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영어: Korean Air Lines Flight 902
일본어: 大韓航空機銃撃事件
러시아어: Катастрофа Boeing 707 в Карелии
'''항공사고 요약도'''
'''발생일'''
1978년 4월 20일
'''유형'''
조종사 과실, 민항기 격추
'''발생 위치'''
소련 러시아 SFSR
카렐리야 공화국 로우히
'''기종'''
Boeing 707-321B
'''운영사'''
대한항공
'''기체 등록번호'''
HL7429
'''출발지'''
파리 오를리 공항
'''경유지'''
앵커리지 국제공항
'''도착지'''
김포 국제공항
<color=#373a3c> '''탑승 인원'''
승객: 97명
승무원: 12명
<color=#373a3c> '''사망자'''
승객: 2명
승무원: 0명
<color=#373a3c> '''생존자'''
승객: 95명
승무원: 12명
1. 요약
2. 사고의 원인
2.1. 707기와 항법장치
2.2. 항법사의 실수
3. 경과
4. 사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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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착 당시 대한항공 902편의 모습. 왼쪽 주익(날개) 끝부분이 '''통째로 날아간''' 게 눈에 확연히 보인다.

1. 요약


1978년 4월 20일 파리를 출발하여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한 뒤 서울로 도착할 예정이었던 대한항공 902편 보잉 707 여객기가 항법상의 실수로 앵커리지 대신 소련 영공을 침범해 콜라 반도 상공에서 격추당한 뒤 무르만스크 인근에 불시착한 사건이다. 이 사고로 탑승 인원 109명 중 2명이 사망하였고, 나머지 승객들은 조사를 마친 후 별 일 없이 핀란드 헬싱키를 통해 귀국했다. 소련은 10만 달러의 배상금을 청구하였으나, 한국 정부는 지불하지 않았다.

2. 사고의 원인



2.1. 707기와 항법장치


이 사건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보잉 707의 항법장치에 있었다. 관성항법장치가 민항기에 본격적으로 장착되기 시작한 것은 보잉 747부터이며, 그 이전의 민항기에 장착된 항법장치는 대부분 LORAN이라 불리는 구식이었다.
LORAN은 지상의 기지국에서 일정한 전파를 발신하여, 그 전파의 방향을 추적하여 삼각 측량으로 그 위치를 추적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만약, 지상의 기지국이 활동을 중단한다거나 고장이 날 경우, 인근 지역을 지나가는 배나 항공기는 그 정보를 입수하여, 다른 적절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문제는 저 시절에는 GPS도 없고'''[1] 관성항법장치도 대중화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보잉 707에는 관성항법장치가 장착되지 않았다.[2]
결국, LORAN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707기의 경우 나침반과 태양의 방위만으로 현재 이동 방향을 파악해야하고, 만약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방향을 잃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특히, 극지방의 경우 편각[3]이 매우 크기 때문에, 지금 북쪽을 향하고 있는지 남쪽을 향하고 있는지 혼동하기 쉽다. '''그리고 자북극은 이 항로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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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902편의 비행 경로. 자북극 근처에서 경로를 크게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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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의 지자기 지도와 비행경로를 겹쳐보면 어떻게 이렇게 큰 경로 오류가 가능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2.2. 항법사의 실수


항법사의 실수는 크게 2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LORAN 기지국의 가동 여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서, 기지국 하나가 가동 중단된 점 때문에 위치 파악에 혼동이 왔다는 거고, 또 하나는 이 편각을 잘못 계산해 버렸다는 점이다.[4] 사실 한 가지 수정 요소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고전적인 방법인 '''태양의 방위'''. 이 때 하늘이 맑기 때문에 수상한 점이 한 가지 생기는데, 조종석에서 보아도 분명 태양의 위치가 역으로 바뀌어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비행편이 날아가는 시간대는 저녁에 출발하여 낮에 도착하는 일정인지라 분명 햇빛이 밝아오는 쪽이 미주와 앵커리지쪽이고 어두운 쪽이 원래항로와 정반대편, 그러니까 그린란드와 러시아쪽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일본 문예춘추에서도 "오오야씨는 왼쪽 창문에 있어야 할 태양이 어느새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는 걸 알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전문가인 승객도 알고있을 상식을 무시하고 비행했다는 점에서 항법사와 기장의 과실에 구차한 변명을 달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실수가 겹쳐져서 KE902편은 방향을 확 틀어 버리고, 원래 가야 하는 앵커리지 방향이 아닌 엉뚱한 무르만스크 방면으로 틀어지게 된다. 사실 여기까지만 들어가면, 구태여 격추될 이유는 없어 보이지만, 소련 방공군[5]은 과감히 격추시켰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2.3. 민항기로 위장한 군용기


당시 미국 공군은 다양한 정찰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RC-135이다. C-135[6]의 동체를 활용하여, 멀리서 보면 민항기처럼 보이게 위장하고 실제로는 정찰 센서를 잔뜩 붙여서 내놓은 이 항공기는 다양한 임무에 활용되었는데, 전자전 정보 수집이나 핵실험 물질 탐지, 혹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발사 실험 정찰''' 등에 투입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즉시 미국 본토를 직격시킬 수 있는 큰 미사일 몇 개를 가지고 있던 소련 입장에서는 '''제1순위 경계 대상이었다.'''

3. 경과


잘못된 항로로 날아가던 중 대한항공 902편은 노르웨이 방공망 일부를 지났다. 그리고 그 부근은 미군 전진기지 및 나토 군의 대 소련 방공 감시망이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93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김창규 기장은 나토 방공망 주파수로 전진기지와 2차례 무전 타진을 했지만, 노르웨이 기지에서 왜인지 모르지만 '''계속 진행하라''' 는 답변을 들었다고[7] 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의문이 되는 부분 중 하나. 이렇게 대한항공 902편은 회항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다.
해당 침입 지역은 방공기지가 밀집된 소련 해군 북방함대의 모항인 무르만스크 상공이었고 소련 방공군은 20시 54분에 레이더로 영공 400km 밖에서 자신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대형 항공기를 발견한다. 소련 방공군은 이 미확인 기체에 25분간 무전으로 접촉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반응 없이 그대로 영공을 넘어오자 21시 11분에 Su-15 요격기를 긴급 발진시켰다. 이후 미사일에 피격되기까지의 과정은 902편 탑승자들의 증언과 소련의 공식 발표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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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카렐리아의 주요 군공항 위치 및 KAL 902편의 비행경로
소련의 발표에 따르면 431 방공군의 아프리칸다(Африканда Afrikanda) 군공항에서 긴급 발진한 알렉산드르 보소프(Александр Босов) 대위의 Su-15TM이 영공 침범 5분만에 대한항공 902편 조종석에 가까이 접근하여 기체를 좌우로 롤링하는 등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902편은 이를 무시하고 핀란드 쪽으로 급격히 기수를 선회해 달아나려 했다. 이를 보고받은 21 방공군의 지휘관 블라디미르 차르코프는 곧바로 10 방공군의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장군에게 허가를 받은 뒤 격추를 명령했고[8] 보소프는 민항기임을 주장하며 몇분간 격추를 거부하다가 결국 21시 42분에 명령을 수행한다.
대한항공 902편 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보소프의 Su-15TM를 발견하고 기체 외부의 항법등을 모두 켜고 속도를 줄여서 지시를 따르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국제 공용 비상주파수 121.5MHz로 계속 접촉을 시도했으나[9] Su-15TM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발사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Su-15TM에는 UHF(300~3,000MHz) 대역 무전기만 설치되어 있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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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승객 오오타니 기시오[11]가 기내에서 촬영한 알렉산더 보소프의 Su-15TM.
승객의 입장에서는 일본인 승객 시오자키 세이코[12]가 Su-15TM의 출현부터 비상착륙까지 1시간 42분 동안 발생한 모든 일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소련 전투기가 나타나 902편의 오른쪽에 바짝 붙어 항공기를 훑어보듯이 기수부터 후미까지 오가며 비행하기 시작했고 바로 항공기 외부의 등이 전부 켜졌다. 그 근처에 앉았던 프랑스 승객 쟝-샤를 포리는 승객들이 소련 전투기의 출현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다들 밝은 달빛 아래에서 소련 전투기를 구경하고 사진 찍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보소프도 여객기 창문의 커튼들이 열리고 불이 켜진 객실 안의 사람들이 자신을 구경하며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Su-15TM이 곧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폭발이 있었고 시오자키 세이코의 네 좌석 뒤 왼쪽 동체에 멜론 크기의 구멍이 생겼다. 장-샤를 포리는 폭발이 있은 후 앞좌석에 걸어둔 자신의 재킷에 동전 크기의 구멍이 세개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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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파편에 손상된 동체 내외부의 모습
보소프가 발사한 R-60 빔펠 열추적 미사일은 첫 발은 빗나갔으나 두번째 발이 왼쪽 날개 끝을 맞춰 4m 가량이 떨어져나가고 파편에 의해 동체에 구멍이 다수 생겼다. 이 때 미사일 파편에 머리를 맞은 한국인 승객[13]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어깨와 오른팔에 중상을 입은 일본인 승객 스가노 요시타카(31)[14]는 불시착 후 소련군의 구조 중에 과다출혈로 사망한다.[15] 이외에 그의 형 스가노 야스오(33)[16]와 처남 후쿠이 타카마사(25)[17] 등 13명이 부상을 당했다.
피격 직후 동체에 생긴 구멍으로 인해 객실 감압 경보가 뜨자 기장은 즉시 기수를 내리고 분당 5,500피트(1676.4m)로 급강하하여 고도를 35,000피트(10668m)에서 5,000피트(1524m)로 낮췄다.[18] 이때 소련군의 방공 레이더에서도 사라지고 구름을 뚫고 강하하면서 보소프의 시야에서도 사라진다. 그는 대한항공 902편이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지상에 아무런 화재나 충돌 흔적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지 못했고, 5분이 넘는 급강하 동안 승객들도 추락 중이고 곧 죽는 것으로 생각했다. 시오자키 세이코의 노트에는 "우리는 이제 다 죽을 것 같다. 우리는 추락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때 미사일에 떨어져 나간 왼쪽 날개 파편이 레이더에 잡히자[19] 차르코프는 크루즈 미사일이나 버려진 스파이 장비로 판단했고 다른 기지(Poduzhemye)에서 발진해온 또 다른 Su-15TM[20]이 R-98MR 레이더 추적 미사일을 발사해 공중에서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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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피야르비 호수. 마치 활주로처럼 긴 모양을 가지고 있다.
이후 보소프의 Su-15TM은 연료 부족으로 돌아가고 교대를 위해 발진해온 아나톨리 케레포프의 Su-15TM이 대한항공 902편을 발견하고 근처의 아프리칸다(Африканда Afrikanda) 군공항으로 유도하던 중 얼어붙은 코르피야르비 호수를 발견하고 강제 착륙시킨다. 케레포프의 증언에 따르면 미사일 피격 후 약 1시간 20분간 유도해 가다가[21] 얼어붙은 호수를 발견하고 대한항공 902편의 날개를 자신이 탑승한 Su-15TM의 날개로 계속 눌렀다고 한다.
그리고 김창규 기장은 모든 악조건을 뚫고 비상착륙에 성공한다. 승객을 가득 태워 무거운 대형 여객기로 미사일에 피격된 상태에서 마찰력이 거의 없는 얼음호수 위에, 그것도 무려 야간에 비상착륙을 시도하여 부상자 하나 없이 성공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이는 순전히 김창규 기장의 뛰어난 조종 실력 덕분이었다. 역대 전세계 민항기 추락 사고 중에서 인명 피해 없이[22] 불시착에 성공한 극히 드문 케이스다. 소련군도 민항기 조종사의 환상적인 기동[23]에 대해 특기할 만한 사례로 분석했다고 한다.[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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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착륙 다음날의 모습. 김창규 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착륙 후 얼음이 깨지는 등의 이유로 비행기가 호수에 가라앉을 위험이 있으므로 착륙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기수를 틀어 땅에 비행기를 올렸다. 착륙 경로가 잘 보이는 거의 유일한 사진. [26]
고정 타겟이나 다름없는 대형 민항기에 발사된 두 발의 미사일이 아예 빗나가거나 날개 끝에만 맞아 계속 비행이 가능했던 점 등 운이 굉장히 좋았을 뿐더러, 소련 방공군 측에서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아 대부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시 인접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5방공군 예브게니 그로보프스키 대령이나 10방공군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장군 등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항공 902편을 레이더로 발견한 순간부터 인접 부대 지휘관들 간에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즉각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한다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는데[27] 결국 규정대로 요격기를 접근시켜 착륙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두의 작약량이 적은 공대공 미사일이 발사되었고 대한항공 902편이 큰 피해를 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28]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지대공 미사일은 무게 및 크기 제한이 있는 공대공 미사일에 비해 작약량과 파편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29] 피격되면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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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착륙한 902편에 접근해 감시하는 소련 병사들의 모습
비상착륙 후 승객들은 불빛 하나 없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착륙한 불 꺼진 비행기 안에서 2시간 동안 떨며 앉아 있었으며, 이후 군인들이 나타나자 미군인가 하다가 긴 코트에 우샨카를 쓴 모습에 소련군인 것을 알고는 공포에 빠졌다고 한다. 다행히 소련군은 승객들을 최선을 다해 잘 대해주었는데, 민항기를 격추시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대형사고를 낼 뻔했으니 일을 더 키우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비행기에 올라 여권을 걷은 뒤 3대의 대형 헬리콥터를 동원해 켐(Кемь Kem)이라는 지역의 군사도시[30]로 부상자, 여자, 아이들부터 이동시켰고[31] 따뜻한 장교 클럽에 남녀로 나누어 재우고 잘 먹였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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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제공받는 승객들
한밤중에 군인들이 동원되어 장교 클럽의 내부 집기류가 치워지고 충분한 양의 침대와 담요가 설치됐으며 지역 주민들은 조리 도구와 관을 만들었다. 승객의 대부분인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위해 을 구해다 밥을 지어주었고 유럽인 승객들에겐 햄버거 패티와 곡물, 삶은 감자가 제공되었다. 이들의 통역과 인솔을 담당했던 스베틀라나 파시우코바에 따르면[33]프랑스인오이바나나를 요구하자 얼어붙은 카렐리아의 산속 군사기지에서 한밤중에 어디선가 오이와 바나나가 나타났고, 영유아를 동반한 가족 승객들(한국인 11명)은 근처의 그나마 시설이 좋은 군 병원[34]의 병실을 제공받았는데 당시 그들을 담당했던 의사 루드밀라 미니나에 따르면 그들은 쌀밥 외에는 주는 음식을 모두 거절하고 직접 요리를 하려 했으며 레닌그라드에서 온 당 간부들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뭐든 구해주라고 하여 고생했다고 한다.[35]
이렇게 첫날 밤이 지나고 둘째 날에는 승무원과 승객들이 KGB에게 조사를 받았다. 조종사를 제외한 탑승자들에 대한 조사는 통상적인 수준 이었다. 김창규 기장의 심문에 배석했던 5방공군의 블라디미르 폴리오친 대령[36]은 김창규 기장은 자신은 소련 국경을 넘는 줄 몰랐으며 전투기가 접근해 동체의 붉은 별을 보여줄 때 알았다고 대답했으나 KGB는 받아들이지 않고 심문과 진술서 작성을 5회 이상 반복했다고 증언했다. 최종적으로는 민항기에 첩보 설비를 설치해 승객의 목숨을 담보로 정보 공작을 벌이려 했으며 소련 방공군이 빠른 긴급 발진과 미사일 공격을 통해 정보 공작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는 결론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폴리오친 대령에 따르면 KGB의 항공기 수색에서 대한항공 902편 조종석 아래에 숨겨진 강력한 무전 설비가 발견됐고 권총이 포함된 파일럿 생존 키트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착륙 후 소련군이 접근할 때까지의 빈 시간에 정찰 장비는 숲에 버리고 정찰한 정보를 모두 무선으로 송신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Su-15TM을 긴급 발진시켰던[37] 265항공연대에서 참모장이었던 발레리 볼리닉은 자살 시도가 아닌 이상 그런 식의 정찰을 할 이유가 없고 민간인 승객까지 가득 태우고 그럴 이유는 더더욱 없다고 이를 부정하고 정찰 장비 같은 것은 발견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인근 57항공연대의 지휘관이었던 비탈리 다이모프도 "발견됐다는 무전 장비는 아마 백업용 통신 장비였을 것이다"고 말하고 승객을 태우고 그런 일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북극 근처에서 측정 장치가 오류를 일으켜 오토파일럿이 오작동했다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종합해 볼 때 KGB의 보고서는 민항기에 미사일을 발사한 일에 대한 명분을 만들고 체제 경쟁에서 이용하기 위해 적당히 만들어낸 주장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승객들은 스파이 혐의가 없다고 판단되어 모두 돌려보내진다. 당시 대한민국과 소련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이 중재했고, 승객들과 객실 승무원들은 팬암보잉 727에 타고 우선 중립국인 핀란드수도 헬싱키로 이동한 후, 대한항공헬싱키로 보낸 또 다른 707에 타고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김창규 기장과 이근식 항법사는 추가 조사를 받은 후 역시 핀란드를 통해 귀국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때 헬싱키로 투입된 비행기는 9년 후, 폭파 사건의 희생양이 된다. 하지만 707 기체는 반환받지 못했으며, 러시아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소련은 이 기체를 철저히 조사하여 자신들의 여객기를 개량하는 데 활용했다고 한다. 이 러시아 언론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김창규 기장이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기사는 2008년 기사이고 김창규 기장은 2009년 세상을 떠난다.
이유야 어떻건 본의 아니게 공산권 국가로 넘어간 전력 때문에 귀국한 한국인 승객과 승무원 전원은 중앙정보부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며[38] 일부 심한 '''고문'''까지 받았으나, 대부분 무혐의로 풀려났다. 항간에는 이때 중정 측에서 기내 최고 책임자였던 김창규 기장의 도덕적 해이와 무능에 초점을 두어 '''비행기 순항 중에 기장은 고스톱이나 쳤다'''라는 이야기를 사건의 전말이라고 발표했다는 설이 돌고 있지만, 이는 사실 무근이다. 당시 국내 조사위는 블랙박스 등이 없어 제대로 된 사건 진상 규명을 하지 못했다고 발표했으며, 단지 아마도 항법사 실수와 계기 고장 등이 원인일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김창규 기장 등 승무원에게 카드 놀이 운운하며 태만 책임을 물은 것은 중앙정보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소련 측이었고, 이 주장이 외신 보도를 통해 국내에 전해진 것이다. 반면 국내 조사위에서는 반대로 조종실이 좁기 때문에 카드 놀이를 할 공간이 없으므로 소련 측의 주장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
그렇지만 이러한 논란 속에서 김창규 기장의 조종사 자격은 취소되었고 책임을 느낀 김 기장은 대한항공에 사표를 제출했지만, 이는 수리되지 않고 대신 지상 근무를 했다. 그러나 그는 9개월 만인 다음해 1월에 다시 조종사 자격에 응시, 합격했으며 곧바로 동형기인 707기 기장으로 복직했다. 5월에는 대한항공 최고 영예인 창공금상을 받고 7월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에서 AVG-CNAC 항공인상을 수여받는 등 책임을 덮어씌우기는커녕 뛰어난 조종 실력으로 비상착륙에 성공시켜 대참사를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 공로에 맞는 명예로운 대우를 받았다. 부기장과 기관사, 항법사 역시 김창규 기장과 함께 사표를 제출했으나 항법사 이근식만 사표가 수리되어 떠났고, 부기장과 기관사는 조사가 끝난 뒤 전원 복권, 복직되었다. #

4. 사고 이후


5년 후인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의 KE007편 보잉 747-200소련 방공군의 공격으로 사할린 상공에서 추락하여 승무원과 승객들이 전원 사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이후 영구결번 된 것과 달리[39], 파리발 인천행인 KE902편은 2018년까지 쓴 후 KE910편으로 바뀌었다가, 2019년 4월부터 다시 KE902편으로 바뀐다.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가 일어난 중국국제항공 CA129편 역시 유사한 사례.
이후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면서 소련 붕괴 이전인 1990년에 대한항공은 소련 영공 통과 승인을 받았다. 김창규 기장이 모스크바(셰레메티예보)로 가는 보잉 747의 기장을 했으며[40], 1991년 인터뷰에서는 소련 영공에 들어갈 땐 지금도 아찔하다면서 소련 정부가 902편, 007편 격추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소련 정부는 사과하지 않았고 소련은 그해 12월에 붕괴했다. 러시아 정부도 사과는 하지 않았다. 김창규 기장은 이후 미국 샌디에이고로 이민을 갔고 2009년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
대한항공시베리아 영공의 통과 승인을 받아 현재 에어버스 A380-861으로 모스크바 상공을 관통하면서 파리에 취항 중이다.[41]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의 A380도 마찬가지. 보잉 747-200 시절에는 한때 모스크바를 경유하기도 했다.[42] 물론 우크라이나 상공은 말레이시아항공 17편 격추 사건이나 시베리아 항공 1812편 격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회해서 운행하고 있다.

[1] 공교롭게도 5년 뒤 대한항공또 격추 사고를 당하자 GPS가 민간에 개방되었다. [2] 몇 년 뒤에는 대부분 항공사들이 보잉 707같은 구형기재에도 INS를 설치하거나 GPS항법을 설치했고 현재 날아다니는 군용 보잉 707들은 아예 FMC까지 개조해두거나 조종사 편의를 위해 글래스 콕핏으로 바꿔버리긴 했다.[3] 실제 극점과 자극점의 차이에 의한 오차.[4] 1993년 월간조선에서 기장과 인터뷰에서는 항법사가 그린란드 상공에서 오른쪽으로 30도 수정하라고 지시했고 이 후 육지가 보여야 하는데 바다가 나와서 어떻게 된거냐 묻자 '''육지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물론 항법사는 그런 사실이 없고 자이로 문제였다고 주장했다는 후문.[5] 소련 공군과는 다르다! 방공군의 소련 내 명칭은 V-PVO. 공군은 VVS로 명명되었다. 현재 러시아 공군은 방공군과 공군을 다 통합한 형태.[6] 당시 공군에서 운용 중이던 '''보잉 707'''의 군용형 모델, 정확히는 군용형인 KC-135가 먼저고 그후에 여객기인 '''보잉 707'''이 나온 것이다.[7] 이 인터뷰에서 그는 '귀국 후 만난 미 정보요원이 당시 소련 공군 상황에 대한 매우 자세한 얘기를 했다.'고 주장하며, 이런 미군이 이 상황을 몰랐을리 없고 그들이 소련 방공망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 902편을 희생타로 삼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8] 차르코프의 증언으로는 당시 핀란드 국경과 80km 거리였기 때문에 당시 902편의 900km 속도면 6분 안에 소련 영공을 벗어난다. 아직 항공기의 정체가 확실하지 않아 적국의 군용기일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절대 놓치면 안 되므로 격추를 명령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이 결정에 대해 훈장을 받았다[9] 핀란드 로바니에미 항공 관제소에 모두 기록됨. 2000년에 공개된 교신 기록에 따르면 미사일에 맞기 전까지 김창규 기장은 대한항공 902편이라는 것을 세번 분명히 전달하였다.[10] 그리고 보소프는 영어를 못했다[11] 당시 50세[12] 좌석번호 19A[13] 방태환, 36세 대우건설 직원, 좌석번호 24E[14] 좌석번호 23A[15] 부상이 심각해 피격 직후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영국인 승객 윌리엄 하워드는 러시아인들의 의료지원이 느리고 부적절해 그가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16] 좌석번호 23B, 허벅지와 종아리에 파편상[17] 좌석번호 23C, 발에 파편상[18] 고고도는 기압이 낮아 5~10분이면 전원 질식사하게 되므로 가능한 빨리 고도를 낮춰야 한다.[19] 속이 비어있고 면적이 넓어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20] 파일럿은 세르게이 블로보드치코프[21]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사일 피격 후 바로 비상착륙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상시 무선 감청 및 항공기 추적을 하던 소련 정보기관에서 항공기의 정체(편명, 항로, 기종, 항공사, 승객 수, 승무원 수)를 확인하고 방공부대 지휘관들에게 전달하여 민항기임이 확정된다.[22] 미사일 피격에 의한 피해 제외[23] "Фантастический маневр гражданского летчика"[24] 대한항공 입사 전 베테랑 공군 파일럿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당시 소련 측이었던 국가의 매체 기사나 당시 인물들의 인터뷰에는 그가 베트남전에도 참전해 소련 전투기들과 싸웠다는 표현이 등장하며 군 조종사였다는 점에서 그에게 의혹을 제기하지만, 베트남전에 한국 공군은 수송기인 C-54D로 후방 수송을 담당한 은마부대만 참전했으며 그가 은마부대로 파견되었는지 여부 역시 확인이 불가능하다.[25] 단 이건 애초에 음모론 축에도 못 끼는데, 세계 어느 나라든 간에 공군 파일럿 출신이 전역 후 민항기 조종사가 되는 케이스는 너무나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파일럿 자체가 육성이 쉽지 않은 엘리트들이며, 전역하면 당연하게도 민항기 조종 외에는 별 다른 선택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항사 입사 자체가 애초에 자격 요건(대표적으로 비행 시간) 등으로 인해, 공군 파일럿 외에 다른 선택지로 이걸 채우려면 대부분 돈이 매우 많이 든다는 문제도 있다. 괜히 민항사 내에 공군 출신과 민간 출신 파벌로 대립하는 게 아니다. 자세한 것은 조종사 를 참조하자.[26] 출처: Корейский Боинг в Карелии (2018), Юрий Викторович Шлейкин [27] 당시 무르만스크에서 소련군의 군사 훈련이 진행 중이었다. 드미트리예프 대령은 지금도 고의적인 도발로 생각한다고 한다.[28] 대한항공 902편으로 정체가 확인된 후 소련군 지휘관들도 격추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29] 예를 들면 이때 발사된 공대공 미사일인 R-60의 탄두 무게는 3kg이지만 당시 소련 방공망에서 사용하던 SA-2 지대공 미사일의 탄두 무게는 200kg이다.[30] 호수 바로 앞의 Louhi는 이런 많은 인원을 수용할 시설이 없었다[31] 4월이라 다들 복장이 가벼운 봄옷과 샌들, 슬리퍼 등이었다.[32] 앞서 말한 시오자키 세이코의 기록[33] 해당 지역 공산당 선전부의 영어교사였고 한밤중에 갑자기 불려나와 뜬금없는 백명의 외국인들을 보고 황당했다고 한다.[34] October Railway Hospital, 1979년 해체됨[35] 예를 들어 이들이 셀러리를 요구했는데 셀러리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었다고 한다.[36] 김창규 기장이 심문 내내 굉장히 침착했고 말보로 담배를 피우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위의 10방공군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첩보 작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37] 아나톨리 케레포프와 세르게이 블로보드치코프[38] 이 때는 아직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되기 전일 뿐만 아니라 외국에 나가기 전에 반드시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다. 공산권 국가로 넘어갈 경우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39] 무르만스크에서 대한항공 902편에 미사일을 발사했던 알렉산더 보소프는 놀랍게도 이때는 사할린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건에 연관되지는 않았다.[40] 그것도 902편으로 같았으나 앵커리지 대신 모스크바 경유 파리행이었다.[41] 당연히 에어프랑스에서도 AF5092편으로 걸려 있다.[42] 심지어 모스크바 공항 첫 착륙 항공편이 902편이었다. 당시 1988년에 B747-200으로 정기 취항이 아닌 한소 외교체육 패키지 회담 때문에 앵커리지 대신 임시로 모스크바 경유로 갔었다. 물론 보잉 747-400의 추가 도입 과정에서 이 노선과 런던, 프랑크푸르트 행 항공편이 직항으로 전환되고, 이후에도 모스크바 경유로 유지되던 암스테르담-취리히, 비엔나, 로마, 마드리드 편도 90년대 중후반 이후 직항으로 대체된다. 물론 한국-러시아 간 직항은 아주 잘 다닌다. 아니 아예 극동 쪽은 항공 자유화로 여러 저가항공까지 가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