 송악에 성을 쌓았고, 703년에 성덕왕이 개성(開城, 개풍군 서면 개성리)을 쌓았다. 이렇게 신라 때는 두 성이 따로 있었다.
후삼국시대 왕건의 아버지 왕륭 가문의 기반 지역이었다. 왕륭이 궁예에 귀부하면서 궁예가 이 지역을 주목해 태봉 건국 초기에 잠깐 수도로 삼았다. 이것이 개성 전성기의 미약한 시작. 이 시기 개성은 훗날의 황해도 지역과 함께 패서(浿西) 지방으로 묶였고, 궁예는 패서지방 주민들의 고구려 유민 의식을 건국의 정당성으로 삼았기에 그 도움을 얻으려고 처음에 개성을 수도로 삼은 것이었다. 그러나 궁예는 나라를 세우고 몇 년이 지나자 왕건 가문을 비롯한 패서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의식과 관련성이 적은 새로운 근거지 철원군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이것이 패서 호족 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918년 왕건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그리고 건국 이듬해인 919년에 철원에서 왕건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다시 천도했고 동시에 왕궁과 시전(재래시장)을 건설했다.

3. 고려시대



[image]
KBS1 정도전에서 묘사된 고려말 개성부 일대 모습.[6]
대몽항쟁강도(江都)로 피난간 38년을 제외하면 436년간 고려의 제1수도였다. 그렇기에 5도 양계 중 어떤 도에 속하지 않는 별개의 경기(京畿)라는 행정구역에 속했다.[7]

3.1. 행정구역 변천사


918년, 왕건쿠데타를 일으켜 고려왕조를 세우면서 수도를 철원에서 왕건 가문의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옮겼다.
이듬해인 919년, 수도의 이름을 ''''개경(開京)''''이라 하고 부속도서로 송악과 개성을 통폐합하여 ''''개주(開州)''''를 설치했다.[8] 그렇게 '개경 개주'가 탄생했다.
960년, 광종은 개경을 '''황도(皇都)'''로 승격시켰다.[9] 그리하여 '황도 개주'가 되었다.
35년 뒤인 995년, 성종이 황도를 ''''개경(開京)''''으로, 개주를 ''''개성부(開城府)''''로 고치면서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개경 개성부'가 탄생했다.[10]
1018년, 현종이 개성부를 폐지해 개경만 남겼다.[11]
1062년, 문종이 개성부를 다시 설치해 '개경 개성부'로 돌아갔다.
1308년, 충렬왕은 '개경 개성부'를 '개성부 개성현'으로 격하시켰다.[12]
1390년, 공양왕은 개성현을 '''경기좌도(京畿左道)''', '''경기우도(京畿右道)'''로 나누었다.[13]

3.2. 당시 인구


고려사에 따르면 강화로 천도하기 직전의 개경인구는 10만호로 표현되고 있다. 한 호당 5명으로 추산하더라도 대략 50만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후대 조선의 한양은 물론이고 심지어 현대 대한민국 기준으로도 남양주시, 포항시, 김해시 등 전국 20위 안에 드는 상당한 수치다. 물론 신라의 금성 17만호 기록이 있긴하다. [14]
당시 전근대 농업국가인 고려에서, 후대 조선왕조 한성부나 태봉국 철원성터, 신라 월성 등보다도 좁은 입지에 자리잡은 도시가 북송카이펑,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플 등의 당시 세계도시와 맞먹는 인구를 보유했다는 점은 납득이 어렵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 또한 추론일 뿐이다. [15]
연구학자에 따라 당대 개경의 화재 기사 등을 토대로 개경의 인구집적도가 상상이라는 점, 개경의 도성크기가 한성부 보다 크다는 점 등을 바탕으로 10만호 설을 인정하는 이도 있다.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10~13만호가 아니라 10~13만명이라도 전세계 10위권에 드는 숫자다.

3.3. 당시 건축


[image][16][17]
주요 건축물인 '''만월대'''[18]를 세운 것은 왕건 즉위 직후인 919년이다.
개경의 당시 모습
여요전쟁으로 파천 당시 크게 피해를 입은 이후 강감찬 상원수의 건의로 1029년(현종 20년)에 외성(外城)인 '''나성(羅城)'''을 축성했다. 왕가도가 장정 24만명과 기술자 8천여명과 현종 즉위년부터 20년간 쌓았으며, 현종 당시 성안의 관아 및 민가들은 5부(동, 서, 남, 북, 중) 35방 344리였다고 한다.
1011년, 현종은 '''황성(皇城)'''을 쌓아 궁성 - 황성 - 나성 체제를 완성시켰다. 황성은 천자만이 지을 수 있는 성이다.[19][20]
개성 시가지를 지형조건에 맞추어 조성했기 때문에 질서정연한 바둑판식 정(井)자형 도시와는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당나라의 장안성, 신라금성, 발해상경용천부, 일본 헤이안 시대헤이안쿄와 같이 질서정연한 형태의 도시구조가 아닌 풍수지리적인 자연스러운 도시형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북송의 수도 역시 운하로 둘러싸인 카이펑이었으니 중세 수운에 걸맞는 수도라고 할 만하다. 다만 후대의 한성이나 송의 카이펑과는 달리 수도 바로 인접 지역에는 큰 강이 없었던 게 당대에도 약점으로 여겼던 듯.[21]
여러 전란에도 지금까지 이때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개성남대문, 선죽교, 만월대터, 공민왕릉, 박연폭포, 송악산 등. 개성 남대문 외에도 내성에는 동대문, 동소문, 서소문, 북소문, 진언문 등 6개의 성문이 더 있었는데 문루는 대개 없어지고 남대문만 1954년에 복원했다.

4. 조선시대


조선 건국 직후에는 수도의 위치를 유지했으나, 태조 3년 남쪽의 한양으로 이전했다. 이 때 나성 안쪽에 다시 내성(1391~1393, 반월성)을 쌓았다. 수도가 바뀌었으므로 개성을 중심으로 한 고려시대의 경기를 폐지하고 남쪽 한양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기도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이 때 개성은 신설 경기도 북쪽 끝으로 들어갔다. 정종 시대에 일시적으로 개성으로 복귀했다. 이 때 일어난 유명한 사건은 시내에서 벌어진 제2차 왕자의 난이다.
태종 5년 한양으로 이전하며 개성과 한양의 양경 체제는 형식상으로 남게된다. 세종 20년 개성유후사를 개성부로 개편하면서 계기로 양경 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지만 수도 한양을 제외한 경기도의 행정을 책임지는 경기관찰사를 개성부윤이 겸하게 하여 수도 한양을 보좌하는 주요한 배후 도시로서 무시할수 없는 위상을 유지했다. 경기도 중심도시로서 경상도의 경주나 진주, 전라도의 전주에 비견되는 위상이었다. 한양과 사실상 같은 권역으로 취급되며 성종~연산군 연간엔 개성에서 재주있는 이들은 진즉에 한양으로 건너와서 개성에 남은 사람중에는 인재가 드물다는 인식이 공공연히 돌만큼 접근성이 좋았다. 게다가 학당, 사원 같은 고려시대부터 구축된 교육, 전승 인프라가 풍부해 16세기 이전까진 상당한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16세기들어 조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완전히 정착하고 사화와 당쟁으로 중앙의 관인층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원을 통한 자체적인 교육과 전승 체계를 마련하면서 개성과 타 지방에 가지는 이점은 퇴식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재난으로 도시가 쑥밭이 되면서 학문교육 시설도 재가 되버리니 개성의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경덕(徐敬德), 차천로(車天輅), 최립(崔岦)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15~16세기의 영예도 끊어져 버렸다. 과거 누려온 메리트가 모두 사라지고 자부심을 드높일 문인들도 배출되지 않은 상실감과 박탈감, 피해의식은 조선 조정이 국초부터 고려수도인 개성주민들을 차별하고 소외시켰다는 개성소외론이란 가공의 역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개성의 떨어진 자존감은 18세기에 노론 낙론 종장들에게 수학한 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나서야 회복된다.
이와 별도로 태조 왕건의 선조대부터 융성했고 고려왕조 500년간 수도로 기능하며 원래 종사자가 많았던 상업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송도상인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5. 일제강점기


[image]
↑ 1930년에 분리된 개성부(구 개성군 읍내시가지역) 지도
일제강점기 때에도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거의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일제 때 이 도시에 있던 일본인 상점이 단 한 곳뿐이었다고 하니.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상업도시여서 그런지 일본인들도 진출하려고 애썼지만 서비스고 가격이고 뭐고 무조건 개성 사람의 가게만 쓰는지라서(…) 그것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오오.
기반 자체가 없으니 발을 못붙이자 도량기구는 일본인 가게에서만 취급하게 했다. 하지만 그마저 개성 밖으로 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사서 썼기 때문에 결국은 도량가게도 기반을 못다졌고 실패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22] 그래서 당대의 개성은 일본인 인구비중이 2%(1944년)에 불과해, 일본인 인구비중이 가장 적었던 부(府) 도시였다.[23] 1925년 인구조사에서 개성(송도면)의 인구는 4만 6천 명으로 조선 6위의 대도시였으며, 면 중엔 단연 1위[24]로 개성보다 인구가 적은 부가 7곳이나 있었음에도 일본인이 적어서 승격이 늦었다고도 한다.
부군면 통폐합 때 풍덕군을 흡수하여 개성군으로 바꾸었다.
1930년 개성군 송도면이 개성부로 승격했고, 개성군의 나머지 지역은 개풍군으로 바꾸었다.
[image]
↑ 1938년 이후의 개성부 전역 지도
1940년 당시 인구 7만2천, 1944년 당시 인구 7만6천으로 전국 10대 도시, 전국 15대 도시에 들어갔다. 이 이야기는 개성의 입지를 나타내는 거지만, 거꾸로 말하면 1940년대 시작한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개성의 인구가 당시 크게 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6. 광복 이후


1945년 해방 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는 38선 이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대한민국의 행정권이 미치는 도시였다.[25] 서로 적대하는 체제의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상 개성의 주민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은 것(사실상 줄어 들은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실제로 1948년 당시 인구는 인구 87,962명, 1949년 당시 인구는 8만9천이었으며, 이는 일제강점기 인구가 더 적었던 '''목포시'''(11만)나 전주시(10만), 마산시(9만)보다도 인구가 작았다. 결국 남한에서도 7대 도시에서 남한 10대 도시로 전락한 것이다.(...)
게다가 개성 바로 북쪽에 있는 송악산은 38선 이북이었다. 이 때문에 38선 이남의 방어진지와 개성 시가지가 다 내려다 보이므로 대한민국이 방어하기 어려운 곳 중 하나였을 지경이었다. 참고로 개성 외에도 연백 평야옹진반도 일대도 전면전시 일단 철수하는 지역으로 결정되었다. 게다가 이 결정은 당시 이 지역을 지키던 제1보병사단의 건의에 따른 것이며, 그 전에는 현실을 망각한 채 병력과 장비도 안주고 1개 사단에게 적이 고지대에서 빤히 쳐다볼 수 있고 38선 후방에 평야와 바다가 펼쳐진 '''총합 100km의 전선'''을 담당하라는 어이없는 명령만 있던 상태였다.
당장 한국전쟁 이전에도 개성은 '''송악산에 있는 북한의 야포 때문에 무진장 두들겨맞는 도시였다'''(…). 게다가 1949년에는 북한군이 개성 시가지를 '''포위'''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국지전에서는 보기 힘든 사단급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육탄10용사 사건도 이때 벌어진 것.
이런 문제 때문에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38도선을 행정구역별로 재조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황해도소련군정에, 경기도미군정에 이양하자는 것이다.[26] 이것이 성사됐다면 개성은 남한으로, 그리고 당시 남한 영역이었던 황해도 옹진군(서해 5도 포함)은 북으로 넘어가는 셈인데, 실익을 따지기는 어려운 문제이나 개성시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살아날 타이밍을 놓친 셈이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 곳 출신의 이성득 의원이 당선되었다. 민선 개성시장을 지냈으나, 임기를 마친 직후 한국전쟁이 벌어져 전쟁 중에는 전라북도지사(1951~52)를 지냈다. 또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미국 유학으로 유명한 신문 만화가, 삽화가였고[27]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김동성 화백이 2대 국회의원이었는데, 당선 직후 피난가야했고 이후로 1954년까지 명목상의 임기만을 지냈다.
여담으로 해방 이후에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박물관이 전국에 몇 개가 있었다. 본관은 서울, 분관은 부여, 공주, 대구, 평양, 개성에 있었다. 그런데 38선이 그인 후에 북한은 평양 쪽만 소유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개성 지역이 북한에 너무 가까워 불안한 나머지 개성 박물관에 있던 상당량의 문화재를 열차에 실어 서울로 옮겼다. 빈 자리는 잠시 서울의 박물관에서 몇몇 전시물을 대여해서 전시했다가, 결국 무기한 휴관했다. 이 때문에 나중에 조선인민군이 개성을 점령했을 때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물론 옮기는 도중에도 북한의 도발은 수시로 벌어졌다. 유물들을 기차에 싣고 있는데 역 앞 광장에 야포탄이 떨어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을 정도. 현재 남한 지역 박물관에 있는 고려청자들이 (간송미술관의 매병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 때 옮긴 것이다. 고려 수도는 북한령인데 정작 질 높은 고려청자와 고려시대 유물들은 현재 죄다 남한에 있고 북한에는 비교적 후진 고려청자들만 남았다. 이는 개성이 5년 동안이라도 남한에 속해준 덕분이다.

6.1. 6.25 전쟁


결국 6.25 전쟁 개전 초기에 북한군 제6사단이 비밀리에 철도를 수선한 후 열차에 탑승하여 돌격하는 바람에 함락당했다(…)는 설이 있어 논쟁 중이다.[28]
그 후에는 인천 상륙작전으로 수복하였으나 1.4 후퇴 때 다시 북한에게 넘어간 후 1951년 3월 UN군의 커레이저스 작전(Operation Courageous)의 결과 UN군이 잠시 수복하였으나 곧바로 개시된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다시 빼앗겼다. 전열을 정비한 UN군이 다시 반격을 가하여 전선을 개성 근방까지 올려놓았으나 개성은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황 속에 1951년 6월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시작했고[29],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개성을 놓고 협상이 벌어졌다. 유엔군은 '''공산군이 개성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산군은 거절하였다. 공산군은 후술하는대로 오히려 38선 시절의 원상 복귀를 주장했다. 유엔군사령부는 끝내 개성을 공산측에 양보하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휴전선이 개성 남쪽을 지나는 바람에 현재는 북한 영토가 되었다.''' 개성은 그냥 도시가 아니라 고려시대 시절 한민족의 수도였던 곳이며, 당시 대전광역시보다도 더 큰, 현재 기준으로 보면 광역시에 해당하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도시규모상으로만은 이 전쟁에서 남한 측이 손해를 봤다. 반면 당시 동부 전선에서는 원산 이남까지 밀고 가기 위해 일단 고성군의 거진읍을 점령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렇게 전쟁 초기보다 동부 전선이 상당히 올라가자 휴전 회담에서 북한은 전쟁 이전의 영토, 즉 38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UN군은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전쟁 전과 같이 개성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을 것이지만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며, 싸워서 쟁취한 강원도 북부 지역이 다시 북한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승만은 상징성 높은 도시인 개성을 잃은 것을 상당히 분통해하여 개성의 반환 없이는 휴전도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내비치기도 했다는데, 이승만은 애초에 휴전 협상 자체를 파토내려고[30]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벌인 적도 있을 만큼 휴전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였으니 이 주장은 조금 의문이 가는 구간이다. 다만 굳이 휴전하려면 상징성 높은 개성이라도 확보해달라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도 개성, 연백, 옹진의 영유권을 휴전 이후 꽤 오랫동안 주장했다.[31] 정부차원에서 1957년정도까지 지속적으로 각종 궐기대회를 조직하거나 항의를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32] 함락 이후에도 경기도청에서도 임시로 개성시청을 두기까지 했던 듯 하다.[33] 참고로 한국전쟁 직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옹진군, 연백군의 국회의원들은 1953년 휴전 이후 자신들의 지역구를 상실하였음에도 그 임기와 직책, 지역구를 다음 총선이 있는 1954년까지 그대로 유지하였다. 또한 원래 개성 시내에 있었던 서울지방법원 개성지원, 서울지방검찰청 개성지청은 휴전 이후 파주군 아동면(현 파주시 금촌동)으로 이전해와 '개성지원', '개성지청'이란 이름을 1962년 8월까지 그대로 유지하다가, 1962년 9월 1일 각각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현 의정부지방법원), 서울지방검찰청 의정부지청(현 의정부지방검찰청)을 신설하면서 이에 통합해 폐지했다. 의정부지방법원 연혁 의정부지방검찰청 연혁
이후 1976년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휴전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서해안 부분을 정리하기 위하여, 현재도 간간히 언급되는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령의 회복, 그리고 개성의 탈환을 충분히 고려하기도 했지만 실행하진 않았다. 끝내 개성은 북한 치하로 넘어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7. 북한 치하의 개성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개성은 38선 이남 한정으로 경성(서울), 부산, 인천, 대구, 광주에 이어 6위였다. 북한 지역까지 합하면 평양, 흥남, 청진, 신의주, 원산, 함흥, 해주에 이어 13위의 인구 규모를 자랑했다. 대체로 남포, 광주, 해주(셋 다 82,000여명)보다 약간 적고 대전(76,202명)과 비슷했다. 6.25 이후 북한에 편입되고도 사실상 도청소재지급 도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도시(함흥, 청진, 남포)에 비해 인구 성장이 정체했고, 개성특급시로 장풍군 등을 분리시킨 이후로는 단천시, 개천시, '''사리원시'''[34] 등의 도시에 밀려 2008년 기준으로 북한에서도 8~9위권이 되었다. 남한으로 치면 순위 외일 것이다. 안습.[35]
1944년 인구 통계를 보면 개성부 76,360명, 개풍군 91,697명으로 총합 168,057명이 살았는데, 2008년 북한 통계에서는 308,440명이 거주한다. 64년동안 한반도의 인구는 2500만명에서 7400만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는데, 개성의 경우 고작 184% 늘어났다. 결국 북한 치하에서 개성의 인구는 한반도의 평균 인구증가율(60년간 2.5배)에도 못 미치게 증가한 셈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른 동네로 이사 간 개성 사람들이 타지에서 전입온 사람보다 더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순위가 떨어진 이유로는 북한 도시들이 죄다 30만명 선에서 고만고만 해서 순위가 밀리기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36] 단, 장풍군의 인구를 더하면 개성권역의 인구는 37.7만명 선인데, 이렇게 되면 역시 인구가 행정개편으로 반토막난 남포(36.7만명)보다 많아 북한 제4의 도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남포가 특별시로 승격하면서 주변 지역을 합병해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 비해 인구증가가 더딘 것은 분명하므로 현 상태가 유지된다면 향후에는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7.1. 개성직할시 - 북한 치하의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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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을 하면서 경기도도 강원도처럼 남북으로 잘렸다. 상당 부분이 북쪽으로 잘린 강원도에 비해 경기도는 거진 대부분을 남한이 먹었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는 북한 경기도의 대부분은 개성 근처인데 북한의 김씨 왕조는 북한 경기도를 아예 개성으로 싹 묶어버렸다. '''그래서 북한 경기도는 그냥 개성 하나였다.''' 다만 일제시대 때 경기도 연천군에 속했던 일부 지역은 강원도 철원군으로 편입시켰다. 다만 지금은 황해북도 소속으로 치는 듯.
전쟁 중인 1951년부터 개풍군을 폐지하고 "개성지구"로 만들었으며, 1955년에는 북한이 점령한 경기도의 나머지 지역인 장풍군, 판문군을 편입시켜 개성직할시(1957년 6월)로 만들었고, 1960년에는 강원도와 황해북도에서 추가로 확장하였다.
이후로는 부침이 있었다. 예컨데 개성직할시의 리즈 시절인 1972년에는 인구 32만으로 당시 북한 4대 도시(평양, 함흥, 청진 다음)였던 적도 있었다. 함흥은 1960년에 직할시로 승격받았으나 다시 1970년에 강등당했으므로, 진정 리즈 시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80년대 잠깐 개성시로 격하당했으며, 이때 인구가 1/3토막(10~11만 명)이 났다(...) 다시 1980년대 중반 이후 복귀하여 1993년 당시 33.4만 명으로 그래도 이 때만 해도 북한 5위권이었으니 북한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7.2. 개성특급시 - 개성공단과 개성관광


[image]
2002년 11월 개성직할시의 판문군(1개읍, 16개리)을 폐지했다. 폐지된 판문군은 판문읍이 봉동리로 바뀌어 봉동리, 진봉리, 평화리, 동창리, 판문점리와 삼봉리 일부, 전재리 일부를 개성시에 합쳤다. 그리고 개풍군의 해선리 일부를 개성시 송악동에, 판문군의 전재리 일부를 선적리에 합쳤고 선적리를 장풍군에, 판문근의 삼봉리 일부를 상도리에 합쳤다. 또한 상도리, 대련리, 화곡리, 령정리, 신흥리, 월정리, 조강리, 림한리, 덕수리, 대룡리를 개풍군에 편입시켰다.
2003년 6월 개성직할시의 장풍군과 개풍군을 황해북도로 편입시켰다. 2003년 9월 황해북도의 특급시로 격하하면서 개성직할시를 폐지했고 구 개성시를 개성공업지구로 변경했다.[37] 장풍군을 개성시에서 분리한 이유가 바로 개성공업지구 때문이었다. 장풍군은 개성공업지구에 포함되는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
2003년 10월에는 개풍군 해선리 전역과 연릉리, 고남리, 오산리, 상도리 일부가 개성특급시에 편입되었다. 이어 2004년 2월에는 개풍군으로 편입되었던 구 판문군 영역의 상도리, 대련리, 화곡리, 령정리, 신흥리, 월정리, 조강리, 림한리, 덕수리, 대룡리 등 10개 리, 그리고 장풍군으로 편입되었던 선적리가 개성특급시로 편입되었다. 2005년 9월에는 개풍군 개풍읍을 개풍동으로 승격하는 대신 개풍군을 완전히 폐지해 개성특급시로 편입시켰다. 돌고 돌아 장풍군을 제외하고는 다시 개성으로 환원된 셈이다.[38]
이 때문에 2008년 UN이 시행한 인구 센서스에서도 개풍군은 찾아볼 수 없다.[39]
격하당한 후에도 개성공단 덕분에 개성 주민들은 평양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잘사는 편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상당한 특혜를 누렸기도 했지만.) 2003년 당시 개성특급시 일부와 구 판문군 일부를 합쳐, 개성공업지구를 신설했다. 바로 여기에 '''개성공단'''이 있다. 문서 참조. 2000년 김정일정몽헌 현대그룹 회장(현대아산)의 합의로 짓기로 하여 2003년 6월 기공, 2006년 완공했다.
개성공단으로 남북관계와 개성은 새로운 전기가 맞았다. 또한 현대아산편으로 개성시내관광(물론 제한된 장소만)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이후로 금강산 관광과 함께 중단되었다.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2010년대 들어 남북관계 악화와 함께 매우 지지부진해졌다.
2013년에 이곳에 존재하는 개성의 성곽과 개성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사, 왕건릉과 공민왕릉 등 고려 왕릉들이 '개성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 결정적으로 북한의 마수에 들어간 탓에 결국 도시의 위상 역시 대폭 떨어졌다.

7.3. 개성특별시


2019년 10월 28일에 다시 광역행정구역인 개성특별시로 승격했다.
2020년 4월 경에는 구 개풍군 지역과 구 판문군 지역을 개풍구역판문구역으로 복구했다.
* 통일한국 이후의 개성특별시의 지위에 대한 논의는 개성특별시 본 문서를 참고 바란다.


[1] 공주와 부여, 전주, 강화, 철원, 김해 등도 역사적 고도이기는 하나 김해를 제외하면 수도로서의 존속기간이 앞의 넷에 비하면 매우 짧고 강화도를 제외하면 한반도 통일국가의 수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후순위로 밀린다.[2] 다만 이 네 도시 중에서는 개성의 위상이 꼴찌다. 서울은 백제, 조선(단, 백제는 강남, 조선은 강북) 양조의 500년의 고도이고 현 대한민국의 수도라 도합 수도 기간이 1100년에 이르고 200년간 고려의 부수도 남경이였던 적도 있다. 경주도 기나긴 신라사 전체를 관통하는 991년 역사의 고도이며 역시 고려시절 300여년간 부수도인 동경으로 군림했던 도시인데다가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알아주는 도시였다. 평양은 통일왕조의 수도인 역사는 전무하지만 한반도 최초의 도시였던데다가 고조선과 고구려의 200여년 수도였고 400년간 낙랑군의 치소였던 적도 있으며 이후에도 고려, 조선시대 제2도시 역할을 잘 수행했고 현재 북한의 수도이기도 하다. 반면 개성은 사실상 고려시대의 수도 타이틀 1개가 전부인 도시로 후삼국시대과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극초기를 제외하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한 역사가 없다. 앞의 세 도시보다 역사적 출현도 한참 늦은 901년이고(나머지 세 도시는 기원전으로 최소 1000년의 차이가 있다.) 수도였던 기간도 450년이 채 안된다. 개성이 고려의 수도가 된 이유도 사실상 고려 태조의 고향 겸 기반지여서가 컸으며 심지어 당대에도 수도로서의 입지가 좋지 않아 툭하면 천도 의견이 나왔었다. 하지만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한국 및 한민족의 형성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커서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버프를 받은 격.[3] 여기서의 개풍군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의 풍덕군 지역(개풍군 남부 지역)을 제외한 지역을 일컫는다.[4] 일단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상으로는 신라 9주 5소경한주에 속했는데, 신라 후기에 한주와 구분되는 특수 행정구역 패강진을 신라 서북면에 설치했다는 설을 긍정한다면, 신라 말에 패서지방으로 주로 황해도 지역과 묶어 분류했던 개성 역시 위치상 패강진 관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5] 그러나 경덕왕이 한 번에 개성, 송악이란 이름을 새로 만들어낸 건 아니고 694년, 703년 기사 등을 근거로 효소왕, 성덕왕 때도 존재했다고 보기도 한다.[6] 꽤 고증에 공을 들인 이미지로, 실제 풍경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민가의 기와집이 적다는 《고려도경》의 묘사를 근거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충선왕 때 대대적으로 개경의 가옥들을 기와집으로 바꾼 기록이 남아있다. 또 개경엔 부유한 귀족과 관료들의 거대한 저택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기와지붕이 많이 보이는 게 당연하다. 《고려도경》에도 선의문 안으로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사치스럽다는 묘사가 있다.[7] 당시 서경이었던 평양에게도 서경기가 있어 제2수도로서의 대우를 받았다.[8] 도읍은 송악인데, 새로운 고을의 이름은 정작 도읍의 옆동네인 개성에서 따온 것.[9] 동시에 서경은 ''''서도(西都)''''로 승격되었다.[10] '개성'이란 지명이 옛 송악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포괄하는 지명으로 완전히 굳어지면서 지명의 지위가 확장 및 역전되었다.[11] 폐지된 개성부 지역은 개성현과 장단현 2현으로 나누어 관리했다.[12] 이는 원 간섭기의 영향이다. 동시에 동경은 계림부, 남경은 한양부, 강도는 강화현으로 격하당했다.[13] 즉 '개성부 / 경기도'가 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도 영향을 주어 수도가 '한성부 / 경기도'가 된다.[14] 여기에도 이론은 많다[15] 신라 금성의 17만호, 개경의 10만호 기록을 유독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하다. 또한 고려의 농업생산력, 전체 인구 등에 대한 부분도 연구의 소지가 많다. [16] 가장 바깥의 성이 나성(羅城), 서북쪽에 있는 눌리문 - 광화문이 있는 성이 황성(皇城), 내제석원이 있는 작은 성이 궁성(宮城)이다.[17] 중부와 북부를 감싼 회색으로 되있는 성은 우왕 ~ 공양왕 대에 추가로 지은 성이다.[18] 만월대는 조선시대에 붙은 이름으로, 당시엔 특정 명칭이 없고 단지 본궐, 정궁 등으로 불렸다.[19] 동시에 서경에도 황성을 세운다. 장락궁 문서 참조.[20]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제후국을 자처했기에 황성이 없다.[21] 예성강, 임진강이 동서로 지나기는 하나 시가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 반면 한양은 위의 두 하천보다 넓은 '''한강'''이 지척에 위치하여 수운에서는 유리했다.[22] 참고로 당시 개성의 경제력은 웬만한 일본 도시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23] 참고로 1944년 당시 타 도시의 일본인 인구비중은 예를 들어보면 경성 16%, 부산 19%, 광주 11%, 대구 10%, 진주 6%, 평양 9%, 나진 26%였다.[24] 참고로 개성군 송도면 다음은 제주군 제주면(3만 9천)과 고양군 용강면(3만 2천) 순. 다만 제주면은 행정구역 자체가 매우 넓었고, 용강면은 사실상 서울의 연장이었다.[25] 구역 상으로는 송악산의 남쪽 사면의 북쪽 일부가 북측에 속했지만 북측의 행정상 개성시를 설치하지는 않았다. 후술하지만 그곳에는 북한군이 주둔하여 남한을 무진장 괴롭혔다.[26]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돌베개. 171~174페이지[27] comic을 (아마도 일본을 거쳐서였겠지만) '만화'라고 번역한 게 1923년 이 분이 최초라고 한다![28] 철도 수송설은 한국 전쟁 서적중 가장 유명한 데이비드 햄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도 소개되었다. 또한 저명한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톨랜드의 서적에서는 거의 정설로 쓰여져 있다.[29] 회담장소를 개성에서 약간 남쪽으로 떨어진 판문점으로 옮긴 것은 고도(古都) 개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산군 측에서 의도했다는 설이 있다. 휴전 협상 지역은 유엔군의 작전 지역에서 제외되었기에 북한 측은 개성 지역을 확실히 점령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던 것.(출처: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30] 이승만이 진정 원했던 것은 '''완전한 통일'''이였다. 이 때문에 휴전 자체를 반대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군이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혹여 북한이 다시 침공해오면 이번엔 미군이 확실히 돕겠다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31] 그건 이북 5도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긴 했지만.[32] 휴전 직후 신문기사에서 개성시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이런 기사이다.[33] 물론 현재도 이북 5도 위원회에서는 북한 치하의 모든 도·시·군·읍·면·동의 장(長)을 계속 임명하고 있다.[34] 황해북도 도청소재지. 2008년 인구가 거의 동일하다.[35] 도시권 전체를 합쳐 37만 명이라고 치더라도 2010년 남한의 인구 별 도시 순서에 대입하면 당시 기준 39만 명의 평택시나 34만 명의 진주시와 맞먹는 인구이다. 그러면 대략 27~28위. 개성 하나만 두고 보면 원주시, 익산시랑 비슷한 수준으로, 31~32위 정도다. 두 도시는 이런저런 지원으로 성장가능성이 높은데 개성은 현재 북한의 영토이다.[36] 평양, 함흥, 청진을 제외하고는 10여개 도시가 모두 27~36만명선.[37] 승전동(옛 사목동, 社穆洞), 내성동(옛 태평리, 太平里), 성남동(옛 손하동, 孫河洞), 박연리(옛 산성리, 山城里) 일대[38] 남성욱·황주희, 『북한 행정구역 개편의 함의와 행정통합에 관한 연구』, 통일정책연구 제27권 1호, 2018, p.127.[39] 북한 《조선중앙년감》을 참고하여 연합뉴스가 매년 만드는 《북한연감》에 따르면 개풍군은 2016년판부터 사라졌다.# 하지만 연합뉴스 《북한연감》은 업데이트가 다소 늦는 경우도 있고, 오류도 간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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