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인

 


1. 개요
2. 민족
3. 편견
3.1.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호전적이며 여성혐오적이다
3.2. 부르카는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특징이다
3.3.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아랍인이다
4. 해당 인물
5. 관련 문서


1. 개요


  • 영어 : Afghanistani People / Afghan[1]
  • 파슈토어 , 다리어 : افغان‎
아프가니스탄인 혹은 아프간인은 아프가니스탄 영토에 거주하거나 기원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프가니스탄은 기본적으로 다민족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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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초반 아프가니스탄 왕국 시대 사진들

2. 민족



2.1. 파슈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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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슈토어를 쓰는 주류 민족인 파슈툰인이 대략 전체 인구의 40~45% 정도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다수 민족이지만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는 북부 산악지대에 사는 비주류 민족 대우를 받고 있다. 파슈툰인 거주지역의 정가운데가 인위적인 국경으로 분단된 꼴이다.[2]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주로 이슬람 수니파 계열의 하나피파를 믿지만 일반적인 하나피파와는 교리와 문화가 좀 다르다. 파슈툰인들에게는 이슬람 도래 이전부터 전해져 온 민족 규율인 파슈툰왈리(پښتونوالی, Pashtunwali)가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파슈툰인들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외에 인도에도 살며 두라니 왕조 시기의 파슈툰인들이 이동하면서 인도 서북부 카슈미르에도 일정수 이상이 거주한다. 그리고 난민이 된 사람들이 인도 대도시인 뭄바이 등에 정착하기도 했다. 수르 제국 등을 포함한 인도 북부의 이슬람 왕조 상당수가 파슈툰계 왕조이지만 해당 왕족 후손들은 오늘날 다른 인도인들에게 동화된 상황이다.
아프간이라는 말 자체가 페르시아어로 파슈툰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외에도 두라니 왕조를 세운 파슈툰인들은 아프간이라 불리기 이전에는 아브달리(ابدالي, 에프탈)로 불렸다고 한다.
타지키스탄과 중국,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4개국의 국경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사리콜인, 와키인, 슈그니족의 경우 언어는 파슈툰어와 비슷하지만 종파와 문화가 다르다 한다.

2.2. 타지크인


그 다음으로 다리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타지크인이 대략 30~35% 정도를 차지한다. 이들은 그냥 이란인과 동계다. 다만 오늘날 이란인들이 근세 사파비 제국의 영향으로 시아파가 주류가 된 것과 다르게, 타지크인은 수니파가 주류이다. 타지크인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민족을 타지크라고 간주하기 보단 수니파 페르시아인이라는 표현을 훨씬 더 좋아한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들을 타지크로 부르는것이 종족명(Ethnonym)이 아닌 동인이명(Heteronym)이기 때문이다. 타지크라는 단어 자체는 튀르크인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는 일반적으로 파슈툰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부를때 사용된다.
반탈레반 통일전선이었던 북부 동맹의 주요 지도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대표적인 타지크계 아프가니스탄인이다. 타지크인들은 전반적으로 과거 구소련 영토였던 타지키스탄의 영향도 있고, 탈레반의 영향도 적게 받은 편이라 근본주의 성향이 덜한 편이다.[3]
그 다음으로는 하자라인, 아이마크인, 튀르크멘인과 같은 튀르크계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다만 민족에 따라서 도시화 비율이 크게 차이가 난다.

2.3. 하자라인


하자라인은 이 지역에 파병군으로 정착한 몽골-튀르크계의 후손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 정확한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하플로그룹 조사 결과 위구르, 우즈베크 등 차가타이계 튀르크와 흡사하지만, 아프리카 흑인에게만 나타나는 '''부계''' 유전자를 가진 경우가 꽤 있었다 한다.[4]
하자라인은 타 소수민족에 비해 도시화 비율이 높고 주류 사회에 섞여 살아가기 위해 페르시아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하자라인들이 쓰는 페르시아어 방언인 하자라어는 파슈토어나 다리어와는 차이가 매우 커서 의사소통이 그다지 원활하지 않다. 또한 대다수의 소수민족은 수니파 이슬람을 믿는데 비해, 하자라인은 시아파 계열의 12이맘파 이슬람을 믿는다.[5] 또한 눈에 잘 띄는 외모까지 섞여서 아프가니스탄 내에선 가장 심한 배척을 받고 있는 민족이다.
그러나 탈레반이 들어선 이후로는 어차피 그 실상은 무슬림이라 해도 탈레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온갖 박해를 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자라인과 투르크멘, 우즈베크 등의 튀르크인들이 모두 연합하여 북부 동맹군을 구성, 중앙의 탈레반과 대적하기도 했다. 초창기 탈레반이 인기를 얻은 이유가 하자라인에 대한 집단 학살과 탄압을 내세운 점도 있었는데, 아프가니스탄 내 하자라인 혐오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자라인들 중에는 이러한 처지가 싫어서 이란, 파키스탄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란에서도 몽골에 대한 혐오 감정이 워낙 강한 관계로 주류 종파가 같은 이란 내에서조차 길거리에서 구타를 당한다든지 같은 차별이 많고, 생활수준도 크게 낮다. 그러다보니 사회적인 인정을 받거나 먹고살길을 찾아 이란군 외인부대로 입대하는 경우도 많다. 파키스탄 내에서는 주로 발루치스탄 퀘타에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2.4. 우즈베크인


우즈베크인은 아프가니스탄 전체 인구의 7~10%를 구성하며,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인구 수가 네 번째로 많은 민족이다. 근세 티무르 왕조 시절부터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은 역사를 상당부분 공유해왔다. 재밌는 것은 티무르 왕조 시절에도 우즈베키스탄 일대는 비교적 온건하고 세속적인 형태의 이슬람을 믿었고, 아프가니스탄 일대는 엄격하고 교조적인 분위기의 이슬람 문화가 있었다 한다. 무굴 제국을 건설한 바부르도 어떻게 보면 우즈베크계 아프가니스탄인이다.
우즈베크인들이 파슈툰 국가에 통제를 받게 된 역사는 19세기 바라크자이 왕조 때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독자적인 우즈베크계 칸국들의 주민이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의 투르키스탄 병합 이후 우즈베크 칸국들이 무너지며 갈 곳이 없어진 우즈베크인들이 바라크자이 왕조에 투항한 것이다.

2.5. 그 외


아이마크인,[6] 튀르크멘, 키르기스,[7] 발루치족, 펀자브인, 파미르인(와키인, 슈그니족 등),[8] 누리스탄인'), 브라후이족 등이 있다. 파미르인이나 누리스탄인의 경우 서유럽 백인과 구분이 힘든 수준의 외모로 금발벽안에 피부색이 밝은 편인데, 과거 인도유럽어족의 중앙아시아 이주 정착 과정에서 척박하고 고립된 산악지대에 잔류한 인원들의 후손이 외부인들과 통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이어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9]
몽골 제국 시대 정착한 몽골 군인들의 직계 후손에 해당하며 현재도 몽골어족 모골어를 사용하는 모골인들도 있다. 이들의 경우 하자라인과 다르게 수니파를 믿으며 아프가니스탄 현지인들과 통혼이 있던 관계로 외양이 하자라인보다는 남아시아계 민족 등과 흡사하다.
심지어는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에 소련군 병영 부조리 때문에 탈영하거나, 혹은 포로로 붙잡혔는데 무슬림이라서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정착한 러시아인도 1천여 명 내외라고 한다. 특히, 아프간내 일부 러시아인들중에는 탈레반 정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에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아프간인이 된 경우가 있었다.#1#2
아이마크인의 경우는 똑같이 페르시아어를 쓰고 수니파 이슬람을 믿는 타지크인과 합쳐서 계산하기도 한다. 차이점이라면 타지크인들은 아리안 유목민이었으나 정주도 하였고 아이마크인은 유목민이었다는 점.
극소수의 아제르바이잔인의 지파인 아프샤르족들이 있기도 하다. 나디르 샤가 아프가니스탄의 호타키 왕조를 정복하면서 정착한 사람들인데, 같은 시대 키질바시 수피 교단에 소속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하기도 했으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영국 편을 들었다가 분노한 파슈툰족들에게 때죽음을 당하고 대부분 오늘날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추방당했다.

3. 편견



3.1.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호전적이며 여성혐오적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중세 초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던 불교 승려들의 기록에 따르면 해당 지역 주민들이 부인의 말을 잘 따른다는 기록도 있긴 하다. 무슨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태생적으로 여성혐오적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웃한 타지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은 이런 문제가 없고 또 다른 이웃국가인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권에서 가장 여성인권 의식이 진보적인 나라 중 하나이다.
이것은 탈레반이 운영하던 마드라사들이 여성 혐오를 조장했던 것이 문제였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와중에 많은 전쟁 고아들이 발생했는데,[10] 마드라사들이 이들을 거두면서 아불 알라 마우두디사이드 쿠틉의 영향을 받은 여성혐오 성향의 이슬람주의 신학을 주입한 것이 문제였다. 마드라사에서 어머니나 남매를 비롯한 여성들과 전혀 접촉이 없이 분리된 상태에서 자라난 소년들은 후에 탈레반의 핵심 멤버가 돼서 여성의 노출을 미신적이다 싶을 정도[11]로 극도로 죄악시하는 비뚤어진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비교하자면 차우셰스쿠가 비밀 경찰들을 주로 고아 출신들을 데려다가 세뇌 교육을 시킨 것을 생각하면 된다.
미국은 냉전이 끝난 1992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무장단체들을 방치(사실상 토사구팽)했는데 특히 조지 부시는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대한 명분의 근거를 찾기 위해 탈레반 정권 당시 활동했던 여성단체인 '''Revolutionary Association of the Women of Afghanistan'''가 2001년 8월 26일에 탈레반 경찰이 부르카 쓴 여성들에게 매질하는 것을 몰카한 것을 이용했다.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조지 부시가 이를 이용한 것은 이중잣대이며 이런 몰카도 아프가니스탄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대중화되는데 기여했다. 특히 2007년에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가 발생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견고화했다.
파키스탄 출신인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주류 민족이기도 한 파슈툰인이 아프가니스탄인 중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 보수적인 편이지만, 오늘날 파슈툰인 내에서도 개혁을 통한 편견 해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16년에 개봉된 파키스탄 영화인 '''Janaan'''이 이를 반박하고 있다. 말랄라가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호평했다.[12]
불행 중 다행히도 탈레반은 여성할례는 시행하지 않는다. 물론 탈레반이 여성 할례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여성 인권을 고려해서는 아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할례 악습을 시행하는 집단이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보흐라파(Bohra; 보라파라고도 한다.)라는 시아파 내 소수종파이기 때문에, 이단적 풍습이라 생각해서이다.

3.2. 부르카는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특징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동북부에 거주하는 고대, 중세 문화를 보존하는 파미르인들의 경우 히잡으로 머리카락만 가리지, 부르카를 쓰지 않는다.[13]
고대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보에 따르면 이란 서북부의 해당하는 메디아의 일부 여성들이 베일로 안면을 가렸다는 기록이 나와있으며, 서기 3세기 초 로마 제국 동부의 기독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토속신앙을 믿는 아랍인들이 처녀에게 머리 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를 베일로 가리게 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다만 고대의 니캅은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의 그것과는 용도나 의미가 달랐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이슬람 이전 시대 아랍 시들을 보면 가젤처럼 날씬하고 피부가 뽀얀 여성을 찬양하는 시가 많이 나오는데, 원래 니캅 같은 얼굴을 가리는 형태의 복식 및 아바야 등은 자외선으로부터 피부가 타지 않게(피부미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자외선 과다노출은 피부 노화를 촉진한다.)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즉 원래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풍습이 아닌 중동 지역의 풍습이었다.
근세 이후로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파란자라 해서 결혼식날 신부가 옷으로 얼굴을 덮어서 결혼식 초반에 얼굴을 가리던 풍습이 있었는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와중에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을 지원하던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를 비롯한 걸프 산유국들이 니캅을 미풍양속이라고 권장하면서, 탈레반 측에서 타지크인들이 결혼식날 등에 입던 파란자를 좀 더 저렴하게 변경한 후 민간에 입도록 강제한 게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부르카이다.[14]
아프가니스탄 북부 타지키스탄의 경우 러시아 제국 내에서 타지크인 중에서 일부 상인 가문들이 여성들에게 평소에도 파란자를 입고 다녔는데,[15] 스탈린 정권 당시 다 때려잡았다.

3.3.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아랍인이다


  • 비다 모하마드가 한국에 살면서 느낀 문화충격 동영상에 대한 유튜브 댓글 반응[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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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이 사우디,예멘같은 아라비아국가들과 똑같이 사막이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흑발흑안에다 터번을 쓰고 이슬람을 내세우기 때문에 같은 민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17]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은신했던 것이 대중매체에 알려지면서 이런 오해가 더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인들의 대부분 민족들은 셈족이 아니라 이란계 아리아인이다.
7세기 우마이야 왕조가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던 당시 아프가니스탄 서부 호라산 지역에 상당수의 아랍인들이 정착한 적도 있었으나, 중세 초 압바스 왕조의 발흥 이후 대부분 현지인들과 동화하였고, 호라산 아랍어라는 특유의 방언을 사용하는 아랍인 상인 인구가 유대인 인구 수준으로 극소수 남아있었으나 19세기 중앙아시아 무역이 무굴 제국의 약화로 급격히 쇠퇴한 것을 계기로 자취를 감추었다.[18]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인 중 아랍계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절 무자헤딘으로 참여했던 아랍인 후손 극소수 of 극소수이다.

4. 해당 인물



5. 관련 문서


[1] 이 경우는 주로 파슈툰인만 의미한다.[2] 반대로 파키스탄의 주민족인 펀자브인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걸쳐 존재한다. 물론 파키스탄 펀자브 지대와 인도 펀자브 지대는 주민들이 주로 믿는 종교가 다르다.[3] 타지키스탄의 타지크인 같은 경우는 기독교로 개종한 친척과 아무렇지도 않게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프가니스탄 파슈툰인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경우이다.[4] 아프가니스탄의 이웃국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주민들 중에서 조상이 흑인인 경우가 꽤 된다.[5] 아프가니스탄 내 시아파들은 하자라족을 제외하면 전통적으로 주로 이스마일파보라파이다.[6] 몽골인의 약탈 이후 사막화가 심해진 아프가니스탄 서부에는 타지크인 농민들이 농업을 포기하고 유목을 하면서 아이마크인이 되었다.[7] 아프가니스탄 최동단 지역의 바다흐샨 주에 거의 고립된 상태로 거주한다. 지나치게 고립되고 외진 동네인지라 이 지역은 전쟁의 여파도 별로 미치지 않았을 정도였다.[8] 키르기스인을 제외하면, 전부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에 속한다. 사실 중국에서 타지크족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정체가 바로 파미르인들이다.[9] 기원전 2000년경 팽창기 당시 인도유럽어족들은 부족원들이 마차를 타고 다니며 농사가 가능한 땅에 종자를 뿌리고 농사를 지은 후 인구가 늘어나서 농경지가 부족하면 부족원 상당수가 다시 마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반농반목 문화였다.[10] 소련 아프가니스탄 전쟁 와중에 아프가니스탄 측 인명 피해는 200만여 명 정도에 달했다.[11] 대표적으로 탈레반 정권 시절 한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부르카를 입은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실수로 팔이 약간 노출되었다가, 분노한 광신도 한 명에게 구타당해 맞아죽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례가 있다.[12] Malala Wishes Team Janaan! [13] 파미르인 상당수가 이스마일파를 믿는데 근자에 이스마일파에서 여성 인권 운동에 힘을 좀 쓰는 관계로 히잡 대신 (머리카락이 좀 더 노출되는) 원통형 모자로 대체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14] 청렴한 살라프파 학자로 유명했던 셰이크 알 알바니니캅이 이슬람 고유 의상이 아니라고 지적했다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게 찍혀서 시리아와 요르단을 전전했듯이, 살라프파 내에서도 부르카는 무슬리마 복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하는 편이다. 부르카를 강요하는 것은 탈레반, 다에시 이렇게 두 집단이다.[15] 이 경우는 조선시대 말 장옷처럼 나는 일 안하고 하인 두고 산다고 부를 과시하는 경우였다.[16] 출처 - 아프가니스탄인이 한국와서 충격받은 이유 TOP4(유튜브) [17] 아프가니스탄의 사막은 이라크, 시리아와 달리 고도가 높기 때문에 8월이라도 기온이 낮으며 산에서 눈을 자주 볼 수가 있다.[18] 호라산 방언을 사용하던 중앙아시아 아랍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 소수 남아있었는데 그마저도 소련 시절에 탄압을 받아, 오늘날 기준으로는 노년층 이하는 해당 아랍어 방언을 잘 구사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나마 우즈베키스탄은 러시아에 중국산 차(茶)를 수출하던 무역이 유지는 되었기에 아프가니스탄과 다르게 유대인 및 아랍인 인구가 어느정도 보존되었던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