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애쉬비

 


'''브루스 애쉬비
Bruce Ashbey · ブルース・アッシュビー'''
'''OVA'''
'''인물 정보'''
'''신체 정보'''
남성, 186cm, ?형
'''생몰년'''
SE 710. ?. ?. ~ SE 745. 12. 11. 19:09 (35세)
'''가족 관계'''
아델레이드 애쉬비(첫 번째 배우자), 루신다 애쉬비(두 번째 배우자)
'''국적 및 소속'''
자유행성동맹 자유행성동맹군
'''최종 계급'''
자유행성동맹군 대장(사후 원수 추서)
'''최종 직책'''
자유행성동맹군 우주함대 사령장관
'''기함'''
하드럭
'''미디어 믹스 정보'''
'''성우'''
[image] '''외전''' 카자마 모리오
[image] '''자유행성동맹군 우주함대 사령장관'''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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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애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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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사망 후의 전개 및 본편에 미친 영향
4. 모살설
5. 작중 명대사
6. 기함


1. 개요


소설 은하영웅전설 외전 5권 <나선미궁>의 등장인물이며, 자유행성동맹군의 전사,戰史,에 이름이 빛나는 전설적인 함대 사령관으로 제국군의 공포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양 웬리의 대선배'''라고 할 수 있다.
OVA 성우는 카자마 모리오. 주로 드라마, 영화, 연극 무대에 서는 명배우라고 한다.
을지해적판에서는 브루스 아슈비 또는 부르스 아슈비, 서울문화사판은 브루스 애슈비란 번역을 했지만 실제 발음은 브루스 애쉬비가 맞고 이타카판에서 애쉬비로 번역했다.
성격은 군재는 최고였고 자신감이 충만하였지만 성격이 매우 직설적이고 오만불손하여 같은 730년 마피아 멤버들과 부하들도 천재적인 실력과 공훈은 인정하지만 인격상 존경하는 인물은 영 아니더라고 평가하였다.

2. 상세


작중에서 활약했던 시기는 은하영웅전설의 메인 스토리로부터 약 60년 전. 우주력 730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했을 때[1] 스무 살이었던 그는 신장 186센티미터에 미남이었다고 한다.[2]
32세에 중장, 35세에 대장, 자유행성동맹 우주함대 사령장관에까지 진급한 발군의 전술가이며 은하제국에 있어서는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관학교 시절의 우수한 동기들을 직속부하 혹은 참모로 거느려 승리를 거듭하며, 그의 부대는 '''730년 마피아'''[3]라고까지 불리기도 했다. 당시의 제국군에게 수차례에 걸친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것은 당근지사.
전장에서 사용한 기함의 이름은 하드럭. 원작에선 형태에 대해 특별한 묘사는 없으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이름에 어울리게 기타를 닮은 형태로 나온다.
제2차 티아마트 회전 때 제국의 주력 함대를 거의 괴멸시키기까지 하였으나 추격 도중 매복해 있던 고립된 적함이 날린 유탄[4]에 함체 중앙부가 피격당해 중상을 입고 죽었다. 죽은 뒤에는 원수로 추서되어 35세(살아있었다면)로 자유행성동맹 최연소 원수가 되었으며,[5] 그가 전사한 12월 11일은 학교까지 쉬는 자유행성동맹의 공식 기념일이 되었다. 게다가 일시적 기념일도 아닌 모양이라서 외전 3권 <율리안의 이제르론 일기>에서는 율리안 민츠가 자신의 일기에 '12월 11일에 하이네센에 있었다면 학교도 쉬는 날이었을 것'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6] 전기가 100권도 넘게 출판되고, 입체 TV며 입체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승리의 여신이 그를 따르는 것 같았다'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전투의 승기를 잡는 데 있어서는 달인이었던 모양. '승리보다는 어쩌면 시간의 여신이었는지도'라는 사족이 붙는 것도 보면 타이밍의 귀재이기도 했다.
게다가 전략적 안목도 상당한지, 애쉬비는 초보적인 '''요새''' 건설 계획도 수립하여 설계도를 국방위원회에 제출한 적이 있다. 다만 이 요새는 이제르론 요새 같은게 아니라 함대가 주둔하여 보급받는 대형 보급기지적 성격이 강했고 그나마도 예산문제로 최고평의회에서 요새 건설안과 함대전력 강화안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하자 기왕 비용을 들일 거라면 요새보다는 함대에 써야 한다는 애쉬비의 용병사상 때문에 결국 요새 건설안은 폐기되었다.
외전 5권 <나선미궁>에 등장하는 제국군 포로 크리스토프 폰 쾨펜힐러 대령이 30년에 걸쳐 그의 뒷조사를 해본 결과, 은하제국 내부의 고위관료이자 반체제 조직의 주요인물이었던 마르틴 오토 폰 지크마이스터 대장이 비밀 루트를 통해 애쉬비 측에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제공하여, 애쉬비는 그 정보를 토대로 매우 유리한 전투를 벌인 것이란 정황이 포착되었다. 하지만 이는 쾨펜힐러가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추리해낸 결과일 뿐 확고한 증거로 입증된 사항은 아니다.
쾨펜힐러를 만날 당시 소령이었던 양 웬리는 한정된 정보를 바탕으로 연전연승을 이루어낸 애쉬비를 정보전의 천재라 평했고 평가절하하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홍차를 좋아하고 자칭 청년탐정님, 타칭 헌병장교님이라고 불린 어떤 동맹군 소령은 애쉬비 원수의 화려한 엽색질을 보고는 덤덤하게 '''"거참, 부지런한 분이셨군."'''이라고 감탄하고, 자기라고 여자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이나 읽겠다고 할 정도로 전공 못지않게 사생활도 화려했다.[7]
하지만 실제 결혼 생활은 의외로 수수해서 애쉬비는 스물세 살과 스물아홉 살에 두 번 결혼했으며, 스물여섯 살과 서른 살에 두 번 이혼했다. 첫 번째 부인 아델레이드 애쉬비는 이혼 후 노년에는 요양을 하면서 남편의 편지를 자기 자신에게 배송하는 일만 하고 지내며[8], 두 번째 부인 루신다 애쉬비는 향년 쉰아홉 살에 수면제 복용량을 착각하는 바람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첫 번째 아내였던 아델레이드의 경우, 그녀와 이혼할 때 애쉬비가 아내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쩔쩔맸다고 한다. 당시 이혼 중재를 맡은 '730년 마피아' 멤버였던 알프레드 로자스 장군은 도대체 친구라고 해도 감싸주지 못할 정도로 애쉬비의 잘못'''만''' 많아서 곤욕을 단단히 치렀다고 한다. 애쉬비는 바람기 정도가 아니라 지극히 진심으로 외도를 했는데, 결혼을 함으로써 아델레이드에게 구속되는 것을 차츰 견딜 수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혼 당시, 첫 번째 아내 아델레이드가 이혼을 받아들이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내게 돌아올걸. 당신이 돌아올 곳은 나밖에 없으니까.

이 말을 들은 애쉬비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는데, 로자스의 회고로는 '''전장에서는 단 한 번도 겁을 먹은 적이 없었던 애쉬비가 오한으로 떠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두 번째 아내였던 루신다의 경우, 이혼 후에도 그녀가 애쉬비라는 성을 썼으며 그 때문에 브루스 애쉬비와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감과 패기를 겸비했지만 모난 언행은 상관과 충돌하고 반복되는 마찰의 원인이 되었다. 소령 시절, 어떤 상관이 그에게 "애초에 귀관은 지나치게 오만한 것 아닌가? 이제까지 거둔 승리가 모조리 실력이고 운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나? 자신에게는 불가능이 없다고 생각하나!"라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이를 냉담하게 바라보던 애쉬비는 상관이 말을 다한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물론 제게도 불가능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보다 더한 실패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당연히 상관은 폭발했고 주변의 참모들도 너무하지 않냐고 같이 흥분했으며 로자스와 '730년 마피아' 동료들이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지만 애쉬비는 일절 사과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3. 사망 후의 전개 및 본편에 미친 영향


브루스 애쉬비는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군무성이 눈물을 흘릴 40분'''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제국군 고급장교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일단 '''역전의 노장들을 포함한 총 60명의 장성급 지휘관들을 이 40분 동안 잃었고, 이들을 보좌하던 참모집단 역시 최소 세 자리, 심하면 네 자리까지 쓸려나갔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장 작중에 등장한 함장들은 구축함조차도 최소 소령 이상, 그나마 은영전에서 등장한 소령 함장은 라인하르트 폰 뮈젤 한 명뿐이다. 즉 함정 손실 1척당 영관급 장교가 1명 이상, 많으면 5~10명까지도 죽어나간다. 당장 브루스 애쉬비와 같은 기수인 730년 6월에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임관한 생도 중 62.5%가 2년 내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만 봐도 장교단의 극심한 소모를 보여준다.
'''즉, 일선의 영관급 장교단은 애초에 매년 수만 명 단위로 소모되고 있었다.'''
게다가 작중 묘사로 볼 때 동맹군이고 제국군이고 참모는 별도 병과로 관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편인데, 참모는 구 프로이센 육군이나 구 일본군의 경우 우수한 장교를 대량으로 뽑아 3년짜리 교육을 별도로 시켜서 전체 교육이수 인원의 약 10% 정도를 쓸 만한 참모로 길러내는 식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참모단 100명이 죽었다면 이것은 '''우수하다고 평가된 함장 1000명 이상'''을 상실한 것과 맞먹는 타격이다. 평범한 함장까지 계산하면...이것만으로도 작중 설정된 '''우주함대 하나 수준의 쓸 만한 인재가 전멸했다'''는 뜻이다. 만약 1000명 수준이라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제국군이 이 손실을 만회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는 하는데 라인하르트 폰 뮈젤이 등장할 때를 즈음해서 보여주는 제국군 고급장교단, 특히 은하제국군 수뇌부의 심각한 질적 저하로 볼 때 저 10년은 양적으로'''만''' 만회했다는 거지 질적으로는 '''그때까지도''' 회복 중이었다고 봐야 한다.
일례로 그레고르 폰 뮈켄베르거도 아버지 빌헬름 폰 뮈켄베르거가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제국군인이 되었으며, 이런 경우에는 처우가 일반 제국군인보다 더 좋으므로 자신이 가진 실력보다 고속승진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제국군 우주함대 사령장관까지 오를 정도면 그 밑의 장성들의 실력이 '''아주 낮았다는 것'''을 보여준다.[9]
현실에서도 전투의 손실로 인해 주요 참모단의 손실이 심했다면 차기 참모진을 길러낼 교관단도 대폭 손실됐다는 뜻이고, 아울러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무자격자 또는 현격히 능력이 떨어지는 자들을 대량 채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참모는 능력이 되지 않더라도 일단 숫자는 채워야 하는데 지휘관 혼자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군은 원래 참모장교 소요가 비교적 적은 구조를 구축한 상태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참모대학 이수자를 모조리 긁어모으고도 모자라서 무자격자를 대량 채용하고, 덤으로 교육과정 자체를 간소화시켜서 억지로 참모단을 길러내야 했다. 따라서 이들로 인한 전반적인 질적 저하 역시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본편의 시작을 알리는 아스타테 회전에서 제국군 선봉대로 본래 참모나 군사학 교수에 어울리지 실전지휘관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슈타덴이 발탁될 정도로 제국군의 수뇌부는 기형적인 형태였다.[10]
그러므로 은영전 본편에 와서도 과거보다 현격하게 약체화된 제국군은 라인하르트가 그동안 괄시받았던 평민과 하급 귀족들 위주로 아예 새로 구성한 청년장교단[11]을 제외하고는 그때까지도 제2차 티아마트 회전의 인적 손실의 영향, 나아가 브루스 애쉬비의 악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인 것이다. 이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일으킨 립슈타트 전역 당시 문벌귀족파 사병단과 반 로엔그람파 정규군 연합의 심각한 지휘계통 문제로 증명된다. 당장 해군 장교단만 해도 몇 세대에 걸쳐서 길러지는데, 그들을 통제 운용할 참모단이라면 대체 얼마나 더 많은 교육기간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함대결전 한두 번 망한 것 정도로 해군 장교단 자체가 철저히 무너지진 않지만, 강제적인 지휘전문 인력 감소는 그게 설사 전사나 사망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군처럼 강제 퇴역되어 언젠가는 복귀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군 조직 자체에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기는 것이다. 당장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독일군 지휘부가 딱 그 꼴이었다. 육해군 공통으로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나마 육군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실무 경험을 쌓아 어떻게든 복구가 되었으나 해군은 말 그대로 안습 수준. 특히 함선 건조 관련 전문기술진 교육구조는 완전히 박살났다. 하물며 저런 식으로 전투에서 참모진을 대량으로 잃었다면 망했어요...
더군다나 제국의 특성상 문벌귀족들은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가문빨로 영관급에 장군 승진이 일단 보장되어 있었고, 반대로 하급귀족이나 평민들은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문벌귀족이란 장벽에 가로막혀 출세에 한계가 있다 보니 질적인 회복은 더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원수 자리에 올라 원수부를 개설하고 불러들인 뒤 활용한 인재 풀만 봐도 모두 능력이 있음에도 여러 이유로 중앙군에 제대로 붙어있지 못했던 인물들이다.
아쉽게도 애쉬비 자신이 전사했고 그의 사후 730년 마피아는 해체되었으며 동맹과 제국의 극명한 국력 차이도 있고 해서 암릿처 회전 때와 달리 국가의 흥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싸움만 잘하는 싸움꾼이란 평이 있으며, 실제 싸움질(전술적 능력)만 떼어놓고 따지면 양 웬리도 라인하르트도 발라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였다. '''그러나 그가 맡았던 총사령관(사령장관)이란 직책은 전투에서 이기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애쉬비는 전술적 승리에 치우친 나머지, 그만큼 전략적인 면모는 다른 지휘관들에 비해 떨어졌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전술적 능력이 너무 커서 전략적인 곳까지 영향을 줄 정도였다. 양 웬리의 "전술적 수준의 우연은 전략적 수준의 필연이 남긴 잔광에 불과하다"는 말의 정면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제2차 티아마트 회전의 성과만 살펴보더라도 얼핏 보면 단순한 전술적 승리에 불과하지만, '''제국의 대(對) 동맹 전략 자체가 수정되어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물론 라인하르트나 양 웬리와는 달리 애쉬비는 이런 상황을 조성할 의지도 없었고, 만에 하나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더라도 이런 제반 상황을 활용할 사고방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긴 하지만...
그러나 제국군은 다곤 성역 회전 이래로 근 100년간 줄곧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공세를 취하는 입장이었고, 동맹은 짧은 보급선을 활용하여 제국군을 막아내고 역습을 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제2차 티아마트 회전 이후 21년이 지난 제국력 457년에 제국군은 결국 이제르론 회랑무지막지한 요새를 건설했다. 요새라는 것 자체가 거점 방어를 위해 건축되는 걸 생각하면 그걸 제국-동맹 국경지대에 지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제국군은 동맹군의 제국령 침입 시 함대전만의 방어 능력 상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쉬비는 제국-공격, 동맹-방어라는 제국-동맹 전쟁의 근본적인 양상은 결국 뒤집지 못했다. 그의 후배라 할 수 있는 양 웬리단 한번의 승리로 전황을 뒤집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점.
그러고 동맹은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대승리를 거뒀음에도 51년 뒤 한 마술사마술과도 같은 승리를 가져다 주기 전까지 전쟁의 주도권을 못 잡았다. 이제르론 요새의 존재도 존재지만 제국군이 이 전투에서 입은 막대한 인적자원의 손실로 질이 하락했다면 동맹군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질이 하락했기 떄문.'''
그리고 애쉬비의 활약 덕이 명줄을 연장한 한 제국민이 있었는데, 바로 크리스토프 폰 미켈젠 제독. 동맹군에게 군사기밀을 빼돌렸다는 사실이 들켜 제국군 수뇌부가 코젤 대장을 통수본부 차장에 임명하여 미켈젠 제독을 숙청하고 스파이망을 발본색원하려고 했는데, 제2차 티아마트 회전의 패배로 제국군 장성들이 떼죽음을 당한 데다 코젤 대장도 전사하여, 얼마 안 남은 제국 장성을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야 숙청했겠지만, 미켈젠의 뛰어난 은폐능력으로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했고 미켈젠도 위협을 느끼고 스파이 활동을 일시중단했기 때문에 결국 숙청하지 못했다. 그러나.......

4. 모살설


그의 죽음으로부터 43년 뒤인 우주력 788년, 그가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전사한 게 아니라 실은 모살,謀殺,당했다고 주장하는 투서가 매주 화요일마다 36주 동안 자유행성동맹군 통합작전본부로 날아들었다. 통합작전본부는 이 모살설에 대해 모살 가능성이 없다고 입증하기 위해 민간인 탈출작전의 성공으로 막 소령으로 진급한 양 웬리를 비공식 조사위원에 선임했고, 양 웬리는 이 모살설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730년 마피아의 마지막 생존자, 알프레드 로자스를 만난다. 이게 외전 5권 <나선미궁>의 줄거리.
통합작전본부에 온 투서는 의문점이 있었는데, 투서를 한 사람이 브루스 애쉬비의 두 번째 부인 '루신다 애쉬비'로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9년 전 59세의 나이로 수면제 복용량을 착각하는 바람에 죽었는데, 이 사실을 카젤느로부터 들은 양은 투서를 보낸 사람이 그녀가 죽은 걸 모르고 썼거나 또는 죽은 걸 알면서도 그녀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조사 도중 알프레드 로자스가 수면제 양을 착각해버리는 바람에 죽었다. 그의 사후 양 웬리는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 참가했던 중견 사관이나 하급병사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출장신청서를 냈으나 사흘 뒤 상부는 양을 한직인 에코니아 포로수용소의 참사관으로 발령냈다. 양은 애쉬비 조사 따문이라고 추측했지만 카젤느가 어떻게든 빨리 돌아오도록 할 테니 지금은 귀가해서 짐 싸라고 하자 돌아가서 짐을 쌌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은 에코니아 포로수용소에서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상당수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크리스토프 폰 쾨펜힐러라는 제국군 포로도 있었는데, 그를 통해서 과거 제국군 미켈젠 제독의 암살과, 제국군 지크마이스터 제독의 망명, 브루스 애쉬비의 화려한 활약 뒤에 있는 또 다른 가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양은 제국의 첩보조직이 동맹의 권력자들에게 브루스 애쉬비에 대한 의구심을 심어 모살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으나 일단 이 가설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쾨펜힐러가 모은 자료로 추측한 거라 결정적인 증거도 없었고, 제국군이 동맹에 상호불신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일부러 모살설을 제기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브루스 애쉬비가 모살되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무래도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이 군사기밀이라는 명목으로 은닉한 역사적 사실 속에 있을 것이었으므로, 양은 지크마이스터 망명-미켈젠 암살-브루스 애쉬비 전사라는 세 사건을 잇는 진상이 밝혀지려면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이 멸망한 이후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때문에 브루스 애쉬비 모살설의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쾨펜힐러가 남긴 자료들은 B급 중요자료로서 25년간 봉인되었으며, 양은 제8함대 사령부 작전과로 발령나갔다.
결국 브루스 애쉬비가 모살되었다는 것과 투서를 보낸 범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5. 작중 명대사


'''너희를 물리친 인물은 브루스 애쉬비다. 다음에 너희를 물리칠 인물도 브루스 애쉬비다. 잊지 않도록.'''[12]

브루스 애쉬비는 제국군에 승리할 때마다 패배한 제국군에게 위와 같은 타전을 보내 자신의 용전을 자랑했다. 당연히 애쉬비를 만날때마다 개박살나고 위와 같은 패기넘치는 전문을 본 제국군의 분노는 우주를 뚫어버릴듯 타오르게 되었다. 하다하다 당시 군무상서 켈트링 원수는 제국군 장성들을 집합시켜놓고 "생사는 불문한다! 애쉬비라는 반란군 장수를 황제 폐하 어전에 끌고 오라. 이 명령을 완수하는 자에게는 신민으로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부귀가 주어질 것이다!"란 연설을 하며 애쉬비에 대한 분노를 불사올렸으나 공교롭게도 켈트링 원수는 제2차 티아마트 회전을 앞두고 병사했다. 공식적으로는 격무에 의한 과로사지만 실제로는 장남 헤르만과 차남 칼 하인츠를 모두 애쉬비한테 잃은데서 온 '''화병으로 인한 분사로 추정된다.''' 빌헬름 폰 뮈켄베르거도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군무상서님의 원한을 풀어드리자!"라며 전투에 열렬히 참여했다가 어린 아들 하나 남겨두고 애쉬비에게 전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2차 티아마트 회전 당시 약 40분만에 제국군 고위장성 60여명을 전사시켰다는 점을 보면 애쉬비에게 강제 멸문당한 제국 군인 가문이 한 두개가 아닐듯 싶다(...).
켈트링 원수의 사망 당시 원수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조카 빌헬름 폰 뮈켄베르거 중장이 켈트링 원수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는데, 켈트링 원수는 사망 직전 조카 뮈켄베르거의 손을 덥석 잡고는 '''"애쉬비를 쓰러뜨려라!"'''란 유언을 남겼다.[13]
하지만 양 웬리는 이런 기록을 보면서 페잔을 통해 왔다는 이 정보들이 정말 사실일까? 동맹 측이 애쉬비 찬양을 위하여 조작하거나 과장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6. 기함


'''하드럭
Hard Luck · ハードラック'''
'''OVA'''
'''함선 정보'''
'''함명'''
하드럭
'''식별 번호'''
0001(OVA)
'''함종'''
전함
'''선적'''
자유행성동맹 자유행성동맹군
'''선주'''
브루스 애쉬비
'''크기'''
불명
'''무장'''
함수 광선포 24문
'''승무원'''
불명
'''건조'''
SE ???. ?. ?
'''침몰'''
불명
'''함장'''
불명
하드럭은 브루스 애쉬비의 기함이자 자유행성동맹군 총기함이다. 여타 장성들의 기함들 처럼 화력증강을 위해 전면 주포를 늘리는게 아니라 동력부, 기관부를 확장시킨 구조로, 그 모습이 흡사 기타처럼 생긴 기묘한 모습이 특징. 또한 함선명도 신화에서 따오지 않고 하필이면 '''불운'''이라는 뜻의 하드럭, 기묘할 따름이다. 참고로 하드럭의 식별번호는 100여년 전 동맹군의 전설적인 명장 링 파오의 기함 산타이사벨과 식별번호가 같다. 대부분의 동맹군 제독들의 기함은 아킬레우스급 전함이지만 하드럭은 아킬레우스급 전함이 등장하기 40여년 전의 전함이었으므로 아킬레우스급 전함이 아니다.
우주력 745년 발발한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 하드럭은 동맹군 총기함으로서 참전했고, 제국군의 전열이 붕괴하고 퇴각하자 구축함 3척과 순항함 6척의 호위를 받으며 전장을 전진하고 있었다. 미처 퇴각하지 못하도 전장에 고립된 제국군 전함이 포격하자 호위하던 순항함이 기함에서 조금 떨어져 주포로 격퇴했다. 그때 유탄이 하드럭에 날아와 선체 중앙부 우측 하단을 강타했다. 이때 폭발로 하드럭의 3개 층이 뚫렸으며 함교의 바닥이 갈라졌고, 이 구멍을 통해 함교요원 앳킨스 대위와 스퍼리어 소위가 우주공간으로 빨려나갔으며, 브루스 애쉬비는 폭발로 발생한 파편에 몸이 베여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함선명 처럼 승승장구 끝에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하드럭의 행방은 불명이다. 영문 은영전 위키에서는 이때 입은 손상이 너무 커서 수리하지 못하고 폐기했다고 서술했다.

[1] 사관학교가 개교한 이래 최고의 인재로 평가받았으며 사관학교 시절 거의 만년 수석 자리를 차지했지만 딱 한번 3년차에 차석이 되자 일생의 치욕으로 여겼다고 한다.[2] 양 웬리와는 비교도 불가능할 정도로 무인의 풍채를 지녔다. ''''일개 소위대령보다 높아 보였다''''는 엄청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외견부터가 타인 위에 설 수 있는 품격을 지녔다.[3] 브루스 본인을 비롯한 부대 중추부는 전원이 우주력 730년 6월에 사관학교를 졸업한 동기들이다. 마피아라는 단어는 이런 인적 커넥션을 의미하기도 하며 꼭 범죄집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들에게 당하는 제국 입장에서 이 '730년 마피아'는 '''인류 역사상 최강, 최악의 범죄집단'''이었을 것이다.[4] 서울문화사판, 이타카판에서는 기함을 호위하던 순항함이 그 포화에 대응하면서 기함에서 멀어진 사이, 유탄이 날아와 함체 우측 중앙 하단에 명중해서 내부에서 작렬했다고 나온다. 을지서적판에서는 순항함이 떨어져나갔다는 묘사가 커트되어 있어서 유탄이 '''호위함을 제끼고 들어온 마법의 파편'''이 되어버렸다.[5] 브루스 애쉬비와 맞먹는 평판을 얻은 링 파오와 유수프 토패롤조차 40세에 이르러서야 원수가 되었다.[6] 이 기념일은 러일전쟁의 전투 중 하나였던 쓰시마 해전 발발일인 5월 27일이 구 일본 제국에서 해군기념일로 제정되어 1945년까지 공휴일이었다는 사실의 패러디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코멘트는 따로 없다.[7] 카젤느의 말로는 애쉬비의 여자들은 자칭, 타칭 1개 중대 규모였다고. 심지어 그 점에 있어서는 같은 자유행성동맹의 전쟁영웅 링 파오하고 비교하기도 했다.[8] 단, 아델레이드 본인은 자기가 남편의 편지를 써서 자신에게 배송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고 한다.[9]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인 요소까지 가미되어 있었다. 당장에 메르카츠만 해도 뮈켄베르거보다는 높았지만 지위는 낮았다.[10] 다만 제1, 2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과 이 경우를 비교하는 것은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두 세계 대전 사이의 간격은 21년이라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초급간부단이 그대로 현역 고급장교단일 가능성이 높지만, 제2차 티아마트 회전아스타테 회전 사이의 간격은 무려 51년이다. 설정상 영관급도 65세가 정년이니 장군 진급자 외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고, 제2차 티아마트 회전 당시 19세였던 알렉산드르 뷰코크 중사가 70세까지 군문에 남아 중장까지 승진해 있었던 것이 유일한 예외. 수백만 명 중 1명이라면 영향력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슷한 예로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장교단이 수도 없이 갈려나갔지만 그것이 21세기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는 않는다.[11] 파렌하이트나 몇몇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새로 뽑은 인선이다.[12] 외전에서 양 웬리가 브루스 애쉬비 모살설을 밝히기 위해 조사하던 도중 브루스 애쉬비가 제국군에게 시비를 거는 영상을 찾아냈을때 나왔다. 이걸 본 양 웬리는 제국군에서 느꼈을 불쾌감이 이해가 된다고 반응했다.[13] 뮈켄베르거 중장도 켈트링 원수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면서 전의를 불태웠으나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전사하면서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당시 뮈켄베르거 중장의 7살 난 아들이 훗날 군대에 입대하니, 그가 바로 그레고르 폰 뮈켄베르거 원수다.