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화된 다섯 부족
'''Five Civilized Tri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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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공식홈페이지
미국에서 백인 문화를 수용한 아메리카 원주민 다섯 부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체로키족, 세미놀족, 촉토족, 치카소족, 머스코기족[1] 이 여기에 속한다.
오늘날에는 '''문명화된 다섯 부족(Five Civilized Tribes)'''이라는 용어는 백인 우월주의적인 시각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공식 석상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학술적인 목적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때문에 오늘날에 이들 부족을 가리킬 때는 주로 '''다섯 부족(The Five Tribes)'''이라는 말을 쓴다.
흔히 다섯 부족이라고 묶어서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이 단일 부족 연맹을 구성했던 것은 아니고, 서로의 관계가 우호적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2] . 그냥 이들이 우연하게도 사우스캐롤라이나부터 미시시피까지 미국 남동부 일대에 모여살았던 까닭에 한때 싸잡아서 다섯 부족이라고 지칭했을 뿐이다.
체로키족과 세미놀, 촉토, 치카소, 머스코기의 5개 부족은 16세기를 전후하여 백인들과 처음 접촉한 후에는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로, 이들 부족들은 타 부족들이 비해서도 선진적인 제도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에 이 부족들은 농장제도와 노예제도를 포함한 백인 정착민들의 제도를 그대로 채택하고 백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이유로 백인 사회에 의해 문명화된 부족이라고 여겨졌다. 가령, 아메리카 원주민 민족들 중의 일부는 공화제와 유사하게 자신들의 대추장을 부족장들끼리의 투표로 선출한 바 있었고[3] , 부족 산하의 마을들 마다 마을 장로를 중심으로 자치를 하기도 했는데, 이들 다섯 부족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서 아예 현대 민주주의 체제를 적극 받아들였다. 우선 부족장들끼리의 부족 회의를 부족민들의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로 전환했고, 자기들 부족어로 된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으며, 삼권분립을 명문화하고 행정부 산하의 장관에 해당하는 전쟁추장, 평화추장 등의 직위도 두었다[4] . 그리고 백인들이 가진 선진 과학기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하거나, 공장을 세우기도 하는 등, 경제를 빠르게 발전시켜 나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노예 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본래 흑인들은 백인들의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탈출하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게 합류하는 일이 잦았고, 다섯 부족으로 탈출한 사람도 많아서 처음에는 이들이 부족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부족의 규모가 커지면서, 오히려 백인들로부터 노예를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많은 수의 다섯 부족민들이 노예를 보유한 노예주가 되었다.[5] 이는 뒷날 다섯 부족의 대부분이 남북전쟁에서 남부연맹의 편을 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 역시 자신들의 터전인 미시시피 강 동쪽의 미국 남동부에서 쫓겨나 오클라호마 등지로 강제 이주 당하였다. 1830년에 다섯 부족들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인디언 이주법에 따른 일련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그들의 고향인 미시시피 강 동쪽에서 쫓겨나 현재 오클라호마 동부에 있던 인디언 준주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강제 이주는 체로키 족의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이었다.
다섯 부족들도 조만간 세력이 커진 백인들의 정부가 자신들의 영토를 위협할 것이라는 것은 진작에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백인들과 동등한 관계를 인정받고 자신들이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백인들의 문물을 받아들이고는, 이를 바탕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착실하게 키워나갔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유럽화를 이뤄낸 체로키족과 악착같이 백인들에게 저항한 촉토족을 제외하면 완전히 몰락하여 미국 사회의 하층민이 되었으며, 그나마 백인들과 비교해도 꽤 잘 사는 편인 체로키족 역시 부족이 2~3개의 분파로 갈라지고, 부족민의 대부분이 오클라호마로 추방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체로키족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부족들은 본래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이주한 이들이다[6] . 그래서 자신들의 원래 고향과 가까운 오클라호마에서 얼추 적응하는데 성공했지만, 체로키족은 멀리 뉴잉글랜드와 오대호 일대에서 거주하다가 남하한 이들이어서 그들에게 오클라호마는 생판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래서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죽어라고 개고생하면서 경제 기반을 다시 닦아야 했다.
이들은 얼마 못 가서 원래의 경제력을 상당 부분 회복하였지만, 이는 흑인 노예들을 가혹하게 쥐어짜면서 이뤄낸 성과라서 뒷날 다섯 부족의 대부분이 노예제 폐지에 반발하여 남부연맹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 부족이 오클라호마에 정착한 뒤에, 오클라호마에는 샤이엔족 등을 포함한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원래 살던 곳에서 추방되어 이주해왔다. 이에 따라서 1834년에 미국 정부는 이들 부족들에게 할당된 보호구역들을 모아서 인디언 준주를 출범시켰다. 이 인디언 준주는 1907년까지 존속하다가 이웃한 오클라호마 준주와 합병하여 오늘날의 오클라호마 주가 되었다. 하지만 오클라호마로 강제이주당한 다섯 부족은 여전히 노예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흑인들의 다섯 부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1842년에 흑인 노예들이 체로키인 농장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뒤이어 백인 노예사냥꾼들에 의해 촉토인 농장주에게 팔려가던 흑인들도 반란에 합류했고, 이들은 오클라호마를 탈출하여 멕시코로 달아나려 했으나, 뒤쫓아온 체로키-촉토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체로키 노예 반란이라 하여 1859년에 백인 개신교 목사이던 존 브라운이 일으킨 반노예제 봉기 이전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노예 반란 사건이다. 그러다가 1861년에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섯 부족은 지지할 세력을 두고 분열하였다. 촉토 족과 치카소 족은 주로 남군에 붙어 싸웠고, 머스코기 족, 세미놀 족, 체로키 족은 북군과 남군을 지지하는 계파로 분열되었다. 특히 체로키 족은 남군에 붙은 세력과 북군에 붙은 세력 사이에서 동족 간의 싸움까지 벌였다.
1907년에 오클라호마 준주와 인디언 준주가 오클라호마 주로 합병되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은 오늘날에도 그 존재가 남아 있다. 미국 원주민들, 특히 이들 부족 외 다른 부족 사람들은 문명화된 다섯 부족이라는 말을 인종차별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문명화된이라는 말은 미국 원주민이 야만적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하므로, 미국 원주민 부족들이 함께 토론을 할 때에는 '문명화된'이라는 표현은 피하고 대부족이라는 단어를 쓴다.
과거 자신들의 노예였던 흑인들과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있다. 가뜩이나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한 미국에서 체로키 족과 세미놀 족은 자기 부족의 일원으로 살던 흑인들의 부족 시민권[7] 을 박탈하는 간 큰 짓을 벌여 연방 정부의 어그로를 끌고 있다. 특히 세미놀 족은 대놓고 부족민 투표를 통해 흑인들의 부족민 자격을 박탈했는데, 이에 발끈한 연방 정부가 세미놀 족들에게 허가해준 카지노 사업권을 회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투표 결과를 취소한 사례가 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 중에서는 문화적으로 가장 이질적인 부족으로, 나머지 부족들이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번성한 미시시피 문명을 세운 이들의 후손이며 언어학적으로는 머스코기어족에 속하지만, 체로키족은 예외로 이로쿼이어족에 속하며, 오늘날의 뉴잉글랜드 일대에서 남하한 민족이다. 이들은 독자적인 체로키 문자를 만들어서 신문과 서적을 간행하고 흑인 노예를 이용해서 운영되는 대농장을 만들기도 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백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부족 사회를 민주주의 체제로 개혁했으며, 그런 관계로 이들 중에서는 가장 부유한 부족이 되었다. 이미 17세기경부터 영국과 접촉하여 영국식 문화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8] 그래서 영국군에 입대하여 장교가 된 사람도 여럿 있었고, 이것이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혁명 때 체로키 족이 친영 성향을 띠는 계기가 되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일으킨 눈물의 여정 사건으로 인해 체로키 족은 두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버렸다. 오클라호마로 강제이주당한 이들과 원래의 고향인 테네시 주에 남은 이들로 나뉘었다. 그리고 오클라호마의 체로키 족들도 다시 분열되어 분파가 갈라졌다. 이들 각각은 현재도 미 연방 정부로부터 따로따로 공인받아서 보호구역을 할당받았다.
현재 다섯 부족들 중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은 부족이며, 2018년 기준 부족원 전체 인구는 316,049명, 2010년 기준으로 체로키 혈통을 가진 사람은 819,105명으로 집계된다. 체로키 족 핏줄을 가진 유명인만 해도 배우 웬트워스 밀러,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셰어, 척 노리스, 케빈 코스트너 등, 위키러들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이들이 많다.
머스코기족은 달리 크리크족이라고도 불리며, 아래의 세미놀족과는 사촌뻘되는 민족이다. 이들은 미시시피 강 일대에서 발흥한 미시시피 문화를 창시한 이들의 후손으로, 머스코기족을 포함한 미시시피 원주민들은 16세기 중엽에 스페인에서 온 콩키스타도르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처음 그 존재가 알려졌다.
콩키스타도르의 정복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 대한 유화책을 들고 나온 스페인 왕실에게 칭신하기로 선언하였고, 그 뒤로도 미시시피 강 일대에서 계속 거주하다가, 18세기경에 스페인이 프랑스에 밀려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을 하나둘씩 잃으면서 그들을 따라 오늘날의 플로리다 주로 이주했다. 머스코기족은 스페인의 속국으로 존속하던 중에 유럽의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으나, 과거에 있었던 콩키스타도르의 침략과 함께 유럽에서 건너 온 전염병이 퍼진 탓에 많은 수의 인구를 잃었고, 때문에 플로리다 주로 이주할 당시에는 이미 세가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친척 부족인 세미놀족이 미국의 침공을 받아 패망하고 오클라호마로 추방당하는 와중에 미국 정부에 감히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오클라호마에 할당된 보호구역으로 들어갔다.
머스코기족 역시 이런 강제이주로 인해 부족이 둘로 갈라지는 비극을 겪었으나, 다섯 부족에 속한 다른 부족과는 달리 본토인 테네시 주에도 많은 수의 부족민들이 남을 수 있었다. 2010년 기준 머스코기족 전체의 인구는 88,332명으로 추산된다.
16세기경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세미놀족과 처음으로 조우한 뒤에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세미놀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에 세미놀족은 북아메리카의 다른 원주민 부족들인 푸에블로족 등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수준의 농업 기술과 깔끔하게 정돈된 마을을 이루고 살았지만, 황금으로 가득한 땅인 시볼라에 대한 전설에 혹한 스페인인들의 침략과 이 시기에 유행한 천연두, 홍역 등의 유행으로 인해 많은 수의 세미놀인들이 사망하면서 인구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이들 콩키스타도르들은 분노한 푸에블로인들의 보복으로 침략에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결국 스페인 왕실은 푸에블로와 세미놀 두 부족에 대하여 종주권을 인정받고 그들의 영토를 스페인의 식민지로 삼는 조건으로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유화책으로 선회했고, 뒤이어 스페인 본국에서 원주민들의 법률 자문을 담당할 변호사들이 파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세미놀 족과 백인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세미놀 족은 스페인으로부터 갖가지 선진 문물을 도입하였다. 우선 그들의 전통 의상이 당대 유럽인들의 의상을 크게 본딴 형태로 바뀌었고, 스페인제 철제 판갑옷을 도입하고 이를 자체 생산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지금의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조지아 주,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이르는 굉장히 드넓은 영역에 거주했고, 이곳에서 원래 보유한 농업 기술에 유럽의 플랜테이션 농법을 결합하여 대규모의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똑같이 문명화된 다섯 부족으로 분류되던 체로키족과는 달리, 이들은 미국과 적대하려 하지 않아서 미국과는 굉장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부족이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노예 제도의 확산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었고, 미국 남부의 노예주들의 가혹한 착취와 인권 탄압을 견디지 못한 흑인 노예들이 탈출하여 세미놀족에 합류하자, 미국과의 관계가 굉장히 냉랭해졌다. 결국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앤드류 잭슨이 세미놀 족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세미놀 전쟁이 발발했고, 거기서 패해서 상당수가 오늘날의 오클라호마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세미놀족 역시 이웃한 체로키족과 똑같이 부족이 둘로 갈라지고 많은 수의 부족민들이 이주 도중에 희생되는 비극을 겪었다. 세미놀족은 다섯 부족에 속한 다른 부족과는 달리 노예 제도를 채택한 적이 없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을 계기로 흑인에 대한 배척 여론이 급증하였고, 이 때문에 1861년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는 남부연맹에 합류할 지의 여부로 부족 내에서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플로리다에 남아있던 극소수의 세미놀족들과 오클라호마에서 플로리다 고향으로 돌아온 세미놀족들이 연방정부와 협상해 보호구역을 재건해 오늘날 세미놀족은 오클라호마주와 플로리다주에 가장 많다.
한편 남북전쟁 시기의 영향으로 인해 부족 내에 인종차별 여론이 더욱 기승을 부려서 급기야 2000년에는 부족민 전원이 참여하는 투표를 통해 흑인들의 부족민 자격을 박탈하는 사태까지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인종차별 문제에 넌더리가 난 연방 정부가 이 사태에 분노하여 세미놀족의 카지노 운영권을 회수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자, 결국 세미놀족들이 투표 결과를 취소하였다. 이런 역사 때문에 현재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스포츠팀의 마스코트는 이들이다. 2018년 기준 세미놀족 전체의 인구는 18,600명 정도에 이른다.
본래 치카소족은 미시시피 강 유역에 거주하던 이들로 스페인인 콩키스타도르들의 침략을 막아낸 뒤로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로 이주했다. 이후에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일대에 영국이 버지니아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영국인들로부터 선진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다. 문제는 치카소족이 이웃한 촉토족을 공격하여 많은 수의 사람을 납치해서 영국에 노예로 팔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두 부족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고, 뒷날 촉토족이 치카소족에게 노예로 팔려가던 과거사를 반면교사삼아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뒷날 19세기 초반에 미국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에 의해 미국-세미놀 전쟁이 발발하면서 치카소족의 대부분이 오클라호마로 추방되었다. 2018년 기준 치카소족의 인구는 38000여명으로 추산된다.
다섯 부족들 중 체로키족을 제외한 나머지 부족들처럼 미시시피 강에서 이주해 온 이들로, 본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정착하였으나, 하필 인근의 치카소족이 먼저 유럽식으로 부족 전체를 개혁하는데 성공하고 촉토족을 공격하면서 부족 전체가 치카소족의 노예가 되었다. 치카소족의 노예 사냥꾼들은 수시로 촉토족을 공격하고 부족민을 납치해서 영국인이나, 스페인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러나 17세기에 프랑스가 이들의 발원지이던 미시시피 강 유역으로 식민지를 확장하자, 촉토족은 프랑스인들과 접촉하여 선진 농업기술과 총기 제작 기술을 습득하였고, 그들과의 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았다.
그러던 중에 미국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에 의해 미국-세미놀 전쟁이 발발하면서 노스캐롤라이나 주와 플로리다 주의 원주민 부족들이 오클라호마로 추방될 위기에 놓이자, 촉토족은 세미놀족을 도와서 미군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다. 결국 이 전쟁에서 패해서 강제이주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나[9] , 다섯 부족에 속하는 다른 부족들과는 달리, 그들의 본토인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대부분의 부족민이 남았다. 2018년 기준 촉토족의 인구는 160,000여명에 달한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과 같이 유럽 문물을 대거 받아들여서 대대적인 개혁을 이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은 생각보다 꽤 있다. 가령, 멕시코에 있던 도시국가인 틀락스칼라는 자국을 반(半) 노예화했던 아즈텍 제국[10] 을 멸망시킨 스페인에게 협력했고[11] , 그 결과로 이들은 스페인을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자치권을 보장받고 우수한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지금의 멕시코 소노라 주 방면으로 식민지를 확보하는 등의 리즈시절을 누렸으나, 뒷날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멕시코군에 깨지고 결국 자치권을 잃고 틀락스칼라 주로 편입되었다. 멕시코가 아즈텍 수준으로 막장은 아니었기에 틀락스칼라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 살고 있긴 하지만, 현재의 멕시코는 아즈텍 제국을 자기들의 긍지쯤으로 여기고 있어 틀락스칼라는 침략자인 스페인과 손을 잡은 배신자쯤으로 여기며 차별을 하고 있다. 물론 틀락스칼라 입장에서는 실로 어이가 없는 것이 아즈텍이야말로 자기들을 노예, 가축처럼 대한 침략자, 압제자이며 스페인은 오히려 자신들의 구원자였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다섯 부족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대대적인 개혁을 이루어낸 부족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이로쿼이 연맹이다[12] . 하지만, 문명화된 다섯 부족과 큰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노예를 단 한 명도 보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모피 무역과 포경업을 토대로 하여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의 뉴잉글랜드의 특성 상, 노예를 부리는 것이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13] . 그래서 이들은 어쩌다 탈주한 흑인 노예들을 캐나다나 미국 북부의 다른 주로 도망치게 해주는 경우는 좀 있어도, 그들을 노예로 부리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또 이들은 일찍이 유럽산 무기들을 대거 사들여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직접 양산해내기까지 하면서 군사력을 더욱 키웠으므로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도 이들을 감히 건드릴 수 조차 없었다. 결국 19세기에 이르러서 이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서 대부분 캐나다령 지역과 오대호 주변 지역으로 내쫓아버리긴 했으나, 이로쿼이 연맹에 가입된 부족들의 대부분이 원래의 고향인 뉴잉글랜드 일대에 그대로 남았다.
오늘날의 벨리즈에 해당하는 지역에도 다섯 부족과 비슷하게 유럽식 개혁을 해서 명맥을 이어간 부족이 있었다. 미스키토족이 그 주인공으로, 당시 벨리즈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국은 1820년대에 이미 노예 제도를 폐지했으므로, 미스키토족은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지않고, 엄연한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미스키토족은 아메리카로 이주했다가 기근을 피해 흩어져버린 백인 이주자들을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등의 유연한 모습까지 보였고, 이를 통해 한때는 중앙아메리카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이미 주변 지역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스페인의 지속적인 견제와 공격을 받아서 끝내 몰락하고 말았고, 그저 그런 군소 부족이 되고 말았다.
칠레의 마푸체족과 아르헨티나의 테우엘체족 역시 대포와 말, 화약, 철기 등 유럽의 신식 문물을 받아들여[14] 아르헨티나와 칠레 지역을 식민화하던 스페인군에 맞서싸웠고,[15] 결국 이들의 격렬한 저항에 스페인도 마푸체와 테우엘체족이 살던 남부 칠레와 아르헨티나 영토에 대한 무력 정벌을 포기하면서 스페인으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아 스페인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사실상 반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정부가 추진한 남부 파타고니아 개척 정책에 의해 칠레군과 아르헨티나군의 공격을 받아 모두 토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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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에서 백인 문화를 수용한 아메리카 원주민 다섯 부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체로키족, 세미놀족, 촉토족, 치카소족, 머스코기족[1] 이 여기에 속한다.
오늘날에는 '''문명화된 다섯 부족(Five Civilized Tribes)'''이라는 용어는 백인 우월주의적인 시각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공식 석상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학술적인 목적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때문에 오늘날에 이들 부족을 가리킬 때는 주로 '''다섯 부족(The Five Tribes)'''이라는 말을 쓴다.
흔히 다섯 부족이라고 묶어서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이 단일 부족 연맹을 구성했던 것은 아니고, 서로의 관계가 우호적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2] . 그냥 이들이 우연하게도 사우스캐롤라이나부터 미시시피까지 미국 남동부 일대에 모여살았던 까닭에 한때 싸잡아서 다섯 부족이라고 지칭했을 뿐이다.
2. 역사
2.1. 초기 역사
체로키족과 세미놀, 촉토, 치카소, 머스코기의 5개 부족은 16세기를 전후하여 백인들과 처음 접촉한 후에는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로, 이들 부족들은 타 부족들이 비해서도 선진적인 제도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에 이 부족들은 농장제도와 노예제도를 포함한 백인 정착민들의 제도를 그대로 채택하고 백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이유로 백인 사회에 의해 문명화된 부족이라고 여겨졌다. 가령, 아메리카 원주민 민족들 중의 일부는 공화제와 유사하게 자신들의 대추장을 부족장들끼리의 투표로 선출한 바 있었고[3] , 부족 산하의 마을들 마다 마을 장로를 중심으로 자치를 하기도 했는데, 이들 다섯 부족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서 아예 현대 민주주의 체제를 적극 받아들였다. 우선 부족장들끼리의 부족 회의를 부족민들의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로 전환했고, 자기들 부족어로 된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으며, 삼권분립을 명문화하고 행정부 산하의 장관에 해당하는 전쟁추장, 평화추장 등의 직위도 두었다[4] . 그리고 백인들이 가진 선진 과학기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하거나, 공장을 세우기도 하는 등, 경제를 빠르게 발전시켜 나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노예 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본래 흑인들은 백인들의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탈출하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게 합류하는 일이 잦았고, 다섯 부족으로 탈출한 사람도 많아서 처음에는 이들이 부족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부족의 규모가 커지면서, 오히려 백인들로부터 노예를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많은 수의 다섯 부족민들이 노예를 보유한 노예주가 되었다.[5] 이는 뒷날 다섯 부족의 대부분이 남북전쟁에서 남부연맹의 편을 드는 계기가 되었다.
2.2. 백인들의 탄압
그러나,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 역시 자신들의 터전인 미시시피 강 동쪽의 미국 남동부에서 쫓겨나 오클라호마 등지로 강제 이주 당하였다. 1830년에 다섯 부족들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인디언 이주법에 따른 일련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그들의 고향인 미시시피 강 동쪽에서 쫓겨나 현재 오클라호마 동부에 있던 인디언 준주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강제 이주는 체로키 족의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이었다.
다섯 부족들도 조만간 세력이 커진 백인들의 정부가 자신들의 영토를 위협할 것이라는 것은 진작에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백인들과 동등한 관계를 인정받고 자신들이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백인들의 문물을 받아들이고는, 이를 바탕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착실하게 키워나갔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유럽화를 이뤄낸 체로키족과 악착같이 백인들에게 저항한 촉토족을 제외하면 완전히 몰락하여 미국 사회의 하층민이 되었으며, 그나마 백인들과 비교해도 꽤 잘 사는 편인 체로키족 역시 부족이 2~3개의 분파로 갈라지고, 부족민의 대부분이 오클라호마로 추방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체로키족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부족들은 본래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이주한 이들이다[6] . 그래서 자신들의 원래 고향과 가까운 오클라호마에서 얼추 적응하는데 성공했지만, 체로키족은 멀리 뉴잉글랜드와 오대호 일대에서 거주하다가 남하한 이들이어서 그들에게 오클라호마는 생판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래서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죽어라고 개고생하면서 경제 기반을 다시 닦아야 했다.
이들은 얼마 못 가서 원래의 경제력을 상당 부분 회복하였지만, 이는 흑인 노예들을 가혹하게 쥐어짜면서 이뤄낸 성과라서 뒷날 다섯 부족의 대부분이 노예제 폐지에 반발하여 남부연맹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2.3. 오클라호마 정착 이후의 근대사
다섯 부족이 오클라호마에 정착한 뒤에, 오클라호마에는 샤이엔족 등을 포함한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원래 살던 곳에서 추방되어 이주해왔다. 이에 따라서 1834년에 미국 정부는 이들 부족들에게 할당된 보호구역들을 모아서 인디언 준주를 출범시켰다. 이 인디언 준주는 1907년까지 존속하다가 이웃한 오클라호마 준주와 합병하여 오늘날의 오클라호마 주가 되었다. 하지만 오클라호마로 강제이주당한 다섯 부족은 여전히 노예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흑인들의 다섯 부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1842년에 흑인 노예들이 체로키인 농장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뒤이어 백인 노예사냥꾼들에 의해 촉토인 농장주에게 팔려가던 흑인들도 반란에 합류했고, 이들은 오클라호마를 탈출하여 멕시코로 달아나려 했으나, 뒤쫓아온 체로키-촉토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체로키 노예 반란이라 하여 1859년에 백인 개신교 목사이던 존 브라운이 일으킨 반노예제 봉기 이전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노예 반란 사건이다. 그러다가 1861년에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섯 부족은 지지할 세력을 두고 분열하였다. 촉토 족과 치카소 족은 주로 남군에 붙어 싸웠고, 머스코기 족, 세미놀 족, 체로키 족은 북군과 남군을 지지하는 계파로 분열되었다. 특히 체로키 족은 남군에 붙은 세력과 북군에 붙은 세력 사이에서 동족 간의 싸움까지 벌였다.
2.4. 현대
1907년에 오클라호마 준주와 인디언 준주가 오클라호마 주로 합병되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은 오늘날에도 그 존재가 남아 있다. 미국 원주민들, 특히 이들 부족 외 다른 부족 사람들은 문명화된 다섯 부족이라는 말을 인종차별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문명화된이라는 말은 미국 원주민이 야만적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하므로, 미국 원주민 부족들이 함께 토론을 할 때에는 '문명화된'이라는 표현은 피하고 대부족이라는 단어를 쓴다.
과거 자신들의 노예였던 흑인들과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있다. 가뜩이나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한 미국에서 체로키 족과 세미놀 족은 자기 부족의 일원으로 살던 흑인들의 부족 시민권[7] 을 박탈하는 간 큰 짓을 벌여 연방 정부의 어그로를 끌고 있다. 특히 세미놀 족은 대놓고 부족민 투표를 통해 흑인들의 부족민 자격을 박탈했는데, 이에 발끈한 연방 정부가 세미놀 족들에게 허가해준 카지노 사업권을 회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투표 결과를 취소한 사례가 있다.
3. 부족
3.1. 체로키 족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 중에서는 문화적으로 가장 이질적인 부족으로, 나머지 부족들이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번성한 미시시피 문명을 세운 이들의 후손이며 언어학적으로는 머스코기어족에 속하지만, 체로키족은 예외로 이로쿼이어족에 속하며, 오늘날의 뉴잉글랜드 일대에서 남하한 민족이다. 이들은 독자적인 체로키 문자를 만들어서 신문과 서적을 간행하고 흑인 노예를 이용해서 운영되는 대농장을 만들기도 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백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부족 사회를 민주주의 체제로 개혁했으며, 그런 관계로 이들 중에서는 가장 부유한 부족이 되었다. 이미 17세기경부터 영국과 접촉하여 영국식 문화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8] 그래서 영국군에 입대하여 장교가 된 사람도 여럿 있었고, 이것이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혁명 때 체로키 족이 친영 성향을 띠는 계기가 되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일으킨 눈물의 여정 사건으로 인해 체로키 족은 두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버렸다. 오클라호마로 강제이주당한 이들과 원래의 고향인 테네시 주에 남은 이들로 나뉘었다. 그리고 오클라호마의 체로키 족들도 다시 분열되어 분파가 갈라졌다. 이들 각각은 현재도 미 연방 정부로부터 따로따로 공인받아서 보호구역을 할당받았다.
현재 다섯 부족들 중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은 부족이며, 2018년 기준 부족원 전체 인구는 316,049명, 2010년 기준으로 체로키 혈통을 가진 사람은 819,105명으로 집계된다. 체로키 족 핏줄을 가진 유명인만 해도 배우 웬트워스 밀러,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셰어, 척 노리스, 케빈 코스트너 등, 위키러들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이들이 많다.
3.2. 머스코기 족
머스코기족은 달리 크리크족이라고도 불리며, 아래의 세미놀족과는 사촌뻘되는 민족이다. 이들은 미시시피 강 일대에서 발흥한 미시시피 문화를 창시한 이들의 후손으로, 머스코기족을 포함한 미시시피 원주민들은 16세기 중엽에 스페인에서 온 콩키스타도르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처음 그 존재가 알려졌다.
콩키스타도르의 정복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 대한 유화책을 들고 나온 스페인 왕실에게 칭신하기로 선언하였고, 그 뒤로도 미시시피 강 일대에서 계속 거주하다가, 18세기경에 스페인이 프랑스에 밀려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을 하나둘씩 잃으면서 그들을 따라 오늘날의 플로리다 주로 이주했다. 머스코기족은 스페인의 속국으로 존속하던 중에 유럽의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으나, 과거에 있었던 콩키스타도르의 침략과 함께 유럽에서 건너 온 전염병이 퍼진 탓에 많은 수의 인구를 잃었고, 때문에 플로리다 주로 이주할 당시에는 이미 세가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친척 부족인 세미놀족이 미국의 침공을 받아 패망하고 오클라호마로 추방당하는 와중에 미국 정부에 감히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오클라호마에 할당된 보호구역으로 들어갔다.
머스코기족 역시 이런 강제이주로 인해 부족이 둘로 갈라지는 비극을 겪었으나, 다섯 부족에 속한 다른 부족과는 달리 본토인 테네시 주에도 많은 수의 부족민들이 남을 수 있었다. 2010년 기준 머스코기족 전체의 인구는 88,332명으로 추산된다.
3.3. 세미놀 족
16세기경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세미놀족과 처음으로 조우한 뒤에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세미놀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에 세미놀족은 북아메리카의 다른 원주민 부족들인 푸에블로족 등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수준의 농업 기술과 깔끔하게 정돈된 마을을 이루고 살았지만, 황금으로 가득한 땅인 시볼라에 대한 전설에 혹한 스페인인들의 침략과 이 시기에 유행한 천연두, 홍역 등의 유행으로 인해 많은 수의 세미놀인들이 사망하면서 인구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이들 콩키스타도르들은 분노한 푸에블로인들의 보복으로 침략에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결국 스페인 왕실은 푸에블로와 세미놀 두 부족에 대하여 종주권을 인정받고 그들의 영토를 스페인의 식민지로 삼는 조건으로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유화책으로 선회했고, 뒤이어 스페인 본국에서 원주민들의 법률 자문을 담당할 변호사들이 파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세미놀 족과 백인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세미놀 족은 스페인으로부터 갖가지 선진 문물을 도입하였다. 우선 그들의 전통 의상이 당대 유럽인들의 의상을 크게 본딴 형태로 바뀌었고, 스페인제 철제 판갑옷을 도입하고 이를 자체 생산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지금의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조지아 주,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이르는 굉장히 드넓은 영역에 거주했고, 이곳에서 원래 보유한 농업 기술에 유럽의 플랜테이션 농법을 결합하여 대규모의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똑같이 문명화된 다섯 부족으로 분류되던 체로키족과는 달리, 이들은 미국과 적대하려 하지 않아서 미국과는 굉장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부족이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노예 제도의 확산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었고, 미국 남부의 노예주들의 가혹한 착취와 인권 탄압을 견디지 못한 흑인 노예들이 탈출하여 세미놀족에 합류하자, 미국과의 관계가 굉장히 냉랭해졌다. 결국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앤드류 잭슨이 세미놀 족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세미놀 전쟁이 발발했고, 거기서 패해서 상당수가 오늘날의 오클라호마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세미놀족 역시 이웃한 체로키족과 똑같이 부족이 둘로 갈라지고 많은 수의 부족민들이 이주 도중에 희생되는 비극을 겪었다. 세미놀족은 다섯 부족에 속한 다른 부족과는 달리 노예 제도를 채택한 적이 없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을 계기로 흑인에 대한 배척 여론이 급증하였고, 이 때문에 1861년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는 남부연맹에 합류할 지의 여부로 부족 내에서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플로리다에 남아있던 극소수의 세미놀족들과 오클라호마에서 플로리다 고향으로 돌아온 세미놀족들이 연방정부와 협상해 보호구역을 재건해 오늘날 세미놀족은 오클라호마주와 플로리다주에 가장 많다.
한편 남북전쟁 시기의 영향으로 인해 부족 내에 인종차별 여론이 더욱 기승을 부려서 급기야 2000년에는 부족민 전원이 참여하는 투표를 통해 흑인들의 부족민 자격을 박탈하는 사태까지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인종차별 문제에 넌더리가 난 연방 정부가 이 사태에 분노하여 세미놀족의 카지노 운영권을 회수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자, 결국 세미놀족들이 투표 결과를 취소하였다. 이런 역사 때문에 현재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스포츠팀의 마스코트는 이들이다. 2018년 기준 세미놀족 전체의 인구는 18,600명 정도에 이른다.
3.4. 치카소 족
본래 치카소족은 미시시피 강 유역에 거주하던 이들로 스페인인 콩키스타도르들의 침략을 막아낸 뒤로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로 이주했다. 이후에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일대에 영국이 버지니아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영국인들로부터 선진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다. 문제는 치카소족이 이웃한 촉토족을 공격하여 많은 수의 사람을 납치해서 영국에 노예로 팔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두 부족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고, 뒷날 촉토족이 치카소족에게 노예로 팔려가던 과거사를 반면교사삼아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뒷날 19세기 초반에 미국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에 의해 미국-세미놀 전쟁이 발발하면서 치카소족의 대부분이 오클라호마로 추방되었다. 2018년 기준 치카소족의 인구는 38000여명으로 추산된다.
3.5. 촉토 족
다섯 부족들 중 체로키족을 제외한 나머지 부족들처럼 미시시피 강에서 이주해 온 이들로, 본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정착하였으나, 하필 인근의 치카소족이 먼저 유럽식으로 부족 전체를 개혁하는데 성공하고 촉토족을 공격하면서 부족 전체가 치카소족의 노예가 되었다. 치카소족의 노예 사냥꾼들은 수시로 촉토족을 공격하고 부족민을 납치해서 영국인이나, 스페인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러나 17세기에 프랑스가 이들의 발원지이던 미시시피 강 유역으로 식민지를 확장하자, 촉토족은 프랑스인들과 접촉하여 선진 농업기술과 총기 제작 기술을 습득하였고, 그들과의 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았다.
그러던 중에 미국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에 의해 미국-세미놀 전쟁이 발발하면서 노스캐롤라이나 주와 플로리다 주의 원주민 부족들이 오클라호마로 추방될 위기에 놓이자, 촉토족은 세미놀족을 도와서 미군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다. 결국 이 전쟁에서 패해서 강제이주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나[9] , 다섯 부족에 속하는 다른 부족들과는 달리, 그들의 본토인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대부분의 부족민이 남았다. 2018년 기준 촉토족의 인구는 160,000여명에 달한다.
4. 유사 사례
문명화된 다섯 부족과 같이 유럽 문물을 대거 받아들여서 대대적인 개혁을 이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은 생각보다 꽤 있다. 가령, 멕시코에 있던 도시국가인 틀락스칼라는 자국을 반(半) 노예화했던 아즈텍 제국[10] 을 멸망시킨 스페인에게 협력했고[11] , 그 결과로 이들은 스페인을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자치권을 보장받고 우수한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지금의 멕시코 소노라 주 방면으로 식민지를 확보하는 등의 리즈시절을 누렸으나, 뒷날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멕시코군에 깨지고 결국 자치권을 잃고 틀락스칼라 주로 편입되었다. 멕시코가 아즈텍 수준으로 막장은 아니었기에 틀락스칼라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 살고 있긴 하지만, 현재의 멕시코는 아즈텍 제국을 자기들의 긍지쯤으로 여기고 있어 틀락스칼라는 침략자인 스페인과 손을 잡은 배신자쯤으로 여기며 차별을 하고 있다. 물론 틀락스칼라 입장에서는 실로 어이가 없는 것이 아즈텍이야말로 자기들을 노예, 가축처럼 대한 침략자, 압제자이며 스페인은 오히려 자신들의 구원자였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다섯 부족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대대적인 개혁을 이루어낸 부족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이로쿼이 연맹이다[12] . 하지만, 문명화된 다섯 부족과 큰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노예를 단 한 명도 보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모피 무역과 포경업을 토대로 하여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의 뉴잉글랜드의 특성 상, 노예를 부리는 것이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13] . 그래서 이들은 어쩌다 탈주한 흑인 노예들을 캐나다나 미국 북부의 다른 주로 도망치게 해주는 경우는 좀 있어도, 그들을 노예로 부리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또 이들은 일찍이 유럽산 무기들을 대거 사들여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직접 양산해내기까지 하면서 군사력을 더욱 키웠으므로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도 이들을 감히 건드릴 수 조차 없었다. 결국 19세기에 이르러서 이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서 대부분 캐나다령 지역과 오대호 주변 지역으로 내쫓아버리긴 했으나, 이로쿼이 연맹에 가입된 부족들의 대부분이 원래의 고향인 뉴잉글랜드 일대에 그대로 남았다.
오늘날의 벨리즈에 해당하는 지역에도 다섯 부족과 비슷하게 유럽식 개혁을 해서 명맥을 이어간 부족이 있었다. 미스키토족이 그 주인공으로, 당시 벨리즈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국은 1820년대에 이미 노예 제도를 폐지했으므로, 미스키토족은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지않고, 엄연한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미스키토족은 아메리카로 이주했다가 기근을 피해 흩어져버린 백인 이주자들을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등의 유연한 모습까지 보였고, 이를 통해 한때는 중앙아메리카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이미 주변 지역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스페인의 지속적인 견제와 공격을 받아서 끝내 몰락하고 말았고, 그저 그런 군소 부족이 되고 말았다.
칠레의 마푸체족과 아르헨티나의 테우엘체족 역시 대포와 말, 화약, 철기 등 유럽의 신식 문물을 받아들여[14] 아르헨티나와 칠레 지역을 식민화하던 스페인군에 맞서싸웠고,[15] 결국 이들의 격렬한 저항에 스페인도 마푸체와 테우엘체족이 살던 남부 칠레와 아르헨티나 영토에 대한 무력 정벌을 포기하면서 스페인으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아 스페인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사실상 반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정부가 추진한 남부 파타고니아 개척 정책에 의해 칠레군과 아르헨티나군의 공격을 받아 모두 토벌되었다.
[1] 마스코기족 또는 크리크족이라고도 한다.[2] 가령, 다섯 부족들 중의 하나인 촉토족은 역시 다섯 부족의 하나에 속하는 이웃한 치카소족에게 수시로 침략을 당하고 부족민들이 노예로 팔려갔던 까닭에, 뒷날 두 부족 모두 백인들의 침략과 박해로 인해 오클라호마로 내쫓겨날 때까지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3] 그래서 기존의 추장 선출 방식과 미국 정부의 연방제가 유사하다고 여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대통령을 대추장이라고 불렀다. 두아미시-수쿠아미시 족의 추장인 시애틀이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워싱턴 D.C.의 대추장에게'라고 쓰여있었다.[4] 전쟁추장과 평화추장은 각각 현대의 미국 국방부 장관과 국무부 장관이라고 보면 된다.[5] 심지어 이미 다섯 부족에 합류하여 그 일원이 된 흑인들도 철면피쓰고 노예를 사들였다. 몰라서 그렇지, 남북전쟁 이전만 해도 흑인이 노예주인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6] 11세기 경에 오늘날의 미국의 애리조나 주 일대에 세워진 아나사지 문명이 멸망한 후에 그 유민들이 미시시피 강 일대에서 자신들의 문명을 재건하였는데, 머스코기족, 촉토족, 치카소족, 세미놀족은 이렇게해서 세워진 미시시피 문명의 후손들이다.[7]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자기들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한 이들에게 발급하는 시민권이다.[8] 체로키 문자를 만든 세쿼야가 영국인과 체로키족의 혼혈인이었다.[9] 강제이주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오클라호마로 이주했으나, 일부는 텍사스나 원래의 고향인 미시시피 주로 이주한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계속 서진해서 미국 본토의 서쪽 끝인 캘리포니아까지 이주한 이들도 있었다.[10] 그냥 노예화한 정도가 아니라, 아즈텍인 특유의 식인 문화에 이용될 인육을 공급하는 인간 목장으로 이용되기까지 했다.[11] 공교롭게도 유럽에도 이런 비극을 겪은 나라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중 하나인 메세니아는 옆 나라인 스파르타에게 패망하여 장장 400년 간을 속국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테베가 중심이 되어 스파르타를 상대로 벌인 전쟁인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패하자, 즉각 메세니아는 독립을 선포하고 테베가 중심이 된 코린토스 동맹에 합류해서 원수의 나라인 스파르타를 경제적으로 말려죽였다.[12] 우연히도 이로쿼이 연맹은 다섯 부족에 속한 부족들 중의 하나인 체로키족의 먼 친척뻘되는 부족이다. 언어학적으로도 이들은 모두 이로쿼이어족에 속한다.[13] 이 점이 미국 북부에서 노예 제도가 실시되지 않은 원인이기도 했다. 흑인들을 숙식을 제공해줘야 하는 노예로 데리고 있느니, 월급만 주면 값싸게 동원할 수 있는 노동자로 써먹는 게 더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산업 혁명으로 인해 북부 지역에서 대대적인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증가했다.[14] 아예 이들 원주민이 말을 타고 과나코나 퓨마 같은 야생동물을 수렵하는 기록화도 있을 정도.[15] 특히 마푸체족은 전투를 지휘하던 스페인군 사령관을 직접 사살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